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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사이보그가 되세요

2013.11.30 22:4511.30

사이보그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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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물약 값이 또 올랐습니다. 500㎖ 한 병에 이백만 로트입니다. 보통 사람들 두세 달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두세 달 동안 열심히 일해서 한 푼도 안 쓰고 모았을 때 물약 한 병 사면 끝입니다. 음식도 못 사고 옷도 못 삽니다. 집세도 못 내고 세금도 못 냅니다. 그러니 어쩌겠어요. 물약을 포기하는 수밖에요. 으악,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물약을 포기하다니요. 그러면 고름이 줄줄 흐르는 흉한 몰골로 회사에 출근해야 하고, 학교에 가야 합니다. 피부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겠네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고름이 흐르는 부위가 가려운데, 단 몇 초만 참아도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가려운데, 긁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계속 긁어야 하잖아요. 한 손으로는 피부를 긁고 한 손으로는 일을 하고, 한 손으로는 피부를 긁고 한 손으로는 필기를 하고, 한 손으로는 피부를 긁고 한 손으로는 숙제 안 해온 아이들을 때리고. 그런데 이게 참, 긁어도 긁어도 가렵잖아요. 더 세게 긁게 되잖아요. 그래서 긁다보면 어느새 손톱이 뼈에 닿게 되잖아요. 살을 너무 깊이 파들어 가서 말이죠. 그런 경험들 다 하시잖아요. 지금도 뼈를 긁고 있는 분들 계시겠네요. 뼈는 긁어봐야 소용없어요. 전혀 시원하지 않답니다. 끔찍하게 아프기만 하죠.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머릿속은 온통 물약 생각뿐인데, 물약만 마시면 당분간 가렵지 않은데. 어쩌시겠어요. 네, 물약을 훔치든가 돈을 훔치든가 해야겠죠. 하지만 살인보다 돈이나 물약을 훔치는 게 더 큰 범죄라는 거 아시죠? 범죄 중에서도 가장 큰 범죄라는 거 아시죠? 재판 없이 바로 처형당합니다. 물약 값은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더 절망적인 건 조만간 또 오른다는 거죠. 또 오르고 또 오른다는 거죠. 삼백만 로트, 사백만 로트, 오백만 로트. 1년 뒤에는 아마 최소 천만 로트까지 오른다는 관측도 있습니다. 500㎖짜리 한 병에 말이죠. 최소 천만 로트입니다. 이천만 로트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래가지고서야 상위 1% 부자들만 물약을 살 수 있겠네요.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 그러니까 99%의 사람들은 물약을 살 수가 없겠네요. 끔찍하죠! 하지만 현실입니다. 다국적 기업 파베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물약 제조에 필요한 원료를 구할 수가 없으니까요. 이건 당연한 겁니다. 시장 원리라는 게 그렇죠. 원료가 거의 바닥나고 있거든요. 10년, 20년, 아마 그때가 되면 제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물약을 살 수 없을지 모릅니다. 물약 자체를 만들지 못할 수도 있어요. 원료가 없는데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그럼 여러분들은 결국 어떻게 될까요. 긁어도 긁어도 가려운데요. 살을 파내도 파내도 가려운데요. 아마 온몸에 살이 한 점도 남지 않을 때까지 긁고 또 긁어댈 겁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목숨이 끊어지겠죠. 뼈만 남은 시체로 변할 겁니다.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말입니다.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오염된 지구에서 살아가려면 더 이상 인간의 몸으로는 안 됩니다. 사이보그가 되세요. 저처럼 말이죠. 그럼 더 이상 물약 같은 건 필요가 없습니다. 사이보그가 되면 피부병 같은 건 생기지 않으니까요. 사이보그가 돼도 여러분의 기억, 추억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로봇이 아닙니다. 제 머릿속에는 뇌가 들어 있습니다. 다국적 기업 파베르의 혁신적인 기술이죠. 뇌를 손상시키지 않고 이식해서 사이보그로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보그가 되기 전과 된 후의 저는 똑같습니다. 달라진 거라고는 더 이상 몸이 가렵지 않다는 거죠. 저주 받은 인간의 몸뚱이는 버리세요. 그리고 새로운 육체를 얻으세요. 사이보그가 되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드냐고요? 이제 저희 다국적 기업 파베르는 시장 원리를 거부합니다. 인류애를 외치고 실천하는 기업으로 거듭나려고 합니다. 그 첫 행보가 무료 사이보그 시술입니다. 여러분을 사이보그로 만들어드리는 데 일체의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단 일 로트의 돈도 받지 않겠습니다. 저 역시 단 일 로트의 돈도 내지 않고 사이보그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망설이지 마세요. 피부병의 고통에서 벗어나세요. 더 이상 피부병으로 괴로워하지 마세요. 물약 값으로 당신이 가진 모든 걸 탕진하지 마세요. 고통에서 벗어나세요. 저처럼 행복해지세요. 여러분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다국적 기업 파베르가 운영하는 사이보그 시술관을 찾아가세요. 그곳 관계자 모두가 당신을 반길 겁니다. 그리고 그곳을 나서는 순간 새 삶이 시작됩니다. 저처럼요.’
텔레비전과 거리의 대형 전광판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사이보그가 되라는 광고가 흘러나왔다. 광고 속 모델은 수시로 바뀌었다. 젊은 여자, 젊은 남자, 아이, 노인. 저마다 웃는 얼굴이었고, 깨끗한 옷을 입었고, 얼굴 피부가 매끈했다. 머리카락 넘길 때 보면 손도 예쁘고 고왔다.
