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이게 제 경험담이에요. 이후의 얘기는 후일담이고 당신에게 이 글을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죠. 글쎄, 어떤 이야기를 해야할까요……. 제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얘기할까요?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야를 가득 채운 건 인공적인 하얀 빛들이었어요. 미친듯이 술을 먹은 다음날처럼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죠. 잠시 멍하니 쏟아지는 빛 속에 몸을 내버려 두었어요. 제가 겪었던 일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지만 그건 너무나 멀고 낯선 일들이었죠. 오랜 옛날 서수진씨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잠시 치워놓고 일단 상황파악부터 하기로 했어요. 조금 들썩이자 온몸이 깨질듯이 아파왔죠. 작은 관절들 하나하나가 움직이는 것도 너무도 어색하게 느껴졌어요. 몸을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자 바로 제 시야에 들어온 건 당신의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어요. 그제서야 어느 정도 제 상황이 현실감을 가지기 시작했죠. 그리고 미약한 기시감도 함께. 전 다시 과야낄의 작은 병실에 누워 당신의 간호를 받고 있더군요.
 당신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어요. 건조한 말로 제게 일어날 일과 주의사항들을 일러주었을 뿐이었죠. 일의 결과에 대해선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뭔가 끔찍할 거란 건 분명했어요. 그런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건 영감에게도 에콰도르 정부에게도 귀찮은 일이었고요. 물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고. 귀찮은 상황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모두의 동의로 인해 일은 쉽게 넘어갈 예정이었어요. 사건을 아는 소수의 사람들이 함구하고 남은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거죠.
 확실히 일은 빨리 처리되더군요. 몇시간이 지나 제가 몸을 추스릴 수 있게 되자 우린 서둘러 병원 옥상에 마련된 헬리콥터로 향했어요. 저는 실신으로 인한 일시적 근육경직이라나 뭐 그런 판정을 받고 신속하게 퇴원처리 된 거고요. 옥상에는 모레노 교수 뿐이었죠.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오히려 정리된 말이 나오지 않더군요. 전 그 곳에서 당신과 나타샤에게 작별을 고했죠. 당신과 그 애는 비행기 편으로 유럽으로 돌아간다고 했어요. 당신의 심리 연구소가 있는 곳으로. 짧은 눈인사, 그게 당신과 나타샤와의 마지막이었죠.
 샌디에이고로 돌아가는 헬리콥터 안에서 모레노 교수는 조심스럽게 자신이 겪었던 일을 들려주었어요.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그는 갑판으로 오르는 층계 근처에서 당신과 나타샤를 만난 거에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비라타를 장착했죠. 저와는 다른 것이더군요. 그는 그대로 모든 감각기관이 차단되었어요. 의식을 잃은 건 아니죠. 모든 감각이 닫힌 상태에서 의식은 살아있다니, 지옥이 있다면 그 상태이겠군요. 아무튼 교수는 그 상태에서 강박적으로 시간을 세었다고해요. 하긴 그 상태에서 미치지 않으려면 뭐에든 집중해야겠죠. 그래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당신이 교수의 감각을 다시 열었을 때는 삼십여분이 지났다고 하더군요. 맙소사, 삼십분이라니. 제게 그 시간은 삼십년 같았다고요. 어쨌거나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전 대체 당신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하더군요. 곰곰히 고민하고 선택할 여유 따위는 없었잖아요. 대체 왜 그랬는지, 우리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는 뭔지… 샌디에이고에 도착하면 당장 따져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교수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고 듣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일이 끝난 뒤 배의 정황이죠. 익숙한 얘기였어요. 난파된 샤이닝 허그 호에서 우리가 목격한 광경이니까. 우리 넷을 제외하고 배에는 아무도 없었죠. 그리고 곳곳에 파손된 기기들과 핏자국들, 그리고 선체에 길게 아로새겨진 압흔들. 전 재수 없는 페드로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쓰고 이제 다시는 어디에서도 그를 마주치지 않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결국 머리를 가득 메운 건 프랑코를 비롯한 팀원들이었어요. 녀석이 마지막으로 이죽거린 농담은 버뮤다 삼각지대에 관한 신비주의자들의 웹사이트에 대한 것이었죠. 망할 자식. 눈물은 나왔지만 어느 정도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서인지 생각보다 침착할 수 있었어요.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서 당신과 교수는 가까운 해양경비대를 향해 구조 신호를 보냈죠. 배는 완전히 멈춰버렸고 압흔들에서 물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더군요. 교수는 그런 중에도 침착한 나타샤를 언급하며 넌더리를 쳤어요. 초조해하고 혼란스러워하던 당신과 교수와는 달리 그 애는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처럼 익숙해보였고 즐거워하는 것처럼도 보였다고. 어쨌거나 예상외로 신속한 인양이 끝나고 과야낄에 도착한지 이틀 뒤에 제가 깨어난 거죠.
