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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히어로센터 - 4. 오지아 기자와 아이스맨

 

 


  1

 

  그의 이름은 세 개다.
  본명 김명균.
  대학을 중퇴할 때까지는 김명균으로 불렸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던 명균에게는 단짝 친구가 있었다. 이름은 김승현이었다.
  둘은 1학년 2학기 때부터 급격히 친해졌다.
  물론 급격히 친해진 데에는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승현과 친해지기 전까지 명균은 학교에서 외톨이었다. 늘 혼자 떨어져 앉아 수업을 들었고, 혼자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특별히 말을 걸어오는 학생들도 없었고, 명균 역시 같은 과 학생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학기를 보냈다.
  그리고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고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학생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수업을 듣기 위해 명균은 강의실로 갔다.
  아직 수업이 시작하려면 1시간 정도가 남았지만, 특별히 할 게 없었기에 강의실에 가서 낮잠이나 자려고 했다. 도서관에 가서 잘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자칫 자느라 수업을 못 듣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두 번 그런 적이 있었기에 낮잠은 꼭 강의실에서 잤다.
  명균은 하품을 하면서 강의실 문을 열었다. 당연히 강의실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태껏 낮잠을 자기 위해 강의실에 왔을 때, 강의실에 사람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강의실 문을 열었다. 그러다 누가 있는 걸 보고 명균은 깜짝 놀랐다. 놀라서 순간적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입을 찢어져라 벌린 채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찢어져라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기에 저절로 신음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하지만 놀란 건 명균만이 아니었다. 승현도 마찬가지였다. 수업 시작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갑자기 누가 강의실 문을 열기에 왼손을 엉거주춤 든 채로 멍하게 명균을 쳐다보았다.
둘은 한동안 그런 상태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다 명균이 먼저 입을 다물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와서 승현과 떨어진 곳에 앉은 뒤,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엎드렸다.
  그때 뚜벅뚜벅 승현이 다가왔다.
  명균은 승현이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승현이 명균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동안 승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명균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무도 몰라. 부모님도 모르지. 얘기를 안 했거든. 들킨 적도 없었고. 이게 누구한테 자랑할 만한 건 아니잖아. 그랬다가는 괜히 골치만 아파지고 말이야. 난 그냥 사진작가가 되고 싶을 뿐이지. 평범한 사진작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진작가로 지내고 싶어. 이것 때문에 이런 저런 일에 휩쓸리는 거 싫어. 그러면 아마 사진작가가 되지도 못할 거야. 주위에서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니까.”
  승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명균은 여전히 책상에 엎드려 있기만 했다. 물론 잠은 다 달아난 상태였다.
  승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짧았다. 낮은 목소리로 짧게, 차갑게 말했다. 상대를 숨 막히게 하는 말투였다.
  “봤지?”
  승현의 물음에 더 이상 명균도 책상에 엎드려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들어 승현을 보았다. 승현의 왼손을 보았다. 그러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봤어. 지금도 보고 있고. 하지만 관심 없어. 휩쓸리는 거 싫다고 했지? 나도 마찬가지야. 누구한테든 얘기하지 않을 거야. 휩쓸리기 싫으니까. 물론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자유야. 그리고 난, 네가 누군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는 명균의 눈을 승현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명균도 지지 않았다. 승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승현이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갑게, 말투로 상대의 목을 가르듯이.
  “이 자리에서 내가 너 죽일 수도 있어. 너만이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다시 아무도 모르게 하기 위해서.”
  그 말을 듣고 명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소리가 굉장히 컸다.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일 거면, 나를 죽일 거면, 앞으로는 좀더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거야. 지금처럼 학교에서 멋대로 그렇게 했다가는, 아마 앞으로도 너는 계속 사람을 죽여야 할 거야. 평범한 사진작가가 되고 싶거든, 주위에서 너를 가만히 놔두기를 원한다면, 네 그런 경솔한 행동부터 바꿔. 그리고 미안한 얘긴데, 사람 죽이는 거, 그렇게 쉬운 거 아니야. 특히나 너처럼 ‘죽일 수도 있어’ 하고 말하는 사람은 쉽게 사람 못 죽여. 네 왼손을 한번 봐. 나보다 더 떨고 있어. 애초에 얘기했듯이, 난 관심 없어.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나는 흥미로운 게 별로 없어.
  명균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잠시 승현의 눈을 쳐다보다가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물론 자려고 엎드린 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태평하게 잠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냥 승현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스윽 하고 명균의 목에 무언가가 닿았다. 감촉이 차가웠다.
  “과연 그럴까. 쉽게 못 죽일까. 아무튼 이제부터는 네 말대로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을 거야. 그러다 살인에 재미라도 붙이면 큰일이지. 그리고 알려줄게. 알려주는 게 예의겠지. 난 김승현이야. 처음 봤지만, 반가웠어.”
  그리고 승현은 왼손을 치켜들었다.
  그때 강의실 복도가 갑자기 소란스러웠다.
  곧이어 강의실 문이 열리고 몇 명의 학생들이 들어왔다.
  이미 승현은 왼손을 내린 채 명균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학생들이 명균과 승현을 힐끔 쳐다보더니,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모여 앉아 책상 위에 편의점 봉투 여러 개를 올려놓았다.
  그중 한 아이가 쭈뼛거리며 명균과 승현 곁으로 다가왔다.
  “미안. 이렇게 일찍 강의실에 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식당에 자리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왔거든. 둘이 얘기 중인 거 같은데, 우리 여기서 밥 먹어도 될까? 방해된다면 옥상 가서 먹을게.”
  오늘 따라 강의실은 일찍부터 붐볐다.
  “괜찮아,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어. 우리 신경 쓰지 말고 맛있게 먹어.”
  승현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 명균 옆 자리에 앉았다.
  “죽일 생각이었어. 아마 진짜로 죽였을 거야. 물론 그러고 나서 후회했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진짜로 죽일 생각이었어. 누구든 내 능력을 알아서는 안 되니까. 평생 감추고 살자고 다짐했거든. 그런데 오늘 어처구니없게도 들켜버렸어. 전혀 존재감도 없던 너한테 말이야. 허무할 정도야.”
  “미안하게 됐네. 그래도 이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네 능력, 앞으로는 단 한 사람만 알고 있을 거야. 나는 여전히 네 능력에 관심이 없고,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으니까. 물론 나중에라도 나를 죽인다면, 그때는 다시 아무도 네 능력을 모르게 되는 거야. 여전히 믿든 안 믿든 네 자유지만. 너 때문에 잠만 다 달아났다. 오늘은 별로 유쾌하지 못한 날이네. 나한테 유쾌한 날이라는 게 거의 없기는 하지만.”
  명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게실에 가서 담배나 피울 생각이었다.
  “어디 가냐?”
  승현이 물었다.
  “담배 피러 가.”
  “같이 가자. 나도 담배 생각났는데.”
  휴게실에서 승현은 담배까지 명균에게 빌렸다.
  명균이 헛웃음을 한번 짓더니 승현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김승현이라고 했냐? 이렇게 나 감시 안 해도 돼. 내가 아까도 분명히 얘기했잖아. 아무한테도 말할 생각 없다고. 나는 네 정체가 뭐든 관심 없어. 네가 설사 천사라고 해도 난 관심 없어. 물론 천사는 아닐 테지만.”
  명균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피다 만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게 불편해서 옥상에나 올라갈 작정이었다.
  당연히 승현이 쫓아왔다.
  “뭐하는 거야? 감시 같은 거 안 해도 된다고 말했을 텐데! 그렇게 불안하면 그냥 죽여. 그게 너한테도 편하겠다.”
  “너 엄청 까칠하구나. 그러니까 한 학기가 지나도록 그렇게 외톨이로 지내지. 이름이 뭐냐? 같은 과 학생인데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냐?”
  승현의 말에 명균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가만히 승현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명균이 차갑고 짧게 말했다.
  “명균. 김명균.”
  “그래, 명균이구나. 실은 아직 할 말이 남아서 말이야.”
  “뭔데? 말해봐?”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라.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내 능력에 대해 알게 되면…….”
  “그럴 일 없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나는 여전히 너한테 관심이 없어. 네 능력 같은 것에는 더더욱 관심 없고. 그러니 걱정하지 마. 그래도 네가 듣고 싶은 말은 해줄게.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네 능력에 대해 알게 된다면, 당장 나를 죽여도 돼. 물론 불안하면 지금 죽여도 되고. 됐지!”
명균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명균을 승현이 또다시 불러세웠다.
  “나는 이미 들켜버렸고, 명균아, 그런데 넌 도대체 정체가 뭐냐?”
  결국 명균은 옥상에 올라가려던 걸 포기하고 다시 휴게실로 들어갔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무슨 소리야? 정체가 뭐냐니?”
  “정체가 뭐기에 그렇게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거냐? 심지어 죽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말이야. 솔직히 너 같은 사람 처음 본다. 네가 이렇게 나오니까 정체를 들켜버린 내가 오히려 혼란스러울 정도야. 내 능력 같은 거, 사람들이 알아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거였나. 그 정도로 형편없는 능력인가. 이런 생각까지 든단 말이지. 내 능력이 형편없어서 그런 거냐, 아니면 네가 이상한 거냐?”
  “질문이 너무 복잡하다. 첫째, 정체가 뭐냐는 질문에는 딱히 할 말이 없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네 능력 말인데, 잘은 모르겠지만 왼손이 흉기로도 변하고 하는 것 같더라. 형편없지는 않아. 아마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봤다면, 눈이 휘둥그레졌을 거야.”
  “그러냐! 그동안 다른 사람한테 보여준 적이 없으니, 평가를 받아본 적도 없었거든. 그래서 말인데, 내 왼손은 만능이야. 어떤 걸로든 변해. 칼이나 총, 그러니까 아까 네 목에 들이댔던 칼로 변할 수 있어. 그런 건 기본 중에 기본이지. 총으로 변하면 당연히 쏠 수도 있고. 무기 같은 거 말고 오토바이나 자동차, 배, 비행기로도 변할 수 있어. 물론 비행기로 변하면 날 수도 있고. 어때, 내 능력?”
  “대단하다.”
  “끝이냐? 반응이 겨우 그 정도야?”
  “진심이야. 대단해.”
  “휴, 너란 아인 참! 그런데 사실 나 말이지, 너를 안 죽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려냐! 나도 다행이네.”
  “만약에 너 말고 다른 애가 봤으면 어땠을까! 놀라서 당장 도망가려고 했겠지! 아니면 비명을 지르거나 말이지. 아무튼 꽤 소란스러웠을 거야. 그럼 나도 덩달아 이성을 잃고 무작정 그 아이를 죽였을 거고.”
  “너도 나 죽이려고 했잖아.”
  “하지만 안 죽였지. 그리고 이렇게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고. 내 능력에 대해서 말이지. 그래서 다행이라는 거야. 사실 말이지, 이런 거 생각도 못 했거든. 누군가에게 내 능력에 대해 말할 일은 평생 없을 줄 알았어. 그런데 막상 이렇게 너한테 얘기하니까, 뭐라고 하면 좋을까, 아주 조금은 자유로워진 기분이야. 사랑 고백을 해버린 것 같은 기분.”
  “두 번 다시 그런 말 하지 마라. 징그러워.”
  “풉, 너 참 재미있는 녀석이야. 안 죽여서 정말 다행이다.”
  “그 말도 별로 듣기 안 좋아.”
  “그러냐! 미안. 하지만 진심이거든. 그런데 명균아, 넌 왜 사람들과 안 어울려? 왜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거야?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승현의 물음에 명균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거 없어. 그냥 혼자가 편해서일 뿐이야. 관심이 생기면, 그 관심이 더 커지니까 아예 관심을 안 갖는 것뿐이야.”
  “관심이 더 커질까 봐 아예 관심을 안 갖는다! 흠, 어렵다. 아니지, 그럼 뭐냐! 내 능력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도, 관심이 더 커질까 봐 그렇게 얘기한 거야?”
  “그건 아니야. 네 능력에는 진짜 관심이 없어. 내 말은, 그러니까 사람한테 그렇다는 거야.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기면, 그 관심이 더 커져버려서 힘들어. 그래서 아예 관심을 안 갖는 거야.”
  “역시 어렵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 너 같은 사람도 있고, 반면에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거니까.”
  “그럼 혹시, 내 능력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결국 나한테 관심을 안 두려다 보니까 그렇다는 얘기니?”
  “얘기하자면 그렇지. 너한테 관심이 없으니, 네 능력에도 관심이 없어.”
