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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황금 열쇠

2013.11.30 22:4411.30

황금 열쇠

푸른 바다 위에 흰 돌이 떠 있고 그 돌 위에 누군가 앉아 있다.

소년은 하얀 바위 아래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올려다보니 바위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은 작은 남자아이였다. 
- 여긴 어디야?
소년이 물었다. 아니, 물으려 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소년은 놀랐다.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 넌 누구지?
다시 한 번 소년이 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질문은 목구멍에서만 맴돌 뿐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얀 바위 꼭대기의 작은 꼬마가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조그만 꼬마의 등 뒤 하늘 위에 아른아른 떠오른 거대한 황금 자물쇠를 보았다. 

열쇠는 하늘에, 자물쇠는 바다에.

소년은 어쩐지 바위 위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마를 붙잡아야 했다. 그리고 저 황금 자물쇠를 손에 넣어야만 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으나 이 두 가지가 몹시 중요했다.
그래서 소년은 매끄러운 하얀 바위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
아이는 1교시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2교시가 되어도 학교에 오지 않아 담임 선생님이 전화를 했다.
PC 방에 있었다고 했다. 친구와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아이는 말했다. 시간을 보니까 이미 늦어서, 기왕 늦은 거 마저 끝내고 갈 생각이었다고 아이는 말했다. 말하면서 아이는 웃었다. 만 13년이 조금 넘는 짧은 생에서 아이가 저지른 첫 일탈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학교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학교에 늦은 것을 알면서도 계속 게임을 했다고, 아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기 때문이었다.

**
소년은 바위 꼭대기로 올라갔다. 작은 남자아이는 마치 은둔자처럼 바위 위에 앉아서 발 밑의 거대한 푸른 바다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년이 물었다.
- 여긴 어디야?
이번에도 입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목소리는 머리를 통해 울려 나왔다. 소년은 기뻤다.
- 넌 누구지? 난 어떻게 해서 여기로 온 거야?
작은 남자아이가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남자아이의 피부가 거무죽죽한 납빛을 띠고 눈구멍 안에 눈동자 대신 어둠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소년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발 밑의 바다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
집을 나서면서도 아이는 계속 웃고 있었다. 따르고 싶지 않은 규율을 강요하는 엄마를 놀리기 위한 조롱이나 반항심에 찬 웃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처음으로 자신만의 결정을 내리고 스스로 원하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웃음이었다. 
그 때 나는 그 웃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의 등 뒤에 대고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점점 더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
조그만 꼬마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소년도 얼떨결에 눈을 들어 위를 보았다. 
푸른 하늘을 가르며 붉은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두 눈은 타오르는 불 덩어리였고 털가죽은 전체가 불길에 휘감겨 있었으며 갈기와 꼬리는 횃불처럼 활활 타면서 불꽃을 흩날렸다. 말은 사납게 코를 울리며 발을 굴렀고 그러자 바다 위에 떠 있던 흰 돌이 말 꼬리에 감기면서 불길에 휩싸였다.
불타는 흰 바위가 흔들리면서 소년은 떨어졌다.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지면서 불길에 파묻혔다. 
소년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여전히 비명은 목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와 주지 않았다.

