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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나무

2013.03.01 00:3303.01

나무

 

 

 

그곳의 땅은 언제나 축축하고 질었다. 흙이 비옥하고 풍성하여 식물이 잘 자라고 언제나 풍년이 들었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았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경고하곤 했다. 흙 속에 괴물이 산다. 흙장난을 해서는 안 된다. 땅을 파내려가면 괴물이 팔다리를 빨아당기고 이어서 목숨을 빼앗아간다.
물론 그는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흙장난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땅 속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높은 곳을 좋아했다. 높은 데 올라서 동네를, 세상을 내려다보기를 좋아했다. 지평선의 끝,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인 그곳을 멀리 바라보며 그 너머에 뭐가 있을까 상상했다. 그 하늘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새벽의 짙푸른 빛에서 한낮의 희고 맑은 옥색을 거쳐 저녁의 자줏빛과 아른거리는 선홍빛, 그리고 밤의 어두운 쪽빛까지 하루 중의 시간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모습을 바꾸었다. 그는 마을 가까운 숲 속의 가장 높은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서 그 기기묘묘하게 아롱지는 색색의 변화를 지치지도 않고 하루 종일 홀린 듯이 바라보곤 했다.
친구는 불구의 몸이었다. 다리가 나무등걸처럼 말라붙어 뒤틀렸고 나무의 옹이처럼 딱딱하고 둥글게 튀어나온 관절이 남들보다 적어도 두 개는 더 있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다리가 구부러지곤 했다. 평소에 친구는 몸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양팔을 한껏 벌리고 그 휘어지고 말라붙은 다리를 지느러미처럼 옆으로 움직이며 힘겹게 걸어다녔다. 또래보다 몸집이 한참 작고 가벼웠기 때문에 관절이 아무렇게나 휘어지지 않도록 꼿꼿하게 힘을 주면 몹시 느리기는 해도 간신히 자기 발로 서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무에 매달리는 순간 친구는 달라졌다. 말랐지만 단단하고 튼튼한 양팔로 작고 가벼운 몸을 지탱하면서 가지에서 가지로 마치 날다람쥐처럼 옮겨 다녔다. 아무리 높은 곳도 무서워하는 법이 없었고, 심호흡을 하고 몸을 한 번 흔들면 아무리 멀리 떨어진 나뭇가지라도 가볍고도 정확하게 건너뛰어 안착하곤 했다. 그 바람에 가지에 앉아 쉬고 있던 새들이나 토실토실한 뺨에 나무 열매를 구겨넣는 다람쥐들을 놀라게 하는 일도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친구는 절대로 다른 동물을 재미삼아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나무 위에서는 친구도 그런 야생의 동물들 중 하나였고, 그래서 나무 위에서만 친구는 자유로웠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마을에서는 아무도 친구에게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는 그저 불구의 몸을 타고난 운 나쁜 소년이었으며, 불구자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거나 보란 듯이 동정을 베푸는 것은 일부러 못살게 구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열하고 품위 없는 행동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마을 어른들은 친구가 중심을 잡느라 팔을 휘저으며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고개를 돌렸고, 마을의 아이들은 친구를 괴롭히지 않았으나 어울려 놀려고 하지도 않았다. 불구의 소년은 언제나 혼자였다.
그래서 그는 소년의 유일한 친구였다.
해가 뜨면, 가끔은 동이 채 트기도 전에, 그는 소년의 집으로 달려갔다. 소년은 반갑게 웃으며 예의 그 힘겨운 걸음걸이로 마당을 가로질러 어렵사리 걸어와서 문을 열어주곤 했다. 그를 보고 소년의 부모도 언제나 환하게 웃었다. 불구의 몸인 아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마을에 그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소년의 부모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년의 부모는 그를 언제나 반겼고 따뜻한 음식을 마음껏 먹게 해 주는 것으로 자신들의 호의를 표시했다.
그도 그런 호의를 언제나 감사히 여겼다. 그는 고아였다. 부모가 죽고 나서 이곳에 사는 친척이 거두어주기는 했으나 불구의 소년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그에게 특별히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숙모가 눈쌀을 찌푸리고, 사촌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려 놀다가도 그가 나타나면 하던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려버리며, 그가 집을 나서면 등 뒤로 숙부가 문을 세게 소리내어 닫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소년과 마찬가지로 외톨이였다. 그리고 외톨이일수록 춥고 배고플 때 마음을 기댈 따뜻하고 포근한 고향 집의 화롯가가 절실한 법이다. 그에게는 소년의 집이 일종의 그런 화롯가였다. 그리고 그 화롯가 밖의 무심하고 냉정한 세상에서 천애고아와 불구자는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쓸모는 없지만 함부로 버릴 수도 없는 골치아픈 덤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이른 아침을 먹고 나면 두 아이들은 숲으로 향했다. 친구를 위해 느릿느릿 걸으며 그는 하늘의 색깔과 그 하늘을 향해 솟아난 나무들을 관찰했다. 불구의 소년은 힘겹게 그를 따라잡으며 휘어진 발을 붙잡아 감싸는 땅의 흙에 대해 불평하고 간밤에 잠든 소년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꿈속에서만은 소년은 불구가 아니었다. 원한다면 뱀처럼 땅을 길 수도 있고 네 발 달린 짐승처럼 빠르게 달릴 수 있었으며 새처럼 하늘을 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불구의 소년은 현실의 세상보다 꿈속의 세상을 더 마음에 가깝게 품고 있었고, 그런 꿈속에서 일어난 일을 세세하게 기억해 두었다가 유일한 친구인 그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숲의 입구에 도달했다. 높은 나무를 찾아 안쪽으로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때때로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이나 뛰어 건너야 하는 시냇물이 나오면 그는 친구를 업고 갔다. 그러나 오래 그렇게 애쓸 필요는 없었다. 숲에는 나무가 많았고, 나무가 있는 곳이면 친구는 어디든 올라갈 수 있었다. 처음에 매달릴 때 조금만 받쳐주면 그 뒤로는 그가 도저히 엄두를 못 내는 곳까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순식간에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땅에 서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올려다보는 그를 내려다보며 친구는 즐겁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는 그 웃음소리가 좋았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비웃음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악의 없이 순진무구하게, 그저 어린 아이가 친한 친구를 놀려주는 웃음이라는 것을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함께 웃었다.
그리고 그는 친구를 따라 나무를 올라갔다. 나무를 타는 친구의 능력은 분명 특출했으나 그는 건강한 몸에 활기가 넘치는 보통의 어린 소년이었으므로 친구가 조금만 기다려주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정해진 높이까지 누가 먼저 올라가는지 내기를 하면 언제나 그가 지는 편이었지만,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내기할 때면 친구와 그는 언제나 비슷비슷했다. 위험하게 휘청거리는 나뭇가지와 성난 새와 놀란 동물들을 피해서 어제는 올라가지 못했던 곳에 오늘 도달하게 되면 그와 친구는 그것을 가장 큰 성취이자 더없는 기쁨으로 여겼다. 그렇게 높은 가지에 나란히 앉아서 두 소년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숲 너머 지평선을 겹겹이 둘러싼 산과 그 바깥의 세상, 더 넓고 흥미로운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친구가 불구의 몸을 이끌고 그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일은 평생 결코 없으리라는 사실을 두 소년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어렸고 세상은 그들의 조그맣고 미숙한 삶에 비하면 더없이 크고 경이로웠으며, 그러므로 두 소년은 어린아이다운 믿음으로 앞날에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고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외로웠고 순진하고 무구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리고 두 소년은 어느 날 그렇게 나무 위에 앉아 있다가 숲 속의 오솔길을 지나는 여행자를 발견했다. 늙은 나귀를 타고 터덜터덜 지나가는 여행자는 수도승의 황갈색 두건을 쓰고 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타고 있는 나귀가 키가 작아서, 키 크고 어깨가 넓은 여행자는 발이 땅에 닿을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생각에 잠긴 듯, 혹은 졸음에 겨운 듯 흔들흔들 느릿느릿 태평하게 아래를 지나가는 여행자를 두 소년은 나무 꼭대기에 숨어서 흥미롭게 구경했다. 마을에 외지인이 들어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고, 설령 외지인이 찾아왔다 한들 마을 사람들 틈에서라면 두 소년이 오랜만의 흥미거리인 타지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아무런 방해 없이 마음껏 구경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잔다, 그치? 저러다 떨어지겠다.”
