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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밀 [특집2] 은잎

2013.10.01 00:1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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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김주영 님의 단편소설 <마감 사수자 헬>의 오마주입니다. 해당 작품은 [보름달 징크스]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아이디어를 흔쾌히 허락해주신 김주영 님께 감사 드립니다.
 
 
 

우찬영 작가가 연락두절이 된 지 정확히 한 달 째 되던 날, 나는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까지 찾아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나는 가능한 유화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해보고 정 안 되면 특단의 조치를 내리는, 정해진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가기를 선호하는 원칙주의자다. 즉 계약서상 원고 마감일이 지났는데 작가가 휴대폰이고 집전화고 이메일이고 아무런 연락도 되지 않는다면, 우선은 작가의 주변 인맥, 소속 기관, SNS 계정, 자주 하는 온라인 게임 등을 뒤졌다. 그러다보면 굳이 발품을 팔 것도 없이 전화나 인터넷만으로 며칠 만에 덜미를 잡는 일도 많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보화 시대니까. 요즘 세상에 완벽한 ‘잠수’는 없는 법이니까. 

누군가는 내가 이런 식으로 일하는 게 오히려 더 흥신소 같고 사생활 침해라고 말하지만,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무작정 집으로 찾아가서 수 십 시간 집앞에서 잠복을 하거나 팔이 부러져라 현관문을 두드리다가 ‘선생님’과 마주쳐서 얼굴을 붉힌다든지, 그 선생님의 내연녀 이름이나 택배 내용물이나 부엌 포인트 벽지 무늬나 파자마 색깔 따위를 알고야 마는 것은, 아무래도 내 취향이 아니다. 나는 문학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일하는 사람이고, 웬만하면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환상을 깨고 싶지 않은 천진한 독자이므로. 

오해는 없길 바란다. 나뿐만이 아니라, 마감 사수자들은 누구든지 기본적으로 문학에 대한 사랑이 있다. 지하실이나 호텔이나 외딴 산장에 작가를 감금해서라도 원고를 뽑아내는 일은 물론 사랑이 없으면 못해먹을 일이다. 혹자는 사랑이 아니라 미저리라고 폄하하는 모양이지만, 어쨌든 전 세계의 출판사들은 잠수 탄 작가에게서 원고를 받아내는 일에 우리의 서비스를 곧잘 이용하는 편이다. 변호사나 경찰보다는 마감 사수자에게 맡기는 편이 돈도 시간도 훨씬 절약되기 때문인 것 같다. 

각설하고, 그런 내가 작가의 가택에까지 직접 발걸음을 할 정도면, 앞서 말한 우회적인 방법들이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찬영 작가는 워낙 은둔형 작가였다. 좋게 말하면 그렇다는 거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가족과는 추석과 설날에만 보는 정도고, 성격이 나빠서 친구는 거의 없으며, 모두가 그의 돌연한 잠적에 하도 익숙해져서 한 2년쯤은 연락이 안 되어야 슬슬 걱정을 해볼까 생각이라도 한다는 얘기다. 당연히 근황이고 행방이고 아무것도 안다는 사람이 없었다. 온갖 종류의 ‘선생님’들에게 시달려본 관록 있는 편집자들조차도 우찬영의 히스테리와 오만함과 변덕에는 질릴 대로 질려서 꼭 필요한 일 외에는 사적인 연락을 하지 않는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보니 집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출판사측 계약서에 적어놓은 주소지가 옛날 주소라고 하기에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찾아낼 수 있었으며, 애써 집까지 찾아가서도 이틀 내리 잠복을 하고 문을 두드리기를 반복했으나 안에서 아무 대꾸조차 없기에 나는 정말로 특단의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가택 침입을 결행한 것이다. 우찬영 작가의 아파트에도 튼튼한 도어락은 달려 있었지만, “여기 친구가 사는데 한 달째 실종되었어요. 시체가 썩고 있지나 않을지...”라고 하면 집주인이든 관리인이든 누군가는 나서서 열어주기 마련이다. 

그리고 내가 그 집에 들어가서 발견한 것은 좀 특이했다. 

아니, 아니다. 정말로 시체가 썩고 있었던 건 아니다. 내가 이 직업에 10년째 종사하면서 이제껏 작가가 죽었기 때문에 연락두절인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작가란 워낙 자기 과시가 심한 족속이라 자살이든 타살이든 동네방네 광고를 하지 않고는 죽지도 않는다. 내가 예상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우찬영 작가가 이미 이 집을 떴으리라는 것이었고, 이 집을 구석구석 뒤지면 그의 다음 행선지를 추적할 실마리가 나오리라는 것이었다. 

그 예상은 반만 맞았다. 일단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작가가 이미 어딘가로 떠난 지 오래인 것이 확실했다. 현관문에 덕지덕지 붙은 치킨집과 세탁소 광고 전단도, 다 말라 죽은 허브 화분들도 한참 전부터 이곳이 빈 집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실내 풍경이 좀 이상했다. 서재도, 침실도, 부엌도, 화장실도, 작가에 대한 나의 순결한 환상을 깨지 않을 만큼이나 굉장히 깨끗했다는 점도 이상했지만(맙소사, 작가인데 집이 깨끗하다니, 악명대로 성격이 나쁘긴 정말 나쁜 모양이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깨끗한 방들 곳곳에 이따금씩 위화감을 자아내는 물건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빵 부스러기가 남아 있는 접시 한 장, 커피가 말라붙은 머그컵 하나, 건조대에 널린 수건이며 속옷. 마치 10분 전에 잠깐 어디 외출 나간 사람의 집 같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서재의 컴퓨터로 걸어가 전원을 켰다. 어쨌든 가장 많은 정보는 컴퓨터에서 나오기 마련이니까. 바탕화면에 특별한 게 없다는 걸 확인한 나는 곧바로 웹브라우저를 켰다. 집에 있는 데스크탑은, 더군다나 우찬영처럼 독신인 작가는 어느 사이트든 자동 로그인이 설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예상대로 나는 손쉽게 그의 이메일 계정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언뜻 훑어보니 받은 편지함에는 별 게 없었다. 눈길을 끈 것은 임시 저장함이었다. 

