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

  만취한 연금술사가 실수로 빚은 공예품. K의 작업실 외관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랬다. 오래된 통나무로 대충 세운 울퉁불퉁한 벽면에는 나무껍질을 따라 이끼가 휘감고 있었고, 그 틈새에 족발과 자장면 그리고 치킨과 불륜을 저지른 피자들이 그려진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 형형색색의 전단지들이 마치 죽음을 앞둔 물소의 옆구리를 쪼아대는 독수리들처럼 보였다. 설빈은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더욱 불쾌해졌다. 예술대학 내에 저런 건물이 지어져 있다니, 참으로 낯 뜨거운 아이러니야. K의 작업실에서 열 걸음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설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거절했어야 했나.”
  K의 부탁은 잽 없이 날아오는 어퍼컷처럼 느닷없었다. 두 사람은 W대학 연극영화과의 동기였지만 술자리에서 몇 마디 나눈 것이 다일 뿐 딱히 이렇다 할 친분도 없었거니와 연락을 주고받는 일도 전무했다. 연기전공인 설빈과 달리 K가 극작전공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둘은 노는 물 자체가 달랐다. 그 수려한 외모로 인해 무수한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설빈의 인기는 W대학 전체를 통틀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지만 K는 그 정반대였다. 언제나 무리에 섞이지 않고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작가지망생일 뿐이었다. 그런 K가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는지 설빈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오늘 내 작업실로 와줘. 부탁해. 네가 꼭 봐야할 것이 있어. K가.’
  불청객처럼 핸드폰이 울렸을 때, 설빈은 콧노래를 부르며 왁스로 뒷머리를 정리하고 있던 중이었다. 오늘은 무용과에서 가장 콧대 높기로 유명한 ‘채민경’과의 세 번째 데이트가 있는 날. 삼세판을 좋아하는 한민족의 후예답게 설빈은 세 번째 데이트에서 파트너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것을 자신만의 철칙으로 여겼다. 대망의 삼세판 날, 채민경의 브래지어 후크를 어떻게 하면 단시간에 풀 수 있을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도 모자랄 판에 이름도 떠올리기 어려웠던 K와의 만남이라니.
  설빈의 입장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놈이 자신을 불러내는 것이 결코 탐탁지 않았지만, ‘잘 알지 못한다’는 바로 그 점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K의 말마따나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둘이 마주칠 일은 없을 터였다. 더군다나 자신이 ‘꼭 봐야할 것’ 이라니.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기에는 무언가 꺼림칙하면서도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 호기심이 일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까탈스러운 채민경의 성격상 그를 기다려줄리 만무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면 무용과 최고미녀의 브래지어는 석양을 향해 날아가는 백조처럼 멀어질 것이다. K의 작업실 문을 노크할 때까지 설빈은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어서 와. 많이 놀랐지?”
  설빈의 예상과는 달리 K는 마치 오랜 단짝친구처럼 그를 맞아주었다. K가 열어준 문 안으로 엉거주춤 들어가자 설빈은 자신이 서울의 캠퍼스에 있는 것인지 헝가리 집시의 부락 안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벽면은 마오리족 사냥꾼들이 휘둘렀을 것만 같은 부메랑들과 출처를 알 수 없는 부적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작업실 중앙에는 북극곰의 엉덩이 가죽으로 재단한 듯한 소파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설빈의 시선을 끈 건 구석에 자리 잡은 책상에 올려놓은 모니터였다. 흉흉한 눈빛을 발하는 늑대 박제가 모니터위에 얹어 있었다. 마치 아사 직전의 늑대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모니터를 삼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모니터 아랜 엄청나게 두꺼운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작업실 전체가 신 내림을 받은 것만 같은 풍경에 설빈은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왜 날 보자고 한 거지?”
  짐짓 목에 힘을 주고 딱딱하게 꺼낸 말이었지만 K는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일단 앉아.”
  머뭇거리며 설빈이 소파에 앉자 K는 책장에서 무언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무엇을 찾고 있던지간에 설빈은 그것이 자신을 부른 용건과 관계된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K가 두 번째 칸을 이리저리 파헤치고 있는 동안 설빈은 푹신한 소파에 멀뚱히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때 K의 오른쪽에서 설빈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책상 한켠에 자리 잡은 유리관 속에 무언가 움직이는 형체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자세히 바라본 순간 설빈은 혀를 깨물 뻔 했다.
  그것은 생쥐만한 푸른 색 거미였다.
  “K. 그, 그거 위험한 거 아니야?”
  “이 녀석? 타란튤라라고 해. 그렇게 겁낼 필요 없어. 아직 자라고 있는 중인걸.”    
  K는 여전히 책과 책 사이를 뒤지며 말을 이었다.
  “종 이름은 코발트블루라고 해. 타란튤라 중에서도 맹독을 지닌 편이고 성격도 사납기로 유명하지. 하지만 흔히 알려진 만큼 치명적이진 않아. 물려도 며칠간 부어오를 뿐 사람의 목숨에 지장을 주지는 않아. 물론 그 부위의 세포는 걸레가 되겠지만. 예뻐서 사긴 했는데 성격이 꽤 까칠해서 애먹고 있어. 타란튤라는 아름다운 종일수록 더욱 치명적이거든.”
  듣고 보니 처음에는 보기에 섬뜩했지만 자세히 보니 여덟 개의 매끈한 검붉은 빛 다리가 매혹적인 색을 발하고 있었다. 아름다울수록 치명적이라. 설빈은 K의 마지막 말에 공감했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예쁜 여자일수록 자빠뜨리기 어렵고, 순순한 따르는 여자일수록 건드리는 맛이 없기 때문이다. 그 한 예로 설빈은 몇 달 전 만났던 극작과의 ‘양혜정’을 떠올렸다. 하도 콧대가 높다고 하길래 건드려봤더니 고작 두 번째 데이트 만에 다리를 벌려주었던 것이다. 차려주는 밥상이라 몇 술 뜨긴 했는데 영 아니었다. 수컷의 정복감이 충족되지 않았다고나 할까. 설빈은 허술한 밥상을 걷어차듯이 그녀를 차 버렸다.
  “아, 찾았다.”
  설빈이 양혜정에 대한 기억을 갈무리하고 있는 동안 K는 갈색 서류봉투 하나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환한 얼굴로 설빈의 맞은편에 앉으며 봉투를 내밀었다. “자, 이거야.” 설빈은 생각보다 얇은 봉투를 건네받으며 K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K는 남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심각할 정도의 박색이었다. 억센 곱슬머리에 툭 튀어나온 이마, 그리고 낙타가 뜯어먹은 듯한 눈썹에 얼굴 이곳저곳의 곰보자국까지 더해 그야말로 흉한 몰골이었다. 설빈은 애써 시선을 돌리며 서류봉투 안에서 종이뭉치를 꺼내었다. 정갈하게 프린팅 된 깨알같은 글씨들이 설빈의 눈을 가득 채웠다.
  “‘속삭임의 역사에 관하여’…… 이게 뭔데?”
  설빈의 질문에 K는 슬며시 미소지었다.
  “요즘 한창 집필 중인 소설이야. 네가 한 번 읽어봐 주었으면 해서.”
  설빈은 카펫 위에 종이뭉치를 내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 바쁜 사람 불러다 놓고 한다는 말이 소설 한 번 읽어달라고?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하고 생각하고 있구나?”
  K가 정확히 자신의 마음을 짚어내자 설빈은 움찔했다. 하지만 K는 웃음을 잃지 않고 설빈의 손에 들린 종이뭉치, 정확히는 K의 소설을 가리키며 말했다.
  “단순한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아직 완성한 것이 아니라서 결코 긴 분량이 아냐. 그냥 어느 날 문득 영감이 떠올라 휘갈긴 글이라고나 할까? 설빈. 영감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해?”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설빈은 마른 입술을 훔쳐야만 했다. 영감이라니? 양로원에서 기체조를 하는 할아버지를 향해 기둥 뒤에 숨은 할머니가 추파를 던질 때 쓰는 말은 아닐 테고. 분명 머릿속에 불현듯 스쳐지나가는 그런 것을 말할텐데…….
  “그런 건 극작과인 K 네 쪽이 더 잘 알지 않을까?”
  “생각해봐.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떠올리는 발명가들은 대체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를 선물받은 걸까? 나는 말이야…….”
  K는 손가락을 들어 왼쪽 머리를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뮤즈의 속삭임이라고 생각해. 뛰어난 예술품이나 세상을 빛낸 발명품들은 단순히 얻어지는 게 아니야. 마치 신에게 선물 받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뛰어난 ‘영감’이 반드시 필요하지.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영감’을 받아서 쓴 글이야. 뮤즈의 속삭임을 들었다고나 할까?”
  “잠깐만. 그래, 알겠어. 이 소설이 너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하지만 왜 하필 내가 읽어야만 하는 건데? 극작과의 다른 친구들에게 읽어달라고 하면 되잖아? 난 연기전공이야. 소설에는 젬병이나 다름없다고.”
  설빈은 노골적으로 귀찮은 기색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그 말의 숨은 요지는 이렇다. 내가 왜 채민경의 뽀얀 허벅지를 놔두고 음침한 작업실에서 거미나 키우는 네 놈의 소설을 읽어야 하는 건데? K는 그것까지 눈치 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 마. 많은 시간을 뺏지는 않을 거라 약속할게. 내가 그랬지? 네가 반드시 봐야 할 것이 있다고. 나 역시 한가한 사람은 아니야. 허섭한 장난을 칠 생각은 추호도 없고. 다 읽고 났을 때 내가 왜 굳이 널 불렀는지 깨닫게 될 거야.”
  그렇게 말하는 K의 눈빛은 타로카드를 펼쳐놓고 미래를 점치는 점성술사의 그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역시 오래 쳐다보기에는 부담스러운 면상이었다. 설빈은 한숨을 내쉬며 K의 소설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소파에 등을 푹 기댄 채.    
  그것은 K의 얼굴만큼이나 기묘한 이야기였다.


