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김이환 괴물 같은 건 없어

2013.05.31 22:5605.31

괴물 같은 건 없어

 

 

 

<괴물>
"괴물 같은 건 없어."
거울을 보며 남자는 중얼거린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바닥에 누운 괴물이 그의 등 뒤에서 킬킬 웃는다. 이 세상에 괴물 같은 건 없어, 괴물 같은 건 없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어. 그가 반복해서 되뇌어도 괴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괴물이 그의 집에 살고 있다. 남자는 세 개의 방 두 개의 화장실 다용도실 베란다가 딸린 좋은 아파트에 살았다. 이제는 괴물과 같이 산다. 괴물의 악취를 참을 수가 없어 그는 이를 악물었다. 괴물은 집이 너무 밝다고 말한다. 낮이나 밤이나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는 아침과 저녁에 괴물의 방으로 들어가 먹을 것을 놓고 나온다. 괴물은 변도 보질 않는지 방에서 절대 나오지 않는다. 괴물은 이유 없이 그를 부르고는 킬킬 웃는다. 단지 그를 비웃고 싶을 뿐이라는 듯이. 나와 같이 사는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듯이. 검고 주름진 얼굴, 누런 눈동자와 이빨, 악취. 끝없는 악취. 방을 아무리 꽉 닫아도 문 틈 사이로 어느 새 새어나와 거실로 퍼진다. 그는 집에 돌아오면 창문부터 열고 공기를 환기시킨다. 한겨울 밤중에라도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쟁반에 밥을 담아 방으로 들어가면 괴물은 키들키들 웃는다.
"괴물 같은 건 없어."
쟁반을 놓고 방문을 닫고 등지고 그는 중얼거린다. 텔레비전을 켜면 잠시 괴물을 잊을 수 있다. 버라이어티쇼를 꼭 챙겨본다.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연예인들의 농담을 따라 웃는다. 그동안 괴물은 집에서 사라진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집에는 그 혼자뿐일 것 같다. 하지만 괴물의 악취가 그를 괴롭힌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괴물 같은 건 없어. 거울을 보며 되풀이 말해도 괴물은 있다. 다 먹은 밥그릇을 방구석에 밀어놓고 이불 속에서 웃는다. 머리만 내밀고 그를 보고 있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괴물을 감추고 살아."
괴물은 말한다. 괴물은 그의 뒤를 따라왔다. 그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그 일이 있었다. 편의점을 들리지 않았다면 사고는 터지지 않았을 것이다. 조용히 집으로 들어갔다면 안락한 삶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고통을 참으려 그는 이를 악문다.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사람을 죽일 의도가 없었어. 편의점으로 가는 길이었다. 누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대답하려다 목소리를 기억했다. 편의점 근처에 구걸하는 노인이 돌아다닌다. 술 취한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다. 입에서 나는 술 냄새가 독하다. 처음에는 담배가 있느냐고 묻는다. 한 가치 달라고 점잖게 청한다. 담배를 건네면 이번에는 불을 빌려달라고 한다. 대부분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선뜻 불을 붙여준다. 연기를 한번 내뿜고 나서 노인은 본심을 털어놓는다. 내가 차비가 없어서 그러는데 천원만 빌려주겠나? 아마 그 천원들을 모아 소주를 사마시는 것 같다. 멀쩡하게 생긴 노인이다. 노숙자처럼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다. 방금 집에서 나왔거나 어딘가로 저녁을 먹으러 가는 옷차림의 노인 같다. 하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숨길 수 없다. 그는 노인에게 천원을 준 적 없다. 이번에도 그럴 마음이 없다. 그는 싫다고 대답하려 목소리를 향해 몸을 돌린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그도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정확하지 않아서 혼란스럽다. 자동차가 먼저 다가왔을 때인가. 남자가 구걸하는 노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임을 먼저 알았을 때인가. 그가 남자에게 몸을 돌렸다가 실수로 밀쳤을 때인가. 발을 헛짚은 남자가 길 위에 넘어졌을 때인가. 골목으로 들어오던 자동차가 미처 멈추지 못했을 때인가. 그가 뒤에서 일어난 상황을 알지 못하고 계속 길을 걸었을 때인가. 막 모퉁이를 돌았을 때 우지끈 소리가 들렸을 때인가. 고개를 슬쩍 내밀어 길을 보다가 차에 깔린 남자를 목격했을 때, 타이어 밑에 있는 사람의 머리를 봤을 때인가. 그는 길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있고 운전자도 피해자는 밝은 가로등 밑에 있어서 어둠 속에 있는 그를 보지 못했을 때인가. 그래서 그가 막 내딛으려던 발을 뒤로 빼서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자동차 사고를 지켜봤을 때의 일인가. 운전석의 운전자의 크게 뜬 눈이 보였을 때인가. 누군가의 비명을 들었을 때인가.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리고 다시 한 걸음 뒤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인가. 그의 삶이 망가진 것은.