임시 저장함에는 ‘나야.’라는 간단한 제목의 보내려다 만 메일이 들어 있었다. 수신인의 메일 주소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몇 없는 친구 중 한 명에게 보내려 했던 것 같았다. 작성일은 정확히 한 달 하고도 일주일 전, 즉 우찬영의 원고 마감일이자 잠적일로부터 7일 전이었다. 

나는 빈 집 특유의 괴괴한 정적과 책먼지 냄새가 내려앉은 서재에서, 그 장문의 메일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그건 이메일 하나, 블로그 신변잡기, 생일 카드 한 장이라도 도무지 평범하고 간소하게 쓰질 못하는 모든 작가들이 그렇듯이 장황한 내용이었고, 또한 앞으로의 내 일을 풀 실마리가 되어줄지 아니면 더 복잡하게 해줄지 알 수 없는 메시지였다. 

 

*

 

나야. 

예상하겠지만 이번에도 글이 막혀서 연락했어. 항상 얘기 들어주는 거 고맙게 생각해. 이번 메일은 좀 길 거야. 길어도 꾹 참고 끝까지 읽어주길 바라. 아, 네가 무슨 의견을 말하든 반영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은 당연히 잊지 않고 있겠지? 하도 오랜만에 연락하는 거라 혹시라도 까먹었을지 모르니, 불필요한 오해를 미연에 없애자는 차원에서 분명히 해둘게. 소설의 주인은 나라는 것. 소설의 모든 내용과 구성은 내가 결정한다는 것. 내가 너에게 작가로서의 내 고민을 털어놓고 의견을 구하는 건 그저 효과적인 브레인스토밍 작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 네가 이 모든 걸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걸 기쁘게 생각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가가 무슨 질문을 하거나 의견을 구하면 자기가 그 작가의 작품에 무슨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멍청이인데 말이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신작 장편소설의 제목은 <은잎>이야. 배경은 90년대 서울, 주인공은 두 명의 여고생. 임의로 L과 M이라고 할게. 

L은 곱게 자란 모범생 타입이야. 고급 공무원 아버지, 전업주부인 어머니, 경영대 다니는 오빠가 하나 있지. 40평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고, 대학가 앞에 상가 한 층을 갖고 있어서 그거 세도 꼬박꼬박 받아먹는, 말하자면 그럭저럭 사는 집 딸이야. L은 똑똑하고 야무진 편이어서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쉽게 인정을 받으며 자라왔어. 다만 타고나기를 이기적이라는 단점이 있지. 워낙 아빠 엄마 오빠가 공주님처럼 대해줬으니까.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싹싹하긴 한데, 결정적인 데서 자기 자신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거야. 그래서 주변 아이들의 불필요한 오해를 사곤 해. 선생님들에게 예쁨을 받고 일부 친구들에게는 사랑을 받는 반면, 어떤 애들은 L이 잘난 척한다는 이유로 굉장히 싫어하는 거지. L은 주변의 그런 오해가 스트레스고. 

M은 L과 완전히 반대야. 어렸을 때 엄마가 얘를 미혼으로 낳고 버려서 이모가 대신 키우고 있어. 그 이모라는 사람은 딸이 이미 둘이나 있고, 남편은 공사 현장에서 비계가 무너지는 사고를 당했다가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이라는 희귀병에 걸려서 집에 앓아 누워 있는 신세인지라 형편이 열악해. 이모가 M을 구박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혼자 고깃집에서 일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자기 딸들 챙기기도 힘든데 M은 솔직히 짐덩어리지. M도 자신의 그런 처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폐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해. 물론 M은 눈치 주는 이모도 한 달에 한 번 꼴로 아프다고 발작하는 이모부도 자기를 따돌리는 사촌동생들도 자기를 버리고 연락도 없는 엄마도 다 밉지만, 즉 세상이 원망스럽지만, 그런 원망 때문에 섣부른 반항을 하기에는 생존 본능이 더 강한 애야.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셈이랄까. 

M은 L과 달리 주위의 주목을 받지 못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M은 늘 조용하고, 성적은 중간을 약간 밑도는 정도이고, 별 사고도 치지 않아. 혼자서 책을 읽거나 글을 끼적거리는 게 유일한 낙이지. M이 책을 접한 건 어렸을 때 한 번 가출을 했다가 하루만에 파출소에 잡혀 들어갔을 때였어. 그때 이모는 사흘이 지나도록 M을 데리러 오지 않았고, M은 파출소에서 시켜주는 밥을 먹으면서 구석에 비치된 낡은 아동용 세계문고를 보며 시간을 때웠지. 그때 M은 두 가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어. 첫째, 가출 같은 짓을 해봤자 자기만 손해라는 것, 둘째, 책을 읽으면 모든 걸 잊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M은 소설을 읽고, 소설을 쓰게 돼. 소설가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야망까지는 없어. 그저 M은 소설이 지금의 현실을 견디기 위한 필수적인 방편일 뿐. 

L은 M과 달리 고급공무원이 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 하지만 그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야망이라고 할 수는 없지. 집에서 첫째는 대기업, 둘째는 공무원으로 진출시키겠다는 방침을 어려서부터 당연시했고 L은 그 방침에 아무런 저항감을 느낀 적이 없이 그저 따랐을 뿐이니까. L은 현실주의자야. 미래는 엄격한 현실의 영역이어야 하고, 거기에 꿈을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꿈을 미래로 끌고 가는 건 낙오자들이 하는 짓이거나 곧 낙오될 사람들이나 택하는 길이라고 생각해. L에게 글쓰기나 소설 같은 건 언어 영역의 지문 독해나 논술에 필요한 소양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교양 있는 사회인이 되기 위해 쌓아야 할 지식일 뿐이야. 

그 나이 때 여자아이들은 상당히 눈치가 빠르지. L 주위의 아이들은 L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어. L이 아무리 서투른 상냥함으로 위장해도, L이 그들을 낙오자 아니면 곧 낙오될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건 뻔히 티가 날 수밖에 없었어. 특히 정말로 낙오자인 애들은 더더욱 L을 싫어했지. 아, 아니야. 오히려 진짜 ‘노는’ 애들은 L을 좋아하거나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는 편이었어. 왜냐하면 L은 그들의 숙제를 선뜻 도와주고, 필기를 빌려주고, 가끔 부모님이 해외 여행에서 사왔다는 초콜릿이나 화장품 샘플을 주기도 했으니까. L은 찌질하지도 않고 입이 싸지도 않고 뚱뚱하지도 않고 안경도 안 쓰고 옷도 잘 입고 다녔으니까. L 같은 타입을 싫어하는 애들이 누구냐면, L을 선망하면서도 동시에 열등감을 느끼는 애들이야. 공부를 적당히 잘 하고, 집도 적당히 잘 사는,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L의 성적을 따라잡을 수 없고 선생님들의 애정을 빼앗을 수도 없는. 세상이 가르치는 차별과 불평등의 논리에 상처를 받을 만큼 충분히 예민한 아이들이 L을 싫어했고, 비방했어. 

