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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망재 홍등의 골목

2013.06.30 23:2106.30

홍등의 골목


 


나는 내가 태어난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렸을 때의 일들은 전생처럼 멀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저,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내게는 고정된 양육자가 없었다는 것. 그때 남겨진 화상이나 영상 데이터들에서, 나를 안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은 늘 굳어 있었다는 것. 그 뿐이었다. 수없이 입양되고 또 파양당하는 불운한 아이들처럼, 나 역시도 그랬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을 볼 때 마다 바다를 꿈꾸었다. 수많은 신화 속에서, 어머니는 바다였다. 나의 어머니, 나의 바다. 어렸던 내 어머니는, 내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인공자궁에서 새끼손가락만한 세포덩어리로 싹이 터 생물의 모든 진화단계를 닮은 성숙을 거쳐 태어나는 동안, 나를 그 몸에 직접 품었다고 했다. 잠시 나를 양육하던 이들 중 하나가, 그의 고향인 프랑스에서는 어머니와 바다가 모두 라 메르”, 같은 발음이라고 말해주었던 적이 있었다. 바다. 어렸던 나는 다른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에 달려가 안길 때 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바다를 꿈꾸었다. 내가 고향을 떠나, 낯설고 획이 많은 붉고 노란 글자들과, 한 골목 가득 붉고 둥근 종이 등이 잿빛 하늘 아래 선명한 이 바닷가 마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가 처음 가리켰던 글자는 바다 해()”였다. 그 안에 어머니()가 안겨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날이 다 지나기 전에 알았다. 바다는 어머니였다. 이 곳에서, 온통 검은 머리카락과 황토빛 살결을 지닌 진화 1세대의 아이들이 잿빛 하늘과 낡은 골목길 사이사이 혼자 사금파리 조각으로 바닥에 선을 긋고 놀다가, 어느 순간 어머니를 향해 달려가 그 품에 안기는 모습을 볼 때 마다, 나는 나를 품었고 또 버리고 떠났던 어떤 바다를 생각했다.

언니.”

내가, 태평양에서 가장 큰 해양연구함인 자산함을 동경하게 된 것도 아마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 거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바다를 그리워했지만, 이곳에 오면서 그리움은 더 커졌다. 닿지 않을 세계. 내가 닿아야만 하는 어떤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아직 내 것이 아닌, 내가 갖고싶은 세계, 그 세계는, 아침 동이 트면 눈부신 은백색으로 빛났고, 그 외의 시간에는 하늘을 그대로 끌어안은 듯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난 바다에 갈 거야.”

끝도 없는 망망대해. 누구도 그 바닥을 볼 수 없을 만큼 가없는 깊이. 대기권 밖의 무한한 우주가 슈슬리사의 것이었다면, 이 바다만은 아직 슈슬리사도 끝을 보지 못한 곳이었다. 나는 아직도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 바다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어머니처럼 느껴지곤 했다. 삼국지 벽화가 그려진 중국인 거리를 따라 비탈을 올라가, 공자 상 옆에 쪼그리고 앉으면 잿빛과 황토빛 가득한 바다가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였다. 대형 화물선에 컨테이너들을 차곡차곡 싣는 모습을 보며, 또다시 양육자에게 거부당했던 나는 내가 태어날 때 나를 받아주셨던 신부님을 대신하여 흔쾌히 나를 받아주신 제준이냐시오 신부님과, 그분의 조카인 윤진 언니 손에서 얌전히 자랐다.

맨날 보는 바다, 질리지도 않냐.”

안 질려. 백 번을 봐도 안 질려.”

그래, 그래. 맨날 바다만 보고 살아라. 됐고, 그 사람들 또 찾아왔어.”

방바닥에 등을 깔고 뒹굴며 바다를 생각하던 내 평화로운 오후에, 두꺼운 유리를 발로 밟은 것 같은 균열이 났다.

관심 없다니까.”

돌아가란다고 그 사람들이 말을 듣디? 경찰을 불러도 난리, 안 불러도 난리.”

, 왜들 그런대.”

너보고 구세주라잖아.”

집에 공무원이 있는데 민원은 받아주지도 않고.”

주말이잖니.”

어우.”

나는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진 언니로서도 어떻게 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을 거다. 저런 정신나간 사람들은 아주 손톱만한 핑계만 있어도 자기들이 환대받기에는 충분하다고 착각들을 하니까. 어떻게 하면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나는 아마도 영원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냥 뛰어나가려다, 주방에 들러 윤진 언니가 김치를 담근다고 새로 사 놓은 굵은 소금봉지를 기예 찾아내어 들고 나갔다.

잡귀같은 것들.”

치기어린 마음, 사춘기, 어떤 이들은 빈정거림을 담아 중2병이라고도 부르는 그런 감정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절박한 분노를 담아서, 나는 씩씩거리며 대문을 열었다. 나를 맞이하러 왔다는, 더러는 정말로 무슨 구세주를 영접하듯 머리를 조아리고 땅바닥에 이마를 비빌 기세인 중늙은이들이 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염치들도 없지. 나는 대문을 열자마자, 굵은 소금 한 줌을 쥐어 늙은이들의 머리에 태질을 하듯 집어 뿌렸다.

천년왕국을 예비하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다시 이 땅에 독생자를 보내셨나니.”

그 와중에, 머리가 돌아버린 듯한, 검은 한복을 입고 손에 성경을 든 여자가 나를 향해 굽신거렸다. 구역질이 났다.

성스러운 처녀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태어난 구세주가 이 땅에 오셨도다.”

, 시끄러워요. 가라고요! 동네 부끄럽게 여기서들 이러지 말고!”

이사나 님.”

뻔뻔한 것도 분수가 있지.”

나는 목청껏 소리쳤다. 이런 모습을 신부님이 보시면 싫어하겠지만, 신부님 아니라 신부님의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이 굽어보셔도, 그 아드님인 예수님이 이 자리에 나타나셔도, 일단은 채찍질을 해서 내쫓아버리고 나서 다음 일을 생각하고 싶으실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뻔뻔한 자들. 언제나 그랬다고 들었다. 나는 소금을 한 줌 더 쥐어, 성경을 든 여자의 얼굴에 뿌리며 으르렁거렸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예전에는 혼자만 잘난 척 다른 종교들 다 무시하고 믿쑵니다를 외쳐대다가, 슈슬리사가 내려온 이후에는 바로 자기 신앙이고 뭐고 다 내던진 게 당신들 아니었나요? 그래놓고는, 애들이 다들 인공자궁에서 태어나는 세상에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애가 하나 있다는 이야기 듣고 와서는 구세주? 구세주라고? 제발 발 닦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요!”

아직 그런 큰 소임을 감당하시기에는 이르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내가 태어난 날에는, 동쪽 하늘에 큰 별이 뜨지도 않았고, 동방박사 세 사람이 보물을 들고 찾아오지도 않았어요.”

나는 있는 한껏 빈정거리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내가 태어난 날에는, 거기 봉사활동 하러 가신 신부님이 크리스마스 날 갑자기 애를 받느라 큰 일이셨다고만 들었어요. 그 다음엔 어땠는지 알기나 해요? 모르면 닥치고라도 있어요. 구세주 좋아하네. 구세주라고? 댁들이 구세주를 알아볼 만큼 그렇게 대단들 하신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잘났으면 그럼 왜 그때 알은 체 안 했던 거예요? 내가 어떻게 살았는 줄 어떻게 알고.”

윤진 언니가 뭐라고 잔소리야 하겠지만, 나는 남은 굵은 소금을 탈탈 털어 그들의 낯짝에 집어던졌다. 그래도 속이 시원해지진 않았다. 정신 나간 작자들 같으니.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이 왜 저런대. 진화 1세대는 아닌 것을 보니 멀쩡히 엄마 뱃속에서 아홉 달 잘 채워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엄마 치마폭에 폭 감겨서 자랐을 사람들이.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인간이 저렇게까지 멍청하고 편협해질 수 있는 걸까?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에는 “God's in his Heaven, All's right with the world.”라는 말이 나온다. 하느님이 천국에 계시니 세상은 평화롭도다. 브라우닝이 그 시를 썼을 때만 해도 그 시는 문자 그대로의 하느님과 천국을 꿈꾸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런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정상인 시대다. 시내에 나가면 푸른 빛 피부의 슈슬리사들이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레 섞여 거리를 누비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들 이 세상의 어디에서도 슈슬리사들의 우주선 하나쯤은 보이기 마련인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신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누군가 신이, 빛이 있으라고 한 마디 한 것만으로도 세상이 생겨나고, 진흙을 집어 던진 것 만으로도 생명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과학으로 세상의 신비를 벗겨내기 이전, 사람들이 어떻게든 자신들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논리를 쌓아 만들어 낸 이야기일 테니까. 그 무지몽매한 시대의 동화에 아직도 현혹되어, 언제까지나 게으르고 순진하게 살아가며 남들에게 이런 민폐를 끼치고 살 사람들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나는, 대문을 닫고 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다. 문 밖에서 흐느끼는 듯 한 찬송가 소리가 났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답답하고 막막하도록 깊은 회색빛 하늘 아래, 낡아가는 성당의 십자가가 눈에 비쳤다. 나는 귀를 막은 채, 차가운 철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내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들을 읽을 무렵 신부님은 성당의 문은 어떤 이를 위해서라도 열려 있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이 성당의 문은, 저 악머구리떼들 때문에 미사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닫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사제관과 성당 사이에 문을 하나 더 달아야 할 것 같은데. 눈을 깜빡이는데, 옆 골목 쪽으로 사다리 같은 게 삐죽 올라온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보랏빛에 가까운 푸른 얼굴이 삐죽, 담벼락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이사나.”

“......거기서 뭐 하세요?”

만나러 왔죠, 소금 안 뿌려요?”

다 뿌려서 없어요.”

빈 봉지를 거꾸로 털어보였다. 나의 감독관인 그는 빙긋 웃으며 담을 넘었다.

.”

넘어오고 나서, 사다리를 밖에 그냥 두었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 것은 칭찬해 주고 싶지 않지만.

사다리 어떡하죠? 저기 두면 도둑 들어와요.”

문 열어드릴 테니 나가서 가져오세요.”

나도 저 사람들 무서워요.”

그럼 제가 가져올까요?”

“......아뇨.”

나의 감독관, 시셸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천천히 대문을 열었다. 슈슬리사가 모습을 드러내자, 문 앞에 모여있던 이들이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시끄러워졌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같은 인간의 말은 듣지 않는 저들이, 슈슬리사의 말에는 뭔가 사소한 불이익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그런지, 바로바로 명령에 따라 주기는 하니까. 나는 바로 그, 나와 같은 종인 지구의 인간들이 흔히 보이는 그 익숙한 굴종의 태도가 싫었다. 슈슬리사의 보호를 받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닐 지도 모른다고 가끔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싫은 것은 싫은 것이었다. 잠시 후, 시셸은 사다리를 끌고 돌아왔고, 나는 그의 등 뒤에서 겁먹은 짐승들처럼 불안한 눈빛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듯 바라보았다.

여전히 사납네요, 이사나.”

시셸은 웃었다. 그는 꽤 잘 생겼고, 자상하고 다정했으며, 내게는 마치 친오빠라도 된 듯 친근하게 굴었다. 그의 목덜미에서는 늘 꽃내같은 비누향기가 났다. 한참 예민할 나이라고 부르는 시기, 사춘기로 분류되곤 하는 나이인데, 아무리 종이 다르다고 해도 이렇게 잘 생긴 슈슬리샤를 내 감독관으로 배정한 것이 걱정스럽다고 신부님께서는 농담처럼 말씀하시곤 했지만.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었다. 그는 괜찮은 오빠 노릇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취향은 아니었으니까.

멍청하게, 한가한 이야기들이나 하고 있잖아요.”

