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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망재 처형

2013.09.30 21:3009.30

처형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아이는 언제나 부모 대신 스승에게 모든 것을 배워 왔다. 정무에 바쁜 그녀의 어머니 대신, 배움이 얕은 아버지 대신, 스승님이라 불리는 남자는 늘 그녀의 곁에 있었다. 어린 손을 내밀면, 언제라도 옷자락을 붙잡아 쥘 수 있는 그곳에. 열병에 걸렸을 때에도, 처음 써 본 마법의 실패로 손과 얼굴에 화상을 입었을 때에도, 눈을 떴을 때 가장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이는 바로 그 남자였다. 그녀는 철이 들기 전부터 자신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고, 경박한 아버지가 경애하는 스승에 대해 묘한 경쟁심리를 불태우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정무에는 열심이지만 몸이 허약한 자신의 어머니가, 옥좌의 주인이 바뀔 경우 이 두 남자들을 어린 딸의 공동 섭정으로 세우고자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신의 스승에 대해 최고의 존경을 바치곤 했다.

“그게 꼭 좋은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어요, 전하.”

소년은 활 시위를 풀다 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제 아버지께 신뢰를 보이실수록, 황군 폐하께서는 제 아버지를 싫어하실 텐데요.”
“아바마마께서 그렇게 옹졸한 모습을 보이시면 안 되는 거야.”
“이론과 실제가 같나요.”

올해 열한 살인 그녀는 무릎을 안은 채 웅크려 앉아, 저보다 한 살 위인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 지킬 수 없다면 소중하다는 티도 내선 안 된다고. 하지만, 다른 분도 아니고 태사란 말야. 아바마마께서 아무리 속 좁게 질투하고 견제하신다고 해도, 태사께서 그 정도로 흔들리는 분은 아니잖아.”
“지금까지는 그랬죠. 하지만 전하.”

소년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하오나, 전하께서 어른이 되실 때 까지 폐하께서 견뎌 주시기만 했어도, 저도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요.”

바람이 마른 낙엽을 헤치며 낮게 스치고 지나간다. 하늘은 가없이 높았다. 모든 황제는, 저 푸른 하늘에서 날아드는 황금빛 새의 꿈으로 현몽하여 그 잉태를 알리고, 다시 세상을 떠난 뒤에는 금빛 새가 되어 저 세상으로 날아가리라고 하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 것도, 그녀의 스승님이었다. 키가 크고, 늘 먼 곳을 바라보던 그는, 왼손은 아들에게, 오른손은 그녀에게 늘 열어두고 있었다. 말수가 적었지만, 그는 엄격했지만 어리광부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린아이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안아줄 품을 찾는다. 그녀 또한 그랬다.

“아바마마는 그분의 욕심을 채워 줄 수 있는 쪽이라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분이시지. 폐하를 사랑해서 황군의 자리에 오르신 것도 아니잖아. 지금도 그렇지. 태사를 질투하기만 하실 뿐, 정작 내가 뭘 하고 지내는지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는 분이 내 아버님, 이 나라 황군 폐하시지.”
“그렇다고 해도, 황군 폐하께서 전하께 위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분의 권력은 결국 전하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분은 황금알을 낳는 닭의 배를 갈라버릴 만큼 어리석진 않거든요.”
“차라리 바보였으면 밉지나 않지.”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이 나라의 황제는, 단 한 명 뿐인 후계자가 어른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는, 아무리 좋은 점만 고르고 골라서 본다고 하여도 한 나라의 황군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내였다. 따로 황군을 맞아들이지 않아도 황제의 자식은 황제의 자식이라, 그녀의 후계자로서의 정당성에는 전혀 영향이 없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굳이 그를 황군으로 맞아들인 것은, 자신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확신에 가까운 깨달음 때문이었으리라. 애초에, 아이 같은 것을 낳는다고 할 몸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에 대한 일을,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결국 사랑같은 것은 없었다.

“답답해 죽겠어.”

한쪽은 일찍 어머니를 잃고 말 아이에게 방파제같은 아비가 필요했고, 다른 쪽은 권력이 필요했던 것 뿐이니까. 그러니까, 거기까지면 좋았다.