 머릿 속이 검은 선 뭉치로 가득찬 것 같았어요. 그저 어딘가 숨어 1년 정도 잠만 자고 싶었죠. 제 바람과 달리 헬기는 금새 목적지에 도착하더군요. 영감의 저택이었죠. 우린 경호원의 안내를 받으며 영감의 방으로 향했어요. 짜증이 나서 영감탱이를 만나면 뭐라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막상 영감은 아무 것도 묻지 않더군요. 그저 지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팀에게 약속된 돈이 지급되었다고 말할 뿐이었어요. 하긴 그도 골이 아팠을 거에요. 하루만에 자신의 두 팀과 그들의 장비와 프로젝트가 모두 날아가 버렸으니까요. 여차하면 언론들이 붙잡고 늘어질 수도 있죠. 어째서 영감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건지, 아니 안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다들 뭔가 오래 얘기를 나눌 상태가 아니었죠.
 연구소에 도착하자 교수는 바로 소파에 드러누웠어요. 저도 쉬고 싶은 생각 뿐이었지만 결코 마음 편하게 누울 수가 없었죠. 곧바로 라이프치히 대학 심리연구소 홈페이지에 접속해 당신의 메일 주소를 알아내고 메일을 보내기 위해 로그인을 했어요. 놀랍게도 당신의 메일이 도착해있더군요. 제가 깨어나지 않은 동안 쓴 모양이에요? 당신은 우리 팀 홈페이지에서 제 주소를 알았다며 곧 궁금해할만한 것들에 대해 답을 해주겠다고 했죠.
 하지만 마냥 당신의 답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전 그 때 폭발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고요. 그리고 아무 것도 알 수 있는 게 없었죠. 별 소용이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닥치는대로 이것저것 알아봤어요. 안 그러면 숨이 막힐 것 같았으니까.
 공감각에 대한 이야기들은 도무지 쉽게 와닿지 않았어요. 역사학을 전공하고 이 길에 들어선 지금까지 도대체 심리학이니 신경과학이니 하는 게 저랑 상관있을 거란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요. 아무튼 알아갈 수록 의아했어요. 2000명 중에 한두명 꼴로 공감각자가 태어나죠. 그리고 공감각은 감각영역의 교차활성화로 인해 발생한다면서요? 공감각이 없는 사람이 감각을 받아들일 때 뇌의 한 영역만 활성화 되는 데에 반해 공감각자는 두개 이상의 영역이 활성화된다. 이건 태아의 뇌가 형성될 때 감각영역 간의 신경연결이 엉켜있기 때문이다. 그럼 대체 전 왜 후천적으로 한순간에 모든 영역이 활성화 되었던 건지, 그게 가능하기는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죠.