여긴 성당이에요. 저 사람들이 믿는 신과 같은 신을 믿는 곳이 아닌가요?”

똑같은 물도요,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댔어요.”

나는 그를 따라가며 종알거렸다.

저 사람들은 그냥 정신병자예요, 나쁘고 뭐고 떠나서 다들 미쳤다고요. 미쳤으면 곱게 미치기나 할 것이지, 이젠 매일매일 찾아와서 저 소란이라고요. 시셸, 슈슬리사들은 그렇게 복지정책을 강조하면서 저 사람들 좀 어떻게 병원에 못 넣어줘요?”

이사나, 신앙의 자유라는 것도 있어요. 존중해야죠.”

저 사람들의 신앙의 자유가 지금 제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니까요.”

하루이틀 일이어야 그냥 신앙의 자유겠거니 하고 웃고 넘어가지, 매일매일 찾아와서 저 난리를 치는데다, 때로는 학교까지 졸졸 따라오는데야 할 말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정상적인 학교생활과는 거리가 먼데, 저런 광신도들까지 들러붙었으니 학교생활이 평화로울 리가 없다. 학교에서 교문 밖으로 내쫓는 것도 한두번이지, 이런 소란이 계속되자, 학교에서는 내가 학교에 나오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어디서들 그런 말을 들었는지, 선생이건 동급생들이건 내가 진화자궁이 아닌 사람 배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수군거리는 판에, 이젠 얼치기 구세주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으니.

학교에 갈 맛이 나야 말이죠.”

적응이 안 된다는 건가요.”

.”

곤란한데, 내가 지금 여기 오는 것도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거라서요. 뭔가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네요.”

생각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가요.”

시셸은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마구 헤집었다. 보랏빛 손가락. 그의 손가락은 마치 오랑캐꽃같은 보랏빛이었다. 오랑캐, 오랑캐꽃, 오랑캐꽃같은 슈슬리사. 나는 슈슬리사의 수컷도 남자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지, 가끔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시셸은 틀림없이 곤란한 얼굴을 하며 웃어보이겠지만.

, 이사나. 전에도 말했지만, 원한다면 학교에 안 가고도 공부는 계속할 수 있어요.”

나도 알아요.”

까짓거, 시셸의 말대로 그냥 학교를 그만둘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당신은 특별한걸요.”

하나도 안 웃겨요. 뭐가 특별해서.”

특별하다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남다르다고 해 두죠. 일단 태어난 과정이 좀 남다른 것은 분명하고, 그 때문에 내가 여기 와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관찰일기 쓰려고 와 있는 거잖아요.”

부정할 수 없어서 미안하긴 한데...... 그런 사정은 둘째치더라도, 보통 당신 나이 때는 특별해지고 싶어서 안간힘을 써요.”

여기서 뭘 어떻게 더 그래요. 남들 다들 인공자궁에서 태어날 때 혼자 엄마 뱃속에서 태어났다고 무슨 괴물 새끼같은 취급이나 받다가, 겨우 여기 정착해서 조용히 사나 했더니 매일매일 저 정신나간 광신도들에게 구세주 취급이나 당하고 사는데.”

번거로운 일이죠.”

번거로운 정도가 아니에요. 그렇게 좋으면 당신이 저 사람들 구세주 노릇좀 해주지 그래요.”

그럴 수 있다면 그래보고 싶네요.”

진심이에요, 그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놀고 먹으면서, 이게 신의 뜻이라고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평생은 못 살아도, 한 달쯤은 그래볼만 하죠.”

실망이에요, 시셸.”

나는 웃었다. 나는 나의 감시자이자 감독관이며, 나에 대해 꼬박꼬박 보고서를 적어 보내고 있을 이 슈슬리사를 친구처럼 좋아하고 가끔은 오빠처럼 생각했다. 인간과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있어 인간과의 우정이라는 게, 우리가 개나 고양이를 바라볼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일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나는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좀 더 내밀하고 친근한 어떤 감정일 것이라고 나는 막연히 생각했다. 시셸은 그런 것을 두고 낭만적이라고 놀렸지만, 나는 내가 시셸의, 혹은 슈슬리사들의 의도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내심 뿌듯했다.

내 이름은 이사나, 올해 열 다섯 살이 되었다.

내 나이에 나를 낳았다는 내 어머니를, 나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나는, 아버지도 진화자궁도 없이 그저 진화 1세대인 내 어머니의 태에서 자연 출산한 그 날부터 슈슬리사들의 관심과 감시를 받으며 자랐다. 내가 태어난 날이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이브였기에, 내가 태어난 곳이 하필이면 세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이었기에, 그리고 내가 정말로 아비없는 아이였기에. 진화 1세대를 만들어내며 벌어진 어떤 실수, 혹은 돌연변이로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며 만들어내는 주기와, 하필이면 내 출생지가 만들어낸 우연이 겹치며, 어떤 이들은 손가락질하는 나는 어떤 이들에게는 구세주의 재림으로 여겨졌다.

물론 둘 다 아니다.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알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지구를 떠나고 싶었다. 혹은 멀리 떠나 혼자서 조용히 살아가고 싶었다. 내 출생에 대해 알고 이해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학교에 가면 계속 그들의 시선과 손가락질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지만, 학교까지 안 다녔다간 나중에 성년이 된 이후에. 취직을 하건 무엇을 하건 한 번은 더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힘들어도, 그냥 몇 년이다. 어떻게든 참아버리는게 낫지. 나는, 입을 다문 채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현관 앞에 윤진 언니가 뜻밖이라는 듯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윤진 언니는 시셸을 보고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가, 안으로 들어오라며 뒤로 물러섰다. 시셸은 미소를 지었고, 윤진 언니도 소리없이 웃었다. 윤진 언니는 올해 서른 한 살, 진화자궁이 도입되기 전,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나 자란 마지막 세대였다.

  


  

바다 쪽부터 불그스레한 빛이 번지더니, 마침내 길 건너 제분공장 쪽의 하늘까지 붉게 물들도록, 시셸은 윤진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보호자들의 대화에, 나는 끼어들 수 없었다. 면담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나는 노을진 하늘빛이 잠시 윤진 언니의 뺨에 머물렀다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감정이 어떤 것인지 짐작은 갔다. 나보다도 어린 여자애들이 숨어서 킬킬거리는 그런 감정. 나는 그 감정이 어떤 결여에서 나온 것이라고 늘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결여에서 나오는 감정이라면, 아마도 시셸은 언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영영 알지 못할 거다. 나는 웅크린 채,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멀리서 구경하다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짬뽕 먹으러 갈까?”

무슨 짬뽕.”

짬뽕도 먹고, 너 좋아하는 바다도 보고 오고.”

시셸하고 저녁 먹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둘이 오붓하게 다녀오세요.”

넌 애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내게 핀잔을 주면서도, 윤진 언니는 그 말이 밖에 들릴까 걱정이었나보다. 나는 책을 덮고 느릿느릿 일어나 의자 뒤에 걸어놓은 바람막이를 집어들었다. 윤진 언니가 시셸과 함께 저녁 먹고 산책하고 싶다는데, 식객으로서 그 정도 비위는 맞춰 드려야지. 여튼 나는 윤진 언니를 좋아했고, 주에 한 번씩 나를 관리 감독한다는 명목으로 시셸도 마음에 들었으니까,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방해하진 않겠지만, 시셸이 언니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야 그야말로, 내 알 바가 아니지. 나는, 윤진 언니가 결국은 상처받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말이 통할 뿐, 종이 달랐다. 자연출산 마지막 세대인 윤진 언니는, 불과 한두 살 차이나는 진화자궁 1세대들이 자신을 진화가 덜 된 원시인 취급하는 것을 보고 상처를 받았다. 지성체란, 애초에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구분하고, 구별짓고, 사소한 우월함에 도취되어 상대를 무시하고. 슈슬리사라고 다를까. 나는 그들이 우리보다 나은 게 있다면, 적어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상대를 무시하거나 빈정거리거나 잘난 척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하고 가끔 생각했다. 그들 역시도, 우리를 진화시켜야 할 존재”, “더 성숙해져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나는, 그들의 눈에 윤진 언니가 어떻게 보일까, 시셸의 눈에 윤진 언니가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다가, 그러면 나는 어떨까 생각하고 웃었다. 웃음이 쓰디썼다. 나는, 진화 1세대들이 20대 후반, 30대 초반이 된 지금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태어나기 시작하는 진화 1세대의 자손, 그러니까 2세대인 동시에, 진화 1세대의 일탈인지 기적인지에 의해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난, 그러니까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였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그렇게 태어난 장소가 하필이면 예루살렘이었으며, 어른들에게 혼날까봐 집을 나와 숨어 지내다가 아이를 낳다 보니 하필 어디의 마굿간 비슷한 곳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슈슬리사가 이 땅에 내려오고도 서른 해가 더 지난 지금까지도 하느님이 흙으로 인간을 빚어 낙원에서 살게 하였는데, 그만 호기심에 선악과를 잘못 서리하는 바람에 인간이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는 헛소리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쫓겨다니기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구원자라고. 웃기고들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낙원에서 살아가는게 그렇게 좋다면, 다시 태어날 때는 저기 때 되면 밥 나오고 온도 습도 맞춰주는 가운데 먹고자고 먹고자고 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고뇌도 없을 돼지로 태어나서 잘 사육당하라고. 나는, 시셸과 함께 있을 때는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는 그 광신자들을 경멸하듯 바라보다가, 문득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그래도, 과해서 탈이지 이 땅에서 적어도 나를 무시하려들지 않는 지구인, 신부님과 윤진 언니를 빼면 그 광신도들 밖에 없기는 했다. 그게, 열 다섯 살 내 인생이 한없이 거지같을 수 밖에 없는 이유라면 이유겠지.

그렇지 않아도 어정쩡한 존재인데다, 이곳의 늙은이들은 아직도 피부색이 다르다고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길을 걷는데, 술 취한 영감이 나를 동남아라고 부르며 손가락질을 한 적도 있었다. 튀기년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도 그때였다. 이해할 수 없는 증오였지만, 내가 받았던 증오가, 언제인들 이해할 만 한 것이었나.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헤드셋을 펼쳐 귀에 걸었다. 음악을 듣지 않아도, 헤드셋을 쓰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 앞에서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말들을, 내 등뒤에서 지껄이는 소리가,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는 헤드셋에 둔탁하게 걸러지며 귀에 들어왔다. 이곳 차이나타운에서, 공자상을 지나 공원까지 이어진 계단을 단숨에 밟아 달려가, 물고기 비늘처럼 꿈틀거리며 빛나는 저 바다를 향해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나는 어디에 있으면 좋을까.

어디에 있어야 나는, 내 두 발이 땅을 단단히 딛는 것을 느껴 볼 수 있을까. 어디에 가도, 나는 내 두 발이 땅 위에서 반 뼘 위를 딛는 듯 불안하기만 했다. 그럴 나이라고, 그럴 때라고. 몸이 변화하고 마음도 함께 변화하는 때라고 그래서 늘 불안한거라고 학교에서는 말했지만, 누가 안다는 건가. 진화 1세대의 마음을 이전 세대가 몰랐듯이, 이후 세대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이게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성장통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사라지고 말 감각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 감각이 어쩌면 영영 내 발목에서 떠나지 않으리라고 종종 생각했다. 처음부터 늘 그랬다. 지구의 중력이 나를 붙잡아주지 않는 것 같은 허무한 감각. 내가 늦게 들어오면 걱정하시는 신부님과, 아침마다 출근 때문에 전쟁을 치르면서도 성장기에 아침 거르면 안된다고 꼭 내 몫으로 우유 한 잔씩을 식탁위에 따라 놓고 나가는 윤진 언니가 있는데도, 나는 늘, 혼자 붕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시셸은 어렸을 때, 양육자가 너무 자주 바뀐 것이 원인일거라고 말했지만. 누구를 탓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느끼고 싶었다. 내가 이 별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다는 어떤 인연을. 그 강력한 중력을.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 중력은 바로 내가 여기서 살아도 된다는 증명과도 같은 것일 텐데.