  “뭔가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거 같다. 아무튼 넌 관심이 없는 아이구나.”
  “그래, 관심 없는 아이.”
  관심을 안 가지려고 애쓰는 아이.
  명균이 뭔가 다짐이라도 하듯 휴게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만 강의실에 들어가야겠다. 이야기 즐거웠어.”
  “뭐냐, 그 말투? 꼭 이별 통보 같다!”
  “이제 서로 할 얘기 없잖아. 네 능력에 대해서 말 안 하겠다고 약속했고, 그래도 만일 누군가 알게 된다면 나를 죽이면 되고.”
  “관심 없는 놈. 아무리 네가 나한테 관심이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부터 명균이 너한테 관심을 가져야겠다.”
  “왜?”
  “왜긴, 당연한 거 아니냐! 네가 약속을 지키나 안 지키나 감시해야지. 나는 감시만 할 테니까 명균이 너는 신경 쓰지 마. 나한테 관심 안 가져도 된다. 자, 그만 들어가자.”
  그러면서 승현이 먼저 휴게실을 나갔다.
  명균은 그런 승현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위험하다.
  명균은 직감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명균이 승현의 능력을 알게 된 뒤, 둘은 명균의 우려대로 친해졌다.
  감시를 핑계로 승현은 수업 때마다 명균의 옆자리에 앉았고, 도서관이나 식당도 함께 다녔다. 덕분에 같은 과 학생들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쟤네 좀 이상하지 않니? 명균인가, 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병적으로 우리들 피했잖아. 승현이 쟤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어도, 그래도 어딘가 좀 수상한 구석이 있었고. 누구와 친하게 지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멀리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적당히 거리를 두던 애였잖아. 아무튼 둘 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저렇게 서로 가까워졌을까!”
  “그러게, 모를 일이다. 명균이 쟤는 여전히 우리들은 피하면서 승현이하고는 잘 어울린단 말이야. 승현이 쟤는 아주 명균이 그림자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고. 희한해. 둘 사이에 뭔가 통하는 게 있나!”
  심지어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걸로 내기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명균아, 너 혹시 애들 사이에서 우리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 아냐?”
  도서관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승현이 물었다.
  “일이 벌어지다니, 그게 뭔 소리냐!”
  “역시 관심이 없구나, 쯧쯧. 애들 사이에서 우리를 두고 서로 내기를 하고 있다는구나.”
  “내기라니! 승현이 너 혹시 나 몰래 무슨 경기에 참가 신청이라도 했냐? 만일 그랬다면 당장 취소해라. 아니면 너 혼자 참가하든지.”
  “그런 게 아니고, 아, 이거 막상 말하려니까 좀 망설여지네.”
  “그럼 말하지 마. 관심 없으니까. 아무튼 나는 경기에는 안 나간다.”
  “일생을 관심 없이 사는 놈! 저러니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하나도 모르지! 경기에 나가는 게 아니고, 애들이 우리가 사귀는지 안 사귀는지 내기 했단다. 더 웃기는 건, 사귄다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다는구나.”
  “애들도 참 할 일이 없나보구나. 별 쓸데없는 데 신경을 다 쓰고. 한심하다. 아무튼 관심 없다.”
  “애들이 그런 내기까지 한다는데도 관심이 없냐! 사귄다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다는데도 관심이 없냐! 아우, 애들이 다 불쌍하다. 상대는 관심도 없는데, 그것도 모르고 내기까지 하고 있으니.”
  “내 탓은 아니지. 애들 탓이지.”
  “명균아, 우리 그러지 말고 애들 한번 놀려줄까? 관심 없다는 말은 하지 말고.”
  “놀려주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별 건 아니야. 그냥 사귀는 척 해보자는 거지, 히힛. 어차피 사랑 고백도 했고.”
  “미쳤구나. 네가 언제 사랑 고백을, 아, 그때 휴게실에서……. 하여간 미친놈. 앞으로는 내 주위에 얼씬도 하지 마라. 징그럽다. 난 내려갈 테니까, 너는 한 시간 뒤에 내려와라. 아, 저 미친놈.”
  “아잉, 명균아, 같이 가앙!”
  “시끄러워, 인마!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나 학교 자퇴하는 꼴 보고 싶냐! 아, 진짜 미친놈.”
  “흐흐, 흐흐흐.”
  “왜 웃어, 인마! 웃음소리도 이상해 인마!”
  “재밌어서 그런다. 명균이 네가 싫다고 하니까 정말로 사귀고 싶어지는데. 흐흐. 앙탈 부리는 게 매력 있단 말이야. 흐흐흐.”
  “죽여라. 차라리 나를 죽여. 아니다, 당장 내려가서 사람들한테 말해야겠다. 김승현은 능력자라고 말이지. 그럼 죽이겠지. 차라리 그게 낫다.”
  촤앙!
  순간 명균 옆에 있던 재떨이용 항아리가 두 동강이 났다. 승현이 왼팔을 칼로 변신시킨 뒤 내리친 것이었다.
  명균은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떨고 있지는 않았다.
  “농담으로라도 절대 그런 말은 하지 마. 이번에는 항아리였지만, 다음에는 아닐 테니까.”
  승현의 왼팔은 여전히 칼이었다.
  “아무 데서나 그렇게 변신하지 마라. 능력자라는 거 영원히 감추고 싶다면서, 너는 여전히 조심성이 없구나. 영원히 비밀로 하고 싶다면, 상대를 이기려 들지 마.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생각 같은 거 하지 마. 상대한테 져라. 그러지 않으면 너는 언젠가 사람들 앞에 능력을 드러내고 말 거야. 그리고 한번 드러낸 이상, 멈추지도 못하겠지. 분명 폭주하고 말겠지. 내가 볼 때는 승현이 네가 가장 무서운 능력자야. 감추지도 못하면서 감추겠다고 맹세하는 너, 네가 가장 무서운 놈이야.”
  명균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승현을 두고 혼자 옥상에서 내려왔다.
  승현은 깨진 항아리를 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왼팔은 이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음,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이러다 정말 폭주할지도 모르잖아. 조심해야지. 그나저나 저 녀석 정말 화난 건가. 내가 좀 심하긴 했어. 가서 뭐라고 말을 건담. 아, 골치 아파. 난 왜 저 녀석한테 자꾸 끌려다니는 거지. 이상해.”
  승현은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옥상을 내려가려고 했다.
  그때 뒤쪽에서 음료수 캔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명균은 천천히 몸을 돌려 소리가 난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걸이는 느긋했다. 누군가 있다 한들 어차피 도망갈 곳은 없었다.
  도서관 옥상에는 여러 대의 자판기가 설치된 간이 휴게실 같은 곳이 있었다. 그곳에는 의자와 테이블도 있어서, 의자에 앉아 편히 음료수를 마실 수 있도록 했다. 물론 휴게실에는 창문도 있었다.
  아마 누군가 휴게실 창문을 통해 밖을 훔쳐보고 있었으리라.
  승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그 간이 휴게실로 가고 있었다.
  이제 휴게실까지는 몇 미터 남지 않았다.
  갑자기 휴게실 문이 덜컹 열리더니 누군가가 나왔다. 
  “어, 스, 승현아 안녕. 너, 너도 도서관엘 다 오고, 의, 의외네. 아, 아니, 꼭 뭐 그런 건 아니지만. 그, 그런데 어째 명균이는 안 보인다. 늘, 가, 같이 다니더니. ……그럼, 나, 나 먼저 내려갈게. 채, 책 좀 빌려야 하거든. 이따 수, 수업 시간에 보자.”
  전에 승현이 막 명균의 목을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 강의실로 들어온 무리들 중 한 명이었다. 이름은 한희영이었다.
  희영은 거의 뛰다시피 승현 곁을 지나쳐 옥상 출입문 쪽으로 갔다. 도중에 발이 꼬여 넘어졌지만, 곧장 일어나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희영이 출입문까지 와서 문손잡이를 돌렸다. 돌리면서 문을 밀었다. 힘껏 밀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손잡이만 계속 헛돌고 있었다.
  희영은 손잡이를 돌리면서 동시에 문을 쾅쾅 두들겼다.
  두들기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옥상 전체가 울릴 정도였다.
  하지만 희영은 소리까지 지르지는 않았다.
  거기 누구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이런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지르고 싶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겁에 질려 마구 눈물이 쏟아졌다. 그래서 목이 메였다.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희영아, 문이 안 열리니?”
  승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승현은 어느새 희영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승현의 목소리를 들은 희영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문까지 덜컹거릴 정도였다. 그리고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희영아, 문이 안 열려?”
  승현이 다시 한번 물었다.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으, 응.”
  희영이 배에 잔뜩 힘을 주고 가까스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 승현이 희영 앞으로 스윽 왼손을 뻗었다.
  희영은 승현의 왼손을 보자마자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저앉더니 얼굴을 무릎에 파묻은 채 상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웅얼거리고 또 웅얼거렸다.
  “희영아, 혹시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거니?”
  “살려줘.”
  “응? 뭐라고?”
  “살려달라고. 부탁이야. 죽이지 말아줘. 아무것도 못 봤다고 하면 안 믿겠지! 그래, 봤어. 승현이 네 왼팔. 봤어. 칼로 변한 네 왼팔.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시키는 대로 다 할게. 뭐든지 할게. 그러니 제발, 죽이지만 말아줘. 부탁이야. ……살려줘.”
  여전히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렇다고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희영은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승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죽이다니, 내가 너를 왜 죽여. 희영이 너도 참 별 걱정을 다 한다. 나는 그냥 문 여는 거 도와주려고 온 거야. 당겨야지, 그렇게 밀면 문이 열리니!”
  승현은 문손잡이를 돌려 문을 당겼다.
  “자, 문 열렸다.”
  문이 열린 것을 보고 희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고개만 들어 승현을 보았다. 그새 눈까지 퉁퉁 부어 있었다.
  “뭐해, 책 빌려야 된다면서! 얼른 내려가 봐.”   
  하지만 희영은 좀처럼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 희영을 향해 승현은 활짝 웃어주었다.
  승현의 웃는 얼굴을 보자 희영도 조금은 용기가 생겼다.
  “승현아, 나 진짜 내려가도 되는 거야? 정말로 그냥 보내주는 거야?”
  “자꾸 무슨 소리 하는 거니. 걱정도 팔자다. 얼른 내려가.”
  비로소 희영은 바닥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승현아, 고마워.”
  희영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발을 힘겹게 들어올려 출입문 난간을 밟았다.
  그때 승현이 스윽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대신, 나에 대해서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그러면 넌 죽어.”
  승현의 말을 듣자마자 희영은 또 한번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야가 흐릿했다. 충격이 커서인지 멍하게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희영을 두고 승현이 먼저 옥상에서 내려왔다.
  뭐야, 참을 수 있잖아. 안 죽였잖아. 좀 찝찝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안 죽였잖아. 폭주는 무슨, 하여튼 명균이 이 자식은 괜히 자기 혼자 화내고 말이지. 음, 아닌가, 명균이 녀석 충고 때문에 안 죽일 수 있었던 건가. 아, 하여튼 골치 아픈 녀석. 잡히면 가만 안 둬.
  승현은 그렇게 혼자 투덜대면서 명균을 찾아 도서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전공 수업이 끝나고, 교수 인솔 하에 사진학과 학생들은 대강의실로 갔다.
  대강의실에서는 연극 동아리 학생들이 저녁 시간을 이용해 일주일째 공연을 하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 공연이었고, 사진학과 학생들은 교수를 따라 단체로 마지막 공연을 관람하기로 했다.
  교수는 공연 끝나고 대강의실 앞에서 또 한번 출석을 부른다는 말까지 했다. 만일 출석 부를 때 자리에 없으면 오늘 받았던 수업은 결석 처리한다는 말까지 했다. 그 말에 학생들이 우우우, 하고 야유를 보냈지만, 교수는 학생들의 야유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래서 명균과 승현도 대강의실로 향했다.
  마침 사진학과 학생들이 대강의실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극이 시작됐다. 그리고 명균과 승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등을 의자등받이에 기대고 잠을 청했다.
  연극은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끝났다. 벌써 저녁 8시였다. 
  사진학과 학생들은 대강의실을 나오면서 투덜거렸다.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
  “배우들이 하나도 안 예뻐. 멋있는 애도 없어.”
  “아마추어 티 팍팍 나.”
  “배고파.”
  학생들의 투덜대는 소리를 듣더니 교수가 출석 체크는 생략하겠다고 했다. 
  그 말에 학생들이 또 한번 투덜거렸다.
  “또 속았어.”
  “내일 학교 안 나올 거야.”
  “난 그냥 이번 과목 F학점 받을래. 시험 거부할 거야.”
  “오늘 확 외박해 버릴 거야.”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교수는 학생들의 투덜거림을 가볍게 무시했다. 다음 수업 때 보자며 먼저 사라졌다.
  대강의실을 나오자마자 승현이 명균의 팔짱을 꼈다.
  “징그럽게 뭐하는 짓이냐! 애가 갈수록 이상해져. 떨어져서 와, 인마!”
  명균의 말에도 승현은 팔짱을 풀지 않았다.
  “명균아, 배 안 고프냐! 식당에서 밥이나 먹고 가자.”
  “너무 늦었다. 그냥 집에 가서 먹을래.”
  “주도면밀한 놈. 알았다. 밥값은 내가 낼게.”
  “얘 또 혼자 엉뚱한 소리하고 있네. 늦어서 그런다니까!”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자판기 커피도 내가 뽑아줄게. 더 이상은 나도 양보 못 한다. 이번 달 적자야. 그러니 더 이상 흥정하지 말고 이쯤에서 타협하자.”
  “아, 골치야. 알았어. 먹고 가자. 아, 진짜 피곤한 놈이야.”
  “자식, 그래도 나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지는 않는 걸 보니, 일말의 양심은 있구나. 아니지, 오히려 더 잔인한 건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까지만 몰아붙이기. 그래야 나를 계속 이용해 먹을 수 있으니까 말이지. 역시 무서운 놈.”
  “시끄러! 확 그냥 가버리기 전에 빨리 앞장이나 서, 인마!”
  “네.”