 

발을 질질 끌고 숨을 몰아쉬며 집으로 돌아온 것까지는 기억난다. 그러나 여전히 기억은 혼란스럽다. 나 때문에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믿을 수가 없다. 나 때문에 사람이 죽었어. 이미 일어난 일이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야. 죽은 사람은 어떻게도 되살릴 수가 없어. 그리고 내 인생도 그렇다. 망가졌어.
한번 무너진 삶은 되돌릴 수 없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고의가 아니었다고 말할까. 몸을 돌리려다가 우연히 밀게 됐다고 말할까. 넘어질 만큼 세게 밀지도 않았어. 그 남자가 중심을 잃고 발을 헛디뎠겠지. 발을 헛디딘 정도로 넘어졌으면 이미 술에 취해있었을지도 몰라. 구걸하는 노인처럼 말이야. 그러니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항변해볼까. 과실치사로 사람을 죽이면 감옥에 가던가. 몇 년이지. 합의금이 얼마더라. 합의가 가능한가. 지금 감옥에 가면 내 삶은 어떻게 될까.
아니다. 목격자가 있을까. 골목에 폐쇄회로 카메라가 있던가. 없다. 나를 본 사람은 없다. 누가 봤을까. 운전자가 봤을까. 아니다, 앞에 있는 사람도 못 보고 들이받았다면 나도 못 봤을 것이다.

 

그날 밤 늦게 사고 현장에 가보았다. 삼거리 가운데에 흰 페인트로 사람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매일 오가는 길이다. 자동차도 사람도 다니는 조용한 길이지만 이제는 다시 이곳으로 올 수 없다. 내일부터는 다른 길로 다녀야 한다. 그의 삶에 큰 흔적 하나가 남았다. 페인트가 도로에 그어져있듯이 흔적도 그의 삶에 찍혀 있다. 상처를 상기시키는 이곳으로는 다시 와선 안 된다. 흰 페인트는 유난히 희고 검은 아스팔트는 유난히 검어보였다. 그는 흰 페인트 모양으로 남자가 눕던 그 순간을 계속해서 되새겼다. 생각을 거듭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남자는 쓰러지고 자동차가 그 위를 지나가고 남자는 페인트 자국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페인트 자국을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지 않았는지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고 현장을 몇 분 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니 분명 이상해보일 것이다.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그가 등을 돌려 천천히 현장을 벗어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땅에서 일어나 그에게 말을 걸었다. 불행이 다시 말을 걸었다. 그를 붙잡았고 삶을 뒤틀어놓았다. 망가진 것이 한번더 망가졌다.
"이것 봐, 사람을 죽였으면 책임을 져야지."

 

 

<흉가>
"안녕하세요. 핸드폰은 어쩌다 잃어버리셨어요?"
그는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핸드폰을 주웠다. 삼거리에서의 일이다. 세 개의 길이 있다. 삼거리로 들어오는 길, 도로로 빠져나가는 길, 주택가로 더 깊이 들어가는 길. 도로는 서울 곳곳과 연결된다. 주택가에는 아파트와 단독주택 빌라가 차례대로 늘어서있고 더 지나가면 산이 있다. 산 중턱에는 도시와 산의 경계에 확실히 밑줄을 긋듯이 높은 펜스가 자리하고 그 너머에는 나무가 갑작스럽게 자라기 시작한다. 그곳 땅을 밟으면 시멘트 밟는 소리가 아니라 낙엽을 밟는 소리가 난다. 그곳은 바람도 다르다. 해가 더 빨리 지는 것도 같다.
그와 여자는 세 개의 길이 만나는 곳에 있다. 삼거리에 있다. 이곳은 삼거리로 들어오는 길 한쪽에 위치한 카페다. 남자가 앉은 자리에서는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슬쩍 보인다. 카페의 좌석 중에 유일하게 창 너머로 산이 보이는 자리다.
그는 주택가에 산다. 넓은 단독주택에 그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고 있다. 집으로 가려면 삼거리를 지나쳐야 한다. 그는 매일 발밑을 보며 걸어 나가고 걸어 들어온다. 삼거리 길에는 보도블록이 어지럽게 깔려있다. 블록과 블록 사이의 틈이 만든 무늬로 가득한 길이다. 매일 길을 걸어 나가고 걸어 들어오면서 무늬들을 관찰하고 머릿속 생각들과 짜맞춰간다. 때로는 무늬가 생각을 불러오기도 한다. 무늬 중에는 도깨비도, 알파벳도, 눈물 흘리는 남자도, 흐르는 강물도, 누워있는 여자도, 입을 벌리고 있는 사람도, 거대한 건물도 있다. 수많은 것들이 포함된 커다란 세계처럼도 보인다. 그런 세계가 있다면 참으로 아름다울 거라고 그는 생각하면서 길을 걷는다.
어느 날 무늬 가운데에 검은 핸드폰이 놓여있었다. 빛나는 플라스틱 재질은 돌로 만든 블록 위에서 눈에 쉽게 띈다. 핸드폰이라는 물건은 참으로 쉽게 눈에 띄는 물건이다. 그런데 왜들 쉽게 잃어버릴까? 누군가 잃어버린 핸드폰을 집어든 그는 핸드폰 안의 주인이 찍은 사진을 확인하고는 어린아이처럼 중얼거린다.
"우와, 미인이네."
이제 그 미인이 불분명한 표정을 하고 그의 앞에 앉아 있다. 불분명한 표정의 미인은 핸드폰을 살펴보고 있을 뿐 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벌써 네 번째로 그는 묻는다.
"어쩌다가 핸드폰은 잃어버리셨어요?"