이사나.”

, 나는 젓가락을 들고, 멍한 표정으로 시셸과 윤진 언니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윤진 언니는, 짬뽕을 앞에 두고 빈 젓가락질만 하고 있는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내 얼굴을 주의깊게 쳐다보았다.

“......, 미안.”

미안이 아니라, 이야기 하나도 못 들었구나.”

괜찮아요, 다시 이야기하면 되니까요. 이사나, 조금 전 서 선생님께 말씀드렸는데, 당분간 제 친구 한 명이 성당에서 같이 지내게 될 거예요. 아니, 지냈으면 해요. 행성과학자인데, 지구의 바다에 흥미가 있어서 이 근처 대학에 교환교수로 와서 연구를 하기로 했다더군요. 다음 주 쯤 지구에 도착할 거예요.”

시셸의 친구? 슈슬리사요?”

종교시설인 성당에 종교와는 요 만큼의 연결고리도 없을 슈슬리사가 살게 된다니 이게 무슨 짓인가 싶으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슈슬리사가 있는 한, 그 광신도들이 집 앞에서 진을 치는 일도, 동네 사람들이 어디서 튀기가 돌아다닌다고 손가락질하는 일도 줄어들겠지. 모처럼 시셸의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게 된 윤진 언니의 표정에도 채 숨기지 못한 기쁨이 드러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신부님은 별채에 한 명이 사나 두 명이 사나 신경도 쓰지 않으시고, 종종 묻지도 않은 식객들도 와서 몇 날 며칠씩 머무르다 사라지는 마당에, 문제 될 일은 없었다. 게다가 어디로 생각해도 나쁜 일은 아닌걸.

지구인은 아니에요. 여튼 잘 부탁해요.”

 

  

시셸이 성당에 다시 나타난 것은 이레 뒤, 내 다음 번 면담 날이었다. 그는 큼직한 캐리어를 끌고 성당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그 뒤로 성당 앞에서 나를 두고 구세주니 뭐니 헛소리를 하던 인간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거나 더러는 손가락질을 하며 시셸의 등을 가리키고 있었다.

안녕, 이사나.”

어떻게 된 거예요?”

친구를 소개하려고요. 인사해요. 사비리키, 이쪽은 이사나.”

안녕하세요, 이사나.”

시셸의 뒤를 따라 성당 앞마당으로 들어선 것은, 거대한 쁘띠첼이었다. 탱글탱글하고 말갛고 반투명한데 햇살 아래 묘한 오렌지색을 띠고 있는, 높이가 1미터가 넘는 그런 쁘띠첼은, 뒤쪽에 튀어나온 괄태충같은 꼬리로 바닥을 밀며 시셸의 옆쪽으로 움직여 멈추었다. 그 탱탱하고 매끄러운 윗면에서, 긴 더듬이 같은 것이 일어났다.

만나서 반가워요.”

악수를 청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만져보면 무슨 느낌이 들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시셸도 옆에 있고, 어디로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어색하게 손을 내미는데, 내 등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아악!”

돌아볼 필요도 없이, 윤진 언니였다. 쁘띠첼, 아니, 사비리키라 불린 외계인의 살빛이 흐린 보랏빛으로 변했다.

이런.”

, 그러니까 진화 전 세대예요.”

나는 그만 윤진 언니가 가장 싫어하는 표현으로 그녀를 소개하고는, 윤진 언니와 외계인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시셸을 바라보았다. 시셸은 이런 문제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시험에 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외계인들이란, 음흉하기가 무슨 구렁이 백마흔마리쯤 든 영감님들보다 더하다니까. 윤진 언니는 그렇다고 치고, 신부님이 대체 뭐라고 하실지, 연세도 있으신데 혹시 놀라서 119에 실려가시진 않을지, 주저앉은 윤진 언니가 해야 할 걱정까지 혼자 다 떠맡은 채로 나는 고개를 흔들다가, 윤진 언니에게 다가갔다.

저기, 그러니까 저건 사비리키라고 하는데 시셸의 친구인 외계인인 것 같은데.”

같은데......?”

윤진 언니는, 시셸의 부탁에 자기가 먼저 뺨을 붉히고 온갖 수줍은 척은 다 하면서 좋다고 해 놓았으면서, 마치 이 모든 일이 나 때문에 벌어진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기, 사람 안 해쳐?”

저기, 언니. 침착하시고. 봐봐, 그냥 우리가 숟가락만 들고 가도 간식거리밖에 안 될 것 같잖아.”

저런 건 줘도 안 먹어!”

나는 사비리키의 빛깔이 묘한 파란 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며, 얼른 윤진 언니를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윤진 언니가 뭐라고 소리를 질러댄 것 같다. 이럴 때 보면 대체 누가 누구의 보호자인지 모르겠지만.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사비리키를 별채의 손님 방으로 안내했다. 손님 방은 내 방 바로 옆이었다. 벽 하나 사이에 두고 저 묘한 생물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침대를 빼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다행히도 사비리키는 침대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나는 간식 준비좀 하겠다며, 사비리키에게 짐좀 풀고 있으라고 하고는 마당으로 나왔다. 나는 이 세상 걱정을 나 혼자 다 감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다. 시셸은 그런 내가 우스운지 소리죽여 웃었다.

시셸.”

, 왜 그러죠?”

윤진 언니한테 장난이 너무 심한 것 아니에요.”

이사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던가요? 분명히 표정이 변하는 걸 봤는데.”

, 물론...... 지성체가 다 눈 두 개 코 하나 귀 둘 입 하나 달린 이족보행 생물이라는 법이야 없긴 없지만...... 그래도 시셸의 친구라고 했으니까.”

이사나도 내 친구예요.”

나는 시셸이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건지, 아니면 나를 시험하려고 그렇게 말하는 건지 정확하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월등한 종인 슈슬리사의 눈에는, 그들만큼의 진보를 이루지 못한 지성체는 여튼 다 평등하게 부족해 보이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이족보행과 저 아무리 좋게 봐도 매끈매끈한 푸딩처럼 보이는 피부를 지닌 괄태충이 똑같이 보인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긴, 개는 인간의 친구고 고양이도 인간의 친구이긴 하죠.”

나는 자조했다. 시셸이 감독관다운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이사나,”

사실이잖아요?”

당신이 어릴 때 기록을 읽어봤는데, 예전에 마리 씨에게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요.”

“......”

슈슬리사는 인간의 친구라는 말이, 개는 인간의 친구라는 말과 다른 거냐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셸은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오면 이 이야기를 하겠다고 벼르기라도 한 듯,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바로 말을 이었다.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해둘 수 있어요. 진화는 한 방향으로 일어나지 않고, 모든 지성체가 다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지구에도 우리가 판단하는 지성체의 기준에 맞는 종이 더 있었죠. 돌고래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진화가속의 후보였어요. 한 행성에 여러 지성체가 공존하면 진화과정에서 싸움으로 한쪽 종이 거의 멸절의 위기를 맞는 것이 사실이고, 다행히도 인간과 돌고래는 육지와 해양으로 영역이 나뉘어 있어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서로 다른 방향의 발전을 이루어 왔지요. 우리가, 과연 이 두 종 중 어느 쪽을 빨리 진화하도록 돕는게 맞는지에 대해 몇 번이나 토론을 거듭해야 했을 만큼.”

그러니까 음, 저 사비리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지성체니까 존중하라는 말씀이신거죠. 생긴건 달라도.”

이 지역 사람들은 비교하고 등수 매기는 걸 참 좋아하더라고요. 그렇죠?”

그런 편이긴 한데요......”

좋아요, 그러면 이해하기 편하게 말해줄께요. 이사나는 지구인이고 사비리키는 로크바예요. 로크바는 진화가속을 받지 않은 종이에요. 그들은 처음부터 슈슬리사보다 뛰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심같은 것은 부리지 않는 이들이었어요. 오히려 슈슬리사는 로크바와 접촉하면서 호전적인 면을 버리고, 다른 지성체들과 함께 발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었어요. 이제, 슈슬리사를 대할 때처럼 정중하게 그를 대해줄 수 있겠어요?”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할 지는...... 아시잖아요. 같은 사람인 저한테도,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는지.”

물론 알고 있지요. 이사나, 그러니까 사비리키를 좀 잘 부탁해요. 난 그가 지구로 연구하러 오겠다고 했을 때부터 말리긴 말렸지만, 한 번 뭘 하겠다고 마음먹은 학자를 말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짐작할 수 있겠지만.”

“......언니한테 실망했어요?”

아뇨.”

시셸은 차분히 대답했다.

예상했던 반응인걸요.”

시셸이 실망하지 않았다는 말을, 나는 윤진 언니에게 전하지 않았다. 윤진 언니가 시셸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듣는다면 상심할 게 분명하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윤진 언니가 그 말을 듣고 안심한다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언니에게 실망해버릴 것 같아서. 나는, 시셸과 사비리키와 함께 차를 마시고, 사비리키가 머리에서 나온 촉수를 그대로 잔에 담가 차를 마시는 것을 보며 조금은 역겨웠고, 조금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의외로 침착했던 것은, 외출했다가 돌아오셔서 집 현관문을 열자마자 괄태충을 닮은 사비리키의 꼬리를 발견하신 신부님이었다.

, 지난번 말한 손님인 모양이구먼.”

그 말씀이 전부였다. 사비리키는 발도 없이, 마치 꼬리를 저어 움직이는 것 같은 동작으로 현관으로 나왔다. 윤진 언니는 되도록 사비리키에게서 멀리 떨어지려는 듯,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제준이냐시오 신부님이시지요. 사비리키라고 합니다.”

머무르는 동안 편히 쉬어요. 손님 방이 좁아서 불편해서 어쩐다.”

아닙니다,”

대화는 그게 전부였지만, 신부님은 사비리키가 내미는 촉수를 잡고 짧게 악수를 하고 들어가셨다. 어째서인지, 악수를 한 이후로 신부님은 조금 더 사비리키에게 호의가 담긴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나는 사비리키의 촉수는 어떤 감촉인지, 저 젤라틴으로 코팅한 것 같은 피부는 눌러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 사비리키에게 한 번 만져봐도 되냐고 물어볼까 생각했다. 그때 사비리키가, 조금 전 신부님과 악수했던 촉수를 배배 꼬며 말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신부님께서 저를 한입거리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

생각보다 맛이 없을 텐데.”

저기, 상대방의 생각을 읽거나 그런거예요? 텔레파시나?”

로크바의 촉수 중 가운데 촉수는 자기 감정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데 쓰여요. 물론, 그만큼 상대방의 감정도 밀려들어오지만.”

아마 정말로 한 입거리도 안 된다고, 육식동물같은 생각을 하시진 않으셨겠지. 다만 사비리키의 이 생김새와 탱글탱글한 젤리같은 표면을 보시면서, 신부님은 아마 점잖은 표정 뒤로 이건 뭐 거대한 과일젤리가 굴러다니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시긴 하셨을거다. 내가 쁘띠첼을 떠올렸듯이, 아마도 신부님은 한입에 먹었다는 제리뽀를 구체적으로 떠올리셨을 수도 있고. 나는 웃다가, 그 간식거리들을 검색해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먹는 거군요.”

사실은 저도 처음에는 이게 갑자기 커져서 우리집에 들어왔나 하고 생각했어요.”

아아.”