  잠시 그 모든 게 환각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당신이 제게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시술을 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실종은 곧 그 가능성을 약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요, 그 것도 이상한 점이죠. 만약 그 때의 일이 모든 사람에게 제가 겪은 것과 같은 공감각을 불러왔다면 왜 사라져야했는가? 나뉘어진 감각이 동시에 느껴진다고해서 몸이 분해될 필요는 없잖아요.
 의문들은 도무지 풀리지 않았고 조금이나마 만만해보이는 세이렌들 쪽으로 달라들었죠. 멜루지네, 로렐라이, 인어공주같은 자매들도 함께. 그 전까지 제게 세이렌은 뱃사람들의 판타지가 투영된 전설일 뿐이었죠. 하지만 녀석들도 어느 순간 제 삶의 밀접한 존재가 되어버린 거에요. 호메로스에 의해 처음으로 구체화되고 이후로 사회변화에 맞춰 역할을 바꿔온 존재들과 이들과 조우한 사람들의 얘기가 너무도 현실감있게 느껴지더군요. 어쩌면 모두들 비슷한 일을 겪은 건 아닐까. 매혹적인 여인들과 그들이 약속하는 지혜의 유혹, 벗어날 수 없는 성적인 충족감, 정신을 나가게 만드는 노랫소리.
 그리고 생각은 카탈리나 베리오가 새겼을 세이렌이라는 글귀가 적힌 선체 조각으로 향하더군요. 사건이 있은 뒤로 모든 연구는 중단되었죠. 교수는 한없이 무기력해졌고요. 그에 상관없이 우리가 발굴한 유물들은 연구실에 도착해 정밀처리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전 잠시 보존고로 향해 그 선체 조각을 집어들었어요. 우습게도 전 카탈리나 베리오에 대해 더 알 수 없다는 게 아쉬워지기 시작했어요. 스텔라 호도 같은 일은 겪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 욕망은 더 절실해졌죠.
 제노바 쪽 팀에서 뭔가 연락이라도 왔으면 좋았을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그들도 이 기이한일에 대해 함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걸까요? 세상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흘러갔고 전 혼자 구질구질한 고민들을 안고 힘든 나날을 보냈죠.
 지리한 며칠이 지나고 당신의 메일이 도착했어요. 전 작게 심호흡을 하고 메일을 열었죠. 생각보다 메일은 길더군요. 그래도 제가 익숙하지 않은 내용이란 걸 생각했는지 쉽게 풀어 설명해주려한 게 느껴지던 걸요. 배려에 감사해요. 뭐 그렇다고 잘 이해한 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어느 정도 제 의문들이 해결된 것도 사실이에요.
 지금부터 당신도 뻔히 알만한 내용을 떠들어 볼게요. 제 생각을 정리해보려는 생각에서요. 제가 어느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지 당신에게 확인받으려는 생각도 있고요.
 당신이 속한 심리 연구소에서 당신이 이끄는 팀은 공감각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죠. 그리고 최근에 연구하고 있는 주제는 이거에요. 공감각이 후천적으로 습득 가능한가? 그렇다면 공감각은 미래의 인류가 가질 인지 양식은 아닐까? 당신다운 주제에요.
 그리고 당신들의 흥미를 끌만한 사례들이 나타나죠. 대표적인 게 스웨덴의 R.C. 양이고요. 그녀는 난파된 유람선에서 실종되었다가 구조되요. 정신을 잃은 채로. 이후로 그녀는 별 이상없이 일상을 이어나갔지만 곧 공감각의 양태가 나타나죠. 32년 동안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말이에요. 당신들은 그녀의 동의를 얻고 본격적으로 그녀에 대해 연구를 하지만 쉽게 풀리지 않았죠. 그녀는 사고 순간의 기억을 잃은 상태였고 증상을 불러온 원인에 대해 알아낼 방법은 요원했으니까요. 더군다나 그녀는 급속도로 공감각 능력을 잃어갔어요.
