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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피와 얼음의 여왕

2016.05.31 23:1505.31

0. 
여자가 언제부터 그의 삶에 들어왔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사랑에 빠지게 된 그 사람을 처음 만난 순간은 평생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정신차려 보니 이미 곁에 그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언제나, 그녀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노력했다. 진심으로 노력했다.
그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1.
전화기가 울린다. 그는 흠칫 놀란다. 불안해진다. 그리고 놀란 것을 그녀에게 들켰을까 더 불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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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문자 메시지를 위로 넘긴다.

- 일부품목 제외: 제품번호 XE325947 / KH12843 / F6M87954 / VO 라인 전상품

수신거부 008-1800-6037

그는 무작위로 나열된 것처럼 보이는 알파벳과 숫자들을 암기한다. 눈을 감고 재빨리 머릿속에서 되새겨본다. 제대로 외웠음을 확인하고 메시지를 삭제한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요?”
“아무 것도 아냐.”
그는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며 무뚝뚝하게 내뱉는다.
“뭔데 그래요? 나도 보여줘요.”
여자가 장난스럽게 몸을 기대며 핸드폰 화면을 곁눈질한다. 
“뭐 하는 거야!”
그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여자를 밀어낸다. 여자는 균형을 잃고 땅에 넘어진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본다.

그는 당황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좋을 것이 없다. 무엇보다 그는 여자를 그렇게까지 세게 밀어낼 생각이 아니었다. 
매번 이렇게 쓸데없이 화를 내고, 매번 여자를 괴롭히고, 매번 이렇게… 속으로 자책하며 그는 여자에게 손을 내민다.
“미안해요.”
그가 사과하기 전에 여자가 먼저 말한다. 그가 내민 손을 얌전히 잡고 일어선다.
“미안해요. 그냥 장난이었어요. 화내지 마세요.”
그가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가 다시 사과한다.
여자가 사과했기 때문에, 잘못한 것은 그 자신인데 여자가 이유 없이 먼저 사과했기 때문에 그는 울컥 화가 솟는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잖아!”
그는 다시 고함친다.
“쓸데없는 장난을 안 치면 괜찮았을 거 아냐!”
“미안해요.”
여자가 당황하며 다시 사과한다.
여자가 사과했기 때문에, 여자가 어쩔 줄 모르기 때문에, 그는 더욱 화가 난다. 다시 고함치려다가 그는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말을 멈춘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일부러 심술을 부린 내가 나쁘다고, 모두 내 탓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자를 안아주고 싶다. 달래주고 싶다.
그러나 그는 여자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살그머니 들어올렸던 손을 힘겹게 억지로 다시 내린다.
“가.”
그는 일어선다. 눈물 고인 얼굴의 여자를 벤치에 버려두고 성큼성큼 혼자 걷기 시작한다.
몇 걸음 걷다가 견딜 수 없어서 돌아본다. 여자는 그의 뒤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따라오다가 화들짝 놀라서 멈춘다. 버려진 강아지처럼, 혹은 야단맞은 어린 아이처럼 애처롭게 그를 바라본다.
그는 견디지 못한다. 다가가서 여자의 손을 잡는다.
“화내서 미안해.”
그가 속삭인다.
여자는 여전히 눈물 고인 얼굴로 미소 짓는다. 여자의 미소는 아름답다. 여자는 언제나 그렇게 미소 짓는 얼굴로 그를 용서한다. 그는 눈물로 촉촉해진 여자의 부드러운 볼을 양손으로 감싸고 여자에게 입맞춘다.

2.
XE325947-KH12843 지점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예상대로 하얀 승합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번호판을 확인한다. F6M879. 승합차 뒤로 돌아가서 뒷문을 열고 짐칸을 확인한다. VO 제제가 든 상자. 54개가 맞는지 그는 일일이 세어본다.
상자의 개수가 맞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문을 닫는다. 운전석에 오른다. 시동을 걸기 전에 그는 기도한다. 
- 세상을 정화할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하나이다. 이 세계를 바꾸려는 위대하신 뜻에 조그만 힘이라도 보탤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하나이다.
- 계획을 실행할 용기를 주소서. 행동할 힘을 주소서. 세상의 더러움과 악을 모두 제거할 힘을 주소서. 세상을 구원할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그는 덧붙인다.
- 그녀를 구원할 용기를 주소서.