모기구는 가끔 광고에 눈길을 줄 때면 늘 모델들 모습에 시선이 고정됐다. 웃는 얼굴, 깨끗한 옷, 매끈한 피부. 지구가 오염되면서 사람들 피부는 마치 좀비처럼 짓무르기 시작했다. 물집이 생기고, 그 물집이 터지면서 고름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냄새도 고약했다. 하수구에서나 풍기던 악취가 사람 몸에서 났다. 그 어떤 향수를 뿌려도 악취는 없애지 못했다. 손은 물론이고 온몸, 얼굴까지 고름투성이에 악취가 진동했다. 사람들 모습은 그랬다. 모기구의 모습도 그랬다. 고름투성이에 악취, 시궁창 쥐가 따로 없었다. 그보다 더 징그럽고 냄새도 고약했다. 사람은 시궁창 쥐보다 못했다. 시궁창 쥐보다 못한들 어떠랴, 고름투성이에 악취가 진동한들 어떠랴.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모기구를 괴롭히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가려움증이었다. 참을수록 더 견디기 힘든 가려움. 긁지 않으면 마치 간질 환자처럼 발작을 일으키게 만드는 가려움. 한번 긁기 시작하면 살을 완전히 파내 뼈가 드러날 때까지 멈추지를 못한다. 그러고 나서야 고통을 느낀다. 뼈가 드러날 때까지 살을 파낸 고통. 목에서 피가 솟구칠 때까지 비명을 지른다. 지르고 질러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사라질 것 같지 않은 고통이지만, 아니, 사라지지는 않지만, 줄어들기는 한다. 더 이상 비명을 안 질러도 될 만큼 줄어든다. 하지만 고통이 줄어들어도 사람들은, 모기구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오히려 조금만 더 고통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고통이 잠시 가려움을 잊게 해줬으니까. 이제 다시 긁어야 하니까. 긁고 또 긁어야 하니까. 뼈가 드러날 때까지 긁어야 하니까. 피와 고름이 몸을 더럽히고 옷을 더럽히고 집을 더럽히고 학교를 더럽히고 직장을 더럽히고 거리를 더럽힌다. 그래도 긁어야 한다. 뼈가 드러나면 비명도 질러야 한다. 또 긁고, 또 비명을 지르고.
아무리 피가 나고 고름이 흘러도, 뼈가 드러나도, 비명을 질러도 사람들은 모기구를 쳐다보지 않는다. 괜찮으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의료센터에 연락하지 않는다. 그건 모기구 역시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동료가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질러도 마치 귀가 안 들리는 사람처럼 앞이 안 보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모기구 역시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피가 나고 고름이 흐르고 뼈가 드러났으니까.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물집이 터져 고름이 흐르기는 하지만, 긁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몸에서 악취는 나지만 긁지 않기 때문에 비명을 안 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다국적 기업 파베르에서 제조하고 판매하는 물약을 먹은 사람들. 500㎖ 한 병에 이백만 로트나 한다. 그 약을 먹은 사람들은 긁지 않는다. 한동안은 가렵지 않게 해주는 약이다. 한 번 마실 때 100㎖. 효과는 24시간이다. 이백만 로트를 주고 한 병을 사면 5일은 가려움증을 겪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물약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마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기구의 월급은 백만 로트다. 두 달을 일해야 살 수 있다. 두 달 동안 단 한 푼도 안 써야 살 수 있다. 아니면 조금씩 조금씩 몇 년을 모은 뒤에 사거나. 그래서 모기구는 단 한 번도 물약을 산 적이 없다. 모기구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이 회식 자리에서 직원들에게 물약 100㎖씩을 나눠준 적이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까지 뼈가 드러나도록 살을 파낼 수는 없으니까. 그 자리에는 모기구도 있었다. 그때 딱 한 번 마셔본 게 다다. 그때의 무료함을, 나른함을 모기구는 잊지 못한다. 뼈가 드러날 때까지 살을 파내는 게 일과였는데, 그래서 늘 손톱을 깎을 때도 2, 3㎜는 남겨놓고 깎았는데, 물약을 마시는 순간 가려움증이 사라졌다. 그래서 습관처럼 살을 파내다가, ‘아, 안 긁어도 되는구나. 안 가지럽네’ 하고 멈췄다. 안 간지러우니까 무료했다. 나른할 정도로 무료했다. ‘이게 행복이구나. 행복이란 건 무료하고 나른한 거구나. 좋다.’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월급이 이백만 로트가 넘는 사람들은 많다. 심지어 한 달 수입이 이천만 로트가 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비교적 자주 물약을 구입해 마신다. 특히 한 달에 수천만 로트를 버는 사람들은 물약 저장고까지 구입해서, 대량의 물약을 보관해 놓기도 한다. 물약은 하루가 다르게 값이 뛴다. 심지어 오전에 오십만 로트였던 것이 오후에 칠십만 로트가 될 때도 있다. 하지만 값이 내려가는 법은 절대 없다. 그래서 돈 많은 사람들은 여유가 될 때마다 물약을 대량으로 구입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대량으로 구입한 물약을 다른 사람에게 되팔 수는 없다. 그건 불법임과 동시에 중범죄에 해당한다. 불법으로 판매하다 적발되면 갖고 있는 물약은 몰수당하고, 두 번 다시 물약을 구입할 수도 없다.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한 달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손발이 묶인 채로. 그건 거의 사형이나 다름없는 판결이다. 차라리 사형이 낫다. 실제로 한 달간 교도소에서 지내다 살아나온 사람은 백에 한두 명이다. 대부분이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가려움증 때문에. 살을 파내야 하는데 손발이 묶여서 그러지를 못한다. 참을 수 있는 가려움이면 애초에 살을 파낼 정도로 긁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몸 여기저기를 벽에 문지른다.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는 방의 벽은 피와 고름투성이다. 거기에는 뼛가루도 섞여 있고 살점도 섞여 있다. 문지르고 문지르고 문지르고. 방 안에서 사람들은 하루 종일 벽에다 몸을 문지른다. 그렇게 이삼 일 동안 쉼 없이 문지른다. 이건 뼈가 드러날 때까지 살을 파내는 것과는 다르다. 살을 파내는 것이 아니다. 살과 피부를 없애는 것이다. 손발이 묶여 있기에 몸을 긁을 수 없다. 긁지 못하면 괴롭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롭다. 그래서 그들은 살과 피부를 아예 없애버린다. 없애버릴 각오로 문지른다. 살과 피부가 없어지면 가려움증도 없어질 거라는 생각에서. 가려움 자체보다 긁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욱 괴롭게 만들어서. 물론 손발이 자유로운 상태에서는 이런 극단적인 행동은 안 나온다. 손발이 묶여 있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다. 그리고 방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할 거라는 건 판결을 내린 사람들도 알고 있다. 긁다가 긁다가, 살과 피부를 없애다 없애다, 등에 있는 살과 피부를 없애다 없애다, 마침내는 진짜로 등에 있는 살과 피부를 완전히 없앤다. 아니, 자신도 모르게 어느샌가 완전히 없어진다. 뼈를 긁어대고 있다. 그 즈음 되면 이미 의식은 사라졌다. 숨은 끊어졌지만 아직 신경은 살아 있어서 팔딱거리는 것처럼, 이미 의식은 사라졌지만 팔딱거리듯 등을 문지르고 있다. 등을 문지르는 건, 몸을 문지르는 건 사람들에게 팔딱거림과 같은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스르르 주저앉는다. 그렇게 주저앉으면 이제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한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몸을 문지르지도 않는다.
