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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입생



  “얘―여기서 뭐하니? 길을 잃었니?”
  “…어?”
  갑자기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인시아는 고개를 꺾어 올려서 위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커다란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어머! 미안―하플링인 줄 몰랐어―”
  느릿느릿한 말투로 수선을 떠는 여자의 모습을 보며 인시아는 피식 웃었다. 작은 여인은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봤다.
  “아하, 네가 그 편입생이구나.”
  “응―며칠 전에 여기로 왔어―”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재잘대며 뿌듯하다는 듯이 가슴을 폈다.
  “아참, 넌 이름이 뭐야?”
  “음, 나는….”
  “아차차, 미안해. 내 이름먼저 말했어야 했는데―나는 에이리야. 에―그러니까 줄여서 이리라고 불러 줘.”
  인시아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숙녀의 애칭으로 ‘늑대’는 좀 그렇지 않아?”
  다행히도 그녀는 공용어 말장난을 이해했다.
  “뭐 어때. 엘프어로는 아무 의미도 없잖아―.”
  약간 어눌하게 씨익 웃는 그녀에게 인시아도 마주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난 인시아. 따뜻한 숲의 인시아야.”
  “인시아, 인시아…예쁜 이름이다. 성도 예쁘네―따뜻한 숲이라니, 고향이 정말 따뜻한 곳인가 봐?”
  “뭐, 푸른 들판은 전체적으로 왕국보단 따뜻한 편이니까.”



  새 학기였다. 인시아가 사는 이 변방의 소도시는 굉장히 소박하고 평범한 곳이다. 도시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대학을 제외하면. 많은 공국들이 수도에 대학들을 집중시킨 것과 달리 왕국은 국토 전역에 걸쳐 대학이 띄엄띄엄 위치하고 있었다. 인시아와 엘렌이 다니는 이 대학은 주로 문학과 사회학 부분이 뛰어난 곳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덕분에 일부러 유학(왕국은 제국 못지 않게 넓어서 같은 나라 안이라도 배우기 위해 이동을 한다면 유학이라고 할 만 하다)을 오는 학생들이 제법 있었고, 별 특징이 없는 이 소도시의 수입 원천이 되고 있었다.
  인시아는 방금 전에 과 친구한테 편입생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우연인지 친구와 헤어지자마자 그 편입생을 만나게 되었다. 인시아는 느리게 수다를 떠는 그녀를 바라보며 새로이 알게된, 그리고 자주 만날 듯 한 인물에 대해 빠른 판단을 내렸다. 일단, 인종 차별주의자는 아닌 것 같았다. 가정교육을 잘못 받은 엘프는 이종족의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그 정도는 아닐 지라도 일반적으로 엘프들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이종족을 경계하는 게 보통이다. 에이리는 스스럼없이 다가와 좀 지나칠 정도로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어―? 저건 무슨 소리야?”
  “아, 이 동네 터줏대감인 늙은 구름고래야. 점심시간에 울어서 식사종 노릇을 해.”
  “아―(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우리 같이 점심 먹지 않을래―?”
  “음, 뭐, 좋아.”
  그녀는 다 큰 하플링을 번쩍 안아 들어올렸다. 인시아는 왓, 하고 약간 놀란 얼굴을 했지만 곧 그런 표정을 지웠다. 말에 탄 것처럼 태평스러운 표정으로 작은 여인은 키 큰 여인의 수다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에이리는 아기를 안은 것처럼 인시아를 약간 흔들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멈췄다.
  “아―아―그러니까―아, 그래. 식당이 어디야?”
  인시아가 방향을 가르쳐주자 그녀는 그 쪽으로 걸어가며 다른 얘길 꺼냈다.
  “얘, 넌 무슨 과 들어―?”
  “음, 왕국문학, 제국문학, 문화인류학, 기초생물학, 등등.”
  “와―, 나랑 비슷하다. 나도 왕제국문학(이 말을 듣고 인시아는 살짝 웃었다)이랑―, 인류학 듣는데.”
  “그리고? 아, 그러니까 전공이 뭐야?”