3.
피.
형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주위의 땅을 뒤덮었다. 피는 보도블럭 사이의 고랑을 타고 네모나게 꺾인 선을 그리며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그는 눈이 아직 다 녹지 않은 진흙과 검댕투성이의 차가운 땅에 앉아서 형의 피투성이 얼굴을 감싸 안은 채 형의 피가 보도블럭을 따라 네모나게 흘러가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형에게 총을 쏜 범인은 그와 동갑이었다. 아직 얼굴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보송보송한 어린애였다. 그 어린애가 그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는 총구 너머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죽는구나, 라고 담담하게 생각했다. 총을 든 어린애가 뭔가 외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비웃음과 경멸과 분노가 가득한 어린애의 얼굴을 보면서 대체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째서 저런 얼굴로 형을 죽여야만 했을까, 하고 그는 여전히 무심하게 궁금해했다. 무섭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총을 들고 있던 어린애의 머리가 경찰의 총에 맞았을 때도, 형을 쏘아 죽인 범인의 피와 뇌수가 그의 얼굴에 튀었을 때도, 형의 시신과 형을 죽인 범인의 시신이 나란히 실린 구급차에 함께 타고 갈 때도 그 무감각은 그의 온몸을 휘감고 머릿속에 커다란 얼음 덩이처럼 박혀 있었다. 형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 온 구급대원들이 그의 팔에서 형을 빼내려 했을 때, 이미 죽어버린 형에게서 그를 떼어내려 했을 때, 단지 그 때만 그는 소리 지르며 온 몸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그렇게 저항하는 순간조차도 단단한 빙하기의 얼음과 같은 두껍고 차가운 무감각은 그의 마음과 정신을 온전히 감싸 그를 어딘가 투명한 벽 너머에 가둬두고 있었다. 그 벽 너머에서 그는 죽은 형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광란하는 자기 자신을, 그리고 그런 자신을 진정시켜 떼어내고 형과 형을 죽인 범인의 시신을 검고 긴 천으로 덮어 하얀 침대 위에 올려놓고 구급차에 실어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현실은, 세상은 그에게서 멀어졌고, 그는 더 이상 세상의 일부가 아니었다.
쓰러져 있던 형의 얼굴, 형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 그에게 총구를 겨누었던 어린애의 경멸과 분노에 가득한 얼굴이 시시때때로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면 그는 한 순간 불에 타는 듯한 고통에 잠겼다가 다시 얼음 같은 무감각 속으로 돌아오곤 했다. 견딜 수 없이 괴롭지만 그를 현실과 직접 연결해주는 고통이 더 나은지, 아니면 고통을 포함해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평온한 무감각이 더 나은지, 그는 결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형의 얼굴, 피, 총구와 죽음의 기억은 밤낮 없이 불시에 그를 덮쳤고,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 속에 너덜너덜해진 채로 다시 얼음장 같은 무감각 속에 남겨졌다. 극단의 고통과 극단의 무감각, 그의 삶은 그 두 가지 극단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중간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약을 받아들였다. 약이 혈류를 휘감아 뇌에 퍼질 때만 그는 얼음 같은 무감각과 타는 듯한 고통의 중간 어딘가, 보통 사람들이 보통의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그가 아직 보통의 사람이었을 때 보통의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견딜 만한 즐거움과 소소한 기쁨과 조그만 슬픔과 사소한 짜증과 별 것 아닌 분노와 달착지근한 행복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 감각들이 모두 약이 만들어낸 환영이며 가짜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약이 가져다 주는 감각과 감정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는 쪽이 정확했다. 형의 얼굴과 피의 기억이 덮쳐올 때의 심장이 찢기는 듯한 고통과 그런 고통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 그리고 분노와 고통이 지나간 뒤의 탈진해버린, 슬프고 지친 무감각에 비하면 가짜라도 평범한 감정 쪽이 백 배 나았다. 
어머니는 떠나갔다. 아버지는 슬퍼했다.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형의 피투성이 얼굴을 품에 안았던 것은 그였고, 그 때 부모는 그의 곁에 없었다. 그 순간 그 곳에서 그의 곁에 없었던 사람들은, 비록 혈육이라 해도,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약에 탐닉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에게 약을 공급해주던 그의 친구, 혹은 그가 친구라고 믿고 있었던 범죄자의 여전히 피 흘리는 시신 곁에서 그는 자신을 겨눈 총구를 바라보는 순간을 맞이하였다. 그래 결국 또 이렇게, 라고 그는 생각했다. 
유명한 우범지대였고, 경찰은 그가 어렸을 때 기억하던 것만큼 빨리 오지 않았다. 총알이 자신의 어깨를 관통하는 감각까지는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 뒤에 그는 정신을 잃었다.