 

 

<괴물>
그는 흰 페인트가 유난히 희고 아스팔트가 유난히 검다고 생각했다. 흰 페인트가 더 희게 보인 건 그의 죄책감 때문이다. 검은 아스팔트가 더 검게 보인 것은 그 위에 검은 그림자가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넘어진 사람의 모양대로 누워있던 그림자가 사람이 바닥에서 일어나듯이 일어서자 사람과 비슷한 형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온다. 걸을수록 모양이 뚜렷해진다. 아스팔트에서 솟아오른 존재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니, 정말로? 그는 일상으로 돌아가 보았다. 몸을 돌려 한걸음 앞으로 그리고 다시 한걸음 걸었다. 눈앞에는 그가 매일 보아온 동네 풍경이 있었다. 그는 일상 속에 있었다. 일상을 앞에 마주하고 있었다. 돌아보니 여전히 검은 그림자가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등 뒤에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몇 시간 전 그의 삶이 망가졌다. 교통사고 현장으로 와본 이유가 그 때문이다. 삼거리에 와서 그가 범인으로 잡히지 않은 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싶었다. 그곳에서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간다면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일상은 그림자의 말과 함께 완전히 망가졌다.
"나는 죽어서 괴물이 되었어. 나는 갈 곳이 없어. 나를 데리고 가. 네가 나를 죽였으니까. 나를 데려가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네가 나를 죽였다고 말할 거야."
"괴물이 하는 말을 누가 믿어?"
"나는 네가 죽을 때까지 너를 따라다닐 거야."
괴물은 대답했다.
괴물의 말을 믿는 사람이 있을까. 괴물 같은 건 없어. 그는 대답했다. 괴물 같은 건 없어. 이 세상에 괴물이 있을 리 없어. 하지만 괴물은 그의 집에 있다. 그날 그를 따라온 후 작은 방에 숨어서 악취를 내뿜으며 키들키들 웃고 있다.
"너 말고도 많은 사람이 괴물을 데리고 있어."
그는 방에서 새어나오는 악취를 참으며 거실 텔레비전에서 버라이어티 쇼를 보았다. 쇼가 끝나자 페브리즈를 꺼내 거실에 뿌리고는 침실로 돌아가 오랫동안 뒤척인 끝에 어렵게 잠이 들었다.

 

 

<흉가>
"가장 무서운 게 뭔 줄 아세요?"
지루한 여자? 동문서답? 묻는 질문에 대답 안하는 것? 미인의 질문에 그는 대답을 고민해보았다. 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뜬금없이 되묻는다. 아니, 되묻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무 상관없는 질문을 한 것이다. 원래 이런 대화법으로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걸 즐기는 여자인가?
이 질문은 중요한 질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하려는 농담의 도입부일까? 그녀의 표정이 여전히 불완전하기 때문에, 농담은 아닐 것이라 그는 짐작했다. 그녀가 처음 꺼낸 말이다. 아마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
중요한 질문에는 어떻게 해야 중요한 대답을 할 수 있을지 그가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미인은 자신의 질문에 직접 대답했다.
"불행이요."
"핸드폰은 다시 찾으셨잖아요."
"핸드폰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는 카페 유리창을 내다보았다. 날이 어둡고 카페의 백열전구 불빛은 환하다. 유리창으로는 밖의 풍경보다는 반사된 내부의 풍경이 더 잘 보인다. 그의 얼굴이 풍경 가운데에 있다. 불안한 눈으로 자신의 불안한 눈을 응시한다. 멀끔히 잘 하고 나왔는데. 그는 생각한다. 미인의 표정은 여전히 불완전하다. 내 얼굴 때문은 아닐 거야. 나는 잘생겼으니까. 싱거운 생각을 하자 유리 속의 남자가 웃는다.
"아무리 즐거운 일이 있어도 웃지 못해요."
미인은 말했다. 그는 지지 않고 되묻는다.
"왜 불행하세요?"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 있거든요."
질문이 좋지 않았어. 그는 생각했다. 핸드폰을 어쩌다 잃어버리는 사람은 없지.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고 잃어버린 이유가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건 다시 찾았다는 거야. 처음 물어봤을 때 제대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어. 덕분에 셔츠는 단추가 엉망으로 잠겼고 풀어서 다시 채워야 돼. 하지만 다시 채울 기회가 있을까.
"나는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 있어요. 진수씨의 머릿속으로도 들어갈 수 있어요. 보고 싶으세요? 나는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나는 불행해요. 불행이 가장 무서운 악당이죠."
미인은 말했다.