한 달에 수천만 로트를 버는 사람도 있지만 극소수일 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기구와 처지가 비슷하다. 물약을 구입할 수 없거나, 구입한다고 해도 1년에 한두 병이다. 그러니 물집과 고름투성이도 모자라 피가 줄줄 흐르는 피부, 모기구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사람들 모습이 그렇다. 그런데 텔레비전이나 거리 전광판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하나같이 웃는 얼굴, 깨끗한 옷, 매끈한 피부다.
지구가 오염된 뒤로 사람들에게서 사라진 게 바로 저 세 가지다. 웃는 얼굴, 깨끗한 옷, 매끈한 피부.
모기구는 자신이 언제 저렇게 크게 웃어봤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가려움증에 허덕이는 지금, 어쩌면 자신에게, 인간에게 웃음이라는 감정 표현은 사라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걸 봐도 웃을 수가 없다. 웃기지가 않는다. 웃는 건 텔레비전 속 사이보그들뿐이다. 인간은 안 웃는다. 긁기만 한다.
웃음이라는 감정이 사라진 대신, 그 자리를 매우고 있는 건 짜증과 폭력이다. 웃기지가 않아서 짜증이 나는 건지, 짜증이 나니까 웃기지가 않은 건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사람들에게서 웃음은 사라졌다.
모기구는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짜증이 미려오는 걸 느낀다. 눈 뜨자마자 몸이 가렵다. 피와 고름으로 지저분해진 수면 캡슐에서 나와 곧장 소독실로 향한다.
지구가 오염된 뒤 사라진 것 중 하나가 샤워실이다. 물집투성이에 고름이 줄줄 흐르는 몸을 물로 씻는 건 고역이었다. 씻을 때마다 물집이 터지고 고름이 흘렀다. 씻으면 씻을수록 오히려 피부는 더 흉해졌다.
사람들은 점차 씻는 걸 포기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집에 돌아와서도, 잠자기 전에도 씻지 않았다. 도시 전체에 악취가 진동했다. 피부병 때문에, 씻지 않아 더러워진 몸 때문에, 씻지 않아서 더 악화된 피부병 때문에 사람들은 숨을 참거나 코를 틀어막은 채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갔다. 그러다 일이 터진 건 몇 해 뒤였다. 더 악화된 피부병 때문에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 자다가 죽었다. 잠결에 살을 너무 긁어대다가 과다출혈로 죽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정부가 무료로 샤워실을 없애버리고 대신 소독실을 설치했다. 물론 앞에 나선 건 정부였지만, 그 비용은 모두 다국적 기업 파베르가 댔다.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면 그만큼 물약 제조와 판매에 타격을 입게 되니까.
모기구는 온몸을 소독한 뒤 고름과 피로 얼룩진 옷을 입었다. 한 번 입은 옷은 매일 빨았지만, 입을 때마다 옷에 고름과 피가 스며들었다. 빨면 스며들고 빨면 스며들고. 그렇게 몇 번을 되풀이하면서 옷에는 고름과 피가 원래의 무늬처럼 자리 잡았다. 어떤 방법으로 빨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모기구에게는 깨끗한 옷이 없다. 깨끗한 옷을 입는 건 광고 속 사이보그들뿐이다.
회사 버스에 올라타자 순간 모기구의 콧속으로 악취가 훅 하고 들어왔다. 버스에 타고 있던 직원들 몸에서 나는 냄새가 열린 문 쪽으로 한꺼번에 돌진한 탓이었다. 모기구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동시에 머리 위에서 소독액이 분사됐다. 모기구는 출입문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독액을 맞은 뒤에야 버스 안쪽으로 들어갔다.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지만, 실제로 둘이 앉아 있는 곳은 없었다. 다들 혼자 앉아서 창밖을 보거나 눈을 감고 있었다. 물론 몸을 긁으면서. 그리고 서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몸을 맞대는 걸 극도로 꺼렸다. 대화를 나눠야 할 경우에도 최대한 거리를 두었다.
모기구 역시 빈자리에 앉지 않았다. 서서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사람들과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기구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텔레비전 속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서로 반갑다며 부둥켜안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자들은 모두 사이보그다. 사람들은 절대 부둥켜안지 않는다. 나란히 걷지도 않는다. 악수도 나누지 않는다. 싫어서가 아니다. 피부병이 생긴 뒤로는 서로 최소한의 접촉조차 피하는 것이 예의처럼 여겨졌다. 그러다 보니 차츰 대화 나누는 것까지 사라졌을 뿐이다.
버스는 회사까지 가는 도중에 몇 번을 더 정차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이 올라탔다.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찡그렸으며, 서로 아는 체도 하지 않았고, 빈자리에도 앉지 않았다.
이게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차단막으로 사방을 막았다. 지금 버스 안에는 모기구 혼자 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그런데, 왜 모기구가 갑자기 옆 사람에게 말을 걸었을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동이었다.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짜증과 폭력을 유발시키는 행동이었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사람들도 놀라서 모기구를 쳐다보았다. 버스 기사조차 30초 가까이 모기구를 훔쳐봤다.
“참 쓸쓸한 하루죠. 오늘도 역시나 쓸쓸한 하루입니다. 어제는 별일 없었는지, 오늘 기분은 어떤지, 일 끝나고 뭘 할 건지, 요즘 재미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뭔지, 물약 값은 도대체 언제까지 저렇게 고공비행만 할 건지, 요즘 회사 사정 안 좋다고 하던데, 혹시 이상한 얘기 들은 건 없는지. 이런 일상적이고 사소한 얘기들을 주고받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늘 혼자, 사람들은 분명 쓸쓸한 기분을 느낄 텐데 용케 잘 버티는 것 같아요. ‘쓸쓸하다’라는 말 아시죠? 외롭다, 쓸쓸하다.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단어잖아요. 이러다가는 언젠가 외롭고 쓸쓸한 감정도 사라질지 모르겠네요. 물론 진짜로 사라지지는 않겠죠. 다만 외롭고 쓸쓸하기는 한데, 그런 말이 없으니 그냥 이게 뭐지, 하고 고개만 갸우뚱 하다가 말겠죠. 아, 그러다 보면 결국 그런 감정이 진짜로 사라질지도 모르겠네요. 이거 슬픈 일이라는 생각 안 드세요? 버스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너무 조용하네요. 참 쓸쓸한 광경입니다.”