4.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깨어났다. 병원이었다. 모든 것이 얼음장처럼 희었다.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하얗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옥에서 얼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가 다른 무엇보다 먼저 그 병원을, 흰색의 천장과 푸르스름할 정도로 희었던 병실을 떠올린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구온난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거야. 자연이 스스로 순환하는 건강한 상태였을 때로. 그러면 인간도 그 안에서 건강하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어.”
그는 물론 처음부터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그 병실이 떠올랐기 때문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해수면이 상승하면 바닷가에 있는 도시들은 살아남을 수 없게 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이상기온과 온난화로 인해서 물이 말라붙게 되지. 간단히 말하면 먹을 수 있는 민물은 줄어들고 짠물인 바닷물만 넘쳐나게 되는 거야. 벌써 그렇게 되어가고 있잖아? 그러니까 도로 얼려야 해.” 
그는 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얼음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았으므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닷물을 도로 얼려야 하는 거지. 빙산과 빙하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민물도 원래대로 되돌아올 거야. 얼음이 그래서 중요한 거야. 기후를 조절하고 지구의 상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또 왜 중요한지 알아?”
알지 못했으므로 그는 고개를 저었다. 
“보통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사람들은 폭발물을 터뜨리지. 그러면 기간시설이 불에 타게 돼. 다른 일반 사람들에게 공포심만 심어줄 뿐, 실제로 살아나가는 데 필요한 시설과 장비들은 전부 불타버리게 된다는 거야. 그게 얼마나 낭비냔 말이야. 순식간에 얼렸다가 순식간에 해동시키면 장비들을 다시 쓸 수 있어. 겨울에 눈에 덮였던 건물은 봄이 돼서 눈이 녹으면 다시 들어가 살 수 있지만 불타버린 건물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게 되잖아. 같은 이치야.”
눈과 얼음에 덮인, 얼어붙은 건물… 이라고 되뇌면서 그는 병실에서 바라보았던 하얀 천장을 생각했다.
“생명과 회복으로 가는 첫 걸음은 바로 얼음이야. 겨울이 지나간 뒤에 봄이 온다고들 하잖아. 그게 왜 그렇겠어? 얼었다 녹은 뒤엔 모든 것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거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야. 파괴가 아니고 부활. 새롭게 태어나는 것, 건강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 우리 인류뿐만이 아니고 지구 전체를 위해서 말이야.”
지금은 그의 안내자가 된 같은 방 동료는 격려하듯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잘 생각해 봐. 파괴가 아닌 상생과 부활이야. 그리고 여기에 지구의 미래가 걸려 있어.”
그 때의 그는 물론 지구의 미래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희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보였던 병실의 벽과 형광등이 차갑게 빛나던 하얀 천장의 기억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가 전달자를 만나는 데 동의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종교와 과학은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과학은 도구일 뿐이고, 종교는 행동입니다. 좋은 도구가 있으면 사람은 훨씬 더 효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죠.”
그는 전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달자는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해 드리죠. 종교적인 사고방식이란 우리가 사는 이 세계, 물리적인 현실 세계보다 더 높은 차원의, 더 숭고하고 더 아름답고 더 완벽한 세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만 가지고 종교가 성립되지는 않아요. 그렇게 믿을 뿐이라면 그저 종교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일 뿐이죠.”
전달자는 한 번 말을 끊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이 설명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부분까지는 알아들었기 때문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종교가 성립하려면 그 고차원의 이상적인 세계가 우리의 현실에 어떤 식으로든 직접 영향을 끼친다고 믿어야만 해요. 그리고 직접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우리도 그 아름답고 숭고하고 이상적인 세계에 더 가까워지려 한다는 마음을 행동으로써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믿음과 행동, 이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하고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만 종교가 성립합니다.”
전달자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부드러웠지만 눈은 빛나고 있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종교가 아니라 그저 이론이고 신학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행동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윤리일 뿐, 어쩌면 숭고함에 대한 이상이 없는 맹목일 뿐이고요. 믿음과 행동을 결합시키고 신앙과 과학을 결합시킬 때 세상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잘못으로 지구가 죽어가는 지금 현실에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없습니다.”
일어서면서 전달자는 그에게 물었다.
“다음 주 같은 시간에, 어떻습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5.
변호인 접견의 이점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횟수와 시간에 제약이 덜할뿐더러, 무엇보다도 대화의 내용이 녹음되지 않았다. 천장 구석에 붙은 감시카메라는 작동하고 있었지만, 그가 자신의 변호인과 어떤 대화를 하든지 그 내용은 법으로 보호받았으므로 녹취나 감청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전달자는 책상 위에 그의 사건 파일과 법적인 서류들을 늘어놓은 뒤에 죽어가는 지구와 인간의 죄악과 얼음을 통한 부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잠자코 들었다. 자신이 어째서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지 그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 것은 전달자가 그에게 얼음에 대해서 물었을 때였다.
“얼음, 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무엇이 떠오르나요?”
전달자는 마치 심리상담을 하듯이 그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어떤 이미지인지 얘기해 보세요. 뭐든지 좋아요.”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대로 더듬더듬 묘사했다. 하얗고 푸르스름하던 병실의 벽과 희고 깨끗했던 침대와 그리고 차갑고 흰 형광등 불빛이 빛나던 하얀 천장과…
“자 그럼 이제 질문을 바꿔서, 얼음을 생각하면 어째서 그 방이 떠오르죠?”
그는 말문이 막혔다. 전달자는 그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다시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봅시다. 그 방을 떠올리면 어떤 느낌이 들죠? 그 방은 추웠나요? 차가운 곳이었나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병실은 춥지 않았다. 따뜻하지도 않았다. 오직 병원에서만 가능한, 아무런 특징도 없는 소독된 온도였다.
“그 방을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들죠? 겁이 났나요? 싫었어요? 나가고 싶었나요?”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떤 기분이었죠? 좋았나요? 편안하고 따뜻했나요?”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전달자는 기다렸다.
한참 뒤에야 그는 머릿속에서 정확한 단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안도감.
그 방에서 그가 느꼈던 것은 안도감이었다.
“어떤 안도감이죠?”
전달자가 집요하게 물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인가요?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안도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병실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하얀 천장이었다. 푸르스름한 흰 벽과 침대 옆의 각종 의료기기들을 보고 그는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오른팔에 뭔가 걸렸다. 그의 오른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수갑은 침대에 연결되어 그는 팔을 약간 뻗거나 어느 정도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침대에서 일어나거나 병실을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다. 
그 수갑을 보고 그는 안도했다. 
“어째서죠?”
전달자가 다시 물었다.
“체포되었으니 다시 범죄에 말려들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했나요?”
“체포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안도했어요.”
그가 대답했다.
“이제 처벌을 받게 될 테니까.”
“그게 어째서 안도할 이유가 되나요?”
전달자가 물었다.
그는 품에 감싸 안았던 형의 피투성이 얼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그를 쳐다보던 형의 눈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울기 시작했다.