“아바마마를 황군으로 맞으신 것이야 폐하의 선택이시니 어쩔 수 없지만, 유고시 왜 아바마마를 공동 섭정으로 지목하신 거야. 태사 한 분으로도 차고 넘치잖아. 어차피 아바마마는 정치니 행정이니 그런 것은 모르시는데. 돈 쓰고 노는 법이나 잘 아시겠지.”
“그렇게 권력을 나누어드리지 않으면, 결국 그분은 전하를 볼모로 잡고 아버지를 위협할 테니까요.”
“……설마 그렇게까지는 하시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 못해서 정말 유감이야.”

혈연이라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도, 스승이었다. 늘 희미한 인연만이 느껴지는 부모를 바라보며, 그저 낳아놓았을 뿐인데 무엇이 소중하다는 것일까 생각하며 스스로 껍질 속으로 파고들던 그 때에, 너는 자라서 네 아이에게 같은 마음을 물려주지 않으면 되는 거라고 말해주었던 이도. 그랬기 때문에, 어머니로서 애틋하게 사랑하지는 않았어도 통치자로서 황제를 존경했다.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존경하지는 않았어도, 헛된 욕망으로 움직이는 황군을 안쓰러이 여기려 애썼다. 그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일이기는 했어도 누구나 어느정도는 예상하였던 그대로, 황제가 서른 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열세 살의 소녀는 스승의 아들인 소년과 함께 침묵의 탑에서 한 달동안 근신하며 지냈다. 탑 뒤의 공터에 남은 활터 자리에 과녁을 걸고, 하루종일 활을 쏘거나 책을 읽거나 하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을 보냈다. 본시 황제가 될 이가 그 그릇이 아니라면 누구든 그를 죽이려 하는 이가 숲을 열고 들어와 해치고 말았을 테지만, 이제는 공동 섭정이 되어 권력을 나누어 쥔, 서로가 서로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두 남자 모두, 그녀가 무사히 즉위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에 대해서만은 이견이 없었다. 숲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 한 달 사이 두 섭정이 화해하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상황은 더 좋지 못한 쪽으로 변해 있었다. 본래, 스승은 마법사단의 수장이자 필요하다면 일국의 재상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행정가이기는 하였지만, 워낙 선비같은 인물이라보니 권력에는 영 뜻이 없었다. 반면, 이제 태황군으로 불리게 된 그녀의 아버지는 스승과는 모든 면에서 정 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그 사이 황실 안팎에서 자신을 지지해줄 이들을 끌어모았다. 어쩌면 황제가 죽기 전부터 이런 밑준비를 꾸준히 해 왔으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태황군은, 이제 갓 즉위한 어린 황제의 아버지로서의 권리를 내세우며, 그녀에게 자신이 골라 둔 배우자감을 내놓았다.

“……이렇게 행동력이 좋으실 줄 알았다면, 돌아가시기 전에 너와 정혼이라도 하게 해 달라고 할 걸 그랬어.”
“그랬으면 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텐데요.”
“그럴까……?”

열네 번째 생일이 지났으니, 예전같으면 혼인을 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었을 나이라 하나, 성년도 되기 전에 혼례를 올리는 걱은 법도에 어긋나는 법이라. 성년식을 치를 열 여섯 살 까지 혼인을 미루어 놓기는 하였다. 그러나 어찌할까. 마음이 갑갑했다. 혼인을 그리 미루는 대신, 태황군은 그녀의 스승에게 따로 별궁을 내어줄 테니 그 안에서만 머무르라고 명했다. 그녀가 찾아갈 수도 있었고 사람을 부리는 데는 문제가 없으니 섭정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불안했다. 그 불안이 모습을 갖추듯, 별궁 앞의 경비가 점점 더 삼엄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태황군의 허락 없이 스승을 찾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열 다섯 살이 되는 동안, 요즘들어 갑자기 훌쩍 키가 자라 버린, 바로 얼마 전 한 사람의 마법사로서 각인을 받은 소년은 무언가 더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 했지만,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가 만약에 이 혼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면, 넌 나와 결혼해 줄 거야?”
“아뇨.”
“세상에, 갑자기 얼굴 한 번 못 본 놈과 약혼당한데다 스승님은 연금당하기 직전인데 지금 너한테 차이기까지 한 거야? 뭐 이런 끔찍한 날이 다 있어.”
“다른 형제가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제가 폐하와 혼인하면 저희 집안은 누가 이어요.”
“날 위해 목숨도 바치겠다고 해 놓고 몸은 못 바친다?”
“목숨은 바치겠는데 호적은 못 바친다는 거죠. 그나저나 몸을 바친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아시는 거예요?”