*
아이는 자전거를 끌고 횡단보도를 건너려다가 차에 치었다. 12미터나 날아갔다고 했다. 아이를 친 차량은 멈추지 않고 도망쳐 버렸다. 
사거리는 뺑소니 사고가 자주 나는 곳이라 사방에 폐쇄회로 카메라가 있었다. 범인을 잡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조사하러 나온 경찰관이 위로했다.
범인 따위 어떻게 되든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아이는 일곱 시간에 걸쳐 수술을 받았다. 찢어진 내장 기관을 봉합하고 부러진 뼛조각을 살 속에서 꺼내어 도로 맞춰야 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아이의 몸뚱아리를 갈기갈기 짓부수었다가 전부 다시 꿰매 붙인 것이나 다름 없었다.
어째서, 라고 나는 물었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 어리고 연약한 몸을 쇳덩어리로 부숴야만 했을까. 어째서 다른 아이가 아닌 내 아이였을까.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질문은 스스로 솟아나왔다. 굳이 그것을 멈출 만한 의지나 여유가 내게는 없었다.
온몸이 붕대로 휘감기고 코와 입에 관을 이어 붙인 채 아이는 기계장치에 의존하여 숨만 쉬고 있었다. 언제 깨어날지, 과연 깨어나기나 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
푸른 바다에서 흰 거품과도 같은 곧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솟아 나왔다. 푸르고 창백한 여인은 푸른 하늘을 가르는 불의 말 꼬리에 얻어맞아 불길에 휩싸인 소년을 희고 차가운 손바닥으로 잡아챘다. 
타오르는 불길이 즉시 꺼지면서 얼음장 같은 냉기가 소년을 사로잡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목소리는 내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열린 입 속으로 차가운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입을 다물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쓰리고 차가운 물은 송곳처럼 소년의 입 안으로 휩쓸고 들어와 뱃속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갔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여인의 핏기 없는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흰 돌 위에 앉아 있던 작은 꼬마가 뻥 뚫린 눈구멍에 어둠을 가득 담고 차가운 죽음의 물살에 휩쓸린 소년을 바라보며 창백한 입을 벌려 크게 웃었다. 소리 없이 웃으면서 어린 꼬마의 조그만 납빛 얼굴은 점점 노인처럼 늘어지고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잡혔다.
- 엄마.
소년은 생각했다.
- 엄마…

*
나는 아이의 몸을 닦으며 울었다. 중환자실에는 깨어나지 않는 사람들의 몸을 닦으며 우는 가족들이 많았다.
면회는 하루에 두 번, 열두 시부터 열두 시 반까지 그리고 오후 다섯 시부터 다섯 시 반까지였다. 들어가기 전에 대기실에서 주는 소독한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병원 슬리퍼를 신어야 했다. 중환자실의 환자들은 면역력이 특히 약해서 외부에서 묻혀 들어온 병균에 감염되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가끔 면회 오는 사람이 많으면 가운이나 슬리퍼가 모자랐다. 그러면 누군가 면회를 마치고 나와서 벗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기다리면서 대기실의 환자 가족들끼리 서로 잡담을 하기도 했다.
깨어난 사람들의 가족은 깨어나지 않은 환자들의 가족과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깨어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입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환자들의 가족은 오랫동안 혼수상태가 지속되는 환자들의 가족과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환자가 깨어나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고 결국은 완전히 회복하여 병원을 나가는 것이 모든 환자 가족의 희망이었다. 
환자의 몸을 닦아주는 가족은 거의 여자들이었다. 중환자실의 간호사도 모두 여자들이었다. 시신처럼 누운 의식 없는 사람들 사이로 흰 옷의 여자들이 소리 없이 헤매고 다녔다. 
어째서 건강하던 내 남편이, 멀쩡하던 내 아이가, 정정하시던 내 부모가 쓰러져 깨어나지 못하게 되었는지, 내가 어떻게 해야만 그들이 깨어날지, 언제쯤 깨어나 가족에게 돌아와줄지 아무도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모두들 설명할 수 없는 타인의 불운이 병균처럼 자신에게 옮아오지 않게 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과 가족을 방어했다.
오래된 환자들 중에서도 연령이 높거나 반대로 나이가 너무 어려 예후가 좋지 않은 환자들의 가족과는 아무도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아이는 이제 겨우 열 네 살이었다. 깨어나더라도 머리를 다쳤으니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할 거라고, 다른 환자 가족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다가 내가 돌아보자 얼른 말을 멈추었다. 한 명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의 남편은 교통사고로 입원했는데 얼마 전에 깨어나서 자기 힘으로 유동식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외면했다.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 서둘러 대기실을 빠져 나왔다.