 열쇠는 다른 곳에서 풀리죠. 이건 제가 더 친숙하지 않은 분야라 쉽게 이해가 안되요. 아무튼 스웨덴의 기상 연구팀이 도움이 되었다는 거죠? 유람선 사고가 일어난 곳을 조사하다보니 사고 당시 발생 해역에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급격한 입자 운동이 발생했다는 거 맞나요? 포뢰섬 근처인 그 곳은 R.C. 양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고요.
 당신들은 곧 그 기상 연구팀과 함께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입자 운동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탐사를 시작해요. 굉장히 드문 일이었지만 연합팀은 몇군데에서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던 흔적을 찾아냈어요. 사후에 발생한 일이라 그 현상이 공감각과 연결되어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찾을 수 없었지만, 인근 지역들에서 R.C. 양과 비슷한 사례들을 발견하기도 하죠. 기상팀이 계속 입자 폭풍을 찾아다니는 동안 당신들은 경험자들에 대한 연구와 입자 폭풍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폭풍의 정체를 밝히는 데에 힘쓰게 되죠.
 그 결과 당신들이 세운 가설을 제가 이해하리라 생각한 건 아니겠죠? 제가 노력한 정도는 이래요. 급속한 입자들의 진동은 공간을 휘게 만들고 그 곳에 있는 사물에 강력한 압력을 가하기도 하죠. 그리고 인간의 뇌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고요. 감각 신경에 일시적인 자극과 혼란을 가하게 되고 그 결과가 공감각과 같은 경험을 이끌어낼 수 있는 거죠. 하지만 갑작스런 자극은 결국 본래의 인지 매커니즘을 회복하지 못하게 할 수 있고요.
 거듭된 시뮬레이션을 통해 당신들은 폭풍이 뇌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대한 대처와 기록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장비를 만들어내요. 비라타죠. 순간적으로 제가 모르모트가 된 거 같아 기분이 상하더군요. 아무튼 당신들에게는 실측 연구만이 남아있었죠. 기상팀이 폭풍이 발생할만한 장소를 예상해냈고 당신들은 그 곳에 직접 탐사팀을 파견하기보다 해당지역에 갈 선박에 동승하는 쪽을 택했어요. 공개적으로 하는 연구가 아니라서 그런 건가요? 어쨌거나 그런 당신들에게 최선의 선택은 에콰도르 관광청 소속 선박 페사디야 호였어요. 샌디에이고의 수중 고고학팀이 빌린 배죠. 이런!
 예상대로 당신은 목적을 갖고 우리와 동승했던 거죠. 당신이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영감도 이 일을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는군요. 영감과 특별한 거래를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영감은 돈이 될만하다는 판단이 들면 뭐든 하려하니까. 당신팀에서 당신만이 혼자 우리 배에 승선했으니 페드로를 포함한 다른 팀은 영감의 감찰관들이었을 거에요.
 왜 저와 교수만이 남았는가도 알게 되었죠. 당신은 승무원 모두에게 비라타를 장착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의도를 밝히는 건 내켜하지 않았죠. 입자 폭풍이 우리의 항로에서 발생하리란 보장도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실제 폭풍이 우리에게 다가왔죠. 당신은 그게 입자 폭풍의 전조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샤이닝 허그 호에서 유일하게 남은 나타샤는 확신을 주었죠. 당신이 먼저 그에대해 넌지시 질문을 던지자 그 애가 신나하며 얘기한 거에요.
 당신이 비라타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미처 손 써볼 틈도 없이 해저에서 먼저 미약한 폭풍이 발생했죠. 후유증에 시달리는 잠수부들에게 비라타를 장착해서 효과를 확인한 당신은 곧 승무원들을 한명씩 만나 당신의 계획을 설명하려 애써요. 하지만 아무도 당신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지 않았죠. 그 때 배 분위기도 어수선했으니. 설상가상으로 전날밤엔 비라타들을 시험가동하는 중에 작동이 정지되버리죠. 입자 폭풍의 전조로 모든 기기가 멈춰 육지에 연락을 해볼 수도 없었고 결국 당신은 혼자 힘으로 비라타를 수선해요. 비라타가 다시 작동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폭풍이 시작되기 직전이었고, 당신은 가까스로 만난 저와 교수에게 비라타를 장착하는 게 다였죠.