그저 쓸쓸한 농담을 주고 받을 뿐.

“어차피 섭정의 권한이라는 게 성년식까지, 한정적인 거잖아.”
“성년식 지나자마자 혼인을 물려버리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는데, 안 될 거예요.”
“약혼이야 파할 수도 있는 거지.”
“상대가 자정국 막내 왕자예요. 나라와 나라간의 일입니다.”
“미안한데 나 좀, 제발 잠시만 꿈 좀 꾸게 놔 두면 안될까.”
“꿈을 꿔서 현실이 달라질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꿈 꾸시게 두겠어요.”

언제부터인가, 그 키 크고 마른 등만 보였다. 이쪽으로 돌아보아주지 않았다.

“아직도 이렇게 불러도 된다면, 내 공주님. 더는 꿈 꾸지 마세요. 그냥, 앞만 바라보세요. 바꿀 수 없는 것에 매달리지 마시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세요. 자정국 막내 왕자와 결혼하지 않을 수 없을까 궁리하지 마시고, 차라리 자정국 막내 왕자는 어떤 사람이냐고 제게 물으세요.”

소맷자락 너머로 보이는, 긴 손가락을 만지고 싶었다. 찻잔을 쥐고, 붓을 드는 그 손을. 빼앗고 싶었다. 붙잡고 싶었다. 어느새, 이제는 자유롭게 만나러 갈 수 조차 없게 되어버린 스승을 닮아가는 소년이,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 하나하나를 눈으로 좇고 있다.

 
 
 

섭정인 태황군이, 그녀가 스무 살이 되는 해 까지 섭정으로서 통치하는 데 동의하라며 서명을 요구한 것은, 또다시 해가 바뀌어 새해의 첫 조례를 준비하던 아침이었다. 아무리 황제의 아버지라 해도, 중궁, 그것도 아침 단장을 하고 있는 황제의 방에 멋대로 밀고 들어와서는, 술냄새도 다 빠지지 않은 채 내민 것이 그 서류였다. 거절했고, 그날 저녁 새끼손가락 하나가 그녀의 침소로 보내졌다. 희고 긴 손가락. 집어드는 순간, 누구의 손가락인지 알 것 같았다. 치졸한 겁박이라고 웃어넘길 수조차 없다. 잡아보고 싶었던 그 손가락이, 마치, 흰 찰흙으로 대충 빚어 버려둔 듯 싸늘하게 핏기조차 없이 식은 채, 그 잘려나간 단면이 불에 그을린 채 놓여 있었다.

그 손가락이 담긴 상자를 들고, 스승이 갇혀 있는 별궁으로 달려갔다. 잠긴 문 앞에서, 대체 누구를 지키기 위한 병사들일지 모를 근위병들에게 가로막혔다. 마법을,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생각해야지 사람을 해치는 데 사용해선 안 된다던 스승의 가르침을 애써 무시하며, 그들을 기절시키고 문을 열었다. 서재에도, 방 안에도, 스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썩은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며 검을 뽑아들었다.

“태사께서는 어디 계시냐!”

서재를 청소하던 말단 관헌 하나가 그녀를 보고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서재를 나서, 뒷마당 한 가운데, 뚜껑이 덮인 낡은 우물이 보였다. 그 우물의 뚜껑을 열자, 볕도 들지 않는 깊디깊은 수직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스승은 그 안에 있다고 했다. 한 달쯤 전에, 태황군께서 이곳에 납시어 그분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이 마른우물 아래 지하 감옥에 가두라 하셨다 했다. 다행히도 이곳에도 그를 존경하는 이들이 있어, 옷이며 음식을 몰래 우물 아래로 내려보내곤 했고, 다시 두레박을 잡아당기면 흙 묻은 옷가지가 담겨 올라왔으니 아직 살아 계실 것이라 하였다. 이 깊은 갱 속에서, 촛불을 켜는 것은 명을 재촉하는 일이기 때문일까. 마법이 만들어낸 불빛들이 갱의 바닥 안쪽으로 연결된 지하감옥을 희미하게 밝힐 뿐이었다.

“이리 되시도록 왜 아무 말씀 아니 하셨습니까!”

열 다섯이 되도록, 해가 바뀌도록, 키는 별로 자라지 않은 대신 잔뜩 신경이 곤두선 표정을 하고 나타난 제자를 보고 스승은 혀를 찼다.