그러던 어느 날, L은 교실에 들어왔다가 자기 책상에 유성 매직으로 “체육 선생이랑 빠구리 뜬 창녀년”이라고 낙서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어. 아직 L을 괴롭히기까지는 하지 않았던 아이들이 결국 작심을 한 거지. L은 울지 않았어. 자존심이 강했으니까.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화가 났지만 상스럽게 그런 걸 터뜨리지는 않았어. 화는 L 대신 L의 친구들이 터뜨렸지. 누구야? 누가 이랬어? 어떤 썅년이 이랬어? L의 친구들이 호들갑을 떨며 눈을 부라렸지만 모두가 모른 척만 하고 있었어. 자기들도 영문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침묵하는 와중에 한편으로는 L과 체육 선생과의 스캔들에 호기심이 역력한 눈알들이 사방에서 빛나고 있었지. 

그 상태를 깨뜨린 게 M이었어. 

M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서, 늘 매니큐어와 아세톤과 화장솜 일체를 갖고 다니면서 주변에 독한 냄새를 풍기곤 하는 아이에게 다가갔어. 그리고 침착하게 아세톤을 빌려달라고 하더니, L의 책상으로 건너와서 그 낙서를 꼼꼼히 지워주었어. M의 움직임은 어쩐지 한밤의 고속도로 위를 지나가는 고라니처럼 무구하고 평화로워서, 모두가 그 짐승을 방해하지 않으려 멈춰선 운전자들처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어. 

그게 전부였어. 낙서를 다 지운 M은, 자신에게 쏠린 주변의 시선에 겸연쩍어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어. 그 겸연쩍음은 모두를 덩달아 겸연쩍게 했어. 드라마틱하게 화를 내면서 선정적인 분위기를 고조시켰던 L의 친구들도, L과 친구들의 반응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던 가해자들과 방관자들도.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L이 M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어.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L은 M에게 큰 관심이 없었어. 다만 특유의 친절함으로 M에게 말을 걸고, 사소한 선물을 하고, 사려 깊은 질문을 하고, 체육복을 다 입을 때까지 기다려주기는 했었지. L에게 그런 건 그냥 부모님이 가르친 예의였기 때문이야. 

하지만 M에게는 그것이 감동이었어. 지금까지 M을 그렇게 대해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물론 M은 자신에 대한 주변의 무관심이 딱히 고통스럽지는 않았고, L이 자신을 좋아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어. 다만 L의 친절이 그렇게 무심하기 때문에 도리어 우아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 M은 L이 우아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동경했고, 그래서 도와주고 싶어했어. 그저 L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저 L의 책상 위에 그런 낙서가 적힌 채로 놔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M은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L을 좋아했고, L은 M의 그런 이상함에 매혹을 느꼈어. 그래, L은 M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M이 대가나 목적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데에. 진로나 미래를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에.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를 견뎌내는 것만도 바빠서 그런 걸 고민할 시간이 없다는 데에. 소설을 좋아하고 소설을 쓴다고 말하면서 문학특기생 코스를 밟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데에. L은 연예인이 되겠다느니, 소설가가 되겠다느니, 패션 잡지 편집장이 되겠다느니, 여행 사진을 찍겠다느니 하는, 그런, 으레 10대 아이들이 가지는 섣부른 자의식부터 앞서는 피상적인 꿈들에 농담으로라도 공감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내심으로는 경멸했지. 그런데 M은 그런 식의 꿈 같은 게 없었던 거야. 아니, M의 삶 자체가 꿈처럼 보이는 면이 있었지. 어쩐지 땅을 단단히 딛지 못하고 허공에 0.1센티미터쯤 붕 떠 있는 것처럼 말이야. 

 

음, 미치겠군. 간단히 쓰고 싶어도 그렇게가 안 되네. 내가 지금 이 원고를 쓰면서 부딪힌 문제를 설명하려면 작품의 줄거리부터 가능한 세세하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어. 맥락 하나, 단어 하나도 놓치지 말고 잘 읽어야 해. 그게 네 의무니까. 

 

M은 L과 친구가 된 게 여간 기쁘지 않았어. 행복했어. 가슴이 뛰었어. L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할 뿐만 아니라,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니까. L은 M이 좋아하는 책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 책에 대한 M의 견해를 귀 기울여 들었지. L은 M이 쓰려 하는 소설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 줄거리와 캐릭터와 사건 들에 대해 주의 깊게 경청했지. 게다가 그 모든 것을 정말로 좋아해주었어. M은 이제껏 누군가 보아주리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던, 단지 삶을 견디기 위한 은신처에 불과했던 눅눅하고 어두운 지하실이, 베르사유의 거울의 방처럼 휘황찬란하고 역사적인 공간으로 확장되는 환희를 느꼈어. L이 들어주었기 때문에 비로소, M은 자신의 말들이 진짜라는 실감이 들었어. 다른 누구도 아닌 L이 들어주었기 때문에 비로소, M은 자신의 말들에 가치가 있고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M은 자신이 그렇게나 많은 말들을 할 수 있는 사람인 줄 몰랐는데, 말을 싫어한다고만, 늘 조용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고만 믿었는데, 그런데 자기도 생각지 못했던 말들이 지하수가 터진 것처럼 끊임없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던 거야. 스스로도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M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웃는 L은 예쁘고 선량한 히로인 같았어. M이 이제까지 읽은 모든 낭만주의적 소설에 등장하는 히로인 같았어. L은 구혼자들이 줄을 잇는 왕녀 같았고, 탑에 갇힌 샬럿의 레이디 같았고, 사랑의 묘약을 먹은 이졸데 같았고, 왕비가 되기로 결심한 어린 시절의 퐁파두르 부인 같았어. 정말로 그렇게 보였어. 보편타당한 히로인의 미덕을 갖춘 L의 주위에는 무례하고 지저분하고 위험한 것들이 들끓었고 M은 그런 L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L을 질시하고 깎아내리려 혈안이 된 아이들로부터, L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채 고작 성적으로 평가하는 선생들로부터, L을 전리품처럼 거머쥐고서 우쭐거리려 하는 현재와 미래의 남자들로부터 L이 손상되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었어. 