 안타까운 일이죠. 해결책이 있었지만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으니. 당신을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저 안타까울 뿐이에요. 조금만 일이 잘 풀렸어도 모두가 무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우린 샤이닝 허그 호나 스텔라 호보다는 나은 처지에 있었죠. 그래요, 스텔라 호. 아마 그들도 세이렌들을 만났겠죠.
 당신의 메일을 읽으며 제 나름대로 스텔라 호의 난파에 대해서 가설을 세워봤어요. 스페인 군함을 피하는 길에 입자 폭풍을 만난 거죠. 입자가 공간을 휘게 하고 물체에 강한 압흔을 남기기도 한다면 선저의 구멍도 설명해볼 수 있어요. 입자의 움직임이 한 곳에 집중해서 발생했겠죠. 당시 바람이 멎어버렸다면 입자가 원형의 구멍을 만드는 것을 어찌해볼 수 없었을테고요. 하긴 이미 폭풍 속에서 그런 것에 신경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겠죠. 가까스로 스텔라 호가 시계에 들어올 만한 거리에서 추적하던 스페인 군함 쪽에선 순식간에 침몰한 스텔라 호가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거에요. 카탈리나 베리오는 세이렌이란 글자를 그 폭풍 속에서 남긴 걸까요? 그럴 수는 없겠지만 그 정도로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는 게 전설 쪽에 더 부합하겠군요. 세이렌을 선수상으로 달더니 진짜 세이렌들을 만나고 전설이 되다, 그리고 여기 우리들도 전설이 되어버렸군요. 그들을 뒤쫓다 같은 처지가 되어버렸으니 참 기구한 운명이네요. 그래도 우린 일부나마 세이렌들의 유혹에서 빠져나왔죠.
 물론 그게 가능했던 건 비라타 덕분이고요. 그럼 비라타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무엇을 위해. 그 전에 제 가장 큰 의문에 대해 정리해봐요.
 어째서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공감각이 후천적인 사건으로 습득이 가능한가. 제가 직접 겪지 않았다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을 거에요. 복잡한 인간의 뇌는 오랜 기간 만들어진 매커니즘으로 작동되죠. 입자들이 일으킨 폭풍은 이 매커니즘을 교란시켜요. 뇌의 감각영역들을 임의적으로 자극하고 감각 신호의 흐름을 제멋대로 바꾸죠. 하나의 감각을 통해 자극이 오면 작용은 증폭되요. 사소한 자극 하나에서도 다른 자극들이 폭발적으로 함께 반응하는 거죠.
 예전같으면 이런 얘기에서 스키너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 거부감이 들었을 거에요. 하지만 제가 직접 그 속에서 경험한 뒤로는 다르죠. 전 인간에게있어 감각의 수용이란 감각인지시스템 그 자체가 아니라 정보에 대한 논리적 분석이라고 믿었어요. 물론 그 말은 맞죠. 하지만 추론과 분석은 감각 방식 위에 서 있는 거에요. 인간의 신피질이 그 조상인 어류와 파충류의 뇌 위에 있는 것처럼요. 실제로 감각의 혼란을 통해 새로운 인지 방식을 강요받게되자 제 논리적 정보 처리 능력은 무용지물이 되었죠. 다시 한번 착시 그림을 생각해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더군요. 인간의 인지 과정은 과거의 데이터와 패턴을 다른 정보를 접했을 때 적용하는 것에 기반해요. 정보가 되는 사물들이야 언제나 그대로고 인간의 감각 방식이 변할 일도 없으니 이런 과정은 효율적이죠. 하지만 감각 방식 자체가 바뀌어버린다면? 오랫동안 효율적으로 작동하던 이 매커니즘은 쓸모없어지는 거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되니까. 자유의지나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인간의 뇌가 만들어진 과정과 딛고 선 기반을 무시해선 안되겠죠.