친구가 킥킥거리며 속삭였다. 그리고 눈을 반쯤 뜨고 몸을 좌우로 흔들며 나귀를 탄 여행자를 흉내냈다.
그도 함께 소리 죽여 킥킥거렸다. 친구는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고 코 고는 소리를 내며 몸을 더 심하게 흔들었다. 그는 참을 수가 없어 배를 잡고 소리내어 웃었다.
친구는 몸을 일부러 흔들었고 그는 웃으면서 격렬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앉아 있는 나뭇가지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렇게 흔들리는 것이 재미있어서 두 소년은 더 심하게 웃었다. 이제 나뭇가지가 삐걱삐걱 불길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두 소년은 여전히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누르며 양 손으로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똑바로 앉았다. 소년들이 중심을 잡고 나뭇가지가 흔들림을 멈추었다. 두 소년은 나뭇가지를 흔들거나 부러뜨리지 않게 조심하면서도 다시 킬킬 웃기 시작했다.
그 때, 저 아래 땅에서 오솔길을 지나가던 여행자가 고개를 들었다. 거칠고 무심한 시선이 똑바로 소년들을 향했다. 그는 흠칫 놀라 웃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 친구가 나뭇가지에 달려 있던 개암을 따서 느닷없이 여행자를 향해 던졌다.
개암은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속이 꽉 차서 돌멩이처럼 단단하게 영글어 있었다. 소년이 높은 나뭇가지에서 있는 힘껏 던진 개암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서 여행자의 나귀가 발을 디디려던 곳 바로 앞, 푹신하고 축축한 땅 속에 박혔다.
이 갑작스럽고 이유없는 공격에 죄없는 나귀는 깜짝 놀랐다. 앞발을 들고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고, 그 서슬에 무방비하게 졸고 있던 여행자는 그대로 나귀 등에서 떨어져버렸다. 붙잡아줄 주인마저 등에서 떨어지자 나귀는 그 길로 히히히힝 하고 길게 비명을 지르며 어딘지 모를 숲 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두 소년은 다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나귀 등에서 떨어진 여행자가 땅에 엎드린 채 잠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두 소년은 터져 나오려던 웃음을 멈추었다. 여행자가 꾸물꾸물 움직여 마침내 몸을 일으켰을 때 두 소년은 안도했다. 그러나 그가 옆에 앉은 친구를 팔꿈치로 찌르며 뭔가 재치있는 말을 건네려던 순간, 여행자는 고개를 들어 두 소년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소년들은 당황했다. 어른이 나무에 오르는 모습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므로 여행자가 그렇게 빠르고 능숙하게 나무를 탈 수 있을 줄 두 소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망치려 해도 그럴 길이 없었다. 소년들이 앉아 있는 곳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가지 위였다. 어디로든 다른 가지로 옮겨가려면 일단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아래쪽에서는 나귀를 잃은 여행자가 무시무시하게 눈을 부라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두 소년은 여행자가 올라오는 방향을 향해서 내려갈 용기가 없었다.
먼저 결심을 굳힌 것은 친구였다.
“빨리 와.”
나뭇가지를 붙잡고 아래쪽으로 몸을 옮기며 친구가 속삭였다.
“조금만 내려가서 옆에 있는 다른 가지로 뛰어 옮겨가면 돼. 자, 빨리.”
그는 망설였다. 친구가 그의 발치에서 재촉했다.
“어른은 무거우니까 우리처럼 가지 사이로 빨리 뛰지 못해. 괜찮아, 서둘러.”
그래서 그도 마지못해 어기적거리며 나무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금 내려가서 친구가 먼저 옆 나무의 가지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친구와는 달리 다리를 쓸 수 있었으므로 발을 나무 줄기가 튀어나온 곳에 받쳐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렇게 엉거주춤하게 서서 그는 친구가 내민 손을 잡았다. 꽉 잡았다. 그리고 옆 나무의 가지로 옮겨가려 했다.
여행자가 팔을 뻗어 그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발목을 잡은 힘센 손을 뿌리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손을 아래로 휘저었다. 그러면서 친구가 잡고 있던 다른 한 손을 자기도 모르게 낚아챘다.
그 서슬에 그는 친구와 함께 나무에서 떨어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등 뒤로 손이 묶여 있는 것을 알았다. 여행자는 친구도 등 뒤로 손을 돌려 그의 손목과 함께 묶어놓았다. 그리고 여행자는 지팡이로 땅을 파는 중이었다.
이곳의 흙은 부드러웠고, 여행자의 낡은 나무 지팡이는 길고 단단했다. 뭐가 어떻게 되려는 것인지 그가 깨닫기도 전에 여행자는 땅을 어느 정도 파더니 그와 친구를 일으켜 세워서 구덩이 속에 다리부터 똑바로 파묻었다.
구덩이는 생각보다 깊었고, 그와 친구는 조그만 소년들일 뿐이었다. 가슴까지 파묻힌 채로 그와 친구는 울부짖었다. 그러나 숲은 깊고 어두웠으며 주위에는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공연히 장난을 치면 그렇게 되는 거다.”
여행자가 굵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의 나귀를 빼앗으면 혼이 나는 거야.”
중얼거리면서 여행자는 가슴까지 파묻힌 두 소년 주위의 흙을 발로 밟아서 다졌다. 그리고 울며 아우성치는 두 소년을 남겨두고 무심하게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참이나 울부짖다가 목이 쉬고 지쳐서 그는 저절로 진정되었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나서야 그는 이곳의 흙은 언제나 느슨하고 부드럽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애를 써서 몸을 움직이다 보니 팔다리 주변에 조금씩 공간이 생겼다. 그는 손목을 묶은 끈을 풀기 위해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살려줘.”
친구가 헐떡거렸다.
“나, 밑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것 같아.”
불구의 소년은 언제나 상상력이 풍부했으므로 그는 친구가 여전히 겁에 질려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손을 꼼지락거리고 손목을 흔들면서 불평했다.
“개암은 왜 던졌어?”
“몰라, 그냥 손에 닿았어….”
친구가 훌쩍거리며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했다.
“눈이 마주치니까, 깜짝 놀라서….”
“잡아당기지 말고 너도 어떻게든 풀어 봐.”
그가 짜증을 냈다.
“밧줄이 굵지만 느슨해, 너도 같이 풀면 금방 풀어질 거야.”
“내가 당기는 거 아냐.”
친구가 한층 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밑에서 당긴다니까…. 다리를 타고 올라와….”
친구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서 점점 작아졌다. 처음에는 친구가 상상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도 발 아래 흙 속에서 잡아당기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결사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느슨하게 대충 묶인 밧줄을 풀었다. 그리고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팔을 휘저어 구덩이 속에서 몸을 빼냈다.
“자, 잡아.”
그가 친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친구는 겁에 질린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
“팔을 들 수가 없어… 아래에서 잡아당겨…..”
그는 친구의 목이 말하는 도중에 뻣뻣하고 거칠거칠하게 굳어져 나무 줄기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친구가 비명을 지를 듯이 입을 크게 벌렸지만 이미 늦었다. 땅 속에 가슴까지 파묻힌 채로 불구의 소년은 소리 없는 비명과 절박한 공포를 열린 입과 크게 뜬 눈에 담은 채 그대로 나무둥치로 변해버렸다.