처음에는 모기구의 행동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던 사람도 곧 무시하고 원래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다시 눈을 감고, 정면을 주시하며 운전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기구 옆에 있던 사람은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자리를 피했다.
“환자들, 정신병자들, 또라이 새끼들, 다국적 기업 파베르의 종들, 노예들, 살을 파내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 새끼들, 쓸쓸함도 모르는 새끼들, 외로움도 모르는 새끼들, 이런 이런 불쌍한 새끼들.”
모기구는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그 말은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 모두가 듣고 있었다. 들리고 있었다.
‘어쩌죠? 사람들 사이에 폭력이 더욱 심해지고 있네요. 특히 버스나 열차 같은 곳에서요.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까 종종 서로에게 불쾌감을 주는 일들이 생기는 거 같아요. 그게 곧바로 폭력으로 이어지고요. 예를 들어 인사 같은 경우가 그렇죠. 요즘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는데, 누군가 난데없이 반갑다며 악수를 청하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그건 반가움의 표현이 아니죠. 상대를 불쾌하게 만드는 행동이에요. 사람들은 늘 신경이 곤두서 있어요. 짜증에 가득 차 있어요. 가려움증 때문에요. 그러니 조금의 불쾌함도 참지를 못하는 거죠. 바로 폭력으로 이어지고 말아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렇게 폭력 사건이 벌어지면 바로 경찰이 출동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곧 폭력 사건을 해결하죠. 하지만 불과 2, 3년 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어요. 폭력 사건이 벌어져도, 폭력이 난무해도 경찰이 제때 출동을 안 했어요. 경찰이면서 현장에 출동하는 걸 싫어했죠. 귀찮아했어요. 짜증이 났던 거죠. 그때는 경찰이 사이보그가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경찰이 사이보그예요. 사이보그가 아니면 경찰이 될 수도 없습니다. 경찰뿐만이 아니죠. 국가공무원이 되려면 사이보그여야 합니다. 인간인 상태로는 응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요. 인간의 심리 상태는 불안정해요. 감정 컨트롤을 못 하는 거죠. 언제 폭발할지 몰라요. 그런 상태인데 어떻게 국가공무원이 될 수 있겠어요. 아마 민원인이 찾아오면 온갖 짜증을 내며 내쫓을 거예요. 참, 제 뒤에 있는 거리 보이시죠! 이번에 새로 조성된 사이보그 제3특구예요. 첫 번째, 두 번째와 마찬가지로 다국적 기업 파베르가 모든 비용을 대서 어제 완공됐어요. 총 5만 가구의 주택이 들어섰고요, 사무실 밀집 구역, 문화와 스포츠 센터 밀집 구역, 음식점이나 찻집 같은 식음료 밀집 구역 등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물론 제3특구 역시 다른 특구와 마찬가지로 주택은 무상으로 임대해 드려요. 정해진 기간은 따로 없어요. 제3특구에서 지내시는 동안에는 계속 사용하면 됩니다. 그리고 다른 특구로 이주를 원하는 경우, 그쪽 특구에 있는 주택을 역시 무상으로 임대해 드리고요. 게다가 특구에서 지내시면, 일자리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특구에 있는 회사나 스포츠 센터, 음식점 등은 모두 다국적 기업 파베르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직접 찾아드려요. 제1특구, 제2특구 주민들은 백 퍼센트 직업을 가지고 있답니다. 제3특구도 그렇게 될 거고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특징이 있어요.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네요. 하지만 꼭 확인해 보셔야 할 거, 바로 청결이죠. 집, 회사, 식당, 거리. 특구 어느 곳을 다녀 봐도 지저분한 곳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 주위를 둘러보세요. 청결한가요? 전 사이보그가 된 뒤로 특구를 떠나본 적이 없네요. 그래서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많이 청결해졌는지 어떤지를요. 사이보그가 되기 전, 제가 그곳에 살았을 때는 한 마디로 끔직했어요. 거리 곳곳, 버스와 열차 바닥, 집, 회사. 정말이지 어디를 가나 피투성이였어요. 싸움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사람들이 자기 몸을 긁은 흔적이죠. 제가 제 몸을 긁다가 흘린 피이기도 하고요. 물론 청소용 로봇이 핏자국을 지우기는 하지만, 그게 깨끗하게 지워지지가 않잖아요. 그리고 깨끗하게 지운다 해도 곧 다른 사람들이 또 바닥에 피를 묻히고요. 피에 살점에 고름에, 거기에다 악취에, 으, 정말 끔찍했어요. 깨끗한 곳에서 잘 수도 없었고, 깨끗한 옷을 입을 수도 없었어요. 얼굴이 흉해서 언제나 천으로 가리고 다녔어요. 정말이지, 밖을 나가기가 싫었어요.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고 싶었어요. 죽을 때까지 그냥 집안에서만 지내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잖아요. 집세를 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잖아요. 물론 주택 소유주는 다국적 기업 파베르였고요. 지금도 마찬가지잖아요. 여러분들은 집세를 내기 위해서, 거리 청소비를 내기 위해서, 소독비를 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잖아요. 적성에 맞는 일을 고르는 게 아니라,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일을 하잖아요. 물론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또 남들보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있고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대체 얼마나 되겠어요. 그리고 또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서 과연 행복할까요. 여러분들하고 다를까요. 그들도 피부병 환자들이에요. 물약을 먹어서 잠시 가려움증은 겪지 않겠지만, 그래도 사이보그인 제가 보기에 그들의 모습은 끔찍해요.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요. 고름이 줄줄 흐르죠. 악취, 여러분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심하다는 건 아시죠? 