 

  둘은 각자 자판기 커피를 손에 든 채 식당을 나왔다. 그리고 학교를 벗어나기 위해 정문 쪽으로 향하는데, 정문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 뭐냐. 왜 저렇게 모여 있지? 명균아, 한번 가보자.”
  “가보기는 뭘 가봐. 그냥 신경 쓰지 마. 애들이 또 술 마시고 서로 싸우나 보지.”
  “아, 자식! 제발 주변에 관심 좀 가져라. 싸움 구경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그런 게 주변에 관심 갖는 이유냐! 하여튼 심보가 못 됐어. 너나 실컷 구경해라.”
  “아, 얘는 당최 인생의 재미라는 걸 몰라. 삶이 너무 건조해. 도대체 내가 상대 안 해주면, 누가 얘를 상대해 줄까! 그래, 그냥 가자! 내가 같이 안 가주면, 누가 너랑 이 길을 같이 가주겠냐!”
  “승현이 너 아까부터 이야기를 혼자서 잘도 끌고 간다. 아무래도 일인극에 소질 있나 보다. 나중에 그쪽으로 한번 진출해 봐라. 그냥 각본도 네가 다 써.”
  “내가 다방면으로 좀 소질이 있지. 아무튼 내 재능을 인정해 줘서 고맙다. 역시 명균이 너는 진정한 친구야.”
  그 말에 명균이 멀리 있는 쓰레기통을 향해 종이컵을 휙 던지더니, 빠른 걸음으로 승현과 멀어졌다.
  대충 휙 던진 종이컵은 쓰레기통 속으로 정확히 들어갔다.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승현이 오오오, 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얼른 명균의 뒤를 쫓았다.
  그때 누군가 승현을 불렀다.
  “승현아! 승현아! 도와줘, 승현아!”
  다급한 목소리였다.
  “어, 승현아, 저쪽에서 누가 너 부르는 거 아니냐?”
  “그러게. 나도 듣기는 했는데, 이상하다. 저기 모여 있는 애들이 왜 나를 부르냐. 가볼까?”
  그때 다시 승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보자. 꽤 다급한 목소리네.”
  “거봐, 인마. 내가 아까 가보자고 했잖아.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단 말이지.”
  “잔말 말고 얼른 가봐. 도대체 무슨 일인데 너를 다 부르고 그럴까!”
  둘은 정문 근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모여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가 고개를 돌려 승현을 보았다.
  “어, 승현이 왔다. 희영아, 승현이 왔어!”
  그렇게 외친 아이 역시 사진학과 학생이었다.
  “승현아, 도와줘, 승현아!”
  희영은 또 한번 승현을 불렀다.
  그러자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 고개를 돌려 승현과 명균을 보더니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물러서자, 안쪽에 있던 한 남학생과 희영의 모습이 보였다. 남학생이 희영의 팔을 붙잡은 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남학생은 덩치가 상당히 컸다.
  잔뜩 울상을 짓고 있던 희영이 승현을 보자 덜컥 울음을 터뜨렸다.
  “승현아, 쟤 우리 과 여자아이 아니냐? 그런데 왜 너를 보자마자 우는 거냐?”
  명균의 물음에 승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 희영의 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스, 승현아, 미안해. 도와줄 사람이 너밖에 없을 것 같아서. ……미안. 네가 지나가는 걸 우연히 봤거든.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네 이름을 불렀어.”
  희영의 말에도 승현은 묵묵부답이었다. 여전히 매섭게 희영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때 모여 있던 무리 중 한 여학생이 승현 곁으로 다가왔다. 희영에게 승현이 왔다고 알려준 여학생이었다. 승현이 강의실에서 명균의 목을 베려고 했을 때, 희영과 함께 강의실에 들어온 여학생이기도 했다.
  “체육학과 학생이야. 우리가 대강의실 앞 계단에 모여 앉아서 놀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뒤에서 희영이를 확 껴안았어. 그때 다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희영이는 말할 것도 없고. 뒤에서 껴안더니 흐흐흐 하고 막 웃는 거야. 입에서 술 냄새 엄청 나더라고. 희영이가 막 몸부림 쳐도 안 놔줬어. 계속 웃기만 했어. 그래서 우리가 가방으로 쟤를 막 때렸거든. 때리고 발로 차고 머리 잡아당기고 그랬어. 간신히 희영이한테서 떨어지더라.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희영이 끌고 막 달렸지. 그런데 계속 쫓아오더라. 흐흐흐 거리면서 쫓아오는데, 꼭 무슨 좀비 같았어. 술 취해서 비틀비틀 거리면서도 넘어지지도 않고 계속 쫓아왔어. 결국 여기까지 와서 잡힌 거고. 무서우니까 제대로 도망도 못 치겠더라.”
  희영의 친구가 말하는 동안에도 승현은 계속 희영만 노려보고 있었다. 체육학과 학생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나가는 학생들한테 도움 요청했거든. 도와달라고 소리쳤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어. 마침 한 남학생이 말리려고 하기는 했는데, 저기 분수대 쪽에서 누가 소리쳤어. 괜히 어디 몇 군데 부러지고 싶지 않거든 그냥 놔두라고. 저렇게 술 취했어도 네다섯 명은 가볍게 때려눕힌대. 그리고 나중에 술 깬 다음에도 찾아내서 반 죽여놓는대. 그러니까 가만 놔두는 게 좋을 거래. 쟤 술 취해서 저러면 아무도 못 말린대. 자기들도 못 말린대. 교수들도 못 말리고. 게다가 쟤네 아버지가 파워도 세서, 학교 측도 쟤 어쩌지 못한대. 손도 못 댄대. 그래도 큰 사고는 안 치니까, 우리 보고는 그냥 조금만 참고 있으래. 몇 번 끌어안고 주무르고 그러다 말 거래.”
  “너, 희영이 쟤한테 오늘 무슨 얘기 들은 거 있니?”
  승현은 도중에 상대의 말을 끊고 그렇게 물었다.
  희영의 친구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 했다.
  “무슨 얘기?”
  “아니다. 됐어. 명균아, 가자.”
  승현이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나려 했다.
  그때 희영의 친구가 갑자기 승현의 팔을 잡았다. 그것도 왼팔을 잡았다.
  승현은 곧바로 몸을 돌려 오른손으로 그 아이의 목을 움켜쥐었다.
  “무슨 짓이야?”
  승현의 목소리는 낮았다.
  희영의 친구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캑캑 거리기만 했다.
  “왜 내 왼팔을 잡았지?”
  여전히 희영의 친구는 캑캑 거리기만 했다.
  다행히 명균이 다가와 승현의 오른팔을 비튼 덕분에, 희영의 친구는 가까스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승현이 너 뭐하는 짓이야! 미쳤어!”
  명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승현도 크게 심호흡을 했다.
  “미안, 갑자기 흥분했어. 명균아 그만 가자.”
  승현은 다시 한번 명균을 재촉했다.
  명균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까지도 희영의 친구는 멍하게 서서 기침만 하고 있었다. 감히 명균의 모습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희영의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명균의 행동에 놀라서, 다들 명균을 외면하고 있었다.
  희영만이 남학생의 팔을 계속 뿌리치며 명균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뭐야, 쟤가 네 남친이라도 되냐? 아니면 뭐, 전 남친이야? 그래서 도움 요청한 거야? 햐, 그런데 싹 무시하고 가버리네. 불쌍해라.”
  그러면서 체육학과 학생은 희영을 와락 껴안았다.
  희영은 몸부림치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명균을 부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대신 주위에 있던 희영의 친구들이 계속 남학생에게 애원했다.
  “그냥 놔주세요. 제발 희영이 좀 그만 괴롭혀요.”
  “희영이 쟤 몸 약한 아이에요. 저러다 정말 쓰러질지도 모른다고요. 제발 이제 그만해 주세요.”
  “불쌍하잖아요. 저렇게 떨고 있는 희영이가 불쌍하잖아요. 부탁이에요. 이제 그만 희영이 놔주세요.”
  다만 승현에게 목이 잡혔던 여학생만 계속 기침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의 애원에도 남학생은 계속 흐흐흐 웃기만 했다. 희영의 목덜미에 코를 들이대며 킁킁거리기까지 했다.
  희영의 친구가 기침을 멈췄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승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승현이 네가 왜 목을 움켜잡았는지는 모르겠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무조건 사과할게. 아까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어. 그래도 무조건 사과할게. 제발 도와줘. 희영이가 너를 불렀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거 아니야.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불렀을 거 아니야. 도와줘. 제발 도와줘. 희영이 불쌍해서 미치겠어. 저 새끼 죽이고 싶어서 미치겠어. 승현아, 제발 도와줘.”
  친구의 말에 명균이 대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승현에게 속삭였다.
  “일이 좀 꼬였네. 복잡하게 됐어. 승현아, 너 혹시 그 왼팔, 변신 같은 거 말고 단단하게 만들 수도 있냐? 시멘트처럼 단단하게. 그런 걸 강화라고 하나!”
  “뭐야! 아무데서나 능력 발동시키지 말라며!”
  “그래,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내가 자칫 저 새끼 죽일지도 모를 거 같아서 말이야. 그러면 큰일이거든.”
  “어휴, 그러셔. 그러면 큰일이지. 젠장.”
  승현은 곧장 남학생이 있는 곳으로 갔다. 왼팔은 변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어이, 남친, 아니 전 남친! 왜 다시 왔을까! 비겁자라고 놀림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나한테 맞아죽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왔을까! 글쎄, 현명한 판단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졸업할 때까지 넌 나한테 계속 맞아죽을 텐데. 오늘 하루로 안 끝날 텐데. 불쌍한 새끼. 꼴에 남자라고.”
  체육학과 학생의 빈정거림에 승현은 헛웃음만 지었다. 그 헛웃음의 의미를 알기에 희영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승현의 표정을 보자 남학생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더 이상 흐흐흐 하고 웃지도 않았다.
  “너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 내 앞에서 그런 표정 짖는 놈 처음이다.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병원에서 그냥 몇 달 푹 쉬어라. 너희 부모님한테도 돈 몇 푼 쥐어줄 거야. 그럼 오히려 좋아하실지도…….”
  승현은 왼손 주먹으로 남학생의 배를 가볍게 쳤다. 아주 가볍게 쳤다. 죽지 않을 만큼, 병원에서 몇 달 푹 쉬면 나을 수 있을 만큼의 상처만 입도록, 아주 가볍게 쳤다. 내장이 뒤틀려 허리를 펼 수 없을 만큼, 내장이 서로 꼬여 끊어질 듯한 통증을 느낄 만큼, 내장이 꿈틀거리면서 배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감각을 느낄 만큼, 자칫 주먹이 배를 뚫고 등으로 튀어나오지 않을 만큼, 아주 가볍게 쳤다.
  남학생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몸을 돌돌 만 채 바닥을 뒹굴었다. 끊길 듯 말 듯한 비명을 끊길 듯 말 듯 내지르면서 뒹굴었다.
  승현은 왼손의 강화를 풀고 조용히 희영한테 다가가 속삭였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에 나 끌어들이지 마. 그땐 네 배를 뚫어버릴 테니까. 그리고 아까 옥상에서 했던 말도 명심하고.”
  승현의 말에 희영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 승현은 희영의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불길하다.
  불안하다.
  위험하다.