그는 어쩔 줄 모르는 채로 친구 곁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소리치며 말을 걸고 건드리고 두드려 보았으나 친구는 이제 그의 말을 들을 수도, 그에게 대답할 수도 없었다. 울며 비명을 지르며 고함을 지르며 서 있다가 그는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하는 수 없이 숲을 나와 마을로 돌아왔다.
친구의 집에 가서 소년의 부모에게 사건의 전말을 고했을 때 소년의 어머니는 기절했다. 정신을 잃은 아내를 가슴에 안고 소년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죽일 듯이 노려보는 그 시선에서 그는 친구의 아버지에게 이제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의 아버지가 말없이 문 쪽을 가리켰기 때문에 그는 친구의 집을 나왔다.
다시 숲에 가보고 싶었지만 날이 이미 어두워져 갈 수 없었다. 잠을 자는둥 마는둥하고 그는 다음날 새벽 다시 집을 나섰다. 그러나 불구자 소년의 집에 찾아갔을 때 그가 발견한 것은 빈집이었다. 친구의 가족은 밤 사이에 짐을 싸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
그는 오랫동안 믿을 수 없었다.
혼자 숲으로 가서 그는 이제 나무가 되어버린 친구 옆에 하루종일 앉아 있곤 했다. 친구는 딱딱하고 거칠고 차가웠으며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리 빌어도, 아무리 울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그는 친구를 알아보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이곳의 흙은 질고 축축하고 비옥했으며, 그래서 나무가 되어 땅에 뿌리박은 그의 친구는 숲의 다른 나무들이 그러하듯이 쑥쑥 자랐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무둥치는 작았고 친구의 얼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자라서 가지를 뻗고 잎을 피웠으며, 그리하여 숲의 다른 나무들과 구분할 수 없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그는 서너 번에 한 번, 두 번에 한 번 꼴로 친구의 흔적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러다가 마침내 숲 속의 수많은 키 큰 나무들 중 어느 것이 친구가 변한 모습인지 아무리 살펴보아도 알 수 없게 되는 날이 피할 수 없이 찾아왔다.
그래서 그는 울었다. 친구가 처음 눈앞에서 나무로 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땅에 무릎 꿇고 친구일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는 나무둥치에 이마를 대고 있는 힘껏, 목청껏 울부짖었다.
친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