딸에게는 이 모든 일을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사고에 대해서는 딸도 알고 있었다. 동생이 입원한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사고 경위와 현재 상황도 할 수 있는 한 전부 말해 주었다.
그러나 대기실은 그 ‘할 수 있는 한’에 포함되지 않았다. 미래를 알지 못하는 인간이 짊어진 불운, 그리고 타인의 불운을 피하기 위한 그 두려움에 찬 침묵과 외면을 딸에게도 겪게 할 수는 없었다.
물론 딸은 동생을 보고 싶어했다. “어린 아이가 갈 데가 못 된다”는 말에 자신은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라고 항의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설명했다.
“그곳에는 죽음과 불행이 가득 차 있어.”
딸은 눈물이 고이지 않은 눈으로 조용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곳에 자기 아이를 들여보내고 싶어하는 부모는 없어. 난 찬주를 그곳에서 데리고 나오고 싶어. 너까지 거기에 데려가고 싶지는 않아. 절대로.”
딸은 생각에 잠겼다. 한참 동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딸은 병원에 함께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
하얀 물거품 같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창백한 여인은 소년을 움켜쥐고 들여다보았다. 소년은 얼음 같은 물 속에서 숨이 막혀 괴로워하며 몸부림쳤다.
여인은 소년의 입 속으로 길고 날카로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소년의 몸 속에서 핏줄을 뽑아냈다. 여인이 입술을 말아 올리자 해초와도 같이 길고 검고 흐늘거리는 치아가 드러났다. 여인은 소년의 피를 빨기 시작했다. 
소년은 수천 개의 바늘 조각 같은 한기가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죽을 것 같이 아팠으나 죽지 않았다. 괴롭고 무서워서 기절할 것만 같았으나 정신을 잃을 수도 없었다.
여인이 소년의 내장을 끊어내어 씹기 시작했다. 텅 빈 눈구멍에 어둠을 가득 담은 작은 꼬마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군침을 흘렸다.
얼어붙은 차가운 물 밑에서 소년은 죽은 여인에게 생명을 뜯기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물 바깥의 푸른 하늘 너머로 황금빛 태양이 아른거렸다.
소년은 손을 뻗었다. 그러나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물 밖의 황금 자물쇠를 잡을 수 없었다.

*
아이의 병상 건너편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는 뇌종양으로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지내다가 일반 병실로 옮겨갔다가 다시 중환자실로 돌아왔다. 그 전에 이미 위암이 생겨서 위를 절제했는데 약을 타러 갔다가 의사에게 머리가 아프다고 불평해서 그 길로 검사를 받으러 갔더니 뇌에서도 종양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안 좋은 소문일수록 빨리 퍼지는 법이다. 희망이 생겼다가 사라졌거나 몇 번씩 되풀이해서 중환자실로 돌아온 경우는 처음 중환자실에 입원해서 오래 나가지 못하는 것보다 더 좋지 않게 여겨졌다. 며느리가 매일 찾아왔으나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 아무도 가까이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자도 아무에게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서인지, 그다지 슬프지도 두렵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사실은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 무표정이 여인의 방어막이었다.
불운한 할아버지의 며느리와 불운한 아이의 엄마인 나는 대기실 의자의 양쪽 끝에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서 말없이 차례를 기다리곤 했다. 서로의 불운이 뒤섞이거나 한 쪽에게로 부당하게 흘러가버리지 않도록, 우리는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서로 쳐다보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며느리는 가끔 아들인 듯한 꼬마를 데리고 왔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조그만 남자아이는 자기 어머니가 가운을 입히고 병원 슬리퍼를 신겨 주는 동안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곤 했다. 그 커다랗고 새까만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면 나는 이유 없이 소름이 끼쳤다. 어쩌자고 저렇게 어린 아이를 이런 곳에 데리고 오는 것일까. 꼬마가 나를 보고 웃기라도 하면 견딜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곤 했다.
할아버지의 며느리는 의학을 조금 아는 것 같았다. 병상 옆의 모니터에 나타난 숫자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간호사에게 뭔가 묻거나 길게 상의하기도 했다. 
나지막한 이야기 소리가 들릴 때면 나도 가끔 그 쪽을 쳐다보았다. 모니터에 나타난 숫자는 매번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꼬마가 커다란 검은 눈동자를 나에게 향하고 웃었다. 그러면 나는 고개를 돌리고 꼬마의 시선이 아이에게 향하지 못하도록 몸으로 막아 섰다.