  그녀의 대답은 인시아를 다시 약간 놀라게 했다.
  “실용마법―.”
  호비트는 좀 다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어디까지 할 수 있어?”
  “음―, 일단 빛의 굴절은 못 해. 아―그런데 냉각은 좀 할 줄 알고, 가열도 할 줄 알아. 덕분에 요리할 때 되―게 편해. 하지만 더 익히고 싶진 않아. 이 이상 파고들었다 간―에―그러니까 뭔가―태워먹을 것 같아. 방전도 그래. 무서워. 아―하지만 역용(力用)은 많이 익혔어. 그건 꽤 잘해.”
  그녀는 자세를 바로잡아 인시아를 한쪽 팔로만 안은 다음, 건물의 구석을 자유로운 손으로 가리켰다. 먼지가 살짝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실례지만)무겁게 느껴졌는지 에이리는 얼른 다시 두 팔로 인시아를 안았다. 약간 휘청거렸기에 하플링은 그녀의 목에 팔을 두르고 메달려야 했다.
  “무음(無音)의 경지까지 이르렀구나.”
  에이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경지’라고 할 만한 정도는 아냐―. 무음은 의외로 쉬워. 무동(無動)이 어렵지. 무지하게 연습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상상력이 되―게 풍부해야 하거든.”
  그 때 에이리가 갑자기 멈춰 섰다. 안긴 채 에이리의 얼굴을 보고 있던 인시아는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엘프 하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봐, 편입생. 그거 실례잖아. 다 큰 하플링을 아기 취급하다니.”
  “에―그런가요? 아―생각을 못 했어요.”
  인시아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괜찮아 롬. 난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은 걸.”
  ‘롬’므란 페리레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벗이여, 보는 이가 불편하지 않겠는가. 그다지 품위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없으니 말일세.”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좀 많아 어른 노릇을 하는 롬이 전통적인 엘프식 화법을 섞으며 말할 땐 정말 정중히 부탁할 때뿐이었다. 그래서 인시아는 에이리에게 내려달라고 말했다. 롬은 에이리에게 몇 가지 주의를 준 다음 떠나갔다. 작은 여인이 키 큰 여인을 올려다보자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어머, 미안해―. 내가 생각 없이―”
  “아니, 아까 말했듯이 난 괜찮아. 자, 쫌만 더 가면 식당이야. 바로 저기니까 얼른 가자.”
  인시아는 팔을 쭉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녀는 언제 미안해했냐는 듯이 다시 어눌하지만 생글거리는 얼굴로 다시 다른 얘기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엘렌은 멍하니 식당 입구, 정확히 말하면 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기들이 먼저 식사를 마치고 가보겠다고 말했을 때도 그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보던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 보는 여인과 인시아가 같이 있었다. 엘렌은 그녀가 며칠 전에 새로 온 편입생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서로 무슨 자매라도 되는 것처럼, 두 사람은 롬에게 혼날 때까지 서로 부둥켜안은 채(에이리가 자세를 바로잡을 때 인시아가 목에 매달렸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다)사이 좋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 여인이 인시아를 내려놓은 후엔 그녀들은 서로의 손(이 아니라 손목이었지만 멀리 있었기에 엘렌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을 붙잡고 식당 쪽으로 다가왔다. 기껏해야 며칠 전에 처음 만났을 게 뻔한 데도 두 사람은 여전히 무슨 10년지기라도 되는 듯이 즐겁게 얘기를 나누며 식사를 받아 같은 탁자에 앉았다. 남자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여자들의 묘기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왠지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식어버린 그의 식사를 들고 쿵쿵거리며 그녀들이 앉아있는 탁자 쪽으로 향했다. 이 왕국의 소도시에서 듣기 힘든 힘찬 발소리에 인시아가 고개를 돌렸을 때 엘렌은 이미 그녀들의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여, 엘렌.”
  “‘여’라니 이….”
  엘렌은 말을 멈췄다. 그는 화를 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직전, 자신이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지 자신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흥분과 당황이 뒤섞인 그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고, 인시아는 지금 이게 뭐 하는 꼬라지냐고 묻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때 에이리가 이 짧은 대치를 끝냈다.
