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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왼손 약손가락

2015.04.30 23:2704.30


왼손 약손가락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역겨운 놀이기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몸이 서서히 위로 떠오르다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뚝 떨어지니 언제 정점에 이르는지는 순전히 자신의 경험과 느낌만으로 알아차려야 했다. 어느 순간 중력이 사라지며 귀가 멍해지는 때가 온다. 그때가 바로 추락을 대비할 찰나. 눈을 질끈 감으며 이를 꽉 물지 않으면 세찬 바람에 입이 벌어지고 하강의 충격으로 이빨끼리 부딪치고 만다. 턱이 얼얼한 정도에 그치면 다행이고 심하면 이빨 한두 개는 부러질지 모른다. 진동은 대체로 완만한 주기를 가지고 되풀이되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놈이 멈춰 설 때는 한참이나 움직임이 없다가 또 달릴 때는 몸속의 내장이 튀어나올까 두려울 정도로 격렬한 진동이 이어졌다. 긴장을 놓칠 틈이 없다.

이토록 격렬한 환경 속에서 무사히 있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하면서 J는 겨우 자신과 주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을 되찾았다. 마음속에 가장 빨리 그리고 쉽게 떠오른 지옥이란 표현을 얼른 떨쳐내려 애썼다. 그런 식의 자포자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냉정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현실을, 과거의 자신을, 세상이 멀쩡하던 무렵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친숙한 비유가 필요했다. 현실도피를 위해 떠올린 놀이기구는 설움만 북돋을 뿐 도움이 되질 않았다.

어지러운 J의 머릿속에 흐릿한 풍경이 떠올랐다.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승객이 빽빽하게 들어찬 만원 버스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는 모습. 특히 고등학교 시절 등교시간의 버스는 아무것도 붙잡지 않아도 될 정도로 틈 없이 학생들로 가득했다. 거친 도로와 격한 커브, 우악스런 운전이 삼위일체를 이룬 만원 버스가 지금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하필이면 여기는 손끝이었다. 가장 격렬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부위가 아닌가. 가슴과 허리라면 그나마 안정된 위치다. 팔과 다리에 비하면 그쪽은 텅텅 빈 지하철이나 마찬가지일 정도. J의 눈에도 죽은 듯이 꼼짝도 안 하고 달라붙어 있는 조그만 몸뚱이들이 보였다. 어쩌면 정말 죽은 걸지도 몰랐지만 팔자 편한 인간들이라는 생각은 억누를 길이 없다. 팔과 다리에선 신음과 고통의 한숨이 끊이질 않는데 몸통은 얌전하기만 했다. 엄마 등에 업혀 잠든 아기처럼.

목은 어떤가 하니 굵고 짧은 편이지만 안심할 수 없는 위치였다. 대체로 움직이지 않다가도 먹을 것을 발견하면 옆으로 혹은 아래로 고개를 휙 돌리기 때문이다. 뒷목이라면 버틸 만하겠지만 앞쪽 사람들은 이미 목살이 찌그러지면서 완전히 한 덩어리로 뭉쳐져 있다. 어디가 팔이고 다리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J가 위치한 곳은 사람의 왼손 약손가락 끝에 해당한다. 상체는 웅크리고 하체는 쭉 뻗은 자세로 골격에 해당하는 끈적한 살덩어리에 반쯤 매달리고 반쯤 달라붙은 상태. J의 몸 오른쪽은 또 다른 사람과 밀착되어 있는데 등을 마주하고 있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중년남자로 보였다. 털투성이의 뚱뚱한 다리, 커다란 엉덩이와 살집 두둑한 허리에 맞닿아 있는 게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왼팔에는 다른 여성이 붙어 있다. 나이가 제법 들어 보였지만 할머니라고 부르면 실례일 것 같은 여성. 두 사람 다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 사이로 보이는 남자와 붙어 있다. 그 위로도 사람들이 잔뜩 이어지며 손가락과 손바닥 및 손등을 형성하고 있으나 손끝 위치에서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 이들 네 사람이 왼손 약손가락 끝마디를 이루고 있다.

“거기 아가씨.”

중년남자 T가 말을 걸었다. 목소리가 뚜렷하지 않은 걸로 봐서 입 주위가 자신이나 타인의 신체 일부에 묻혀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아가씨라고 불릴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지만 J는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리를 좀 저쪽으로 굽히지?”

부탁 같기도 하고 명령 같기도 한 말투였다. 지금 J가 다리를 쭉 뻗고 있어서 T는 몸을 꽤 옆으로 기울이고 있다. 공간의 여유를 만들어주면 T가 몸을 자기 쪽으로 돌리면서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남의 사정 봐줄 처지가 아님은 서로 매한가지. 등을 마주하고 밀착한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한 사람이 편한 만큼 다른 사람이 불편한 위치였다. 더구나 다리를 앞으로 구부리면 J의 엉덩이가 그의 몸에 닿을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 맞닿은 부분도 역겨운데 더 가까이 달라붙으라니. J는 못 들은 척을 하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아, 거 참…… 여기 자리 전세 냈나?”

T가 들으라는 듯 분명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J는 그러는 너야말로 자리 맡아놨냐고 따지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누구도 원해서 여기 있는 게 아니고 있고 싶어서 남은 게 아냐.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꾹 삼켰더니 눈가가 축축해졌다.

휘익, 쿵.

다시 떠올랐다가 뚝 떨어졌다. 땅을 울리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따라온다.

“어, 씨팔! 한 놈이 다가와!”

젊은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끝마디에서 유일하게 머리를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H다. 달라붙을 때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었던 덕분이었을까. H는 고개를 뻗어 사방을 마음껏 살펴볼 수 있었기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파수꾼 역할을 맡고 있었다.

여기서는 머리카락이 길고 풍성한 게 핸디캡으로 작용했다. 옆에 있는 나이든 여자 Y가 그런 경우다. 긴 머리카락이 피와 체액으로 만든 점액질 표면에 단단히 달라붙어서 머리가 고정된 상태다. 눈, 코, 귀가 완전히 차단되어 겨우 입으로 숨만 쉬는 상태였다.

“어디야? 어디서 오는데?”

T가 다급하게 물었다.

“11시? 아니 10시 방향!”

“이런 젠장, 이쪽이잖아!”

T는 반쯤 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듯 외쳤다. 진행 방향을 기준으로 10시라면 바로 왼팔이 공격대상이라는 얘기였다. 거리는 굳이 묻고 답하지 않아도 다들 알 수 있었다. 소리, 그리고 진동이 직접 알려주었다.

쿵, 쿵, 쿵.

연속으로 대포를 쏘아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땅이 한층 격렬하게 흔들렸다. J는 자신이 매달린 본체보다 진동은 작지만 속도가 빠르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즉 덩치는 작은 대신 민첩하다는 얘기. 얼굴 반이 파묻혀서 한쪽 눈으로만 전방 일부를 겨우 볼 수 있는 J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필사적으로 상대의 위치를 찾았다. 소리는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크기가 어느 정도야? 누가 더 셀 것 같은데?”

T가 물었다. 아직 그가 있는 위치에선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H는 모래먼지 속에서 고개를 흔들고 눈을 깜박였다.

“안경을 써야 되는데, 잘 안 보여서……. 우리 쪽보단 좀 작은 것 같아요. 그래도 100m는 되겠는데.”

“방향은 아직도 이쪽이야?”

“예, 9시에서 10시 사이. 맞서 싸울 것 같은데요.”

“덩치가 작은데도 덤빈단 말이야? 미친 거야, 자신이 있는 거야?”

“그리 크게 차이는 안 나는 것 같아요. 우리보다 걸음이 훨씬 빨라서 작겠다 싶었는데…… 이제 보여요! 좀 더 날렵하고 팔도 긴데요.”

“우린 대신에 팔다리가 굵잖아. 우리 쪽이 이기겠지?”

“아니죠. 여긴 산비탈이에요. 지형도 위쪽에 있는 상대에게 유리하고 팔이 기니까 압도적으로 이쪽이 불리하죠.”

“그야 그렇지만 전에도 키가 큰 놈을 때려눕혔잖아. 길면 그만큼 가늘고 약한 법이지. 우리 쪽은 짜리몽땅해도 단단하거든.”

“100m는 예전에 넘겼어요. 더는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인파이트로 맞서면서 내구력으로 버티는 전법이었는데 앞으론 안 통할 걸요.”

“아직 다리가 굵으니까 불리하진 않을 거야. 지금까지 지켜봤는데 일단 넘어지면 끝이더라고.”

“확실히 그렇죠. 이놈은 넘어진 다음의 대응이 느려 터졌어요. 얼른 일어나질 못하면 굴러서 피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거북이처럼 팔다리만 휘젓고 있으니. 승기를 잡으려면 먼저 쓰러뜨려야 되죠.”

두 남자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흥분이 섞여 상기된 말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J는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남자들의 핏줄에 흐르는 사냥과 전투에 대한 본능 때문인 걸까. 무슨 스포츠 시합이라도 앞둔 관중처럼 태연하게 말하고 있으니. 누가 이기고 지냐는 토론에 무슨 의미가 있나. 결국 싸우는 건 본체가 아니라 우리다. 저놈에게는 손가락 하나겠지만 이쪽에는 몇 개의 목숨이 달려 있는지 모른다.

“누가 이기든 우린 다 죽어요. 손가락이잖아요!”

앙칼진 J의 목소리에 두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상대방의 전모가 J의 시야에도 들어왔다. 무릎 위를 넘지 않는 수많은 나무를 쓰러뜨리고 왼손으로 산비탈을 짚으면서 신중하지만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피부가 누렇고 얼룩덜룩하며 쭈글쭈글한 거인이었다. 체형은 몸통이 크고 팔다리가 짧은 아기를 닮았다. 그러면서도 머리는 작은 반면 손과 발은 지나치게 크다. 물론 J가 달라붙어 있는 쪽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몸의 크기와 팔다리의 길이나 굵기 등에서 작은 차이가 있어도 대체적인 외형은 비슷했다. 심지어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도 막 걸음마를 뗀 아기와 닮았다. 이 커다란 존재가 그나마 균형을 잡고 걸으려면 이게 최선의 방식일지도.