**
소년은 몸부림쳤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은 피를 빨고 내장을 씹다가 소년의 뼈를 부수려 했다. 핏줄 속을 파고들던 한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격심한 고통에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 어….
작은 신음과 함께 오른손이 움직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소년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소년은 여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며 물 밖을 향해 팔을 뻗었다. 
소년이 뻗은 손이 검은 입을 벌린 채 웃고 있던 꼬마의 얼굴에 닿았다. 꼬마와 여인이 동시에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물이 떨리고 바다가 갈라질 듯한 추악한 비명이었다. 소년은 귀를 막고 싶었으나 막을 수 없었다. 대양을 가득 채운 끝없는 물이 진동하면서 온몸이 함께 갈라질 듯한 전율에 소년은 몸서리를 쳤다…

다음 순간 소년은 물 밖에 나와 있었다. 
모래는 녹색이었다. 소년은 그 녹색 모래를 밟고 바닷가에 서서 차가운 흰 거품을 일으키는 푸른 물결을 향해 등을 돌린 채 어두운 숲을 마주하고 있었다.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대양을 가득 채운 얼음장 같은 푸른 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제 소년은 알았다. 하늘과 이어진 그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흰 바위는 너무 멀어서 닿을 수 없었다. 
소년은 앞을 보았다. 검은 숲은 어두웠다. 소년은 그 불길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숲 속에서 뭔가 아른거렸다. 소년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길게 빼어 우거진 나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숲 한가운데에서 뭔가 환하게 반짝이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년은 망설였다. 다시 한 번 뒤쪽의 바다와 흰 바위를 돌아보고 앞에 마주선 검은 숲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걷기 시작했다.

*
아이는 오른팔을 휘둘렀다.
깨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오른팔을 휘두를 뿐이었다. 어, 어, 하는 짧고 의미 없는 신음 소리를 함께 흘릴 때도 있었다.
나는 희망을 가졌다. 몸을 움직이고 목소리도 내는 걸 보면 이제 깨어날 순간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는 깨어나지 않았다. 의식 없이 팔을 휘두른 탓에 병원 침대 옆의 철제 난간에 부딪쳐 팔목에 멍이 들었다. 유동식을 주입하는 호스를 때려서 입술이 찢어지기도 했다. 더 이상 다치지 않도록 병원 측에서 쿠션을 댄 수갑을 가져와서 아이의 손목을 고정시켰다. 손목이 묶인 뒤에도 아이는 계속 어, 어, 하고 억눌린 비명 같은 소리를 흘리며 팔을 휘두르려 했다. 
나는 그 손목의 수갑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손이 묶인 것 같이 괴로워 병원 측에 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간호사는 아이가 또 팔을 휘두르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차갑게 물리치지 않고 찬찬히 상냥하게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간호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면회 시간은 점심과 저녁에 삼십 분씩 두 번, 합쳐도 하루에 한 시간뿐이었지만 그 동안만이라도 아이의 손을 힘껏 잡아 주었다.
아이의 손은 차가웠다. 그리고 무거웠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버티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이의 손이 내 손 안에서 당장 따뜻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계속 무겁기를 나는 빌었다.