“말씀을 드린들,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어찌 하겠사옵니까.”
“……”
“어찌 여기 오셨는지 짐작이 갑니다. 태황군께서, 섭정권을 연장하라 폐하를 압박하셨겠지요.”

그녀는 대답 대신 잘린 손가락을 내밀었다. 스승은 그 손가락을 들여다보다가, 그와 꼭 닮은 손가락으로 그 잘린 단면을 어루만지고 한숨을 쉬었다.

“……원도 한도 닿지 않으니, 그저 무심히 내놓았음이라.”
“지금 그런 말씀이!”
“그럼 어찌 하오리까. 그저 몸을 지키기 위해 그 아이가 태황군 폐하를 해했어야 하옵니까.”
“……”
“아옵니다. 그 아이의 마음만으로는, 폐하를 위해서라도 태황군 폐하를 해하고도 남았으리라는 것을. 그럼에도 그리 할 수 없었던 것은, 이곳에 잡혀있는 소신 때문이겠지요.”
“태사.”
“시간은 폐하의 편이고 기다림은,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는 자는 결국 소인의 얕은 수를 넘어서나니. 폐하께서는 그저 인내하십시오. 태황군께서 무어라 말씀하시건, 어떤 희생이 따른다 하더라도 그저 버티십시오. 신도, 그 아이도, 부디 폐하의 족쇄가 되는 일 없도록.”

차가운 손가락이, 손바닥에 닿았다.

뜨겁고도 맵짠 눈물이 손등에 떨어졌다. 원망하듯, 소리질렀다.

“태사께서는 이 지경이 되도록 그런 선비같은 말씀밖에 못 하시옵니까!”
“폐하께서 정녕 원하신다면, 피를 묻히고 칼을 쥐어 태황군을 시해하고, 이름을 더럽히는 그 모든 일, 기꺼이 소신이 감당하겠사오나.”

손등에, 차가온 손길이 닿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 속에서도 형형한 두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소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명분을 드리는 일 뿐인 듯 하옵니다.”
“명분이라니.”
“태황군께서 그간 저지르신 일들을, 이 흙바닥 아래에 파묻어 놓았습니다.”
“이리 나오세요. 같이 가셔야지요.”
“더이상 폐하를 모실 수 없게 되어, 송구하옵니다.”

목소리는 거기까지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부시를 당겨 불을 켰다. 죽은 지 달포는 지난 듯한 시신 한 구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썩은 핏자국이 번진 전포의 깃을 당겨 벌리자, 가슴과 등에 수십 번은 창으로 찌른 듯한 상처가 드러났다. 잘린 손가락을 가슴에 품고, 작은 몸에, 언제나 울며 매달리던 어린 손을 꼭 잡아주고 안아 토닥여주던 이의 썩어가는 시신을 부축하듯 걸치고, 허리끈을 풀어 그의 몸을 떨어지지 않게 묶었다. 바닥을 파헤치고 싶었지만, 이곳의 위병들이나 관헌들이 아마도 그새 태황군께 소식을 전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마법으로 이 우물의 벽을 나무 사다리로 바꾸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디뎌 올라갔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오는 듯한 긴 우물벽을 다 기어올랐다.

횃불 아래, 참혹한 상처들이 드러났다. 썩고 벌레가 꾄 몸을 바닥에 뉘었다. 마지막에, 그저 침착하게 죽음을 응시한 듯, 공포의 빛이 거의 드러나지 않은 얼굴은 일렁이는 불빛 아래 마침내 눈 감겼다. 중정을 가로지르는, 신발을 살짝 끄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었다. 태황군의 뒤로, 이제 청년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 채, 손목을 꽁꽁 묶여 끌려온 소년 마법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사흘 뒤에도 섭정의 통치기간을 늘리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오랜 친구의 손가락이 하나 더 잘리는 것을 눈 앞에서 보면서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도, 비명을 지르거나 슬퍼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는 세 번째 손가락에 칼을 들이대는 것을 바라는 둥 마는 둥 하며 옥좌에 파묻히듯 기대앉아, 전의감이 올린 부검기록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마법사단을 움직일 생각입니다, 아바마마.”
“이 평화로운 시기에, 그게 어인 말씀이신지.”

태황군은 웃었다.

“전쟁이 필요한 것도 아닌 시기에 섣불리, 그 위험한 마법사들을 움직이실 이유가 있겠습니까. 불가하옵니다.”