  “아―안녕하세요―. 인시아의 친구이신 가요?”
  엘렌은 그녀를 흘끔 보고 건성으로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하지만 막상 그러고 나니 시선을 어디다 둬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하릴없이 창 밖을 바라보며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음식을 입에 집어넣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던 인시아는 고개를 흔들더니 다시 에이리와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한창 그렇게 떠들면서(“어머 맛이 뭐 이래―?” “왕국 전통 음식이 다 그 꼴이지, 뭐….”)식사를 거의 다 끝낸 인시아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엘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에이리도 인시아의 시선을 좇아 엘렌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기―. 아까 걔는 누구야? 인시아 친구야?”
  “응. ‘엘렌’디아드 라니안샤. 착한 녀석이야.”
  “음―. 얼굴도 잘 생긴 것 같던데―.”
  인시아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었는데?”
  “그런가? 하긴―잘못 봤을 수도 있겠네. 흘끔 보고 말았으니까―. 그 후로 쭈―욱 딴 데만 보고 있더라. 원래 남의 시선을 부담스러워 해?”
  “아니. 나도 쟤가 저러는 거 처음 봐. 뭘 잘못 먹었나보지. 오늘 밥이 좀 그랬잖아.”
  “아하하―. 그럴 수도 있겠다―.”


  
  “후우….”
  쿵쿵거리며 걸어가던 엘렌은 발이 아프다는 걸 느끼고 멈춰 서서 한숨을 쉬었다. 그는 복도의 벽에 기대서 자신을 추스르려 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도 다 큰 엘프인지라 곧 이 상황을 설명할 하나의 단어를 떠올렸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말도 안 돼. 그는 가정 교육을 제대로 받은 엘프였기에 하플링인 인시아를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모범적인 엘프였고, 그런 단어가 지금 의미하는 바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젊은 대학생이었다. 아무리 완고한 집안에서 자라난 엘프라도 슬슬 전통적인 가치보다 자신의 신념, 혹은 그냥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시작하는 나이였고, 엘렌의 집안은 그렇게까지 완고한 곳도 아니었다. 안 돼. 정신차려 이 친구야. 그녀는 이종족이라고. 정상적인 엘프 여자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키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우린 달라. 시끄러. 안 될 건 또 뭐야? 젊은이의 열정은 신도 막지 못한 댔어. 신이라, 말 잘했다. 아이라사께서 자신의 아이가 이러는 걸 보면 무척 좋아하시겠구나. 할 줄 아는 게 그렇게 유치한 협박밖에 없냐, 너란 놈은. 걷지 않는 신이시여,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그는 자아 분열적인 혼란 속에서 고개를 떨군 채 자신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지금 확실한 것은 지금 그를 고민에 빠트린 게 유별나게 맛없었던 오늘 점심식사가 아니란 것뿐이었다.

  

  편입한 이래로 에이리는 인시아와 붙어 다니는 일이 잦았다. 다른 엘프들은 그 꼴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냥 반도막 꼬맹이 녀석이랑 생각 없는 편입생 놈이랑 성격이 맞아서 끼리끼리 어울리는구나 하며 그다지 신경 쓰진 않았다. 문제는 엘렌이었다.



  첫 번째 강의인 제국문학 시간이었다. 인시아와 에이리가 같이 앉아있는데, 엘프가 나타났다. 그는 인시아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여, 인시아. 좋은 아침.”
  “어, 그래.”
  에이리도 엘렌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 엘렌, 좋은 아침이에요―.”
  그런데 그녀가 밝게 인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엘렌은 그녀를 흘끔 보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봐, 엘렌? 사람 인사하는 거 안 들리….”
  “아, 교수님 오셨다.”