 

  명균은 전철 안에서 오늘 오후 옥상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옥상에 희영이 있었다는 사실과, 희영이 승현의 능력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지금 본 걸 누구에게든 이야기하면 죽이겠다고 경고했다는 말도.
  “진짜로 네 능력을 봤는데도 안 죽였단 말이야?”
  “안 죽였으니까 아까 거기서 날 부른 거 아니냐.”
  “그건 그렇겠지. 승현이 네 능력을 봤다면, 아까 그 체육학과 학생 정도야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래서 걱정이란 말이지. 내가 다시 한번 확실히 위협을 주긴 했는데, 아무래도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다음에 또 이런 일 생기더라도 절대 내 도움 바라지 말라고 확실하게 충고를 하긴 했는데, 왠지 불안하단 말이지. 게다가 내가 그렇게 충고를 하니까, 희영이 걔가 나보고 미소를 짓더라고. 겁을 먹어야 정상인데, 오히려 미소를 짓더라니까. 그 순간 뭔가 기분이 이상했어. 불길하고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예감이 안 좋아.”
  “그게 무슨 뜻이야?”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희영이 걔가 내 충고를 무시하고 뭔가 일을 저지르고 말 거 같다는 예감, 그래서 아주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어. 그냥 아까 낮에 옥상에서 죽였어야 했나, 하는 후회도 들고.”
  “흠, 일단 승현이 네가 희영이를 그 자리에서 안 죽였다는 게 놀랍다. 다른 사람한테 능력 들키면 바로 죽일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 틀렸네. 사과하마. 아주 잘했어. 대견하다.”
  “그런 소리 듣자고 한 말 아니다. 나 정말 심각하단 말이지.”
  “뭐, 희영이 걔도 다시 한번 승현이 네 능력을 봤는데, 설마 함부로 네 충고를 무시하지는 않겠지. 다른 사람들한테 네 능력을 얘기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거야. 얘기하고 싶은 충동은 들겠지만, 쉽게 얘기하지는 못할 거야. 한두 번 더 주의를 주는 것도 좋을 거 같고. 아니면 이제 나는 그만 감시하고, 앞으로는 희영이랑 같이 다니는 게 어떠냐? 그것도 괜찮은 방법 같은데.”
  “아, 자식,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라니까. 나 진짜 심각하다니까. 기분이 영 찜찜해.”

 

  그리고 다음 날.
  명균은 강의실 구석 의자에 앉아 어제 승현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곱씹고 있었다.
  ‘아주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어. 기분이 영 찜찜해.’
  승현의 예감이 맞았다. 녀석의 예감이 적중했다.
  명균이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체육학과 학생이 따라 들어왔다. 어제 승현에게 배를 맞았던 아이였다.
  “너 어제 그 놈 친구 맞지?”
  체육학과 학생의 말에 명균은 아무 대구도 하지 않았다.
  “어제 그 놈, 완전히 괴물 같더라. 주먹이 장난 아니게 세던데. 배 엄청 아팠어. 죽는 줄 알았다. 진짜로 아파서 죽는 줄 알았어. 그래서 도저히 그냥 못 넘어가겠더라고. 화를 안 풀면 평생 억울해서 못 살겠더라고. 다행히 이제 화는 약간 풀어졌어. 하지만 완전히 풀어진 건 아니야. 아직 마무리를 못 지었거든. 무슨 말이냐 하면 말이지. 이제 그 희영이라는 애 말이야, 학교 못 나올 거야. 걔네 집 알아내는 것 정도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식은 죽 먹기지. 새벽에 바로 걔네 집으로 갔어. 혼자 간 건 아니고, 사람들 데리고. 무서운 사람들 데리고. 아니, 잔인한 사람들 데리고. 그리고 무작정 집안으로 들어가서, 가족들 보는 앞에서, 같이 간 사람들이, 걔 죽였어. 주먹으로, 쇠로 된 뾰족한 걸 낀 주먹으로, 걔 배를 계속 때려서 죽였어. 주먹이 배를 뚫을 때까지 계속 때려서 죽였어. 아마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도 굉장히 아팠을 거야. 나도 어제 굉장히 아팠거든. 그런데 그것보다 더 아팠을 거야. 너무 아팠는지 비명도 못 지르더라. 그런데도 가끔씩 그 남친 말이야, 승현이라는 놈 이름을 부르더라. 도와달라고 하면서.”
  얘기를 듣는 동안 명균은 이를 악물었다. 10년이 훌쩍 넘었다. 분노를 느껴본 지 10년이 넘었다. 10년 만에 느끼는 강한 분노였다.
  “그런데 넌 어떻게 학교에 왔지? 사람을 죽여놓고 어떻게…….”
  “아, 나한테는 그런 거 아무것도 아니야. 걔네 가족, 학교, 언론, 전부 입막음 할 수 있어.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건 없거든. 돈은 신이잖아. 흐흐흐. 나 대단하지 않냐? ……다음은 그 승현이라는 놈 차례야. 그 놈도 희영이라는 애처럼 똑같이 죽일 거야. 전해 줘. 오면 곧장 체육관으로 오라고 말이야. 아니면 내가 밤에 걔네 집으로 갈 거야. 그래서 가족들이 보는 데서 죽일 거야. 그러니 체육관으로 오는 게 나을 거야. 그렇게 전해 줘. 넌 걔 친구잖아. 흐흐흐.”
  체육학과 학생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승현의 예감이 맞았다. 녀석의 예감이 적중했다.
  내 탓이다. 승현을 부추긴 내 탓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승현이 올 것이다. 승현에게 숨길 수는 없다. 어차피 그 놈이 밤에 승현의 집으로 갈 테니까. 승현에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럼 과연 승현이 폭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을 죽이려고 덤벼드는 놈들 앞에서 폭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승현은 죽지 않을 것이다. 대신 놈들이 죽을 것이다. 몰살당할 것이다. 그러고도 승현은 무사할까. 이미 폭주해 버린 승현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돌아온다 해도, 이미 사람들을 죽인 능력자를, 파괴자를 다른 능력자들이 가만 놔둘까.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위험하다.
  명균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서 승현을 알게 된 걸 후회했다. 역시 누군가와 친해지지 말아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했는데 또 누군가와 친해지고 말았다며 후회했다.
  그러다 승현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어, 뭐야! 왜 아무도 없어? 명균아, 오늘 휴강이냐?”
  승현의 물음에 명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승현의 얼굴만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 왜 아무 말이 없어? ……혹시 희영이 문제냐? 그런 거야?”
  “……그래. 희영이 문제야. 일이 좀 커졌어. 우려했던 것보다 더 커졌어.”
  그러면서 명균은 희영이 죽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체육학과 학생이 체육관에서 승현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 웃기는구나. 혹시라도 희영이가 쓸데없는 행동을 벌이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여기 저기 떠벌리고 다니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뭐 이런 웃기는 일이 다 벌어지냐. 희영이를 죽였어야 했나, 하고 후회했는데, 뭐 이런 웃기는 일아 다 벌어져! 어떻게 희영이가 진짜로 죽을 수가 있는 거냐! 배 한 대 얻어맞은 앙갚음으로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여! 인간이란 것들은 다 그러냐! 약해빠진 주제에, 대가리 속에는 아주 무시무시한 게 들어있나 보네. 으하하하. 정말 웃기는 것들이야. 인간들은 정말 웃겨. 죽여달라고 발악을 다 하니 말이야. 애원을 다 하니 말이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안 죽여. 궁금해 미치겠는데 어떻게 안 죽여. 인간들 대가리 속에는 뭐가 들었을까 궁금해 미치겠어. 쑤셔서 끄집어내야지. 확인해 봐야지. 그래야 궁금증이 풀리지. 으하하하. 정말 웃기는 것들이야.”
  슈앙!
  승현의 왼팔은 길이 2미터가 넘는 칼로 변했다. 강화된 칼.
  그러고는 문을 두 동강 낸 뒤 강의실을 나갔다.
  명균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으하하하, 웃기만 하면서, 벽과 창문과 기둥을 두 동강 내면서 저벅저벅 걸어갔다. 앞에 사람들이 있건 말건 상관없이 칼을 휘둘렀다. 명균의 피하라는 외침에 다행히 다친 사람들은 없었다.
  명균의 우려대로 승현은 폭주해 버렸다.
  멀리서 희영의 친구가 승현의 모습을 보았다. 왼손이 칼로 변한 모습. 무서움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하마터면 어젯밤 저 칼에 자기 목에 날아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은 완전히 창백했다.

 