전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법률 서류 위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형은 … 죽었는데… 나는… 살았는데… 형 얼굴에… 피가… 손에… 죽었… 형… 피…. 피가….”
그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통곡하며 더듬더듬 내뱉었다. 전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존 자체에 죄책감을 갖는 것은 트라우마를 겪은 피해자들에게 흔히 보이는 현상입니다.”
전달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안도감을 느꼈다고 했죠? 그 느낌에 집중하세요. 얼음이 당신에게 안도감을 의미한다면 그 방향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세상이 다시 의미 있는 곳이 되고 삶이 살아갈 만한 것이 되도록 행동을 하면 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전달자는 그가 통곡을 멈추고 흐느낌을 그칠 때까지 참을성 있게 말없이 마주 앉아서 지켜주었다.

6.
석방된 후에 그는 단체에서 운영하는 기숙사에 머무르며 낮에는 기도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까지 열심히 뭔가를 공부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얼음과 냉기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게 되었다. 
얼음을 얼리거나 녹이는 일,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 그리고 그런 일에 필요한 화학약품을 다루는 방법에 관련된 공식적인 자격증까지 몇 가지나 취득한 뒤에 그는 단체에서 지시하는 대로 물류회사에 들어가서 대형 운송트럭을 몰게 되었다. 그런 지시를 내리는 사람, 혹은 그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그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지시는 핸드폰의 메신저 프로그램을 통해 문자로 전달되었다. 전달자 혹은 안내자가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양쪽 모두 부인했다. 그리고 누가 지시하는지, 단체를 이루는 사람들과 운영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런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며 본래 어떤 사람들인지, 그가 알지 못하는 쪽이 단체와 그 자신을 위해 더 나은 거라고 전달자도 안내자도 말했기 때문에, 그도 수긍하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모든 지시를 성실하게 이행했다. 주저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다. 망설이거나 의심하기에 그는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었고, 너무 간절하게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 
세상은 얼음으로 뒤덮여야 했고, 악한 인간들은 흰 눈과 맑은 얼음으로 정화되어 사라져야 했다. 그런 뒤에야 그와 모든 사람들은, 모든 사람과 모든 동물들은, 그리고 모든 동물과 모든 생물들은 다시 건강하고 조화롭게 존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자연의 뜻이었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인간이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저 이상적이고 완벽한 세계가 원하는 진리였다. 유일하고 완전한 진리였다.
그는 필요하다면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7. 
그러나 그녀는?
그녀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녀도 그 유일하고 완전한 진리의 일부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는 오랫동안 고민했다. 전달자는 그의 질문에 대해 한 마디로 대답했다.
“이제는 시간이 없습니다.”
날짜는 정해졌고,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끼어든다면 그녀는 신뢰할 수 없는 예측 불가능의 변수일 뿐이었다. 최선의 경우라도 계획을 함께 실행할 정도의 교육을 하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모든 것을 망칠 수도 있었다.
“이해합니다. 괴롭겠죠. 그러나 그녀를 위해서라도 놓아주어야 합니다.”
전달자는 얼굴에 더없이 안타까운 표정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놓아주려 해도 그녀는 놓아지지 않았다.
그가 이유 없이 화를 내도 그녀는 먼저 사과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니 서로를 위해 헤어져야 한다고 차분하게 설명하면 그녀는 커다란 눈에 눈물부터 글썽거렸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니 곁에 있게만 해 달라고 그녀는 울었다. 그 눈물을 보면 그는 차마 더 냉정해질 수 없었다.
“때려.”
안내자는 간단하게 말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는 안내자를 때릴 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에게는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작전을 바꾸어 그녀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아침 저녁으로 불시에 그녀의 집에 나타났고, 그녀가 집에 없으면 올 때까지 기다리며 수시로 전화했다.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그녀가 하루 종일 몇 시 몇 분에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오 분 단위로 캐물었다.
그렇게 하면 그는 그녀 쪽에서 먼저 알아서 도망칠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자진해서 그를 떠나 주기를 원했다. 도망쳐 주기를 원했다. 가능하면 멀리, 이 도시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단체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계를, 지구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첫 단계를 시행할 곳은 바로 이 도시였다. 그것은 위대한 변화의 시작이자 숭고한 이상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단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 그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면 계획의 첫 단계를 시행한다는 것은 이 도시 전체를, 도시 안의 모든 사람들을 얼음 속에 가두어 버린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날은 멀지 않았다. 그녀도 함께 얼어붙을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추위와 냉기 속에 죽어가게 될 것이었다.
떠난다면… 그녀가 지금 떠난다면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세계 전체가 얼어붙겠지만 그래도 그 전까지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살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살아 있다면 그도 언젠가는 그녀를 찾아내어 이 모든 일을 고백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녀를 설득해서 이 거대한 변혁의 길을 함께 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가 살아 있기만 해 준다면.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한 그녀에게 위협적이고 억압적으로 행동했다. 그녀가 진저리를 치고 떠나가기를, 겁을 먹고 도망치기를 원했다.