그러나 황제는 웃지 않았다. 심장을 단숨에 꿰뚫은 창상, 목과 가슴을 찌른 상처들, 등을 벤 검상. 기록지에 다 표시할 수도 없을 만큼 셀 수 없이 많은 상처의 기록. 그 기록들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그는 학자이기 이전에, 이 나라에서 가장 고강한 마법사였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창과 칼을 물리칠 방법이 없었을 리 없었다. 적어도, 심장을 보호하고 죽음을 유예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해친 이들을 저승길 동무로 데려갈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 대신에, 그는 곧 심장이 멈추고 썩어 부서질 그 몸에, 마지막으로 영혼을 붙잡아 매어 놓았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녀를 기다리면서.

“……마법사단은 황제 직속입니다. 섭정의 동의를 받을 필요도 없지요. 그리고.”

그녀는 옥좌의 손잡이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마법사단장을 살해한 것은, 황제를 시해한 것과 같은 반역죄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마법사단장을, 묶고 그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마드리스 대후작이 살해되었고, 마마께서는 제 앞에서 그 상속자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고 계시온대.”
“……”
“섭정이라 하여 반역죄를 면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께서는 이 아비를 협박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렇다면, 마마께서 하시는 행동은 무엇이겠사옵니까.”
“……”
“손가락을 더 자르고 싶으면 그리 하시고, 목숨을 빼앗고 싶으면 그리 하시옵소서. 그는, 제게 호적은 못 바쳐도 목숨은 바치겠다고 맹세한 이입니다.”
“……”
“다만, 섭정의 통치기간을 늘리겠다는 그 이유만으로, 황제를 겁박하고 마법사단장을 고문하는 것은 명백한 반역이오니, 아바마마께서는 당장 그 일을 그만두시고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태황군은 쩔쩔매는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정말로 마법사단을 소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납득하고 얼른 물러났다.

“자정국 대사와 더불어 역모를 꾸미시는 증거를 잡았습니다.”

소년은, 아니, 청년은, 손가락 두 개가 잘려나간 손을 피투성이 소매 아래로 감추다가, 고통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내 공주님.”
“결혼 반지도 못 낄 손으로 어디 다른 데 장가 들겠다는 거야. 내관, 전의감을 불러라!”
“……그러게요.”
“태사께서 돌아가셨어.”
“그럴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말하지 않았어.”
“제가 폐하를 위해, 태황군 폐하를 시해해 드릴까요.”

가슴 한 켠이 싸늘해졌다.

“……친아버지를 처벌한 황제로 역사에 남으실 수는 없으니까.”
“처벌할 만 하면 하는 거지.”
“혈연이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데 얽매일 만한 입장이 아니잖아.”

젊고 건장한 의관들이 마법사를 부축해 일어났다. 전의감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조금 전 잘려나간 마법사의 약지를 집어 약에 적신 수건으로 쌌다. 황제는 품에 넣어 온, 이제는 살려낼 수도 붙일 수도 없을 만큼 단면이 쪼그라들어 엉망이 된 새끼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이것을 받은 즉시 전의감을 불렀다 하더라도, 단면이 그을리고 재가 묻어 있었으니 그 주인에게 되돌려주기는 어려웠으리라. 대신, 그녀는 그 새끼손가락에 보존 마법을 걸었다. 이상한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손가락을 곁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 한 켠이,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를 절박한 공허감으로 쓰라렸다. 그녀는 외교를 맡은 판서를 불러들여, 아주 대수롭지 않은 일을 확인하듯 물었다.

“나와 혼인하게 될 자정국의 막내 왕자는, 어떤 사람이지.”

 
 
 

자정국은 제국의 동북쪽에 자리잡은 작은 나라였지만, 자원이 풍부한데다 군사적으로도 강한 나라였다. 태황군이 자정국 대사와 더불어 자정국 막내 왕자와의 혼담을 빌미로, 권력과 재물에 대한 대가로 자정국에 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쥐어주고자 모의한 것만 아니라면, 혼사를 빌미로 서로 동맹을 맺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라이기도 했다.