 


그는 거칠어졌다.
숙모와 숙부와 사촌들에게, 마을 사람들에게,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아냥거리고 모욕을 퍼부었으며, 누군가 맞대응하거나 그를 야단치려 하면 덤벼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천애고아라는 꼬리표 위에 ‘구제불능’이라는 딱지를 하나 더 얹게 되었다. 그러나 그 분노의 근원에 자리잡은 어린 소년의 공포와 죄책감은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이해하거나 설명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거칠어졌다.
마을에서 쫓겨나던 날 그는 숲으로 갔다. 이제는 친구가 어디에 뿌리박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눈에 띄는 대로 아무 나무에나 기대 앉았다. 집을 나올 때 훔쳐온 술을 마셨다. 그리고 소리치며 울다 잠이 들었다.
그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숲속이었다. 그는 친구와 마주앉아 있었다. 친구는 더 이상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청년이었다.
그는 반가웠다. 친구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친구는 마르고 앙상한 손을 빼내며 고개를 돌렸다.
- 배가 고파.
친구가 속삭였다.
- 빗물하고 흙만으로는 도저히 못 견디겠어. 배가 고파.
“네 부모님과 가족들은 이사가 버렸어.”
그가 설명했다.
“나도 숙부의 집에서 쫓겨났어. 하지만 네가 원하면 다시 마을에 내려가서 음식을 훔쳐다 줄게.”
- 살아 있는 걸 가져와.
친구가 기괴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그에게 향하고 나지막하게 불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네가 책임을 져야 돼.
“하지만 어떻게…?”
그가 되물었다. 친구는 광기에 찬 눈을 빛내며, 미소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 말했잖아. 살아 있는 걸 가져오라고.
친구는 마르고 앙상한 손을 그의 어깨에 올렸다. 뼈만 남은 차가운 손가락으로 그의 뒷목을 움켜쥐고 얼굴을 그의 눈앞에 바짝 가져다 댔다.
- 안 그러면 널 먹을 거야.
친구의 숨결에서 짙은 흙냄새가 뿜어 나왔다. 무덤 속에 누운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사방을 휘감은 숨막히는 땅의 냄새,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갈 인간을 발 밑에서 평생 지배하는 강력한 대지의 냄새였다.
그는 잠에서 깼다.
이미 아침이었고, 숲속은 환하게 밝았다.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그는 기대 누웠던 나무둥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날 마신 술 때문인지 입안이 텁텁하게 마르고 머리가 띵했다. 등 아래의 땅이 축축하고 기분 나쁠 정도로 차갑게 느껴졌다. 꿈속에서 뒷목을 움켜잡았던 친구의 차갑고 앙상한 손가락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일어섰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래 전 정체모를 여행자가 지나갔을 수도 있는 숲 속의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그는 친구를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는 ‘살아 있는 것을 가져오라’던 친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나무는 검고 거대했다. 하늘까지 뻗을 듯이 높이 솟아 있었으나 줄기가 앙상하고 가지에는 잎이 하나도 없었다. 숲의 다른 나무들이 모두 햇볕과 땅의 기운을 받아 연녹색, 진녹색, 황갈색, 녹갈색, 진갈색으로 생명의 색깔을 다채롭게 빛내는 가운데 그 나무만 주위의 공기까지 검었다.
나무의 주변에는 조그만 동물들이 죽어 있었다. 두더지나 토끼 등 네 발 짐승도 있었고 이름 모를 여러 가지 새도 있었다. 그 시체는 모두 작게 쪼그라들고 나무의 색깔처럼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갔다. 나뭇가지의 검은 그늘 속에 들어서자 냉기와 함께 꿈 속 친구의 숨결에서 맡았던 무덤의 흙 냄새가 진하게 끼쳐왔다.
그는 한때 친구였던 나무의 줄기를 만지려고 손을 들었다. 그러나 엄두가 나지 않아 다시 내렸다. 추웠다. 으슬으슬하게 기분이 나쁘고 떨렸다. 나뭇가지의 그늘 속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몸에서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새까만 나무 껍질과 주위에 죽어 널부러진 동물들의 시체를 보면서 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도망쳤다.