한편 L은 M의 말들이 신비로웠지. M은 마치 세상의 모든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으니까.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의 무연한 통찰력과, 아직 세상을 살아보지도 못한 사람의 결백한 상상력을, M은 모두 가지고 있는 듯했어. L에게는 인식 불가능하거나 어지럽게 분절된 파편들로만 존재했던 세상의 단면들을, M은 마법처럼 그러모아서 한 장의 산뜻한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곤 했어. 이를테면 같은 반 아이들과, 8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영어 선생님과, 거리의 부랑자들과, 데모하는 사람들과, 탑골공원의 할아버지들과, 가든 식당에서 밥을 먹는 불륜 남녀들이, 왜 그렇게 살아가는지, 그런 사람들이 100년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또 1000년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M은 이야기했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L은 무언가가 변화하는 것을 느꼈어. 이제껏 변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단지 삶의 전부라고 여겼기에 살아왔던 학교, 학원, 집의 반복인 생활이, 그리고 곧 출근과 퇴근과 잠이 될 미래가, 초원과 사막과 우주와 바다를 가로지르는 공간으로 확장되는 신비를 느꼈어. 

그 신비는 곧 안도감이었을 거야. 세계가 언어로 환원 가능하다는 안도감. 다시 말하자면, L이 위태로운 일관성을 애써 가장하지 않더라도 세계는 그 자리에 언제나 주어져 있다는 안도감. M 앞에서라면 L은 언제나 온전하고 연속적인 존재였고, 그러므로 여느 사람 앞에서와는 달리 자신을 가장할 필요가 없었지. 어떻게 말해야 똑똑해 보일지, 어떻게 말해야 어른스러워 보일지, 어떻게 말해야 눈치 없어 보이지 않을지를 계산할 필요가 없었어. 어차피 말은 M이 했으니까. 생각은 L이 하고, 말은 M이 했으니까. L은 M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즐거웠고, M은 L에게 이야기하는 게 즐거웠으니까. 

“맞아, 정말 그래.” 

“아, 나 그거 알아.” 

“그래, 정말 그래.” 

두 시간 내리 이런 말만 수 십 번쯤 주고 받으면서 미친 것처럼 웃을 수도 있었어. 실제로도 둘은 끊임없이 붙어 다니며 미친 것처럼 웃었어. 교정에서, 육교 위에서, 패스트푸드점에서, 버스에서, 편의점에서, 백화점에서, 서점에서. 어디를 가든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어. 둘은 사랑에 빠졌으니까. 사랑에 빠진 두 사람에게 공간이란 사랑이 작동하는 배경이자 그 작동에서 비롯된 결과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M은 어디이든 무엇이든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었고, L은 M의 이야기가 태어난 이유이자 그 이야기가 도착할 목적지가 되어주었으니까. 

그럼에도 두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 한 군데 있기는 있었어. 학교 뒷산 기슭에 있는 작은 공터. 빽빽하던 나무들이 별안간 탁 트이면서 드러나는 그 잔디밭이 두 사람의 비밀 장소였지. 경관이 그리 아름답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호젓한 공간은 흔치 않았거든. 무엇보다도 그곳에는 독특한 사물이 하나 있었어. 누가 실수로 잘못 심은 것처럼 공터에 외따로 서 있는 작은 단풍나무 한 그루. 그 나무의 이상한 점은, 잎사귀들의 3분의 2가 은빛을 띠고 있었다는 거야. 

“얘 잎이 왜 이러지?” 

“은엽병(銀葉病)이야. 균에 감염돼서 그래.” 

“예쁜데. 동화 속에 나오는 것 같잖아. 꼭 마이더스가 만진 것 같아. 마이더스는 금이지만.” 

“금처럼 야하고 화려한 건 원래 폭군들이나 좋아해. 너 같은 애는 은이 훨씬 더 어울리지. 누가 꾸준히 관리해줘야 제 빛을 내는 은.” 

“그래?” 

“정말 그래.” 

“그럼 나도 이 병 걸리게 해줘.” 

“좋아. 이렇게 해보자. 어느 나라 공주님이 은엽병에 걸려서 시름시름 죽어가는 거야. 처음엔 머리카락부터, 그 다음엔 눈동자가, 그 다음엔 온 몸이 은이 되어버려.” 

“그래서?” 

“근심에 빠진 왕이 공주를 살리기 위해 온 나라에 왕명을 내려. 공주를 살리는 의사에게 공주를 주겠노라고.” 

“그런 다음엔?” 

“음... 내로라 하는 의사들이 찾아와서 공주를 살리려 하지만 물론 실패해. 마침내 공주를 살린 건 어느 비천한 정원사였어. 공주가 걸린 병은 식물의 병이니까, 정원사가 고치는 게 맞지.” 

“어떻게 살렸는데?” 

“글쎄. 좀 더 생각해보자.” 

둘은 곧잘 은빛 단풍나무 아래의 아지트에 찾아가서 놀곤 했어. 그 이야기를 구체화시키려다가 역할 놀이도 시작하게 됐지. 병에 걸린 공주 역은 L이, 왕과 의사들과 정원사 역은 모두 M이 맡아서. 공주는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었고, 왕과 의사들과 정원사는 말을 많이 해야 하니까. 

L은 은빛의 단풍나무 잎사귀로 엮은 화관을 쓰고 흙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어. M은 L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고, L의 심장 고동을 듣고, L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L에게 키스를 하기도 했어. 

“이게 정원사의 처치란 말이야?” 

“이 나라 정원사는 식물에게 키스도 해.” 

“그럼 이제 내 병 낫는 거야?” 

“아니요, 공주님. 키스로 병이 낫는 건 지나치게 진부해요.” 

그리고 둘은 또 미친 듯이 웃었어. 