그 자정국의 막내 왕자는, 그저 한없이 착하고 수줍은 이라고 하였다. 여인들은 높은 담장 안에 그 모습을 숨긴 채 담장 안의 작은 세계를 가꾸어 나가고, 세상 돌아가는 일은 모두 씩씩한 사내들이 도맡는다는 그 나라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사내답지 못하다 형제들에게 놀림거리가 되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그런 이를, 제국 황제의 배필로 보낼 생각을 하다니. 제국 황제를 놀림감으로 여길 생각이었나. 황제는 낯을 찌푸렸다. 예전처럼 황제가 측실을 두던 시대였다면, 그저 측실을 빙자한 볼모로 삼아 곁에 두면 딱 어울릴 만한 왕자인 듯 한데, 이런 이를 하나뿐인 딸의 배필이라고 골라 놓았다니. 제국의 태황군이라는 자는 얼마나 제 의무와는 담을 쌓은 자인가 싶어 입맛이 썼다. 이 그릇에 담긴 마음이야 세상 떠난 스승이 다듬고 가꾸어 넣어준 것일테지만, 적어도 이 몸의 절반은, 그런 이를 닮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마음조차도, 선비답던 스승보다는 그런 교활한 이를 더 많이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라렸다.

애초에 이 자정국 왕자를 배필로 삼을 마음일랑 추호도 없었다. 새하얀 저고리에, 흰 바탕에 섬세한 금빛 자수가 가득한 전포를 입고, 그린 듯한 모습으로 가마에 앉은 채 궁에 도착한 그를 바라보면서도, 그녀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체념조차도 아닌 인형같은 표정을 보아하니, 그 역시도 이 혼사가 애초에 마음에 들지 않았을 터. 차라리 다행이었다.

혼인 날짜는, 그녀의 생일날이었다. 열 여섯 번째 생일날, 그녀는 성인식을 치르고, 그 축하 잔치를 한 뒤, 해가 질 무렵 이곳에 미리 당도하여 있던 자정국의 왕자를 새로운 황군으로 맞아들이기로 되어 있었다. 성인식을 무사히 마치고, 황제이자 마도사로서 마법사단을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한 각인을 받고, 그녀는 밖으로 나왔다. 재작년 약식으로 치렀던 즉위식을 다시 정식으로 치른 뒤, 오후 내내 축하의 잔치가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자수를 놓은 신부 의상 아래 긴 검을 비스듬히 차고 나왔다.

“……폐하.”
“걱정하지 마.”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복수는 당신의 일이 아닙니다.”
“시끄러워.”

이제 갓 성년이 된 제국 황제는, 젊은 마법사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초승달처럼 차게 웃었다.

“복수같은 것을 하는 게 아니다. 네 증언, 내 스승님의 기록, 자정국 대사 주변에 붙인 밀정의 보고. 모든 것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에, 움직이는 것 뿐이야.”
“……”
“이건 처형이야. 제국의 태황군으로서 감히 반역을 꾀한 자의 목을 베어 본보기를 삼을 거다. 기다릴만큼 기다려 주었지. 그가, 정말 내놓기 싫어서 몸부림을 치면서도 옥새의 반쪽을 내게 돌려줄 때 까지. 내 스승님은, 그 몸에 다 표시할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상처를 입은 채 돌아가셨다. 그저 참수로 끝내는 것은, 차라리 자비로운 일이 아닐까.”
“……폐하.”
“네, 붙어만 있는 그 손가락.”

황제는, 남자의 옷깃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기다리고 있어. 그 쓸모도 없는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마.”

그녀는 긴 옷자락을 휘날리며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태황군을 따르는 이들에게 마법으로 만들어낸 불길을 실어 검을 휘둘렀다. 살이 타는 냄새와 비명소리가 복도를 뒤덮었다. 남자가 뒤를 따랐고, 검은 가면에 검은 법복을 입은 제국의 마법사단이 잔당들을 처리했다. 궁녀들이 힘들게 닦아놓은 긴 회랑은, 순식간에 피와 살점이 튄 전쟁터로 변해 있었다. 목숨만 살려달라고 비는 이들의 목에 칼날을 찔러넣고, 자신을 죽이면 자정국과의 동맹은 결렬되고 만다며 감히 자기 나라의 일을 빌어 제 목숨을 구걸하려 한 자정국 대사의 아랫배에 칼을 박아 그대로 날을 돌렸다. 비명과 함께, 치맛자락과 발등에 축축한 피와 살덩어리가 쏟아졌다. 검을 뽑으며, 그녀는 불행히도 자신의 친아버지인, 제국 황제의 배필이 되기에는 한없이 부족했던 사내의 모습을 찾았다.

처형의 날이었다.