**
그는 숲 주변의 여러 다른 마을을 떠돌며 잡일을 해서 생계를 이었다. 때로는 좀도둑질을 하기도 했다. 쥐, 닭, 비둘기, 도둑고양이 혹은 주인 없는 개 등 작은 동물을 발견하면 산 채로 잡아서 자루에 넣었다. 그리고 숲속으로 가져가서 검은 나무에게 주었다.
그를 쫓아낸 고향 마을은 물론, 가까운 마을에까지 이미 그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퍼졌다. 가끔 쥐나 도둑고양이 혹은 들개를 잡아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주 가끔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먹을 것과 친구가 먹을 ‘살아 있는 것’을 구하기 위해 점점 더 먼 곳으로 가야만 했고, 점점 더 자주 도둑질에 의존해야 했다.
어쨌든 그는 자루에 ‘살아 있는 것’을 채우면 언제나 검은 나무에게 돌아왔다. 갈 곳 없는 밤이면 검은 나무 밑에 ‘살아 있는 것’이 든 자루를 묶어놓고 그 옆에서 노숙하기도 했다.
그런 밤이면 그는 검은 나무에 꽃이 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으나 꿈이 아니었다. 자루 속에 든 ‘살아 있는 것’은 검은 나무 밑에서 공포에 질려 꿈틀거리다 점점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면 검은 나무의 새카맣게 말라붙은 가지에 화사한 색의 꽃이 한 송이 피어났다. 자루 속에 든 것이 쥐나 닭, 비둘기처럼 작은 동물일 때는 꽃도 작고 색도 옅었다. 살이 통통하게 찐 두더지나 도둑고양이일 때는 꽃도 조금 더 커지고 색도 진해졌다. ‘살아 있는 것’의 숫자가 많아지면 그만큼 꽃의 숫자도 늘고 색도 다채로워졌다. 늑대만큼이나 몸집이 큰 들개를 잡아다 검은 나무 밑에 매어놓은 날에는 진한 푸른색 꽃과 함께 연녹색의 잎사귀도 하나 피어났다.
생명을 먹고 피어난 검은 나무의 꽃과 잎사귀는 주변 공기의 색깔마저 바꿔놓았다. 밤의 검은 대기는 꽃 주변에서만 옅은 분홍색과 노란색, 하늘색과 연두색이 뒤섞인 색깔을 내며 어스름하게 빛났다. 새벽녘에 동이 터서 희부연 햇빛 속에 꽃들이 즉각 흩어져 사라져 버릴 때까지 그는 몇 시간이고 매혹되어 바라보곤 했다.
그 꽃에는 향기가 전혀 없었고 좀 더 잘 관찰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서면 나무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무덤의 흙냄새에 숨이 막혔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생명을 먹고 피어난 꽃이 아른아른 색이 바뀌는 대기 속에서 가늘게 꽃잎을 떠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는 ‘살아 있는 것을 가져와, 안 그러면 너를 먹겠다’라고 말하던 친구의 목소리와 그 형형하게 빛나던 기괴한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친구가 이렇게 되살아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살아 있는 것을 얼마든지 가져다주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곤 했다.