  2


  속삭이는 돌(Whisper Stone)은 언제나 우연한 계기로 인류의 역사 속에 출현했다. 서기 2048년, 자메이카 출신 다이버 콰트로 보일삭스는 북극해의 버핀 섬에서 테니스공만한 푸른빛의 돌을 채굴하게 된다. 순박한 심성의 콰트로는 세 살짜리 딸에게 그것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고 북극해에서 발견된 돌은 대륙을 가로질러 자메이카 한 마을의 소녀의 손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며칠 후, 콰트로는 얼어서 길쭉해진 콧물로 동료 광부와 칼싸움을 하던 도중 딸에게서 짤막한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아버지. 돌이 말을 해요.’  
  딸의 말로는 푸른빛의 돌을 손에 꽉 쥐고 있으면 기묘한 중얼거림이 들려온다는 것이었다. 오직 돌에 접촉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불가해한 소리였다. 돌 역시 소유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같았지만 역시 기묘한 언어로 대답을 할 뿐이었다. 결국 주문을 외우는 돌은 마을의 명물이 되었고, 콰트로의 딸은 처음엔 돌이 무서웠으나 결국은 흡족한 기분에 젖게 되었다. 돌을 만져보기 위해, 혹은 속임수를 밝혀내겠다는 목적 하에 많은 사람들이 선물을 들고 집을 찾아온 것이다. 누군가는 악마의 주문이라고 말했고 다른 누군가는 외계 성운에서 지적 생명체가 보내는 전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을의 어느 누구도 돌이 속삭이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는 자는 없었다.
  보름 후, 방문객들이 선물한 과자들 때문에 4키로나 몸무게가 늘었다는 것을 깨닫고 홈쇼핑으로 공중부양식 지방분쇄기를 주문하려던 콰트로의 딸은 호리호리한 중년 남자가 집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소문을 듣고 수도 킹스턴에서 찾아온 언어학자였다. 콰트로의 딸은 방문객에 진저리가 나 있는 상태여서 그를 내쫒으려 손을 휘둘렀고, 언어학자는 말없이 모기눈알 초콜릿을 슬쩍 내밀었다. 콰트로의 딸은 순간 멈칫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공중부양식 지방분쇄기는 모기눈알에게 격퇴되었고 언어학자는 소문의 ‘속삭이는 돌’을 손에 쥐게 되었다.
  언어학자는 13일 동안 돌의 언어를 분석해대었고, 그동안 콰트로의 딸은 이만팔천구백 마리의 모기눈알을 위장 속으로 집어넣었다. 13일째 되던 날의 새벽. 이만팔천구백 마리의 모기들에게 쫒기며 피를 빨리는 꿈을 꾸던 콰트로의 딸은 새된 목소리로 내지르는 언어학자의 외침을 들었다.
  “해냈다!”
  전세계의 모든 언어를 대조한 끝에 결국 돌의 속삭임을 해독해 낸 것이다. 그것은 페니키아어와 아카드어의 유형과 매우 흡사했다. 그러나 언어학자는 그것이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님을 겸허히 인정해 이탈리아에 사는 친구인 유럽어학 교수를 부르기로 했고, 콰트로의 딸 역시 겸허히 텅 빈 초콜릿 상자를 가리키며 이번엔 두 배로 가져다 줄 것을 요구했다. 한 가지 조건을 덧붙여서.
  “되도록이면 피를 빠는 주둥이가 없는 곤충으로.”
  붉은 수염을 지닌 유럽어학 교수는 이튿날 한달음에 자메이카로 날아왔고, 교수답게 속삭이는 돌이 꺼내는 말이 페니키아어의 원형이 되는 ‘셈어’와 부분부분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유럽어학 교수는 언어학자와 콰트로의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속삭이는 돌과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두껍기 그지 없는 셈어 사전을 바닥에 펼쳐둔 채 붉은 수염을 쥐어뜯으며 힘겹게 돌에게 말을 건네었다.    
  “이름이 뭔가?”
  그러자 놀랍게도 그 말을 알아들은 돌에게서 대답이 전해져왔다.
  “나는 아야마룩.”
  돌은 자신을 아야마룩이라고 밝혔고, 다섯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다고 말했다. 붉은 수염의 유럽어학 교수와 언어학자는 이 돌이 ‘누군가와 교신할 수 있는 어떠한 통신수단’이라는 것에 서로 동의했다. 물론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치 인공위성 전화기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아야마룩이라는 사람과 텔레파시를 하고 있는 것이라 추측한 것이다. 붉은 수염의 교수는 또다시 셈어 사전을 한참 뒤적인 후에 물었다.
  “아야마룩.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가 사는 곳은 우가리트다.”
  생소한 도시의 이름이었다. 붉은 수염의 교수는 언어학자에게 눈짓을 보내었고, 언어학자는 콰트로의 딸에게 넓적사슴벌레눈알 초콜릿 한통을 더 쥐어주었고, 콰트로의 딸은 초콜릿을 씹으며 컴퓨터를 작동시켜 ‘우가리트’라는 지명을 찾아보았다. 모니터가 뱉어놓은 검색결과에 붉은 수염의 교수는 한 웅큼의 수염을 부욱 쥐어뜯었고, 언어학자는 찢어져라 입을 쩍 벌렸고, 콰트로의 딸은 초콜릿을 바닥에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우가리트’는 기원전 1400년전 지구상에서 사라진 고대도시의 이름이었다.
  그들은 3400년 전의 인물과 텔레파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3