그녀는 그를 반가워했다.
그가 아무 때나 불쑥불쑥 나타나면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몇 시 몇 분에 어째서 전화를 받지 않았고 몇 시 몇 분에는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캐묻는 그의 질문에 그녀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가 화를 내면 사과했다. 그리고 그가 위협하면 그녀는 겁 먹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애원하듯 쳐다보았다. 그러면 그는 더 이상 심술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떠나지 않았고, 계획을 실행할 날짜는 점점 가까워 왔다.
불안했기 때문에 그는 점점 더 그녀를 험악하게 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안했기 때문에 그는 그만큼 그녀에게서 위안을 바라고 있었다. 고함치며 이유 없는 분노를 쏟아놓은 뒤에 사과하는 횟수만 늘었다. 함부로 대하면서도 그만큼 그녀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떠나가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붙잡고 놓아주지 못하는 것은 그 자신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길을 알려주기를 다시 한 번 기원한 뒤에 차의 시동을 걸었다.
가짜 번호판을 붙인 하얀 승합차는 털털거리며 조심스럽게 공터를 빠져나갔다.

8.
집에 돌아와 보니 그녀가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왔어요?”
그녀는 거실 탁자 위에 있던 물건을 집어 그가 볼 수 있도록 들어올렸다. 조금 흔들었다.
“당신 친구가 주고 갔어요, 배달 물건인데 빠졌다고. 중요한 건가 보죠?”
그녀가 무심하게 들고 있는 상자, 그리고 상자의 운송장에 찍힌 번호를 보고 그는 머리카락이 올올이 거꾸로 서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에서 당장 낚아채어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리 줘.”
그가 간신히 말했다.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그는 상자를 받아 들고 천천히 돌아섰다.
“어디 가요? 방금 들어왔잖아요.”
“차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차에 갖다 두고 올 거야. 내일 첫 차로 배달해야 돼.”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그는 조그만 상자를 조수석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차 문을 꼭 닫고 잠근 뒤에 운전대를 손으로 때렸다. 주먹으로 때렸다. 고함을 질렀다.
얼마나 불안정한 물질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녀가 상자를 기울여서 들고 흔들던 모습이 다시 생각났다. 상자 속의 물질은 그렇게 흔드는 순간 주변의 습기를 모두 빨아들여 얼려버릴 수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부터 순식간에 얼어 붙어 마침내 팔이 끊어져 떨어지는 꼴을 눈 앞에서 목격할 수도 있었다.
한참 소리지르며 운전대를 때린 뒤에 그는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다.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비상등을 켰다 끈 뒤에 트렁크 여는 버튼을 누르고 조수석 머리 받침대를 뽑았다. 
조수석 시트가 열렸다. 안에는 특수하게 제작된 소형 금고가 들어 있었다.
그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금고의 문을 열었다. 조그만 상자를 아주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금고 문을 닫고 조수석 시트를 원래대로 덮은 뒤에 뽑았던 머리 받침대를 도로 꽂아서 조수석 아래 비밀공간을 잠갔다.
그리고 그는 심호흡을 한 뒤에 차에서 내렸다.