쥐를 잡아주러 갔던 농장에서 양을 훔쳐온 것은 그로서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훔쳐온 양을 시궁쥐가 든 자루와 함께 나무줄기에 묶어놓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다가 그는 깜빡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친구는 무릎 위에 양을 껴안고 앉아 있었다. 친구에게 안겨서 양은 고통스럽게 메에에, 하고 비명을 지르며 시들었다. 가죽에서 털이 빠지고 몸이 말라 뼈가 앙상해졌다. 양이 마침내 눈을 까뒤집으며 비명을 멈춘 순간 친구는 그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 살아 있는 소년의 모습으로 잠시 돌아왔다.
그는 반가웠다. 달려가서 껴안으려 했다. 그 때 친구가 입을 열었다.
- 산 너머를 항상 궁금해 했지?
친구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 산 너머에도 마을이 있어. 그리고 그 마을에는 선술집이 있고.
말하면서 친구는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 가서 데려와.
“뭘?”
그가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친구는 다시 빙긋이 웃었다.
- 너와 내가 원하는 것.
그리고 그는 잠이 깨었다.
때는 아직 한밤중이었다. 주위는 검고 어두웠으며 대기는 얼음처럼 찼다. 그는 몸을 떨며 서둘러 일어섰다.
그 순간 검은 나무는 그의 눈앞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 자주색, 노란색, 붉은색, 푸른색, 진보라색, 그리고 그가 이름도 알지 못하고 존재한다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색깔들로 불타오르며 형형색색의 빛으로 주위의 대기를 채웠다. 열기도 생명도 없는 그 무심한 빛은 눈이 부시도록 환하여 주위의 숲을 밝히고 밤의 검은 하늘까지 일순간 밝고 차갑게 채우려는 것 같았다.
그는 다가가려 했다.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친구에 대한 생각도, ‘살아있는 것’에 대한 생각도, 무덤의 흙 냄새와 검은 공기의 위협에 대한 생각도 사라졌다. 나무는 아름답고 찬란했으며 우주의 그 어떤 것보다도 매혹적이었다. 그는 달려가서 나무를 껴안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발을 떼려는 순간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빛이 있었다가 없어져버린 자리에서 밤의 어둠은 몇 배나 더 짙어진 것 같았다. 주위를 감싼 숨막히는 어둠과 사람의 호흡을 막고 생기를 빨아먹으려는 흙냄새 속에서 그는 친구가 가리켰던 방향을 생각했다. 어쩐지 어둠 속에서도 그 방향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걷기 시작했다.

 

 

**

 