  그녀에게도 주의를 할애하라는 인시아의 요청마저 묵살한 엘렌은 왠지 꾸며낸 듯한 일상적인 얼굴로 강의를 하는 교수의 얼굴을 응시할 뿐이었다.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던 인시아도 어깨를 한 번 으쓱 하곤 강의에 주의를 기울였다. 약간 기가 죽은 에이리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다음은 점심 시간이었다. 식사를 받아온 인시아가 먼저 앉고, 에이리가 그 옆에 앉으려고 했다. 그 때, 갑자기 엘렌이 끼여들어서 두 사람 사이를 막아버렸다. 영문도 모르는 에이리는 또 당황했다. 그런데 성질 같아선 이미 한 소리 했을 인시아가 조용했다. 그녀는 단지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엘렌은 이번에도 에이리는 흘끔 보기만 하고 인시아와 대화를 했다. 인시아도 그 표정을 바꾸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그에게 응대를 해주었다.
  이런 식이었다. 붙임성 좋은 에이리는 여러 번 그에게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그는 항상 못 들은 척 하고 지나가 버렸다. 가끔 왠지 불편한 기분이 느껴져 에이리가 고개를 돌려보면 방금 전까지 노려보고 있었던 듯 엘렌이 절묘하게 외면하곤 했다. 불쌍한 에이리는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 그런 그의 기묘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젠가 저 특이한 엘프하고도 친해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아니, 친해져야한다는 의무감마저 느끼는 듯 했다. 인시아는 그런 그녀의 태도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엘렌의 태도는 명백히 누군가를 적대 할 때 나타나는 것이었다. 에이리도 이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여인은 키 큰 여인이 모르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인시아는 에이리와 대화하다가 틈이 나면 종종 엉뚱한 구석을 눈을 가늘게 뜬 채 바라보곤 했다. 오래 바라보진 않았으므로 에이리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엉뚱한 구석은 엘프 젊은이 하나가 몰래 숨어서 그녀들을 지켜보고 있는 장소였다. 다행히도 에이리는 그런 것까지 알아차릴 정도로 주의가 깊지 않은 것 같았다. 인시아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 다시 에이리와의 대화에 열중했다. 이따금씩 혀를 끌끌 차곤 했지만. 별 생각 없이 다시 그 구석을 바라보면 엘프의 그림자는 사라져있곤 했다. 그런 식으로 몇 날 며칠이 지나갔다.



  "후우…."
  한숨이 늘었군…이라고 생각하며 엘렌은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수도 없이 걸어본 길이었지만 엘렌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영 내키질 않았다. 멀리 보이는 하플링 전통의 동그란 집문이 지옥의 입구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으로 향하는 평화로운 오솔길은 도살장으로 가는 길 같았다. 엘렌은 스스로 점점 걷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심이야 한참 전에 내렸지만 막상 부딪히려 하니 결심 따위야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용기를 내 이 친구야. 그냥 넌 좀 별난 친구를 만나러 가고 있는 것 뿐이야. 하지만 몸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은 동그란 문이 커질수록 구체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그 문에 당도했고, 꽤 오랫동안 망설인 끝에 대문을 두드렸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응답도 없이 문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문틈으로 눈을 가늘게 뜬 호비트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나자 엘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아, 걷지 않는 신이시여….



  다음 날이었다. 에이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인시아와 함께 대학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래서―우리 아버지가 그 사기꾼을―.”
  갑자기 에이리는 말을 멈추고 뭔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인시아는 그녀의 시선을 좇아 보았다. 엘프 꼬마 하나가 얼쩡거리고 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를 따라 온 모양이었다. 에이리는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꼬마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누굴 찾고 있니―?”
  “어?”
  꼬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탄성을 질렀다.
  “와! 어떻게 하면 누나처럼 키가 커져요?”
  “아―.”
  165센티미터 짜리 여인이 다시 한 번 웃으며 쭈그리고 앉아 아이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그녀가 뭔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꼬마는 또 다른 질문을 했다.
  “어? 누나는 눈이 왜 그렇게 생겼어요?”
  “아―.”
  그녀는 약간 흠칫 했지만 다시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천천히 설명했다.
  “응―. 그건 누나의 엄마는―엘프였는데, 아빠는 인간이었거든. 그래서 얼굴도 엘프랑 좀 다르고―키도 큰 거야. 알았니?”