  
  “어때?”
  K는 밀크티와 초콜릿을 접시에 담아 내려놓으며 설빈에게 물었다. 어쩐지 K의 소설에 나오는 모기눈알 초콜릿이 떠올라 설빈은 밀크티만 집어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대답했다.
  “아직 잘 모르겠는데. 소설이 좀 정신사납기도 하고, 어딘가 괴기해 보이기도 하네.”
  그러자 K의 생글생글 웃던 얼굴이 건전지가 바닥난 인형처럼 뚝 하고 굳어버렸다. 설빈은 조금 심하게 말했나 싶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 그런데 네가 아는 건 참 많다고 느꼈어. 우가리트는 진짜 있는 거야?”  
  K는 표정을 조금 풀고 대답했다.
  “응. 현재는 시리아가 위치한 곳에 있었던 도시의 이름이야. 북부셈어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성경의 레위기에 나와 있어. 유라시아 대륙의 백인들에게 있어 시조격이라 할 수 있는 코카서스 인종들이 거주했던 곳이지. 우가리트는 여러 원시 부족들 중…….”
  눈을 빛내며 속사포처럼 내뱉는 K의 말은 설빈의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설빈은 채민경과의 약속시간이 한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당장이라도 이 요상한 소설을 팽개치고 K의 작업실에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이미 한 번 읽기 시작한 것을 도중에 그만둔다는 것도 애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아직 K가 자신을 왜 불렀는지 본론을 듣지도 못했다.
  “그럼 뒷부분도 계속 읽어봐. 나는 저 녀석 밥을 줘야할 시간이라서.”
  어느새 할 말을 다 마친 듯 K는 자리에서 일어나 타란튤라의 유리관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밀웜 한 마리를 떨어뜨렸는데 꿈틀거리는 그 모습이 마치 갑옷을 입은 지렁이 같아 등골이 오싹했다. 이물질의 등장에 푸른빛깔 다리를 놀려 뒤로 물러난 타란튤라는, 잠시동안 톱밥더미 위에서 꿈틀대는 밀웜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적과 고요. 설빈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리 없는 공이 울린 것처럼 아무런 사전 동작 없이 타란튤라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앞다리로 밀웜을 붙잡은 타란튤라는 곧 윗턱을 놀려 밀웜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유리관의 뚜껑을 닫으며 K가 말했다.
  “이럴 때면 포식자와 피식자의 운명은 절대 바뀔 수 없는 것처럼 느껴져. 지렁이가 거미를 이긴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 그러나 어쩌면 둘의 차이는 아주 근소한 것인지도 몰라. 누군가가 밀웜에게 치명적인 무기를 전해준다면…….”
  K는 뒤돌아 설빈을 향해 미소지었다.
  “밀웜이 타란튤라를 씹어먹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야.”
  설빈은 거미와 설빈,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섬뜩한지 우열을 가늠해보려다가 그것이 곧 무의미한 것임을 깨달았다. 음침한 고요함을 가진 둘은 서로를 빼다박은 듯 닮아 있었다. 설빈은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어, 글씨가 깨알 같이 인쇄된 종이로 눈을 돌렸다.