좀 더 가까이에서 보면 그가 하나의 개체가 아님을 알아볼 수 있다.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 사람을 쌓아서 만든 탑이요 사람을 뭉쳐서 빚은 덩어리. 그들은 사람의 살과 뼈를, 육신 자체를 자신의 일부로 삼는다. 피부에서 주름으로 보였던 건 사람의 몸뚱이를 뭉치고 엮어서 만들어진 굴곡이요, 얼룩으로 보였던 건 대부분 사라졌지만 일부만 남은 사람들의 옷이다. 위치적 특성 때문에 이 두 놈의 살빛은 대체적으로 노란색이었다.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서는 좀 더 다양한 살빛을 띤 놈도 있으리라.

마침내 두 놈은 서로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마주섰다. 도망치려는 기색은 없었다. 아마도 본 순간 양측의 덩치가 비슷하니 피할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했을 터. 보통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크다면 작은 쪽이 얼른 꽁무니를 빼곤 했다. 간혹 작지만 재빠르고 영리한 놈이 큰 놈에게 덤비는 경우도 있으나 그건 불시의 습격에나 해당하는 일이고. 주로 도시에서 무너지지 않고 남은 건물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무방비 상태로 지나가는 둔한 덩치를 등 뒤에서 덮친 다음 겉에 달라붙은 사람을 한 움큼 뜯어내어 입에 우겨넣고는 도망치는 식이다.

그런데 지금 이 둘은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에서 마주쳤다. 나무라고 해봐야 무릎 아래에서 머무는 높이고 주위에 딱히 몸을 숨길 큰 바위도 없다. 더구나 양쪽 다 스스로의 덩치와 힘에 자신이 있었다. 다가오는 상대에게 먼저 덤볐으면 덤볐지 결코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정면대결 뿐.

괴물은 눈을 치켜떴다. 눈은 옆으로 누워서 머리와 발이 맞닿은 사람 둘이 눈꺼풀을 이루고 있었다. 눈동자가 있어야 할 공간은 시커멓게 뚫려 있고 안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깊은 동굴 속에서 피운 듯이 흐릿한 불. 그리고 사람 넷으로 만들어진 아랫입술이 벌어지며 이빨도 혀도 없는 공허한 목구멍에서 소 같기도 하고 코끼리 같기도 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튜바처럼 낮고 긴 울림이 이어졌다.

매달린 사람들은 본체가 갑자기 움직일 때마다 어어어, 으아아, 꺄아아 소리를 질러댔다. 그나마도 정신을 차리고 기운이 남은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얘기다. 대다수는 그럴 기력조차 남질 않았다. 왼손 약지 사람들이 비교적 멀쩡한 이유는 본체가 오른손잡이였던 덕분이었다. 놈은 오른손을 국자처럼 구부리거나 검지와 엄지만을 써서 숨어 있는 혹은 창백한 얼굴로 도망가는 사람을 붙잡아 삼키거나 피부의 모자란 부분에 붙이곤 했다. 오른쪽 손가락은 피와 흙으로 시커멓게 물든 덩어리가 된지 오래였다.

“저기요.”

뜻밖의 방향에서 소리가 들려서 보니 왼손 새끼손가락 끝에 붙은 여자가 보였다. J는 자신보다 약간 나이가 많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벌거숭이가 된 채로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과 팔다리가 엉킨 채로 달라붙은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안쓰러웠다.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괜찮겠죠?”

질문이라기보다는 동의를 구하는 목소리였다. 자신의 불안함을 해소해줄 동료를 찾는 걸까. 이들이 매달린 본체는 지금껏 비슷한 덩치의 상대와 싸워본 적이 없다. 늘 더 작은 놈을 찾아서 일방적으로 공격하곤 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보통 싸울 때 주먹을 쥐잖아요. 그럼 우린 무사하겠죠?”

“그럴 거예요.”

J는 확신도 없이 상대방과 스스로를 동시에 안심시키기 위해 어설픈 맞장구를 쳤다.

“우린 그냥 숨이 막히고 몸이 조여도 꼼짝도 안 하고 싸움 끝날 때까지 가만히만 있으면 무사하겠죠, 그죠? 손바닥에 있는 사람들이랑 만나게 되겠네. 이왕이면 좀 젊은 사람들이면 좋겠는데. 안 그래요?”

새끼손가락 끝의 여자 S는 간만에 대화상대를 만난 게 반가운지 대답을 할 틈도 안 주고 일방적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런 건 익숙해요. 참아낼 자신 있어요. 거의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겪었거든요. 제일 힘든 게 뭔지 알아요? 내리는 거예요. 타는 거랑 버티는 건 어떻게 할 수 있겠는데 원하는 역에서 내리려면 두 정거장 앞에서부터 움직여야 해요. 탈 때 위치를 잘 잡으면 되는데 그게 또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이상한 아저씨들이랑 몸이 붙으면 밀고 나가기도 그렇고.”

바로 지금이 그런 상태라고 J는 생각했다. 중년 남자의 퀴퀴한 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물론 원인은 T 혼자가 아니었다. 본체의 뼈대를 이루는 굵은 기둥 자체가 사람의 살과 뼈, 피로 만들어져 있기에 피 냄새와 살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게 당연한 일. J는 비온 후에 열려진 배수로의 시궁창 냄새를 떠올렸다. 비유하자면 거인의 육체는 나무젓가락으로 뼈대를 만들어 세운 후 그 위에 점토를 붙여서 만든 것과 같다. 그 모든 재료를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를 뿐 원리는 똑같았다.

두 거체의 거리가 좁혀졌다. 대략 300m 정도 될까? 서로 다가갈수록 발소리가 커지고 충격도 묵직해졌다. J는 구역질을 했지만 이미 몇 번이나 거듭한 결과 더 나올 게 없어서 시큼한 신물만 올라왔다. 가까워지면서 상대방의 누런 피부가 꿈틀대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저 위에서도 자신과 똑같은 불쌍한 희생자들이 가득 달라붙어 있을 터. 지금 보이는 광경이 곧 자신의 상황임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기괴하고 역겹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한층 격렬하게 올라갔다 떨어지면서 꽉 문 J의 이빨 사이로 분홍색 거품이 새어나왔다.

* * * * *


격투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걸렸다는 점에서 두 개체의 싸움이 아니라 두 집단의 전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보통 도망에 성공하지 않는 한 한쪽이 완전히 죽어 없어질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승패를 책임진 두 개체는 아주 원시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결투를 수행했다. 규칙도 기술도 없는, 순수한 육탄전.

놈들은 다짜고짜 달려가 몸을 날려 힘으로 서로의 몸을 밀었다. 결국 반쯤 부둥켜안은 자세로 산비탈에 쓰러져 굴렀다. 발길에 채이고 밟힌 나무가 뽑히거나 부러졌으며 비탈에서 돌과 흙이 무너져 내리며 작은 산사태가 일어났다. 외형은 사람을 닮았으면서도 인간의 민첩함과 무술 같은 건 이어받지 못한 걸까.

표면에 있는 사람들은 찢어지고 부러지며 끔찍한 비명을 토해내었다. 본체에게 있어 그런 사람들의 피해와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은 피부를 꼬집기만 해도 즉시 아픔이 전해지건만 놈들은 무딘 건지 인내심이 강한 건지 조금도 움직임을 멈추거나 몸을 사리려 하지 않았다. 본체와 사람들을 잇는 신경에 해당하는 부분이 아예 없는 건지도 모른다.

S의 추측이 전부 맞지는 않았으나 손가락이 비교적 덜 위험한 부위인 것만은 맞았다. 놈들의 목적은 상대방의 살을 뜯어내어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것, 즉 먹어치우는 것. 따라서 손은 중요한 부위이기에 가장 신속하고 영리하게 움직였고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며 형체를 유지해야 했다. 방심한 상대의 무릎이나 허리로 손을 뻗쳐 살을 한 움큼씩 뜯어내면 상대방이 손목을 움켜쥐거나 손등을 쳐서 떨어뜨렸다. 바닥으로 떨어져 으깨진 몸뚱이를 서로 하나라도 더 빨리 주워 먹으려고 발로 바닥을 더듬거나 쓸었다. 얼핏 짓밟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달라붙은 즉시 본체의 일부로 흡수되니 문제는 없었다. 물론 원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놈들에게 있어 자신의 일부인 사람이 살아 있는지 사지가 멀쩡한지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싸움은 그런 식으로 추잡하고 미련하게 이루어졌다.

“저놈들은 도구를 쓸 생각도 안 하나 봐요!”

H가 소리쳤다. 본체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움직임이 멎으면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멍청한 놈들! 바위를 쪼개서 던지거나 찌르면 금방 이길 텐데!”

“그러게 말이에요! 답답하긴, 몸을 수그리고 있을 때 목을 잡고 확 꺾어버려야지!”

S가 맞장구를 치면서도 훨씬 살벌한 소리를 했다. 어느새 대화를 나눌 정도로 두 사람은 죽이 잘 맞는 기색이고 그들에게서 상황을 주워들은 T가 중간에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지금 우리가 이기고 있나? 어떻게 되었어, 응?”

T는 시야가 불편해 직접 확인할 수 없어서 애가 타는지 몇 번이나 되물었다.

“아까 왼손 공격이 성공한 것 같던데.”

“예. 상대 놈의 어깻죽지가 떨어져서 뼈가 보여요. 한쪽 다리도 너덜너덜해졌고요.”

“좌우지간 좀 빨리 끝냈으면 좋겠구만!”

T는 남의 일처럼 툴툴거렸다. 마치 자신이 붙어 있는 본체가 이길 것은 당연하다는 투였다. 하지만 손가락에서 가장 괴로운 부위는 단연 끝마디. 본체가 상대의 몸을 붙잡을 때마다 생면부지의 알몸뚱이와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순간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그때 어어어, 하는 소리가 팔뚝 쪽에서 났다. 고개를 돌리니 상대방의 몸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이 밀착되어 있다.

“저놈이 팔을 물었어요!”

H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이쪽 본체의 오른손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손바닥이 상대방의 머리를 툭 때리고는 그대로 밀었다.

“꼬집거나 할퀴거나 해야지 그걸 밀고 있냐, 미련한 놈아!”

S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래도 자신이 달라붙은 본체라고 감정이입을 했는지 응원도 하고 훈수도 두는 꼴이 스포츠 시합을 관전하는 태도다.