**
소년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나무는 검고 잎사귀가 무성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걸으면서 소년은 누나를 생각했다. 소년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누나였다. 엄마도, 친구들도, 선생님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로지 떠오르는 것은 누나의 모습이었다. 누나는 울고 있었다.
누나는 7등을 했다. 전교가 아니라 전국에서 7등이었다. 지난 학기에는 경시대회에 나가서 상도 타 왔다. 학원도 다니지 않고 과외도 따로 하지 않는데 누나는 공부를 잘 했다. 누나는 뭐든지 잘 했다.
소년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해도 누나의 동생일 뿐이었다. 공부도 뒤쳐지지 않았고 학교 생활도 평범하게 해 나갔지만 사사건건 누나와 비교당했다. 주로 누나보다 못 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소년은 운동을 잘 했다. 선생님들은 “그나마 그거 하나는 누나보다 잘 한다”고 말했다.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누나는 전국 7등이 찍힌 성적표를 들여다보며 기뻐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보여드릴 거라고 말했다. 소년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성적표를 뺏으려 했다. 누나는 주지 않으려 했다. 성적표를 낚아채면서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누나를 밀쳤다.
누나는 거실 바닥에 넘어졌다. 바닥에 팔목을 부딪쳤다. 빨갛게 부어 오른 팔목을 잡고 누나는 몹시 아파하며 울었다. 
누나의 눈물을 보고 소년은 미안해졌다. 그렇게 세게 밀치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넘어뜨리거나 다치게 할 생각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안 그래도 뭐든지 잘 하는 누나가 이제는 내놓고 잘난 체를 하는 것 같아 얄미웠을 뿐이었다. 성적표를 엄마에게 보여드리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소년은 미안했다. 몹시 미안했기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소년은 찢어진 성적표를 구겨서 뭉쳐 누나에게 집어 던지고 집에서 뛰쳐나왔다.
- 미안해, 누나.
소년이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누나.
다시 불러 보았으나 목소리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검은 숲이 열렸다. 무성한 잎사귀와 어두운 나무둥치 사이에 숨겨진 공터에서 용이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소년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경이감에 차서 용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용이 천천히 소년을 향해 다가왔다.
용의 비늘은 푸른빛과 은빛으로 반짝였다. 마치 수천 수만 개의 거울처럼 아른아른 빛나서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용의 눈동자는 짙고 깊은 보라색이었다. 그 보라색 눈동자로 용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용이 날개를 펼쳤다. 하늘하늘한 연푸른빛 날개는 박쥐의 날개처럼 얇고 몸집에 비해 작아서, 그 모습을 보니 소년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생긴 용을 이전에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기억이 완전히 되살아나기 전에 용이 입을 벌렸기 때문에 소년은 그 생각에 집중할 수 없었다.
용의 입에서 은빛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피할 새도 없이 불꽃이 소년을 덮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뜨겁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그 불은 마치 산들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것처럼 부드러웠고, 따뜻한 것 같기도 하고 시원한 것 같기도 하여 기분이 좋았다. 소년은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사방의 나무들은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용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이 스친 곳에서 나무들은 잎사귀가 연녹색으로 싱싱하게 살아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소년이 보는 앞에서 꽃이 활짝 피어나 갖가지 향기를 풍겼다. 그리고 꽃이 떨어진 자리에 색색가지 열매가 열렸다. 사방의 나뭇가지가 순식간에 온갖 열매로 뒤덮였다. 숲은 짙은 과일향을 풍겼다. 
소년은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은 게 언제였는지, 대체 얼마나 굶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앞뒤 가릴 수도 없이 무시무시하게 배가 고파졌다. 소년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열매를 땄다. 새빨간 열매는 사과 같기도 하고 딸기 같기도 한 달콤하고 유혹적인 향기를 풍겼다.
그 향기에 이끌려 열매를 입에 넣으려다가 소년은 갑자기 깨달았다. 은빛과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용의 모습, 박쥐 같은 조그만 날개를 펼친 그 형상을 소년은 언젠가 컴퓨터 화면에서 본 적이 있었다. 어느 게임인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용은 분명히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용의 시선이 소년에게 꽂혔다. 다정하게 빛나던 짙은 보라색 눈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 눈구멍 속을 채운 것은 증오와 어둠과 공허뿐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열매가 악취를 풍기며 썩어 문드러졌다. 소년은 황급히 열매를 집어 던졌다.
거무스름하게 녹슨 용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또 한 걸음.
소년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다가올 때마다 용은 조금씩 작아졌다. 비늘이 사라졌다. 팔다리가 앙상하게 말라 뼈가 드러났다.
꼬마는 거무스름했다. 어린 아이의 얼굴에 노인처럼 주름이 져 있었다. 그 검고 공허한 눈에 소름이 끼치면서도 소년은 저 모습을 어디선가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때 어린 꼬마가 늙은이의 목쉰 소리로 소년에게 말했다.
- 이곳은 산 사람이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다.
꼬마는 소년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소년에게 나뭇가지처럼 말라붙은 가느다란 손을 내밀었다.
- 내 자리를 네가 채워주면 나는 나갈 수 있다.
꼬마는 말하면서 싱긋 웃었다. 입술이 치켜 올라가며 치아가 드러났다. 해초처럼 검게 비틀렸고 짐승의 이빨처럼 뾰족했다.
- 내 자리를 채워라. 아니면 네가 갈 곳은 영원한 어둠뿐이다.
소년은 물러서려다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과 꼬마는 어느 새 다시 푸른 바다 위 공중에 뜬 흰 바위에 서 있었다. 소년은 자신이 뒷걸음질치다 바위 모서리까지 밀려난 것을 깨달았다. 한 걸음 더 물러나면 그곳은 허공, 아래는 푸른 대양이었다. 그 얼음장 같은 물 속에서 파도의 거품 같은 흰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이 입을 벌리고 소년을 향해 손짓했다.
소년은 다시 고개를 돌려 꼬마를 보았다. 노인의 얼굴을 한 꼬마는 죽은 나뭇가지 같은 손을 내밀며 다시 한 번 입술을 치켜 올려 미소 지었다.
- 내 자리를 채워라. 나는 너를 밟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겠다.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뒤로 떨어질 것 같았다. 
꼬마가 말없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늘 한쪽을 가리켰다. 
소년은 꼬마의 손가락을 따라 푸른 하늘 한 구석을 붉게 물들이며 다가오는 성난 붉은 말을 보았다. 말의 눈은 붉게 달아오른 숯 덩어리 같았고, 불꽃이 굼실굼실 기어 다니는 털가죽에 꼬리와 갈기에서는 불길이 섞인 회오리바람을 내뿜고 있었다.
소년은 겁에 질려 꼬마가 내민 죽은 손을 잡았다.