  4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속임수였다. 과거와의 정신교감이라니.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세 남녀 중 물리학에 조예가 깊은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시간역행이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명제임이 밝혀진 것은 오래된 일이었다. 그러나 돌을 통해 이야기하는 남자 아야마룩은 가짜라면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다. 청동기 시대의 풍습에서부터 이미 멸종한 식물의 특성까지. 무엇보다 이미 소실되어버린 셈어를, 대학에서 강의를 펼치는 붉은 수염의 교수보다 더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것 자체가 부정하기 힘든 증거였다.
  “인정해야겠군. 뭐, 어때. 돌에서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백악기 공룡 트리케라톱스의 위장 속에 있는 기생충과 텔레파시를 나눈다고 해도 말이 안 될 건 없지.”
  언어학자는 마음을 고쳐먹고 아야마룩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아야마룩은 느닷없이 머릿속에서 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해 그동안 꽤나 공포에 떨었던 모양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오기 전까지, 아야마룩의 최대 고민은 이웃 부족과의 전쟁 문제에 있었다. 이웃 부족이 아야마룩의 부족 여자를 훔쳐가는 일이 벌어졌고, 아야마룩을 비롯한 마을 전사들은 여자를 되돌려 받기 위해 무력시위를 벌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우리 화살, 닿지 않는다. 그들 부족 담, 너무 높다.”
  아야마룩의 말을 듣고 있던 붉은 수염의 교수는 콰트로의 딸과 그녀의 스트레칭을 도와 주고 있던 언어학자에게 그 말을 전해 주었고 세 남녀는 고민에 휩싸였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새 정들어버린 과거의 청년 아야마룩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대포로 쏴 버리면 그만이잖아요?”
  격한 스트레칭을 한 뒤라 헉헉대며 콰트로의 딸이 말을 꺼냈다. 언어학자는 그녀의 불어난 체중이 자신 탓이라는 마안함에 잠자코 있었지만 붉은 수염의 교수는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눈빛을 드러냈다. 기껏해야 나무에 청동을 묶어 만든 창칼로 전쟁을 벌이고 있을 시대에 어떻게 대포를 구한단 말인가. 결국 세 남녀는 청동기시대의 화살이 어느 정도까지 발전했는지 조사해보았고 아야마룩에게 어떻게 하면 좀 더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30세기에 걸친 무기 발전 역사를 모두 꿰고 있는 컴퓨터는 답을 토해냈다.  
  “아야마룩. 그들 담, 높아서 화살 넘을 수 없다고?”
  붉은 수염의 교수가 이제는 조금 능숙해진 셈어로 물었고, 아야마룩은 그렇다고 답했다. 언어학자가 교수를 재촉했고 붉은 수염을 잡아당기며 교수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방법 알려준다. 새, 잡아서 깃털, 화살촉 반대편에 달아봐라. 그러면 화살, 더 멀리 날아간다.”
  그 뒤에 아야마룩이 붉은 수염의 교수에게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세 남녀 모두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아야마룩에게 방법을 전수해 준 순간 그들을 감싸고 있던 시간의 우주가 어항에 새 물을 붓듯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이 아야마룩에게 알려 준 ‘화살깃’의 아이디어는 셈족에게 있어 217년이 지나고 나서야 알려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별 생각 없이 순수한 호의에서 세 남녀는 아야마룩에게 화살깃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고 그때부터 시간의 톱니바퀴는 3400년 이전으로 돌아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야마룩은 화살깃을 붙인 화살로 이웃 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로 인해 이웃부족의 여자들은 하룻밤 사이 아야마룩의 부족 남자들과 동침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발악을 하다가 잠자리에서 발휘되는 아야마룩의 색다른 기술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래 역사에서라면 태어날 수 없었을 ‘소부타’라는 한 전사가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소부타는 용맹한 무력과 뛰어난 카리스마, 그리고 큼직한 거시기로 우가리트 일대를 통일 시켰고 강대해진 셈족은 수메르인들과의 전쟁 판도를 뒤바꾸어 놓는다. 그리하여 원래대로라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인이 되었을 수메르인들은 셈족의 지배를 받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고 소부타의 큼직한 거시기에서 쏟아져 나온 올챙이들은 유럽 일대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먼 훗날 그 올챙이들 중 하나였던 ‘하비레논’은 트로이 전쟁 당시 그리스의 오디세우스 장군의 전략으로 만들어진 트로이 목마 속에서 잠복 중이었다. 그러다 동료 병사가 뀐 방귀에 기도가 막혀 질식사하고야 말았고, 또 다른 올챙이였던 ‘장 꼴레므’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날, 빨래를 널던 중 광분한 시민들의 외침소리에 깜짝 놀라 옥상에서 떨어져 뇌진탕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질기게 살아남은 올챙이가 있었으니 바로 에스파냐 해군사령관으로 자라난 판데 에스키벨이라는 남자였다. 그는 아프리카 대륙의 자메이카로 넘어가 원주민이었던 아라와크족을 이구아나 잡듯 제압해버렸고,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그 날, 포도주에 잔뜩 취해 흥겨워하고 있었던 판데 에스키벨의 코트 자락에 포로로 잡혀 있던 한 아라와크족 소년이 용감하게도 가래침을 뱉었고 격노한 판데 에스키벨은 그 소년의 목을 단 칼에 잘라 버렸다. 그 소년은 643년 뒤 북극해에서 ‘속삭이는 돌’을 채굴할 운명인 콰트로 보일삭스의 머나먼 조상이었다.
  그리하여 콰트로 보일삭스는 새로 쓰여진 역사의 페이지에서 깨끗하게 지워져 버린 것이었고, 그에게서 돌을 선물 받은 콰트로의 딸도 태어나지 않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속삭이는 돌’을 둘러싼 세 남녀의 일들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광대한 우주의 그 누구도 그 일들을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존재하지 않았던 일로 시간의 톱니바퀴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하지만 ‘속삭이는 돌’은 묻히지 않았다.
  북극해에서 묵묵히 푸른빛을 내뿜던 돌은 콰트로 보일삭스 대신 다른 사람을 부르기 시작했고, 결국 처음 발견되었던 2048년이 되던 해 다른 이의 손에 캐내어져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속삭이는 돌은 그것을 주운 자에게 또다시 과거의 인물과 연결시켜 주었고, 아야마룩에게 일어났던 일이 한 번 더 일어났다. 아주 사소한 ‘그들만의 속삭임’이 시간의 운명을 또다시 뒤집기 시작한 것이다.
  돌은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손에 쥐어졌다.
      

  5


  설빈은 어느새 자신이 넘긴 소설의 페이지가 꽤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솔직히 인정했다. 물론 머릿속에서는 아직까지 채민경과의 약속시간에 대한 압박감이 자신을 괴롭혔지만, 예상치 못한 엉뚱한 전개로 치닫는 K의 소설이 자신을 묘한 매력으로 끌어당기고 있음을. K는 설빈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동안 맞은 편 소파에서 잠자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종이에서 눈을 뗀 설빈이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나쁘지 않네. 뒷부분을 계속 읽게 만드는걸. 딱히 꼬집어 뭐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그러자 K는 반색했다.
  “그래? 네 시간을 뺏은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지겠는걸.”
  “그런데 말야…… 여기 나오는 일이 가능하긴 한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화살에 깃털 다는 법 하나 알려준 게 세계의 역사를 뒤바꿀만한 일이라고 보긴 어려운걸.”
  K는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그것이 설빈의 질문이 천진한 말투여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소설에 드디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주기 시작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설빈. 나비효과라는 말 알아?”
  “나비효과? 나비의 날개짓 한번이 지구 반대편의 태풍이 될 수 있다는 그거?”
  “그래.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가 생각해낸 이론이지.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고 말 미세한 변화 하나가 종국에는 거대한 힘으로 불어나게 되는 거야. 위대한 발명이란 뭐라고 생각해, 설빈?”
  “글쎄. 컴퓨터나…… 자동차? 아니면 핵폭탄?”
  설빈의 말에 K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해. 진짜 위대한 발명은 그런 거창한 것보다 뭐랄까…… 그래, 지우개나 바구니 같은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만약 이 세상에 지우개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한번 쓴 글자를 지워서 고친다는 발상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그럼 모든 과학기술의 기초가 되는 이론 수정의 원리가 발달하지 못했을 거고. 네가 말한 핵폭탄의 아버지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만들어질 수 없었겠지. 그럼 바구니는 어떨까? 지우개의 위력보다 훨씬 대단하지. 물체를 모아서 담을 수 있는 바구니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군집이 개체보다 큰 위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거고, 문명에서 매우 중요한 분업 혹은 분산의 개념이 태어날 수 없었을 거야.”
  설빈은 넋을 놓고 K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듯 물었다.
  “그래, 알았어. 그런데 이런 소설의 아이디어들은 어디서 생각해내는 거야?”
  그러자 K는 아까 보여준 동작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즉 손가락으로 왼쪽 머리를 톡톡 두드린 것이다.
  “말했잖아. 뮤즈가 속삭여주는 거라고.”
        