그런데 있잖아요,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지면 사물을 볼 수가 없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죠. 여전히 주위가 어두운데도 말이에요.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냄새가 지독하다가도, 익숙해지면 그 지독하던 냄새가 안 느껴지잖아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그곳에서 10년, 20년, 30년을 살았어요. 그 이상을 살았어요. 그런데도 여전히 악취를 느끼고 있죠. 익숙해지면 원래 안 나야 하는데, 여전히 냄새가 나요. 지독한 냄새가요. 악취가 말이에요. 그렇죠? 하지만 그거 아세요? 그래도 여러분들은 그곳에서 숨을 쉬잖아요. 숨 쉬는 데 아무 문제가 없잖아요. 악취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어! 그런 사람들은 없잖아요. 그거, 실은 이미 냄새에 익숙해져서 그런 거예요. 어둠에 익숙해져서 사물이 보이는 것과 같은 거예요. 지독했던 냄새에 익숙해서 안 느껴지는 것과 같은 거예요. 여러분들은 이미 냄새에 익숙해진 거예요. 그런데도 왜 냄새가 날까요? 익숙해졌는데 왜 날까요? 간단하죠. 그만큼 냄새가 지독하다는 거죠. 그나마 여러분들은 익숙해져서 숨이라도 쉴 수 있잖아요. 사이보그가 된 저희들은, 특구에서 생활하는 저희들은 그곳에 못 가요. 가면 숨을 못 쉬거든요. 여러분들은 지금 그런 곳에서 살고 계신 거예요. 짜증 때문에 만성 신경증에 시달리는 곳, 그래서 폭력이 난무하는 곳, 피와 고름 때문에 지저분한 곳, 익숙해졌는데도 여전히 악취가 나는 곳, 사이보그들은 숨조차 쉴 수 없는 곳. 바로 여러분들이 사는 곳이에요. 특구로 오세요. 새로 조성된 제3특구로 오세요. 깨끗한 공기가 있어요. 깨끗한 거리가 있어요. 깨끗한 집이 있어요. 집세 걱정도 할 필요가 없어요. 다국적 기업 파베르가 적성에 맞는 일자리도 구해드려요. 짜증날 일 없고, 폭력이 벌어지지도 않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 않아도 돼요. 매끈한 피부를 갖게 되니까요. 고름 안 나는 매끈한 피부요. 악취 안 나는 매끈한 피부요. 자연히 깨끗한 옷을 입을 수 있죠. 피와 고름이 덕지덕지 묻은 그런 옷이 아닌, 깨끗하고 향기도 좋은 옷이요. 물약 값은 또 올랐어요. 500㎖ 한 병에 이백오십만 로트예요. 아마 내일 아니면 모레 또 오르겠죠. 물약 값은 계속 오를 거예요. 떨어질 일은 절대 없어요. 그러면 그나마 일부 돈 많은 사람들도 결국 물약을 마시지 못하겠죠. 아니면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만 마시거나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실 거예요. 여러분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지만, 미래에도 영원히 물약을 못 마셔요. 잔인한 얘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광고인데, 이왕이면 희망적인 얘기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너무 현실을 솔직하게 말해버렸다고 비난하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비난하셔도 됩니다. 가능할 리 없는 희망을 품게 만드는 것보다 비난 받는 게 낫죠. 희망, 그랬다가는 나중에 더 큰 비난을 받을 겁니다. 저를 원망하고 저주까지 퍼부을 겁니다. 물론 그래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비난을 받든 저주를 받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비난을 퍼붓는 당신과 저주를 퍼붓는 당신, 당신이 더 괴로워집니다. 더 괴롭기 때문에 저주를 퍼붓는 거니까요. 모든 것에서 해방되세요. 물약으로부터도 해방되세요. 그러면 누구에게도 비난하거나 저주를 퍼부을 일이 없습니다. 짜증이 사라지고 폭력이 사라집니다. 특구는 늘 평화롭습니다. 평화로운 특구에서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주위를 둘러보세요. 지붕에 붉은 십자가가 매달린 곳이 보이시나요? 그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곳이 바로 다국적 기업 파베르가 운영하는 사이보그 시술관입니다. 그곳에서 새 삶을 찾으세요.’
다행히 버스 안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지지 않았다. 모기구의 독설을 듣고 옆에 있던 자가 막 주먹을 움켜쥔 채 휘두르려 할 즈음 버스 기사의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기사에게로 향했다.
“뭐야! 왜 회사 철문을 안 열어주는 거야! 저 경비 새끼들이 미쳤나!”
버스 기사가 연거푸 경적을 울려댔다. 그러고는 창문 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회사 경비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야,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야! 차가 들어왔으면 문을 열어야 할 거 아니야! 그렇게 가만히 서서 뭐하자는 거야! 빨리 문 열어!”
버스 기사의 고함 소리에도 불구하고 회사 경비들은 문을 열지 않았다. 철문 너머에 우두커니 선 채 마치 버스가 쳐들어오면 몸으로라도 막을 기세였다. 그렇게 보였다.
“저것들이 살을 하도 파내서 맛이 갔나. 제정신들이 아니네. 완전히 돌았구만, 돌았어.”
기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버스에서 내렸다.
경비들의 행동과 버스 기사의 신경질적인 반응 때문에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짜증도 서서히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자칫 하다가는 버스 안에서 서로 치고받다가, 다들 버스에서 내려 기사나 경비들과도 뒤엉킬 우려가 있었다. 짜증이 폭발하면 내 편 네 편이 없다. 아무한테나 주먹을 휘두르고, 주먹을 휘두르고, 주먹을 휘두를 뿐이다. 얻어맞아도 계속 휘두를 뿐이다. 폭발했던 짜증과 분노가 조금이나마 가라앉을 때까지 링 위의 격투기 선수들처럼 계속 때리고 맞을 뿐이다.
“이봐, 너희들 대체 뭐하자는 거야! 문도 안 열고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버스 못 들어가게 막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냥 차 돌릴까! 버스 안에 있는 저 사람들 그냥 돌려보내! 경비들이 회사 철문을 안 열어주니 그냥 돌아가라고 말해! 그렇게 말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자네들 바보야! 저 사람들 폭도로 변하는 모습 보고 싶어! 버스 안에서 서로 싸우다가 밖으로 나오겠지. 그러고는 이 철문 타고 넘어서 자네들을 덮칠 거야. 물론 나도 무사하지 못할 거고 말이야. 거기서 안 끝나. 회사로 쳐들어가서 원단 다 불태워버리겠지. 기계들도 다 부숴버리고. 그러면 사장이 아주 좋아하겠네. 어쨌든 이 사태는 다 자네들 책임이야. 벌써 저 버스 안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어. 난 모르네.”