*
“엄마, 일어나.”
딸이 속삭였다.
“찬주가 왔어.”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집안은 깜깜했다. 나는 무심결에 전등 스위치를 누르려 했다. 딸이 내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딸과 함께 어둠 속을 천천히 걸어 현관으로 나갔다.
현관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먹물을 부은 것 같은 그 비현실적인 어둠 속에 두 개의 형체가 서 있었다. 한쪽이 다른 쪽보다 훨씬 작았다.
“찬주야.”
내가 속삭였다.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찬주야.”
내가 다시 불렀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팔을 뻗었다. 아이 옆에 서 있던 조그만 형체가 쉬잇, 하는 소리를 냈다. 이를 드러냈다. 어둠보다 더 검은 그 이빨은 길고 흉측하고 사나웠다.
나는 앞으로 나갔다. 아이의 팔을 잡고 당기려 했다. 그러나 내 손은 현관 앞 어둠 속에서 허공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아이 옆에 서 있던 조그만 형체가 다시 그 사악한 이를 드러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위협하는 것이 아니었다. 검고 어두운 형체는 웃고 있었다.
“찬주야, 안 돼.”
내가 말했다.
“안 돼, 가지 마….”
나는 필사적으로 아이의 손을 잡으려 했다. 병상에 누워 의식 없는 아이가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손을 잡았을 때의 그 무게를 떠올리려 했다. 그 현실적인 감촉을 되살릴 수 있다면 어쩐지 아이를 내게 도로 데려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는 나를 보지 못했다. 대신 아이의 시선이 내 등 뒤로 향했다. 아이의 입술이 움직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애타게 입술을 움직였다.
아이 옆에 서 있던 조그만 형체가 아이를 잡아 끌었다. 아이의 얼굴에 절망이 스쳐갔다.
그 때 딸이 나의 손을 잡았다. 