  승현은 마침내 체육관 앞에 도착했다.
  닫혀 있는 문을 칼로 두 동강 냈다.
  “체육학과 학생이라고 했던가. 얼굴이 기억 안 나네. 살짝 손만 들어라.”
  승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안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문과 반대쪽, 체육관 안쪽에는 세 명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모두 검은색 양복에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들 뒤로 한 학생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체육학과 학생이었다.
  그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야. 반가워. 손이 참 근사하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주먹이 굉장히 세더라고. 아마 단단하게 만들었었나 봐. 그래서 여자애한테 물어봤지. 배에 구멍이 뚫리기 직전에야 말하더라고. 승현이가 가만 안 둘 거라나 뭐라나. 걔 손은 칼로 변한다나 뭐라나. 그래서 입까지 찢어버렸어. 칼로 변하는 게 뭐 대순가. 난 돈이 많은대. 너 같은 애들 수천 명도 살 수 있는데. 여기 이 사람들 참 근사하지? 양복 멋있지 않아? 싸움도 엄청 잘한다. 그 칼로는 상대가 안 될 거야. 이 사람들도 능력자들이거든. 세 명을 동시에 다 죽여야 돼. 안 그러면 계속 살아난다. 그러니까 셋이지만 하나인 셈이지. 그럼, 잘해 봐. 응원할게.”
  셋을 동시에 죽여야 한다. 한 명이라도 살아 있으면 나머지 두 명도 죽지 않는다. 칼로 몸을 베고, 그 몸이 다시 붙기 전에 나머지 두 명의 몸도 베어야 하는 셈이다.
  승현에게 상당히 불리한 싸움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칼로는 저 세쌍둥이를 상대하기에 무리가 따른다. 다른 무기로 변신해야 한다. 총이면 간단히 끝날 것이다. 기관총 정도면 단번에 저 세쌍둥이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몸놀림이 빠르더라도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총알을 피할 수 있을까. 설사 피한다 해도, 세쌍둥이를 맞추지 못한다 해도, 의자에 앉아 있는 체육학과 학생을 향해 총알을 퍼부을 수도 있다. 그러면 적어도 저 녀석만큼은 죽일 수 있다.
  녀석은 아마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한 모양이었다. 승현의 왼손이 칼로만 변하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쉽게도 강화 또는 칼, 그 능력만 있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결과는 뻔했다. 녀석은 죽는다.
  하지만 승현의 왼손은 여전히 강화된 칼이었다. 총이나 다른 무기로 변신하지 않았다.
  세쌍둥이는 승현이 다가오는데도 자세를 바로 잡지 않았다. 처음 서 있던 자세 그대로 승현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
  뭐지. 승현이 녀석, 폭주하는 바람에 머리까지 잘 안 돌아가는 건가. 칼로는 승산이 없다는 걸 모르는 건가. 다른 무기로 변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 건가.
  “승현아, 칼로는 안 돼! 다른 걸로 변신해!”
  명균이 그렇게 소리쳤다.
  “호오, 그러고 보니까 관중이 있었네. 저 사무라이 놈 친구까지 왔잖아. 너까지 오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친구 죽는 거 구경하러 왔나 보네. 히야,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친구 죽는 걸 보고 싶어 하다니 말이야. 그리고 다른 걸로 변신하라니, 쯧쯧, 너무 순진하잖아. 저 사무라이 놈이 그러던가? 다른 걸로도 변신할 수 있다고! 순진해도 너무 순진하잖아. 아니, 멍청한 건가. 하긴, 그런 놈들끼리 만나는 법이니까. 이봐, 이봐! 저 사무라이 놈 말이지, 다른 걸로는 변신 못해. 칼하고 강화 두 가지야. 칼이야 뭐 어느 정도 길이 조절은 가능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게 다라고.”
  명균은 놈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아차, 하고 깨달았다.
  “뭐야, 그렇게 둔하지는 않네. 눈치 챈 거야! 그래, 그래. 바로 그거라고. 그러니까 저 사무라이 놈이 자기 능력을 숨긴 거라고. 능력이 형편없거든. 까놓고 얘기하자면, 뭐, 능력이라고 할 것도 없지. 기껏 칼로 변하는 게 고작이니까 말이지. 물론 그 정도로도 너나 나 같은 일반인들한테는 충분히 위협적이지. 하지만 거기까지. 다른 능력자들한테는 상대가 안 돼! 다른 능력자들이 봤을 때 말이지, 저 놈 능력은 능력도 아닌 거야. 그냥 일반인으로 간주해 버리지. 참 하찮은 능력이거든. 으앗, 창피해! 나 같았어도 숨겼을 거야. 다른 능력자들이 알아 봐. 그거 얼마나 창피하겠어. 여기 있는 세쌍둥이들도 처음에 저 녀석 능력에 대해 듣고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는지 몰라. 그런 녀석 때문에 꼭 자기들이 나서야 하냐고, 능력자로서 수치라고, 다른 능력자들이 이 일을 알면 비웃을 거라고 그랬어. 그러면서 안 간다고 그랬어. 덕분에 흥정하느라 돈만 더 들었다고. 그런데 말이지, 왜 내가 굳이 흥정까지 해가면서 이들을 불렀는지 알아? 저 형편없는 사무라이 놈 하나 해치우는 데 왜 이들을 불렀는지 아냐고? 저런 놈 상대로는 사실 능력자를 부를 필요도 없어. 전문 킬러 몇 명만 불러도 돼. 그러니까 일반인 킬러 말이야. 너, 일반인과 능력자의 몸 값 차이가 얼마나 큰 줄이나 알아? 하늘과 땅 차이라고. 그런데도 내가 능력자를 택한 이유, 그것도 몸 값 비싸기로 소문난 세쌍둥이를 택한 이유, 궁금하지 않아? 하, 이런 거 내 입으로 직접 말하려니까 좀 창피하네. 그게 다 저 사무라이 놈을 위해서야. 내가 좀 상대 배려하는 마음이 깊어. 저 사무라이 놈도 어쨌든 능력자잖아. 비록 하찮은, 저주와도 같은 능력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능력자잖아. 그런데 생각해 보라고. 명색이 능력자가 일반인 킬러한테 죽임을 당하면 얼마나 쪽팔리겠어. 다른 능력자들도 아마 창피해할 거야. 능력자가 일반인한테 졌다. 아, 정말, 다른 능력자들도 얼굴을 못 들고 다닐 일이잖아. 그래서 세쌍둥이를 부른 거라고. 저 놈 체면 세워주려고 말이야. 명색이 능력잔데, 죽어도 같은 능력자 손에 죽는 게 덜 쪽팔릴 거 아니냐고. 아 참, 구차하게 내 입으로 이런 말까지 다 해버렸네. 아무튼 그런 거야. 그럼 거기서 구경 잘 해라.”
  그제야 녀석이 세쌍둥이를 향해 손짓했다.
  녀석의 손짓에 세쌍둥이는 짐짓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제히 자세를 바로 잡아 승현의 공격에 대비했다. 셋 다 똑같은 자세였고, 쉽게 빈틈을 찾을 수 없는 자세였다. 그런데도 승현은 칼을 치켜든 채 세쌍둥이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망설이지 않았다.
  세쌍둥이를 죽이려고 다가가는 게 아니다. 체육학과 녀석을 죽이려는 게 아니다. 승현의 목적은 따로 있다. 그래서 다가가는 것이다.
  승현의 모습을 보면서 명균은 그런 생각을 했다.
  “승현아!”
  명균이 큰소리로 승현을 불렀다.
  “승현아!”
  그제야 승현이 걸음을 멈추고 명균을 돌아보았다.
  “승현아, 내가 너 도와주면 안 될까? 사랑 고백한 사이잖아.”
  명균의 말에 승현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미친놈. 사랑 고백은 무슨. 다시는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징그럽다. ……명균아, 그동안 나처럼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놈 상대해 주느라 고생 많았어. 사실 처음부터 명균이 너 죽일 생각 없었어. 그런 용기가 나한테는 없거든. 그런데도 무작정 위협해서 미안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라고. 무섭더라. 명균이 네가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어쩌지, 능력자들 귀에 들어가면 어쩌지, 그럼 난 비웃음 당하다 죽겠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 능력자들 찾아내서 죽이는 능력자들도 많다잖아. 그들한테 난 상대가 안 돼. 저 체육학과 놈 말마따나 내 능력은 아주 형편없으니까. 칼로 변하는 것 하고 강화시키는 거 두 개뿐이니까. 정말 저주 같은 능력이지. 이런 능력은 없는 게 나았을 텐데…….”
  승현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단 하루도 편하게 지내지 못했어. 능력자들 손에 죽게 될까 봐 자다가도 흠칫 놀라서 깨고는 했어. 나도 능력잔데 참 웃기지. 그래서 차라리 왼손을 자르려고도 했는데, 그게 더 무섭더라고. 죽는 것보다 왼손 자르는 게 더 무서웠어. 정말 바보 같은 놈이지.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온 거야. 아니, 버텨온 거지. 언제 죽을지 몰라 벌벌 떨면서 하루하루 힘들게 버텨왔어. 그러다 명균이 너를 만났고. 내 능력을 알게 된 너. 내 저주 같은 능력을 알게 된 너. 네 목에 칼을 들이대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 마지막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 마지막 친구로 이 녀석 정도라면 후회는 들지 않겠다, 죽더라도 이 녀석이 지켜봐 주는 곳에서라면 좀 폼나게 죽을 수 있겠다, 이 녀석 정도라면 내가 죽을 때 조금은 슬퍼해 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명균이 너한테 더 못되게 군 거 같아. 나를 버리지 못하게 만들려고. ……. 명균아, 고마웠어. 진심이야. 그리고 나, 지금 행복해. 네가 지켜보는 곳에서 죽게 됐잖아. 폼 좀 나지 않냐. 히힛. 명균아, 어디 가지 말고 지켜봐 줘. 그리고 미안한데, 조금이라도 슬퍼해 줘. 후아, 명균아, 이제야 좀 후련하다. 홀가분해. 지금까지 뭔가 굉장히 무거운 걸 짊어지고 살아왔거든. 그런데 지금 그걸 내려놓은 기분이야. 아주 잠깐이기는 하지만, 지금 참 행복해. 저 체육학과 녀석이 고마울 정도야.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해줬으니까. 그럼, 명균아, 나 간다. 가서 희영이한테 사과도 해야지. 받아줄지는 모르겠지만. ……안녕.”
  승현은 다시 세쌍둥이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죽이러 가는 것이 아니다. 희영의 복수를 하러 가는 것도 아니다. 승현은, 내 앞에서 폼 한번 잡고 싶어 가는 것이다. 미친놈, 폼을 너무 잡고 있어. 빛이 날 정도야. 눈을 못 뜨겠네. 눈이 부셔서 폼 잡는 모습을 지켜볼 수조차 없잖아. 그래, 가라. 멋있다, 김승현! 지금 아니면, 네가 언제 내 앞에서 폼을 잡겠냐. 잘 가라, 김승현!
  승현은 칼로 변한 왼손을 치켜든 채 체육학과 학생을 향해 돌진했다.
  승현이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건 체육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쌍둥이도 움직였다. 셋이 동시에 몸을 날려 승현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시간은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승현은 참 짧은 시간 동안 홀가분한 삶을 살다 갔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녀석은 유난히 나를 따랐다.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리가 퉁퉁 붓는 병에 걸린 아이였다. 그때도 녀석의 허벅지는 허리보다 굵었다. 그래서 늘 헐렁한 추리닝 바지를 입고 다녔다.
  녀석은 굵은 다리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했다. 늘 뒤뚱뒤뚱, 그러다 옆으로 픽 쓰러지고는 했다. 그럴 때면 히죽 웃으며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젖 먹던 힘을 쥐어짜서 녀석을 일으켰다.
  “고마워.”
  그러고는 또 히죽.
  덩치는 나보다 컸지만, 그렇게 히죽 웃는 녀석이 귀여워 머리를 한 대 콩 쥐어박고는 했다.
  “천천히 걸어. 천천히, 조심조심.”
  “알았어. 고마워, 명균아.”
  녀석은 늘 나한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함께 화장실에 갈 때도 고맙다고, 둘이 떠들다 복도에서 손들고 서 있을 때도 고맙다고, 도시락 같이 먹을 때도 고맙다고, 애들이 녀석을 괴롭힐 때 대신 나서서 싸울 때도 고맙다고, 체육 시간에 달리기 할 때 같이 꼴등을 해줄 때도 고맙다고, 여자애들이 코끼리 다리 같아서 징그럽다고 놀릴 때, 넌 새끼 마녀 같아, 하고 놀려줄 때도 고맙다고, 가끔 녀석의 집에 가서 같이 게임할 때도 고맙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녀석의 보호자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내가 녀석을 끝까지 지켜줄 거라고 다짐하기까지 했다.
  내가 늘 함께 있어 줄게. 누가 너 괴롭히면 내가 다 막아줄게.
  그런 철없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나고, 녀석과 나는 가방을 챙겨들고 교실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검은색 양복에 선글라스까지 낀 남자 셋이 우리를 막아섰다.
  “네가 정훈인가?”
  셋 중 한 남자가 말했다.
  “다리 굵은 걸 보니 맞군.”
  그 말에 나는 남자 셋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비록 상대가 어른들이기는 했지만, 정훈의 보호자를 자처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아저씨들 뭐죠? 정훈이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세요?”
  내 말에 남자 셋은 대구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정훈이가 “이제 오셨네요” 하더니, 웃으며 내게 말했다.
  “명균아, 고마웠어. 그동안 내 친구가 되어 줘서 너무 고마웠어. 잊지 않을 거야.”
  “무슨 말이야, 그게! 고맙다는 말 같은 거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이 아저씨들 대체 뭐야!”
  정훈은 씩씩 대는 나를 향해 한번 더 미소를 짖더니, 손으로 툭 치듯 나를 교실 밖으로 밀어냈다. 그 힘이 굉장히 세서 나는 뒤로 몇 미터나 밀려나갔다.
  정훈이 저렇게 힘이 셌던가. 툭 민 거 같았는데.
  넘어져서도 나는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저 아이는 헤치지 말아주세요. 능력자도 아니고, 그냥 어린아이일 뿐이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예요. 만일 제가 아저씨들한테 진다고 해도, 저 아이는 그냥 보내주세요. 약속해 주세요. 그럼 저도 최선을 다해 싸움에 임하겠습니다.”
  정훈이 세 남자에게 다짐이라도 받듯 말했다.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된다. 우리도 일반인들은 안 건드린다. 게다가 어린아이는 더 더욱 말이지. 우린 능력자들만 제거하는 게 목적이다. 일반인들은 관심 없다. 그러니 안심해라. 게다가 저런 아이 살려둔다고 나중에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능력자로서 관용을 베풀어야지. 자, 그럼 어떻게 할까. 운동장으로 갈까, 아니면 그냥 여기서 할까. 그런데 참, 넌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그렇지, 명색이 능력자라면 닉네임 정도는 만들었어야 하지 않나? 너처럼 강력한 다리를 갖고 있으면 근사한 닉네임 하나는 나올 법도 한데 말이다.”
  “전 그런 거 관심 없어요. 어차피 능력 과시하면서 살 생각 없으니까요. 당신들같이 능력자 킬러들 상대할 때만 잠깐 능력 발동할 생각이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그냥 제 이름 그대로가 좋아요. 그럼, 운동장으로 가요. 강의실에서는 아무래도 이것저것 부서질 만한 게 너무 많아요.”
  “그래, 나가자. 어린 애라도 봐주지 않는다. 능력자는 능력자니까 말이다.”
  정훈이 먼저 앞장서서 복도를 걸어갔다.
  “정훈아!”
  나는 그런 정훈을 불렀다.
  정훈이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능력자였구나.”
  “응. 속여서 미안해.”
  “큭, 처음으로 나한테 미안하다는 소릴 하네.”
  “그런가. 하하하.”
  우린 잠시 말이 없었다.
  “정훈아, 이길 자신 있어? 저 아저씨들 꽤 센 거 같은데. 자신 없으면, 내가 도와줄까?”
  정훈의 두 다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굵어진 상태였다.
  “아니, 말만으로도 고마워. 하지만 이건 내 싸움이야. 능력자라면 피할 수 없는 싸움. 사실 그동안 좀 힘들었어. 그래서 명균이 너한테 어리광도 좀 부렸던 거고. 고마웠어. 이제는 이 짐을 좀 가볍게 만들려고. 그래서 내가 이 아저씨들 부른 거야. 나와 상대해 달라고 말이지. 이 아저씨들은 킬러들이거든. 능력자 킬러. 능력자로 태어난 이상 어차피 한 번은 상대해야 돼. 평생 능력을 감출 자신이 없으면 한 번은 상대해야 돼. 명균아, 이래봬도 나 꽤 세다. 어쩌면 지금이 가장 셀지도 몰라. 하하하. 싸움에서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 어쨌든 이 싸움을 통해서 조금은 짐이 가벼워지겠지. 아니면 사라지든가. ……명균아, 내 말 이해할 수 있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힘차게 응원했다. 꼭 돌아와서 같이 집에 가자고.
  집에 가다 쓰러지면 내가 일으켜줄게, 정훈아. 대신 천천히, 조심조심 걸어야 된다.