그러나 왜 그러지 못했는지 조금 후에 알게 되었다. 상대방이 허리를 껴안듯 팔을 두르고는 양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허리며 엉덩이에 붙은 사람들을 긁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본체의 힘은 덩치에서 나온다. 놈들은 새로운 인간의 육체를 흡수하면서 덩치를 키워간다. 즉 소유한 사람의 수가 곧 체력이요 생명력인 셈.

상대는 덩치가 조금 작은 대신 두뇌와 민첩성에서 앞서고 있었고 접근전에서 그런 장점이 최대한 발휘되고 있었다. 입으로 한쪽 팔을 물어 움직임을 봉쇄한 가운데 양팔로 피부를 뜯어내어 체력을 떨어뜨리는 2중의 공격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이 덩치 큰 놈은 미련하게 팔을 물은 머리만 떨어뜨리려고 어설프게 저항하는 상황. 결국 허리가 과장되게 잘록해져 모래시계 같은 몸매가 되자 이내 힘을 잃고 휘청거리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쩌저적, 뚜두둑.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서 제일 굵은 나무가 꺾이는 소리가 이럴까. 수십 명의 살과 뼈가 찢어지고 끊어지는 소리였다. 마침내 왼쪽 팔뚝이 부러졌다.

“팔이 부러졌어!” “어떡해! 이젠 다 죽는 거야?!” “사람 살려!” “어어, 떨어진다!” “하느님, 살려주세요!” “이거 놔! 나까지 떨어지겠어!”

팔뚝과 손가락에 붙은 이들이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 내는 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J는 이 상황에서도 샘솟는 궁금증에 정신을 집중했다. 본체에서 떨어진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사람 몸에서 잘라진 신체 부위가 썩어가듯 그대로 속절없이 죽음만 기다려야 하는 건가? 어차피 지금 높이는 50m 이상 될 테니 떨어지면서 더 무거운 손이 아래쪽으로 쳐질 테고 손가락에 있는 이들은 전원 추락사할 형편이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금껏 지켜본 바에 의하면 본체에서 떨어진 부위는 다른 놈들이 흡수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팔이 떨어진 것 자체는 큰 피해가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떨어진 팔을 둘 중 누가 먼저 차지하느냐 인데, 원래 주인이 되찾는다면 원상회복되겠지만 상대방이 빼앗는다면 이쪽은 외팔이가 되고 적은 팔이 세 개인 더욱 강력한 괴물이 되고 말지도…….

하지만 J는 팔다리가 둘 이상인 놈을 본 적이 없었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여태까지의 관찰 결과에 따르면 인간과 닮은 형상을 고집스레 유지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적에게 빼앗긴 순간 자신의 육체는 더 이상 손가락 역할을 하지 못하고 몸속 어딘가로 흡수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형체도 찾아볼 수 없이 살과 뼈가 뒤섞인 불그죽죽하고 끈적끈적한 악취 나는 덩어리가 된 채로 삶을 마감하겠지.

그 순간 J는 보았다. 그게 정말 제대로 본 것인지 모르지만 거인의 미소를, 웃는 얼굴을 본 것만 같았다. 팔뚝을 문 입술을 이룬 양쪽의 사람들 몸이 뒤틀리며 일그러진 모양이 꼭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 눈이 살짝 가늘어지더니 시커먼 눈구멍에서 불꽃이 튀었다. 쏘아올린 승리의 축포처럼. 이제 놈에게 남은 건 전리품의 수확이었다. 본체가 결국 못 버티고 옆으로 쓰러지자 마치 포옹하듯 그 위로 자기 몸을 포갰다. 입이 슬쩍 벌어지며 물었던 팔뚝이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행운으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겠지만 가장 먼저 떨어진 부분은 손등이었다!

어휴, 후우, 아아.

안도와 탄식의 숨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왼쪽 손가락의 일원들은 추락사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바라고 그리던 땅바닥에 몸이 닿았다.

“어? 뭐야, 이 감촉은 흙이잖아? 풀이야!”

T의 목소리는 감격에 겨워서 그런지 약간 울먹이는 듯했다.

“아직 안심하긴 일러요!”

H가 소리쳤다.

승리자는 패자의 몸 위에 엎드려 닥치는 대로 주워 삼키고 있었다. 이제 삼켜진 사람들은 거인의 몸 안에서 부서지고 녹고 엉겨 붙어 몸의 일부가 되리라. 좀 더 운이 좋은 사람들은 피부에 달라붙어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만 할 터고. 어느 쪽이 더 행복하다고 말해야 할까.

놈이 부러뜨린 왼팔을 내버려둔 이유는 몸체를 먼저 공격하는 게 급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부러진 부위는 움직이지 않을 테니 나중에 천천히 회수하면 된다. 당장 급한 건 아직 오른팔이 멀쩡해서 반격의 가능성이 남은 본체 쪽이었다.

“우린 이 상태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형수 꼴인가?”

T의 푸념을 H는 힘주어 반박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순 없죠!”

그래도 이들에겐 기회가 있었다. 손가락 끝에 달라붙은 이들은 어쨌든 살아서 다시 땅 위에 닿은 상태. 포기하기엔 이르다.

“저길 봐요, 멀쩡한 사람들이 있었어!”

H는 이번엔 손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그동안 H는 사지가 달라붙어 있었는데 부딪칠 때의 충격으로 떨어진 것인지 팔을 자유로이 움직이고 있었다.

산 아래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본체의 몸이 부딪치면서 피부에서 떨어져 나갔던 소수의 생존자들. 비록 멀쩡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다들 신체 일부가 훼손되거나 떨어져 나간 만신창이였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행운아들이었다.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이 남은 이들은 죽을힘으로 산 아래 도시를 향해 달렸다.

승리자는 거대한 몸뚱이를 게걸스레 포식하고 있기에 그런 조그만 잔챙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눈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는데 바닥에 떨어진 밥풀에 눈을 돌릴 틈이 있기나 할까.

“우리도 탈출해야 해요! 거기 손가락 끝 아가씨! 깨어 있어요?”

H가 메마른 목에서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를 짜냈다.

“제발 정신을 차렸다면 내 말을 들어요!”

안타깝게도 S는 거의 기운을 잃은 것 같았다. 팔이 부러질 때 공포로 기절했든지 아니면 땅에 닿을 때 바위나 부러진 나무에 부딪힌 걸지도. 겉으로 볼 때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H는 S를 비롯해 주위 모든 사람에게 들으라는 듯이 가능한 크게 소리쳤다.

“돌이나 나뭇가지나, 손에 잡히는 걸 잡고 붙은 몸을 떼어내요! 살이 좀 찢어지겠지만 참고 해요!”

J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다행히 주위엔 꺾인 나무 천지였다. 뾰족한 나무 조각을 들고 몸과 뼈대 사이를 찔렀다. 피가 배어 나왔으나 멈추지 않았다.

어릴 적 흙장난 이후로 이토록 열심히 무언가를 파헤친 적이 없었다. 처음엔 손바닥이, 점점 허리와 팔뚝이 아파왔다. 살이 까진 손바닥을 마른 혀로 핥고 좀 더 튼튼하면서 겉이 매끄러운 다른 가지를 찾았다. 허리가 떨어지자 자세를 약간 오른쪽으로 틀면서 왼쪽 어깨를 집중적으로 찔렀다. 틈이 생기자 찔러 넣고 지렛대 원리로 힘을 주어 밀었다.

그야말로 생살이 찢어지는 아픔. 이를 악 물어도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무리 아파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분명했다. 아무리 만원 버스라도 언젠가는 내릴 때가 오지만 본체에 달라붙어 있는 한 영원히 떨어질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죽어서 고통을 잊는 날이 올 때를 기다렸지만 이제 기회가 찾아왔다. 평생 다시 못 올 찬스. 절대로 멈추거나 포기할 수 없었다.

어깨가 떨어지니 다음은 팔뚝이었다. 일단 양팔만 자유로워지면 훨씬 움직이기도 힘을 주기도 편해질 것이다.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다른 걸로 바꿨다. 우여곡절 끝에 왼팔이 분리되었고 이제 하체만 남았다. 나뭇가지를 자신의 엉덩이와 T의 허리 사이에 찌르고 힘을 주었다.

“아야, 아야! 좀 살살해, 아가씨!”

J는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조금도 손을 늦추지 않았다. 쓸데없는 엄살에 장단을 맞춰주다가 천재일우의 기회를 날릴 순 없는 일이니.

해가 기울면서 하늘이 점차 붉게 물들어갔다. 긴 시간이 흘렀다. 결국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끝까지 해낼 수 있었던 건 단순한 행운 이상의 일이었다. 기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영영 가능성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해냈지 않은가!

J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땅 위에 섰다. 허리를 구부리고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빈속이 울렁거렸으며 팔다리가 진동하는 것처럼 떨렸다. 코를 꽉 채운 피 냄새는 자신의 코피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의 피가 묻어서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머릿속에선 짜릿한 쾌감이 불꽃을 튀며 휘돌아다녔다.

내가 살았어! 살아났어! 무사히 빠져나왔어!

북받치는 감격과 안도감에 온몸이 떨렸다. 결국 눈물을 쏟으며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나도 좀 구해줘요!” “나도!” “우리도!” “사람 살려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반쯤 정신을 잃었던 J는 무수한 고함과 비명으로 인해 깨어났다. 다른 손가락, 손등, 팔뚝에 붙어서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였다. 안타깝고 미안하고 불쌍한 마음이 앞서긴 했지만 J는 지금 자기 몸을 건사할 기운도 없었다. 체력도 바닥났고 자신도 없다. 욱신욱신 쑤시는 시뻘건 손바닥을 보니 자기가 어떻게 해냈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죽기 살기로 정신없이 매달렸기에 가능했던 일. 지금 남을 도와주는 건 무리였다.

J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미 몸을 가릴 천 조각 하나 남지 않은 상태지만 굳이 가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방도 알몸이긴 마찬가지였으니까. 남은 힘을 쥐어짜서 한 일이라곤 부러진 나뭇가지나 돌조각을 주워서 달라붙은 이들의 손에 얹거나 쥐어주는 것.