- 나는 축복하며 깨어나고 축복하며 잠이 들고 집 밖으로 나아가 축복하고 벌판으로 나아가 축복한다. 

딸이 속삭였다. 내 손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녹색 해안으로 나아가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바라본다. 오른쪽에서, 동쪽에서 갈가마귀 세 마리, 세 형제가 황금 열쇠 세 개와 황금 자물쇠 세 개를 가져온다. 

“황금 열쇠”라고 말한 순간 딸의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 자물쇠를 잠가 그것으로 물과 강과 푸른 바다를, 열쇠와 샘의 원천을 잠근다. 자물쇠를 잠가 그것으로 피투성이 상처를, 뜨거운 피를 잠근다. 푸른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듯이 그렇게 내 동생, 하나뿐인 나의 혈육에게서 피가 흐르지 않으리라.

주문을 외우면서 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딸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내 손을 잡은 손바닥도 점점 더 뜨거워졌다. 불에 달군 쇠를 손바닥에 쥐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 황금 열쇠로 황금 자물쇠를 잠근다. 황금 열쇠로 황금 자물쇠를 잠근다. 피투성이 상처를, 뜨거운 피를 잠근다. 흰 뼛속에서 녹색 이끼가 나온다. 흰 뼈는 산 자의 영혼이니 죽은 자가 산 자의 피를 흘리지 못하리라. 내 동생, 하나뿐인 나의 혈육에게서 생명을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손이 불구덩이 속에서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으로 내 손을 으깨버릴 듯이 움켜쥐고 있었다. 기절할 것 같았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이를 악물고 마주 힘을 주어 딸의 손을 꽉 잡고 아이를 지켜보았다. 
아이는 어둠 속에서 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간절하게 손을 뻗었다.
딸은 온 힘을 다해 내 손을 움켜쥔 채 점점 더 빠르게, 점점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딸의 목소리에 집의 벽이 울리고 천장이 진동했다.

- 죽은 자가 산 자의 피를 흘리지 못하리라. 황금 열쇠로 황금 자물쇠를 잠그리니 뜨거운 피를 멈추고 흰 뼈가 되살아나라. 내 동생, 하나뿐인 나의 혈육에게서 생명을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 그리고 다음 순간 아이는 조그맣고 어두운 형체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딸이 목청껏 소리쳤다. 
이제는 평범해진 현관의 어스름 속에서 신발장과 거울의 윤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딸은 숨을 헐떡이며 한참이나 내 손을 움켜쥐고 서 있었다. 불처럼 달아올랐던 딸의 손이 서서히 식었다.
마침내 짧고 날카롭게 숨을 들이쉬고 딸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 검고 커다란 눈에는 말로 할 수 없는 두려움과 차마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리고 연약해 보였다.
“괜찮아.”
나는 딸을 품에 안고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것은 나 자신에게 주는 위안이기도 했다.

딸도 나도 잠들지 못했다. 내가 침실에서 이불을 가져왔다. 우리는 이불을 둘러쓰고 현관 앞에 함께 웅크리고 앉아서 밤을 지샜다. 아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병원에서 전화가 왔을 때는 동이 트기 전이었다. 우리는 회색 어스름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도 딸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긴장해서 차가워진 딸의 손을 꼭 쥐고 있을 뿐이었다.

**
“넌 가짜야.”
아이가 노인의 얼굴을 한 꼬마에게 말했다.
“너도 게임 캐릭터일 뿐이야. 여긴 현실이 아니야. 난 집에 갈 거야.”
노인의 얼굴을 한 꼬마가 싱긋 웃었다.
- 물론 이곳은 현실이 아니지. 이미 죽은 사람은 산 사람들의 현실 속에 존재할 수 없으니까.
“난 안 죽었어!”
소년이 항의했다.
“너나 실컷 죽어. 난 집에 간다고!”
- 넌 집에 갈 수 없다.
꼬마가 얼굴에 추악한 어둠을 가득 담고 비웃었다.
-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웃기고 있네!”
소년은 소리쳤다. 
하늘을 불길로 뒤덮은 붉은 말이 다시 흰 바위를 휩쓸어 덮치려던 순간, 소년은 전속력으로 돌진하여 꼬마를 밀쳐 쓰러뜨리고 흰 바위의 반대편으로 건너 뛰려 했다.