 

 

<괴물>
"너는 나에게 뭘 물어보려고 했지? 네가 사람이었을 때 말이야. 아직 죽지 않았을 때. 네가 괴물이 되기 전에 말이야. 그때 무슨 말을 했었지? 나에게 말을 걸었잖아. 말만 안 걸었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후회하지 않나?"
그는 말했다. 세상에 괴물 같은 건 없어. 내 눈 앞에 괴물이 있을 리 없어. 그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며 말했다. 괴물은 킬킬킬킬 웃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되냐고 물었어. 왜? 내가 슬퍼할 것 같아? 길 물어보다가 발 헛디뎌서 죽은 삶을 슬퍼할 줄 알았어? 너를 원망할 것 같았어? 남겨둔 가족을 생각하면서 울 것 같았어?"
"너도 가족이 있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지. 너처럼."
"나처럼? 내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괴물은 킬킬킬 웃었다.
"정말로 그런가?"
아스팔트 위의 흰 페인트를 생각한다. 사람이 누워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그림을 생각한다. 죽은 사람이 남겨놓은 죽은 모습이다. 삶의 마지막 모습이 자국으로 남았다. 괴물의 가족이 현장에 와봤을까? 흰 페인트를 봤을까? 죽은 이가 남겨놓은 마지막 모습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았을까? 통곡을 했을까? 그는 흰 페인트 그림 자리에서 모퉁이를 돌아보았다. 사고가 났을 때 그가 죽은 사람을 쳐다봤던 그 곳이다. 사건 현장은 가로등 밑이고 모퉁이 너머는 어두워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차 주인도 혹시나 지나가던 행인도 그를 보진 못했을 것이다. 죽은 남자는 길을 물어보려고 했다. 나는 편의점으로 걸어가 뭘 사려 했더라? 뭘 사려고 했다가 인생이 무너졌더라?
"네가 죽였지?"
괴물이 말을 걸었다. 처음으로 사건 현장에 가있던 그 순간이었다. 모퉁이를 돌아보고 있을 때 괴물이 말을 걸었다. 흰 페인트 사이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아나 괴물이 되었다. 시커먼 괴물은 누런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았다. 네가 나를 죽여서 나는 죽어서 괴물이 되었어, 네 책임이야. 나를 데리고 가. 사람을 죽였으면 책임을 져야지. 안 데리고 갈 수 없어. 끝까지 따라다닐 거야. 괴물을 떨쳐낼 수 없었고 괴물은 집으로 따라왔다. 괴물은 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악취를 풍겼다.
"많은 사람들이 괴물을 감추고 있어."

 

 

