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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a 만월랑

2013.05.31 23:2605.31

만월랑

 


다시는 울지 않는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특히 남자란 가증스러운 종족 앞에서는. 다정한 얼굴로 다가와서 무엇이든지 다 줄 것처럼 속삭이는 남자, 원하는 것을 들어 주지 않으면 배신당한 것처럼 몸을 떠는 남자, 소중한 것을 달라고 하면서 몸만 탐하고 나면 등을 돌리는 남자, 사랑한다는 말을 무기로 여자에게서 얻을 걸 얻고 나면 잊어버리는 남자, 어기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요란한 약속을 해 놓고서 아무 소식도 없는 남자, 그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꼬리를 잡을 수 없도록 종적을 감춘 남자, 들려오는 소문은 교묘하게 정체를 숨기고 나 외에 다른 사람과 놀아난 무용담뿐인 남자, 나를 속여 넘긴 이야기를 무용담이랍시고 뿌리고 다니는 남자, 울린 여자 수를 훈장처럼 새겨 두는 남자, 울린 여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자기가 울린 여자의 이야기를 비련처럼 각색해서 다른 여자를 꾈 때 쓰는 남자, 세상에 다시없을 멍청한 족속처럼 여자를 이야기하면서 여자를 품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는 남자, 남자, 남자, 남자.
그런 남자들 앞에서는 절대로 울지 않는다. 어떤 남자 앞에서도.
그러니까, 지금만은 실컷 울도록 내버려 두자. 우는 나를 용서하자. 이런 일은 이제 절대로 없을 테니까.
하늘을 가득 메운 듯 눈부신 보름달, 눈이 내려 모든 소리를 빨아들이는 숲, 달빛보다 더 빛나는 아름다운 은색 털을 가진 늑대 친구. 내가 우는 건 비밀이야. 너희만이 내 눈물을 볼 자격이 있어. 그러니까 쉿.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조금만 있으면.