나도 많이 지쳤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야. 나머지는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와라.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행동임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았지만 상대방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만 해도 어디랴. 물론 여전히 도와달라고 소리 지르거나 엉엉 울거나 물귀신처럼 J의 몸을 붙잡으려는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허벅지를 심하게 긁히자 J는 왜 이런 꼴을 당하면서까지 도와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쉴 곳을 찾아 비틀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기엔 이미 J보다 먼저 빠져나온 사람이 있었다. H는 놀랍게도 한쪽 다리가 없는 상태로 수풀 위에 엎드린 채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생존의 기쁨과 그간의 고통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H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J를 올려다보더니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린 살았어요! 역시 포기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살아났잖아요!”

다리를 잃었으면서도 울음을 끝으로 더는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손으로 눈물을 훔친 H는 한층 놀랍게도 용을 쓰는 T를 도와주러 갔다. 한 다리로 껑충 뛰어 다가가더니 양손에 돌조각을 들고 T의 종아리와 엉덩이를 찔러서 떨어져 나오도록 해주었다. 이어서 두 사람은 손가락 끝마디의 마지막 일원인 Y에게로 이동, Y는 팔이 떨어지고 살 곳곳이 심하게 떨어져 나갔지만 목숨만은 무사히 건졌다.

다들 지쳐서 풀 위에 쓰러지듯 몸을 뉘였는데 H만은 구조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새끼손가락 끝마디로 가서 S를 찾았다. 아까부터 애타게 소리쳐 부른 걸 봐서 꽤 마음에 들었던 건지. S는 바닥에 깔린 상태여서 다리 일부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H는 반쯤 엎드린 듯한 자세로 S를 구해내기 위해 애를 썼다.

“틀렸어.”

T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저래 가지곤 살아 있는 게 이상하지.”

J도 Y도 속으로 동의했으나 H의 귀에 들리진 않은 게 다행이었다. 만약 들었어도 화를 냈을지언정 결국 하는 일에는 변함이 없겠지만. 결국 H는 끝까지 희망을 품은 채로 S의 몸을 무사히 분리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비록 몸의 거의 반쪽을 잃어버린 상태였지만 말이다. H는 멍한 얼굴로 S의 몸을 흔들거나 가슴에 귀를 대보거나 하면서 한참이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순애보 났네, 났어. 감상에 젖어 있을 땐가, 지금이?”

T는 툴툴거리고 끙끙대면서 몸을 일으켰다.

“어이, 학생. 빨리 도망치자고!”

한쪽 다리는 뼈가 드러나도록 살이 패어 있었는데도 T는 뒤뚱거리면서 잘도 걸었다. Y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지만 부축을 해주지 않고서는 걷기 힘들 정도로 몸의 손상이 크고 기력도 잃은 상태였다. 한쪽 팔이 없고 양다리의 뼈가 부러진 듯 엉뚱한 방향으로 휘어져 있다.

“혼자 힘으로는 걷기도 힘들 거 아냐? 응?”

T가 H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물었다. 슬쩍 올려다본 퉁퉁한 얼굴은 북어처럼 마르고 딱딱했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포기를 종용했다.

결국 H도 S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순간이 오리란 걸 알고 있다. 문제는 시간이 필요할 뿐. 지금은 슬픔에 젖을 여유조차 허용되지 않은 순간. H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T의 도움을 받아 한쪽 다리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T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미 죽은 사람 더 생각해서 뭐하겠어? 이것도 인연인데 가까운 데 붙어 있던 우리끼리라도 잘 살아남아야지.”

H는 대답 대신 온몸을 떨며 긴 숨을 토해냈다. T는 턱으로 Y를 가리키며 J에게 말했다.

“그럼 아가씨, 이 사람 좀 일어나도록 부축해줘.”

“우리…… 정말 괜찮은 거죠……?”

Y의 물음에 그를 향했던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뒤편의 괴물로 향했다.

이제 그들이 붙어 있던 이전의 본체는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주검에 걸맞는 위엄을 얻지 못한, 그저 살덩이가 뭉쳐져서 만들어진 추악한 덩어리일 뿐. 대신 상대방은 그만큼의 생명력에 충만했고 몸에는 윤기가 흐르는지 저녁놀을 받아 빛이 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제 처음의 두 배 가까이 커진 몸집은 아직도 불어나고 있는 중이다. T는 먹는다기보다 빨아들인다는 표현에 걸맞을 정도로 우악스레 포식하는 놈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거의 다 먹어 가는데. 아직도 저쪽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더 늦으면 도망도 못 가겠어. 일단 산을 내려가자고. 도시로만 가면 숨을 곳은 얼마든지 있어. 아직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 말을 신호로 J는 Y를 부둥켜안고 일어났다. 지쳐서 그런지 생각보다 무거웠다. 몸이 너무 차가워서 죽은 줄 알고 놀랐으나 얼굴을 확인하고는 마음을 놓았다. 일어나다가 비틀거릴 때 H의 손이 J를 붙잡았다. 원래는 둘씩 이동하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네 사람은 여전히 한 덩어리, 비교적 팔이 멀쩡한 J와 H가 양쪽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T가 중심에서 방향을 이끄는 식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네 몸뚱이는 서로를 부축하고 서로에게 기대면서 산비탈을 내려갔다.

* * * * *


도시라기엔 너무 작고 초라했다. 그들에게 찾아온 감정은 숨을 곳을 찾았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하나의 전장에서 다른 전장으로 이동했을 뿐이라는 긴장감이었다.

애초에 도시라는 말에 현혹된 탓이었을까. 넓은 도로와 커다란 건물, 무수한 자동차 같은 걸 연상했던 게 잘못이었다. 그런 장소라면 사람 몇 명쯤 감쪽같이 숨을 수 있었겠지만 여기는 그렇지 못했다. 일단 규모가 작았다.

건물은 형체를 온전하게 유지한 것을 찾기 힘들 지경이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무너진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사이사이로 지나가는 거대한 몸집이 보였다. 그밖에 움직이는 거라곤 시커멓게 꾸물거리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연기와 불길한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새 정도. 지상의 생물은 인간을 포함해서 모두 이 새로운 포식자에게 먹히고 만 걸까. 이제 자유를 누리는 건 저 높은 산 위에 보금자리를 꾸민 새들 뿐.

“산 넘어 산이라더니, 여기도 안심할 수 없구만.”

T가 분함과 허탈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J만이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래도 아까보단 훨씬 낫죠. 일단 쉴 곳을 찾아야 해요.”

덩치가 작은 놈일수록 빠르고 민감했다. 놈들의 눈과 귀와 코는 살아 있는 사람의 기척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한꺼번에 넷이나 되는 먹잇감이 나타났으니 분명히 냄새를 맡고 쫓아올 터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양옆의 J와 H가 옆과 뒤를 살피고 T와 Y가 정면을 보면서 이동했다. 처음엔 되도록 커다란 건물에 들어가려고 했다. 파괴될 위험이 적고 지하실 같은 곳에 숨으면 안전하리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대부분 입구가 무너져서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어떤 건물은 정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안에 5m 정도 되는 놈이 엎드려 있었다. 얌전히 숨어 있다가 먹이가 다가오면 파리지옥처럼 덮치려는 심산인가. J 일행에게 있어서는 도시에 들어온 후로 가장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위기를 벗어난 건 순전히 놈의 부주의 덕분이었다. 팔이 기둥에 부딪치는 바람에 건물이 무너지면서 깔려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후 생각을 바꿔 단독주택이 밀집한 쪽으로 이동했다. 해가 지면 더 위험할 거란 생각에 우선 은신처를 찾기로 했다. 비록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폐허였지만 그들은 지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무너진 집을 발견했다. 깨진 유리와 돌조각을 조심하면서 부러진 기둥과 지붕 틈새로 들어가니 내부는 어둡고 좁지만 숨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시멘트 기와지붕이 외부의 시선을 가려주면서 안에선 움직이기에 충분한 공간을 마련해주는 천혜의 아지트였다.

네 사람은 비틀거리며 겨우 서로에게서 떨어져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친 숨소리만이 어둠 속을 가득 채웠다. 그들은 그대로 죽은 듯이 누워 밤을 맞았다. 얼마만의 숙면이었는지 생각할 여유도, 자유와 행복을 실감할 여지도 없이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J는 땅을 울리는 발소리에 눈을 떴다. 잠시 잊었던 공포가 되살아나며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가까운 곳에서 한 놈이 지나간다. 아니, 두 놈이다. 서로 반대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서로 공격하지 않는 걸 보니 덩치가 비슷한 놈일까? 오른쪽이 더 크게 들리는 걸 봐서 오른쪽 놈이 더 가까이에 있는 모양이었다.

소리가 잦아들자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붕 때문에 사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지붕에 난 몇 개의 작은 틈과 구멍에서 빛줄기가 새어 들어오는 걸로 날이 밝았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누울 땐 몰랐지만 바닥은 땅바닥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부서진 콘크리트와 벽돌과 목재와 잡동사니로 뒤죽박죽이었다. 벽돌조각에 찔린 등과 허벅지가 아파왔다.

끙끙대는 Y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T는 여유롭게도 코를 골고 있다. 소리가 나지 않아 H의 위치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다들 무사히 있을 거란 생각에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시 깨었을 때는 새어드는 빛도 없어서 밤인가 싶었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이나 잠이 들었다 깨었다를 반복했다.

며칠이 지났는지 몰라도 이젠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배고픔이 J의 발목을 잡았다. 지친 몸에 오랫동안 굶어서 움직일 힘이 없었다. 그동안 본체에게 달라붙은 채로 늘 긴장하고 불안에 떨었던 시절엔 당장 내일 자기 목숨이 어찌 될지 모른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이렇게 살아나 죽을 걱정을 안 해도 되니 음식과 물, 잠과 휴식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달았다.

철썩, 철썩.

아주 작지만 물이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물! J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물일 거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최대한 몸을 움직였다. 순수한 의지의 힘으로 늘어진 육신을 억지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밖은 낮인지 낮은 천장에서 빛줄기가 긴 꼬리를 드리우고 있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서 빛을 받아 반짝이는 곳이 보였다. 다름 아닌 물웅덩이다. 그 옆에 엎드려 있는 건 T. 고양이처럼 엎드린 채로 열심히 입을 처박고 물을 마시고 있다. 그가 낸 소리가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처럼 폐쇄된 공간에 울려 펴지고 있었다.