 결국 그렇게해서 새로운 감각 방식에 익숙해지고 그에 대한 처리 방식을 갖추게 된 존재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어요. 우리와는 다른 그 무엇이죠. 폭풍 속에 던져진 인간이 겪게 될 일이기도 하고요. 비라타는 이 과정을 제어하는 역할을 해요. 물론 정확한 방법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이해하기로 그건 머리에 부착하는 패드형이고 파동을 내보내 입자의 교란을 제어하는 장치에요. 교수와 제게 적용된 건 서로 상이한 방식으로 제어를 하죠. 당신들은 교수에게 쓰인 것에 케로스식, 제게 쓰인 것에 스핑크식이란 이름을 붙였어요. 케로스식 비라타는 모든 감각처리작용을 멈춰버리는 방법을 써요. 대상자는 제어가 진행되는 동안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고 감각과 관련된 뇌의 활동이 멈춰버리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폭풍 후에 후유증도 없죠. 다만 오래 사용하면 뇌가 아예 멈춰버릴 수도 있고요.
 스핑크식 비라타는 교란의 진행이 일정선을 넘지않도록만 제어를 해요. 뇌가 새로운 감각방식에 완전히 적응해버리거나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만을 막는 거죠. 이 경우에 비라타가 뇌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지만 공감각 폭발을 고스란히 겪기 때문에 어떤 후유증이 남을지 모르죠. 다행히 전 무사히 당신에게 글을 쓰고 있군요.
 비라타는 또한 대상자의 뇌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기록하는 일도 하죠. 저희를 실험대상으로 삼은 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저도 그 처지라면 똑같이 했을 테니까. 중요한 건 당신들이 무엇을 알아내느냐죠.
 이 경험이 그것을 겪은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분명해요. 그 날 이후로 전 수시로 그 때 만난 세이렌들의 환영에 시달려요. 입자 폭풍 속에서 만난 건 왜 하필 세이렌들이까요. 저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세이렌들의 얘기가 그에 관한 것이라면 말이에요. 전 떠오르는 세이렌들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다 평소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동경하던 외모와 닮아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평소 좋아하던 여배우들의 모습을 잘 조합하면 세이렌들과 비슷할 것도 같더군요. 공감각 폭발을 겪은 다른 사람을 만난다면 더 확실해지겠지만 세이렌들의 모습 자체는 확실하게 규정된 모습이 아닌 거 같아요. 그건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겠죠. 하지만 세이렌이라는 형식은 유지하죠. 그건 공감각이 불러오는 환희가 만들어내는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공감각이 진행되는 동안 외부의 세계는 불가해한 형태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정신적 육체적 자극은 엄청난 것이죠. 그래서 뇌는 그 환희를 투영할 구체적인 대상을 만들어내는 거에요. 인간의 형태로요. 엄밀하게 보자면 세이렌은 중성적인 모습에 가깝죠. 남성과 여성의 장점을 취한 적절한 형태가 여성에 더 가깝기 때문에 여성으로 회자되는 걸 거에요. 그건 결코 여성이 유혹하는 존재이거나 비련의 주인공이어서가 아니죠. 우리가 평소에 직접적으로 만날 기회는 없지만 모두의 정신 깊숙한 곳에는 세이렌이 있을 거에요.
 한편으로 전 공감각 폭발을 겪은 이후에 꾸준히 공감각을 느껴보려고 노력했어요. 자극적인 향을 맡아보기도 하고 헤드폰을 눌러쓴 채 음악을 들어보기도 하고. 별 소용이 없었어요. 당시를 떠올리면 저의 공감각적 기억들은 고스란히 되살아나지만 다시는 어디에서도 그런 감각을 느껴볼 수 없더군요. 어딘가 구멍이 난 것처럼 한없이 허탈하고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초조해요.