*    *    *

예나는 꽁꽁 언 물을 힘겹게 깨서 물을 길어 올렸다. 평소라면 이런 추운 날에는 이미 떠 놓은 물로 아끼고 아껴서 조금씩 써야 하겠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새로 뜬 물을 마시고 그 물을 데워서 몸을 씻으면서 새 해를 맞이하는 것이 예나 나름의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해는 마침 마지막 날이 보름이라 밤이 되면 밖에 나가서 달 구경도 할 참이었다. 운이 좋으면 3년 전처럼 눈이 쌓인 숲 위로 둥글게 떠오른 달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나는 물동이를 양 어깨에 이고 집으로 들어가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물동이는 무거웠고, 이제 집에는 물동이를 받아 줄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1년이나 지났다. 도시 같은 곳은 싫다고 3년 전에 외진 곳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혼자 오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숲에서 실족사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1년 동안 예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이 그 죄책감이었다. 하지만 그 1년 동안 혼자인 것에 익숙해졌고, 뭐든지 혼자서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 전의 2년을 합한 것보다도 더 바쁜 날을 보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인 것도 아니었다. 예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숲을 따라 마을로 가다 보면 어느 새 자신의 옆으로 가볍게 걸으며 보조를 맞추고 있는 늑대 친구가 있었다. 3년 전에 이곳에 처음 와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울러 갔을 때 만났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점잖고 얌전해서 처음에는 주인이 있는 개인 줄 알았다. 거리를 지키고 다가오지 않으면서도 빤히 바라보는 투명한 눈이라든가, 눈에 반사된 달빛처럼 여러 가지 빛으로 빛나는 은색 털이라든가 가지런히 모은 앞발이 너무나 단정해서 야생의 짐승 같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일은 없었지만, 외롭고 주저앉고 싶어질 때쯤 숲에 가면 언제나 그 친구가 맞아 주었기에, 그 친구의 눈을 바라보다가 아무 생각하지 않고 나란히 걷다 보면 어느 새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고 화나고 조바심 내던 일들이 별것 아닌 것처럼 작아졌기에 그 친구의 존재는 작게 볼 것이 아니었다.
예나는 물을 들여 놓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시간을 가늠했다. 생필품을 몇 가지 사러 마을에 내려갔다 오면, 딱 알맞게 해가 질 것 같았다. 그러면 집에 돌아와서 물을 마시고 목욕하고 숲으로 산책. 달도 구경하고 친구도 만나고, 이야말로 완벽한 새해맞이가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니, 올해는 좋은 해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을 울타리를 지나 세 걸음이 지나기 전에 그 생각은 바뀌었다.
예나는 아주 멀리에서부터 군노를 알아보았다. 3년이 지나도 최고급 은담비 털로 만든 외투를 입고 세상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는 것처럼, 자신이 세상 모든 사람을 아는 것처럼 넉살 좋게 뺀질거리는 걸음걸이가 달라질 리 없었고, 3년이 지났다 해도 그 얼굴과 걸음걸이와 몸짓을 예나가 잊을 리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은 왜 도시에서 대연회에 참석하면서 여기저기 아가씨들 마음을 사로잡아 보겠다고 기웃거리고 있을 놈이 이런 벽지에 와 있느냐는 것이었다. 분명히 타깃으로 삼은 여자가 이곳에 와 있거나, 사고를 치고 도망쳐 와 있는 것일 게 뻔했다.
하지만 왜 하필 이곳에, 하필 이때인 거냐.
예나는 아주 잠시 고민했다. 이 좋은 날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군노를 피해 멀찍이 갈 것인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옆을 스쳐 지나갈 것인가. 피해서 가자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런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 살짝 짜증이 났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려니, 그러다 잘못 걸려서 군노와 마주 보고 어색한 대화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떠오르면서 이 또한 살짝 짜증이 났다. 어느 쪽 짜증이 더 무거운가 재 보자 전자가 퍽 내려갔다. 예나는 팔짱을 끼고 잠시 차가운 웃음으로 준비를 한 후, 태연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예상한 대로 군노는 예나를 알아보았다. 그것도 생각보다 먼 곳에서부터 예나를 보고 반가운 얼굴을 하고 걸어오는 것이었다.
“예나! 나야!”
예나는 계속 걸었다. 군노와 얼굴을 맞댈 만한 거리가 되자 반갑다고 만면에 웃음을 띤 그의 얼굴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상한 사람 다 본다는 듯이 한 번 아래위로 훑어봐 주고 그대로 앞으로 나갔다.
“예나! 나라니까? 어딜 가는 거야!”
“누구세요?”
예전에 좋은 인연이 아니었고, 오랜만에 만나서 모른 체하는 데다 이렇게까지 야박하게 굴면 조금은 눈치 채 주어도 좋으련만, 군노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무슨 소리야, 나야, 나, 군노. 기억 못해? 솔직히 내가 너한테 잘못한 건 많지만 그래도 우리 꽤 오래 사귀었잖아. 전혀 기억 못한다니 거짓말하지 마.”
“아아, 그래, 군노. 그 이름은 기억하지. 그런데 댁이 군노라고? 농담이겠지.”
“너야말로 농담도. 내가 군노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야.”
그래도 알아봐서인지 군노의 얼굴이 잠깐 펴졌다가, 이어서 나오는 예나의 말에 한층 더 구겨졌다.
“어머나, 미안. 정말 못 알아보겠는걸. 어쩌다 그렇게 얼굴이 썩은 거야?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아주 중년이 다 됐네.”
“주, 중년……. 너무하잖아.”
“미안. 내가 좀 솔직하잖니. 정말 오랜만이다. 나는 시장 보러 가던 중이거든? 그럼 나중에 볼 수 있으면 또 봐.”
“아니, 잠깐만!”
웬만하면 웃으면서 좋게 헤어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건만. 예나는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돌아섰다. 조금만 더 짜증나게 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자신이 두려웠다.
“어, 저기, 좀 하기 그런 이야기지만…….”
그럼 아예 말을 꺼내질 말든가.
“저기, 내가 우리 동네면 이런 일이 없는데, 예나 너 돈 좀 있냐?”
그래, 그런 말을 할 줄 알았지.
“좀 있지.”
“다행이군! 잠깐만 빌려 줄 수 있겠어? 너도 알겠지만 내가 우리 동네면 이런 일이 애초에 벌어지질 않는데 말이지…….”
어련하시겠어요.
“내가 보기엔 너도 돈이 많아 보이는데, 왜 굳이 헤어져서 딴 길 가는 사람한테 빌려달라고 하는 거야?”
“무슨 소리야, 돈이 없으니까 이렇게 염치 불구하고 너한테 손 내미는 거 아니겠냐.”
“너 입은 털외투. 그것만 팔아도 한 달은 먹고 살겠는데?”
“야, 자꾸 농담하지 말고……. 이 추운 데 외투를 팔라니, 나 보고 얼어 죽으라는 거야?”
“그거 팔아서 한 달 동안 집구석에 처박혀서 살면 되지, 뭘 싸돌아 다니려고 그래. 돌아다니다가 이번엔 또 어떤 여자를 울리려고? 아니, 이미 울리고 도망 온 건가?”
처음에 군노는 예나가 조금쯤 신경을 거스르더라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참아 주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으나, 대화가 진행되면서 예나의 말과, 시종일관 냉소적이고 같잖은 경멸로 가득 찬 눈매를 보면서 그 결심이 눈이 녹듯 사라져 가는 듯했다. 원래도 그다지 상대에 대해 관용도가 높은 사람은 아니었다. 예나는 군노의 표정을 보면서 빠져야 할 타이밍을 슬슬 재고 있었다.
“농담이었는데, 벌써 열 받았어? 설마 정곡을 찔린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믿어. 사람이 3년이 지났으면 좀 변한 구석이 있어야지, 여전히 그렇게 같으면 어떻게 해.”
“뭐라고?”
“계속 변하지 않는 게 그렇게 좋았으면, 마음도 그렇게 쉽게 왔다 갔다 변하면 안 되지. 변하지 말아야 할 건 변하면서, 좀 바뀌었으면 하는 부분은 그대로 그렇게 남아 있다니, 너도 참 구제불능이다.”
“예나 너 진짜……!”
“왜, 또 때리게? 여기는 시장 한복판이거든? 이렇게 탁 트인 데에서 때릴 배짱이 있으면 때려 보시지. 그럴 배짱이 없으면 아예 꼬리를 말고 꺼지시든가.”
군노의 눈에서 무언가 폭발했다. 하지만 역시 군노에게는 사람들이 모두 수군거리면서 이쪽을 돌아보는 시장 한가운데에서 사고를 칠 만한 배짱은 없었다. 달리 말하면 그렇게 멍청하기만 한 자식은 아니었다. 군노는 입을 꾸욱 다물더니 얌전하게 한 발짝 물러섰다. 예나는 그게 또 불안해서 얌전히 군노에게서 한 발짝 더 물러서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두 발짝으로 벌려 놓았다. 하지만 무언가 아쉬워서 마지막으로 몇 마디를 더 던졌다.
“다시는 만나지 않길 빌겠어. 그게 피차 행복한 결말일 것 같으니까, 빈대를 붙으려면 딴 데 알아봐. 더 이상 귀찮게 굴면 난 책임 못 져.”
군노의 눈이 다시 번쩍 타올랐다. 예나는 하지 말아도 될 말을 더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찜찜했지만, 끝까지 눈에 담은 경멸을 잊지 않고 군노를 쏘아보았다. 그러면서도 발을 빨리 놀렸다. 적어도 그 말은 진심이었다.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아직 미련이 남았던 속은 단단히 여물었지만, 그 대신에 정말로 군노를 경멸하고 혐오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다른 의미로 이것도 비참한 변화였다.
