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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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2014.02.01 10:3202.01


- 쾅쾅쾅!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는 눈을 떴다. 
- 탕! 탕탕!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 딱. 딱.
그는 귀를 기울였다. 두드리는 소리는 다급했으나 강도는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정체 모를 손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다. 그는 두드리는 소리가 툭, 툭, 정도로 약해지다가 마침내 멈출 때까지 숨을 죽인 채로 계속 듣고 있었다.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그는 잠시 기다렸다.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불을 켜지 않은 채 좁은 방을 가로질러 문으로 다가갔다. 조그만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복도는 새까만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쉰 뒤에 조심스럽게 자물쇠를 풀었다. 문을 열었다.
피에 젖은 여자의 얼굴이 힘없이 그의 발등 위에 얹혔다. 초점을 잃은 눈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향했다.

경찰은 범인을 잡지 못했다. 잡지 않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생각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여자는 오피스텔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근처 노래방에서 일하는 도우미라고 했다. 골목에서 기습을 당하고 놀라서 가장 가까운 건물로 뛰어든 것 같았다. 여자가 피를 흘리면서 어떻게 9층까지 비상계단을 기어올라왔는지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난도질 당한 몸을 이끌고 9층을 어떻게든 올라왔다. 그리고 비상문 바로 맞은편에 있는 그의 방 문을 두드린 것이다.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면 범인을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비상계단에는 감시카메라가 없었다. 현관에도 감시카메라 같은 건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한 것도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다. 설치된 카메라가 실제로 작동을 하는지 그는 솔직히 믿을 수 없었다. 건물 입구에 주차관리를 위한 경비실이 있기는 했지만 한겨울의 얼어붙은 새벽이라 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관리인은 가건물의 창문을 꽁꽁 닫고 잠들어 있었다. 범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피해자는 죽었다.
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을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다만 밖에 나갔다 돌아와서 비밀번호를 누를 때마다 문에 묻어 있던 핏자국이 떠올랐다. 끔찍하다거나 무섭다거나 하는 감상은 없었다. 그저 그 모습이 떠오를 뿐이었다.

새벽의 어둡고 조용한 시간에 죽은 여자의 손은 가끔 돌아와서 그의 방 문을 두드렸다. 그는 여자가 처음 문을 두드렸을 때 했던 것처럼 이불 속에서 숨을 죽이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가 사라지고 나면 그는 그대로 누워서 커다란 창문 밖의 좁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유흥가의 불빛이 어지럽게 비친 창 밖의 밤 하늘을 배경으로 떠다니는 조그만 공 모양의 물체가 사람의 눈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다. 피 흘리며 두드리는 문 바깥의 손과 표정 없이 들여다보는 창 밖의 눈알 사이에서 그는 다시 잠들지 못한 채 누워서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한껏 웅크린 채 동녘의 햇살을 기다렸다. 그러나 때로 새벽의 어스름이 부옇게 창문을 밝히는데도 문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끈질기게 계속 이어지곤 했다. 그렇게 밤의 휴식을 거치지 못한 채로 시작된 하루는 사막처럼 공허하게 펼쳐져 있었고, 그 안의 모든 순간 순간은 모래를 씹는 것처럼 메마르고 파삭파삭했다.