지평선은 생각보다 먼 곳에 있었다. 산은 높았고, 골짜기도 그만큼 깊었다. 걷다 지쳐서 차가운 흙 위에 주저앉아서 그는 자신이 꿈에 나타난 죽은 친구의 말만 믿고 뭔지도 모를 것을 찾아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마을을 찾아가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너와 내가 원하는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따뜻한 음식과 휴식이었다. 친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아마도 살아 있는 어떤 것이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찬란한 개화(開化)를 떠올렸다.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 보았다. 그 수많은 색채가 뿜어내는 사악하고도 유혹적인 죽음의 생기는 그가 태어나서 이제까지 보아온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초현실적인 화려함이었다. 그는 그 광경을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너와 내가 원하는 것’이리라고 그는 결론지었다. 친구는 다시 한 번 살아나서 피어나기를 원했고, 그는 그 광경을 다시 한 번 보기를 원했다. 자신이 이번에 훔쳐와야 하는 동물이 어떤 것인지 그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지난 번에 양이었으니 이번에는 아마 소, 혹은 산을 넘으려면 나귀나 말이 더 유용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것이 친구가 원하고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훔쳐다 줄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기운을 내어 일어서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
선술집은 산기슭에서 마을로 접어드는 길목에 있었다. 술집과 음식점, 여관을 겸하는 평범하고 낡아빠진 곳이었다. 산을 내려가자마자 불빛이 눈에 띄었고 다가가서 보니 친구가 말한 대로 선술집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쩐지 몹시 안도했다.
다만 밖에서 보았을 때 나귀나 말 등의 동물이 어디에 매여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선술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선술집 안은 밖에서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흐릿한 등불 빛이 밝혀진 낡고 지저분하고 허름한 장소였다. 아마도 가게 주인일 듯한 중년 남자가 너저분하고 좁은 주방에서 그다지 깨끗해 보이지 않는 행주로 귀찮다는 듯 격렬하게 뭔가 닦고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중년 남자가 시선을 들었다. 그 무심하고 거친 눈빛은 십 년 전 숲 속에서 나귀를 잃고 나무 위의 소년들을 노려보던 그 때와 똑같았다.
그는 못박힌 듯 문가에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 까요?”
여자의 목소리가 옆에서 물었다. 그는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여자는 소녀였다. 소녀라기보다는 이제 처녀였다. 그러나 소녀에서 처녀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아가씨 특유의 수줍고도 애교 있는 무구한 표정을 얼굴 가득 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소녀, 아니 처녀는 가볍게 볼을 붉히고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으나 종업원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려는 듯 다시 한 번 모기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드릴까요?”
그는 자신이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더듬더듬 생각나는 대로 술을 한 잔 주문했다. 처녀는 살짝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허름하고 낡아빠진 주방으로 갔다. 중년 남자 옆으로 가서 뭔가 말했다. 중년 남자는 잠깐 고개를 들어 여자를 쳐다보았다. 바라보는 그 눈길은 부드러웠고, 나이와 성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얼굴 윤곽은 한 눈에 알아볼 정도로 비슷했다.
그는 문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너와 내가 원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이제 그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의식적으로 딱 집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아니 누구인지 말할 수는 없었으나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 때 그는 떠났어야 했다. 즉각 선술집을 나와서 산기슭의 마을도,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의 숲도 아닌 어딘지 모를 곳으로 멀리 떠났어야 했다.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보지 말고, 다시는 생각도 하지 말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너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아무 이유 없이 그의 머릿속에 함께 떠오른 것은 어린 시절의 숲에서 검은 나무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그 일생일대의 화려한 광경이었다. 어리고 외롭고 다정했던 그 시절, 그 운명의 날에 그가 친구와 함께 나무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나무 위에서 장난을 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를 붙잡았던 친구의 손을 낚아채어 함께 나무에서 떨어지게 하지 않았더라면 – 검은 나무는 살아 있는 것의 목숨을 빼앗아 죽음 속에서 일시적으로 되살아나 몸부림치며 절박하게 꽃을 피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불구의 몸이나마 친구는 살아서 청년이 되어 그의 곁에 머물렀을 것이고, 친구의 집 화롯가는 언제나 그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진정한 고향으로 남았을 것이다…
처녀가 그의 손을 살짝 건드렸다. 그는 흠칫 놀랐다.
여자는 아름다웠고, 그 몸짓에는 아무런 가식도 의도도 없었다. 처녀는 서 있는 손님을 자리로 안내하고 주문받은 술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그는 여자에게 이끌려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가 술값을 낼 돈이 없다고 자백했을 때 중년 남자는 그가 뚜렷이 기억하는 그 험악한 눈길로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 듯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처녀가 옆에서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다시 한 번 파묻혔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녀가 옆에서 말리자 중년 남자는 여전히 그 험악한 눈길을 거두지 않으면서도 일단은 물러났다. 그래서 그는 선술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오래 전 숲 속의 여행자였고 지금은 선술집의 주인인 중년 남자는 언제나 의심의 눈길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곳은 선술집이었고, 그것도 주로 가난하고 행색이 남루하며 생각과 몸짓이 험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허름한 선술집이었다. 일하는 사람은 중년 남자와 그와 처녀 뿐이었다. 그 중에서 처녀는 홀로 젊은 여자였고, 게다가 아름다운 젊은 여자였으며, 그러므로 험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여러 번 무례한 사람들을 문 밖으로 내던져야 했다. 그 때만큼은 중년 남자도 누그러진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처녀는 젊고 아름다웠고 그곳의 유일한 여종업원이었다.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거칠고 험한 뜨내기 손님들에게서 처녀를 보호하려면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지키는 쪽이 더 효율적이었다.
그는 성실하게 일했다. 그러나 자신이 왜 이곳에 머무르면서 처녀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는 것인지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늦은 밤, 혹은 새벽녘에야 일을 마치고 골방 한구석의 자기 자리에 누우면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 당장 곯아떨어지고 싶을 때라도 반드시 머릿속에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너와 내가 원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이제 알 수 없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디딘 순간 설명할 수 없이 깨달았으나 이제는 의식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알 수 없게 되었다. 복수? 숲 속의 여행자였던 중년 남자를 이 선술집에서 어떻게든 꼬여내어 어린 시절의 숲까지 데리고 가려면 웬만한 속임수나 기지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처녀는… 아버지를 잃고 혼자 남을 처녀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그는 마음이 복잡해지면서 오던 잠이 모두 달아나버리곤 했다.
처녀는 귀엽고 착하고 아름다웠으며 그를 좋아했다. 그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소녀의 마음이 남아 있어서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좋아했다. 험한 사람들이 음탕한 눈으로 훑어보아도 처녀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고 언제나 미소와 꾸밈없는 친절로 손님을 맞이했다. 그래서 처녀와 그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그는 마음이 깊이깊이 가라앉곤 했다.
‘너와 내가 원하는 것.’ 아니, 이제 그가 원하는 것은 검은 나무가 원하는 것과 같지 않았다. 그는 처녀의 삶에 슬픔이나 비극을 원치 않았고, 그러므로 중년 남자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다가 밤 하늘을 향해 타오르던 그 화려한 개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절박하고도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떠올릴 때면 그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검은 나무가 되살아나 밤의 어두운 공기를 흔들며 사방을 색색의 빛으로 채우던 그 찬란한 광경은 이제 그의 마음 속에서 무덤의 짙은 흙 냄새와 함께 한때 처녀만큼이나 무구하고 아름다운 어린 소년이었던 친구의 웃음 소리와 겹쳐지곤 했다.
그렇게 그는 오래 생각했고, 오래 고민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떠나기로 결심했다.
살아 있는 것은 언젠가 모두 죽는다. 이 사실은 그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친구를 위해 아직 생명이 한참 남아 있는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도, 여자가 사랑하는 아버지도 해칠 수 없었다.