예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살짝 매만졌다. 그래도 여전히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 좋은 날이었다. 잠깐 일어난 불쾌한 일로 완전히 기분을 망치지는 말자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되도록 시장을 빨리 보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던 것도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군노는 다시 보이지 않았고, 예나는 적잖이 안심하면서 집에 도착해 요리재료를 풀었다.
감자를 깎고, 양파를 썰면서 예나는 문득문득 고개를 들어 바깥과 집 안을 둘러보았다. 정말로 신경 쓰고 있지 않을 때라도, 누군가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시선을 느낄 때가 있는데, 지금이 꼭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착각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마다 매번 확인해도 예나를 보는 사람은 없었다.
착각이라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예나는 요리 속도를 올렸다. 새 물을 마시고, 새 물로 목욕하는 것은 안전해진 새해로 미루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갑자기 숲에 있는 늑대 친구가 몹시 그리워져서, 요리만 마쳐 놓고 숲으로 가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늑대 친구와 함께 걸으면서 눈밭이 비친 그 고요한 눈을 보고 있으면, 오늘 벌어진 일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길 바랐다.
마음은 점점 조급해져서 예나는 목도리도, 장갑도 잊고 외투만 걸친 채 집을 나섰다. 다행히 엄청나게 춥지는 않은, 다정하고 싸늘한 한기가 맴도는 마지막 밤이었다. 집에 돌아올 때쯤에는 보이지 않았던 보름달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눈이 쌓인 숲은 멀리서 보기에도 괴괴하고 신비로웠다. 예나는 대개 늑대 친구를 만나곤 했던 숲 언저리 샘으로 가기 위해 발을 재게 놀렸다.
“아! 안녕!”
그런데 다른 때와 달리 늑대 친구가 숲 바깥에 엎드려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아니면 무언가를 지키는 것처럼 엎드려서 앞을 보던 늑대 친구는 예나의 인사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 엎드려 있던 모양부터 일어나는 자세까지 언제나 감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단정하고 완벽한 동선을 보여 주어서 예나는 새삼 감탄했다. 게다가 이렇듯 기분이 안 좋은 날, 숲 밖까지 나와 있는 늑대 친구의 타이밍에는 감사를 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해도, 그것만으로도 이미 예나는 기분이 상당히 좋아졌다. 남자란 의도가 좋았다 해도 때를 못 맞추고 대개는 너무 늦게 사과를 한다거나 필요할 때 곁에 없었다. 거기에 비하면 훨씬 낫다고 생각하면서 예나가 재차 인사를 하려는 순간, 친구가 으르렁거렸다.
“무슨 일이야? 설마?”
예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친구는 사람인 자신보다도 눈도 좋고 귀도 좋고 냄새도 잘 맡을 테니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저러는 것일 거라고 믿었다. 과연, 조금 떨어진 모퉁이에서 낯익은 사람이 손에 칼을 들고 나타났다. 여전히 잘 차려입은 군노였다.
“너……! 설마 날 따라온 거야?”
예나는 자기도 모르게 늑대 친구 옆까지 한 달음에 뛰어갔다. 군노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걸음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예나는 친구 옆까지 가서 다시 뒤를 돌아보고 입 밖으로 새어나오려는 비명을 참았다.
소리 지르면 안 돼. 무서워하면 안 돼. 그러면 더 난폭해질 거야. 그리고 다정했던 때하고는 딴 사람처럼 난폭해져서 때리겠지. 안 돼. 떠올리지 마. 자극하지 마.
하지만 군노의 얼굴에는 벌써 무자비하고 가차 없는 폭력의 징후가 떠올라 있었다. 예나는 소용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소리 질렀다.
“오, 오지 마! 더 가까이 오면 여기 친구한테 물라고 할 거야!”
“그래 봐. 그 개새끼 죽여 버릴 테니까.”
예나는 놀라면서 친구 옆에 달라붙었다. 언제나 말을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던 그대로, 늑대 친구가 그 말을 듣고 귀를 빳빳이 세우고 목덜미의 털을 세우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 군노는 칼까지 들었다. 칼을 들고 난폭해진 군노는 곰도 잡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예나는 앞으로 뛰어나가려는 듯한 늑대 친구의 목을 잡고 매달렸다.
“안 돼! 위험해!”
“컹!”
짧게 경고하듯이 친구가 짖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군노가 눈을 밟고 먼 거리를 도약해 뛰어오고 있었다.
“아악!”
예나가 놀라 소리를 지르는 순간, 예나가 안고 있던 품안으로부터 은빛 화살이 쏜살같이 쏘아져 나갔다. 아니, 그것은 착각이었고, 늑대 친구가 재빨리 앞으로 튀어나가 도약한 것뿐이었다. 너무나 빠르고 완벽한 일직선을 그려서 거대한 화살이 튀어나간 것 같은 착각이 잠시 들었을 뿐이었다.
은빛 화살은 칼을 든 군노의 손으로 가서 박혔다. 군노가 짧게 욕을 섞은 비명을 내지르는 것이 들리는가 싶자, 눈에 피가 떨어졌다. 늑대 친구의 공격에 팔을 다쳐서 칼을 떨어뜨렸다. 군노의 반대편으로 착지한 늑대 친구는 역시 도저히 짐승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고요하고 위엄 있는 눈빛으로 군노를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늑대이고, 머리가 더 낮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군노가 아파서 몸을 구부린 한 순간에는 분명히 늑대 친구가 군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양이 꼭 지금 여기서 물러간다면 이 정도로 봐 주겠다는 듯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예나는 이 급박한 순간에 웃고 싶어졌다.
“죽여 버리겠어!”
하지만 피가 흐르는 손으로 군노가 다시 칼을 집어들자, 웃음은 쏙 들어가 버렸다. 군노가 다친 오른손을 보완하려고 양손으로 검을 잡고 늑대 친구에게 달려들었다. 예나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 한순간, 은빛 털이 달빛을 받으며 뭉텅이로 흩어졌다. 군노는 분명히 늑대 친구가 있던 지점에서 휘둘렀지만, 늑대 친구는 이번엔 또 다른 방향으로 도약했다가 착지했다. 그리고 다시 고요한 얼굴로 군노를 돌아보았다. 군노는 큰 소리로 욕을 하면서 다시 두 손으로 칼을 잡고 늑대 친구 쪽으로 붕붕 휘둘렀다. 늑대 친구는 그렇다면 후회하지 말라는 듯이 코웃음 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도약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늑대와 인간 사이에 물고 물리는 싸움이 일어났다. 예나는 여차하면 군노에게 던지려고 돌을 집어들었지만, 둘이 서로 물고 물리는 상황에서는 잘못 던졌다가 오히려 늑대 친구에게 맞을까 봐 던질 수가 없었다.
전전긍긍 보는 사이, 어느 새 군노가 쓰러지고 그 위로 늑대 친구가 올라타서 목 줄기를 물어뜯을 듯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늑대 친구가 예나를 돌아보기에 미소를 지어 주었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군노의 머리를 덥석 물 때에는 기겁해 버렸다.
“뭐, 뭐 하는 거야! 먹지 마! 죽이면 안 돼!”
하지만 늑대 친구는 곧 군노의 머리를 뱉었다. 퇘 하고 아주 맛없다는 듯이. 예나는 긴장이 풀려서 웃음이 나왔다. 나오다 보니 멈추질 않아서 계속 웃었다. 늑대 친구가 특유의 우아하고 단정한 몸짓으로 군노에게서 내려와 걸어왔다. 그 모습이 이제까지 본 모습 중 가장 예쁘고 귀여워서 예나는 팔을 벌렸다. 콱 안아 주고 싶어져서였다. 늑대 친구는 언제나 멈추던 거리에 멈춰서 외면하고 다가오지 않았다. 정말 점잖기도 하지 생각하면서 예나는 풀쩍 뛰어서 늑대 친구의 목을 안아 버렸다. 움찔 하고 놀라는 것,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뒤로 자꾸 몸을 빼려고 하는 것이 느껴지자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더 세게 안고 목털에 얼굴을 부볐다.
“컹!”
짖기까지 하다니, 정말 어지간히 부끄러운 모양이다. 예나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계속 그러고 안고 있었다. 늑대 친구가 빠져나가려고 몸을 비트는 게 느껴졌다. 지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느 한 순간 늑대 친구가 거칠게 몸을 비틀면서 위로 뛰어올랐다. 딱딱한 것과 딱딱한 것이 마주치는 소리가 굉장히 크게 울려 퍼졌고, 예나의 뺨에 피가 튀었다. 놀라서 비명을 지르면서 일어나니, 군노가 윗몸을 조금 일으켜 이쪽을 보고 비릿하게 웃는 게 보였다. 납작하고 날카로운 돌이 늑대 친구의 머리에 맞아 튕겨 나가서 한쪽에 뒹굴고 있었다. 군노의 기분 나쁘게 째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 힘은 없는지 이제 다시 널브러져 있었지만, 뒤통수를 친 게 너무너무 통쾌하고 즐겁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예나는 분노해서 일어섰다.
“너, 군노!!!”
아까 들었던 돌을 다시 들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주위가 빛으로 싸였다. 군노가 누운 채로 이쪽을 놀란 얼굴로 돌아보는 모습이 보이다가 빛에 가려서 희미하게 사라졌다. 예나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빛은 그물처럼 흔들리면서 주위를 맴돌았고, 예나가 앞으로 나가면 예나를 덮치듯이 앞으로 왔다가, 놀라서 예나가 물러서면 똑같이 뒤로 물러서서 일렁거렸다.
“이게 뭐지?”
두리번거리다가 예나는 늑대 친구에게 생각이 미쳤다. 큰 돌을 맞고 쓰러졌는데 잊고 있다니, 어서 치료해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뒤로 돌아섰다가 예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버렸다.
늑대 친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키 큰 남자가 이마에서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었다.