  6
  
  
  속삭이는 돌은 쉬지 않고 운명의 수레바퀴를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적절한 시간에 맞지 않는 ‘때이른 발명의 아이디어’는 세상의 수많은 발명품들을 앞당겨 놓았다. 속삭이는 돌이 2048년의 사람들을 불러들여, 교환원이 통화를 연결시켜주듯 연결시켜준 과거의 사람들은 언제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뮤즈의 속삭임’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무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영감’이 떠오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에게만 그것은 들려오는 것이었다.
  기원전 511년. 이집트의 석수장이 실로스 라네는 주문받은 코뿔소 석상을 옮길 걱정에 빠져 있었다. 귀하신 집정관이 주문한 것이라 정성들여 만들긴 했지만 막상 그것을 집정관의 저택으로 옮길 인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집정관은 정해진 날짜에 자신의 앞마당으로 석상을 가져오라 명령했고, 장정 서른명이 달려들어야 낑낑대며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무거운 석상의 존재는 실로스 라네의 시름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백명 정도의 노예를 고용하면 옮길 수야 있겠지만 그래서야 집정관이 준 수고비를 훨씬 웃도는 돈이 들어갈 것이었다.
  “확 그냥 코뿔소 머리만 싹둑 잘라서 가져다줄까.”
  홧김에 실로스 라네는 이렇게 내뱉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자신의 머리도 코뿔소 머리와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이 뻔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적은 인력으로 힘들이지 않고 저 무거운 석상을 옮길 수 있단 말인가. 날짜가 다가올수록 실로스 라네는 초조해졌고, 초조한 마음에 잠자리에서도 서지 않는 물건은 실로스의 마누라를 날카롭게 만들었고 결국 이집트의 석수장이 부부는 파혼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둘은 평생 갈라서지 않고 오랫동안 잘 살 수 있었다.
  약속된 날짜 하루 전에 뮤즈의 속삭임이 들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머릿속에서 울려오는 뮤즈의 목소리는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식후 디저트를 고를 때의 고민거리만도 못하다는 듯 해결책을 알려주었다. 뮤즈는 단단한 통나무 다섯 개만 준비하라고 알려줘 실로스 라네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석상을 올려놓기만 하면 알아서 비탈길을 굴러갈 것이라고 확신하듯 뮤즈는 말했다.
  그렇게 하여 ‘바퀴’의 원리가 실로스 라네로부터 탄생되었고, 그 기술은 이집트 전체로 퍼져나갔다. 결국 멀고먼 지역까지 무거운 돌을 나를 수 있는 ‘바퀴’의 원리는 이집트의 건축술을 경이적인 속도로 발전시켰고, 기자 왕의 피라미드와 같은 불가사의한 유물을 역사의 한 페이지에 당당하게 남겼다. 실로스 라네의 머리에 영감을 속삭여준 어떤 존재를 알 리 없는 역사가들은 어찌하여 이집트인들이 그토록 정교한 건축술을 가질 수 있었는지 해답을 낼 수 없었고, 결국 지구를 지나치던 외계인들이 오지랖이 넓어 알려주고 갔다는 이야기만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속삭이는 돌은 뉴턴의 머릿속에 만유인력의 법칙을 속삭여 주었고, 베토벤에게 ‘운명 교향곡’의 멜로디를 속삭여주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고 1945년에 사라질 운명이었던 대한민국은 ‘한글’의 존재 덕분에 민족정신의 뿌리를 이어나가 결국 독립을 쟁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또한 세종대왕의 머리에 ‘훈민정음’의 글자모양을 알려준 뮤즈의 속삭임 덕분이었다.
  그렇게 속삭이는 돌은 영원한 생명을 구가할 듯이 보였다. 후라이팬으로 계란 후라이를 뒤집듯 2048년의 세계 판도를 휙휙 뒤집으면서. 때로는 소련이 미국을 넉다운시켜 전세계가 공산주의의 물결로 넘치기도 했고, 때로는 징기스칸이 죽지 않고 세계를 통일해 CNN 뉴스 아나운서들의 헤어스타일이 모두 변발 일색일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2048년. 속삭이는 돌은 이전에 만났던 모든 주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리하고 교활한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7


  “말도 안 돼. 한글이 세종대왕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니. 좀 그렇지 않아?”
  설빈은 소설을 읽던 도중 느닷없이 고개를 갸웃했다. K는 당황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이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는 거야, 설빈? 그런 거야?”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든 설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 하긴 그럴 리가 없지.”
  K는 수학 문제를 틀린 학생에게 어떤 공식이 잘못되었는지 알려주는 선생님처럼 말을 꺼냈다.
  “그럼 좋아. 이렇게 가정해보는 건 어때? 만약 네가 이 이야기에 나오는 속삭이는 돌을 주웠다고 쳐. 그리고 넌 몇 백 년 전의 인물과 텔레파시를 하게 되는 거야. 그렇다면 그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
  설빈은 골몰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글쎄. 비행기의 설계도를 알려주는 건 어때? 그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10분 만에 화성을 다녀올 정도로 발전된 우주선이 생겨있을지도 모르잖아?”
  설빈은 공상과학 경진대회에서 발표를 하는 소년처럼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K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뛰어넘는 희대의 천재라면 또 모르지. 하지만 더욱 먼 옛날의 소크라테스에게 비행기의 설계도를 알려준다고 그게 도움이 될까? 그는 비행기 날개의 소재인 알루미늄을 만드는 법을 이해할 수조차 없을 텐데.”
  “아, 그게 그렇게 되나. 쉬운 게 아니겠네. 차근차근 공부시켜야 하나.”
  “중요한 것을 잊고 있어, 설빈. 내가 아까 얘기한 나비효과를 떠올려봐. 설령 소크라테스를 잘 교육시켜 그리스 시대에 콩코드 여객기가 만들어졌다고 치자. 그렇게 되었을 때 너의 존재가 여전히 현재에 남아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있어? 세계가 뿌리째 뽑아 올라 휘둘러질 때 너의 존재를 현재까지 있게 만들어주는 수억 개의 요인들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온전할 수 있을까? 쉽게 말해 살아있을 수 있겠냐 이거야.”
  설빈은 누군가 지움 버튼을 누르듯 역사 속에서 사라진 콰트로 보일삭스를 떠올리곤 입을 쩍 벌렸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속삭이는 돌은 계속 사용하면서 나 자신의 존재를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는 법은 없는 거야?”
  그러자 K는 제자에게 전혀 새로운 공식을 알려주듯 말했다.
  “지금 네 손에 들려있는 남은 이야기에 답이 있어.”  