J는 열심히 부서진 벽돌 위를 기어가 팔을 뻗어 물을 손바닥에 떠냈다. 힘이 없어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대부분 흘리고 말았지만 J는 아랑곳없이 입술로 손바닥을 빨았다. 원효 대사가 마신 해골 물이 이런 맛일까. 어디서 어떻게 고였는지 모를 탁한 물에서는 씁쓸한 흙맛과 쇠맛이 났지만 꿀물이라도 되는 양 한 방울도 놓치지 않으려 열심히 떠서 입으로 옮겼다.

아주 약간 기운을 차린 후에 더욱 더 가까이 가서 양손으로 물을 떠마셨다. 안도의 한숨을 쉰 후에 Y와 H의 위치를 파악했다. 둘을 물가로 데려오는 건 힘든 일이기에 주위를 손으로 더듬다 부러진 플라스틱 조각을 찾았다. 상자의 일부분인지 구석이 뾰족했다. 여기에 물을 담아 Y와 H의 입에 흘려 넣어주었다.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지자 H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J에게 감사 인사를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운이 좋았어. 빗물이라도 고인 모양이야.”

T가 지붕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웅덩이 바로 위에도 제법 큰 구멍이 뚫리긴 했지만 J는 빗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른 부분은 전혀 젖어 있지 않았고 최근에 비를 맞은 기억도 없기 때문이었다. 옥상 물탱크가 터지면서 흘러나온 게 아닐까. 이유야 어쨌든 그들에게는 생명수가 담긴 마법의 호수인 셈이었다.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찾자 J는 본능적인 수치심과 자존심을 되찾고 벽돌 무더기에서 꺼낸 찢어진 이불을 몸에 둘렀다. 일단 잡히는 대로 모아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Y의 몸 위에도 덮었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도 폐쇄된 공간에 남녀가 모여 있으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남자 둘은 무신경한 건지 부끄러움을 잊은 건지 여전히 알몸이었다.

“불을 켤 수 있으면 좋겠는데.”

T가 말했다. 어둠에 적응을 했어도 어둡긴 매한가지였다.

“전기도 가스도 없을 텐데 되겠어요? 이렇게 어두우니 양초를 찾을 수도 없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H는 반쯤 엎드린 채로 주위를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난 그냥 라이터라도 주웠으면 좋겠다 싶어서 말한 거야. 담배가 땡겨서.”

“이거 냉장고 같지 않아요?”

“어느 거 말야? 이거?”

T는 즉시 움직였다. 냉장고라면 음식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H는 위에 덮인 벽돌을 걷어내며 말했다.

“예. 앞에 벽돌을 좀 치워 봐요.”

“안에 뭔가 있을까?”

“전기 끊어진지 몇 달은 되었을 걸요. 그래도 일단 열어봅시다.”

한동안 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에 J는 진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Y를 부서진 소파 위로 옮겨 푹신한 방석에 눕혔다.

“열렸다!”

H가 간만에 활기에 찬 목소리를 내며 누워 있는 상태의 냉장고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들어올렸다. 잠깐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내 우엑 하면서 손을 놓았다. 짧은 순간인데도 역한 냄새가 내부에 확 퍼졌다.

T는 J 쪽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 틀렸어.”

결국 바닥에 고인 썩은 물밖에는 얻은 게 없었다. 그들은 지붕 위와 가장자리 틈으로 들어오는 실처럼 가느다란 빛에 의지하며 Y 주위에 둘러앉았다. 모두들 몸 곳곳이 찢어지고 부러졌고 일부는 사라졌으며 피부에는 마른 피와 흙먼지가 두텁게 달라붙은 상태였으나 표정만은 편안해 보였다.

두 남자는 J가 말없이 건넨 천 조각을 받아들고 허리 주위에 둘렀다. 문득 자신들의 모습이 원시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식동물의 공격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며 망신창이가 된 불쌍한 원시인. 그들에겐 아직 무기도 불도 없었다. 석기시대만큼의 문명도 주어지지 않은 채로 퇴화되어 멸종될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였다.

“먹을 걸 찾아야 하는데. 결국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나?”

T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H가 즉각 대답했다.

“신중해야 해요. 모처럼 안전한 곳을 찾았는데 자칫 잘못하면 자신만이 아니라 여기 남은 사람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요.”

“자신은 밖에 안 나갈 것처럼 얘기하는구만?”

“왜 굳이 나가서 위험을 자초합니까?”

“그럼 이대로 앉아서 굶어죽잔 말이야?”

“누가 가만히 있을 거라 그랬나요? 일단 안전을 확보하고 신중하게……”

“글쎄 언제까지 신중 찾고 있을 거냐고! 슬슬 한계야. 벌써, 응? 자네들 몸에서 나는 피 냄새가 향긋하게 느껴질 지경이란 말이야.”

끔찍한 말을 태연하게 하는 T를 보며 J는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일단 여기에 있는 한 안전할 건 분명합니다.”

“확실해? 믿을 수 있는 소리야?”

T가 돌무더기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H는 신중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직까지 무사한 것만 봐도 알죠. 도시에 그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셨죠? 놈들이 눈으로 찾든 냄새로 찾든 여길 쉽게 발견하진 못할 겁니다.”

“저놈들은 어느 정도 똑똑한 거야?”

“글쎄요. 그냥 원숭이나 개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코가 개만큼 좋으면 큰일인데. 여기도 금방 찾아낼 거야.”

“저도 확신할 순 없지만 그 정도로 보이진 않았어요.”

“어차피 저놈들도 원래는 사람이었을 거 아냐?”

“그야 그렇겠죠.”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이 끔찍한 비극의 원인이자 시발점이 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무겁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외계인이나 바다 혹은 화산 속 깊숙이 숨어 있던 괴물의 짓이었다면 이 정도로 괴롭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대응도 더 빨랐을 게 분명하다. 처음 시작은 백주대낮에 상대방의 몸을 깨무는 사람들이었다. 길 가던 사람이 갑자기 팔을 깨물어서 저항을 하니 도망갔더라, 하는 짧은 해외토픽 수준의 사건이었다. 워낙 묘하고 신기한 사건이 끊이지 않는 현대 사회라서 수많은 뉴스의 물결에 떠내려가 금방 잊혔다.

같은 현상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시점에는 이미 대응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친 퍼진 후였다. 사람이 사람을 덮쳐서 살을 씹고 피를 마시다니. 먹는다기보다 차라리 흡수했다고 표현하는 게 나을지 몰랐다.

포식자는 피식자의 몸뚱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소화하여 양분으로 만드는 단계를 생략해버린 듯이 곧바로 덩치를 불려나갔다. 네 명 정도 잡아먹은 사람은 이미 더 이상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되고 말았다. 사람을 닮은 거대한 살덩어리가 새로운 먹이를 찾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들은 사람만이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싸우고 서로 잡아먹었다. 약육강식, 부익부 빈익빈. 더 많은 사람을 집어삼킬수록 더욱 커지고 강해지면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잡아먹을 수 있는 법. 상대적으로 작은 놈은 먹히기 싫으면 마주치는 순간 도망가야 했다.

그들의 수가 늘어남과 동시에 사람의 수는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사람이 거의 전멸에 가깝게 줄어들자 이번엔 그들의 수가 줄기 시작했다. 로지스틱 곡선을 그리듯 개체수는 정점을 찍은 후에 감소했다. 아직까지 그들의 생식이나 수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연구할 학자들이 남아나질 않았으니까.

누군가는 천벌이라 할 테고 다른 누구는 진화의 결과라 할지도 모른다. 시인의 감수성을 지닌 이라면 지구의 지배자가 거대 생물인 공룡에서 조그만 인간을 거쳐 다시 거대한 존재에게로 넘어갔다며 탄식할지도. 애초에 그들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하기엔 성급한 단정이겠지만…….

“지금쯤 세계 인구는 얼마나 됐을까?”

H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직 무사한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어쩌면 살아남은 이들이 모여서 살고 있을지도 몰라. 성벽을 쌓거나 큰 빌딩 안에 모여서. 그래,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게 안전하겠지. 생존한 집단이 있다면 군대일 가능성이 제일 클 텐데, 남자들만 있어가지고 원만하게 지낼 수 있을까? 어차피 야만스런 세상이니 여자를 잡으러 다니는 게 중요한 임무가 되겠지. 놈들이 수영을 할 수 있나 몰라? 아무래도 못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멀쩡한 사람들은 다 작은 섬에 모여 살고 있을 지도. 독도가 대한민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려나? 다만 섬 안에서 괴물이 생겨나면 도망갈 길이 없다는 게 문제인데……”

“흥. 신문도 없고 TV도 안 나오는 지금 상황에서 뭘 알 수 있겠나?”

T는 틈새로 새어드는 빛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말했다.

“바깥세상은 이미 저것들 천지야. 세상의 주인이 바뀐 거라고.”

“그렇죠. 우린 그저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것에 불과합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게 아니라 고래 싸움 덕에 죽다 살아난 새우지요. 아니면 고래 등에 붙어 있던 조가비라고나 할까요?”

“고래든 상어든 놈들에게는 한 입에 꿀꺽이지. 이번에 잡히면 끝이야. 또 손가락 끝에 매달리는 요행이 일어날 것 같아?”

“소화되어서 엉덩이 살이라도 되겠죠, 뭐.”

“쉿!”

돌연 J가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거의 동시에 땅이 가볍게 흔들렸다.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발소리와 지진 같은 진동이 이어지긴 했으나 멀리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기에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쿵, 쿵.

천둥이 치듯 낮고 육중한 소리가 들렸다. 꽤 가까워지나 했더니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한참이나 숨을 죽이고 있는 그들은 기다려도 위험이 다가오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H가 말했다.

“놈들은 귀는 잘 안 들려요. 그것만은 틀림없어요.”

“정말인가?”

“제가 삼켜지기 전까지 동료들이랑 화염병 같은 걸로 맞서 싸웠거든요. 시선을 돌리려고 뒤에서 공포탄을 쐈는데 돌아보지도 않더라고요.”

“그게 사실이라면 숨죽이고 있을 필요는 없겠구만. 근데 그게 너무 큰 놈이라서 안 들린 걸 수도 있어. 작은 놈이라면 들을지도 모르지.”