*    *    *

나는 병이 들었다.
하늘만을 보고 숲을 지키고 일족을 지켜야 할 문지기로서,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었다. 그 인간의 여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를 통해서 눈물이라는 것을 처음 본 때부터 나는 그녀를 가슴에 품었다.
그것은 숲의 모든 이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한밤중이었다. 언제나 누군가는 깨어서 움직이는 활기 찬 숲이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깨끗하고 노곤하고 나른한 잠에 빠지는, 일 년 중 하루뿐인 날이었다. 나는 그런 숲의 잠을 지키는 문지기였다. 신성하고 중대한 직책으로서 나는 내가 문지기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였고 언제나 숲의 기대와 나의 자부심에 걸맞도록 문지기의 사명을 다했다.
3년 전,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에도 나는 문지기로서 침입자를 경계하기 위해 그녀의 곁으로 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보았을 때, 인간의 눈물이라는 것을 처음 보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물이 눈에서부터 가득 나와서 뺨을 가득 적시고도 모자라서 턱 끝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얀 눈과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물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가장 놀랐던 것은, 그렇게 물을 떨어뜨리면서도 나를 돌아보고 희미하게 웃어 보이던 그 눈이었다. 물을 가득 담고 일그러지던 그 눈.
그리고 나는 병이 들었다.
병이 들어서, 약을 기다리듯이 그녀를 기다리고, 환영한다는 말 대신 조금씩 그녀에게 가까이 가고, 그녀가 보내 주는 웃음에 점점 중독되었다. 병이 들어서 약을 찾았다가 이제는 그 약에 중독되어서 더욱 깊은 병이 들었다. 이제는 무엇으로도 이 병을 치유할 수 없다. 늑대의 일족은 하나의 주인만을 섬기며 나는 이미 그녀를 가슴에 품었으므로, 이 병은 평생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나는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내가 이 병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를지라도.