 
 
 

혼례를 앞두고, 단장하고 대기하고 있던 자정국 왕자의 처소 문이 열렸다. 자정국에서 그를 호종해 따라온 청년이 앞을 가로막다가, 그대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피를 뒤집어 쓴 꼴을 하고 입가를 당겨 미소지었다. 혈조에 고인 피를 휘둘러 털었다. 왕자의 새하얀 예복 위로 검붉은 핏방울이 튀었다.

“……폐하?”

왕자는 겨우,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미안, 역도들을 처리하고 오느라 늦었소. 미리 말을 했어야 했는데.”
“아니옵니다. 그런데 역도라 하시면……”
“앉아요. 딱히 예를 받을 상황도 아닙니다. 아니, 의자도 됐어요. 의자를 더 더럽힐 생각도 없고. 아, 물수건 좀 가져다 주겠나. 얼굴이 당기는데.”

왕자를 호종한 청년이, 자소를 단장할 때 쓰고 남은 물수건을 공손히 쟁반에 받쳐들었다. 그녀는 수건을 집어들어 얼굴이며 손을 대충 문질러 닦고 쟁반 위에 다시 던져놓았다.

“옥체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폐하.”
“무슨 일인지부터 물을 줄 알았는데, 듣던 대로 왕자는 자상한 사람인 모양이오.”

황제는 비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왕자를 바라보았다.

“선황 폐하 시절의 악연을 정리하고 이제야 겨우 평화를 되찾자는 의미로 국혼까지 치르려는 이 마당에, 또다시 자정국과 내통 따위를 하는 작자들이 있으니 말이지.”
“그렇다면……”
“모반이 있었소.”
“그런……”
“다른 자들이야 마법사단의 손을 빌렸지만, 적어도 두 사람은 내 스스로 처분할 수 밖에 없더군. 그중 한 사람은 왕자께서도 잘 아는 인물일거요. 자정국 대사였으니까.”
“서, 설마……”
“그래요. 태황군 폐하와 내통을 하였더이다. 하긴, 한심하기로는 자정국 대사보다야 태황군 폐하가 더 한심한 일이지. 대체 젊어서는 황제의 남편이요 나이 들어서는 황제의 아버지면 그만한 영광이면 되었지, 무슨 영광을 더 보려고 자정국에 부지런히 기밀들을 팔아 치워서는. 그리하여, 귀국의 대사와 태황군 폐하를 베고 오는 길입니다. 두 분, 품은 뜻이 같았으니, 저승 길 동무로는 나쁘지 않았겠지요.”

이만하면, 질렸으리라. 진저리가 났으리라. 제 결혼식에, 아무리 반역을 저질렀다 해도 자신의 친아버지를 제 손으로 베어버린 여자라니. 이쪽에서 파혼을 통지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도망쳐주리라. 그녀는 피묻은 손을 소매에 문질러 닦으며 돌아섰다. 아니, 돌아서려 했다.

자정국 왕자가 그녀에게 깊이 머리숙여 절한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지금 무엇 하는 겁니까.”

왕자는 몸을 깊이 숙여 바닥에 이마가 닿도록 조아리고, 다시 고개를 들며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피에 젖어 검붉은 얼룩이 진 그 치맛자락에 입술을 대며 왕자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럴 필요 없습니다.”
“폐하.”
“그대를 어떻게 할까…… 한참 생각해 봤지만 그대에게 죄를 물을 이유는 없었소. 그래, 내 직접 온 까닭은, 하마터면 나와 혼례 올리고 이 험한 꼴을 보게 되었을 뻔 한 그대에게 사람답게 살 기회를 돌려주기 위해서요.”
“기회……”
“그대는 자유라고 말해주려 왔습니다.”

황제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대도 그대의 나라도, 두 반역자들의 계략에 놀아난 것일 뿐. 이런 문제에 그대나 그대의 혼례 사절에 대해서까지 죄를 묻지는 않겠소. 그대 역시, 이런 일에 대해서는 피해자일 뿐일 테니.”
“폐하, 제가…… 능력도 부족하고, 폐하처럼 무언가 확고한 실력을 쌓아오거나, 그렇게 유능하게 폐하께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계속 황제의 발밑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왕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곱게 단장한 얼굴에는 그녀의 치맛자락에서 묻은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제가, 혹시라도 폐하께서 저를 내치시지 않는다면……”
“이 와중에, 나와 혼인을 하고 싶다는 말입니까?”