“하긴 그럴지도 모르……”

그때 지붕이 무너지며 환한 빛이 쏟아졌다.

3m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 흉흉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선한 피를 뒤집어썼는지 시뻘건 몸이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놈은 양손으로 지붕을 마구 걷어내면서 입에선 걸쭉한 침을 흘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지만 Y는 여전히 끙끙 앓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고 있어서 아마 사냥꾼이 눈앞에 나타난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뭐 해! 빨리 안 오고!”

뒤뚱거리며 제일 앞서 도망치던 T가 돌아보며 꾸짖듯 외쳤다. H는 여전히 자신의 양심 혹은 정의감과 싸우고 있는지 머뭇거렸다.

결심이 섰는지 H는 부서진 벽돌을 집어서 던졌다. 처음엔 빗나갔으나 두 번째 돌은 적의 몸에 맞았다! 하지만 상대는 약간 머뭇거릴 뿐 아파하는 척도 하지 않았다. 세 번째로 던진 벽돌 조각은 팔을 맞혔으나 놈은 팔뚝에 조각이 박힌 채로 몸을 기울여 남자를 향해 팔을 뻗었다.

으악 소리를 지르며 그는 뒷걸음을 치다가 웅덩이에 발을 헛디디며 넘어졌다. 도망치다가 돌아본 J는 순간 물을 두고 가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절감하여 자기혐오에 빠진 것도 잠시. 지금은 살기 위해 전력으로 움직이는 데 정신을 쏟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H가 넘어지는 바람에 놈은 헛손질을 하면서 잠시 틈을 보였다. 그 사이에 H는 Y에게로 가서 깨우거나 부축해 일으키려 했으나 어느 쪽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전에 놈이 자신을 잡아먹는 게 더 빠를 터였다.

H는 긴급피난이라는 법률용어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카르네아데스의 널빤지에 대해서도 알고. 바로 지금이 그에 해당하는 모범답안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Y를 버리고 가는 게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망설이는 건 그가 여리고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증거일까. H는 그 자리에서 놓친 버스를 바라보듯 멍한 얼굴로 굳어져 있었다.

“여기다, 이 괴물아!”

불현듯 들린 소리에 놀란 H가 돌아보니 J가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방금전 자신처럼 돌을 던지며 소리치고 있었다. 맞히진 못했으나 적의 시선을 돌릴 정도는 되었다. 눈이 마주치자 다급하게 외쳤다.

“도망쳐요!”

H는 그제야 묶였던 주술이 풀린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하나뿐인 다리로는 달릴 수가 없어서 주위의 돌무더기를 손으로 짚어가며 반쯤 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놈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눈앞에 가만히 놓인 먹잇감과 급하게 도망치는 먹잇감, 그리고 갑자기 멀리에서 도발을 해온 먹잇감 중에서 무엇을 노려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 같았다.

J로서는 적의 지능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비록 목숨을 건 도박이지만 해볼 가치는 있었다. 놈이 자기를 노린다면 비록 자신은 없어도 가능한 도망칠 작정이었다. Y나 H를 노린다면 그들의 희생으로 자신은 살아날 수 있으리라. 한쪽 다리가 없는 H가 제대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기대하긴 힘들었다. 여전히 사경을 헤매는 Y야 말할 것도 없고.

결국은 놈은 손쉬운 해답을 선택했다. 무너진 벽돌 무더기를 넘어오더니 그대로 엎드리면서 Y의 팔다리를 움켜쥐고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미처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본 그 광경은 통닭에서 다리를 뜯어내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H가 가까이 오자 J는 부축을 하고 산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멀찍이 떨어진 전봇대 뒤에 숨어 있던 T가 소심하게 고개만 슬쩍 내밀더니 오라고 손짓을 했다. 놈들은 먹는 데에 정신이 팔릴 때는 다른 모든 걸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덕분에 일단 먹이만 던져주면 도망치는 건 비교적 손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물론 그 먹이를 마련하는 게 너무나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 * * * *


세 사람은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걸었다. 들킬 염려도 있으나 적의 모습을 빨리 발견할 수 있는데다가 나무가 우거져 있어 도망치는 데에 유리할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놈들은 나무를 피하거나 사이로 조심스레 이동하려 하지 않고 무작정 나무를 밀어붙이며 쓰러뜨리면서 나아가려 했다. 압도적으로 커서 나무가 거치적거리지 않을 정도의 덩치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10m가 넘지 않는 놈들이라면 그런 불도저처럼 우악스런 전진은 속도를 떨어뜨릴 뿐이었다. 물론 이쪽에게는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마을도 안전하지 않아. 산속에 가서 동굴이라도 찾아야 되겠어.”

아까부터 T 혼자서만 계속 말을 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집을 찾아보는 건데. 너무 급하게 도망쳐왔어. 물이라도 챙겼어야 했는데. 집 안에 물병이나 뭔가 쓸 만한 물건이 더 있었을 거야. 놈들은 먹을 때는 완전히 무방비인 것 같았어. 칼이나 도끼만 있으면 역공을 했을 수도 있었는데……”

“계속 말만 이러쿵저러쿵. 아저씨가 제일 먼저 도망친 거 압니까?”

H가 따지듯 쏘아붙였다. T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젊은이로부터 당한 지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전형적인 고집 센 중년 남자의 꼬장꼬장한 표정이었다.

“그럼 그 상황에서 어쩌라고? 용감하게 맞서 싸우라고?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내 몸을 바쳐? 싸우긴커녕 잡아먹힐 게 뻔한데! 그놈 팔뚝 봤어? 사람 허리보다 굵었다고. 정말 사람 몇 명은 갈아 넣은 거 아니겠어? 그야 뭐, 여자분이야 참 안 되었지. 안 된 건 아는데, 달리 어쩌겠나. 그분이 몸을 바쳐서 우리를 살려준 거라고 생각하고……”

“다음번에 또 괴물이 나타나면 그땐 아저씨 차례겠군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가 힘을 합쳐서……”

“아까는 힘을 합치려고 하지도 않았잖아요! 여기 아가씨는 절 살리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줬단 말입니다.”

“그 상황에선 다함께 덤비다간 다 죽는 꼴이라고. 한 명의 희생으로 셋이 살았으니 그나마도 다행인 거지.”

“아, 그렇습니까? 무려 4분의 1이 희생되어 4분의 3이 살았으니 참으로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군요!”

일일이 사사건건 비꼬는 투로 맞서자 T도 더 못 참고 으르렁거렸다. J에게는 두 남자가 말다툼하는 꼴이 마주보며 짖어대는 개들처럼 보였다.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그 여자랑 아는 사이였나? 가족이나 친척이라도 돼?”

“생면부지였습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함께 힘든 시기를 보낸 사람이죠.”

“인격자 나셨네. 아까는 옆 손가락 아가씨한테 목을 매더니 여자라면 다 좋다 이거야? 나이도 많고 몸에 주름도 자글자글 하더만.”

“생긴 게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남는 게 인간이 할 짓인가 싶었던 겁니다. 희생이라니……. 결국 저 괴물들이랑 다를 게 뭐가 있어요? 누굴 죽여서 자기가 살아남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고 명분이 있단 말입니까!”

“그럼 가서 싸워 이 사람아! 화염병이든 소화기든 들고 놈들이랑 싸워보란 말이야! 세상엔 말이야, 사람 힘으로 안 되는 게 훨씬 많아. 어린애도 아니면서 왜 그러나? 자네 몇 살이야?”

T는 벌게진 얼굴로 침을 튀어가며 설교를 늘어놓았다. H는 고개를 살짝 돌려 시선을 피하다가 씹어 뱉듯이 대답했다.

“스물여덟입니다.”

“군대는 당연히 다녀왔겠지?”

H가 고개를 끄덕이자 T는 한결 친근한 태도로 말했다.

“겪을 만큼 겪었으면서 그렇게 눈치가 없어? 짬밥은 콧구멍으로 먹었나? 내가 부사관으로 군생활을 7년을 했는데 말야……”

T는 잠시 어느 부대에서 무엇을 했다는 둥 군대 자랑을 늘어놓았으나 두 사람의 귀에 머물지 못하고 이내 흘러내렸다.

“……결국 센 놈이 약한 놈을 먹는 거야. 우리는 가장 약한 처지가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냥 그놈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게 제일 속 편했겠구만. 그때는 이런 불안은 없었잖아?”

“무슨 소립니까? 겨우 빠져나왔는데 그 생지옥이 낫다니요. 탈옥한 죄수가 잡힐까 두렵다고 감방에 그냥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꼴이잖습니까! 얼마든지 가고 싶음 돌아가세요. 그 괴물이 얼씨구나 받아줄 겁니다. 식후 디저트로 딱 좋겠다 싶겠죠.”

“누가 돌아가재? 말이 그렇다 이거야. 요는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똘똘 뭉쳐서 한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 말이지.”

J는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계속 납득할 수 없는 말만 일방적으로 했지만 마지막 문장만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었다. 다만 누구와 어떻게 뭉쳐야 하느냐가 문제일 뿐.

도시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모습을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두 거인의 싸움에서 운 좋게 떨어져 나온 사람들을 멀리서나마 몇 명 목격하긴 했다. 대부분 알몸으로 추위와 두려움에 떨면서 무너진 건물 틈에서 먹을 것이나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들켜서 짧은 추격전 끝에 허무하게 잡아먹히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이미 세상엔 뭉쳐야 할 대상이 없었다. 봄의 햇살에 눈이 녹아 사라진 벌판에서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허망하게 헤매는 꼴이었다. 자신들과 같이 요행으로 살아남은 소수도 후손을 남기면서 수명에 준하는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면 결국 인간 멸종에 대한 예외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저거 봐. 산속이 최고 안전하다니까.”

T가 태연히 말하며 가리키는 쪽에는 포식자가 먹이 하나를 붙잡은 광경이 펼쳐졌다. 분명 이들과 같이 싸우는 통에 빠져나온 생존자일 것이다. 놈들이 활보하는 도시 한가운데에 혼자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놈은 양손으로 다리를 움켜쥐고 거꾸로 치켜들어 머리부터 삼키고 있었다. 피와 살점이 뚝뚝 떨어지는 광경을 보면서도 T는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J는 더 나올 것도 없어서 헛구역질을 했고 H는 고개를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숲은 밤이 더 빨리 찾아왔다. T의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산속을 헤맸으나 마음에 드는 동굴을 찾아내지 못해서 결국 바위 밑을 은신처로 정하고 주위에서 돌과 나뭇가지, 낙엽을 최대한 그러모아 자신들의 몸을 덮었다.