 

잘 읽고 있니? 이렇게 완성되지 못한 형식으로 줄거리만 나열하는 것이라도 부디 네가 읽기에 조금이나마 재미있었으면 좋겠어. 너에게 온전한 장편소설로 이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렇게 내가 길이 막혔을 때, 도저히 어떻게 글을 더 이어나갈 수가 없을 때, 온 세상에 혼자가 된 것 같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만 같을 때, 너에게 나의 고민을 털어놓는 것이 나의 오랜 악습임을 이해해주길 바라. 너는 언제나 이해해줬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참을성을 발휘해주었으면 좋겠어. 그래줄 수 있지? 계속할게. 

 

그 공주 이야기는 도무지 진전이 되지 않았어. 그리고 진전이 되지 않는 게 당연했어. M은 그 이야기를 완성할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야. 

M은 소설을 쓴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한 번도 소설을 제대로 완성해본 적이 없었어. 조각글을 끼적거리고 쌓아두기를 반복했을 뿐이야. 열정과 상상력과 불완전한 재능을 갖추었지만 그걸 완성된 작품으로 다듬을 능력과 끈기는 없었던 거지. 그 나이 때 문학소녀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리고 사실 M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M은 한편으로 그 나이 때의 많은 문학소녀들과 달리, 소설을 현실로 가져와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자아 실현의 도구로 삼아야겠다는 망상이나 자기 이름 석 자가 적힌 책을 갖고 세간의 주목을 받고 싶다는 허영심 따위는 없었어. 그게 M의 고귀함이었고, 그게 M의 한계였어. M은 L이 들어주기만 하면 아무래도 괜찮았던 거야. 아니, 오히려 L이 계속 이야기를 듣게 하기 위해서라면 M은 자신의 이야기가 영원히 종결되지 않기를 바랐던 거야. M은 소설을 완성하길 원하지도 않고, 완성할 수도 없었던 거야. 

그래서 L은 좀 초조해졌어. M이 하염없이 결말을 미루기만 하니까. 이야기를 완성하지 않고 이야기의 경계를 한없이 확장하기만 하니까. 여전히 재미있고 여전히 매혹적이긴 했지만, 뭔가를 많이 쌓았으면 그걸로 응당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삶의 방식에 익숙한 L은 이만큼 했으면 뭔가 결실이 나와주기를 바랐어. M이 L 대신 말을 해주었으니, 이제는 L이 M 대신 M의 말들을 다듬는 일을 해주는 게 옳다는 생각도 들었어. 

그래서 L은 은엽병에 걸린 공주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했어. 

L은, 다시 말하지만, 똑똑하고 야무진 아이였어. 중학교 때부터 내내 전교 3등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가 되려면 어지간한 끈기와 강단이 없으면 안 되잖아. 타고난 총기도 있어야 하고. L은 읽고 보고 듣는 것들을 재빨리 자기 것으로 흡수하고 기억하고 응용하는 스펀지 같은 아이였어. M의 이야기들도 예외가 아니었지. L은 M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던 만큼 그 깊고 깊은 정수까지 빨아들이고 있었던 셈이야. 

그래서 소설을 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어. 일주일 만에 단편 하나를 탈고할 수 있었지. 일단 펜을 들고 써나가다보니 술술 맥락이 잡혔어. 공주가 어쩌다가 은엽병에 걸렸는지, 공주의 소망과 욕망은 무엇이었는지, 그 왕국은 어떤 나라였는지, 세 의사들은 각각 어떤 방식을 썼는지, 정원사가 어떤 방법으로 공주를 살렸는지, 그리고 그 소설의 최종 결말이 어때야 하는지. 쓰다 보니까 모두 알 수 있었어. M이 조금만 더 의욕이 있고 야멸찼더라면 꼭 이렇게 썼으리라고 생각되는 방식을 L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어. 

가장 중요한 건 결말 부분이겠지. L의 소설에서 정원사는 은색으로 변해버린 공주의 머리와 발을 잘라냈어. 이 병에 걸린 나무는 문제 부위를 벌채해주어야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야. 머리와 발이 잘린 공주는 고운 꽃과 과실을 맺었지. 그건 공주의 소망이기도 했어. 공주는 비천한 정원사를 사랑했고, 평생토록 정원사의 손질을 받으며 온 나라 사람들이 그 꽃과 열매를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나무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하지만 왕은 공주를 나무로 만들어버린 정원사에게 분노해 그를 처형해버렸지. 이후 정원사는 한 마리의 새로 다시 태어나 나무와 만 년 동안 행복하게 살았다고 해. 

L은 이러한 동화적인 이야기에, M이 그동안 만들어냈던 이야기들 중에서 현재의 한국을 배경으로 한 것들을 몇 가지 골라다가 섞어넣었어. 그러자 이 소설은 가상의 동화라는 씨실과 90년대의 한국의 사회성이라는 날실을 엮은 번듯한 단편소설이 되었어. 

L이 완성된 소설에 <은잎>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M에게 보여주었을 때 M은 깜짝 놀랐어. L은 난생 처음으로 써본 소설이라고 했는데 그건 도저히 여고생이 처음 쓴 습작으로 보이지 않았거든. M은 L의 글솜씨에 감탄해 마지않았지. 물론 기본적인 줄거리와 소재 들은 모두 M 자신이 제공한 것이었지만, M은 그게 자신의 공로라는 것을 민감하게 의식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빼앗겼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어. 그저 행복했어. 가슴이 뛰었어. L과 함께할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아니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L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듯 근사하게 가꾸어주었기 때문에. M이 시작한 이야기의 끝을 L이 내주었기 때문에. 그것은 세상에서 가능한 가장 은밀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 같았어. 

“정원사와 공주처럼 우리는 만 년이라도 사랑할 수 있을 거야.” 

L도 행복하긴 마찬가지였어. <은잎>이 잘 쓴 소설이라는 것을 확신한 L은, 자신과 M이 함께 무언가 대단한 일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앞으로 더욱 대단한 일들을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들었지. 

“우리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야.” 

L은 어디에 출품이라도 해볼까 하고 물어봤고, M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대답했어. 그래서 L은 소설 공모전 몇 군데에 응모를 했어. 만약 우리의 이야기가 당선되어 상금을 받는다면 수능이 끝난 뒤 그걸로 어딘가에 여행을 다녀오자, 캄보디아나 페루나 알바니아 같은 곳으로 가서 낯선 것들을 보고 듣고 경험하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보자고 계획하며, L과 M은 희망에 부풀었어. 