버스 기사의 말대로였다.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짜증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이들은 곧 폭도로 변할 것이다.
“저희가 일부러 문을 안 여는 게 아닙니다. 저희도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경비원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린 거야! 문을 열지 말라고 시킨 게 도대체 누구야!”
“공장장님이요. 공장장님이 한 시간 전에 전화하셨어요. 공장에 직원들 출입 못 하게 하라고요.”
“왜! 직원들을 못 들어가게 하면 기계는 누가 돌리라고! 원단 안 만든대! 공장 문 닫겠대!”
“네, 오늘부로 여기 공장 잠정폐쇄시킨대요. 언제 다시 문 열지는 모르겠대요.”
경비의 말에 격분한 버스 기사가 발로 철문을 걷어찼다. 발에 심한 통증이 전해졌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하루아침에 공장 문을 닫겠다니, 그게 말이 돼! 당장 문 열어!”
“글쎄, 저희도 어쩔 수 없어요. 이제 이 공장은 다국적 기업 파베르 소유래요. 그리고 파베르에서는 기존의 공장 직원들을 전부 일방적으로 해고한 상태고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곳에 함부로 못 들어와요. 들어오면 무단 침입이에요. 자칫하다가는 경찰이 출동할 수도 있다고요.”
“뭐, 파베르 소유! 허 참, 어이가 없군. 왜 하루아침에 공장이 파베르에 넘어간 건데?”
“저희도 정확한 내막은 몰라요. 그냥 대충 듣기로는, 그동안 사장이 파베르에 주식을 조금씩 조금씩 팔았대요. 물약 구입 때문에요. 그러다 파베르가 어떻게 손을 썼는지, 이사회에서 사장을 쫓아냈대요. 그리고 파베르가 공장을 소유하게 됐고요. 소유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공장 잠정폐쇄고요. 그러니 직원들은 당연히 해고 조치됐어요. 소유권을 넘겨받자마자 공장 문을 닫다니, 그럴 거면 왜 공장을 넘겨받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래서 저희도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니 그냥 돌아가세요. 여기에서 이러고 계셔봐야 소용없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정말로 경찰들 들이닥칠지도 몰라요. 공장장이 미리 경찰 쪽에 연락해 놓은 상태라고요.”
경비들은 버스가 오기 전에 물약이라도 마신 걸까, 상당히 차분하게 현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한쪽이 차분하다고 해서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차분해지는 건 아니다. 그러려면 양쪽이 다 물약을 마셨어야 한다. 그래야 분위기가 차분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소용없다.
이미 버스 기사는 이성을 잃었다. 경비가 얘기한 주식 어쩌고 하는 내용은 들리지도 않았다. 심한 통증도 아랑곳 않고 발로 연거푸 철문을 걷어차고 있었다.
버스 기사의 폭주에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도 마침내 휘두르던 주먹을 거두고 일제히 밖으로 나왔다. 온몸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사람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왜 철문을 안 여는지 묻지 않았다. 공장이 폐쇄됐는지 어쨌는지, 공장이 다국적 기업 파베르에 넘어갔는지 어쨌는지, 그런 건 알지도 못했다. 짜증이 치밀어 이성을 잃은 그들은 마치 좀비 같았다. 피와 고름과 살을 후벼 판 흔적들, 동료에게 맞아 코뼈가 주저앉고, 턱이 돌아가고, 팔이 꺾인 모습들, 영락없는 좀비였다. 좀비 무리들.
사람들이 철문으로 몰려들자 경비가 급하게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경봉을 움켜쥔 채 철문에 매달린 사람들을 사정없이 찌르고 갈겼다.
사람들은 경봉에 맞아 몸을 파르르 떨면서도 다시 철문에 매달려 기어오르려 했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발로 밟고 짓이기며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려 했다.
상황은 한동안 지속됐다. 경비들은 경봉을 휘두르고, 사람들은 철문을 넘으려고 하고. 그런 상황이 지속될수록 사람들의 이성은 점점 더 망가졌다. 철문을 넘어 경비들의 몸을 찢어발기는 게 유일한 본능인 것처럼 보였다. 자신들의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이성이 망가진 건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철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들도 마찬가지였다. 물약을 마신 덕분에 짜증을 억누를 수 있었지만, 사람들의 폭주에 그들도 결국 자제력을 잃었다. 괴상한 비명을 질러가면서 미친 듯이 경봉을 휘둘렀다. 철문을 세게 쳐 제 손이 울리는데도 내려치고 또 내려쳤다. 그러다 어느 한 경비가 스스로 흥분에 못 이겨 굳게 닫힌 철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사람들 무리로 뛰어들어 마구 경봉을 휘둘렀다. 그걸 신호로 다른 경비들도 달려들었다.
경비는 셋, 버스에 있던 사람들은 스물다섯. 경비들 손에는 경봉, 다른 사람들은 빈 손. 경봉에 머리를 제대로 맞으면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연거푸 맞으면 두개골이 깨지고 뇌수가 흘러나올 수도 있다. 턱이 날아갈 수도 있고, 늑골이 부러질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 원래 두세 사람만 먼저 공격해서 두개골을 깨뜨리면, 나머지 사람들은 겁에 질려 몸을 움츠리게 마련이다. 그때 또다시 두세 사람만 공격을 하면 된다. 대신 아주 잔인하게. 그러면 무리들은 마침내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뒤쫓아 가서 사정없이 경봉을 휘두르면 된다. 그럼 비록 셋이지만, 충분히 스물다섯을 제압할 수 있다. 아마 절반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불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경비들도 이성을 잃은 상태라 그저 막무가내로 휘두를 뿐이었다. 물론 사람들 무리 속에서는 막무가내로 휘둘러도 맞기는 한다. 다만 정확한 타격 내지는 급소에 맞지 않을 경우 오히려 빈틈이 생긴다. 경봉을 휘두른 뒤 다시 거둬들일 때.
경봉에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자가 그 자리에서 뇌수를 쏟으며 픽 쓰러졌다. 그 모습에 더 흥분한 경비가 경봉을 거의 집어던지다시피 사람들을 향해 마구 휘둘렀다. 팔, 가슴, 얼굴, 허공, 허공. 경봉 끝이 상대방의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휘둘렀다.