*    *    *


예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남자를 자세히 뜯어 보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늑대 친구의 아름다운 은빛과 같았고, 분명 늑대와 사람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이마로부터 코로 이어지는 선과 눈썹, 감은 눈, 약간 고집스러운 입술은 매우 인상이 비슷했다. 무엇보다도 늑대 친구가 군노의 돌을 맞은 부분에서 이 남자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 증거로 보아서 그 빛이 나타났을 때 늑대 친구가 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 같았다. 도대체 그 빛이 무엇이기에? 예나는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빛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일렁이고 있었고, 방 하나 정도 될 만한 좁은 공간만 남긴 채 세상 모든 것을 가리고 있었다. 예나는 한숨을 쉬고 일단 손수건을 꺼내 주위에 있는 눈을 그 위에 얹었다. 그리고 남자에게로 다가가서 상처 위에 조심스럽게 눈을 문질렀다. 피를 먼저 지우고 뭘 해도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으로서는 그 뒤에 어떻게 해야 할지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쁜 자식.
비겁하게 뒤에서 돌을 던지고 그것도 모자라 그걸 자랑스러워하는 자식.
그래도 한때는 정말로 멋지다고 생각하고 사랑한 사람이었는데.
내가 그런 자식을 사랑했다는 게 부끄러워.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예나는 잠시 손을 떼었다.
아무리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이런 식으로 망가졌다고 해도, 실연당한 사람에 대한 마음이 그리움에서 경멸로 바뀌었다 해도 아직은 울 만큼 큰 일이 아니잖아. 이 정도는 3년 전에 비하면, 엄마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앞으로도 사람에게 실망하는 일 따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잖아.
자꾸자꾸 지금 일이 별것 아니라고 속으로 되뇌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만 할 뿐, 더욱 분노가 치솟을 뿐이었다. 예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손수건으로 남자의 상처를 닦아 주기 위해 뒤돌아섰다.
남자가 눈을 뜨고 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나는 너무 놀라서 순간 비명도 못 질렀지만 하나도 놀라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넸다.
“아, 깼어……요?”
남자의 눈은 투명한 파란색이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늑대 친구와 같은 눈이었다. 늑대 친구일 때 말을 건네거나 한 적은 별로 없지만 언제나 반말이었는데, 성인 남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버렸으니 왠지 반말을 하기가 조심스러웠다.
“거참, 이상한 일 투성이이네. 이 빛도 그렇고……. 갑자기 인간이 되어 버려서 놀란 건 아니고?”
정말로 놀란 건 예나 자신이었다.
남자는 여전히 고요한 그 눈으로 일어나 앉았다. 일어나서 앉는 데까지 동작의 선이 왠지 보통 사람과 달리 단정하고 뭔가 달랐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평소 늑대 친구가 떠올라서 예나는 웃어 버렸다. 왜 웃느냐고 하는 듯한 눈으로 예나를 쳐다보기만 하는 그 표정마저도 영락없이 늑대 친구였다.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목소리도 너무나 고요하고 점잖아서, 평소에 늑대 친구가 가지고 있던 인상 그대로였다.
“이게 제 원래 모습이니까요.”
“네에? 하, 하지만, 분명히, 그, 어…….”
“이렇게 인사드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은월이라고 합니다.”
예나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멀찍이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조금 더 뒤로 물러서자 아까처럼 빛의 막이 일렁이면서 예나를 안으로 밀어넣었다. 갇힌 꼴처럼 되어서 은월이란 그 남자와 어쩔 수 없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은, 은월이라뇨? 이게 원래 모습이라고? 왜, 아니, 도대체…….”
“미안합니다, 숨기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 걸 탓하는 게 아니라!”
소리를 질러 버리고 나서 예나 자신이 놀랐다. 자기보다 머리 두 개는 키가 클 것 같은 남자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자신도 놀라웠지만, 그 말에 얼굴을 붉히는 상대의 반응에도 놀랐다. 대저 남자란 것은 여자가 잘해 주면 기어오르고, 대들면 화내는 인종이 아니었던가? 하긴 이쪽은 원래 늑대였구나.
“미안합니다.”
“왜 또 미안한데?!”
“이 공간은 제가 위협을 받으면 더 이상의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서 보호 차원으로 만들어지는 공간입니다. 당신까지 말려들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미안합니다.”
“그거야 뭐…… 날 지키려다 그런 건데 어쩔 수 없지……. 상처는 괜찮아?”
상대가 너무 고분고분하고 점잖다 보니까 다시 자연스럽게 반말이 되어 버렸다. 예나가 다시 손수건으로 상처를 닦아 주려고 다가가자, 은월이 흠칫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미안합니다.”
“이, 이번엔 또 뭐야?”
“가까이, 계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이번엔 또 왜?”
“그건…… 그냥 모르시는 게 더 낫습니다.”
“말해 주지 않으면 가까이 더 가겠어.”
그저 땡깡을 부리고 싶은 기분인지도 몰랐다. 장난을 치고 싶은 기분일지도 몰랐다. 은월이라는 이 늑대는, 이 남자는 예나의 말에 너무나 쉽게 반응하는 데다 그 반응을 알기가 너무 쉬워서 자꾸 건드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오지 마십시오! 말씀드릴 테니까 부디, 거기에!”
“좋아, 말해 봐.”
은월은 예나에게서 거리를 정확히 유지한 채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언제나 나란히 걸을 때마저도 거리를 유지했던 늑대 친구를 연상시켜서 예나는 더욱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저는 숲의 정령 중 하나입니다. 알고 계시다시피 평소에는 은빛 늑대의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저는 숲이 일 년에 하루 잠에 빠질 때 외부인의 출입과 더러운 것의 접근을 막는 문지기로서, 오늘도 그러한 임무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게다가 너무나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높은 사람에게 보고라도 하는 말투라서 더욱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예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웃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은월을 보니 다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예나는 조금 전까지 남자로 생각하고 긴장하고 있던 기분이 완전히 풀리는 것을 느꼈다.
“흠, 흠, 그러니까……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입니다. 숲의 잠과 만월이 겹쳐서…….”
“그게 뭐?”
“아, 음. 그러니까…… 만월이란 저에게…… 발정기로서…….”