 글쎄요, 실제로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전 당신들이 이 현상에 대해 너무 쉽게 대하는 건 아닌가하고 느꼈어요. 이건 단순히 어느 심리연구의 사례들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인간의 존재방식을 바꿔버릴 수 있는 일이라고요. 인간의 나뉘어진 감각과 그 위에 세워진 우리의 문명은 규정짓기를 통해 지속되요. 각각의 감각을 통해 받아들여지는 세계는 감각방식에 따라 부여된 양식을 통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게 되죠. 하지만 공감각 폭발을 통해 새로이 얻은 감각방식으로 느낀 세계는 모든 가능한 형태가 중첩되어있어요. 인간의 구태의연한 규정짓기가 들어설 틈이 없는 순수한 자극으로 충만한 세계죠. 물론 인간은 그 속에서 다시 나름의 질서와 의미를 찾아낼 거에요. 하지만 그건 지금 이 세계의 것들과는 다른 것들이겠죠. 그것들이 가진 가능성에 대해 우린 충분히 탐색해봐야해요.
 제가 앞서 마치 익숙한 곳에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말했죠. 그건 실제로 인간이 과거에 그런 감각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 거라 생각해요. 그동안 강요된 결박에서 풀려났다는 해방감의 다른 표현이겠죠. 카프카는 '사이렌의 침묵'에서 기만에 대해 이야기해요. 세이렌들은 침묵했고 오디세우스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는 이야기. 그건 지금의 경우에도 적용해볼 수 있을 거에요. 우린 외부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어요. 감각기관을 통해 한번 필터링을 거친 정보들이 우리의 세계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세계가 절대적이고 유일불변한 세계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죠. 다른 형태의 감각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세계는 변해요. 우린 그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만을 기준으로 삼으려 하죠. 당신과 나타샤같은 공감각자들은 어딘가 정상과는 다른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 되고 세이렌들은 메타포를 가진 전설이 되어버리고요. 하지만 이제 우리는 다른 감각을 통해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어요. 이러고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행해보지 않은 채 이 세계에 안주해 그것을 한낱 하나의 연구대상으로만 보는 건 기만이에요.
 저는 그런 생각을 했고 이제 그 세계를 다시 한번 만나러 갈 생각입니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 많죠. 우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된 건지 알지 못하잖아요. 당신과 같은 공감각자들은 어느 정도 그에 비슷한 생활을 해왔기에 공감각 폭발에서 커다란 혼돈을 겪진 않고 비라타의 필요성이 크지도 않지만 그래도 주변 세계를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했죠. 그래서 당신도 비라타를 장착하지 않았던 다른 이들의 행방을 모르고요. 그들은 사라졌어요! 다른 감각을 가지는 게 우리를 지금까지와 다른 존재로 만들겠지만 그렇다고해서 사라져버릴 이유는 없잖아요. 아마 그 것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거에요. 제가 사라져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알려줄 수도 있겠죠.
 당신이 있는 곳으로 찾아갈까도 생각해봤어요. 하지만 귀찮아질 것 같더군요. 전 폭풍 속에서 스핑크식 비라타를 한 유일한 경험자니 질문들이 쏟아질 게 뻔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메일을 보내서 제가 겪은 것과 제가 하려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요. 당신이 함께하고 싶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해도 도움을 줬으면해요. 다음번 입자 폭풍이 발생할만한 장소를 알려준다거나 말이에요. 전 혼자서라도 탐사를 준비할테니까요.
 답메일을 기다릴게요. 아 참, 나타샤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선 도무지 그 애에 대해 종잡을 수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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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글을 쓰긴 늦은 것 같고 썼던 글들 중에 애착이 가는 걸 올립니다
너무 긴 것 같긴하군요 읽기도 불편할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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