  “어? 엘프가 왜 인간이랑 결혼한 거예요?”
  “아―.”
  그녀는 생각을 좀 하다가 다시 말했다.
  “나도 몰라―. 우리 엄마 아빠는 내가 태어나자마자―돌아가셨거든. 그래서 물어볼 수가 없었어―.”
  “아, 그렇구나.”
  “램!”
  갑자기 들려온 외침에 인시아와 에이리 모두 고개를 돌렸다. 롬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저기, 미안, 내 동생인데, 늦둥이라 버릇이 좀 없는데, 그러니까 뭐 혹시 무례한 질문 같은 건 안 했….”
  “형, 이 누나, 엄마는 엘프고 아빠는 인간이래~.”
  롬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에이리에게 사과를 하고는 램의 손을 붙잡은 채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허둥지둥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작은 소리로 웃으며 바라보던 에이리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거짓말이야.”
  인시아가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거짓말이야….”
  에이리는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어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았다. 그냥 무감정했다. 인시아는 차라리 슬픈 목소리가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난 그냥 고아원에 버려져있었어…. 엄마가 인간인 건지, 아빠가 인간인 건지, 아니면 두 분 다 하프 엘프인 건지도 몰라. 그러니까….”
  “알고 있었어.”
  키 큰 여인이 작은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알고 있었어. 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인시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얘기했었지? 난 문화인류학을 전공했다고. 수업시간에 배우진 않았지만, 그 쪽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많이 알아봤거든. 그래서 네가 나에게 굉장히 친근하게 다가왔을 때부터…알고 있었어.”
  하프 엘프, 공용어로는 반(半)엘프라 불리는 이들은 참 특이한 종족이다. 아종도 아닌 이종끼린 혼혈이 생기지 않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인간과 엘프는 그 유일한 예외다(사실, 하플링과 드워프에게서 상당한 생물학적 유사성이 발견되었기에 학자들은 조심스럽게 그들의 혼혈이 존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추정했었다. 그러나 유사이래 그 두 종족이 결합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모든 드워프가 멸족한 지금 확인할 길도 없어졌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엘프는 엘프처럼 길고 뾰족한 귀와 인간 같은 얼굴, 그리고 엘프보단 크지만 인간보다는 작은 키가 특징이다. 하프 엘프들의 불량함이나 반사회성이 후천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논란이 많지만(교양 있는 사람들은 전자를 정설로 받아들인다), 분명히 하프 엘프에게만 자주 나타나는 정신적 증상이 하나 있다. 주로 고아로 자라난 하프 엘프들에게 자주 발견되며, 서글프게도 거의 모든 하프 엘프가 고아이기에 찾아보기 흔한 그 증상은 바로 어린아이에 대한 극대화된(집착에 가까운)보호성향이다. 윤리니 자기희생이니 하는 것들과는 기초정치학과 북극곰만큼이나 상관없을 것 같았던 하프 엘프 건달이 위기에 빠진 어린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일은 흔하다. 학자들은 왜 하프 엘프에게만 이런 것이 자주 나타나는 지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대충 그 원인은 유아시절의 애정결핍에 대한 보상심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하프 엘프도 다른 키 큰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하플링을 무의식적으로 어린애 취급하는 버릇을 갖고 있다. 어느 새 에이리의 목소리는 평소의 어눌한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막 안아들고 그래도―불쾌해하지 않았던 거야―?”
  인시아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 아차 했다. 방금 그녀는 에이리를 동정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작은 여인의 표정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있다는 듯 가벼웠다. 하지만 다시 말을 꺼낸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약간의 긴장이 묻어 났다.
  “하지만 난 하프 엘프의 심리를 알고 있었으니까 이해한 것뿐이지, 특별히 동정한 건 아니―.”
  “아니야, 인시아―. 부정하지 않아도 돼. 난 상관없어. 동정을 혐오하는 사람도 있지만―그런 사람들은 동정을 받아들일 아량조차―없는 거야. 가식적인 동정은 있을 수 있어. 하지만―악의가 담긴 동정은 없어. 최소한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건, 그래도 나라는 사람에게 희망이 있단 뜻이거든. 네가 날 동정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준 것만으로도―고마워. 네가 날 여태껏 순전히―동정심만으로 대했다 해도―난 상관없어. 인시아―너한테는 아닐지 몰라도―나한테는 네가 소중한―(그녀는 얼굴을 약간 붉혔다.)친구―야.”