숲을 헤치고 나아가면서 모은 이름도 모를 열매와 버섯으로 허기를 달랬다. 맛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저 독버섯이 아니면 다행이라는 심정으로 제대로 씹지도 않고 목으로 넘겼다. 물은 길쭉한 풀줄기나 이끼를 씹어서 근근이 얻었다.

숲이 어둠에 뒤덮이자 벌레 울음소리가 한층 선명하게 들렸다.

“틀림없어. 생존자들은 숲속이나 산꼭대기에 있을 거야.”

T는 아직도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듯이 확신을 담고 중얼거렸다.

“거 조용히 좀 합시다.”

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할 찰나 H가 매섭게 말을 잘랐다. T는 알아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더니 몸을 돌려 누웠다. 세 사람은 말없이 잠이 오기를 기다렸다. 유일하며 가장 완전한 도피처인 꿈의 세계로 갈 수 있기를 바라며.

시간이 흘러도 J는 잘 수가 없었다. H가 간헐적으로 내는 재채기 소리가 가장 큰 이유였다. 어쩐지 점점 간격이 짧아지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물어봐도 반응이 없다. 은근히 걱정이 되어 살펴보려고 상체를 일으켰다. 팔이 H의 등에 스쳤는데 피부는 차가우면서도 땀투성이였다. 딱히 의학 지식이 없는 J는 증상을 봐도 어디가 아픈지 어떤 병인지 판단하지 못했다. 몸살 같기도 하고 오한이 든 것처럼도 보이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Y가 그랬듯 열은 없지만 온몸에 진땀을 흘렸고 악몽에 빠진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입에서는 잠꼬대 비슷한 낮은 웅얼거림. 낮게 속삭이는 정도의 음량이라 전부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난 ……가 아니야……” 무엇이 아니라는 걸까? J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다 죽어버리는 거 나아……” 극단적인 말도 나왔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어……” “먹히기 전에 먹어야 해……” 뒤이어 욕설이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려나왔다.

그 서슬에 T가 잠에서 깨었는지 뒤척였다. 상대의 처지도 모르고 걱정은커녕 투덜거렸다.

“나 원, 잠을 잘 수가 있나. 남 보고는 조용히 하라고 해놓고…… 아악!”

갑자기 말을 끝맺지 못하고 굵은 비명을 토해내었다. 어둠 속에서 솟구치는 피보라가 그들의 앞날처럼 새까만 장막을 드리웠다. H가 반대쪽으로 누워 있던 T의 다리를 깨문 것이다. J는 불에 댄 것처럼 황급히 놀라며 앉은 채로 뒤로 물러났다. 번뜩이는 H의 눈동자를 본 순간 자신이 매달려 있던 본체의 눈에서 보았던 반짝임을 떠올렸다.

동굴 속의 불빛……

불길한 미래로 인도하는 신호등일까, 아니면 멸망하는 인류를 위한 조등(弔燈)일까…….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이미 늦은 것 같았다. H는 이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T는 숨을 헐떡이며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고 밀었지만 H는 물면 안 놓는 악어처럼 꽉 깨문 채로 버티고 있었다.

“아가씨, 날 좀 구해줘!”

자력으로 해결하려 했다가 이제 속수무책이라 판단했던지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J는 인간에 대한 혐오마저 생겨났다. 바로 좀 전에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말했던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절박하고 애처로운 도움 요청이 아닌가. 이토록 이기적일 수 있을까. J는 지금 만약 자신이 살기 위해 당신을 희생하겠다고 말하면 T는 무슨 표정을 지을지, 뭐라고 반박할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살려줘, 아가씨! 나 죽겠어! 아파! 좀 도와줘!”

쿵, 쿵, 쿵.

비명이 신호라도 된 듯이 육중한 소리와 진동이 점차 커지면서 일대를 감쌌다. 땅이 흔들리며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마치 T의 목소리를 듣고 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H는 좀 전에 저들이 귀가 어둡다고 말했지 않던가. 어느 쪽이 진실일까. J는 조금 더 생각하다가 피 냄새 때문일 거란 결론을 내렸다. 고요한 숲의 적막을 붉게 물들인 건 괴물이 된 H의 불타는 눈빛도 아니고 T가 토해낸 고통도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 나온 생명의 증거, 활력의 젖줄이었다.

J는 얼른 몸을 일으켜 반대방향으로 뛰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멈춰야 했다. 맞은편에선 훨씬 어마어마한 소리가 메아리를 치면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나는 소리가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쿵, 쿵, 쿵.

이 정도 발소리를 낼 수 있는 덩치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거인을 잡아먹은 거인. 지금껏 본 적 없는 가장 크고 강한 거인! J는 자신보다 큰 놈을 게걸스레 뜯어먹던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용감한 도전자는 승리에 대한 보상으로 누구보다 거대한 육체를 손에 넣었던 것이다.

“살려줘! 살려줘!”

무언가 시커먼 게 바람을 일으키며 옆을 지나갔다. 잠시 조용해져서 기절했거나 죽은 줄 알았던 T가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비틀대는 걸음을 보니 H에게 다리를 뜯긴 모양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다리에서 철철 흘러넘치는 핏줄기가 보일 정도였다. 돌아보니 H는 만취한 것처럼 몸을 제대로 못 가누면서도 다리를 들고 뜯어먹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T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J를 노리지 않은 건 아마도 T의 움직임과 강렬한 피 냄새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J는 상대의 시선을 끌지 않도록 조심스레 뒷걸음쳐 바위 뒤로 숨었다. T와 H의 추격전을 지켜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 뒤를 천천히 쫓아갔다.

주위가 밝아져서 빛을 발하는 쪽을 보니 산 아래쪽 건물이 불길에 휩싸여 있다. 그 옆에는 사람으로 만들어진 기둥이 우뚝 서있었다. 아니, 기둥이 아니다. 방금 들었던 엄청난 발소리의 주인이다.

꼭대기는 어둠에 묻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불빛을 받아 그림자가 일렁이는 기둥은 분명 다리다. 고개를 들고 잘 살펴보면 꼭 산꼭대기에 불을 피운 것처럼 어둠 속에서 눈동자 두 개가 반짝였다. 저 덩치는 200m? 300m는 될까? 어둠에 묻힌 거대한 상반신과 굵은 팔뚝이 먹구름처럼 하늘을 덮었다. J는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오싹한 느낌에 양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한편으로 T는 전력으로 비탈을 내려가고 있었다. 아래쪽엔 초거대 괴물이 있는데 왜 그쪽으로 가는 걸까. 작은 괴물보단 큰 괴물이 도망치기 쉽다고 판단한 걸까? 다리를 집어삼킨 H는 불룩 튀어나온 듯한 상체와 굵은 팔을 휘저으며 뒤를 쫓아갔다. 여전히 취한 듯 위태로운 걸음이었다.

둘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다리에 입은 상처와 출혈이 달리는 데 부담을 줬던 탓이다. 뒤를 돌아볼 때마다 가까워지는 H의 모습은 무시무시했다. 무표정한 얼굴, 타오르는 눈동자, 벌어진 입 사이로 튀어나온 혀, 공기를 움켜쥐려는 듯이 휘젓는 팔, 휘청대면서도 재빠르게 움직이는 다리……. 두 개의 다리!

J는 얼른 손으로 입을 덮어 비명을 막았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재빠른 동작이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H의 다리가 생겼다! 본체에서 탈출할 때 무릎 위쪽으로 잘려나갔던 한쪽 다리가, 잠들기 전까지도 없었던 다리가 그새 돋아났다니.

T로부터 얻은 살과 피로 만든 새로운 신체부위임이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멀리에서 봐도 제대로 된 인간의 다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재료가 좀 모자랐던지 정상 다리보다 약간 짧은, 나무 의족을 단 그림책 속의 해적 선장을 연상시켰다. 비록 그런 다리를 달고서도 H는 빠르게 잘만 이동했다.

건물의 모퉁이를 돌지 못하고 따라잡힐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T는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무기가 될 만한 것, 최소한 던질 돌멩이라도 있나 찾아보았다. 시선을 불안하게 옮기는 바람에 발을 헛디뎌 넘어졌지만 결과적으로 그 행동이 T의 목숨을 구했다. 건물 창문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T를 붙잡으려다 실패한 것이다. 분노하여 건물 벽을 무너뜨리며 모습을 드러낸 놈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게 바로 H였다. 벽돌에 부딪치며 찰과상을 입었으나 목숨을 건진 T의 눈에 신장 5m 정도 되는 괴물이 H를 움켜쥔 모습이 보였다. 눈을 감자 뼈 부러지는 소리와 가죽 주머니가 터지는 듯한 소리, 즙을 쥐어짜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겨우 몸을 일으킨 T는 용기를 내어 눈을 살짝 떴다. 어두워서 뚜렷이 보이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오직 역겨운 소리만이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도와줄 뿐……. 하지만 그가 상상해낸 가장 무시무시한 광경이 거기에 있었다. 하체부터 통째로 삼켜지고 있으면서도 H는 상대방의 팔뚝을 물고 뜯어먹으려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불이 산 위로 번지고 있어서 J에게도 H를 삼키는 놈의 모습이 보였다. 곧 T는 포식자가 식사를 마치기 전에 즉시 그 자리를 피해야 함을 깨닫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가는 방향은 J가 있는 쪽도 아니고 도로가 뻗은 도시 안쪽도 아니었다. 바로 불타는 건물, 괴물의 다리가 길을 막고 서있는 쪽이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거대한 포식자를 향해 달려가는지는 짐작이 갔다.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안전한 감방 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탈옥수처럼 절박하고 초조한 심정으로.

T는 집채만 한 발 앞에서 잠시 멈춰서 등을 웅크리고 있었다. 겨우 숨을 고른 그는 뒤꿈치를 향해 개구리처럼 펄쩍 뛰었다. 첫 시도는 미끄러져 실패하고 두 번째는 매달리자마자 놈이 서서히 걸음을 떼기 위해 뒤꿈치를 들면서 떨어져서 실패했다. 한 걸음의 너비가 어마어마하니까 지금 놓치면 따라잡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다음 기회를 얻지 못할지도 모를 일. T는 세 번째이자 최후의 시도로 발꿈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성공했다.