은월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예나는 잠깐 굳었다가 뒤로 파바박 물러섰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빛이 일렁이면서 앞으로 몰아내서 오히려 조금 전까지 유지하던 거리보다 더 가까운 곳까지 몰리고 말았다. 예나보다 은월이 더 놀라서, 뒤로 물러나려고 했고, 예나도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그래. 그건 좀 곤란하겠네. 발정기란 건 그러니까, 보통 동물하고 같은 거라면, 그…… 아무하고나라도 일단 자고 싶어……지는 거지? 그건 나도 안 좋고 그쪽도 사실 안 좋을 거고……. 조금 아는데 대개 발정기는 후손을 만들려고 생기는 거잖아……. 그러니까 이건 좀 이상…….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은월은 예나가 횡설수설하는 사이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았다. 그러더니 그 투명한 눈동자가 보이지 않도록 눈을 감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약 세 시간 후면 이 장벽이 걷힐 겁니다. 그때까지 아무 일 없도록 당신을 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 그래. 그게 더 나을 것 같으면 그래야지, 뭐. 정령인데 인간하고 얽히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고.”
애써 웃으면서 표정을 풀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은월이 다시 눈을 떴다. 은월은 그 투명하고 꿰뚫을 것만 같은 눈으로 잠깐 예나를 쳐다보았다. 예나는 정면으로 그 눈빛을 받자 잠깐 심장이 크게 뛰는 것 같았다. 아무리 정령이라고 해도 인간과 똑같이 생긴 데다 언제나 감탄하던 그 눈을 마주치니 더욱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그 다음에 은월이 그 단정하고 담담한 말투로 한 말은 더욱 놀라웠다.
“저는 당신과 얽히기 싫어서 참는 게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일은 당신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당신을 울리고 싶지 않아서 그럴 뿐입니다.”
“무슨 뜻이야?”
“지난 3년 동안 봐 왔고, 우는 모습도 보았으니까요. 당신이 울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으래? 정말로? 날 울리지 않는 게 어떻게 해야 하는 일인데?”
역시 심술이 돋았다. 예나는 지금까지 뒤로 물러섰던 것과 반대로 앞으로 다가섰다. 은월이 당황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거짓을 말할 줄 모르는 눈, 어떤 큰일이든지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 주는 고요한 눈. 그 눈이 오늘 따라 아주 밉살스러워서 골려 주고 싶었다. 이렇게 엉망인 자신과 더욱 대비가 되어서 더럽히고 싶었다.
“아, 저, 부디 뒤로 가 주십시오.”
“어째서? 그 마음이 진심이라면 차라리 날 안아 주는 게 맞지 않아? 나 오늘 정말 기분이 더럽다고.”
“농담이 아닙니다. 후회하기 전에 뒤로 가 주십시오.”
“울리지 않을 거라면서? 울리고 싶지 않다면서?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참을 수 있을 거 아냐?”
예나는 드디어 은월 앞으로 다가섰다. 확실히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 외에 모든 부분이 뜨거워 보였다. 예나는 모피 바지를 입고 앉아 있는 은월의 허벅지에 슬쩍 손을 올려놓았다. 팽팽한 열기와 긴장이 은월의 몸에서 전해졌다.
“인간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어째서 반응은 인간과 똑같지?”
“예나! 부디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당신은 지금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겁니다!”
“심술? 그래, 맞아. 그렇게 진실만 말하면 더 밉살스럽단 말이야!”
은월이 숨을 들이켰다. 예나가 은월이 입은 가장 윗부분의 모피 조끼를 벗기면서 목에다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아니, 정말로, 하지 마십시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예나.”
은월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장난을 쳤으니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예나는 은월의 목에 입술을 가져다 대면서 신음하듯이 “음?” 이라고 반문했다.
“저는 인간이 아니라, 말에 진심을 담지 않고 말하지도 못하고, 한 번 한 행동을 중간에 수정하는 일도 서툽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대답해 주십시오. 이대로 나가면 전 자제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물러나 주시지 않겠습니까?”
“싫어.”
조끼 밑에 있는 맨살에 입을 맞추며 예나가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왜 그 정도까지 담이 커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 순간 은월이 예나의 손목을 잡아 떼어냈을 때에야 예나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은월의 몸이 성난 것처럼 일어서 있다는 것을, 투명한 눈이 욕망으로 흐려져 버렸다는 것을.
“은월?”
“분명히 전 경고했습니다.”
예나는 양 손목을 잡힌 채 은월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은월의 얼굴이 좀 전까지와 다르게 무척 무서워 보였다. 조금 전까지 왜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그가 늑대라는 것을. 숲을 지키는 맹수라는 것을. 그의 하얀 이빨과 투명한 눈이 주체할 수 없는 갈망과 욕구를 담고 있다는 것을. 마치 사냥감으로 잡힌 것처럼 그 순간부터 예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은월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데, 그저 뻣뻣하게 떨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서워했던 것과 달리 은월의 입술은 감미로웠다. 차갑고 부드러운 입술이 먼저 입술에 닿았다가 살짝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잡아당기면서 예나의 이가 드러나도록 입술로 빨아들였다. 예나는 눈을 감아 보았다. 그걸 눈치 채기라도 한 듯 은월의 입술이 조금 더 강하게 빨아들였다. 혀가 조금씩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서 이빨을 건드리며 입을 벌리라고 불렀다. 예나는 너무 오랜만이라서 낯선 기분을 느끼면서 입을 열어 주었다.
그 뒤에 은월이 한 키스는 오랜만이랄 것도 없이 처음 느껴 보는 황홀한 키스였다. 입술과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는가 싶으면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와서 이빨끼리 부딪쳤고, 불꽃이 튀는 듯한 느낌에 아득해지면 그 뒤로 다시 부드럽게 혀를 감았다. 난폭하게 머리 째로 삼키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가도 그 다음에는 너무 달콤하게 위로해 주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예나는 어딘가 떨어져 가는 듯한 기분에 은월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그 다음에야 은월의 손길이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있다는 것을, 단단히 잡아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나.”
예나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촉촉하게 젖은 은월의 눈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이, 내 한계입니다. 더 이상은 참지 못해요.”