낮에 그는 잠들지도 깨어나지도 못한 채로 자주 천장을 쳐다보며 누워 있었다.
교수는 골프채 세트를 사다 주고 외제차를 구입할 때 돈을 보태주면 그에게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교수가 제시한 액수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신문사에서 전화가 왔을 때 그는 다음 학기부터 강의를 맡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학과 사무실에서 전화가 오지 않은 채 학기가 끝나버렸을 때의 참담함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견디기 힘들었다.
아내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전화를 하고 싶었으나 처형은 아내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가 서너 번 연락하면 마지못해 한 번쯤 ‘잘 지낸다’고 짤막한 안부를 전달해줄 뿐이었다. 그나마 끊어질까 봐 그는 더 조르지 못했다.
그와 살던 십 년 동안 아내는 화장품 가게를 운영했다. 미용 관련 기술 교육도 받고 몇 가지 자격증도 땄다. 세상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든 먹고 살 자신은 있다고 아내는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십 년이나 기대 살면서 그가 직접 눈으로 보아 알고 있었다.
그와 살던 십 년 동안 아내는 명절마다 교수들에게 나가는 선물값만 아니면 숨 좀 돌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돈을 벌어오지 않아도 좋으니 그의 등록금만 내지 않아도 된다면 더 늦기 전에, 너무 늦기 전에 남들처럼 아이도 낳고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아이도 낳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말을 아내가 여러 번, 아주 여러 번 했던 것을 그는 특히 명확하게 기억했다.
처형은 미용 기술이 있으면 자신이 사는 한인 타운에서 가게 단골 한국 사람들 머리만 잘라줘도 기본적인 생계는 꾸릴 수 있다고 아내를 꼬였다. 그가 드디어 졸업했을 때 아내는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며 홀가분한 표정으로 떠났다.
나이 마흔에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학위증명서 한 장뿐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박사님’ 칭호가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평생을 바쳐 따낸 학위가 아무 쓸모도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기술도 없고 실용 지식도 없고 취업 경력도 없는 문과 박사는 학교에서 교수로 채용해주지 않으면 갈 곳이 없다. 그러나 대학들은 기술도 실용 지식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학과에다 비싼 연봉을 주며 새 교수를 계속 채용하려 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기적같이 임용공고가 난다고 해도 그는 나이가 많은 데 비해서 실적이 없었다. 지나치게 길었던 대학원 시절에 논문을 쓰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시절에 논문이랍시고 끄적거린 글은 지금 봐도 형편없었고 그나마 좀 괜찮다 싶은 건 진작에 지도교수가 자기 이름으로 가져다 발표해 버렸다. 학위논문을 고쳐 쓰고는 있었지만 학회 가입비와 심사비, 게재료까지 꼬박꼬박 흘러 나갈 십여 만원 돈이 그는 무서웠다. 그 십여 만원을 몇 번씩 내 가며 논문을 앞으로 얼마나 발표해야 교수가 되기 위한 서류전형에 원서라도 내 볼 자격이 될 지 알 수 없었다. 유학파들이 귀국도 하기 전부터 SCI급이니 AHCI급이니 하는 국제 저널에 이름을 올려서 국내 학술지 논문 두세 편에 해당하는 실적을 한 번에 올리고 들어오는 걸 보면 한숨만 나왔다. 유학파 박사들은 교수가 못 되면 영어학원이라도 차린다는데, 그는 외국어와 상관없는 전공인데다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을 상아탑의 담장 안에 묻어버려서 그 바깥의 삶을 혼자 꾸려나갈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떠나간 아내를 탓하지 않았다. 그는 무능했고 스스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내가 떠나고 학과 사무실에서 더 이상 전화가 오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살던 집을 나왔다. 얼마 되지 않는 전세 보증금을 헐어서 월세로 조그만 방을 얻었다. 이름이 좋아 오피스텔이지 사실은 그냥 고시원보다 조금 나은 닭장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문 밖에서 두드리는 피투성이 손에 대해 생각했다. 바깥 세상과 그를 갈라놓는 한 장의 조그만 철문과, 방의 넓이에 비해 터무니없이 커다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조그만 하늘에 대해 생각했다. 가끔 그 하늘의 어둠 속을 떠다니며 무감정한 시선을 던지는 주인 없는 눈동자를 생각했다. 
더 이상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이성의 판단은 계속 살아 있겠다는, 계속 살아가고야 말겠다는 몸의 의지를 이길 수 없다. 그 무조건적 본능 앞에서 ‘생의 부조리’니 ‘실존적 인식’ 따위를 떠올리는 것은 그의 직업병이었다. 그런 말장난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자신의 발등 위에 누운 여자의 피투성이 얼굴을 직접 본 뒤에야 그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몸의 살아 있음을 유지하려는 그 동물적인 관성이 때때로 무서웠다. 살려는 의지는 언제까지 계속되는가. 죽은 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그것은 근원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이었고, 인간의 좁은 경험과 얄팍한 논리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가 문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에 계속 귀 기울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피할 수 없는 삶과 원하지 않은 죽음 사이에 갇혀 있을 때 – 지옥이 거기에 있다.