하지만 삶은 두 여고생의 소망처럼 진행되어주지 않았지. 

작품이 당선되지 않은 게 아니야. 당선은 되었어. 그것도 청소년 문학상도 아닌 버젓한 대형 문예지 신인상에.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쓴 사람이 여고생이라는 데에 깜짝 놀랐어. 문단과 출판업계와 언론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19세의 작가를 스타 신인으로 만드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지. 세간의 집중 조명이 L에게 쏟아졌어. 상금이 문제가 아니었어.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고, 출판사들의 러브콜이 쇄도하고, L의 사진이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박히고,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가족과 일가친척이 <은잎>을 알게 되고, 인터넷상에 얼굴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은잎>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은 결코 L과 M이 생각했던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어. 그건 L의 이름으로 낸 작품이었고, 그러니 작가는 L이어야 했어. 그건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L의 이야기가 되어야 했고, 상금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L과 그 가족의 것이어야 했고, 명예와 새로운 진로와 새로운 삶은 L의 것이어야 했어. 

물론 L은 M과 함께 쓴 이야기라고 밝히려고 노력했지. L은 수상소감과 인터뷰마다 절친한 친구 M이 글감을 만들었고 자신은 그것을 글로 썼다고 숱하게 말하고 다녔어. 하지만 사람들은 M의 존재에 관심이 없었어. 누가 처음 글감을 제공했든 간에 그것을 글로 쓴 사람은 결국 L이니까. M은 L의 작품에 ‘기여’를 한 존재일 뿐, 작가가 아니었으니까. M은 L의 겸손함과 정직함을 상징하는 존재 내지는 문학 소녀끼리의 우정이라는 미담으로 L에게 따라붙는 액세서리가 되었을 뿐이었지. 

서로가 서로에게 평등하고 고유한 존재였던 두 사람은, 어느새 어른들에 의해 더 중요한 존재와 덜 중요한 존재로 차등화되었어. 재능 있는 10대 작가 L과 그 친구인 M. 총명한 여고생 L과 그 친구 M. 돈 있는 집 딸 L과 그 친구 M. 

시상식에서, 새로 산 다홍색 코트를 예쁘게 차려 입은 L은 이 작품을 쓰는 데에 많은 영감을 준 M에게 고맙다고 말했어. 

사람들이 기대감에 어린 눈빛으로 객석 맨 앞자리에 앉은 M을 돌아보자, 낡은 회색 더플코트를 입은 M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시상대 위로 걸어 올라갔어. 

L과 M이 함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자 박수가 쏟아지고 플래시가 터졌어. 

L과 M이 함께 L의 이름이 새겨진 상패를 들어올리자 또 다시 박수가 쏟아지고 플래시가 터졌어. 

M은 상패에 적힌 L의 이름을 아세톤으로 지우고 싶다고 생각했어. 

 

잘 읽고 있니? 아직 읽고 있는 거 맞아? 네가 듣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어... 나는 네 의견이 필요한데.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돼. 이 문제에 대해 꼭 네 조언이 필요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그러지 않으면 나는 이 작품을 도저히 완성할 수가 없을 거야. 이제 조금 남았으니까... 정말 조금 남았으니까. 

 

M은 그 시상식에서 모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깨달았어. M이 L의 성공에 질투를 한 건 아니었어. 하지만 두 사람이 더 이상 ‘우리’일 수 없게 될 때, 삶은 그들에게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법이지. M은 L의 것처럼 아름답지 않은 자신의 회색 더플코트가, L처럼 날렵하지 못한 자신의 웃음이, L의 것처럼 매끈하게 완성되지 못하고 여기 저기 흩어진 자신의 남루한 이야기들이 별안간 부끄러워졌어. L에게 들려주기 위해 만들었던 그 이야기들이 한심하게 느껴졌어. 자신이 꿈꾸었던 만 년 동안의 사랑이 터무니없이 순진했던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런 생각이 또 부끄러웠어. 

부끄러움에 시달린 건 L도 마찬가지였어. L은 갑자기, M과 어울리는 것이 창피해졌어. M과 같은 아이를 신비롭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고, M과 키스하고 M과 사랑을 속삭이고 M과 역할놀이를 하고 놀았던 그 모든 일들이 낯뜨거울 만큼 유치하게 느껴졌어. L은 M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자신의 눈앞에서, 기억속에서, 그리고 자신이 쓴 소설 속에서. <은잎>이 자신의 온전한 전유물일 수 없게 하는 M의 존재가 L에게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던 거야. 

L은 문학 동아리에 들어가고, 각종 출판 모임에 불려나가고, 수시 전형을 준비하고, 차기작을 준비하는 등 바쁘게 지냈어. 그러면서 M에게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려 했지. 하지만 물론 M에게는 그 거리가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어. M은 L이 자신을 외면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 L이 자신을 경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L에 대한 M의 수치심이 배신감으로, 그 배신감이 미움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어. 

마침내 M은 L을 붙잡고 따졌어. 

“어떻게 네가 내게 이럴 수 있니? 그건 내가 너를 위해 해준 이야기들이었잖아. 그런데 너는 그런 나의 마음을 이용하면서 내게 침을 뱉고 있어.” 

그러자 L이 말했어. 

“아니, 너는 내게 소재를 제공했을 뿐이야. 소설의 주인은 나야. 소설의 내용과 구성은 모두 내가 결정했어. 내가 너에게 작가로서의 내 고민을 털어놓고 의견을 구한 건 그저 효과적인 브레인스토밍 작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 나는 네가 이해하는 줄 알았는데?” 

M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그러자 L은 다시 말했어. 

“너는 정원사가 아니었어. 정원사 역할은 오히려 나였지. 덧없는 은빛으로 시들어가던 나무의 머리와 발을 잘라서 되살려낸 사람은 어디까지나 나야. 잘라내지 않은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니야.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자 M은 말했어. 

“나는 너를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L은 눈물을 터뜨렸어. 

“아니. 너의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게 두 사람이 나눈 마지막 대화였어. 

이후 L은 수시 전형으로 원하던 명문대에 합격을 했고, 그때부터 M의 얼굴을 보지 않는 건 쉬웠어. L은 M이 어느 대학에 가기로 했는지, 대학에 가기나 하는지, 졸업 이후의 거취는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거나 궁금해할 생각도 하지 않았어. 그저 누가 알까 부끄러운 꿈을 잊듯이 그렇게 잊어버리기로 했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어. 