은월은 예나를 눕히고 그녀를 양팔 사이에 가둔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나는 갑자기 몹시 부끄러워졌지만 은월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가장 사랑할 때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군노와 달리 은월은 욕망으로 흐릿한 지금의 눈조차 뚜렷이 들여다보였다. 은월은 말하고 있었다. 지금 몹시 힘들다고, 참기 힘들다고, 하지만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애쓰고 있다고.
“정말 이상해. 왜 날 사랑해?”
예나는 아까는 그리도 참았던 눈물을 자기도 모르게 흘려 버렸다. 은월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당황했다. 역시 조금만 더 참았어야 했을까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져 버린 물, 은월은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주면서 최선을 다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우는 모습 때문에.”
“보기 흉하잖아.”
“너무 외로워 보여서, 그러면서도 외롭지 않은 척 눈물을 참으려고 해서, 그래서, 보는 것만으로 아파서 바라보다가…….”
“응?”
은월은 손가락으로 닦아 주던 것을 멈추고 눈물이 흐르는 볼을 핥았다. 간지러운 느낌에 예나는 울면서도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다 병이 들었습니다. 그게 사랑인가요?”
“네 눈은 날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걸.”
“그렇게 말하는 거군요.”
은월은 그렇게 말하며 예나의 뺨을 부볐다.
“사랑합니다.”
귀에 입을 맞추었다.
“부디 울지 말아요.”
턱에다 입을 맞추었다.
“부디. 웃어 줘요.”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어?”
은월은 다시 난처하게 웃었다. 오늘 예나는 정말 심술도 땡깡도 심하다. 오늘에야 처음으로 말을 나눌 수 있었는데, 처음으로 이 모습으로 만났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그동안 괜찮다고 하면서, 울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외로웠는지,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은월은 다정하게 예나를 안았다.
“정말로, 자꾸 울지 말아요. 기껏 참고 있는데.”
“참지 않아도 돼.”
“그렇게 말하면 저는 진담인 줄 압니다. 조금 전처럼.”
“진담이야. 안아 줘, 은월.”
은월은 예나의 눈을 마주 보았다. 장난을 치고 도발할 때 눈에 깃들어 있던 잔인한 빛은 사라지고 그저 고요한 눈물만 그 눈에 담겨 있었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은월은 이끌리듯 예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정말 진담이라고 확인해 주고 싶은지 예나가 입을 벌리고 적극적으로 답을 했다. 그 답에 따라 은월은 예나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예나가 눈을 감고 숨이 가빠지는 모습을 보았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서도 예나가 계속 요구하고 더욱 매달리는 것을 보았다. 은월은 자꾸만 놓칠 것 같은 정신을 다잡았다. 발정기라 해도 상대는 하나뿐인 마음의 주인, 병의 약. 아무렇게나 끝낼 수 없었다. 은월은 예나를 품에 안았다가 본격적으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예나는 눈을 감은 채 은월의 입술을 느꼈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렇게 나쁘게 끝날지도 몰랐다. 남자들이란 사랑하고 있을 때에는 정말 자신뿐인 것처럼 굴다가, 싫증이 나면 버리는 것이라고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통해서 뼈저리도록 알아 왔으니까, 이번이라고 다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3년 동안 늑대 친구에게서 얻어 왔던 위안이, 한결같이 자신을 지키려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자신이 먼저 울리고 싶지 않다고 물러서 달라고 애원하던 눈을 기억했다. 한계라고 한 후에도 예나를 위해 멈출 수 있는 의지를 보았다. 그래서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너무나 따뜻하고 다정한 은월의 입김이 자신을 녹여 주길 바랐다. 괜찮다는 말로, 다 똑같다는 말로 얼음 속에 꽁꽁 갇혀 있던 자신을 녹여 주길 바랐다.
예나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가면서 은월이 옷을 벗기는 것을 도와 주었다. 맨살이 드러나자 잠깐 추웠다가, 은월이 손으로 만지고 입술로 덮어 주면 금방 훈훈해졌다. 등 뒤로 은월이 입고 있던 모피 옷들이 깔리고 은월의 맨 살이 닿기 시작하자, 잠깐 낯선 기분에 떨리기까지 했다.
“정말로…… 왜 진작 이렇게 나타나 주지 않았어?”
은월의 몸을 껴안고 예나는 다시금 불평했다. 은월이 살짝 웃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가 내뿜는 훈훈한 김이 목덜미에 닿았다.
“원래라면 인간 앞에서 변신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답답하지 않았어?”
“답답하다기보다는…… 중독되었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습니다.”
“중독?”
“당신의 웃음에.”
예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늑대 친구가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던 반대편으로, 늑대 친구가 자신의 웃음을 예쁘게 봐 주었다니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좋아서 머금은 웃음은 금방 가쁜 숨으로 바뀌었다.
은월은 뜸을 들이듯이 천천히 예나의 온몸을 매만지고 있었다. 목 뒤에 입을 맞추고, 허벅지로부터 엉덩이로 올라가는 부분을 쓰다듬었다. 입술을 내려 가슴 부분을 맴돌다가, 붉게 물든 봉오리를 입에 머금었다. 한 번, 두 번 입술로 장난 치듯 물었다가 혀로 적시고 감싸자, 봉오리가 촉촉하게 솟아올랐다. 은월은 한손으로 다른 쪽 가슴을 부드럽게 말아 쥐었다. 예나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기분 좋은 한숨과 신음으로 바뀔 때까지 은월은 입술을 놀렸다.
“은월, 그, 그만, 잠…….”
신음소리가 촉촉이 젖어들 때까지, 가슴에서부터 퍼져 나간 열기가 온몸에 흘러서 자기도 모르게 예나가 하체를 뒤틀고 다리를 비벼 올 때까지 은월은 계속했다. 그리고 자신의 타액에 젖은 봉오리를 떠나 다른 봉오리로 옮겨 가 다시 한 번 입술로 감쌌다. 팔로 단단히 잡고 있는 예나의 어깨 아래 몸이 뒤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예나의 볼이 난로를 지핀 듯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은월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나는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이런 쾌락이 얼마만인지 생각도 안 날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아니, 사실은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은월은 예나의 온몸이 소중하다는 듯 고루고루 만지고 입을 맞춰 주었고, 예나가 흥분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 괴롭히기를 서슴지 않았다. 아직 은월을 품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나가다간 추하게 달아올라서 비명 질러 대는 꼴이나 보이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멈추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은월의 입술이 전진하는 길이 감은 눈 안에서 선연히 보였다. 어깨, 가슴, 허리, 무릎, 배, 허벅지. 예나의 중심을 향하여 천천히 접근하면서 보내고 있는 경고장에 온몸이 벌써 긴장하고 있었다.