  인시아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엘렌이 저런 얘길 늘어놓았다면 그녀는 당연히 그를(물론 악의 없이)조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이리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봐, 이리.”
  작은 여인이 손을 뻗어 키 큰 여인의 허리 위에 얹어 놓았다. 어깨 까진 팔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평소처럼 굴기 위해 약간 어색한 장난기를 섞어 말했다.
  “내가 잘난 팔방미인이긴 하지만 못 하는 게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일순간의 감정이 아닌 정을 꾸며내는 거야.”
  하프 엘프는 그런 호비트를 내려보다가 이리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러자 작은 여인이 공중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팔에 역용술(術)이 가해지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인시아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하플링이 눈 높이까지 떠오르자 에이리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잠시 후 키 큰 여인이 작은 여인을 내려놓자 인시아가 말했다.
  “그럼 먼저 가 봐. 난 여기서 누굴 좀 만나야 하거든.”
  “응, 그래―. 나중에 봐―”
  에이리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먼저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충분히 멀어지자 인시아는 구석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이런 쓸모 없는 녀석, 얼른 기어 나오지 못해?!”
  엘렌이 쭈뼛거리며 그늘 진 곳에서 걸어나왔다.
  “이런 멍청이 같으니. 도대체 며칠 전부터 내가 만들어 준 기회를 몇 개나 낭비하는 거야? 그러고도 네가 사나이야? 앙?”
  엘프가 우물쭈물 거리며 뭐라고 웅얼거렸지만 하플링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연발 석궁처럼 말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이게 마지막이니까 잘 들어둬. 내가 걔네 집에 저녁 식사하러 가기로 약속을 했어. 친구 하나 끌고 와도 된다고 허락 받았거든? 내가 이리 모르게 걔의 부모님들이랑 이미 얘길 다 했어. 딸에게 푹 빠져있는 가정 교육 제대로 받은 엘프 대학생이 하나 있다고 하니까 뛸 듯이 좋아하시더라. 하프 엘프라서 시집가기 힘들거라고 걱정하고 있었나봐. 네 칭찬을 침이 마르도록 했으니까 나중에 한 턱 쏘라고. 중간에 나랑 두 어르신은 은근슬쩍 빠질 테니까, 그 때 잘해봐. 이번에도 놓치면 어젯밤보다 더한 잔소리를 들을 줄 알아.”
  멍 하니 서 있던 엘렌은 인시아의 말 중 이상한 것이 끼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잠깐. 에이리는 고아라며? 부모님?”
  “당연히 양부모지. 그 정도는 알아서 좀 생각해라. 그 분들 성함은….”
  인시아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생각이 나질 않네. 뭐, 직접 만나보면 통성명할 때 알게 될 테니까 상관없겠지. 아, 그러고 보니 너 에이리의 성이 뭔지 아냐?”
  “당연…. 잠깐.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인시아가 키득거렸다.
  “뭐, 그것도 가보면 알게 될 것이야.”
  “뭐야 인시아~! 그 정도는 그냥 가르쳐 줘!”
  호비트가 혀를 쏙 내밀었다.
  “싫―지롱. 내가 요 며칠간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순순히 다 가르쳐주는 건 내 심통이 용납을 못 하지.”
  엘렌이 질렸다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새침하게(엘프는 남자들도 이런 형용사가 어울릴 때가 있다)고개를 홱 돌렸다.
  “뭐, 됐어. 내가 직접 물어보면 되지.”
  “무슨 소리야? 시간 없어. 오늘 저녁이거든.”
  “뭐뭐뭐뭐뭣?!”
  “응. 그러니까 너 지금 당장 가서 준비해야돼. 빨랑 가서 옷 갈아입고 느끼한 대사 준비해. 그 다음 우리 집으로 와. 내가 걔네 집으로 데려다 줄 테니까.”