<흉가>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미인은 다른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고 나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일 아닌가. 미인은 눈을 감아보라고 했다. 그가 생각 속으로 들어가면 자신이 따라서 생각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미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랬을 뿐이다.
"뭐가 보이나요?"
그는 어둠 속에 있다. 눈앞의 어둠을 설명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깜깜한 곳이다. 눈꺼풀 안의 먼지들이 눈물 속에서 춤추고 있었다. 그것만 보인다. 어둠 속에서 형체가 보이기 시작한 건 그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슬쩍 불빛이 비치기 시작한 건 그 때였다. 그의 모습이 보이고 주변이 보였다. 동굴이다. 그는 동굴에 있다.
"동굴이 보여요."
"저도 보여요."
미인이 말했을 때, 그는 미인을 보았다. 미인과 그가 동굴 속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사실은 카페에서 여자와 남자가 눈을 감고 마주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머릿속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두 일은 같은 일이었다.
"제가 보이시나요?"
"네."
미인의 질문에 남자는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이상한 일인 줄 알면서도 대답했다. 무언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왜 핸드폰을 잃어버렸냐는 말에 대답하지 않던 그녀는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준 것이다. 새로운 사건이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야기를 따라갔다. 그는 미인의 말대로 했다.
"눈앞의 흉가로 다가가세요."
흉가도 알고 있다. 동굴 끝에 흉가가 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컴컴한 동굴 끝에 흉가가 있었다. 내가 보는 광경을 그녀는 어떻게 알지? 그는 생각했다. 정말 미인은 다른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올 수 있나?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왜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죠?"
남자가 묻지만 그녀는 답하지 않는다. 그를 앞질러 가는 미인도 돌아보지 않는다. 흉가 마당에는 풀이 가득하다. 어쩌다가 흉가가 됐을지 고민해본다. 귀신이라도 나왔을까.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까. 동굴 끝에 집을 지었기 때문일까. 이런 집에는 누가 살았을까. 왜 나는 누구도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집을 상상하는가. 어두운 흉가 안쪽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다. 오래된 세간 허물어진 지붕 구멍이 뚫린 문. 신발을 벗지 않고 마루에 올라 안방으로 곧장 들어간다. 안방 역시 집의 다른 곳과 같다. 망가진 세간과 더러운 천장. 망가진 유리창. 어두운 네 개의 벽. 유난히 더 어두운 한쪽 벽에 시커먼 구멍이 보인다. 뭐지? 쥐구멍인가? 남자는 넋 놓고 쥐구멍을 바라보다가 문득 미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불행이 닥칠 거예요."
남자는 눈을 떴다. 뭐라고요? 불행이 닥칠 거예요. 미인은 말한다. 왜요? 미인은 입을 다물었다. 왜라니, 이유가 있나? 그런 표정이다. 불행이 닥칠 것이다. 가장 끔찍한 불행이 닥칠 겁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남자의 머릿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핸드폰은 왜 잃어버리셨어요? 핸드폰 잃어버리는데 이유가 있나요? 그는 카페 밖을 보았다. 어두운 밖은 잘 보이지 않는다. 카페의 밝은 조명이 유리를 거울로 만든다. 창 위에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굴까? 불행이 닥칠 거라는 말에 놀란 저 남자는 누구인가?
"불행이 닥칠 거예요."
고개를 돌리자 여자는 없었다. 남자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에 간 것도 아니었다. 그 몰래 떠난 것도 아니다. 원래부터 여자는 없었다는 것이다. 카페 직원은 그렇게 말했다. 혹시 맞은편에 앉은 그 여자를 봤느냐고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은 그런 여자는 카페에 온 적 없다고 대답했다. 그날 남자는 한 잔의 커피 값을 계산했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가 카페에서 확인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한때는 그녀가 그의 머릿속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정말로 불행이 닥칠 것인가?
카페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들었던 의문은 현실이 되었다. 현실은 이미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살던 집이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화재가 난 집은 여러 대의 소방차가 도착해 물을 부었지만 결국 전소하고 말았다. 집에 있던 부모님은 연기 속에서 사망했다. 불은 옆집으로도 일부 옮겨 붙어 큰돈을 배상해야 했다. 그에게는 화재 보험이 없었다.
불행이 닥친 것이다.
그는 여자를 찾아다녔다. 모든 일이 미인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아무리 고민해도 그에게 불행이 닥칠 이유가 없었다. 그 여자가 한 말 때문이야. 그 여자 때문이야. 불행이 닥칠 거예요, 라는 그 말. 여자가 불을 질렀을지도 몰라. 미리 불을 질러놓고 그에게 말을 했을지도 몰라. 여자를 찾으면 불행이 닥친 이유를 들을 것이다. 혹은 불행을 물리칠 방법을 들을지도 모른다. 불행을 지울지도 모른다. 행복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미인을 찾아다니며 한 평생을 허비했다. 하지만 미인은 찾지 못했다.

 

 

<괴물>
"저번에 말이야. 한밤중이었어. 오줌이 마려워서 잠이 깼지. 화장실에 가려고 거실로 나왔어. 너는 안자고 있더군. 괴물은 잠을 자지 않는 건가? 네 목소리가 들렸어. 웃음소리가 들렸고 말소리가 들렸어. 너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어. 맞지?"
"나는 잠들지 않아."
"잠들지 않으면 밤에 뭘 하는데?"
"너를 비웃고 있지."
괴물은 이불 속에서 대답했다. 대낮이다. 그는 회사에 가지 않았다. 밝을 때면 괴물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오지 않는다. 빛이 싫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모습이 보기 싫어서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잔인하게 추측해보았다. 그는 회사에도 가지 않고 괴물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상한 말을 들었어."
"내 대답을 들으려고 회사도 안 가고 기다렸나?"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괴물을 숨기고 있다고 했어."
"그래. 그렇게 말했어. 지난밤에. 혼자말로."
"정말? 나는 괴물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다른 사람들이 괴물을 숨기고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없는데."
"제대로 보지 않고 제대로 듣지 않았으니."
괴물은 킬킬킬킬 웃었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미인을 찾아가."
괴물은 말했다. 미인을 찾아가. 미인? 어떤 미인? 여자? 그녀가 뭘 알고 있는데? 괴물은 다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날 회사를 가지 않았지만 그 후로는 회사를 갔다. 괴물을 집에 숨겨놓은 채 악취를 참는 날이 계속되었다. 다른 괴물을 보거나 어디에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어느 날이었다. 큰 길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삼거리에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카페 유리창에 붙은 전단지를 그는 멍하니 보았다. '미인을 찾습니다. 50년 전 이곳에서 만난 여자를 찾습니다. 찾아서 꼭 물어봐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연락주시는 분은 사례합니다.' 그는 6개월 전 괴물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괴물을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으려면 미인을 찾아가. 미인을 찾아가.