소년이 뛰어든 곳은 끝없는 어둠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 저기 네 가족이 있다.
노인의 얼굴을 한 꼬마가 어둠 속에서 어쩔 줄 모르는 소년의 옆으로 다가와 즐거운 듯 말했다.
- 널 알아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죽는다는 건 그런 거야.
눈에 어둠을 가득 담은 꼬마가 속삭였다.
- 너도 다른 아이를 꼬여서 네 자리에 가둬라. 그럼 네 가족한테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소년은 듣고 있지 않았다.
어둠 속에 빛나는 것이 있었다.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소년은 누나에게 말하려 했다. 애원하려 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년은 누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소년의 누나가 이에 화답하여 소년을 소리쳐 불렀다.

흰 돌 위에 떠 있던 거대한 황금 자물쇠가 열렸다. 피가 쏟아져 나왔다.
피에 젖어 어둠이 깨졌다.
뜨거운 피에 휩쓸려 소년은 숨을 쉴 수 없었다. 눈으로, 입으로, 코로 피가 쏟아져 들어왔다. 끓는 듯이 뜨겁고 숨이 막혔다. 소년은 기침을 하며 몸부림쳤다.

그리고 눈을 떴다.

*
아이는 나를 보고, 딸을 보았다.
아이의 입술이 벌어졌다. 딸에게 뭔가 말하려 했다. 가느다랗게 흐… 하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알아.”
딸이 한 걸음 침대로 다가섰다. 나는 옆으로 조금 비켜 주었다.
딸이 아이의 힘없는 손을 꽉 잡았다. 아이 위로 몸을 굽혔다.
“열쇠, 내가 가지고 있어.”
딸이 작은 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아이는 천천히 눈꺼풀을 움직였다.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아이의 가슴이 연약하지만 고르게 오르내리는 것을 확인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간호사가 속삭였다.
“일단 좀 쉬게 두세요. 이따 점심때 면회 시간에 다시 오시고, 그 전에 무슨 일 있으면 제가 바로 연락 드릴게요.”
“제 동생, 언제 퇴원해요?”
딸이 불쑥 물었다. 간호사는 조금 웃었다.
“두고 봐야죠. 보호자 분들도 가서 좀 쉬시고 이따 다시 오세요.”
그래서 우리는 잠든 아이를 두고 중환자실을 나왔다.

우리는 병원 근처 24시간 패스트푸드점에서 아침을 먹었다. 딸은 햄버거를 씹으며, 나는 커피를 마시며 통유리 창문 너머로 동이 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세상을 지탱하고 존재를 유지한다. 어른들이 일일이 가르쳐주려 드는 것은 방해가 될 뿐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최상의 방법을 가장 잘 알고 있다. 
이제 아이들 앞에서 나의 존재는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중요할지 몰라도 실제적으로는 그다지 큰 쓸모가 없었다. 그것이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보다도 나는 한없이 고마웠다.
“잘 했어.”
나는 딸에게 말했다.
“잘 했어, 우리 딸.”
딸은 나를 쳐다보고 싱긋 웃었다. 아이다운 웃음이었다.
“그럼 엄마, 나 치즈버거랑 블루베리 와플 하나 더 사줘.”
나도 웃었다. 음식을 추가로 주문했다.
떠오르는 햇빛 속에서, 맛있게 햄버거를 먹는 딸의 오른쪽 손바닥 안으로 황금 열쇠가 서서히 녹아 들었다. 해가 완전히 떠오를 무렵이 되자 열쇠는 완전히 녹아서 마침내 사라졌다. 

열쇠는 하늘에, 자물쇠는 바다에.

딸은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
나는 딸을 껴안고 샴푸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입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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