  “그, 그럼 연습은….”
  “연습 좋아한다. 어젯밤엔 연습 안 했냐? 그런데도 결국 넌 걔한테 말도 못 걸었잖아?! 내가 어제 그 야심한 시각에 너랑 그런 삽질로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속 터져. 얼른 너네 집으로 뛰어 가! 시간 없다고! 퍼뜩!”
  안 그래도 말을 정신없이 빠르게 늘어놓고 있던 인시아는 의도적으로 마지막 그리고 크게 고함치며 말했기 때문에 엘렌은 채찍 한 대 맞은 말처럼 펄쩍거리며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어울리지 않게 발까지 꼬여가며 달리는 엘프를 보며 하플링은 속으로 킬킬거리며 웃었다. 문득 작은 여인은 엘프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와 친하게 지내는 하플링에게 질투를 느낀 일은 놀림거리로 30년쯤 우려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녀가 순전히 재미를 위해 일부러 빼놓고 말하지 않은 게 몇 가지 더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에이리의 부모님이 원하는 것은 ‘빠른 결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엘렌을 얼마든지 지원해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긴 그건 에이리가 바라고 있는 것 보다 낫긴 하다(물론 그녀는 지금 자신을 좋아하는 사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아이, 그러니까 ‘자기 아기’니까.



  “안녕하신지요. 저는 용천 탐월성입니다. 이 누추한 교회의 신부이지요. 산캐스롤리의 가호를, 그리고 언제나 희망을 스스로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하은 탐월성이랍니다. 이 사람의 아내 되면서 동시에 이 교회의 두 번째 신부랍니다. 이쪽은 저희 둘째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로 탐월성이라고 합니다. 에이리 누나의 동생이랍니다. 그리고 얘는…”
  하은은 품에 들고있는 포대기를 살짝 기울였다. 의외로 인간 아기에 비해 그다지 크지 않은 아기 우란의 머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작은 우란은 색색거리며 잠들어있었다.
  “우리 막둥이인 내리미 탐월성이랍니다. 귀엽죠?”
  아, 그리고 인시아가 빼먹은 거 하나 더. 에이리의 양부모와 가족들은 우란이었고, 동시에 산캐스롤리의 교회에서 살고있는 성직자들이었다.
  엘렌은 입을 벌린 채 최소한 키가 2미터는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에이리의 가족들을 둘러보느라 인사를 조금 늦게 하고 말았다.
  “아, 당내 평안하십니까? 소인은 ‘엘렌’디아드 라니안샤 되옵니다.”
  에이리가 그의 말투를 듣고 빙긋 웃었다.
  “에이―, 엘렌, 전통 엘프 화법으로 안 해도 되요―. 이쪽이 부담되거든요. 아, 이미 알겠지만―, 난 에이리 탐월성이에요. 줄여서―이리라고 불러주세요. 정식으로 인사하게 돼서 기뻐요, 엘렌.”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려 펴졌다. 동네 터줏대감인 구름고래가 저녁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아, 탐월성이란 성은 직접 지으신 거라고요?”
  “예, 우란의 전통 중 하나로 입양한 아들에겐 성을 주지 않습니다. 인구수가 적으니 자연히 가문의 숫자도 적기 때문에 가문이 하나라도 더 늘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생겨난 전통입니다. 오래된 가문들의 이름엔 별 의미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런 식으로 새로 생겨난 가문의 이름은 우란 문자로 해독하면 좋은 의미가 있는 것이 많습니다. 전 단순히 산캐스롤리의 사제들 사이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런 성을 지었습니다만.”
  식사시간. 용천의 과거가 펼쳐지고 있었다. 하프 엘프와는 달리 아기 우란은 좀처럼 버려지는 경우가 없지만, 어쨌든 그 보기 힘든 우란 고아였던 그는 에이리와 마찬가지로 산캐스롤리를 섬기는 우란 가정에 입양되었다고 한다. 어린아이를 희망의 상징으로 여겨 신성시하는 산캐스롤리 교단의 교리상, 그런 일이 흔하단다. 어느 샌가 대화의 주제는 일상적인 생활로 넘어갔다.