  8


  미국의 심리학자 케빈 아이스하트는 속삭이는 돌을 주운 뒤, 그것이 과거 인물의 머릿 속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 연구하는 것에 자신의 일생을 걸었다. 속삭이는 돌이 케빈에게 연결시켜준 이는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제국의 중년 여자 말루다 부인이었다. 말루다 부인은 매일 밤 귓구멍이 너무 간지러워 불면증에 시달리던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삭가지로 쑤시는 것보다 더 효율적으로 귓밥을 제거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던 그녀에게 케빈은 ‘가지 끝을 살짝 구부리시오’라고 알려주는 대신 아무 말 없이 말루다 부인의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그녀에게 아주 사소한 지식이라도 알려주는 날엔 자신의 존재가 부지불식간에 소멸될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케빈 아이스하트에게 있어 과거와 텔레파시를 시도할 수 있는 푸른빛의 돌은 너무나도 매혹적인 보물이었다. 그는 그것을 결코 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속삭이는 돌을 2달 동안 보관만 하고 있던 케빈은 어느 날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귀의 간지러움을 견디다 못한 말루다 부인이 콜로노스 해협에 몸을 던져버린 것이다. 케빈은 속삭이는 돌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고 탄식했다. 그런데 그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말루다 부인이 죽자 속삭이는 돌은 곧바로 다른 이를 찾아 그에게 연결시켜준 것이다. 그는 정확히 10년 뒤인 기원전 480년에 활동했던 카르타고의 히밀코라는 해적이었다. 케빈 아이스하트는 보물이 다시 살아 숨 쉬는 것에 기뻐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어떠한 깨달음에 직면한 그는 더욱 큰 환희에 젖게 되었다.
  말루다 부인이 죽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속삭이는 돌 또한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다. 그의 영리한 머리는 번뜩이며 돌아갔고 하나의 논리를 귀결시키기에 이르렀다.
  말루다 부인의 죽음은 세계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 것이다. 그제서야 케빈은 속삭이는 돌의 이전 주인들 중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비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속삭이는 돌이 연결해주는 자는 희대의 천재가 될 수도 있지만, 만약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경우에는 세계에 티끌만한 영향도 주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케빈은 속삭이는 돌이 다섯 번 연결을 바꾼 다음에 자신의 가설을 완벽히 확신했다.
  속삭이는 돌은 일부러 역사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자들에게만 속삭이는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케빈 아이스하트는 새로운 판단을 내렸다. 속삭임을 듣는 자가 죽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것이다. 케빈은 돌을 얻은 이후 처음으로 격렬한 속삭임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의 영감도, 발명의 씨앗도 아니었다. 오직 당사자를 빨리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일종의 고문이었다. 이제 그것은 뮤즈의 속삭임이 아니라 악마의 세뇌로 바뀌어져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사악한 음성. 속삭임을 듣는 자들은 점점 더 빠른 시일 내에 목숨을 잃어갔다. 미쳐서 발작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광인이 되어 사람들에게 처형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케빈은 모르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속삭임을 연결해준 푸른 돌에 보이지 않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러는 도중에 시간은 10년씩 규칙적으로 흐르고 흘러 점차 케빈이 존재하고 있는 2048년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100년 전인 1948년부터 케빈은 활동을 시작했다. 100년이라면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산들바람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케빈은 돌을 쥔 채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위대한 발명, 혹은 예술로 업적을 쌓을 수 있었을 천재들은 케빈 아이스하트의 세뇌 아래 억만금을 가로챈 사기꾼, 혹은 국가의 원수를 암살하는 테러리스트들로 변모해나가기 시작했다. 케빈은 자신의 청사진대로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기를 바랐고 그 바람은 착실하게 이루어져갔다. 심리학자인 케빈 아이스하트는 자신만의 최면암시법을 위험한 단계에까지 끌어올렸다. 케빈의 속삭임 아래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고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으며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케네디를 암살했다고 밝혀진 오스왈드는 체포 된지 겨우 이틀 만에 경찰서 지하에서 살해 되었다. 오스왈드를 살해한 잭 루비는 언론에 ‘캐네디 살해범을 용서할 수 없어 내 손으로 처단했다’고 밝혔다. 물론 악마가 그렇게 하라고 속삭였다고 사실대로 밝힐 수는 없었으리라.
  케빈 아이스하트의 계략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온갖 범죄자들을 속삭임으로 조종한 끝에 그는 현실 속에서 억만 장자가 되어 있었고 세계를 주름잡는 거물이 되어 있었다. 아무도 그를 거역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과거를 주무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라크를 초토화시킬 빌미가 필요했던 케빈은 세계무역센터를 테러리스트로 하여금 공격하도록 지시하고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속삭이는 돌을 붙잡고 주문을 외우듯 입을 놀려대었다. 그래서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속삭이는 돌의 귀퉁이가 쩍하고 갈라지더니 그의 방 카펫위에 툭하고 떨어진 것을. 분리되어 나온 속삭이는 돌의 잔해는 선량한 멕시코 청소부 살바도르 깔레하의 손에 들어갔다. 살바도르는 케빈이 자신의 딸인 라니메를 상습적으로 성추행하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으나 참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케빈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살바도르는 자신이 관리하는 쓰레기통의 일부가 되어있을 테니까.
  그런데 케빈의 방에서 주운 푸른 돌에서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하달하고 있었다. 그것도 멀쩡한 비행기를 납치해서 빌딩에 돌격시키라는 과격한 내용이었다. 기억력 좋은 멕시코 청소부는 두 목소리 중 하나를 알아보았다. 다름 아닌 자신의 고용주이자 원한의 대상 케빈 아이스하트였던 것이다.
  비밀스런 통화를 도청하는 첩보원이 된 기분이었다. 한 테러리스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케빈 아이스하트와 그런 케빈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살바도르. 그는 몇 주 동안 틈나는 대로 돌을 손바닥에 쥔 채 케빈의 속삭임을 엿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TV를 보며 나초를 씹던 살바도르 깔레하는 ‘세계10대 참사’라는 프로그램 도중 갑자기 흘러나온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 육중한 무게의 여객기가 빌딩으로 날아와 부닺히는 장면은 마치 데자뷰처럼 그의 뇌리에 꽃혔고, 살바도르는 나초에 사례가 들려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케빈의 속삭임은 단순한 흉계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살바도르는 자신의 고용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깨닫고 공포에 떨었다. 그의 영향력은 과거에까지 뻗쳐있었다. 단순한 심리학자였던 케빈에게 희한할 정도로 따라온 행운의 중첩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악독함에 치를 떨던 도중 살바도르는 어떠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자신의 손에는 속삭이는 돌의 조각이 있었다. 케빈 아이스하트가 할 수 있다면 왜 자신이라고 할 수 없겠는가. 바로 그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돌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랍어도, 중국어도 아니었다. 그 어떤 언어보다 친숙한 에스파냐어였다. 돌이 연결시켜 준 것은 영감을 목마르게 원하는 과학자도, 고뇌하는 예술가도 아니었다. 오랜 세월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돌이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돌은 살바도르에게 ‘속삭임의 역사’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다. 살바도르는 어째서 돌이 자신을 선택했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의 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케빈에게 복수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인 것이다.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온 인류를 통털어 그 뿐이었다.
  케빈 아이스하트를 막기 위한 마지막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9