 

 

<쥐구멍>
"미인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미인을 만났어?"
"아뇨, 그 반대입니다. 미인을 만나고 싶어요."
그는 쓰레기 더미의 악취를 참으며 노인에게 말했다. 숨을 쉴 때마다 쓰레기 냄새가 들어와서 괴롭다가, 문득 괴물의 악취는 이것보다 더 심한데 못 참을 건 또 뭐람, 싶었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괴물을 생각했다가 마음이 편해지기는 처음이다. 노인의 방은 쓰레기로 가득하다. 그는 전단지를 붙이고 있는 노인을 보고 뒤를 따라왔다. 노인이 집 근처에 사는 줄은 몰랐다. 집 근처에 쓰레기로 가득한 다른 집이 있는 줄도 몰랐다. 노인의 집은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산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 노인은 아주 많은 전단지를 붙여온 모양이었다. 쓰레기 더미 사이로 아직 붙이지 않은 종이가 보인다. 어떤 것은 아주 오래되었다. 누렇게 바랜 것이 몇 년은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며칠 전에야 카페 유리창에 붙어있는 종이를 보았다.
노인은 말했다.
"담배 하나만 주겠나?"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내밀었다.
"불 빌려주겠나?"
그는 담배와 같이 들고 있던 라이터를 건넸다.
"내가 차비가 없어서 그러는데..."
"차비요?"
"그래. 차비. 차비가 없어서 그러는데..."
"어디로 가시게요?"
"아무데나. 차비가 없어서 그러는데 천원만 빌려주겠나?"
노인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담배각과 라이터를 자신의 옆에 놓았다. 그에게 돌려주지 않을 생각인 것 같다. 그는 노인 앞에 굴러다니는 빈 소주병들을 옆으로 제쳐놓고 바닥에 천원 지폐를 한 장 놓았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노인은 말이 없었다. 담배 연기가 천천히 흩어지는 동안 그는 말했다. 우리 집에 괴물이 삽니다. 괴물이 미인을 찾아가라고 하더군요. 미인을 찾으면 다른 괴물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괴물을 제대로 듣고 제대로 보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당신도 괴물을 본 적 있습니까? 당신은 미인을 만났습니까? 어디에서 어떻게 미인을 만났나요?
"자네 이름도 진수인가? 내 이름도 진수인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압니까?"
"우리는 잘못 와 있는 거야."
"우리요?"
"불에 탄 집으로 가. 그곳에 미인이 있어."
"불에 탄 집이요?"
"쥐구멍이 있는 집."
"쥐구멍이요?"
"그래."
노인은 천원 지폐를 집어 들어 손에 꽉 쥐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누웠다. 다른 쓰레기와 뒤섞여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고 노인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집에는 악취만 남았다. 그는 악취를 뒤로 하고 집을 나왔다. 불에 탄 집이라니, 그 집은 어디에 있나. 그가 집 마당을 막 가로지르고 있을 때 쓰레기 더미 사이로 집의 벽이 슬쩍 보였다. 동네의 재활용 쓰레기는 전부 모여 있는 그 마당에서 그는 집 지붕도 올려다보았다. 그는 중얼거렸다. 아, 이 집이 불에 탄 집 아닌가. 벽과 지붕 그리고 마당의 쓰레기 일부분이 불에 그슬렸던 것이다. 그러면 쥐구멍은 어디에? 그는 쓰레기를 피해서 피할 수 없는 쓰레기는 조심스럽게 밟고 집으로 들어갔다. 노인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곳은 집 뒤쪽의 작은 방인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는 안방으로 다가갔다. 문은 망가져 있었으며 쓰레기가 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노인은 쓰레기를 왜 모아놨을까. 집은 왜 불에 탔을까? 노인은 불에 탄 집에서 쓰레기를 끌어안고 있는 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왜 그의 삶은 망가졌을까? 당신은 어떤 불행을 겪었습니까? 혹시 당신의 인생도 망가졌습니까? 나처럼? 그는 쓰레기 더미를 치우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유난히 어두운 방이었다. 천장도 벽도 바닥도 어두웠다. 어두운 벽 중에 가장 어두운 벽이 있었다. 벽 한 쪽에는 바닥과 맞닿은 곳에 큰 구멍이 있었다. 크고 어두운, 너무 어두워 깊이를 알 수 없는 쥐구멍을 남자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쥐구멍에 들어가지 않았나요?"
"들어갔습니다."
"아뇨,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래요... 들어가지 않았어요. 사실 기억이 없습니다. 쥐구멍에 들어간 다음부터... 아뇨, 쥐구멍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갔어요. 분명히 들어갔어요. 왜 핸드폰을 잃어버리셨어요?"
"핸드폰을 잃어버리는데 이유가 있나요?"
미인은 말했다. 미인은 핸드폰을 잃어버린 사연을 말해주었다. 핸드폰을 통해 세 명의 남자와 통화를 했고 세 개의 사연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잃어버린 것이다. 통화가 끝나고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다가 떨어뜨린 것이다. 내가 그 핸드폰을 주웠고 미인의 전화를 받았고 미인에게 돌려주기 위해 이곳에서 미인을 만난 것이다. 미인은 핸드폰을 잃어버리기 전 들은 이야기를 나에게도 들려주었다.
한 남자는 자신의 집에 괴물이 산다고 말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사람을 밀쳤는데 그가 도로에 넘어졌고 달려오던 차에 치어 죽었다고 했다. 죽은 남자는 괴물이 되어 그를 따라왔다. 그는 별 수 없이 괴물과 같이 살게 되었다. 그는 경찰에게 자수하고 싶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괴물과 같이 사느니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고 말했다.
다른 남자는 미인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우연히 주운 핸드폰을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카페에서 만났다. 핸드폰의 주인인 여자는 그에게 불행이 닥칠 거라고 말하고는 더 이상의 말없이 떠나버렸다. 그 후로 정말 불행이 닥쳤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 보니 그 사이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가족은 모두 죽은 후였다. 미인의 말처럼 정말로 불행이 닥친 것이다. 미인을 찾으면 불행을 되돌릴 방법을 알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미인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남자는 세상 모든 사람이 괴물로 보인다고 했다. 세상이 괴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괴물이고 괴물이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집에는 그의 가족과 비슷하게 생긴 괴물이 가족 행세를 하고 있다. 거울을 보면 그의 모습을 한 괴물이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던 그는 문득 시선을 돌려 카페 유리창을 보았다. 자신의 얼굴이 있다. 밖은 어둡다. 어두워지면 카페의 조명이 유리를 거울로 바꾼다. 유리에는 그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미인에게 물었다.
"왜 다들 불행한 건가요?"
"불행에 이유가 있나요?"
미인은 대답했다. 그는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유... 없죠. 불행이 가장 무서운 악당이죠. 이유가 없으니까. 삶을 파괴하는데 이유가 없으니까."
"쥐구멍으로 들어간 다음 어떻게 됐어요?"
"쥐구멍이요?"
"쥐구멍."
"쥐구멍이라... 쥐구멍에 들어간 다음에는..."
그는 대답했다.