  “…결과적으로 ‘또’ 다 큰 호비트 숙녀를 품에 안고 다녔다는 거냐?”
  “에헤헤, 깜빡했어요―.”
  인시아는 역시 우란은 다르다고 생각하며 반찬을 집어 입에 집어넣었다. 이종족에게 하플링이 아니라 호비트라고 불리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반대편에서는 엘렌이 젓가락을 들고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은이 일찍이 포크를 쓰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엘렌은 젓가락을 우습게 보고 이를 거절했다. 결과적으로 가련한 엘프는 점잖지 못하게 음식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 마침내 엘렌은 인시아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인시아는 그를 차갑게 외면했다. 그리고 일은 엘렌의 돌발적인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플링의 기대대로 진행되었다.
  “어―? 엘렌, 젓가락 처음 써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저….”
  인시아는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용천씨, 지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요?”
  “응? 서고 쪽인데…. 실례하겠습니다. 잠깐 확인하고 오도록 하지요.”
  첫 번째 신부가 성큼성큼 걸어서 식당 밖으로 나갔다. 에이리는 엘렌에게 친절하게 젓가락질하는 법을 설명하느라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1단계 완료. 이제는 죄 없는 아기 우란을 꼬집을 시간이다.
  “어? 어머니, 내리가 울어요(이리와 내리라. 인시아가 중얼거렸다).”
  “이런,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나? 잠깐 욕실로 데려가자꾸나.”
  “저도 도와드릴게요.”
  2단계 완료. 너무나도 간단하고 부자연스러운 퇴장에 엘렌은 뜨악한 표정을 짓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에이리의 강의를 열심히 듣고있다는 듯한 얼굴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 동안 엘프는 다른 사람들의 퇴장 동태를 살피느라 에이리가 하는 말을 거의 못 들었고, 따라서 그의 젓가락질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기에 하프 엘프는 오기가 생겨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에이리가 엘렌의 손을 붙잡고 법석을 떠는 동안(어찌나 열중했는지 그녀는 엘렌의 얼굴이 벌겋게 달궈진 것도 몰랐다)우란들과 하플링 하나는 서로 미소를 띤 채 눈빛을 나누며 잽싸게 식당에서 빠져 나왔다. 그들이 향한 방안에는 용천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소, 부인?”
  “여보, 성공이에요.”
  사실 성공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썰렁한 작전이었지만 용천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 그럼 저 아이들이 희망을 찾아내길 바랍시다.”
  그 때 인시아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저기 신부님, 제가 다 꾸며놓고 지금 와서 이런 이야기 하긴 뭐하지만, 엘렌이 마음에 드시나요?”
  하은이 우란 특유의 커다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예의바른 젊은이 같더군요. 불안하신 가요?”
  남에게 잘못된 추천을 했을까봐 걱정 되냐는 물음을 그녀는 짤막하게 줄여서 표현했다.
  “음, 전 남이지만, 신부님들에겐 에이리는 딸이고, 그러니까…음….”
  인시아가 말꼬리를 흐리자 용천이 인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받은 느낌으론 우리 딸아이와 좋은 짝이 될 것 같았습니다. 설령 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 아이에게 친구가 더 생기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걱정 마세요.”
  우란들은 미리 준비한 듯한 방석을 깔고 앉았다. 유로는 인시아를 한 번 바라보더니 아기를 싼 포대를 내밀었다. 인시아는 아기를 받아들고 살짝 양옆으로 흔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캐스롤리를 상징하는 달과 별의 모양을 한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내부장식이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희망을 찾게 하는 신의 신전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우란이 하프 엘프를 양녀로 입양해도 그저 다음세대를 위한 희망인 자녀를 가졌음을 축하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시에 하프 엘프와 엘프가 결혼식을 올려도 하나의 가정이 새로운 희망을 품고 탄생했음을 순수한 환희를 느끼며 축복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 여인은 팔을 뻗어 이제는 울음을 그친 갓난아기의 볼을 다독이며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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