L은 대학을 마쳤고, 공무원이 아니라 전업 소설가가 되었고, 작품 여러 권을 발표하면서 이름난 문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어. 그 과정에서 M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졌고 점차 애틋한 추억으로 미화되었어. L은 자신이 처음으로 소설을 쓰도록 해주었던 친구 M에 대해 종종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갈수록 뜸해졌고, 나중에는 아예 잊어버리고 말았지. 작품 활동을 지원해줄 든든한 사업가와 결혼을 했고, 아이 둘을 낳으며, 그렇게 나이를 먹어갔어. 

그러던 L이 M을 다시 생각하게 된 건 어느 여름이었어. 

그 해, L은 유독 글을 쓸 수가 없었어. 아무런 발상도 떠오르지 않았고, 애써 글감을 잡았다 해도 글로 옮기려다 보면 죄다 허튼소리로만 느껴졌지. 한 글자도 쓸 수가 없었어. 아무래도 기분 전환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L은 미용실에 들렀어.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머리에 유난히 새치가 많아졌다는 것을 깨달았지. 펌만 하러 갔는데 염색까지 해야만 했어. 벌써 늙어가나 싶어서 L은 기분 전환은커녕 씁쓸해지기만 했어. 

그런데 염색은 소용이 없었어. 하루만에 물이 다 빠져버리고 오히려 더욱 많아진 새치가 드러나고 말았거든. 하루가 다르게 머리가 하얗게 새어갔어. 사람들은 L이 뭔가 대작을 쓰려나보다고, 얼마나 고심을 하고 있으면 갑자기 그렇게 늙냐고 위로성 농담을 던졌지만, L은 거기에 차마 웃을 수가 없었어. 그게 뭔지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그 머리카락은 흰색이 아니라 은색이었으니까. 맑은 겨울밤 하늘에 뜬 달처럼 은은한 빛이 나는 은빛의 머리카락을 L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으니까. 

눈의 홍채와 손톱 끝이 은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남편만은 L의 변화를 알아보았어. 남편도 <은잎>을 읽었으니 그게 무슨 뜻인지도 알고 있었어. 그는 두려움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병원 여남은 데를 들러도 의사들이 고개만 내젓자, L은 M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어. 

M은 종적이 묘연했어. 마지막으로 알 수 있었던 소식은 M이 친엄마를 찾겠다고 이모댁을 나갔고, 대학에서 자퇴한 뒤 모두와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이었어. L은 M의 행방을 찾아 온갖 곳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지만 M은 원래부터 있지도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 찾을 수가 없었어. 

그 사이에 몸 전체가 은색으로 변해버린 L은 더 이상 스카프와 옷으로 은빛의 머리와 피부를 가리기도 버거워졌어. 그나마 가을이 다가오면서 날이 추워진 덕분에 온몸을 칭칭 감고 다녀도 눈총을 덜 받을 수 있으니 다행이었지. 절박해진 L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학교 뒷산, 은엽병에 걸린 단풍나무가 있던 바로 그곳이었어. 

몇십 년만에 찾아가는 길인데 참 이상하지, 몸이 기억하나봐. L은 기억을 되살릴 필요도 없이 그 길도 없는 산 속을 무언가에 이끌리듯 거침없이 걸어올라갈 수 있었어. 얼어붙어가는 흙과 삭정이들을 바삭바삭 밟으며 황량한 초겨울의 산을 30분쯤 올랐을까, 마침내 눈앞이 탁 트이면서 예전의 그 공터가 나타났어. 

그리고 L은 그곳에서 예전의 단풍나무를 발견했어. 

가지의 3분의 2가 잘려나가 있고, 나머지 가지들만은 불타는 듯 화려한 진홍색의 잎사귀들을 자랑하고 있는 단풍나무를. 

 

내 소중한 친구야. 

나는 여기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이 소설의 결말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무래도 L이 죽거나 사라지는 것으로 끝내야 할 것 같긴 해. 은엽병에 걸린 L이 결국 시들어서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으로 말야. 그치? 너도 그렇게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문제는... 나는, 이 소설을 L의 1인칭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L의 죽음이나 사라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L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거나, 누구도 L을 볼 수 없었다는 식의 결말을 보여주려면, 마지막에서 시점을 다른 인물의 것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잖아. 하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형식적인 일관성이 무너져버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전체의 시점을 3인칭으로 바꾸면, 애초에 내가 이 이야기를 쓰는 의미가 훼손되고 말아. 

이 문제는 아무래도 단순한 기법상의 곤란이 아닌 것 같아. 그보다 한층 더 깊은, 내 안에 들어 있는 어떤 깊은 문제에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너에게 이렇게 긴 메일을 쓸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이런 의문 때문이야. 

네가 그랬지, 소설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분명히 아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보기로 했어. 내가 정말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너를 거쳐서 물어보기로 했어. 

 

있잖아, 내가 우리의 이야기를 이렇게 바꾼 게 잘못인 걸까? 

왕따에 시달리던 내가 아름다운 너를 만나서, 너의 소설과 너의 가난한 삶과 너의 모든 것을 동경했다는 걸, 너의 그 무심함까지도 사랑했다는 걸. 

거꾸로 무심한 쪽은 나였고, 나를 동경하고 사랑했던 쪽은 너였다고 바꾼 게 그렇게 잘못인 걸까? 

의도적으로 너의 소설을 가로채서 내 이름으로 투고했던 나의 악행을 이렇게 부드럽게 각색한 게 많이 잘못이니? 