얼굴을 맞은 사람은 쓰러졌고, 팔과 가슴을 맞은 사람은 아픔을 참으며 돌진했다. 맞지 않은 사람은 경비의 몸을 붙들려고 바동거렸다. 정타로 얻어맞아 바닥에 쓰러진 사람도 곧 정신을 차린 뒤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경비의 다리를 붙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결국 경비는 사람들에게 다리를 붙들리고 팔을 붙들리고 머리채가 잡혔다. 그리고 마치 수십 마리의 개미가 먹잇감에 달라붙듯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옷을 찢고 살을 찢고, 발로 밟아 뼈를 으깼다.
바닥에 납작하게 누운 경비들을 보며 사람들이 사냥에 성공한 짐승들처럼 괴성을 질렀다. 그제야 경비들은 겁에 질려 도망치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부러진 팔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극심한 통증만 전해질 뿐이었다.
“살려줘! 제발 살려줘! 부탁이야, 제발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이제 그만해! 내가 잘못했어!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그러니 제발 멈춰! 살려줘! 살려달라고!”
경비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절규했다. 그렇게 살려달라고 외치지만 않았어도, 몇 분간 숨을 쉴 수 있는 기운은 남았으리라.
그래도 경비의 절규를 들은 사람은 있었다. ‘살려줘! 살려줘!’ 하는 외침에 모기구는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살려줘! 살려줘!’ 언젠가 들었던 소리다. 예전에도 이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분명히 들은 적은 있는데, 언제, 누구의 목소리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1년 전이었다. 아주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다. 출근하기 전, 둘이 앉아 밥을 먹었다. 밥을 먹다 아내가 몸을 긁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밥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아내가 몸을 긁었다. 다시 밥을 먹었다. 아내가 또 몸을 긁었다. 모기구는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아내가 다시 몸을 긁으려고 했다. 모기구는 다시 눈을 꼭 감았다.
아내는 어렸다. 22세. 모기구보다 두 살 적었다.
어린 아내가 다시 몸을 긁었다. 손톱 끝에 피가 묻었다.
“밥 먹을 때만이라도 잠깐 참으면 안 돼? 아니면 좀 살살 긁던가. 손톱 끝에 피 묻었잖아.”
“피 묻은 게 왜?”
“왜긴, 밥 먹는데 보기 안 좋아서 그렇지.”
“알았어, 조심할게. 미안해.”
어린 아내의 미안하다는 말에 오히려 모기구가 더 미안했다. 가려워서 긁는 걸 갖고 타박을 주다니, 자신은 속이 좁아도 지나치게 좁다고 자책했다.
어린 아내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모기구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어. 잠을 좀 설쳐서 예민하게 굴었어.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참을 필요는 없잖아. 못 참겠으면 그냥 긁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아니야, 참을 수 있어. 신경 쓰지 말고 밥 먹어. 늦겠다.”
그러면서도 어린 아내는 계속 몸을 파르르 떨었다. 가려움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밥알을 흘리고 국물을 흘리고 반찬을 흘렸다.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그래도 긁지 않았다. 참았다.
모기구도 참았다. 긁으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이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리고 턱에서 잠시 멈췄다가 밥 위로 한 방울 떨어졌다. 그리고 또 똑, 똑, 똑.
어린 아내는 볼을 타고 흐르는 땀도 닦으려 하지 않았다. 그대로 두었다. 땀을 닦으려고 볼에 손을 갖다대면, 땀을 닦는 대신 손톱 끝으로 볼을 긁을 게 뻔했다. 그러면 손톱 끝에 피가 묻는다. 그러면 남편이 싫어한다. 짜증낼 게 뻔했다. 그래서 닦지 않았다.
똑, 똑, 똑, 똑, 똑, …….
갑자기 모기구가 수저를 집어던졌다.
“긁어! 그냥 긁으라고! 참지 말고 긁어! 뭐라고 안 한댔잖아! 긁으라고 했잖아! 어디야! 어디가 가려운 거야!”
결국 모기구는 폭발하고 말았다. 이성을 잃었다. 어린 아내를 바닥에 눕히고 옷을 모두 벗겼다.
“어디가 가려운 거야! 가슴이야! 배야! 다리야! 어디야! 어디냐고! 어디가 가려운 거냐고!”
그러면서 모기구는 어린 아내의 몸 이곳저곳을 긁었다. 할퀴고 파내고 도려내듯이 긁었다.
어린 아내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알몸이 창피했고, 남편이 무서웠다. 살이 파일 때마다 엄청난 통증을 느꼈지만, 신음을 내지 않으려고 혀를 깨물며 참았다. 그러면서 남편의 화가 풀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죽은 듯 가만히 있는 어린 아내의 행동은 모기구의 화만 더 돋을 뿐이었다. 그만 하라고, 아프다고, 살려달라고 소리쳤어야 했다. 모기구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어야 했다. 최소한 눈물이라도 흘렸어야 했다. 모기구가 완전히 이성을 잃기 전에.
가만히 있는 어린 아내, 평소에도 별로 말이 없었다. 잘 웃지도 않았고 화를 낸 적도 없었다. 모기구가 말을 걸면 짧게 대답했고, 소리 내서 웃지도 않았다. 모기구가 화를 내면 조용히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어린 아내였지만, 모기구에게 대들거나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모기구는 화를 냈다가도 곧 후회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어린 아내를 끌어안고 다시는 화내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린 아내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제 곧 화를 풀고, 손을 멈추고, 자신을 꼭 끌어안으며 화내지 않겠다고 말해 줄 남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아픔을 참았다. 이미 참을 수 없을 만큼 한계에 다다랐지만, 그래도 참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어린 아내의 행동이 모기구를 더 화나게 했다.