 

숲에서 나온 남자는 손에 칼을 들고 있다. 그는 큰 나무에 도착하자 걸음을 멈추고 칼을 품에 넣었다. 바람이 불었고 하늘을 가린 빽빽한 나뭇가지들을 흔들었으나 어둠은 움직이지 않았다. 큰 나무는 숲의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에 있었다. 남자의 뒤로는 단단한 어둠을 숨긴 숲이 있으며, 깜깜한 그곳을 남자는 빛에 의지하지 않고 걸어온 것이다. 숲에서 두 개의 누런 눈동자가 나타나 남자에게 다가왔다. 이어서 검은 피부와 누런 이빨과 이상하게 뒤틀린 다리가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그것은 남자 앞에 서서 한동안 눈만 끔뻑거렸다. 남자는 그것에게 말했다.
"이봐 괴물, 내가 얼마나 많은 불행을 겪었는지 알지?"
"잘 알지."
괴물은 대답하고, 입을 벌리고 침을 흘렸다. 누런 눈이 가늘어지더니 땅 위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풀과 나뭇가지에 쓸린 얼굴과 손을 하고, 남자는 숲의 밖을 보았다. 이윽고 남자의 신발에 밟힌 풀이 바스락 소리를 내고, 나무가 뒤로 물러나자, 숲이 끝나고 도시가 시작되었다. 그곳에 가로등이 있다. 인공조명 아래 남자의 낡은 옷과 콧등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드러나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도시의 중심을 향해 걸었다. 괴물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폐지 줍는 할아버지가 길바닥에 앉아 핸드폰으로 디엠비 방송을 보고 있다. 골목에서는 쓰레기 썩는 악취가 났다. 남자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걸었다. 카페에 도착하자 남자는 백열 조명 속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머뭇거린다. 손님들 때문은 아니었다. 다섯 개의 테이블이 있는 작은 카페에는 두 명의 손님과 한 명의 직원만이 있다. 카운터에 앉은 직원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들었다가 유리 문 밖의 남자를 발견하지만, 남자가 품에서 꺼낸 칼은 유리에 비친 반사광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다.
남자는 카페로 들어왔다. 그는 여자에게 말했다.
"민지씨죠?"
"그런데요."
여자가 대답하자 그는 여자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칼로 찌른다. 흰 와이셔츠를 파고든 칼이 들어갈 때보다는 훨씬 느린 속도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생명이 남자의 몸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의자에서 바닥으로 쓰러졌다. 삶이 사라진다. 칼의 핏방울이 바닥에 고인 피로 돌아간다. 그동안 여자는 생각했다. 여자는 칼에 찔린 남자와 칼로 찌른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칼로 찌른 남자와 칼에 찔린 남자의 얼굴이 똑같아. 민지는 두 남자에게 동시에 말했다.
"진수씨."