어째서 사람은 죽는가.
멍청할 정도로 단순한 질문이다. 대답은 단순하지 않았다. 
늙어서 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바람직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 없이 빠르고 깔끔한 종말을 원한다. 
현실에서 이 두 가지는 종종 양립하기 어렵다. ‘얼마나’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이 자연스럽게 늙어 죽는 것인가, 라는 질문까지 더해지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해서 사람이 희망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질문을 바꾸어 본다. 사람의 몸은 어째서 죽는가.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라면 그는 의약학이나 생물학 관련 분야에 종사하지 않는 보통 사람이 그러하듯 상당히 희미한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약을 먹으면 죽는다. 죽는다고 한다. 무슨 약을? 얼마나? 손목을 끊으면 죽는다고 한다. 어디를? 어떻게? 목을 매면 죽는다. 이쪽은 비교적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으나 죽는 순간에 배설물이 나온다든가 혀가 가슴까지 늘어진다는 등 진위가 불분명하지만 다분히 혐오스러운 묘사들이 첨부되었기 때문에 미학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게 여겨졌다. 차에 치이면 죽는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는다. 그러나 공개된 장소에서의 죽음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그는 현재 자신의 인생이 흘러온 방향이 특별히 자랑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무능한 자신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내면서 죽는 순간까지 알지도 못하는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몸은 칼로 찌르면 죽는다.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이것은 확고부동한 사실로 그의 머릿속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여자와 똑같은 모습으로 피투성이 얼굴에 초점 없는 시선을 창 밖의 조그만 하늘 밖으로 내던진 시체를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자신이 남기고 갈 시체에 대해, 낯선 타인들의 손에 처리되어야 할 시체와 그 시체를 처리해야 할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았다.

삶에 무능한 만큼 그는 죽음에 대해서도 무능했다. 그는 자신의 무능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무능한 자신을 경멸했다.
그래서 그는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깊이 생각했다. 오래 생각했다. 좁고 허술한 데 비해 창문이 지나치게 큰 오피스텔 방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게 된 후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늘었다. 통장의 잔액은 처음부터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자신에게 허용된 남은 시간도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진실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바로 자살이다. 삶이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것은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에 답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문장들로 시작하여 자살에 대해 책 한 권을 썼던 철학자는 자살하지 않고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의 책은 전체가 ‘삶은 무의미하다’와 ‘그래도 살아야 한다’의 대립과 투쟁으로 가득하며 철학 책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자신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답은 내놓지 못했다.
철학자란 근본적으로 몽상가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람들은 사회학자다. 그는 자살을 사회적 문제라는 관점에서 다룬 책에서 노인의 자살과 청년의 자살은 그 양상이 뚜렷이 다르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책에 따르면 젊은 사람은 이유가 뭐가 됐든 자살하는 순간에 대부분 후회한다. 죽음을 눈앞에 마주하면 젊은이는 살려고 발버둥치며, 자살에 성공한 경우에도 그러한 저항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노인은 스스로 택한 죽음을 마침내 마주 대했을 때 젊은 사람만큼 후회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그래서 노인의 자살은 젊은 사람의 자살보다 성공률이 높다고 그 책은 담담하게 기술했다. 
결국 죽음이란 용기나 철학이나 마음의 병이나 결단력 같은 정신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였다. 청년의 몸은 단지 젊기 때문에, 저항할 힘이 남아 있으므로 죽음 앞에서 더 거세게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인의 몸은 청년에 비해 약하므로 망가지기 쉬우며 그러므로 죽기도 쉽다. 그리고 노인은 살아나더라도 어차피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죽을 용기로 살아가라’라는 무책임한 격려는 본래 타인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노인의 자살은 여실히 증명한다.
죽음에 대해 철학을 표방하여 횡설수설하지도 않고 자살자를 정신병자로 몰아가지도 않으면서 그저 건조하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그 책의 논조가 그는 어쩐지 몹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몸은 어찌 됐든 살아 있기를 갈망한다. 오래 전에 읽었던 그 사회학 책의 저자는 통계수치가 아닌 진짜 사람의 자살을 목격한 적이 없었던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원하고, 죽기를 바라면서 삶을 원한다는 것이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든 살아 있는 인간의 모순이다.
언제나 이렇게 답이 없는 철학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자신의 본질인가, 라는 철학적인 생각을 떠올리며 그는 조금 웃었다.