 

  승현을 스치고 지나간 세쌍둥이는 잠시 선글라스를 고쳐 쓴 뒤 체육학과 학생 곁으로 갔다.
  “능력자도 아니고 일반인도 아니야. 어중간한 인간이지. 불쌍하군. 어쨌든 임무는 완수했으니까 잔금은 오늘 중으로 입금해라. 그리고 이제 가능하면 저런 형편없는 능력자를 상대해 달라는 의뢰는 하지 말거라. 그런데 저기 있는 녀석은 어쩔 생각이지? 우리는 저 녀석까지 죽일 생각은 없는데. 일반인은 상대 안 하거든.”
  “네, 오늘 중으로 입금할게요. 그리고 저 녀석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저렇게 슬퍼하다 말겠지요. 그렇다고 저한테 달려들 용기도 없을 테고요. 물론 저런 녀석 정도는 제 손으로도 박살 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아저씨들 솜씨는 정말 소문대로 끝내주네요. 움직임이 전혀 안 보였어요.”
  “그래, 알았다. 그럼 우린 간다. 저 사무라이 놈 시체는 가져갈게. 우리가 죽였으니까, 묻어주는 것도 우리가 한다. 그게 우리 세쌍둥이 룰이라는 거 알지?”
  그러면서 세쌍둥이는 승현 곁으로 다가갔다.
  그중 한 명이 승현을 들어올리려고 했다.
  “건들지 마.”
  승현을 들어올리려다 말고 사내가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 놔둬. 승현이는 내가 묻어준다.”
  명균은 사내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시선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승현을 향하고 있었다.
  “헉, 뭐야 저 미친 놈! 눈앞에서 친구가 죽으니까 갑자기 정신이 나갔나 보네.”
  체육학과 학생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이봐, 꼬마. 미안하지만 뒤처리까지 해주는 게 우리 룰이라서 말이다. 친구 위하는 마음은 이해가 간다만, 우리도 우리 룰은 반드시 지킨다. 그래야 홀가분해. 이제 돌아가라.”
사내가 다시 승현의 몸에 손을 대려 했다.
  “그냥 두라고 했다. 명균이 부탁이라 가만히 있었다. 정훈이 부탁이라 가만히 있었다. 더 이상 나를 화나게 하지 마라. 그냥 두고 떠나라.”
  명균의 말에 세쌍둥이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정훈! 정훈이 누구지. 이 아이 이름은 승현, 그럼 정훈은 또 뭐야. 그리고 너, 꼬마. 말투가 제법 위협적이구나. 혹시 능력자인가?”
  그 말에 체육학과 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저 녀석도 능력자였어!”
  명균은 비로소 세쌍둥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정훈이를 모르나 보구나. 시체 뒤처리까지 해주는 게 룰이라면서 정작 너희들은 죽인 사람 이름도 기억 못하는 건가. 그거야 말로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형편없는 녀석들이군. ……벌써 10년이 조금 넘었구나. 너희가 학교에 찾아왔었지. 초등학교에 말이야.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애를 상대하러 말이야. 다리 굵은 아이, 능력자로 살 생각이 없어서 닉네임도 안 만들었던 어린아이.”
  “음,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한 아이가 옆에 있었지. 그 아이가 너였나 보구나. 꽤 인연이 깊은데 그래. 네가 능력자라는 걸 알았으면, 아마 너도 그때 우리들 손에 죽었겠지. 그땐 왜 능력을 감추고 있었던 건가?”
  “내 능력은 위험하다. 상대는 무조건 죽는다. 함부로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하지만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준다. 그래서 당시에도, 그리고 조금 전에도 물어보았다. 도와줄까, 라고. 아무리 능력자라 해도 죽음은 두렵다. 그래서 나한테라도, 내가 능력자라는 사실도 모르면서 도와달라고 했다면, 그는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나는 도와줬을 것이다. 정훈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승현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둘은 내 도움을 거절했다. 그것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그때의 표정을, 정훈과 승현의 표정을 기억한다. 죽음을 선택한 표정. 그래서 나서지 않았다. 내 능력을 감추고 있었다. 얼마나 참기 힘들었는지 아는가. 뒤늦게 운동장에 갔을 때는 이미 정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수습을 해주지 못한 죄책감이 컸다. 이번에는 그런 죄책감이나마 갖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니 승현을 놔두고 돌아가라. 만일 나와 상대하려 한다면, 너희는 무조건 죽는다.”
  사내는 일단 승현의 몸에서 손을 뗐다.
  세쌍둥이는 나란히 서서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중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누구라는 걸 잊은 모양이구나. 능력자를 사냥하는 킬러들이다. 상대가 능력자라는 걸 안 이상, 우리는 절대 그냥 돌아가지 않는다. 누군가의 의뢰를 받는 이유도 능력자를 죽이고 싶어서다. 능력자를 보면 죽이고 싶다. 죽여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그게 우리 본능이다. ……불쌍하구나. 아무 말 않고 돌아갔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네가 능력자라는 걸 안 이상, 우리는 너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다. 죽인다. 자, 꼬마, 혹시 닉네임이 있는가?”
  명균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세쌍둥이를 쳐다보았다.
  “그런 거 없다. 그리고 있다 해도 너희들은 알 필요 없다. 이제 죽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능력을 발동하게 되면 저 체육학과 녀석도 함께 죽인다. 그래도 상관없다면 다가오거라.”
  명균의 말에 체육학과 학생이 흠칫 놀랐다.
  “어, 뭐야, 왜 나까지 피해를. 이봐, 아저씨들, 이길 수 있겠지? 저런 애송이한테 내가 죽는 일 따위 없겠지? 반드시 저 애송이 놈 죽여줘. 그럼 저 놈 몫까지 지급할게.”
  “그런 거 필요 없다. 그리고 네 놈 목숨 따위 관심도 없고. 겁이 나거든 지금 도망치거라.”
  세쌍둥이의 말에 체육학과 학생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있어!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너부터 죽인다.”
  명균의 말에 체육학과 학생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내 친구를 데리고 가겠다. 살고 싶으면 그냥 돌아가고, 죽고 싶으면 덤벼라.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다.”
  명균은 말을 마치고 나서 승현한테 다가갔다.
  그때 세쌍둥이가 동시에 승현에게 달려들었다. 그 움직임은 실로 재빨랐다. 하지만 세쌍둥이는 승현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지 못했다. 승현의 코앞에서 멈췄다. 아니, 굳었다. 아니, 얼었다.
  체육학과 학생이 그 모습을 보며 히익,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체육관 후문을 향해 뛰어가려 했다. 그러다 굳었다. 아니, 얼었다.  

 

 

  2

 