기가 막혔다. 자정국에서는 혹시 반편이를 신랑감으로 보낸게 아닌가 싶었다. 주머니에 담아 가슴에 걸고 있던 그 새끼손가락을 더듬어 쥐며, 황제는 왕자의 목덜미를 내려다보았다. 왕자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였다.

“이, 이유야 무엇이건 저희 나라의 대사를, 합당한 재판 없이 살해하신 것은 또한 국제문제가 될 수 있는 일입니다. 폐하께서도, 이런 일이 있었으니 자정국에게 대국을 섬기는 도를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군사를 일으키실 것이고요.”
“물론,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럴 빌미는 충분하겠지. 그렇다고 지금, 나라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겠다 말하는 거요?”
“폐하와 제가 혼인을 한다면, 그리하여 이 나라의 황군으로서 자정국의 아바마마께 말씀 올린다면, 아바마마께서도 이 일에 대해 제국에 감히 말씀 사뢰는 일 없을 것입니다. 자정국의 백성들도……”
“애국자 나시었군.”

황제는 진심을 다해 빈정거렸지만, 왕자는 처연하게 웃었다.

“어차피 아바마마께서 저를 이리 보내신 것 부터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왕족이란 본래,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아닌 이상 별 쓸모가 없는 법이지요. 어차피 정략결혼을 할 것이라면, 막강한 권력을 지니신 폐하와 혼례를 올리고 황군이 되는 것이, 제가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기도 하고요.”
“나와 혼인을 하겠다.”
“폐하께서 받아주신다면……”

황제는 몸을 숙였다. 그대로 이 눈치없는 사내를 되돌려보내고 싶었지만, 이 나라의 태황군과 그 나라의 대사가 손을 잡고 벌인 역모를 두고, 다시 협상을 벌이고 동맹을 맺는 그 모든 과정을 반복하기보다는, 이 자를 궁 어디엔가 처박아두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가슴에 매어 단 손가락을 쥐었다. 그리 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벌인 것이 아니다. 처벌은 천천히, 덫을 놓고 그물을 치고 시간이 내 편이 될 때 까지 기다린 뒤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단숨에 해치울 수도 있었다. 이렇게, 성년식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검을 든 것은. 그런 것은.

“부디, 두 나라를 위해서.”

분수를 모르는 자였다. 이 처형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그를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전쟁을 불사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알았다. 그녀는 몇 번이나, 그 주머니 속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목숨은 바칠 수 있어도 호적은 바칠 수 없다고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는 안다. 손이 귀한 집안이고 다른 형제도 없으니, 가문을 이어가고 마법사단을 지켜내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이라는 것도. 그럼에도, 곁에 두고 싶었다. 그가 받아주리라고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다. 살려서 돌려보내도, 죽여버려도, 분쟁이 남을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녀는 이 곱고도 온순하며 체통도 잊고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 분수를 모르는 왕자의 턱을 손가락 끝으로 잡아채었다. 휘둥그레진 왕자의 눈이, 마치 흠집 없는 물건을 고르듯 날카롭게 빛나는 황제의 시선과 마주쳤다.

“잊지 마라, 너는 네 나라의 안전을 위해 몸을 판 거다.”
“……”
“동전 한 닢을 위해 몸을 팔건, 나라를 위해 몸을 팔건. 몸 파는 놈이야 똑같겠지. 네 분수를 제대로 알아야 할 거다. 네 나라가 그리 걱정된다면 말이다. 밖에 누구 있느냐.”

문이 열리고 여관들이 들어왔다. 황제는, 보란 듯이 손바닥으로 왕자의 뺨을 쓸고, 그의 이마에 감정이 거의 실리지 않은 키스를 해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준비를 다시 해야겠다. 얼굴이 엉망이 되지 않았느냐.”
“예, 폐하.”
“축복의 입맞춤을 해 주었으니, 한 시간 후에 식을 치르마. 내 예복을 새로 가져오고. 이대로 식을 올렸다가는 저 구석에 서 있는 놈이 자정국에 돌아가 무어라 나불나불 떠들어 댈 지 알 수 없으니.”

문 밖에서, 여관들의 뒤쪽으로, 그가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피를 뒤집어 쓴 채, 읽히지 않는 표정을 한 채로. 황제는, 스스로 검을 쥐었으되 마치 스스로를 처형한 듯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보란 듯이 왕자의 뺨을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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