발꿈치 위에 뒤엉켜 있던 사람들이 꿈틀거렸다. 예고도 없이 나타난 불청객을 환영해줄 기색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손과 발로 T를 밀어내려 했다. 반면 그는 암벽등반을 하는 것처럼 작은 틈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단단히 붙잡고 매달려 버텼다. 어떻게 성공시킨 필사의 히치하이킹인데 포기할 수 있겠나. 밀려나면 죽음이라는 각오로 버틸 수밖에.

놈이 발을 떼면서 시야에서 멀어지는 바람에 J는 T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발을 땅에 딛을 때의 충격으로 나가떨어졌을 수도 있고 본체의 일부로 무사히 정착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이제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H를 삼키는 괴물이 식사를 마치기 전에 눈에 띄지 않도록 얼른 도망치는 게 급선무였다. 이놈들에게는 포만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 아닐까. 도통 만족할 줄을 모른다. 배가 부르니 식사를 마치는 일이 없다. 먹을 것만 있다면 끊임없이 집어삼킨다. 그 결과가 지진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지고 있는 저 초거대 몸집이었다. 하나의 개체라기보다 이미 하나의 세계라고나 할까. 그 속에 T 같은 이가 하나쯤 더 있거나 없어도 아무런 티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J는 그에 대해선 더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일단 나무 사이를 지나 산비탈을 내려갔다. 불길이 산 위로 이어지고 있었기에 이제 산도 은신처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혼자인 데다가 무기 하나 없는 연약한 육체. 이대로는 살아남기 힘들다. 낮에 봤던 희생자들이 떠올랐다. 결국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 괴물의 먹을거리가 되는 최후를 맞을 운명일까.

벌써 거리엔 악취가 진동했다.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놈들은 귀는 어떨지 몰라도 피 냄새는 귀신 같이 알아차리고 몰려드니까. J의 몸은 말라붙은 피와 땀으로 절어 있으니 주위의 냄새가 강할수록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에 좋았다.

유독 냄새가 역한 곳을 찾아다니다 썩은 시체도 많이 발견했다. 어둠이 가려준 것도 있고 여러 번 보아서 익숙해졌는지 구역질은 나지 않았다. 맨홀뚜껑을 발견하자 반가웠다. 힌트를 얻은 기분이었다.

냄새를 감추려면 냄새가 지독한 곳에 숨는 수밖에.

J는 심호흡을 하며 각오를 다진 다음 맨홀 속으로 들어갔다. 통로는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크기였다. 결국 여기가 그동안 본 중에선 가장 안전한 장소가 아닐까.

숨을 헐떡이며 사다리를 타고 하수구로 내려갔다. 좁은 통로를 지나니 내부는 한층 넓어졌다. 불안함이 앞섰다. 넓으면 넓을수록 적이 들어올 가능성도 커지는 셈이니까. 바닥은 축축하고 미끄러웠다. 다행히 정신이 멍하고 코가 둔해져서 그런지 악취에도 점점 무뎌졌다. 어둠속에서 조심스레 나아가다가 넓은 통로보다는 차라리 원래 있던 곳이 안전하겠다 싶어서 되돌아갔다. 기억을 총동원하여 간신히 내려왔던 입구를 찾아서 사다리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잠을 청했다.

* * * * *


며칠 동안 거기에 있었는지 잊어버렸다. 맨홀뚜껑의 구멍 사이로 빛이 비쳐 별자리처럼 반짝이면 낮이고 아무것도 없이 시커먼 어둠이면 밤이었다. 어느 날에는 구멍과 가장자리 틈새로 물이 똑똑 떨어져서 잠에서 깨어났다. 비다, 비가 오고 있어. J는 맑은 물이 반가워서 정신없이 받아 마셨다. 덕분에 기운도 나고 냄새도 한층 덜해진 느낌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가 멍하고 배도 고파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수구 너머에 있을지도 모를 괴물이 무섭기도 했고. 결국 지친 상태로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잠이 들었다 깨었고 위에서 가끔 떨어지는 쇠맛이 나는 물을 받아 마시며 연명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가는 허기와 나른함, 악취와 지루함 때문에 익숙해질 수 없는 나날. 마침내 이런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여느 때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팔에 얼굴을 묻고 있었는데 몸에 빛이 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 어둠 속 생활로 인해 작은 빛에도 몸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고개를 들자 쏟아지는 빛이 너무나 환해서 괴로울 정도였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슬쩍 눈을 뜨자 등불을 든 시커먼 사람 그림자 두 개가 어렴풋이 보였다.

“쉿!”

등불을 든 사람이 얼른 말했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려 비명을 지르려다가 얼른 침을 삼키며 소리를 막았다.

“너 사람이로구나. 걱정하지 마라. 아무도 널 해치지 않을 테니까. 어디서 온 거냐? 어떻게 지금껏 살아있었지?”

나이 지긋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둘 다 헐렁하고 두꺼운 옷으로 전신을 덮고 있었다. J는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다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전 왼손 약손가락이었어요…….”

두 사람은 잠시 마주보며 뭐라고 속삭였다. 과연 제대로 알아들은 걸까? 잠시 후에 다시 고개를 돌린 남자가 말했다.

“어제 거인 둘이 싸웠다는 소식을 들었어. 생존자를 몇 명 구해냈지.”

눈이 불빛에 익숙해지면서 상대방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주름진 얼굴 사이로 짙은 그림자가 자리 잡았으나 면도도 했고 상처도 없었다. 침착하고 사려 깊은 눈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의 눈.

“너도 그때 운 좋게 분리되었던 모양이로구나.”

뒤에 있던 사람이 긴 헝겊을 내밀었다.

“이걸 덮으렴.”

이번엔 나이든 여자의 목소리다. 인자하고 사려 깊은 분위기였다. 오랜만에 듣는 사람다운 따뜻한 목소리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우리를 따라오너라.”

남자가 말했다. J는 말없이 천을 어깨에 덮고 몸을 일으켰다.

“걸을 수 있겠니?”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내 휘청거렸다. 여자가 얼른 다가가 반쯤 껴안듯이 부축했다. 남자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우리 힘으론 안 되겠어. 당신 무릎이 안 좋잖아요? 가서 사람들을 더 불러오든가 해야지.”

“내가 같이 있을게요. 부탁해요, 여보.”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하수구 너머로 사라졌다. 여자는 품에서 작은 촛대를 꺼냈다. 머그컵 안에 작은 양초 조각이 들어 있는 볼품없는 촛대지만 어둠 속에서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다. 여자는 라이터로 초에 불을 붙였다.

“조금만 참아, 색시. 사람들이 들것을 갖고 올 테니까.”

“다들…… 어디에서 살고 있죠?”

여자는 손가락을 들어 아래쪽을 가리켰다.

“저 위는 이미 우리 세상이 아니야. 좋든 싫든 저들에게 넘겨준 것이고, 우린 우리대로 또 살 길을 찾아야지. 안 그래? 내가 궁금한 건 언젠가 위의 놈들이 서로 먹고 먹히다 단 하나만 남게 되는 때가 오면 어쩌나 하는 거야. 그 녀석은 어떻게 될까? 더 먹을 게 없으니 굶주려서 죽는다면 우리에게야 좋은 일이겠지. 근데 그렇지 않고 또 다른 방식으로 번식을 하게 되면 그게 걱정이 아니겠니? 그때가 되면 우리도 이 땅 밑 어둠에 적응한 새로운 존재가 될지도 모르지…….”

“함께 있는 분들은 어느 정도인가요?”

“정확히는 모르겠어. 한곳에서 다 모여 살진 않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우린 자주 왕래를 한단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위로 올라가서 구해오기도 하고 사람들끼리 교환도 하고 그러니까. 오늘은 우리 부부 차례였어.”

“위험할 텐데요…….”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 걸. 다들 교대로 하는 일이니까 우리만 빠질 수는 없잖니.”

잠시 J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이든 여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깨달은 게 있어. 위의 놈들이 뭉쳐서 커지고 세진다면, 우리도 뭉쳐서 세져야 하지 않겠어? 개미도 그렇게 작고 약한데 모여서 살면 큰 집도 짓고 잘 살지 않아? 아가씨도 우리랑 함께 할 거라 믿어.”

뭉쳐야 세진다. J는 그렇게 주장했던 사람의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했다. 다만 그때는 회의적이었다. 어디에 누가 있으며 누구랑 어떻게 뭉쳐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여기에 얼마든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새로운 세상이 서서히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함께 가자고, 더불어 살게 해달라고 엎드려 빌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도 불안과 절망에 길들여진 마음이 J의 발목을 부여잡고 놓아줄 줄을 몰랐다. 스스로가 쓸모없다는 생각, 존재 가치도 없다는 생각, 남에게 짐이 되고 폐만 끼칠 거란 생각, 언젠가 결국 괴물의 먹잇감이 되고 말 거란 생각, 그보다 먼저 스스로가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차라리 그편이 나을 거라는 생각까지……

점점 추워졌다. 몸이 떨린다. 땀이 피부 위를 흘러 간지러웠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H의 눈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온몸이 그 불덩어리에 휩싸인 것만 같다. 수없이 많은 조그만 바늘이 전신을 찔러대고, 벌레가 식도를 기어오르고, 끓어 넘치는 죽처럼 뇌가 녹아서 흘러내리고…….

깜빡 잠이 든 것처럼 몽롱한 J의 정신을 깨운 건 철벅대는 작은 소리였다. 여러 명이 물기로 흥건히 젖은 길을 걸으면서 동시에 내는 발소리. 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걸 몇 번의 체험을 통해 뼛속에 사무치도록 잘 알고 있었다.

킁킁, 킁킁.

좋은 냄새가 났다. 발소리가 커지면서 점차 농밀해지고 있다. 그리우면서도 달콤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행복한 냄새. 코를 통해 곧장 들어가 텅 빈 두뇌 속을 가득 채워줄 것만 같았다. 당장 급한 허기를 달래긴 했지만 이걸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고나 할까. 절로 벌어진 입에서 의미 없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호적(號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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