사비리키의 촉수와 윗부분이 묘한 초록빛을 띠다가 돌아왔다. 나는 아마도 사비리키가 그 순간, 조금은 웃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젤리같은 것 먹을 수 있어요? 괜찮다면 내일 사다줄께요. , 마트에 가보고 싶다면 같이 가도 괜찮고요.”

 


  

사비리키는 바깥에서 만나는 모든 것에 대해 지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과학자다운 호기심이라고 불러야 했을 것이다. 그는 차이나타운에서 한참 비탈길을 걸어올라간 곳에 자리한 공자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를 보며 그 반투명한 피부의 빛깔을 몇 번이나 바꾸며 기뻐했다. 좀 더 올라가면 나오는 공원에서, 그는 광장 구석, 마치 유람선의 이물처럼 꾸며놓은 전망대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지는 햇살 아래 기분좋게 꿈틀거렸다. 개똥과 비둘기와 시끄러운 아이들의 목소리도, 그에게는 신경쓰이지 않는 듯 했다. 나는, 나란히 걷고 있으면 커다란 개처럼 느껴지는 그가 다리도 없이 어떻게 이 비탈을 올라올 수 있었는지 신기해 했다. 사비리키는 지친 기색도 없이, 나는 들어보지도 못한 먼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언제나 오로라가 빛나는 초록빛 하늘과 해초처럼 끈적이는 바다가 있는 행성들을. 혹은 사비리키가 젊었을 때 한참 머물렀던, 쌍성인 두 개의 태양이 번갈아 뜨고 지는 끝없는 사막이 펼쳐진 행성들을.

그렇게 더운 곳이면,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그곳 사람들은 내 피부를 부러워했어요. 겉 표면 층이 체액의 증발을 막아서 그래도 버틸만 했거든요. 사실 그 곳은, 우리 로크바들의 모성과 비슷한 곳이어서 곧 익숙해질 수 있긴 했어요. 대기의 조성이 다른 것을 빼면.”

, 맞다. 대기의 조성이 다른데 어떻게 숨을 쉬는 거예요?”

나 말인가요?”

아니, 사비리키도 사비리키지만, 슈슬리사들이 사는 곳도 지구와 같은 곳은 아닐 것 같아서요.”

.”

사비리키는 촉수를 까딱거렸다.

어느정도는 적응훈련을 해야 해요. 약도 먹고.”

약을 먹어요?”

적응을 도와주는 약이죠. 지구인들도 시차가 있는 곳에 갈 때에는 약을 먹어서 수면조절을 한다고 들었는데, 그게 좀 많이 발전된 형태예요.”

그게 약 먹는다고.....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슈슬리사는 질소로 호흡을 하고, 내 경우는 질소와 산소의 혼합기체로 호흡을 해요. 산소가 충분하지 못한 곳에서는 부족할 경우에는 산화물 크림을 피부에 바르는 것으로도 충분해요. 그러니 질소와 산소가 풍부한 지구에 오기에는 아주 좋은 체질이죠.”

아아.”

산소가 독이 되는 생물도 많아요.”

정말요?”

지구에도 혐기성 미생물 정도는 있을텐데요. 자기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남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해요, 이사나.”

사비리키는 위쪽의 피부를 울리며 말을 했다.

메리크샤나 인들이 산소를 마시면 순식간에 호흡기 세포들이 산화해 버려요. 쉽게 말하면 타 버리는 것 같은 거죠. 그런 종들은 지구처럼 산소 농도가 높은 곳에는 올 수 없어요.”

우와, 여기선 순도높은 산소 캔 같은 것도 파는데.”

저런, 메리크샤나들이 보면 깜짝 놀랄 거예요.”

그럼 메리크샤나들은 뭘로 호흡해요?”

.”

황이라고요?“

생물을 전공한 것은 아니라서 확실하진 않지만 황화수소로 호흡을 했을 거예요. 그리고 대기 조성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죠. 우리는 높은 압력에는 잘 견디지만, 기압이 낮으면 순식간에 목숨을 잃기도 해요. 슈슬리사들은 기압조정복을 입고서라도 갈 수 있는 곳인데, 우린 갈 수 없는 곳들도 많아요. 반면 슈슬리사가 기압조정복을 입고 허덕이는 곳에서도, 우린 비교적 잘 견디죠.”

지구는 어때요?”

지구? 내 고향에 비하면 약간 기압이 낮은 쪽이에요. 위험한 정도는 아니에요. 조금 높은 곳에 올라와 있는 정도니까. 다행히 여긴 질소 농도가 높아서, 숨쉬는 데는 무리가 없어요.”

사비리키는 시셸이나, 예전에 나를 돌봐주었던 마리처럼 지구인에 대한 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기 위해 이곳에 와서 일종의 봉사과제로 나를 떠맡은 젊은 학생이 아니었다. 이야기할수록 그는, 아마도 많은 별들 사이를 누벼온, 노련하고 경험 많은 외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며칠간 지구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진 뒤 다음 주부터 연구소에 출근하여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한다고 했는데,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아도 적어도 지구인을 직접 상대하며 데이터를 수집하는 말단 연구원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는 내가 최대한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며 이야기하고 있었고, 자기 경력이나 나이를 자랑하지도 않았지만, 그에게서는 살아온 날들 이상으로 깊은 지혜를 쌓아올린 원숙한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침착함이 있었다. 아마도, 모두가 경악하고 이성을 잃을 만한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잠시 촉수를 흔들다가 제일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모두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함도 느껴졌다. 그랬기 때문일까. 그가 등 뒤로 촉수를 휘둘렀을 때,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히 인지하지도 못했다. 두 번째로 날아든 돌이, 우리가 앉아있던 벤치의 등받이를 때리기 전까지는.

, . 뭐야!”

사비리키는 반사적으로 촉수를 뻗어 뒤쪽을 향해 꿈틀거렸다. 나는 사비리키가 돌을 맞은 것을 깨닫고 얼른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어린 사내아이가 세 번째로 던질 자갈을 골라 주워들다 나를 보고 놀라 울음을 터뜨리려고 했다. 아이의 엄마가 곧 아이에게 다가와 달래다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이라도 한 소리 쏟아낼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아이를 쳐다보았다.

애 간수 좀 똑바로 하세요, 아줌마.”

나는 부아가 돋았다. 잘못해놓고는 그새, 어미새 날개 밑에 쏙 숨어버리듯 제 엄마 뒤에 숨어서 이쪽을 향해 혀를 낼름 내미는, 진화 2세대 아이를 보며, 나는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이 떠올라 더 화가 치밀었던 것 같다.

돌을 던지잖아요, 사람 앉아있는데.”

사람 아냐, 괴물한테 던졌어,”

아니거든?”

“......저기, 학생한테 돌을 던진 건 미안한데.”

아마도 어떻게든 우겨 볼 생각이었던 것 같은 애엄마는, 애가 바로 돌을 던졌다고 대답하자 불쾌한 듯 어깨를 움찔거리며 변명 비슷한 것을 늘어놓았다.

저기, 그 옆에 있는 덩어리는 대체 뭐죠? 우리 애가 저걸 보고 그런 것 같은데.”

외계인이에요. 저기, 당신들이 두려워하는 슈슬리사같은.”

외계인이라고요?”

천천히 꿈틀거리기만 하는 사비리키의 뒷모습을 보며, 애엄마는 황당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새로 나온 외계생물같은 건가본데, 그런걸 학생이 멋대로 갖고있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갖고있는 게 아니라, 자아와 지성이 있는 외계 지성체예요. 모르면 가만히 있든가, 애한테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시켜요.”

아줌마는 황당해하며 자기 아이의 손을 붙잡고, 돌아서서 저 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참 걷다가, 아줌마는 이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위험해 보이는 외계생물을 끌고다녀서 우리 애를 놀래켜 놓고는!”

무식하면 가만히 좀 있거나 부끄러운 줄 아세요. .”

나는 조롱하듯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그때 사비리키가 이게 입인지 손인지 감정전달용인지 나로서는 아직 구분이 가지 않는 촉수를 뻗어 내 손목을 잡았다.

그만해요, 이사나.”

그치만!”

그만해요.”

사비리키는 침착하게, 촉수로 내 양 손목을 감아 붙잡고는 나를 진정시켰다. 또다른 촉수 하나가 내 손 위에 겹쳐졌다. 괜찮아. 난 괜찮아요. 그런 감정이 내게 밀려들어왔다. 사비리키의 마음이 나보다 훨씬 굳건하기 때문인지, 놀랍게도 마음이 금세 가라앉았다. 마음이 가라앉자마자, 나는 내게 마음을 전달한 사비리키의 그 촉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왜 그래요?”

“......아니, 생각한 것처럼 물컹거리지 않아서요.”

여긴 기압이 낮아서 더 그럴거예요.”

사비리키는 조용히 웃었다. 나는 어쩐지, 아주 조금 부끄러웠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젤리와 다는, 인간보다는 낮지만 분명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움직이고 천천히 이야기를 한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을 살아왔고 또 살아갈 존재인 것처럼. 소년같은 무한한 호기심과, 이 침착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조금 감탄했다. 나는, 처음으로 동경할 수 있는, 존경하고 등을 바라볼 수 있는 어른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신부님에게서 느끼는 애정이나 배려와는 또 다른 것이었고, 그래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 세상에, 시작이 있었던 것 중 그 어떤 것도, 끝이 없었던 것은 없다. 영유아 시절부터 학령아동이 될 때 까지의 시기를 고정된 양육자 없이 지냈던 사람에게, 영원불멸이라는 말의 의미를 가르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 침착하고 고요하며 현명한 존재에게 있어, 나는 그저 잠시 지구의 바다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도록 안내했던 것이 고작인 작은 인연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불현듯 서러워졌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째서, 나는 지구인으로 태어나 버렸을까. 울고 싶었다.

  


연구소는 멀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내리기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사비리키는 곧,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연구소까지 다니는 데 익숙해졌다. 버스에 오르내리는 것도, 내가 생각한 것 만큼 곤란한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계단을 타고 올라가던 그는, 사나흘 쯤 지나서부터는 촉수로 버스 기사석을 둘러싼 금속봉을 휘감아, 단숨에 몸을 날려 버스에 오를 만큼 노련해졌다. 사비리키는 덜컹거리며 바닷가를 따라 달리는 버스를 좋아했지만, 함께 버스를 타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또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이다. 붐비는 시간대를 피해서, 굳이 새벽같이 일어나 텅 빈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구청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아?”

윤진 언니는, 구두를 벗고 들어와 제 방까지 다 들어가기도 전에 스타킹을 반 넘게 내리며 중얼거렸다.

버스에 탔더니, 전염병을 옮기는 외계생물이 있다는거야.”

무슨 전염병?”

“......눈병 걸렸다던데?.”

자기가 안 씻어서 걸려놓고 무슨 헛소리야.”

그러게. 윤진 언니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방에 들어갔다가, 시원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언니는 머리카락을 슈슈로 대충 묶고,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면파자마 차림으로 나와 내가 엎드려 뒹굴며 책을 읽고 있는 옆에 와서 앉았다.

덥다. 씻기도 싫어.”

그러다가 시셸이 오면 또 막 당황하려고.”

학생은 좋겠다. 방학이라고 집에서 뒹굴 수도 있고.”

나만 빼고 다른 애들은 다들 바쁘거든요.”

출근하기도 싫어, 이런 날은.”

내 이야기 듣긴 듣는거야?”

“......이사나.”

.”

나도 힘들어.”