9.
“뭐 그렇게 오래 걸렸어요?”
그녀는 여전히 상냥하게 웃으면서 그를 반겼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그는 폭발했다.
“그게 얼마짜리인지 알아!”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고함쳤다.
“남의 물건을 거꾸로 들고 흔들다니 제정신이야! 그랬다가 물건 부서지면 누가 물어내야 되는데! 네가 물어낼 거야! 네가 책임질 거냐고!”
“미안해요. 몰랐….”
그녀가 사과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는 더 화가 났다.
“미안하면 다야! 모르면 손대지 말아야 할 거 아냐!”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미안해요.”
“그럼 다시 이런 짓 하게 내가 내버려둘 줄 알았어! 머저리 같은 게 미안하다면 끝인 줄 알고! 나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꺼져!”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그러지 말아요…”
“꺼지란 말이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그러나 그가 아무리 고함을 쳐도 그녀는 제 자리에 서서 울 뿐 도망치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만 해!”
그가 외쳤다.
“그만 해! 나가! 가란 말이야! 꺼지라고!”
그는 그녀의 팔을 잡고 끌어내려 했다. 그녀는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매달리며 울었다.
“미안해요… 그러지 말아요…. 제발….”
“나가!”
그는 그녀를 현관 앞에 내동댕이쳤다. 그녀는 쓰러졌다. 그가 위협적으로 다가서자 그녀는 황급히 뒤로 물러 앉았다. 
등 뒤는 현관문이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는 그녀가 그 문을 열고 뛰어나가기를 내심 바랐다.
“미안해요…”
그녀는 나가지 않았다. 그녀가 현관문에 등을 댄 채로 눈물을 흘리며 한 말이 또 다시 ‘미안해요’였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가라고! 꺼지란 말이야!”
고함치면서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물건이나 집어서 던졌다.
그가 던진 물건은 현관문에 부딪치며 그녀의 얼굴 바로 옆에서 깨졌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얼굴을 가린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핏줄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그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이 정신이 들었다.
“괜찮아? 다쳤어? 미안해, 미안해…”
이번에는 그가 ‘미안해’를 연발하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깨진 유리컵 조각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녀 앞에 꿇어앉았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치웠다.
유리 조각은 그녀의 왼쪽 눈 바로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얇고 연약한 피부가 유리에 베어 피가 한없이 흘러나왔다. 눈에 유리가 튀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미안해. 잘못했어.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그는 그녀를 조심조심 거실로 데려왔다. 소파에 앉히고 구급약을 가져왔다. 그녀의 눈 아래를 소독했다. 눈물 때문에 피와 소독약이 뒤섞인 채 자꾸 흘러내려 몇 번이나 다시 소독해야만 했다. 그녀는 소리 없이 울면서도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거즈로 꽉 눌러 어느 정도 피가 멎은 뒤에 소독약으로 닦아내자 그녀의 왼쪽 눈 밑에 날개를 펼친 갈매기 같은 기다란 상처가 드러났다. 그는 그녀의 눈 밑에 약을 묻힌 깨끗한 거즈를 붙이고 달리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소파에 앉은 그녀 앞에 다시 꿇어앉았다.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잘못했어. 용서해 줘.”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살그머니 쓰다듬었다.
“미안해요. 화내지 말아요…”
그래서 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입맞추었다.

10.
“떠나자.”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속삭였다.
“어디로요?”
그녀가 나른하게 물었다.
“어디든지. 아무 데나 상관 없어. 여기만 아니면.”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정말요?”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만 더 일하면 이 회사 작업은 끝이야. 먼저 가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그럼 나도 갈게. 여기 일 마무리하고 돈 받으면 곧장 너한테 갈게.”
“지금 그냥 같이 가면 안 돼요?”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맞추었다.
“돈 받아야지. 모레까지 채워서 일하면 작업비 꽤 많이 받기로 했거든. 둘이서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할 거 아냐.”
“지금 뭐라고 했어요?”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는 당황했다.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응? 내가 뭐?”
“둘이서 살 거예요? 나하고?”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는 조금 더 당황했다. 그러나 생각하기 전에 대답이 먼저 나왔다.
“응. 싫어?”
“좋아요.”
그녀가 웃었다. 그리고 그의 뺨에 쪽, 하고 소리 내어 입맞추었다.
그의 품에 잠시 안겨 있다가 그녀가 물었다.
“근데 방금 그거 청혼한 거예요?”
“그런가?”
그가 천장을 보면서 나른하게 되물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맞아. 청혼한 거야.”
“진짜로?”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다짐했다.
“가짜 청혼이 어디 있어.”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맞추었다.
“사랑해.”