옆방 노인은 벽을 두드렸다. 얇은 합판 벽이 뚫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세게 두드렸다. 
두드린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몸부림치다가 발로 찬 것이었다. 실제로 발에 차인 부분의 벽이 움푹 패여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해 봤냐고, 그를 취조한 경찰은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물었다.
오피스텔은 혼자 사는 노인들이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주거 형태가 아니다. 그는 노인이 옆방에서 사무실을 운영하는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그곳에서 혼자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바로 옆방이다 보니 좋든 싫든 복도에서 한두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뿐이었다.
아파트와 달리 오피스텔에서는 아무도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의 생활을 이전과 비교할 때 그가 유일하게 안도감을 느끼는 부분이었다. 아파트의 이웃들은 그의 나이와 아내의 나이를 물었다. 평일 낮에 어째서 그가 집에 있는지 물었다. 아내의 화장품 가게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그리고 아이가 있는지, 왜 아이를 갖지 않는지, 언제쯤 아이를 가질 예정인지 집요하게 캐물었다. 분리수거 쓰레기를 내다 버리고 돌아서자 아랫집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따라와서 그가 방금 버린 택배 상자와 우편물 봉투를 뒤적이는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그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랫집 여자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뒤로 그는 아파트 사람들에게 인사도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의 등 뒤에서 입방아를 찧는 것은 아내에게 들어서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오피스텔은 글자 그대로 옆방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곳이었다. 본래 그런 곳이므로 그도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불편한 일이라면 관리인에게 말하겠지만, 이상한 일이라면… 이상한 ‘남의 일’이라면, 그저 눈 감고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일반적으로 허용된 무관심은 그의 생활에 남은 몇 안 되는 조그만 자유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는 완고하게 무관심할 자유를 주장했다. 경찰이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는 굽히지 않았다.

경찰이 어째서 자신을 의심하는지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방 문 앞에서 여자가 죽었다. 그리고 그의 옆방에서 노인이 죽었다. 연쇄살인범으로 의심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노인의 시신은 창가에 기대 앉은 자세로 발견됐다. 발견 당시에 목에 노끈이 감겨 있었기 때문에 사인은 자살로 결론이 났다. 노인의 목을 감은 노끈의 다른 쪽 끝이 아무 데도 묶이지 않은 채로 노인의 시신 옆에 축 늘어져 있었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경찰에서는 노인이 아마 창문 손잡이에 노끈을 묶은 뒤에 주저앉는 방식으로 목을 매달았을 것이라 추정했다. 노인이므로 손 힘이 약해서 노끈을 꽉 묶지 못해 사망한 뒤에 끈이 풀렸으리라는 설명이 공식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일반에 인정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잊어버렸다.
그는 잊을 수 없었다.
노인은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벽을 발로 차고 있었다.