윤진 언니는 몸을 웅크리다가 아예 마룻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나도 힘들다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윤진 언니도 힘들 수 있다. 내가 힘들고 속상해서 엉엉 울 때마다, 날 붙잡고는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야단치던 언니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윤진 언니도 힘든 것을 꾹 참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딱 윤진 언니와 동갑내기들인, 마지막 자연출산 세대들의 상대적 박탈감에 대해서도 들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심통이 났다. 힘들고 속상해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건 알겠지만, 나라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방학인데도 내게 손가락질하는 영감들과, 나보고 구세주라고 노래를 불러대는 광신자들이 귀찮아서라도, 이렇게 집에만 얌전히 처박혀 있는 것이 나라고 좋을 리 없었다. 어리광을 부려도, 내가 부리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똑같이 힘든 거라면, 내가 언니를 이해하기보다는 윤진 언니가 나를 이해하는 게 더 쉬울테니까.

적어도 언니는 혼자는 아니잖아.”

?”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은 아니잖아.”

“......어린애란 팔자 좋구나.”

난 어린애니까 나한테 어리광부리지 마.”

우리 엄마는 나한테 정말 어리광 많이 부렸어. 짜증 날 만큼.”

“......?”

어른이라고 어리광 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야, 오산.”

뭐가 문젠데.”

“......”

뭐가 문젠데 다 큰 어른이 어린애한테 찔통을 부려.”

이사나.”

윤진 언니는 드러누운 채로 낮게 중얼거렸다.

난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그냥 아주 평범하게.”

언니 정도면 평범하지, .”

그런 거 말고, 좀 평범하게 말야.”

뭘 말하는 거야. 한 반에서 30명 중에 15등 하는 거?”

.”

그럼 뭔데, 사람이 좀 알아듣게 말을 하란 말야.”

그냥.”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까,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이 가니까.

그냥, 남들같이.”

“......나같은 짐 되는 애 같은 것도 없고?”

말 좀 오해 없게 하자. 그냥 식객이라고 하든가! 짐 되는 애라고 하니까 내가 어디가서 낳아 온 것 같잖아!”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는 언니보다도 어리겠다. 그치?”

“......그렇겠지.”

내가 엄마 이야기를 꺼내자, 윤진 언니는 더 이상 뭐 한탄같은 것을 해봤다 소용없겠다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윤진 언니는 아마도, 언니에게는 삼촌 되시는 신부님 수발을 들며 사제관에서 살고 싶지도, 거기다 나같은 식객은 물론이고 사비리키까지 떠맡고 살고 싶지도 않았을 거다.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여자들처럼, 근사한 원룸 오피스텔 같은 데를 얻어서 예쁘게 해놓고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테지. 조카 쯤 되어보이는, 그런데다 같은 민족도 아니고 그냥 보기에도 다른 나라에서 온 게 분명한, 한참 예민한 사춘기 여자애를 신경쓰고, 얌전히 책을 읽고 데이터만 수집한다고는 하지만 보이는 것만으로도 신경쓰이는 촉수괴물과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것을 참아내야 하고, 연세 많은 숙부님의 수발을 들어야 하고. 언니도 분명히, 힘들다는 것은 안다. 그 말을, 나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 말을 해 버리면, 공연히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되니까. 내가 여기 있는 것 자체가 미안해지니까. 대신 나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양육자는 수도 없이 바뀌었지만 난 잘 컸어.”

.”

못 하겠으면 시셸한테 못 한다고 그러면 되잖아.”

, 애가 왜 그렇게 못 됐니.”

그냥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야. 나 벌써 고등학생이고, 상황이 특수하니까 성년이 될 때 까지 보호자가 있는게 좋겠다고 슈슬리사들이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이 나이에 벌써 기숙사 고등학교 들어가고 학교 근처에 월세 얻어서 혼자 사는 애들도 있어. 여차하면 나, 성년 되면 부모 없는 아이라고 정부에서 주는 독립자금 당겨 받겠다고 해서 나가서 살아도 되니까, 신경 쓰지 마.”

못됐어, 너 정말로.”

윤진 언니는 내 얼굴에 쿠션을 집어던졌다. 정말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잠깐 푸념하고 싶었던 것 뿐일거다. 나는 몸을 일으켜 윤진 언니를 보고 웃었다. 윤진 언니는 내가 내미는 쿠션을 다시 받아 제 자리에 밀어놓았다.

전염병 옮기는 외계인이라고, 난리도 아냐. 알고 있어?”

사실이 아닌걸.”

사실이 아니라도. 슈슬리사들이 신원과 안전을 보장한다고 해도, 그나마 인간하고 비슷하게 생긴 슈슬리사하고는 또 다르단 말야. 거부감의 대상이라고. 괴물같으니까.”

그는 괴물이 아냐.”

“......네 눈에는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보통 사람들 생각은 또 다르단 말야. 다음에 시셸 오는 날 네가 슬쩍 이야기해보면 안돼?”

뭐라고 이야기하라는 거야. 사비리키랑 못 살겠으니 방을 빼라고?”

, 그래도 되고...... 당장은 아니라도, 아무래도 여긴 비탈길에 있는 집이라서, 그 몸을 하고 왔다갔다 하기도 불편할거고.”

사비리키가 얼마나 날렵하게 움직이는지 알면, 아마 윤진 언니는 기절할지도 몰라. 키득키득 웃는데 윤진 언니가 정색을 하고 내게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시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너니까, 네가 언제 기회 봐서 말하면 안될까? 나는 뭐...... 나는 상관없긴 한데, 사람들이 수군거리잖아. 그렇지 않아도 너 따돌리고 못살게 구는 애들 있는데, 저 외계인 때문에 더 그러면 보호자로서 곤란하기도 하고.”

동사무소에서 뭔 말 있었구나.”

없진 않았지.”

뭐래?”

민원인이 왔어. 집값 떨어진대.”

어휴, 집값. 또 집값. 예수님이 살아와서 맨발로 돌아다니고 부처님이 살아와서 굶고 있어도 노숙자가 있어서 집값 떨어진다고 난리 칠 거야.”

여튼 민원인이 와서 그러다 보니, 나도 좀 난처해졌어. 어떻게 방법이 좀 있어야 한다고.”

그럼 시셸에게 직접 말하면 되잖아.”

.”

좋아하는 거 맞지?”

“......피도 안 마른 게 무슨 소리야.”

이럴 때만 애 취급이야.”

아마도 나는, 절대로 긍정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을 거다, 시셸에게 그런 곤란하고 한심하며 종 차별적인 이야기를 대신 꺼내는 어리석은 짓도 하지 않을 거다. 무엇보다도, 나는 좀 더 사비리키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에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할 일 없는 인간들. 하늘에 우주선이 떠 있고 바다에는 인간들과 슈슬리사들이 함께 탐사에 나선 거대한 함정들이 가득한데도, 좁디좁은 땅에 발이 묶인 채 집값 내려가니까 그 외계생물 좀 치우라는 소리나 하고 있는 어리석은 어른들. 그러면서도, 사비리키에게 덤벼들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게 용하기는 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어떤 생물과도 닮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공격이라도 해 올까 싶어서 슬슬 피하면서 공무원들에게 그 일을 떠넘기는 것까지, 어쩌면 저렇게 비겁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이 먹었다고 어른 행세를 하고 사는 것일까? 사비리키의 침착함이나 좀 배우라지. 나는, 그런 쓸모없는 생각들이 빚어낸 해프닝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이야기일랑 모르는 체 하리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보다는 과연 시셸이 윤진 언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일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어떨까. 지구의 인간들이 슈슬리사의 친구라는 그들의 말이, 과연 개는 인간의 친구라는 말보다 더 진정성이 깃든 이야기이기는 한 걸까.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선명하게 붉어진 언니의 뺨을 보며, 나는 인간과 슈슬리사 사이에 사랑이 성립할 수 있을까, 그런, 삼류 소설의 띠지에나 붙어 있어야 어울릴 것 같은 명제를 두고 고민해야 했다. , 그런 소설의 히로인들이야 결국 무뚝뚝하고 인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다 종종 뭔가 밝힐 수 없는 상처와 한을 품고 있는 슈슬리사의 마음을 열고 함께 우주로 날아가곤 하지만,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 리가 없잖아.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저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언니의 욕망에 대해 생각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건 그냥 안되는 거다. 가당치도 않은 마음이었다. 정말로. 그건 내가 사비리키와 언제까지나 같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사실일거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사비리키는 그날 밤, 해가 저물고 아홉 시 뉴스가 시작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윤진 언니처럼 초과근무를 하지도 않았고, 밤 늦게까지 연구를 하는 것은 열정의 상징일지는 몰라도 능률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가 연구소에서 회식같은 것에 끌려갔을 것 같지도 않았다. 늦으면 늦는다고 말을 했을 테니까. 나는 윤진 언니나 신부님께 사비리키를 마중간다고 말하기가 괜히 부끄러워서, 요 앞 편의점에 간다고 하고 밖으로 나왔다.

버스 정류장에 가서 기다려볼까. 사비리키가 휴대폰을 들고 다니면 좋을텐데, 그는 정신 산란해진다는 이유로 그런 것도 들고다니지 않았다. 그런 것 없이도 시셸과는 연락할 방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역시 지구에 아직 알려져서는 안되는 레벨의 기술이라고 어떤 건지 제대로 말해주지도 않았다. 그럼 시셸에게 연락을 해볼까. 고민을 하면서 골목을 지나려는데, 뭔가 골목 안쪽에 물컹한 쓰레기봉지 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설마.

설마, 설마, 설마. 나는 나를 향해 흔들리는 촉수를 바라보고 바로 달려가 사비리키를 부축했다. 그러나 사비리키는, 그저 평온한 빛깔을 띤 채 나를 향해 촉수를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사비리키?”

이걸 좀 봐요.”

사비리키는 고양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새끼고양이. 내 두 손 안에 들어올 법한, 약하고 어린 생물을 촉수들로 감싸안은 채로, 그는 그대로 있었나보다.

고양이에요. 귀엽죠?”

. 마치 라타시스의 조상종을 본 것 같네요.”

라타시스?”

이 친구들처럼, 뾰족한 귀에 이 비슷한 얼굴을 한 종이 있어요. 좀 호전적이라서 우주군에 많이 들어가는데, 그들도 지구인들처럼 산소호흡을 하죠.”

고양이를 닮은 지성체가 있다고요?”

슈슬리사가 인간과 비슷한 면이 많은 것에는 놀라지 않으면서, 고양이를 닮은 지성체가 있다는 말에는 왜 놀라는 거죠?”

“.......”

꾸짖는게 아니에요, 이사나. 그냥 이야기를 하는거예요.”

사비리키는 앉으라는 듯 촉수로 내 등을 톡톡 치며 말했다.

지구에서도, 배의 발생 단계를 보면 초기에는 비슷하다가 후기에는 서로 제 종의 모양을 따라가죠. 그렇죠?”

. 마치 진화의 단계처럼......”

우주는 넓고, 서로 다른 지역과 환경에서 나고 자랐어도 비슷한 요소를 지닌 종들은 많이 있어요. 지구인들은 지금, 갈라파고스에서 처음 밖으로 나온 핀치새처럼 어리둥절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해하게 될 거예요. 이건 당연한 것이고, 지구 안에서만 살아왔던 당신들은 아직 경험이 더 필요할 뿐이니까.”

“......, 나는 좀 더 잘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그 다르다는 것에 대해 조금은 더 잘 알 줄 알았어요.”

경험의 문제예요, 이사나.”

자기랑 다르다고 깜짝 놀라고, 빤히 쳐다보고, 그러지 않을 줄 알았어요. , 솔직히 말하면요...... 당신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처음에는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놀랐어요.”

놀라지 않는게 이상한 거예요. 당신의 세계에 나와 같은 종은 없었으니까. 당신이 알던 지구 생물 중에, 질소 호흡을 하는 종이 있으면 말해봐요. 뿌리혹박테리아 말고.”

없진 않겠죠.”

없진 않겠지만 바로 떠올릴 만큼 친근하지 않아요. 산소호홉을 하는 종과 질소호흡을 하는 종은 그다지 가깝질 않잖아요?”