  그의 이름은 이제 지서우다. 김명균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지서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대학 때 승현이 죽은 뒤로 그는 며칠 뒤 학교를 자퇴했다.
  학과 교수도 그의 자퇴를 말리지 않았다. 대신 자퇴를 하더라도 승현의 죽음으로 망가지지 말라는 당부만 했다. 빨리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했다. 형식적인 말이었다.
  학교에서는 그 날의 사건을 승현과 세쌍둥이의 대결로만 알고 있었다. 명균은 운이 좋아 살아남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의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매스컴에서도 당시의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다. 체육학과 학생 부모가 나서서 사건을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명균도 학교에서 쫓아버리라고 압력을 가했다. 물론 명균 역시 더 이상 학교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 어쨌든 그래서 학과 교수는 명균의 선택을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서우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잡지사에서 청탁이 들어오면 닥치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 주로 식당을 소개하는 사진이 많았다. 가끔은 지방에서 활동 중인 예술가들의 작업 사진을 찍기도 했다.
  물론 프리랜서 활동은 생계를 위해서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의 손을 빌리는 일은 없다. 지서우는 그걸로 만족했다.
  그리고 가끔, 그러니까 1년에 한두 번 개인 전시회도 열고 있었다. 전시 제목은 언제나 똑같았다.
  지서우의 얼음전.
  한 번은 예전 학과 교수가 지서우의 전시회에 온 적이 있었다. 지서우에게 빨리 충격에서 벗어나라고 형식적으로 말한 교수였다.
  “아직도 얼음에 집착하나? 자네 말대로 당시에 승현이가 놈들을 얼렸지. 물론 그 전에 승현이가 먼저 놈들에게 치명상을 입었고. 자네야 직접 그곳에 있었으니까 충격이 컸을 거야. 승현이가 치명상을 입기 전에 먼저 놈들을 얼렸으면, 아마 승현이는 죽지 않았겠지. 그런 생각 충분히 가질 수 있어. 하지만 놈들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았겠지. 이제 그만 충격에서 벗어나게. 자네는 승현이가 아니야. 그냥 평범한 인간일세. 승현이를 대신해 사물을 얼리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진심일세. 얼음 말고, 승현이를 생각하면서 계속 얼음만 조각하지 말고, 그냥 다른 걸 찍게. 자네 걸 찾아. 얼음 조각품이 제 아무리 근사하면 뭐하나. 자네한테는 필요 없는 재능인 걸. 얼음 조각품이 마음에 든다면, 차라리 조각품 자체를 전시하게. 사실, 자네의 조각 실력은 훌륭해. 진심일세. 조각이 아니라 실물을 그대로 얼린 것 같다는 평도 많아. 하지만 자네는 그럴 생각이 없지. 자네는 얼음 조각가가 아니라 사진작가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수군대는 걸세. 왜 얼음 조각품을 전시하지 않고, 사진으로 찍어서 전시하느냐고 말이야. 하지만 자네는 사람들의 그런 수군거림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아. 상관하지 않지. 이유를 말할 생각도 없고. 물론 나는 알고 있네. 승현이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도 이제는 그만 벗어나게. 승현이도 자네의 이런 행동 원하지 않을 걸세. 얼음에서 자유로워지게. 승현이를 이제 놓아줘. 그리고 자네 걸 찾게. 자네 실력이면 충분히 사람들을 매혹시킬 만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걸세. 얼음 조각품을 전시하는 것도 아니고, 얼음 조각품을 찍은 사진만 전시하는 자네를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어. 나는 제자가 망가지기를 바라지 않네. 진심일세.”
  그러고도 교수는 지서우 앞에서 10분 넘게 설교를 더 하고 떠났다. 진심이라는 말도 수없이 반복해가면서.
  물론 교수가 방문한 이유를 지서우는 알고 있었다. 당시 체육학과 학생이었던 자도 얼었다. 부모 역시 얼음으로 변한 자신의 아들을 부둥켜안고 슬퍼했을 것이다. 지서우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왜 자기 아들이 아니라 지서우란 말인가, 하고 애통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서우는 또 얼음 조각품만 사진으로 찍어 전시하고 있다. 부모는 그 소식을 접할 때마다 아들 생각이 더 간절할 것이다. 지서우가 더 원망스러울 것이다. 지서우의 사진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 사진을 보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교수에게 부탁해 지서우를 만나라고 한 것이었다. 그 따위 사진 그만 찍으라고 충고해 주라고 한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교수의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지서우의 사진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얼음 조각이라면 차라리 조각품 자체를 전시하지 왜 그걸 굳이 사진으로 찍어서 전시할까, 하고 의아해하고 있었다.
  큐레이터도 몇 번이나 권유를 했다. 사진 말고 조각품을 전시하자고. 물론 그럴 때마다 지서우는 큐레이터의 권유를 거절했다. 사진이 아니라면 자신은 전시하지 않겠다고.
덕분에 지서우는 3류 사진작가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 대형 전시를 의뢰받은 적도 있었다. 조건은 하나, 사진 말고 얼음 조각품을 전시하자는 것이었다. 좀더 규모가 큰 조각품 위주로 전시하자는 것이었다. 그만큼 지서우의 얼음 조각품 자체는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어쩜 이렇게 실물과 똑같을까요, 하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지서우는 번번이 전시를 거절했다. 조각품 자체는 전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덕분에 지서우가 사진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은 작은 갤러리뿐이었다. 그것도 지서우에게 아주 불리한 조건으로. 물론 그렇게 의뢰해 오는 갤러리 또한 그리 많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불리한 조건을 내걸어도 지서우는 모두 받아들였다. 그 조건이 사진이 아니라 조각품을 전시하자는 내용만 아니면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프리랜서 활동만으로도 생활은 가능했다. 전시는 정체성 문제였다. 지서우는 사진작가니까. 또한 조각품 자체를 전시하지 않는 이유도 있다. 그리고 사물을 얼리는 이유 역시 분명 있다.
  왜 다른 사진은 전시하지 않는가. 왜 얼음 조각품인가. 왜 얼리는가.
  지서우는 그날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처음으로 얼렸다. 사람이 아닌 사물을 얼린 적은 많았다. 노트북을 얼렸다가 엄마한테 혼날까 봐 깨뜨리고 나서 잃어버렸다고 한 적도 있었다. 물론 잃어버렸다고 해서 엄마한테 많이 혼났다. 길가에 나뒹구는 쓰레기도 얼렸고, 먹던 초콜릿도 얼렸고, 떨어지는 빗방울도 얼렸다. 얼리고 싶어서 얼린 건 아니었고, 아주 무료할 때면 가끔씩 얼렸다.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사람을 얼린 그날, 그날 이후로 지서우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 얼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무엇이든 얼리지 않으면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았다. 사소한 일에도 흥분을 했고, 행동도 거칠어졌다. 대형마트에서 물건을 산 뒤 계산대에 선 긴 줄을 보며 빨리 계산하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다 사물을 얼리고 나면, 싸구려 중고 자전거를 구입해 얼리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폐차 직전의 차를 고철 값만 주고 구입해 얼리고 나면 머리가 더없이 맑아졌다. 큰맘 먹고 백화점에 가서 값비싼 제품들을 사서 얼리고 나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특히 유명 극사실주의 작가가 수작업으로 만든 비싼 인형을 사서 얼렸을 때는 오르가슴까지 느꼈다. 크기를 비롯해서 모든 게 사람과 거의 흡사한 인형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얼린 걸 곧바로 찍었다. 찍고 나서는 곧바로 깨뜨렸다. 비싼 인형을 얼린 조각품을 깨뜨릴 때는 약간 망설이기도 했다.
  지서우가 얼음 조각품 말고 다른 걸 찍을 때는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잡지사 청탁을 받았을 때. 그때 말고는 없다. 전시를 위한 목적으로는 오로지 자신이 얼린 조각품만 찍었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가슴이 벅차오르고 오르가슴까지 느끼는 건 자신이 얼린 조각품들뿐이니까. 값비싼 인형도 그 자체로는 그리 큰 감흥이 없었다. 얼렸을 때 흥분감은 극에 달했다. 그런 것만 작품으로 찍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진을 찍고 나면 곧바로 깨뜨렸다. 거대한 냉동고에 보관한다거나 아니면 녹을 때까지 방치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제거해 버렸다. 물론 처음에는 깨뜨리기가 아까워서 보관도 했다. 보관한 얼음 조각품을 몇 날 며칠이고 감상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지서우는 아파트 단지에 있는 놀이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놀이터 구석에는 얼음으로 변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지서우는 단 한 번도 살아 있는 걸 얼린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날 체육관에서 사람들을 얼리기 전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풀이나 죽은 동물도 얼린 적이 없었다. 그런 걸 얼리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체육관에서 사람들을 얼리고 난 뒤 지서우는 변했다. 사물을 얼리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렇더라도 살아 있는 걸 얼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명이 없는 것들만 얼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신이 얼린 것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묘한 결핍감을 느꼈다. 그게 뭔지는 알지 못했다. 사물을 얼렸을 때는 마음이 차분해지고 가슴이 벅차오르고 오르가슴도 느꼈지만, 그것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자신은 예술가일 뿐 조물주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러다 놀이터에서 고양이를 얼린 것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결핍감이 해소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무서웠다. 이 공포는 뭐지? 하고 중얼거렸지만, 지서우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느끼는 공포가 뭔지 알고 있었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살아 있는 걸 얼렸을 때 비로소 모든 게 완벽해진다.
  그래서 무서웠다. 어느 날 학과 교수가 얼음으로 변해 있을지도 모를까 봐 무서웠다. 체육학과 학생 부모가 얼음으로 변해 있을까 봐 무서웠다. 큐레이터가 얼음으로 변해 있을까 봐 무서웠다.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지서우는 사물을 얼리고 나서 바로 사진으로 찍은 뒤, 그 조각품을 깨뜨렸다.
  조각품 자체를 감상하지 않았다. 대신 그걸 찍은 사진을 감상했다. 다행히 사진을 감상하고 나서부터는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놀이터로 뛰쳐나가는 일은 없었다. 물론 결핍감은 느꼈지만, 이겨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늘은 지서우의 열한 번째 얼음전 마지막 날이었다.
  지서우는 갤러리 문 닫는 시간 한 시간 전에 와서 자신의 작품을 둘러보고 있었다.
  갤러리에는 여자 관람객 한 명이 있었지만, 지서우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지는 않았다. 지서우가 시선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때 갤러리 스태프 중 한 명이 이층에서 내려왔다.
  “어, 작가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습니다. 그동안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에요. 작가님 작품 보고 느낀 게 많았어요. 공부도 되고 좋았어요. 큐레이터 언니 부를까요?”
  “아니에요. 저 오는 거 알고 있으니까, 곧 내려올 겁니다. 일부러 부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매번 이렇게 전시 마지막 날 오신다더니 정말이시네요. 진짜로 오늘 저녁은 작가님이 쏘시는 거예요?”
  스태프가 활짝 웃으면서 물었다.
  “네, 제가 쏩니다. 그러니까 이따가 고기집 가서 많이 드셔야 됩니다.”
  지서우도 함께 웃어주었다.
  “네, 많이 먹을게요. 안 그래도 큐레이터 언니가 점심도 안 사줬거든요. 굶겼어요. 이따 저녁에 작가님이 고기 쏠 테니까, 그때 왕창 먹으라고요.”
  “잘 하셨어요.”
  “아, 그럼 작가님, 여기 잠깐 계세요. 저 이층 올라가서 처리할 게 있거든요. 금방 끝나요. 저 오기 전에 큐레이터 언니랑 둘이 나가시면 안 돼요.”
  “네, 알겠습니다. 천천히 일 마무리하고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스태프는 지서우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다시 이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올라가는 소리가 우당탕탕 요란했다. 덕분에 지서우는 혼자 피식 웃었다.
  여자 관람객은 여전히 갤러리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지서우는 관람객을 피해 한쪽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 멋진 한옥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세월 빛에 바래 거의 회색에 가까워진 기와가 근사해 보였다.
  저 집은 지은 지 얼마나 됐을까. 얼리고 싶다.
  혼자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렸다. 지서우는 한옥을 바라보면서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안녕하세요. 지서우 작가님 맞으시죠?”
  지서우는 얼른 표정을 바꾼 채 몸을 돌렸다.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낯선 사람과 대화 나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지서우로서는 지금 이 순간이 매우 불편했다. 빨리 큐레이터든 스태프든 내려와 주기만을 바랐다.
  “예술가 분들이 의외로 말씀이 별로 없으시더라고요. 제가 괜히 아는 체를 했나 봐요. 작가님 난처하시게 말이에요. 저는 꼭 행동에 옮기고 나서야 후회를 한다니까요.”
  “아닙니다. 잠시 창밖에 보이는 한옥 생각을 좀 하느라고요. 이곳 갤러리 건물하고 차이가 많이 나서요. 오래 된 한옥과 현대식 건물이 이웃해 있다는 게 참 신기해서요.”
  “이 동네 특징이기도 하죠. 개성이 넘쳐요. 한옥을 고집하는 것도 개성이고, 미래 세계에나 어울릴 법한 건물을 짓는 것도 개성이고요. 그리고 그게 한 동네에 있다는 것도 이곳만의 개성이고요. 그러고 보면 작가님하고 이 동네하고 잘 어울리는 부분이 있네요.”
  여자의 말에 지서우는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얼음 조각품만 고집하는 작가. 조각품이 아니라 사진만 고집하는 작가. 그런 의미이리라. 수없이 들어온 말이라, 지서우로서는 오히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침묵해도 상대방은 곧 다음 말을 꺼낼 것이다. 왜 얼음 조각품만 고집하세요? 왜 조각품은 전시를 안 하세요?
  하지만 여자는 그 뻔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말씀 드리는 거 실례가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아직 쌀쌀해질 때도 안 됐는데, 이곳에 있으니까 좀 춥네요. 얼음 조각품을 찍은 사진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좀 추워요. 사진 속 조각품들이 너무 사실적이라서 그런 걸까요? 작가님은 안 추우세요?”
  “하하하, 네, 저는 뭐 춥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간혹 제 작품 구경하신 분들이 그런 말씀은 하시더라고요. 한여름인데도 제 작품 보고 있으면 왠지 춥다고요. 하하하.”
  전혀 실례되는 질문이 아니기에 지서우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저 조각품들이요, 작가님이 조각을 한 게 아니라, 직접 얼리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얼음으로 자전거를 조각한 게 아니라, 자전거 자체를 얼리신 거 아니에요?”
  실례되는 질문이라는 게 이거였나.
  지서우는 여자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당황스러웠다. 
  “뭐, 뭐라고 하셨죠?”
  그냥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웃어넘기면 그만이었다. 지서우로서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황해서 여자에게 되묻고 말았다.
  웃은 건 오히려 여자 쪽이었다.
  “어머, 역시 좀 실례되는 질문이었나 봐요. 제가 좀 무례했죠? 호호호. 죄송해요. 작가님은 사진뿐만 아니라 조각 실력도 굉장하셔서요. 실제로 작품에서 한기가 느껴질 정도잖아요. 그래서 그냥 농담 삼아서, 물론 조금은 작가님을 놀려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꺼낸 말이었어요. 호호호.”
  여자의 그런 말에도 지서우는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 네, 그러셨군요. 저는 또 정말로 그렇게 오해라도 하신 줄 알았습니다.”
  작품에서 한기가 느껴지는 게 아니라, 여자에게서 한기가 느껴졌다. 지서우는 몸을 살짝 떨면서 다시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이제 그만 자신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제스처였다.
  하지만 여자는 지서우의 바람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저쪽에 있는 인형 조각품 사진이요, 사실 저 인형 작품 때문에 그런 농담을 한 거예요. 혹시 작가님도 저 인형 사셨어요?”