이것은 무슨 저주인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벽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 그는 종종 생각했다. 나는 이웃에게 무관심한 죄로 무슨 연옥 같은 데 갇혀버린 것인가.
옆방은 노인의 시신이 실려나간 후에도 한동안 문이 활짝 열린 채 방치되어 있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는 방에 드나들 때마다 옆방 안쪽, 노인이 죽은 현장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옆방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벽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그의 방을 좌우 반전한 구조였다. 가늘고 긴 장방형이라서 문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입구에서 안쪽까지 한눈에 보였다. 그의 방과 마찬가지로 안쪽 맞은편 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통유리 창문은 터무니없이 컸고, 통유리 아래쪽의 실제로 열 수 있는 부분은 그에 비하면 아주 작았다. 창문은 손잡이를 세로로 돌려 안에서 밖으로 밀어서 열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창문 아래쪽 바닥에는 조그맣게 턱이 진 부분이 있었다. 그의 방에는 그 턱진 부분에 난방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옆방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노인의 시체는 저기에 앉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얘기겠구나,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의문이 피어 올랐다.
발견 당시에 창문은 바깥으로 열려 있었다. 노인의 시신이 발견된 이유는 영하의 추위에 창문이 열린 채 방치되어 보일러가 동파돼서 아랫집에 물이 샜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창문 손잡이에 끈을 묶고 몸무게를 이용해서 당겼다면 손잡이가 안으로 끌려 들어와 창문이 닫혔어야 했다. 창문 손잡이에 묶은 끈이 저절로 풀릴 정도로 약하게 묶여 있었다면 애초에 목이 졸려 죽을 수가 없었다.
그는 누군가 노인의 목에 끈을 묶어 창문 밖에서 당기는 모습을 상상했다.
창문 밖, 9층 높이의 허공에서 누가 어떻게 끈을 당겼을지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번 머릿속에 난데없이 떠오른 그 장면은 아무리 논리적으로 반박하려 해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죽음은 질병인가.
노화와 죽음을 같은 종류로 분류하여 치료 가능한 일종의 질병으로 취급하는 것은 전통 깊은 양의학계의 태도이다. 특히 노화를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취급하는 태도는 일반에도 만연해 있으며 화장품 업계는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장사 수단으로 십분 활용하고 있다.
자살은 정신병인가.
죽음이 치료 가능한 질병이라 가정한다면 그러한 질병을 적극적으로 원하는 심리가 일종의 병적인 상태라는 결론은 합리적이다. 죽음이 질병이라면 자살을 원한다는 것은 뇌종양이 생기기를 원한다거나 백혈병에 걸리기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정상이다.
그러나 반대로 죽음이 삶의 자연스러운 종착점이며 그러므로 모든 생(生)의 순환주기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자살 또한 자연스러운 죽음의 한 형태라는 결론이 가능해진다.
죽음을 질병이라 가정하고 그러므로 치유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희망에 매달리는 이유는 그저 그런 희망을 붙들고 있는 본인이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 삼라만상이 인간의 희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며, 어떤 한 사람에게 싫은 일이라 해서 그것이 보편적으로 타파해야 할 그릇된 일인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더 살고 싶기 때문에 다른 모든 인간도 전부 살고 싶어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일 뿐 아니라 이기적이고 오만한 태도이다.
타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도 우리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
타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곁에 있어주는 것뿐이다.
그가 읽은 모든 철학자들의 말 중에서 이것이 유일하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인간적이고 다정한 결론이었다.

그는 그 말을 남긴 철학자의 이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철학자는 대단히 정신병적인 군국주의 독재정권에 찬동했으며 평생 그 사실을 사과하지 않았다. 
육백만 명이 가스실에서 죽어갈 때, 문제의 철학자가 살해당하는 피해자들이 아니라 살해하는 가해자들의 “곁에서” 전쟁범죄자들과 “함께 있어” 주었다는 사실이야말로 표리부동의 좋은 예이며 위선의 표본과 같다고 그는 종종 생각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한 번, 서양 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심오하게 쓸모 없는지 증명하며 그의 생각은 길을 잃었다.

죽음이 질병이라 가정한다면 여러 전염성 질병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전염될 수 있는가. 자살은 전염병인가. 
수백 년 전 서양의 어떤 작가가 쓴 소설에서 주인공이 사랑에 실패하여 자살을 택하자 현실에서도 사람들이 따라서 자살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자살자들은 소설의 주인공처럼 젊은 청년들이었고, 주인공과 같은 옷을 입고 주인공과 같은 방식으로 자살했다. 이로 인해 타인의 자살을 모방하는 행태에 이 소설 주인공의 이름이 붙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허구의 인물이며, 그러므로 실제 존재한 적이 없으니 실제 자살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부조리한 사태다. 
모방 자살을 택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공감이다.
그들의 자살은 특정한 개인적 감정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예술적 가치라는 측면은 부인할 수 없으나, 다분히 사적인 감상을 단 한 번 표현하기 위해 삶을 포기하고 목숨을 던지는 것이 현실적으로 의미 있는 일인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여러 사람을 자살시킨 그 소설의 작가 자신은 82세까지 살고 노환으로 자연사했다.