11.
그녀의 왼쪽 볼을 쓰다듬으며, 눈 밑에 붙인 거즈를 보면서 그는 물었다.
“정말로 날 사랑해?”
“정말이에요. 꼭 물어봐야 돼요?”
그녀가 웃었다. 그는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내가 이렇게 못되게 구는데… 나 때문에 다쳤잖아. 그런데 왜 도망치지 않아?”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녀가 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사랑하니까, 나한테 화내지 말아요.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살아요.”
그녀가 속삭였다.
“응.”
그가 대답했다.
“앞으로 잘 할게. 행복하게 해 줄게.”
그는 그녀의 눈 밑에 붙인 거즈를 엄지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사랑해…”

12.
연인들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을 때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먼저 떠나서 하루만 기다리고 있어. 내일 작업만 마치면 곧장 갈게. 꼭 갈게.”
“알았어요.”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13.
출근하기 전에 그는 그녀를 역까지 배웅했다. 그녀가 예정에 없이 챙긴 간단한 짐가방만 들고 역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작업을 마치고, 도시가 얼음에 휩싸이면, 그는 떠날 것이었다. 임무를 수행한 뒤에, 그녀가 기다리는 먼 곳으로 떠나서 그녀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이었다.

14.
그 날의 배송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텅 빈 아파트와 거실에 놓인 조그만 쪽지였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꼭 다시 만나요.’
그는 쪽지를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15.
- 두근두근 가슴 뛰는 할인의 낙원! 전제품 최대 70퍼센트 할인! 대규모 세일 행사가 이제 내일 단 하루 남았습니다!

그는 이미 몇 번이나 외우도록 들여다본 전화기의 화면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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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에서 사용하는 메신저는 단체 소속 전문가가 직접 개발한 것으로 외부의 해킹이나 감청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래도 받은 메시지는 만약을 위해 즉시 삭제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그는 어쩐지 이 메시지만은 삭제할 수 없었다. 
오전 9시 1분. 역사가 바뀔 것이다. 인간의 역사뿐 아니라, 지구의 역사가. 그리고 그는 그 첫 발을 떼는 데 참여하게 된다.
그런 뒤에는, 떠날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까. 그는 잠시 고민했다. 다른 도시들, 세계 전체를 거대한 변화가 파도처럼 휩쓸기 시작하면, 그 첫 걸음을 떼고 나서 도망쳐버린 것을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아니다. 그는 스스로 대답했다.
‘세상이 의미 있는 곳이 되고 삶이 살 만한 것이 되도록.’
그는 오래 전 감옥에서 처음 들었던 전달자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 그의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존재는 바로 그녀였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꼭 다시 만나요.’
그는 그녀의 베개 위에 쪽지를 놓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16.
밤새 한 숨도 잠들지 못했지만 새벽이 밝아왔을 때 그는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기운차게 일어나서 정해진 복장을 갖춰 입은 뒤에 그는 그녀가 남긴 쪽지를 조심스럽게 접어서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목표물로 삼은 기업에서는 운송회사 제복을 입은 그와 그의 동료들이 건물에 들어오는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배송하러, 혹은 배송할 물품을 받으러 정기적으로 드나들었기 때문에 입구의 경비병은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움직여 인사했고 접수처 직원은 손짓으로 물품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를 가리켰다.
그들은 화학약품이 든 카트를 끌고 직원이 손짓으로 가리켜준 창고로 갔다. 창고에는 이 기업에 침투한 다른 길동무들이 미리 준비해둔 대용량 화학 약품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보호복을 입고 마스크를 썼다. 준비된 화학약품들을 재빨리 혼합한 뒤에 카트에 약품통을 실었다. 
목적지는 옥상이었다. 그들은 창고에서 카트를 끌고 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위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을 때 경비병이 다가와서 그들에게 물었다.
“어느 사무실로 가시죠? 15층 이상은 출입증이 있어야…”
경비병이 말을 마치기 전에 그의 동료가 약품통의 노즐을 꺼내 경비병에게 쏘았다. 경비병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얼어붙었다.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입 안과 눈가에 맺힌 수분이 얼어서 진주 덩어리가 박힌 것처럼 빛났다. 그는 한 순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총소리가 나지도 않았고 폭발물이 터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람들이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고속 엘리베이터가 65층에서 41층으로 내려올 때쯤에야 로비에 있던 사람들은 경비병이 얼어붙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른 경비병들이 그들을 향해서 달려왔다.
그의 동료들 중 한 명이 다시 노즐을 바닥으로 향해서 분사했다. 치명적인 액체는 바닥에 닿자마자 얼음이 되어 흐르며 주변의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을 냉동시켰다. 그는 로비가 얼음으로 뒤덮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엘리베이터는 아직도 23층에 있었다.
그 때 건물 밖에서 귀가 찢어질 듯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유리문 밖으로 검은 승합차들, 소방차와 경찰차가 순식간에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 특수기동대에서 알린다.
확성기 소리가 그들을 향해 웅웅 울리며 말했다.
- 테러 혐의로 너희를 체포한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너희들은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그는 당황하여 동료들과 서로 쳐다보았다. 
약품통의 노즐을 들고 있던 동료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노즐을 치켜들고 사방에 마구 분사했다. 얼음은 로비의 벽과 천장을 타고 건물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무기를 버려라! 투항하지 않으면 발포한다!
확성기 소리가 웅웅 울리며 다급하게 외쳤다.
“발포해봐라! 너희가 먼저 얼음 덩어리가 될 테니까!”
노즐을 든 동료는 이렇게 외치며 약품통을 들고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말릴 새도 없었다. 
특수기동대에서 발포했다. 그러나 그 전에 동료가 들고 있던 약품통의 노즐에서 분사된 액체가 먼저 땅에 닿았다. 특수기동대에서 쏜 총알에 맞아 약품통이 터지면서 안에 들어 있던 액체가 사방으로 튀고 땅으로 흘렀다.
그와 남은 동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세상은 얼음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기동대 승합차도, 경찰차도, 소방차도, 경찰관도, 검은 제복을 입고 보호장구를 갖춘 특수기동대 요원들도, 그리고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그 사람들이 데리고 가던 개들도, 개들이 영역표시를 하던 나무들도, 나무가 뿌리 내리고 있던 흙도, 땅도, 땅 속의 곤충들까지 모두…
세계가 순식간에 하얗고 투명하고 단단하게 변했다.