  지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시선은 창가로 향한 채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왠지 그러셨을 거 같았어요. 저도 저 인형 하나 갖고 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서요. 인형도 유명하고, 값도 아주 비싸잖아요. 물론 비싼 이유가 있죠. 작가 분 혼자 전부 직접 손으로 만드시니까요. 게다가 인형이지만 사람과 진짜 똑같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집에 있는 인형 보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니까요. 웬 낯선 사람이 서 있나 싶어서 말이에요. 호호호.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요, 저 인형 제작하시는 작가님 특징이 있으시잖아요. 작품 완성되면 항상 왼쪽 발등에 아주 작게 숫자를 새기시잖아요. 일종의 일련번호 같은 거요. 이 인형은 자기가 몇 번째로 만든 인형이다, 하는 걸 숫자로 새겨놓으시잖아요. 제 거에는 45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거든요. 그러니까 작가님이 마흔다섯 번째로 만드신 인형이라는 뜻이잖아요. 지서우 작가님 사진은 보니까 인형 왼쪽 발등에 48이라고 새겨져 있더라고요. 앗, 그러고 보니까 지서우 작가님보다 제가 저 인형을 먼저 샀네요. 호호호. 아무튼 그래서 직접 얼리신 거 아니냐는 농담 같지 않은 무례한 질문을 드렸던 거예요. 어쩜 잘 보이지도 않는 일련번호까지 조각을 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 사진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통 꼼꼼하지 않고서는 저런 부분까지 신경 쓰기 쉽지 않잖아요. 아마 다른 사람이 저 인형을 얼음으로 조각했다면 저렇게 일련번호까지 신경 쓰지는 못했을 거예요.” 
  여자의 말을 듣고 나서 지서우는 조금 기분이 가라앉았다. 자신이 쓸데없이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게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냥 우연히 보게 된 겁니다. 저 작가 분이 인형에 일련번호를 새긴다는 건 몰랐거든요. 그래서 이 숫자는 뭘까,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일단 똑같이 조각을 해야겠기에 숫자도 새기기는 했습니다만, 그 숫자가 그런 의미였군요. 덕분에 몰랐던 걸 알게 됐습니다.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그려면서 지서우는 여자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지서우의 행동에 여자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그리고 지서우 역시 따라 웃었다.
  먼저 웃음을 그친 쪽은 여자였다. 언제 웃었나 싶게 표정이 더없이 차가웠다.
  “거짓말입니다.”
  말투도 차가웠다.
  지서우는 여자의 말투 때문에 다시 한기를 느꼈다.
  “뭐, 뭐라고 하셨죠?”
  지서우는 또 한번 여자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자가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정말로 몰라서였다.
  “거짓말이라고요. 저 인형에 일련번호 같은 건 없습니다. 물론 비싼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작가가 수작업으로 만든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 정도는 지서우 작가님도 알고 계시겠지요. 하지만 일련번호 따위는 없습니다. 저 작가는 자기 작품에 그런 걸 새기지 않습니다. 제가 지어낸 말입니다.”
  지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지금 여자에게 무언가 말려들었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연히 작가님이 조각한 작품에도 숫자 같은 건 없습니다. 48이라는 숫자는 조각품, 아니 사진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서우는 여자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이 시간에 갤러리에 온 이유가 있었나 봅니다. 제가 전시회 마지막 날이면 항상 한 시간 전에 갤러리에 온다는 걸 알고 있었나 봅니다. 묻겠습니다. 당신, 정체가 뭐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이제 곧 스태프든 큐레이터든 내려올 겁니다. 그 전에 말씀해 주시는 게 좋습니다. 발소리가 들리면, 당신은 죽습니다.”
  지서우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다. 누구라도 지서우의 이 표정 앞에서는 몸이 얼음처럼 굳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달랐다. 자신이 오히려 지서우를 얼릴 기세였다. 감히 지서우 앞에서 말이다.
  “벌써 10년도 넘었네요. 지서우 작가님이, 아니, 그때는 지서우가 아니었지요. 김명균이었지요. 아무튼 작가님이 학교를 그만 둔 게 10년도 넘었네요. 작가님께서 학교를 그만 둘 즈음, 뭔가 사건이 일어났었지요. 장소는 체육관이었습니다. 작가님과 작가님의 유일한 친구 김승현, 그리고 체육학과 학생과 능력자인 세쌍둥이 킬러. 그렇게 여섯 명이 체육관에 있었습니다. 전 날 사소한 다툼 때문에 한 여학생이 죽었습니다. 체육학과 학생 짓이었죠. 체육학과 학생은 그 여학생을 죽이면서 재미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작가님의 친구, 그러니까 김승현이라는 자가 능력자라는 사실을요. 그래서 세쌍둥이 킬러를 고용했습니다. 김승현을 죽여달라고요. 당시에 세쌍둥이 킬러들은 악명 높은 자들이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능력자들을 사냥하고 다녔습니다. 그건 곧 세쌍둥이 킬러들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뜻하기도 합니다. 그들 때문에 능력을 숨기고 사는 자들도 많았으니까요. 세쌍둥이 킬러의 타깃이 될까 봐서요. 하지만 그날은 달랐습니다. 세쌍둥이 킬러들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체육학과 학생도 죽고, 작가님의 친구인 김승현도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건 작가님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작가님께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죠. 친구인 김승현이 실은 능력자였다고요. 왼팔을 칼로 변신시키는 능력자였다고요. 작가님의 그 말을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물론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작가님의 친구인 김승현은 왼팔을 칼로 변신한 상태로 체육관까지 갔습니다. 그 모습을 많은 학생들이 보았고요. 특히 같은 과 여학생 중 한 명은 김승현이 자기 앞에서 왼팔을 칼로 변신시키는 모습을 보았다는 증언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작가님은 이런 얘기도 하셨습니다. 친구인 김승현의 능력이 그것뿐인 줄 알았다고요. 그 능력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다고요. 실제로 세쌍둥이 킬러들과 싸울 때도 친구인 김승현은 줄곧 왼팔만을 가지고 상대를 했다고 했습니다. 수세에 몰리면서도 칼로 변한 왼팔만으로 세쌍둥이 킬러들과 싸웠다고 했습니다. 싸우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나를 죽이더라도 저 친구는 그냥 보내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작가님은 죽이지 말아달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세쌍둥이 킬러들은 그러겠노라고 했습니다. 본래 세쌍둥이 킬러들은 일반인은 죽이지 않으니까요. 그 말을 작가님의 친구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친구인 김승현은 세쌍둥이 킬러들의 공격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습니다. 그 때문에 일어설 수조차 없게 됩니다. 그때 체육학과 학생이 돌연 태도를 바꿉니다. 세쌍둥이 킬러들에게 작가님도 죽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앞서도 얘기했듯 세쌍둥이 킬러들은 절대 일반인은 죽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체육학과 학생의 말을 무시해 버립니다. 화가 난 체육학과 학생이 직접 작가님을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하지만 세쌍둥이 킬러들은 그 체육학과 학생을 말리지 않습니다. 가만 놔둡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작가님한테 달려들던 체육학과 학생이 갑자기 얼음으로 변해버린 겁니다. 작가님 사진 속 조각품들처럼 말입니다. 그 모습에 세쌍둥이 킬러들이 겁을 먹습니다.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된 겁니다. 그래서 서둘러 체육관에서 도망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친구인 김승현이 그들을 불러세웁니다. ‘나는 지금까지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 이 능력을 사용한 적이 없다. 오늘 처음 사용했고, 오늘 처음 사람을 죽였다. 나는 너희들한테 부탁했다. 내 친구는 그냥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저 녀석을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친구가 죽을 뻔했다.’ 그 말을 들은 세쌍둥이 킬러들은 이미 자신들의 운명을 예감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친구인 김승현의 말을 듣지도 않고 무작정 달려듭니다. 자신들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끌어올려서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셋 다 얼음으로 변합니다. 체육학과 학생처럼 말입니다. 친구인 김승현은 작가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명균이 네가 평생 괴로운 기억을 짊어지게 됐어. 지워지지 않겠지. 미안해.’ 그러면서 숨을 거둡니다. 이게 작가님이 사람들한테 한 얘기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작가님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체육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충격으로 작가님이 자퇴한 걸로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여자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잠시 갤러리에 걸린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지서우는 그런 여자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이제는 얼릴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아니, 얼려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낯이 익은 얼굴이야. 훗, 승현이만 쓸데없이 죽은 셈이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자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제 존댓말은 그만 할까. 아무튼 사람들은 지서우, 아니 명균이 네 말을 그대로 믿었지. 모든 사람들이 다 네 말을 그대로 믿었어. 그만큼 너는 나약한 아이로 소문이 나 있었거든. 나약하고 소심한 아이. 다른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 그러니 그게 다 실은 네 짓이라고 누가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어! 나조차도 처음에는 네 말을 믿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일종의 직업병이 발동을 한 거지. 그래서 나름대로 조사를 좀 해봤어. 역시 내 추측이 맞더라고. 그 날 체육관에서 벌어진 사건. 그러니까 체육학과 학생과 세쌍둥이 킬러가 얼음으로 변해버린 사건. 그건 승현이가 한 게 아니었어. 승현이에게는 애초부터 그런 능력이 없었어. 오직 왼팔을 변신시키는 능력만 갖고 있었지. 그러니까 그들을 얼린 건 승현이가 아니야. 바로 명균이 너였지. 승현이의 복수를 위해서 명균이 네가 그들을 얼린 거야. 너는 사물을 얼릴 수 있어. 능력자인 거지. 저 사진 속 조각품들도 실은 전부 네가 얼린 것들이고. 조각한 게 아니야. 직접 얼린 거지.”
  여자는 ‘어때? 내 말이 맞지?’ 하고 묻듯이 지서우를 쳐다보았다.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지서우는 여자의 눈을 마주보다가 피식 웃었다. 능력을 들켜서가 아니라 반가워서였다. 여자가 반가워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네가 죽은 줄 알았는데, 그래서 승현이도 체육관에 갔던 거고. 그런데 이게 뭐야. 넌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구나. 괜히 승현이만 억울하게 죽은 꼴이 됐어. 뭐, 그렇다고 화는 나지 않아. 그만큼 세월이 흘렀으니까. 그리고 화내 봐야 승현이가 다시 살아돌아 오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궁금하기는 하다. 넌 어떻게 살아난 거지?”
  “풋, 네가 그런 질문하니까 웃긴다. 넌 어떻게 사물을 얼리는데?”
  “웃기는 질문이기는 하다. 그래도 정말 감쪽같이 속였구나. 그런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말이야. 죽지 않는 능력이라, 이거 이거 엄청 부러운데.”
  “변명같이 들리겠지만, 실은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나한테 그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어. 알았다면 애초에 그 날 체육학과 학생한테 붙잡혔을 때 승현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밤에 녀석이 집에 찾아와서 나를 죽일 때 승현이가 복수해 줄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을 거고. 승현이는 능력자라고, 분명히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 막 저주를 퍼부으면서 죽었어. 그렇게 죽기는 죽었는데, 얼마 있다가 다시 눈이 떠지더라.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잖아. 이미 녀석은 돌아간 상태였거든. 거실로 나갔지. 당연히 아빠하고 엄마는 내 모습 보고 바로 기절하셨고. 귀신인 줄 알았대.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뭔지 알아? 그날 내가 녀석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더라고. 며칠 뒤에 학교에 갔더니 친구가 그러더라. 체육관에서 엄청난 일이 있었다고 말이야. 명균이 너는 이미 자퇴한 상태였고. 웃기지 않아?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야. 체육학과 놈은 자기가 저지른 일을 부모한테 말하기도 전이 이미 얼음으로 변해버렸지, 명균이 너는 자퇴했지, 체육학과 놈하고 같이 왔던 녀석들은 사람 죽이는 게 직업이라 당연히 아무한테도 말을 안 했고. 물론 나중에 복수하려고 수소문해 봤더니, 이미 나 죽인 뒤 1년 조금 지나서 다들 죽었더라고. 사람 죽이는 게 직업이면, 반대로 그 놈들의 목숨을 노리를 자들도 많았겠지. 그래서 어쨌든 명균이 너까지 조용히 지내주는 바람에 나는 학교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어. 고마워.”
  여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제법 큰소리로 웃었다.        
  “그런 거였나! 뭔가 좀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드네. 그래도 어쨌든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다행이긴 한데, 갑자기 이렇게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아, 그 전에 말이야, 도대체 내 능력은 어떻게 알아낸 거야? 나 역시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지서우의 물음에 여자는 갤러리 주변을 살피면서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비밀 얘기라도 하려는 분위기였다.
  “실은 말이지, 조사 같은 건 해보지도 않았어. 말 그대로 그냥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혹시나 너도 나 같은 능력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얼음을 조각한 게 아니라, 실제로 얼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순전히 추측일 뿐이었지. 그런데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그 추측을 증명할 방법이 없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거야. 너한테 직접 듣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넌 일종의 내 유도 심문에 말려든 거고. 통쾌했어. 짜릿했다고.”
  “뭐야, 또 맥이 빠지네. 그래도 인정은 해줘야겠다. 대단해. 네 능력도 대단하고, 내 능력을 알아낸 것도 대단하다. 진심이야. 그래도 역시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그렇게 유도 심문까지 해서 내 능력을 알아낸 이유가 뭐야? 그냥 단순히 알고 싶었던 것뿐이야? 설마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니겠지? 사람들한테 내 능력을 얘기한다든가 하는 거 말이야. 실은 지서우라는 작가가 찍은 저 사진 속 조각품들은 조각한 게 아니라 실제로 사물을 얼린 거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럼 나 역시 네 능력을 사람들한테 말할지도 몰라.”
  “풋, 당연히 아니지. 사람들한테 그런 얘기 해봤자 나한테 득될 건 하나도 없잖아.”
  “그럼 왜 알고 싶어 했던 건데?”
  “내 추측이 맞다면, 동료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려고. 나와 같이 일해 줄 수 없냐고 부탁하려고.”
  “동료! 흠, 그렇다면 그 전에 네가 하는 일부터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 그런가! 미안. 자, 명함.”
  지서우는 건네받은 명함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월간 히어로. 들어본 적 있는 잡지사였다. 가전제품을 소개하듯 일반 사람들에게 능력자들을 소개하는 잡지. 그리고 기자 오지아.
  “잡지사 기자님이시네. 사진 전공했으면서 웬 기자냐! 사진기자라면 또 모를까! 그리고 네 이름, 혹시 희영이 아니었던가!”
  “사진 쪽으로는 별로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됐어. 그리고 나도 졸업하고 나서 이름 바꿨고. 아, 그러니까 사진 잘 찍는 명균이 네가 사진기자 일 좀 해줘. 나랑 한 팀이 돼서 같이 일하자.”
  “잡지사 사진기자라. 그럼 나더러 프리랜서 생활을 접으라는 얘긴데, 음, 당장 결정을 해야 되나?”
  “아니, 생각할 시간은 줄게. 이번 주 내로 연락 줘. 그리고 참고로 얘기하는 건데, 잡지사 사람들은 내가 능력자라는 거 몰라. 내 능력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어. 그리고 명균이, 참 너 명균이라는 이름 이제 안 쓰지. 서우라고 부를게. 지서우. 서우 네 능력도 회사 사람들한테는 숨길 거야. 이유는 나중에 차차 알려줄게.”
  그러면서 오지아는 지서우를 향해 살짝 윙크를 했다. 그리고 갤러리 이층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지아야 잠깐, 궁금한 게 더 있어. 나더러 동료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니? 단지 내가 능력자라서?”
  오지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지서우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그때 이층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연락 줘. 그때 얘기해 줄게. 간다, 아이스맨!”
  오지아는 다시 한번 손을 흔들며 갤러리를 나갔다.
  “아이스맨! 아이스맨이 누구야! 나야! 내가 아이스맨인가!”
  지서우는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피식 웃었다.
  “아이스맨이라뇨? 그게 뭔데요?”
  이층에서 내려온 큐레이터가 갤러리 안을 둘러보며 지서우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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