  “여기서…… 끝이야?”
  설빈은 허탈한 듯이 K를 향해 말했다. 소설은 여기서 더 나가지 않고 끝나 있었다. 비록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뚝 끊긴 흐름은 무의식중에 설빈으로 하여금 입맛을 다시도록 했고, K는 아쉬워하는 설빈의 반응에 만족한 듯 말했다.
  “뒷부분은 아직 글로 옮기지 못했어. 다 읽은 소감이 어때, 설빈?”
  “뭐……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왠지 바다 어딘가에 푸른 돌이 숨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마지막엔 꼭 진짜로 일어난 일을 기록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K는 설빈이 작업실로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그래? 만약 그렇다면…….”
  어느새 K는 몸을 앞으로 내밀어 설빈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설빈은 유쾌하지 못한 몰골의 얼굴인 K가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아까와 달리 불쾌감을 느끼지 못했다. K는 웃음기를 싹 지운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었다면 케빈 아이스하트는 정말 나쁜 놈이겠지? 세상에서 없어져야 마땅할 악당 중의 악당이겠지?”
  설빈은 K의 말에 담긴 저의를 알수는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죽어도 싸. 그런 놈은.”
  “소설의 뒷부분 이야기를 해 줄게, 설빈. 속삭이는 돌은 살바도르 깔레하에게 케빈 아이스하트를 없애줄 것을 부탁해.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의 솜털하나 건드릴 수가 없는 형편이지. 하지만 그에게도 막강한 무기가 있었어.”
  “떨어져 나온 돌?”
  “그래. 두 번째 속삭이는 돌. 그것을 사용하면 살바도르 깔레하 역시 과거를 바꿀 수 있으니까. 그래서 살바도르는 케빈 아이스하트의 출생을 지워버리기로 마음먹었어. 애초에 없었던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기로 한 거지. 그는 케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구인지 조사했어. 케빈의 아버지인 알버트 아이스하트는 26살 때 한 파티에서 신들린 듯 춤을 추고 있던 새라 해밀턴에게 한 눈에 반하고 말지. 그리고 그것은 새라도 마찬가지였어. 살바도르는 바로 그것을 노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둘을 애초에 만나지 말도록 하면 케빈 아이스하트는 태어날 수가 없는 거야. 그런데 속삭이는 돌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
  K가 뜸을 들이자 참지 못하고 설빈이 물었다.
  “응? 어째서?”
  “속삭이는 돌이 텔레파시를 보낼 수 있는 시간은 2007년으로 정해져있었어. 그 알버트와 새라가 만나게 되는 파티는 2029년이었고. 시간대가 맞지 않게 되는 거야. 22년을 기다리면 되겠지만 그 사이에 미쳐가기 시작한 케빈 아이스하트가 세계를 어떤 모양으로 바꿔버릴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절망에 빠진 살바도르 깔레하의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스쳐지나갔어. 속삭이는 돌이 도움을 준게 아니야. 신의 도움인지, 뇌의 화학작용인지 모르지만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거지. 새라는 알버트가 동양의 어떤 영화배우를 닮아서 그의 매력에 끌렸다고 방송에서 밝힌 적이 있었어. 만약 동양의 그 영화배우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알버트와 새라의 만남까지 막을 순 없겠지만 둘의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던 거지. 그래서 속삭이는 돌은 자신의 최후가 될지도 모르는 도박을 감행했어. 2007년 그 영화배우가 태어날 나라의 누군가에게 살바도르 깔레하를 연결시켜 준거야. 그 누군가는…….”
  K는 여기까지 말하고 말을 멈췄다. 설빈은 애타게 그를 재촉했다.
  “그래서? 속삭이는 돌이 연결시켜준 그 ‘누군가’는 어떤 사람이었어?”
  그러자 힘겨운 비밀을 토해내듯 K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나갔다.
  “2007년의 대한민국…… 소설의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는 한 극작가 지망생이었어.”


  10


  오랜 침묵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설빈이었다.
  “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 ‘누군가’가 설마…… K 너야?”  
  그러자 K는 말없이 손을 들어 책상을 가리켰다. 모니터 아래 아까부터 펼쳐져 있던 두꺼운 책. 그것은 에스파냐어 사전이었다. K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나도 혼란스러웠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속삭임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을 때는 너무나 두려워 미쳐버리는 줄만 알았어. 하지만 그 속삭임은 내게 간절히 말하고 있었어. 한 남자아이의 탄생을 막아야 한다고. 그래야 세계에 평화가 찾아온다고. 믿기 힘든 내용이었지만 거부하기도 힘들었어. 그래서 소설을 쓰게 된 거야. 뮤즈가 속삭여준 그대로.”
  설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왜 굳이…… 내게 보여준 거야? 응?”
  K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마치 거미줄에 먹잇감을 칭칭 감은 채 노려보는 거미의 눈처럼.
  “외면하려 하지 마, 설빈. 이제 아무런 친분이 없는 너를 이곳으로 불러낸 내 목적을 어렴풋이 깨달았을 텐데? 그 영화배우는 2007년 10월 2일, 바로 오늘 잉태되게 돼. 그리고 나는 그것을 막아야만 하고. 그 영화배우의 이름은 신상혁. 20년 후 아시아를 넘어 헐리우드에까지 맹위를 떨칠 최고의 스타지.”
  갑자기 K가 손가락을 들어 설빈을 가리키자 설빈은 독침에 쏘인 듯 굳어버렸다. K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신설빈, 바로 너의 아들이야!”