내게 복수하겠다고 협박하는 너를 죽여서 단풍나무 밑에 시체를 파묻은 뒤, 네가 친모를 찾으러 떠난다는 말을 남겼다고 경찰에 거짓 증언을 했던 나의 범죄 행각을 이렇게 삭제해버린 게 많이 잘못이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너도 알잖아. 소설에는 개연성이 있어야 해. 현실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하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곳이 현실이야. 도저히 참아줄 수 없는 클리셰들이 난무하는 것도 현실이야. 생각해봐. 집에서는 맞바람 난 부모님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고,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집단 따돌림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뚱뚱하고 음침한 모범생 L이라니. 이런 인간은 현실이니까 존재했던 거지, 그걸 그대로 소설로 쓰면 너무나 진부한 캐릭터가 되잖아. 그리고 L만 맹목적으로 M을 사랑해서 쫓아다니기만 하면 둘 사이에 관계가 아예 형성되지 않고, 그러면 아예 아무 이야기도 시작되지 않잖아. 물론 현실에서는 너와 나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었어도 이야기는 시작되었지만... 네가 나를 돌아봐주지 않아도 이야기는 계속되었지만... 무자비하도록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지만... 그렇기에 현실 속에서는, 내가 널 죽인다는 귀결은 별로 놀라울 게 없었지. 어리고 미숙하고 불행하며 절박한 아이였던 나로서는 충분히 취할 수도 있는 선택이었으니까. 그때 나는 네가 끝장나든지 내가 끝장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거야.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소설에는 개연성이 있어야 하잖아. L이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하면 독자들은 너무 억지라고 말하고 믿지 않으려 할 거야. 실제로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독자들은 세상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함부로 말해댈 거야. 독자들은 어리석으니까. 너도 알잖아. 그렇잖아? 

이렇게 나는 모든 문제들을 세심하게 고려해서 이 소설을 쓰고 있어. 너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게끔, 네가 살아 있었다면 꼭 이렇게 썼으리라고 생각되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난 도무지 모르겠어. 

 

이제 내 눈동자까지 은색으로 변해가고 있어.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새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내 소설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환각을 보고 있거나 꿈을 꾸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무리 거울을 뚫어져라 노려봐도 이건 꿈이 아니더군. 

나는 지금 내 머리와 발을 잘라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고 있어. 하지만 그건 분명 고통스럽겠지.

너는 죽어가면서 어떤 기분이었니. 많이 고통스러웠니? 나를 많이 원망했니? 그때 네가 내게 쏟아부었던 저주의 말들이 기억 나. 나를 노려보던 너의 마지막 얼굴도 기억 나. 사실 꿈에도 나오곤 해. 아니, 꿈을 꾸고 있지 않을 때에도 네 얼굴이 보이고, 네 비명이 들리곤 해. 너 때문에 나는 정상적인 일상 생활을 하지 못한 지 오래 됐어. 누군가와 만나서 몇 분이라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다는 게 불가능하니까. 사람들은 이미 나를 잊어가고 있어. 이 정도면 나는 충분히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봐. 네가 보기에는 아직도 모자란가봐. 내가 지금 쓰는 이 소설로 너를 위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나봐. 너는 이 이야기가 못마땅한가봐.

내 병이 무서워. 나는 죽는 게 두려워. 아니, 아니야. 내가 진정 두려운 건 그게 아니야. 죽는 건 괜찮아.하지만 내가 아무에게도 목격되지도, 증언되지도 못한 채 은빛으로 시들어 사라진다면, 이 세상에서 오로지 나만이 알고 있는 너의 역사가 이대로 영영 사라지리라는 게 두려운 거야. 너도 그렇지 않니?

뭐가 불만인지 말을 해줘. 내 소설에서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 L의 이야기를 어떻게 끝맺어야 네가 만족스러울지. 제발 말을 해줘. 소설은 얼마든지 네가 고치라는 대로 고칠 테니까. 네가 좋다고 할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칠 테니까. 제발 이런 장난은 그만해.

 

 

나는 위의 메일을 다 읽은 뒤 편집자에게 포워딩했다. 언제 메일을 보내도 1분만에 열어보는 편집자 P씨는 10분만에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게 다예요?” 

다짜고짜 그렇게 따지는 P씨에게 나는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컴퓨터 폴더를 다 뒤졌는데 일단 소설 원고는 없는 것 같아요. 미완성 원고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찾아낸 건 이게 다예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에 P씨가 입을 열었다. 

“이런 경우 본 적 있어요?” 

“아뇨. 처음입니다.” 

“저도 출판계에서 오래 묵었고 온갖 작가들을 다 만나봤지만 이런 식의 마감 회피 수법은 처음 겪어봅니다.” 

“저도 마감 사수업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보고 실종되거나 사망한 척하는 작가들도 몇 명 겪어봤습니다만 이렇게까지 정교한 사람은 처음 겪어봅니다. 과연 마감 회피로 악명이 자자한 우찬영 선생님 답네요.” 

“그렇죠.” 

다시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혹시 자기도 자기 거짓말을 믿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일종의 허언증이나, 과대망상증이나, 하여튼 하도 은둔을 오래하다보니 머리가 이상해졌다거나...” 

P씨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작가가 얼마나 교묘한데요. 예전에도 미친 척하다가 들통난 전례가 있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사람들이 속아넘어가줄 거라고 과신하고 있을 것 같네요. 그놈의 단풍나무가 있는 공터가 어딘지 경찰과 우리가 찾아헤매는 동안 자기는 어디 사이판에서 느긋하게 휴가라도 즐길 생각이겠죠.” 

“과연.” 

“잘 부탁드립니다. 그 집에서 어떻게든 다른 단서를 찾아보시고 행방을 알아보세요. 이거 참, 드릴 말씀이 없군요.” 

“아닙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음...” 

나는 진심으로 유감이라는 어조로 말하고 잠시 망설였지만, P씨는 내가 뭔가 더 말하려는 기색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도 그냥 끊어버렸다. 

나는 한숨을 쉬고 서재 밖의 베란다를 내다보며, 말라 죽은 화분 밑에 수북히 깔린 은빛의 잎사귀에 대해 P씨에게 말할지 말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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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피의 자물쇠 2013.12.31
해망재 안녕, 세상의 끝 2013.12.31
곽재식 흔한 패턴 (본문 삭제)4 2013.12.31
세이지 낙인 2013.12.31
곽재식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4 2013.11.30
이로빈 이화(二花) (본문 삭제) 2013.11.30
아이 사이보그가 되세요 2013.11.30
정도경 황금 열쇠 2013.11.30
미로냥 선화(蟬化) (본문 삭제) 2013.11.30
곽재식 인간적으로 따져보기 (본문 삭제)9 2013.10.31
아이 프로페셔널 킬러 (본문 삭제)1 2013.10.31
양원영 인조력시장만가(人造力市長輓歌) 2013.10.31
赤魚 [특집1] 파국(破局) (본문 삭제) 2013.10.01
아밀 [특집2] 은잎 201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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