은월은 오랫동안 공을 들여 도착한 예나의 은밀한 곳에 손을 대 보았다. 신음하며 은월의 이름을 부르던 예나의 목소리처럼 그곳도 촉촉이 젖어 반짝거리는 얼굴로 은월을 맞이했다. 은월은 그곳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간간이 가까운 허벅지와 골반 근처에 입을 맞추면서 예나가 긴장하는 것을 즐겼다. 마지막 경고장처럼 촉촉한 숲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길을 트자, 예나가 놀란 듯 상체를 퉁겼다. 은월은 사냥감을 거의 다 몰아넣은 사냥꾼의 표정으로 그것을 흘끗 보고는, 그곳에 얼굴을 갖다 댔다.
처음에 예나는 놀라서 그곳에 얼굴을 파묻은 은월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곧 예나는 손을 놓치고 등과 허리를 잔뜩 휜 채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뱉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따뜻하고 촉촉하고 부드러운 혀가 자신의 은밀한 곳을 탐하고 있었다. 그 입술이 꽃잎을 물고 그 위 봉오리를 머금고 그 혀가 물결칠 때마다 견딜 수 없는 쾌락의 파도가 전류처럼 흘렀다. 발바닥이 뻣뻣해지고 팔에 힘이 빠지고 볼썽사나운 몰골로 그저 고개를 젖히고 신음하는 자신을 어느 순간 깨닫고 부끄러워하다가도, 그 다음 순간 은월이 다시 괴롭히기 시작하면 부끄러움도 이성도 모두 날아가 버렸다. 오직 머리와 발을 뚫고 몸 밖으로 뛰쳐 나갈 것 같은 미칠 것 같은 쾌감과 열기, 조금만 더 가면 끝이 나 버릴 것 같은 무서움과 기대만이 남을 뿐. 예나는 계속 은월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다가 아래쪽으로부터 갑자기 밀어닥친 파도에 몸을 뒤틀었다.
은월은 그제야 예나의 몸으로 들어갔다. 커다랗게 성나서 아까부터 기다리던 남성을 밀어넣자 예나가 허리를 움직이며 은월을 반겨 주었다. 은월은 숨을 다잡았다. 뜨겁고 촉촉하고 감겨드는 예나의 안쪽에 벌써 굴복할 수는 없었다. 은월은 머리카락을 볼에 흐트러뜨리고 신음하는 예나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리듬에 맞추어 은월을 받아들이다가 그 리듬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에야 얼굴을 들고 은월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찡그린 것도 같고 참는 것도 같은 묘한 표정으로 은월의 투명한 눈이 예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부터 뺨에는 굵은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예나는 그 땀방울을 닦아 주면서 웃었다.
“괜찮……습니까? 아프진 않나요?”
그 와중에도 다시 울까 봐 겁이 났는지 은월이 물었다. 예나는 환히 웃으면서 손을 뻗었다. 은월은 예나의 손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은 앉으면서 자신 위에 예나를 포개어 앉히듯이 안았다. 예나는 은월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다리로는 그의 허리를 감싸 매달렸다.
“바보.”
“네?”
“너처럼 바보 같은 남자는 처음 봤어. 내가 지금 아파하는 걸로 보여?”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물어?”
“주인님의 의견을…… 들어야 하니까요.”
힘겨운 듯 띄엄띄엄 하는 말에 예나는 다시 웃었다.
“다음부터는 좋느냐고 물어.”
“좋습니까?”
“응.”
말하고서 부끄러운 듯 웃고 있자 은월이 다시 키스를 해 와서 다행이었다. 예나는 너무 따뜻하고 기분이 좋다고, 지금 자신을 감싸 주는 은월이 너무 사랑스럽고 멋지다고 말할 필요가 없어져서 안심했다. 은월이라면 알아들었을 거라고, 그러니까 이렇듯 황홀하게 길게 키스하며 대답을 바라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예나와 은월은 그때부터 한치도 떨어지지 않고 몸을 붙인 채로 함께 율동했다. 다리를 얽고 팔을 서로의 허리에 두르고 입술을 서로에게서 떼지 않는 그것은 정말로 율동이었다. 밀고, 당기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구르고, 다시 밀고, 당기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신음하고. 느리게, 빠르게, 다시 느리게, 그리고 좀 더 빠르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하늘에 닿을 때까지. 열기가 마침내 두 사람의 몸을 뚫고 폭발하여 산산이 흩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땀과 점액으로 번들거리는 몸으로 큰 숨을 내뱉고 힘없이 누울 때까지 예나와 은월의 머리에서 생각이란 건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정적과 아직 남은 나른한 열기만이 빛으로 둘러싸인 그 좁은 공간을 채웠다.
예나는 은월의 머리카락을 집어서 입을 맞추었다.
“오늘은 정말 일진이 안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놈 때문입니까?”
예나가 끄덕이자 이번에는 은월이 예나의 정수리에 입을 맞춰 주었다.
“괜찮아, 이 상처?”
“인간보다 더 빨리 아무니까, 괜찮습니다.”
“정말 아까 기분 그대로 새해를 맞이해야 했다면, 끔찍했을 거야. 은월이 있어서 다행이야.”
“당신이 울지 않아서 기쁩니다.”
그 말에 예나는 은월에게 다시 입 맞추고 그 품에 파묻힐 수밖에 없었다. 은월은 울지 않아서 기쁘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나와서 숨고 싶었다. 우는 걸 감추려고 멀쩡한 목소리로 말을 하려고 해도 곧 목소리가 갈라져서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사랑합니다. 당신이 가르쳐 준 말이라서 더욱 맘에 듭니다.”
그리고 은월은 그런 예나의 맘을 모르는 듯 점점 울릴 소리만 골라 했다. 예나는 마침내 은월의 품 안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저 흘리는 눈물도 아니고 펑펑 우는 울음은 3년 전 그날 밤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예나는 계속 울었다. 은월이 해 주는 말이 고마워 울었고, 지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순간이 기뻐서 울었고, 은월의 사랑한다는 말에 바로 답해 주지 못하는 게 미안해서 울었다.
빛의 망이 사라지면서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두 사람 위로 하얀 만월의 빛이 쏟아져 내렸다. 하늘을 가득 메운 듯 눈부신 보름달, 눈이 내려 모든 소리를 빨아들이는 숲, 달빛보다 더 빛나는 아름다운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숲의 정령. 예나는 이 셋에게만 자기 눈물을 볼 자격을 주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숲의 정령, 자신의 늑대에게서만 그 눈물을 품어 줄 가슴을 찾았다.
새로운 해를 맞으면, 언젠가 정말로 참지 않아도 울지 않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면서, 예나는 그 가슴에 안겨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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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3.06.05 20:19 댓글

    잘 읽었습니다. 혹시 페나님께서도 읽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저를 거울로 이끌었던 송경아님의 "나의 우렁총각 이야기"의 소재, 주제를 생각나게 하는 면이 강해서 묘한기분으로 더욱더 반가웠습니다.

  • 곽재식님께
    No Profile
    pena 13.06.06 02:44 댓글

    으악 재식님이 덧글 달아주시니까 음청 더 쑥스러운 거...! 그 소설은 읽어보지 못하고 재식님 이야기로만 들었습니다.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 No Profile
    라키난 13.06.05 20:36 댓글

    꺅 로맨스다! 이게 그 19금이군요:D 잘 읽었습니다. 

  • 라키난님께
    No Profile
    pena 13.06.06 02:44 댓글

    감사합니다. 흐헷. 로맨스죠.... 음음 ... 씬만을 위해 썼으니 로맨스가 아니라고 하면 곤란하여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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