모든 생물의, 진화 최초의 모습은 다 비슷한 것을 알고 있어요.”

나는 내 어깨를 감싼 촉수 끝을 손으로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그냥 세포 덩어리, 배아 형태였다가, 새도 되고 돌고래도 되고 인간도 된다는 것을 배웠어요. 하지만 뭐라고 할까, 이게 우주에서 딱히 유리한 생김새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성체라면 으레 이족보행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인간이 그렇고, 슈슬리사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모든 지성체의 진화의 결과가 그렇게 한 방향으로 갈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요.”

이사나, 난 지구에 오기 전에, 지구에서 만들어진 SF영화들을 보면서 왔어요. 지구인들이, 다른 지성체에 대해 갖는 생각이 궁금했거든요.”

“......어땠는데요?”

당신을 귀찮게 하는 그 종교의 신도, 사람의 모습을 닮지 않았던가요?”

사비리키는 촉수 끝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나는 몸을 숙여, 사비리키가 쓰다듬던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사비리키의 몸에 얼룩덜룩한 보랏빛 자국이 남아 있었다. 사비리키는, 어쩌다가 이 골목에서 이 새끼고양이를 만나게 된 걸까. 아무리 외계인이라고 해도, 멍 자국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그 자국들을 못본 체 하며 나는 짐짓 딴청을 부렸다.

어미는 어디로 갔을까요?”

며칠째, 여기 혼자 있었어요.”

“......죽었을까.”

데려가도 된다면, 데려가도 좋지 않을까요.”

이 녀석들을 진화자궁으로 가속시키면, 어떤 모습이 되는 걸까요.”

고양이는 작고, 따뜻했다.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얇은 가죽 아래 뼈가 잡히듯 느껴졌다.

아까 말한 그, 우주군에 많이 들어간다는 종족처럼 될까요? 아니면 슈슬리사처럼 파란 얼굴에 두 발로 걸어다니게 될까요.”

글쎄요, 그건 이 아이들의 의지에 달리지 않았을까요.”

의지?”

의지라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라면, 선택이라는 표현도 있겠죠.”

선택......”

수동적으로 진화 프로그램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는 종들은, 그저 슈슬리사가 될 뿐이에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종으로서의 지구인들은 사라지고, 슈슬리사 중의 하나가 되는 거죠.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나요?”

그러니까, 진화자궁으로 진화를 거듭하면 결국 지구인이 슈슬리사가 된다는 뜻인거예요?”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이사나. 지구인이, 자기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유지하면서 진화 프로그램을 능동적으로 따라간다면, 그 결과는 달라지겠지만.”

나는 고양이를 안은 채로, 사비리키의 움직임에 맞추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사비리키는, 엷은 피부 아래로 꿈틀거리는 복족을 움직이며 비탈길을 걸어 올랐다. 낮보다는 서늘해진 바람은 여전히 바다의 습기를 머금어 눅눅했고, 혀를 내밀면 짭짤한 맛이 느껴질 것만 같았다. 공연히 눈이 따끔거렸다. 숨이 막히도록 끔찍한 것들. 나는, 결코 이 중력을 벗어날 수 없다. 나는 결코 지구인이 아닌 다른 종이 될 수가 없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의 출생도, 나의 종도, 나의 그 모든 정체성도, 나는 그저 숙명으로 지고 갈 수밖에 없다. 나는, 묵직해보이는 몸을 하고 이 비탈을 가볍게 움직여 올라가는 사비리키를 바라보며, 울고 싶었다.

“......누가 때린 거예요.”

다치지 않았어요.”

멍 들었잖아요.”

예전에, 옆 나라에서 이 나라를 침략했을 때, 옆 나라에 지진이 났다고 해요. 그때 옆 나라 사람들은 이 나라 사람들을 강제 노역을 시키려고 끌고갔는데, 막상 지진이 나고 전염병이 도니까, 이 나라 사람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고 다닌다고.”

.”

당신은 지구를 연구하러 온 거잖아요? 어떤 해도 끼치지 않잖아요?”

어떤 해도 끼치는 일 없도록 늘 노력하고 있죠.”

여기 사람들은, 당신이 전염병을 옮긴다고 동사무소에 민원을 넣더래요. 씻지도 않고 눈을 만졌는지, 눈병 걸렸으면서. 그걸 당신 탓이라고 그러더래요.”

윤진 씨가 곤란했겠군요.”

대체 왜들 그러는 걸까요. 정말. 자기들하고 다른 것을 보고 뭐 낯설어서 놀랄 수도 있고, 그건 아는데......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잖아요. 당신들은 우리를 알려고 여기까지 오는데.”

내가 여기 처음 오던 날 기억해요?”

.”

그날 시셸이 공항으로 마중나왔어요. 시셸은 시내까지 택시를 타자고 했지만, 내가 고집을 부렸지요. 대중교통으로 움직이는 쪽이 더 빨리 움직일 수 있기도 했고, 또 이곳의 지성체들이 궁금했으니까요. 어땠는지 상상할 수 있나요?”

제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안좋은 상황이었을거라는 생각은 드는데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사실은 시셸이 많이 곤란했죠.”

사비리키의 촉수가, 고양이를 안아 쥔 내 손을 톡톡 건드렸다.

애완동물은 가방에 넣어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이쪽은 애완동물이 아니며 제대로 차표를 구입했다고 설명해야 했죠.”

세상에. 애완동물......”

시셸이 슈슬리사니까 그 정도로 끝났지, 보통 지구인이 나와 함께 공항철도에 탔다면 정말 곤욕을 치렀을지도 몰라요.”

여기 사람들에게 슈슬리사란 뭐, 신 비슷한 거니까요...... 사실은 그런것도 아닌데.”

나는 의기소침해진 채로, 고양이를 한 손으로 받쳐 안고는 다른 손으로 사비리키의 촉수를 붙잡았다.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서로 닿고 있다고 해도, 지금 뿐이다. 마음은 결코 닿지 않을 거다. 설령 마음이 닿는다고 해도, 반드시 끝이 나고 말 만남이다. 머지 않아서, 나는 몇 년 뒤에는 어른이 되고 독립을 하게 될 것이고, 설령 그때까지 그가 나와 함께 산다고 해도, 그에게 있어 지구인의 몇 년이란 고작 찰나에 불과할 테니까.

인간보다 훨씬, 감정도 풍부하고, 변덕스럽고, 자기 멋대로 동정심과 연민에 지구인의 아이 하나를 맡았다가 버리기도 해요. 그래도 변명이라도 들어보려고 하는 것은 지구인보다 조금 나을까. 그들은 신이 아니에요. 그들이 여기 내려오고 3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그들이 신에 가까운 존재라고 믿는 멍청한 사람들이 드글드글하지만, 역시 아니잖아요. 그렇죠? , 이런 건 슈슬리사에게는 물어볼 수도 없고, 여기 사람들은 그들이 신인 줄 아니까 결국 평생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들은 우리보다 문화가 발달하고 좀 더 앞날을 예측도 하고,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도 좀 더 예의를 차리고 체면을 차릴 수 있을 뿐이지, 결국은 우리보다 더 감정적인 거죠? 그들은, 신이 아닌 거죠?”

물론, 아니죠. 하지만 이사나,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당신의 예전 담당자는, 아직 어렸던 것 뿐이고, 그녀 역시 당신을 위해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

당신의 손에 닿으면 느껴지거든요. 당신의 추억들이.”

사비리키는 내게 촉수들을 내밀었다. 마치 안아주고 싶어도 팔이 없어서 안아줄 수 없다는 듯이. 고작 발밑만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이 그의 반투명한 피부에 닿았을 때, 그의 피부는 익어가는 사과처럼 불그레한 빛을 띠었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말하지 않아도, 닿는 것만으로도 나를 느껴버리는 그의 예민한 감각에, 어쩌면 이 마음은 이미 읽혀버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울고 싶었다. 이런 것을 말한들 무슨 소용일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너무 빨리 어른이 되고, 또 순식간에 늙어버릴텐데, 혹시나 그가 이곳을 떠났다가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때의 나는 살아있다손 쳐도 이미 늙어 꼬부라진 할머니일 거다. 그런 찰나의, 한없이 무심하고 덧없을 마음 같은 것은, 나는 전할 생각도 없었지만 전할 방법도 몰랐다. 어째서 나는, 그와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게 되면서도 그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을까. 그때, 내 손에 잡힌 사비리키의 촉수가 꿈틀거렸다. 나는 깜짝놀라 촉수를 놓으며 사비리키를 바라보았다.

지구인들은 이 감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사나, 내가 느낀 그대로 이 감정을 해석해도 좋을까요.”

아뇨오오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마터면 안고있는 고양이를 사비리키에게 던져버리고 그대로 집까지 도망칠뻔 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입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사비리키가 촉수를 뻗어왔다. , 그랬지, 정류장에서 버스 안으로 촉수를 뻗어서 튀어들어갈 만큼 날렵했지. 그의 촉수가 밧줄처럼 내 손목을 휘어감았다. 나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도, 안도했다. 이 골목길에 다른 사람이 없어서. 누군가 의협심 강한 사람이라도 지나가다가, 웬 촉수괴물이 여고생을 공격한다고 오해하고 사비리키에게 폭력을 쓰는 것보다는 나을테니까. 하지만.

이사나, 그런 고민을 하는 당신이 참 사랑스러워요. 난 정말로 당신이 좋아요.”

도망치고 싶었다. 분명히 끝이 보이는 관계를, 굳이 말하고 설정하고 만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난 그저, 그를 동경했다. 그의 침착함을 부러워했다. 나는 언젠가 내가 가고 싶은 먼 바다를 꿈꾸는 그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뿐이었다. 나는 지구인이고, 지구의 시간으로 고작 백 년이나 살면 잘 사는 거다. 그와는 다른 별에서, 다른 시간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까.

“......저기, 아마도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뜻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그러니까 기대하지 않을 거다. 바라지 않을 거다. 꿈꾸지 않을 거다. 나는 내가 어깨를 떨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고개를 들었다. 내 코앞까지 다가온 사비리키가 다른 촉수로 내 어깨를 감쌌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내가 아마도 당신과 같은 뜻으로 이야기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나는, 도저히 태연한 척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으면서 대답하는 그런 모습을 마음속으로 상상해보려 애썼지만, 그 모습을 마음속에 떠올려 보기도 전에 먼저 터져나온 것은 울음이었다. 결코 갖지 못할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절망이, 저 뻘밭을 채우며 밀려드는 바닷물처럼 나를 떼밀었다. 사비리키는 나를 좀 더 단단히 감싸안은 채, 촉수로 내 등을 토닥거렸다.

울지 말아요, 이사나.”

개가 인간을 사랑하는건요......”

?”

개의 1년은 인간의 7년이래요. 강아지는 순식간에 성견이 되었다가 순식간에 늙어버리는데, 우습잖아요. 그런 개가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개가 인간을 정말로 사랑할 수 있다고 그래도, 그건 보통 생각하는 사랑과는 다른거잖아요.”

스스로를 비하씩이나 할 필요는 없어요. 개는 여튼, 독자적인 문명을 가진 지성체로 발전하진 못했으니까.”

개의 아이큐가 70이라고 그래요. 인간 평균이 100이고요. 개에게서 인간하고, 인간에서 슈슬리사 중에 어느쪽이 지적으로는 더 가까울까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당신은 슈슬리사들보다 더 현명한 종족이라면서요.”

개가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면, 인간이 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이런 변명을 할 수 있던가요.”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이 사랑이 첫 번째 사랑도 아니고, 언제까지나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않아요. 다만, 나는 내가 존재하는 한 당신을 계속 기억할 겁니다. 이사나, 울지 말아요. 내가, 차마 당신에게 말하지 못했던 그 마음과 같은 것이 당신에게서 느껴져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내가 미안해요.”