옆방의 노인이 문제의 소설을 읽었을 가능성은 물론 매우 적다.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 인해 촉발된 자살이라면 노인과 현실적으로 관계가 있던 다른 누군가의 죽음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러나 노인이 살아 생전 맺었던 인간 관계까지 그가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문 밖에서 두드리는 손과 창 밖을 떠돌며 지켜보는 눈이 노인의 마음을 감염시켜 죽음을 원하게 한 것인가.
노인은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벽을 발로 찼다. 한겨울의 날씨에 창문은 이유 없이 열려 있었고, 노인의 목에 감긴 끈은 다른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채 노인의 몸 옆에 늘어져 있었다.
죽은 여자의 손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죽은 노인의 발이 벽을 차는 소리를 들으며, 창 밖의 어둠 속에서 내려다보는 눈을 마주보면서 그는 노인의 몸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창문 아래 앉아 있는 모습을 자기도 모르게 떠올리곤 했다. 자신의 목에 노끈이 감겨 있었고, 그 노끈의 반대쪽 끝은 창 밖으로 빠져나가 어딘지 모를 어둠 속으로 한없이 뻗어갔다. 그리고 갑자기 노끈이 팽팽해지면서 자신의 목을 조를 때, 그가 몸부림치면서 벽을 발로 차기 시작할 때, 양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노끈을 당겨 풀어 보려고 피부를 긁고 할퀴는 모습을 창 밖의 떠도는 눈이 어둠 속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좁고 긴 방 안에 혼자 꼼짝 않고 누워서 그런 광경을 오랫동안 상상하면서, 그는 사람의 마음이 혼란과 절망에 감염되는 과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혼란과 절망의 끝에 필연적으로 죽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자살은 질병이었다.

전화가 울렸을 때 그는 잠들어 있었다. 오래 지치고 시달린 끝에 찾아온 힘겨운 잠이었다. 그는 얼른 깨어나지 못했고,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으려다가 그는 전화기를 꺼 버릴 뻔했다.
“… 여보세요.”
그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보, 나야.”
그는 순식간에 잠에서 깼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전화가 끊어진 뒤에도 그는 한동안 전화기를 그대로 귀에 댄 채 통화하던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을 만났다고, 아내는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이어서 아이를 가졌다고 통보하는 목소리에서 그는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아내의 기쁨을 엿들었다. 그러니 자신에게나 언니에게나, 처가 식구 누구에게도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아내는 차분하게 말했다. 근 십 년간 같이 살았던 한때의 배우자에 대한 예의라 생각해서 마지막으로 전화했으니 잘 지내라고 말하고 아내는 전화를 끊었다.
‘예의’라는 그 단어였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부분도,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는 부분도 아니었다. 아내가 ‘예의’라는 단어를 발음한 바로 그 순간 그는 심장이 터진다거나 피가 거꾸로 솟구친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실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내는 기다려 주었다. ‘예의’ 있게, 그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아내가 밥 잘 챙겨먹고 잘 지내라고 다시 한 번 당부한 뒤에 먼저 끊은 것은 그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옆방의 죽은 노인이 벽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전화기를 놓고 일어섰다.
부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조리대로 가서 과도를 집어 들었다.
칼끝을 손목 안으로 찔러 넣었다. 칼은 작았고, 손목의 힘줄에 걸려서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칼을 비틀어 아무렇게나 손목 안에 쑤셔 넣고 썰었다.