17.
그것은 기묘하게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얼음으로 뒤덮인 세상은 조용했다. 소리를 낼 사람도 기계도 모두 얼어붙었다. 확성기 소리도 기동대의 총소리도 자동차의 엔진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저 투명하고 희고 단단한 차가움과 평온한 침묵이 있을 뿐이었다.
보호복을 입은 그와 동료들도 마치 함께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들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천천히 걸어서 건물 밖으로 나왔다. 대리석을 깐 로비의 바닥은 원래 미끄러웠지만 그 위에 얼음이 깔리니 제대로 걷기가 무서울 정도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미끄러졌다. 건물의 유리 정문은 얼어붙어서 열리지 않았고, 밀어서 열어보려 하자 끼익끼익 불안한 소리가 났다. 
다른 동료 하나가 옆문을 가리켰다. 약품통을 끌고 달려나간 동료가 열어젖히고 간 문이었다. 그는 남은 동료들과 함께 그 문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하얗고 투명하고 조용한 세상 앞에 서서 그는 전달자가 언젠가 말했던 종교의 의미, 이상적이고 완벽한 고차원 세계의 모습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약품통을 끌고 가장 먼저 달려나갔던 동료는 총에 맞아 땅에 쓰러진 채로 얼어붙어 있었다. 약품통의 노즐이 손아귀 안에서 얼어붙었기 때문에 다른 동료들이 달라붙어 떼기 시작했다. 그는 목적 없이 기동대 승합차와 경찰차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얼어붙은 기동대 요원 옆으로 지나갈 때, 그는 뭔가 움찔 움직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몸을 돌려 기동대 요원의 옆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라고 생각하고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보호장구에 덮인 기동대 요원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흠칫 움직이는 것을 그는 확실하게 보았다.
보호장구 때문에 완전히 얼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사후 경련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는 되돌아가서 기동대 요원을 들여다보았다.
마스크와 헬멧으로 가려진 얼굴에서 간신히 보이는 것은 두 눈뿐이었다. 요원의 왼쪽 눈 밑에는 갈매기가 날개를 펼친 모양의, 아직 아물지 않은 기다란 상처가 있었다.
그는 입을 벌렸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요원은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그의 배를 꿰뚫었다. 그는 쓰러졌다.
얼어붙은 그녀는 총의 반동으로 인해 상반신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자기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등 밑에 깔린 얼음을 녹이고 웅덩이가 되어 고이는 것을 느끼며 얼어붙은 땅 위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다리는 마치 독립적인 존재인 듯, 살아 있을 때 모습 그대로 얼어붙은 채 똑바로 서 있었다. 그 다리 주변에는 산산조각이 난 그녀의 상반신과 왼팔, 그리고 덩어리져 떨어져 나온 오른팔과 손가락들이 새빨간 꽃송이처럼 찬란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꼭 다시 만나요.’
그는 그녀의 왼쪽 눈 밑에 있던 갈매기 모양의 기다란 상처를 마지막으로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댓글 1
  • 정도경 16.05.31 23:17 댓글

    아 물론 진짜 테러범들이 저렇게 알아보기 쉬운 암호를 사용할 리는 없습니다만 이 이야기의 목적은 암호풀이가 아니라 치정이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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