 

"그런 일이 있었나요?"
"네."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요."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는 카페에 미인과 마주앉아 있었다. 카페는 조용하고 직원은 피곤해 보인다. 창밖의 삼거리는 어둠에 잠겨있다.
"원래부터 괴물 같은 건 없었어요."
"누가 그러던가요?"
"미인이요."
그는 미인에게 대답했다. 미인은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핸드폰을 잃어버렸을 때 들은 이야기였다. 불행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남자는 모든 사람이 괴물로 보인다고 했다. 세상이 괴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괴물이고 괴물이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집에는 그의 가족과 비슷하게 생긴 괴물이 가족 행세를 하고 있다. 거울을 보면 그의 모습을 한 괴물이 있다고 했다. 남자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냈을 때부터 남자에게 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실수로 젊은 여자를 치었고 그녀는 죽고 말았다. 소식을 듣고 놀란 그가 집을 나갔을 때 그는 레인지 위에 올려놓은 냄비를 깜박 잊고 말았다. 돌아와 보니 집은 화재로 전소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사람을 죽인 죄로 감옥에 갔고 그곳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충격으로 쓰러져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재산도 가족도 잃어버렸고 정신은 점점 혼란스러워져갔다. 그는 자신이 집에 불을 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사람을 차로 치어서 죽였다고 생각했다. 내가 집에 불을 질렀던가? 내가 사람을 죽였나?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건가? 아니야, 분명히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어. 그는 왜 자신에게 불행이 닥쳤는지 생각했다. 하지만 이유는 없었다. 이유가 없으니 불행을 되돌릴 방법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사람이 괴물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괴물러 보였다.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아버지가 괴물로 보였다. 거울을 보면 그곳에는 그의 모습을 한 괴물이 있었다.
여자의 말을 듣고 남자는 말했다.
"그 남자는 긴 꿈을 꾼 기분이겠군요."

 

남자는 쥐구멍을 바라보았다. 쥐구멍으로 들어가려고 머리를 들이밀려는 순간 깨달았다. 아, 나는 이미 쥐구멍으로 들어왔지.

 

큰 길에서 집을 향해 걸어오다 보면 삼거리가 있다. 큰 길로 걸어 나가면 차도가 있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로 가면 조용한 주택가가 나온다. 위로 올라가는 길로 걷다보면 산이 나온다. 산은 어둡다. 길도 어둡다. 삼거리는 어둠에 잠긴다. 삼거리 한쪽 구석의 카페에만이 조용히 불이 켜져 있다. 카페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어느 순간 유리가 거울로 변한다. 밤의 어둠 너머로 문득 교통사고가 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유리창으로는 밖을 내다보는 것 같지만 사실 내 얼굴이 보일 뿐이다. 단지 밤이 되었을 뿐이다.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집에 괴물이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이제는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어도 믿어지지 않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전부 괴물로 보인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나는 괴물 같은 건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원래부터 괴물 같은 건 없었다.

 


 

mirror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가는달 거울바라기 2013.06.01
해망재 레퍼런스 2013.06.01
초청 단편 OK TO DISCONNECT 2013.05.31
초청 단편 툴쿠2 2013.05.31
미로냥 망선요(望仙謠) - 본문 삭제 -6 2013.05.31
pena 만월랑4 2013.05.31
날개 그림자 없는 아이들 2013.05.31
김이환 괴물 같은 건 없어 2013.05.31
양원영 디스토피아를 찾아서3 2013.05.31
pilza2 김박사의 시간 여행 2013.05.01
곽재식 종합적 신경성 증상4 2013.05.01
정도경 피와 토스트13 2013.04.30
곽재식 말버릇과 태도의 우아함 (본문 삭제)5 2013.03.29
이로빈 허밍웨이 베이커리 (본문 삭제)2 2013.03.29
정도경 기원 2013.03.29
정도경 D21 2013.03.29
곽재식 원근법 기교2 2013.03.01
pilza2 지룡의 성 2013.03.01
이서영 노병들2 2013.03.01
세이지 홍대 유령녀 2013.03.01
Prev 1 ...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