이런 꼴을 누가 본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인적 없는 골목에 감사하며, 나는 CCTV도 차마 들여다보지 못할 이 어두운 골목의 한 구석에서 사비리키에게 속삭였다. 이래도 괜찮은건진 모르겠는데, 나도 당신을 좋아해요.

  


  

고백을 했다고 해서, 사비리키와 나 사이에 뭔가 눈에 띌 만한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내 또래의 다른 아이들 같으면 고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몰래, 더러는 남들 보는 앞에서 대놓고 당당히 입맞추고, 성급한 아이들 같으면 고백한 그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섹스를 하기도 했지만, 이쪽은 사정이 달랐다. 지구인과 제법 비슷하게 생긴 슈슬리사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아직 환상적일정도로 황당하면서도 지구인의 감각에 일방적으로 맞춘 로맨스 소설 말고는 딱히 데이터가 없는 판에, 하물며 거대 쁘띠첼처럼 생긴 이 로크바와 지구인이 서로 번식을 위한 교미행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나는, 차마 그와 나와의 사이에서 섹스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도 못한 채 최대한 백과사전에나 나올 것 같은 단어를 동원해서 그 일을 떠올려 보았지만, 어느 쪽이라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고민 끝에, 촉수괴물이 나오는 야동을 어떻게 불법적인 경로로 구해서 보려고 했지만, 때맞추어 퇴근한 윤진 언니에게 제대로 걸리는 바람에 혼쭐만 나고 말았다.

로크바의 번식 말인가요?”

결국 돌파구는 시셸밖에 없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하고도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어보았고, 시셸은 사실 내가 정말로 구세주이고 지금까지 구세주 노릇을 싫어해서 도망다닌 것은 그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이라고 말하더라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을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말은, 사비리키와의 관계에 뭔가가 생겨났다는 뜻으로 봐도 되나요?”

애가 생긴 건 아니고요.”

물론 그렇겠죠. 있잖아요, 이사나.”

미리 말하겠는데 먼저 고백한건 사비리키거든요? 제가 번거롭게 한 게 아니거든요?”

아니, 알겠어요. 알아요. 이사나가 그렇게 섣부른 행동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시셸은 안타깝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 일은, 보고할 수 밖에 없겠네요. 인정하죠?”

언제는 보고서 안 쓴 슈슬리사처럼 그러시네요. 쓸 줄 알고 있었으니까 걱정 마세요.”

이봐요, 이사나. 지구인의 심리에 대해서는 계속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당신처럼 한참 성숙기에 접어든 십대 중반의 소녀에 대해서는 특히 섬세한 지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있어서는 어떤 보고서에도 별다른 이견이 없어요, 나라고 해서 사춘기 여고생의 비밀을 있는 그대로 쓸 만큼 뻔뻔하진 않다고요. 당신은 충분히 사비리키에게 기준치 이상의 관심을 보이고 있었지만, 난 그걸 내가 못 본 것으로 해 두었단 말이죠. 둘이 사귀기까지 하니 이건 보고를 하지 않을 수 없고요.”

보고하게 되면, 사비리키는 다른 곳으로 가게 되나요?”

사비리키는 우리의 손님이에요. 그가 원하는 한 여기 머무를 수 있어요.”

그러면, 어리석은 사랑에 빠진 탓에 내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되는 모양이네요.”

그렇지도 않아요. 모처럼 양육자와 적당한 사이를 유지하며 잘 지내고 있는데, 성년까지 이대로 머무르게 하는 편이 합리적이죠.”

그럼, 뭐가 변하는 거예요?”

변하는 것 없어요. 겁 먹었어요?”

아뇨.”

그럼 뭔가 변했어요?”

아뇨, 아니...... 좀 더 침착해졌어요. 학교도 꼬박꼬박 가고. 해양연구를 하려면 무슨 공부를 해야 하는지 사비리키가 이야기해줬는데, 지금보다 공부 시간을 더 늘려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좋군요.”

아무리 짜증나는 일이 있어도, 학교에는 꼬박꼬박 가기로 했어요.”

나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가 여러 번 학교를 빼먹었던 것도, 알고 있죠?”

그건 보고서에 적었어요. 어차피 학교 출석 기록이 있으니까.”

학교에도 가기로 했어요. , 애들이 괴롭히는 건 사실인데...... 견뎌봐야죠. 사비리키는 전염병을 옮긴다고 말도 안 되는 민원신고까지 들어갔어요. 심하잖아요.”

긍정적이네요. 어지간해선 이쪽의 일은 관찰만 하고 별다른 조치는 하지 않는 쪽이긴 하지만, 당신 말대로라면 상부에서서도 당신과 사비리키의 교제에 대해 어떤 조치를 하진 않을 거예요. 당신이 충분히 성숙해질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 안심해도 되겠어요.”

하지만 말이에요, 시셸.”

?”

, 사랑이란 어떤 종류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이건 그냥 내 결여된 부분을 채우기 위한 그런 욕망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요.”

.”

이건 제대로 된 일일까요? 그는 제대로 된 어른이고, 나는 불안정한 어린애일 뿐인데.”

어차피 지구인은 나이 들어도 불안정하지 않습니까.”

그치만요.”

당신이, 그의 결여를 채워줄 수 없어서 불안한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생각해보지 그래요. 그는 정말로 뛰어나지만, 여기서는 젤리 닮은 애완동물, 전염병을 옮기는 외계생물, 그런 취급을 당해요. 그런 그의 외모는, 적어도 여기서는 어떤 결여가 아닐까요?”

그건 중요한 일은 아니잖아요.”

물론 그렇죠. 그리고 그, ‘그럼에도 불구하고곁에 있고 싶다는 게 사랑이라면, 당신의 사랑도 딱히 불안해할 종류의 것은 아닐텐데요. 곁에 있고 싶은 거죠?”

그와 내가 살아갈 시간이 너무 달라서 슬퍼요.”

그럴 거예요. 다른 종과 사랑에 빠진 이들이 흔하게 겪는 문제죠. , 인생에 사랑이 한 번만 찾아오는 건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도 될 문제예요. 보통은 자신과 같은 종을 짝으로 맞는 것이 가장 무난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방법은 많으니까. 일단은, 헤어지는 게 두렵다면 사비리키의 세포를 배양해보는 건 어때요? 작년까지 우리 사무실에서 쓰던 실험도구들, 그대로 꺼내줄 수 있는데.”

사비리키가 동의할까요?”

싫어하지 않을 거예요. 그도 지금 지구에 연구하러 왔으니까. , 재미있는 것을 알려줄께요. 로크바들의 촉수 상피세포는 조금만 약품 처리를 하면 이것저것 배양할 수 있어요. 그 부분의 세포만 떼어서 다른 종과 키메라를 만들기도 쉽고. 그래서 자기 몸에다가 이것저것 샘플들을 배양해서 다니는 로크바 학자도 본 적이 있는데.”

정말요?”

오늘 돌아가면 전에 쓰던 것들을 다 꺼내놓을테니, 내일부터 나와요. 전에도 좋아했죠? 이런 것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리키의 세포라니. 키메라라는 말을 할 때, 시셸은 분명히 웃었다. 해봐도 된다는 뜻일거다. 나와 사비리키의 속성을 조금씩 가진 배양체를 만들어 볼 수도 있을 거다. 두근거렸다. 그 세포들 자체가 오래오래 살아남을 수는 없겠지만, 여기다 지난번 얻어 두었던 헬라세포를 활용하면 뭔가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언젠가 사비리키와 헤어지게 된 뒤에, 그를 추억할 수 있는, 계속 살아서 분열하는 세포덩어리들을 만들어낼 방법이. 사비리키가, 이런 내 생각을 징그럽다고, 너무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조금은 부끄러워서.

문득, 윤진 언니의 마음은 시셸에게 닿았을까 궁금해졌다. 시셸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까. 만약에 시셸이 윤진 언니의 마음을 알게 된다면,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변하게 될까. 나는, 지구인에게는 신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저 슈슬리사가, 인간의 어떤 결여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아주 조금은 심술궂은 생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시셸의 얼굴을 왼쪽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올려다보았다.

이사나?”

그거 알아요? 당신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지구인이 있어요.”

“,,,,,,”

차마 말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알아요?”

 


  

윤진 언니는 서른 한 살이었다. 나를 낳은 내 친엄마보다도 나이가 많을 터였다. 명작이라고 불리는 고전 소설들을 읽어도, 노래 가사를 보아도, 사랑에 목매고 죽고 사는 것은 내 나이, 십대 중반부터 이십 대 중반 까지의 이야기였다. 서른 살 넘은 사람들도 사랑하고 이별하고 살겠지만, 자기 길을 택해서 자신의 삶을 쌓아올려가는 나이에 사랑이 인생의 전부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이후의 사랑은, 그저 소소한 해프닝일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시셸이 윤진 언니의 감정을 묻건 말건, 혹은 그 감정에 대해 분명한 거절을 표하더라도, 그런 것이 윤진 언니의 인생을 어떤 식으로든 뒤흔들거나 망가뜨릴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 개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사비리키의 세포들도 시셸의 사무실 구석에서 무난히 잘 배양되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방에 가방을 던져놓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 뜻밖에도 천정 쪽 배관에 목을 맨 윤진 언니를 보았을 때, 나는 출근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는가 싶어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너무 비현실적이라 비명은 나오지도 않았다. 눈 앞에 죽은 사람이 매달려 있는데, 느껴지는 이 요의도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매달려 있는 언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리고 손을 씻었다. 살인이었다면 뭔가 증거가 남아있을지도 몰랐지만, 이건 그런 문제는 아니었을 거다.

나는 조심스레, 언니의 맨 발등을 손으로 건드려보았다. 단단하지도 물렁하지도 않은, 뭔가 상태가 좋지 않은 고깃덩어리를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고, 기분나쁜 냉기가 돌았다. 그때, 언니의 잠옷 바지에 남은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 죽은 거구나. 그 생각이 그제야 머릿속을 치듯이 다가왔다.

목을 매고 죽은 사람은 혀를 이만큼 빼문다는 말을 들었다. 언니의 얼굴은, 풀어내린 머리카락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욕조 안쪽으로 들어가 굳이 언니의 얼굴을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손을 씻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멍했다.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잠시 주저앉았다가, 사비리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비리키는 곧 돌아오겠다고, 어서 경찰에 연락하겠다고만 말했다. 시셸에게 먼저 전화를 걸고, 다음으로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경찰과 통화하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긴 사제관이라고. 성당 뒷마당이야. 이런데서 자살을 하다니. 신부님이 아시면 뭐라고 하시겠어. 한숨을 쉬다가, 나는 울지 않는 내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윤진 언니가 죽었는데, 이 와중에 이렇게 차분하게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나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거야. 괴물 소리를 들어도 싸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눈물도 나지 않는 거라고 애써 생각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진 언니였다. 이 와중에, 죽은 윤진 언니를 가엾게 생각하지 못하고, 괴물같은 나를 발견하고 또다시 연민하고 있는 것이 더 한심했다. 나는 억지로라도 울기 위해 애써 슬픈 생각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눈물 대신 오히려 눈알이 뻑뻑한 느낌만 들 뿐이었다.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주말이면 사비리키의 세포들과 합성해보려 했던 헬라 세포 생각이 났다. 죽지 않고 계속 분열하는 인간세포, 헬라 세포의 주인이었던 헨리에타 랙스는 윤진 언니와 같은, 31세에 죽었다. 그 본체인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남은 세포 생각이 났다. 나는 마루에 앉아 경찰이 오기를, 경찰이 아니라도 누구든 빨리 와 주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이 마룻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윤진 언니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윤진 언니는 그때도, 지금 입고 있는 그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동안 계속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직장에서의 일로.”

“......고인은, 진화 이전 세대예요. 자연출산 마지막 세대들의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서가 나와 있을 정도죠.”