“여기가 가렵구나, 그치? 내가 긁어줄게. 다시는 안 가렵게 만들어줄게. 여기도 가려운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이렇게 긁어주고 있잖아. 조금만 더 긁으면 이제 다시는 안 가려울 거야. 피부에 물집이 생겨서 그래. 아니지, 살 때문에 그래. 살을 파내면 안 가려울 거야. 조금 더 세게 긁어야겠다. 그래야 살이 완전히 파지지. 그래야 가려움증이 완전히 사라지지. 어때, 안 아프지? 이렇게 살을 파내도 안 아프지? 그래, 안 아플 거야. 살 같은 건 필요 없거든. 필요 없는 건 원래 없애는 거야. 없애야 하는 걸 없애는데 아플 리가 없지. 아 참, 아까 배를 긁었었지! 배가 제일 가려웠구나. 여기부터 파내야겠다. 헤, 여긴 물집이 많네. 고름도 많고. 많이 가려웠겠다. 살을 파내달라고 진작 얘기하지. 하여간 당신은 너무 말이 없어서 탈이야. 이러면 내가 미안해지잖아. 이런 거 하나 눈치 채지 못하다니, 그런 생각이 들잖아. 미안해. 내가 좀 둔하지? 응? 뭐라고? 잘 안 들리네. 조금만 크게 얘기해 줄래? 당신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안 들려.”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
“응? 뭐라고? 잘 안 들린다니까? 아직도 가려움증 때문에 그래? 살을 파내라고? 지금 파내고 있어. 조금만 더 파내면 돼. 당신답지 않게 재촉을 다 하네.”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
어린 아내는 여전히 몸부림치지 않았다. 이미 의식이 희미해져서 몸부림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살려달라는 말도 끊어질 듯한 숨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겨우 내뱉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기에 소리는 작았다. 평소보다 더 작았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면 어린 아내가 아무리 큰소리로 살려달라고 외쳤어도 모기구는 못 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어린 아내는 몇 번을 더 살려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전히 모기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모기구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어린 아내는 죽어 있었다. 살은 거의 다 파헤쳐져 뼈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계속 피가 배어나왔다.
모기구의 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옷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모기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뼈만 남은 어린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살려달라고 몸부림쳤어야지. 도망쳤어야지. 나를 죽이고서라도 어떻게든 빠져나갔어야지. 당신은 너무 말이 없어. ……미안해.”
모기구는 뼈만 남은 어린 아내 옆에 누웠다.
“외로워도 조금만 참아. 언젠가는 나도 사이보그가 될 테니까. 당신 곁으로 갈게. 그땐 당신도 좀 시끄럽게 떠들라고. 수다쟁이가 좀 돼봐.”

 

모기구는 비틀거리며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왔다. ‘살려줘, 살려줘.’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살려줘, 살려줘. 그래, 말했었구나. 소리쳤었어. 살려달라고 외쳤었어. 내가 못 들었던 거고. 당신은 분명히 나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했어. 그 소리를 내가 못 들었네. 미안해. 못 들어서 미안해. 많이 아팠을 거야. 미안해. 그리고 그동안 당신 외로웠겠다. 나처럼 외로웠겠어. 조금만 기다려줘.

 


2

 

모기구는 지붕에 붉은 십자가가 매달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국적 기업 파베르가 운영하는 사이보그 시술관이었다.
출입문 앞으로 다가서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사방이 온통 하얀색인 복도. 스피커에서 복도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전자음이 들렸다.
피와 고름투성이 옷, 게다가 회사 현관 앞에서 벌인 난투극 때문에 옷 여기저기가 찢겨 있었다. 물론 피부도 흉측했다. 그런 상태로 사방이 하얀색인 복도를 걷는다는 게 좀 께름칙했다. 그래도 위축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자신의 방문으로 득을 보는 건 파베르니까. 모기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금은 당당하게 걸었다.
-이제 복도 끝에 있는 문 안쪽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물론 그 전에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문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다시는 나가실 수 없습니다. 마음이 바뀌셨다면 지금 돌아가셔야 합니다. 문은 30초간 열리게 됩니다. 문이 닫히기 전까지 결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전자음이 끝나자마자 복도 끝에 있는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 옆에 설치된 숫자판에 불이 켜졌다.
30, 29, 28, 27, …….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문 안쪽은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곳이구나. 사이보그 시술실, 아니 물약 제조실.
모기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건물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어린 아내를 죽였다. 회사 경비를 죽였다. 언제 또 이성을 잃고 사람을 죽일지 모른다. 그래서 두려웠다. 살아 있는 게 두려웠다. 그리고 죽는 게 두려웠다.
15, 14, 13, …….
무서워. 무서워 여보. 이렇게 무서운데, 당신은 그때 얼마나 무서웠을까. 내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죽는 게 얼마나 무서웠을까. 살려달라는 말도 못 듣고 살을 파내던 내가 얼마나 싫고 무서웠을까. ……미안해. 용서 안 했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용서를 빌게. 미안해. ……보고 싶다. 너무 보고 싶다.
맺혀 있던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모기구는 걸음을 내디뎌,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모든 사람은 알고 있다. 물약의 재료가 무엇인지. 특구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당연히 사이보그 같은 것도 없다. 사이보그가 되라는 광고, 그건 곧 물약의 재료가 되라는 것이다. 피부병 때문에 이성을 잃고 사람을 죽이는 자들, 꼭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피부병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들, 세상에는 그런 자들뿐이다. 모기구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괴로워하는 자들, 그들은 결국 죽음을 생각한다. 그렇게 죽음을 생각하는 자들은 광고에서 말하는 사이보그 시술관으로 간다. 그러니까 물약 제조실. 그곳에 가면 고통 없이 편히 죽을 수 있다.
처음에는 광고에서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죽음을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다국적 기업 파베르가 운영하는 물약 제조실로 오십시오. 이곳에서는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러분의 뇌로 물약이 만들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게 됩니다. 다만 의식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뇌를 꺼내야 합니다. 이미 숨이 끊어지게 되면, 그 뇌에서는 물약 재료가 분비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마세요. 그 전에 이곳으로 오세요.’
아무도 물약 제조실을 찾지 않았다. 그냥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경우 물약 재료가 되는 분비물이 뇌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뇌가 살아 있어야 한다.
결국 다국적 기업 파베르가 고안해낸 아이디어가 바로 사이보그와 특구였다. 광고에 죽음이라는 단어, 물약 제조실이라는 말을 없앤 것이었다.
바뀐 광고 덕분에 사이보그 시술관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 수는 점차 증가했다. 그리고 이제는 자살을 할 때 모두 물약 제조실로 간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혹은 아주 오랜만에, 물약을 마시고 편히 깊은 잠을 잘 수 있으니까.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은 공간, 그곳에는 수많은 투명 관이 있다. 케이블이 꽂혀 있는 관, 관과 관이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다.
그 안에는 뇌가 들어있다.
그중 하나가 모기구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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