  11


  설빈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피식피식 웃기 시작하다가, 이윽고 허리를 젖히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을 웃다가 갑자기 굳어진 표정으로 K를 노려보았다.
  “이봐 K. 농담이라도 이정도면 지독한 모욕이야.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냥 네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잖아? 네 말대로라면 오늘 내가 그 신, 뭐시기인가 하는 놈을 태어나게 한다는 건데 무슨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야말로 코미디잖아.”
  설빈은 마술사의 유치한 트릭을 간파한 것처럼 비웃으며 쏘아댔지만 K의 곰보자국 얼굴은 진지했다. 그는 다만 침착하게 설명해나갈 뿐이었다.
  “오늘 무용과 채민경과의 데이트가 있지? 그래서 내게 오기 싫었던 거잖아.”
  “……그래서?”
  설빈의 표정에서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K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세 번째 데이트. 설빈, 너는 여자와 세 번째 데이트에 마지막 스킨쉽을 시도하는 철칙이 있고. 오늘이 바로 그 날이지.”
  “이봐, K.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계속 이러면 나도 더 이상…….”
  “그리고 네 뒷주머니에는 콘돔이 들어있겠지? 오늘 밤의 일에 대비해 준비해놨을 거야. 어때, 내 말이 틀려?”
  설빈은 하얗게 굳어진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스스로 뒷주머니를 더듬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지만 K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K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더 자세히 말해볼까? 오늘밤 너는 채민경을 유혹해 침대 위에 끌어들이지. 그리고 네가 셀 수 없이 많은 여자를 스치며 갈고 닦은 애무로 그녀를 흥분시켜. 삽입한지 7분 동안은 최고의 쾌락을 맛보게 될거야. 하지만 넌 깨닫지 못해. 7분째 되던 그 순간 격렬한 피스톤 운동을 견디지 못하고 콘돔이 찢어져버리고 마는 걸. 그로 인해 채민경은 너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 거야. 앞날이 유망한 연예인인 너는 가차 없이 그녀를 버리지만 채민경은 아이를 지우지 않아. 운명을 망쳐놓은 너에 대한 복수로 아이를 영화배우로 키워. 그리고 세계적 스타가 되었을 때 아이의 아버지인 너를 파멸시키게 되는 거야. 모든 것을 잃은 너는……”
  “닥쳐!”
  설빈은 번개같은 동작으로 K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왜소한 K의 몸은 힘없이 들어 올려졌고, 설빈은 당장이라도 그의 얼굴을 날려 버릴 듯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K는 태평한 눈동자로 바라볼 뿐이었다. 설빈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네가 뭔데 내 인생이 파멸될 거네, 뭐네하고 말하는 거야? 그 헛소리를 내가 믿을 것 같아?”
  K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 설빈, 네가 내 이야기를 모두 허황된 이야기라고 믿어버리면 아무 소용없으니까.”
  “그래, 맞아. 다 허풍이잖아. 쓰레기같은 소설 나부랭이일 뿐이라고.”
  쓰레기라는 말에 K는 잠시 울컥하는 듯 했으나 이윽고 눈을 내리감고 가라앉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는 멱살이 들어 올려진 상태에서 힘겹게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내밀었다. 설빈은 그것을 보자 멱살을 잡던 손을 풀 수밖에 없었다. 화가 가라앉아서가 아니었다. 그가 내민 물건이 그만큼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앙증맞기까지 한 콘돔 한 벌이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내 말을 믿으라고는 하지 않겠어. 채민경과 섹스를 나누지 말라는 것도 아냐. 하지만 나는 내 일을 해야 해. 그래서 택한 방법이야. 네 뒷주머니에 있는 콘돔을 버리고 이것을 써. 그러면 케빈 아이스하트는 사라지게 돼. 이건 너에게도 득이 되는 이야기야. 설빈, 너 역시 젊은 나이에 실수하고 싶지는 않겠지?”
  설빈은 어느새 조금씩 설득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K의 콘돔을 집어 들게 되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의 허황된 이야기가 실은 모두 진실이고, 자신은 세계를 혼란에 빠져들게 만드는 악당을 없애기 위해 K의 명령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참기 힘든 굴욕일 터였다.
  “선택해, 설빈.”
  K의 마지막 말이 설빈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12


  설빈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K의 작업실이 버림받은 짐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설빈의 손에는 K가 내민 콘돔이 들려 있었다. 물론 그는 K의 소설을, 그가 한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속삭이는 돌이라는 게 2048년마다 진짜로 나타난다면?
  “제길. 잊어버려. 약속시간에 늦어버리겠다고.”
  설빈은 머리를 훌훌털고 뒤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두 번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고.
  
  K는 창가에 서서 설빈이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세계의 안정을 지켰다는 뿌듯함도, 끝내 상대방을 완전히 설득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나타나있지 않았다. K는 다만 떠올리고 있었다. 설빈이 그의 작업실을 나가기 전에 꺼냈던 마지막 말을.
  “궁금한 게 있어. 내가 채민경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 세 번째 데이트에 대한 습관, 그리고 내 콘돔이 찢어질 거라는 것. ……그것들 역시 뮤즈가 속삭여준 거야?”
  K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설빈 역시 대답을 독촉하지 않고 떠나갔다. 이윽고 설빈의 모습이 K의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창가에는 어느새 석양의 빛이 침범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K는 손에 들고 있던 자신의 소설을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꽂아 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두툼한 앨범을 꺼내어 펴보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청순한 외모의 한 여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K의 삶의 이유, 혹독한 세상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단 하나의 빛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설빈이 몇 달 전 섹스를 나눈 뒤 가차 없이 버려버린 여인이었다.
  사진속의 인물은 K와 같은 극작과의 최고미녀 ‘양혜정’이었다. 그녀는 몇 달 전 설빈에게 버림받은 뒤 실의에 빠져 학교도 나오지 않고, 잠적을 해 버렸다. 그녀와 한 강의실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만한 기쁨을 느꼈던 K에게 있어 그것은 재앙과도 같았고 K는 양혜정에게 닥친 일이 어떤 것이었는지 조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설빈이라는 연기전공의 증오스러운 남자를 알게 되었고, 그의 여성편력도 알게 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K는 그의 사소한 버릇 하나하나까지 파고들었다. 세 번째 데이트에 여자를 자빠뜨리겠다는 그 얄팍한 자만감에서부터 뒷주머니에는 항상 콘돔을 넣고 다니는 습관까지.
  그리고 K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아니야, 설빈. 뮤즈의 속삭임 따위는 없어. 영감이란 원래 그런 거야.”
  전부 사람의 머릿속에서 치밀한 계획 끝에 나오는 거지. K는 천천히 등을 돌려 유리관 앞에 섰다. 타란튤라는 톱밥 속에 숨어 눈빛만을 발하고 있었다. 사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혀 친분 없는 설빈을 자신의 작업실에 끌어들이는 일은. 그리고 허황돼 보이면서도 현실과 이어지는 소설을 창작해 내는 것은. 하지만 가장 어려웠던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살아있는 독거미 타란튤라에게서 독액을 채취해 압축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미리 준비한 콘돔에 정교한 주사기로 윤활액과 함께 섞이도록 주입시키는 일이었다. 그것은 정교한 기술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K는 해냈다. 결국 마지막에 설빈은 그 콘돔을 집어든 것이다. 물론 타란튤라의 독이 치명적이진 않다는 K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닿은 부위가 걸레가 되어 버린다는 말도 역시 일말의 과장도 없는 진실이었다.
  “악당은 역사에서 사라져야지. 네 놈의 빌어먹을 물건 말이야.”
  K는 유리관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리고 먹이를 삼킨 뒤 포만감에 젖어있는 타란튤라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지켜보았다. K의 한 쪽 입가가 슬며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힘겹게 참아왔던 웃음이 거미줄처럼 새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141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