그는 옆방의 죽은 노인이 했듯이 창문 아래의 조그만 턱에 걸터앉았다. 갈라진 손목에서 피가 흘러내려 바닥으로 퍼져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등 뒤에서 창문 밖 영원한 어둠 속을 떠도는 눈이 그의 죽음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 탕탕탕!
죽은 여자의 손이 밖에서 그의 방 문을 두드렸다. 
그는 문을 열어주려 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 방문이 저절로 천천히 열렸다. 죽은 여자의 피투성이 손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 난 죽고 싶지 않았어.
죽은 여자의 손이 말했다.
- 마지막 순간에는 너무 아프고 지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그래도 난 죽고 싶지 않았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등 뒤에서 어둠에 잠긴 창 밖의 허공 속에 주인 없는 눈알이 마치 이해한다는 듯 함께 까딱까딱 움직였다.
- 난 죽고 싶었어.
벽이 사라져버린 옆방의 창문 아래 앉아서 죽은 노인이 말했다. 목에는 여전히 노끈이 감겨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은 창 밖으로 빠져나가 영원한 어둠 속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뻗어나가 있었다.
- 마지막 순간까지 죽고 싶었지. 발버둥을 친 건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냐, 그저 몸에 남아 있던 반사 작용이었을 뿐이야.
옆방의 죽은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자랑스러운 듯 싱긋 웃었다.
창 밖으로 뻗어나간 노끈이 팽팽해졌다. 노끈이 감긴 노인의 목이 뒤로 부자연스럽게 젖혀졌다.
- 원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는다고 사는 것도 아니지.
노인은 목에 감긴 노끈을 따라 창 밖으로 끌려 나가면서 말했다.
- 자살조차도 운때가 맞아야 성공하는 거야. 누구에게 삶이 주어지고 누구에게 죽음이 허용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법이야.
창 밖으로 끌려나가 어딘지 모를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서 노인은 말했다. 그리고 노인은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 그게 사람이야!
목에 노끈이 팽팽하게 감긴 채로, 노인은 웃고 있었다.
팔목이 간질간질했다. 그는 갈라진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에서 팔뚝으로 길게 이어진 상처 속에서 식물의 새싹 같은 것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싹은 하나가 아니었다. 한 뼘 정도 이어진 피투성이 상처 속에서 새싹이 수없이 꾸물꾸물 자라나왔다. 어떤 싹은 꼿꼿하고 싱싱해 보였지만, 다른 새싹은 비틀어지고 기묘하게 휘어 있었다. 그리고 새싹들은 전부 피에 흠뻑 젖어 칙칙한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놀라서 고개를 숙여 팔목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의 등 뒤에서 창 밖의 허공을 떠도는 눈도 함께 다가와서 들여다 보았다. 
죽은 여자의 손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팔목에서 가장 높이 자라난 새싹을 하나 건드렸다. 간질간질하고 기묘한 느낌에 그는 몸을 움츠렸다. 
죽은 여자의 손이 이번에는 다른 새싹을 건드렸다. 휘어지고 비틀어져 어딘지 슬퍼 보이는 새싹이었다.
무시무시한 고통이 그의 팔목을 덮쳤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그는 눈을 떴다. 자신의 방 창문 아래, 그는 손목에서 흘러나온 자기 피의 웅덩이 속에 앉아 있었다. 
상처 입은 팔목에서 물론 새싹 따위는 자라 나오지 않았다. 그저 보기 흉하게 갈라진 살이 피에 젖어 있을 뿐이었다. 그는 거의 자동적으로 고개를 움직여 그 피에 젖은 상처를 무심결에 들여다보았다.
아내가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시간과 거쳐온 생의 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팔목의 상처가,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의 웅덩이가 눈에 들어온 순간, 이대로 방치한다면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해한 순간, 그는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아무 것도 그립지 않았다.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살고 싶었다.
거기에는 그 어떤 변명도 논리도 이해도 철학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이나 추함, 강하고 약함, 혹은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이 끼어들 문제도 아니었다.
그는 살고 싶었다.

전화기는 그의 발치에 내던져져 있었다.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상처입지 않은 반대쪽 팔을 뻗으려 했으나 손을 들어올릴 수조차 없었다. 간신히 발을 움찔움찔 움직여서 전화기를 한 치 한 치 밀어 올리는 그 순간이 그에게는 일생을 통틀어 가장 길게 느껴졌다.
전화기가 상처 입은 손에 닿았다. 그러나 힘줄이 끊어진 손은 뇌가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꿈틀거릴 때마다 피가 더 새어나올 뿐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반대쪽 팔을 들어올렸다. 팔은 힘없이 공중으로 조금 떠올랐다가 마치 젖은 빨래처럼 그의 몸을 가로질러 휘감겼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피투성이 손 위에 반대쪽 손을 얹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전화기에 조금씩 다가갔다. 전화기 모서리에 손가락 끝을 걸어 살살 끌어당겼다. 통화 버튼을 건드렸다. 화면에 번호판이 나타났다. 그는 세 자리 숫자를 조심스럽게 천천히 눌렀다.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그는 처음으로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지 않았다.
단지 구급차가 도착하기를, 그리고 “이 다음”이 그에게 주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자기 피의 웅덩이 속에 앉아서 생의 결정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는 그 순간, 그는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찬란하게 단순 명료하며 동시에 얼마나 깊고 어둡고 복잡한지를 완전하게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피투성이 손목을 부여잡고 소리 없이 웃으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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