상대적 박탈감.”

그럴만한 징후는 없었습니다. 어제도 여기 왔다갔지만, 평소와 다르지 않았어요.”

시셸은, 나를 대신하여 할 말은 다 했다. 어차피 나는 미성년자였고, 내 말이 딱히 중요하게 여겨지기 어려웠고, 뭔가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시셸의 말들은, 일단은 다 사실이기는 했다. 윤진 언니는 자연출산 마지막 세대였고, 그 세대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높은 자살율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언니는 때로는 그 점을 들어 자신이 생존자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통계상으로 그 희생자쪽에 설 수밖에 없을 거다. 나는 구석에 앉은 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윤진 언니의 시신이 내려지고, 바닥에서 1차적인 검안이 이루어졌다. 언니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경찰이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 댁의 위탁아동입니다. 신부님께서, 저희를 대신하여 이 아이를 맡아주셨지요.”

시셸은 그렇게만 설명했다. 성당에 얹혀 살고 있는, 뭔가 출신이 복잡하다는 아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지, 경찰은 아, 그 아이요, 하고 나를 잠시 돌아보고는,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나는 안심해야 하는건지, 아니면 절망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몸이 그대로 늘어져 바닥에 들러붙을 것만 같았다. 날이 덥기 때문일까. 살아있던 사람이 죽은 그 아찔한 감각, 새파란 가방에 담겨 실려가는 윤진 언니의 몸에서 풍기는, 무언가가 썩기 직전의 단내와 지린내.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미치기 직전까지 몰아갔다. 신부님께 전화를 드려야 하는데. 오늘, 교구 회의가 있다고 하셨는데.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까. 놀라실까. 우실까. 아니면 자살하는 죄를 지었다고 화를 내실까. 신부님께 전화하는 일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그때, 문가에 서 있던 경찰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잠시만요.”

나는 슬리퍼를 끌고 마당으로 나가, 문 앞에 선 경찰들을 밀며 골목으로 나갔다. 집 앞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로, 사비리키가 괴물 취급을 당하며 밀려나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민원 넣었는데, 아직도 이런 걸 키우고 있어?”

아줌마가 민원 넣었어요? 윤진 언니가, 그런 민원 들어온다고 계속 고민했는데!”

나는 동네 아줌마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악을 썼다. 뒤따라나온 시셸이 경찰에게, 사비리키에 대해 설명하는 사이 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패악질을 부리듯 소리를 질렀다.

내가 처음 여기 성당에서 살게 되었을 때도, 동남아 튀기년 소리가 입에서 떨어지질 않더니. 외계에서 온 연구원을 보고는 전염병을 옮긴다는 둥, 괴물이라는 둥. 나요, 3년만 있으면 여기 떠나도 되는데, 여기서 떠나면 이동네 쪽으로는 침도 안 뱉을 거예요. 아까워. 윤진 언니가 왜 죽었는지 알기나 해요? 내가 여기 살아서? 아니면 댁들이, 자기들이랑 눈곱만큼만 달라도 아주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댁들이 지랄을 해 쳐서?”

이사나, 그만둬요.”

시셸, 똑바로 봐요. 이 사람들, 당신이 슈슬리사가 아니었다면, 당신을 존경하지도 않을 사람들이야. 난 정말 여기, 이젠 진저리가 나서 못 살겠어요. !”

사비리키가 촉수로 내 손목을 감았다. 순간, 손 끝에 감전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 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 손을 털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대로 사람들을 향해 고꾸라졌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이 죽음은 내 탓이 아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절망해서 자살하는 것은, 나이가 서른이 넘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이건, 사랑 때문이 아니다. 그녀에게 죽을 이유는, 과하게도 많았다. 마지막 자연출산 세대. 그들은 학창시절 내내 바로 1년 아래인 진화자궁 1세대들과 쉼없이 비교당했고,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앞두고도, 기왕이면 더 우수한 자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진화자궁 1세대들에게 늘 밀려나곤 했다. 언니는, 나와 마찬가지로 이방인이었다. 결코 섞여들 수 없는, 계속 거부당하는. 이 죽음은, 언니 혼자의 죽음이 아니다. 이 죽음은, 그 수많은 통계의 한부분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나는, 윤진 언니가 죽음으로써 나의 어느 한 구석이 함께 죽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고정된 양육자가 없었던 인생에, 잠깐 쉬어가는 페이지가 있었다는 것. 나는 그 차이나타운에서의 시간들을 아마 그렇게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곳에서 머무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사람들 앞에서 말한 바로 그 말 때문에, 또다시 서식지를 옮길 처지가 된 모양이었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신부님이 아닌 실질적인 양육자였던 윤진 언니가 세상을 떠난 마당에 여기 더 눌러 앉아있는다는 것도 곤란하다는 이야기도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그 명확한 답이 나오기 전까지, 내 방 구석에서 움츠리고 있었다. 두어 번, 신부님이 방 문을 열고 밥을 먹으라고 말씀해주신 것이 고작이었다. 신부님은, 며칠 새 부쩍 늙어버리셨다. 자살은 죄가 된다고 말씀하시던 그 신부님의 조카가, 사제관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유서조차 없었다. 죽은 후에야, 윤진 언니가 살아있을 때 정신과에 꾸준히 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을 뿐이었다.

이사나, 이리 좀 나와 보거라.”

며칠이나 이렇게 쓰러져 있었을까. 눈을 뜨면, 머리맡에 놓인 자리끼를 들이키고 다시 고꾸라졌다. 시간감각이 둔해진 가운데, 매미 소리만이 내 고막을 계속 두드렸다. 나는 꿈을 꾸는 듯, 허우적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이사나.”

지금 가요......”

사비리키 씨가 작별 인사를 한다고 왔구나.”

사비리키. 나는 눈을 깜빡였다. 필사적으로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나는 기듯이 문으로 다가갔다.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너무 깡마르고 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저하는데, 가만히 문이 밀리고 촉수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비리키......”

전근 명령을 받았어요, 이사나.”

어째서요.”

이번에 윤진 씨의 자살 원인중에, 민원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있었죠. 그 민원중에, 나로 인한 것이 적지 않았거든요.”

“......”

이사나.”

당신 때문이 아니잖아요!”

그래요, 이사나. 그리고 당신 때문도 아니에요.”

사비리키의 촉수가 내 머리를 쓰다듬듯이 톡톡 쳤다.

시셸에게 주의깊지 못한 말을 한 것에 대해서는 들었어요. 당신이, 아마도 그 일 때문에 더 자책하고 있을 거라고.”

“......”

당신은 사랑에 빠진 소녀고, 다른 사람의 사랑에도 한참 관심이 몰릴 시기니까. 시셸도 나도, 당신의 그 죄책감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있어요. 당신 잘못이라고 생각했겠죠. 시셸에게 그 감정이 알려진 것 때문에, 어쩌면 시셸이 그녀에게 냉담한 거절이라도 했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

시셸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그래요. 시셸은 나처럼, 자기 자신에게 그저 솔직하기에는 아직 어린 청년이라서.”

나는 문을 열었다. 문 밖에, 사비리키가 파르스름한 빛을 내며 웅크려 있었다. 거대한 젤리같은 몸. 길고 탄력있는 촉수. 다들 괴물이라고 부르는 그를, 나는 사랑하고 싶었다. 정말로 사랑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것이 되고 싶었다. 소녀들이 말하는 로맨스에서도 가장 숨죽여 속삭이는 그 절정을, 그에게서 내려받고 싶었다. 나는 내가,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그에게 바다를 보여주러 나갔다가,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그 모든 순간들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이어진, 성당 창고 구석에서 발견했던 디지털화 되지 않은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영상들이 이어져 지나갔다.

“......, 예전의 양육자처럼요?”

그래요. 젊은 슈슬리사는, 자기 충동과 감정을 어떻게 해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지 아직 알지 못하니까요. 감정에 몸을 맡기는 쪽도 있지만, 시셸은 불확실한 것에 대해서는 일단 시간을 두고 인내하는 친구예요.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다른 종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도 컸을 거예요. 계속, 생각하고 있었죠.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사비리키는 움찔거리며 덧붙였다.

내게, 상의했어요.”

, 사랑해요?”

그래요.”

사비리키는 촉수로 내 뺨을 가만히 더듬어 내려왔다. 나는, 그제야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비리키는 나를, 내 어깨를, 그 촉수로 가만히 감아 안았다. 탄력있는, 그의 반투명한 몸 속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당신이 성년이 되는 것을 보고 싶었어요. 당신이 바다로 가는 것도.”

사비리키.”

당신이 배양한 내 세포를 봤어요. 여기서 헬라 세포라고 불리는 인간 세포를 이식하려고 했다고 들었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리키는 자신의 등에 묶인 짐에서 능숙하게, 손가락만한 유리병을 꺼냈다. 그 유리병 속의 조직은, 마치 사비리키의 일부인 것처럼 그가 빛깔을 달리할 때 마다 같은 빛을 띠며 반짝였다.

우리 식으로 손을 좀 봤어요.”

사비리키.”

괜찮다면, 당신의 상피세포를 얻어가고 싶어요.”

제 세포를요?”

설명을 들었을지 모르지만, 로크바의 촉수조직 상피세포는 조금 처리를 하면 다른 세포를 이식해 키울 수 있는 배지로 쓸 수 있어요. ...... 괜찮다면 그렇게 당신을 기억하고 싶어서.”

한번도 입맞추어 볼 수도 없었던 그를 위해, 나는 면봉으로 입 안을 긁어냈다. 물만 마셨을 뿐 계속 굶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너무 울었기 때문일까. 입 안은 바싹 말라, 아팠다. 상피세포 약간과 피 몇 방울. 사비리키는 가져온 시험관 안에 그 조직을 담았다. 그게 전부였다. 그게 끝이었다. 나는, 그 다음 날, 이곳의 사제관을 떠나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다행히도, 해양연구원이 되겠다는 내 장래 희망과 적성이 받아들여져, 나는 해군사관학교가 있는 진해로 보내지게 되었다. 성년이 될 때 까지의 보호자 겸 관찰자로서 시셸이 동행하게 되었지만, 그와 함께 사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나는 아마도, 예상했던 것 보다 조금 일찍, 독립 생활을 하게 될 모양이었다. 이곳에 올 때 가져왔던, 낡고 작은 가방 하나에 넘치도록 옷과 짐을 눌러 담았다. 사비리키가 살아있는 한 계속 분열하며 그와 연결되어 있을 사비리키의 세포 조직과, 신부님께서 챙겨주신 윤진 언니의 묵주를 맨 위에 담고, 나는 가방을 단단히 잠갔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나는 시셸이 짐을 챙겨 오기를 기다리며, 붉은 등이 켜진 거리를, 붉어져가는 하늘 아래 잿빛과 황토빛 뒤엉킨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내게는 어머니와 같았던 윤진 언니의 죽음에 대해, 나는 언제까지나 부채감을 지울 수 없을 거다. 그것이 나 때문이 아니었다고 해도. 내가 시셸에게 했던 그 말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이 황토빛 바다를 기억할 때 마다, 언니를 떠올리며 먹먹해지겠지. 그 마음 속 황토빛 바다에 햇살이 내려앉을 때 마다, 나는 내가 처음으로 온전히 사랑했던 존재를 떠올릴 것이다. 존재하는 한 나를 기억하겠다고 했던, 인간도 슈슬리사도 아닌, 낯선 모습을 하고 내게 다가온 그를. 나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어딜 잘라야 할지 알지 못한 채 평생을 끌고 다녀온 탯줄을 잘라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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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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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ible 13.07.08 22:22 댓글

    이 글 '다시 한 번 크리스마스'와 연결되네요. 그 글도 감동적이었지만, 이 글도 재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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