 

 

**

 


처녀와 그 아버지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는 나귀 한 마리를 훔쳐 선술집을 빠져나왔다. 나귀는 십 년 전 여행자가 타고 숲을 지나가던 그 때의 그 나귀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늙고 볼품이 없었다.
나귀를 훔칠 때만 해도 그는 다른 곳으로, 알지 못하는 먼 곳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나귀는 걷다 지치면 타고 가고, 돈도 먹을 것도 없이 절박해지면 팔 수도 있다. 몰래 나귀를 끌고 선술집의 대문을 나설 때만 해도 그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어째서 산을 넘어 어린 시절의 숲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는지 그 자신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의리는 지킬 가치가 있는 대상에게만 지키는 것이 현명하다. 그는 나귀를 훔칠 때 생각했던 것처럼 먼 곳으로 떠났어야 했다. 어린 시절의 숲과, 나무로 변해버린 친구와, 불운한 그 때 그 시절의 여행객과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하고 아름다운 처녀와 – 이 모든 과거와 현재의 족쇄가 존재하지 않는 곳, 그가 진실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 곳으로 도망쳤어야 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의 숲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자유는 도망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로부터 끝없이 도망치면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도망칠 수 없었다. 그는 어떤 마무리, 자신도 잘 알 수 없지만 피할 수 없는 어떤 끝맺음을 향하여 어린 시절의 숲으로 향했다.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인간의 감정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늙고 기운 없는 나귀를 앞세우고 터벅터벅 걸으면서 그는 처녀가 밤의 어둠 속에서 자신을 몰래 뒤따라 오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그는 밤새 걸었다. 나귀도 그의 앞에 서서 터벅터벅 태평하게 지치지도 않고 계속 걸었다. 걸으면서 그는 생각했다. 친구에게 나귀를 줄 수도 있다. 친구가 되살아나 꽃을 피우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거나 혹은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그는 확실하게 말할 생각이었다. 이제 친구가 원하는 것과 그가 원하는 것은 같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아무 것도 모르는 처녀를 친구에게 데려다줄 수는 없었다. 친구는 죽었고 그는 살았다. 그러므로 그는 죽은 친구를 위해 마지막으로 기도하고 그는 떠날 것이었다. 검은 나무가 그의 이런 최후통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어쨌든 그런 말들을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었다.

동이 틀 무렵에 그는 마침내 검은 나무 앞에 도착했다. 숲속을 부옇게 밝히는 첫 새벽의 햇빛 속에서 검은 나무는 어쩐지 전보다 작고 무해하며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조금 안심했다.
그는 나귀를 데리고 가서 나무에 매어 놓으려 했다. 낮에 검은 나무에 살아 있는 것을 주어 본 적은 몇 번 없었다. 그러므로 검은 나무가 곧바로 나귀를 빨아먹을지 아니면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릴지 그는 잘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친구가 원하던 것은 가져오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가져다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는 검은 나무를 달랠 생각으로 나귀를 가까이 데려갔다.
그러나 그가 다가서기 전에 나무는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검은 나무가 살아남에 따라 주변의 숲은 죽어갔다. 검은 나무는 땅과 하늘과 숲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이며 그 사악하고 부자연스러운 거짓 생명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진한 분홍색, 핏빛 붉은색, 노을진 파도와도 같은 적자색 꽃잎들이 죽은 가지를 뒤덮으며 희고 투명한 아침 숲의 공기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꽃잎은 맥박치며 검은 나무를 아래에서 위로 차근차근 휘감았고, 그에 따라 검은 나무의 곁에 서서 이제까지 진녹색, 연녹색, 갈녹색, 회갈색, 연갈색, 연두색으로 호흡하며 성장하고 살아가던 다른 나무와 꽃들은 전부 거무스름하게 쪼그라들어 말라붙었다. 그 죽음의 한가운데에서 검은 나무만이 붉게 꽃피며 살아났다.
그리고 처녀가 검은 나무에게 홀린 듯이 다가갔다.
그는 처녀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지 못했다. 뒤따라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상황을 이해하고 처녀를 붙잡으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처녀는 허공에 떠서 미끄러지는 것처럼 아름답지만 부자연스러운 걸음으로 검은 나무에 빨려들듯 다가가서 열정적으로 그 줄기를 껴안았다. 나무둥치를 감싸안은 처녀의 두 팔과 검은 나무의 껍질에 댄 처녀의 뺨이 그대로 조금씩 녹아서 나무껍질의 표면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그는 똑똑히 보았다.
그는 달려가서 처녀를 떼어내려 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살려내려 했다. 그러나 무덤의 짙은 흙냄새가 사방을 휩쌌고, 그와 함께 붉은 꽃잎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검은 나무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돌개바람에 밀려서 쓰러졌다. 몇 번이고 바람을 뚫고 지나가려 해 보았으나 바람이 너무 강해서 나무둥치에 가까이 가기는 커녕 제대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몸을 일으켜 다가가려다가 몇 번이나 바람에 밀려 내동댕이쳐지고 쓰러지면서 그는 절망과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그 서슬에 붙잡고 있던 고삐를 놓치면서 겁먹은 나귀가 도망쳐 버렸다. 그는 나귀가 도망친 것을 몰랐다. 나귀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로 핏방울 같은 붉은 꽃잎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하는 여자가 죽어버린 검은 나무에 목숨을 조금씩 빨아먹히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
나무는 여자를 쉽게 죽이지 않았다.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나무 곁을 떠나지도 않고 사흘 동안 밤낮으로 여자를 지켜보았다. 생애 가장 고통스러운 사흘이었다. 
사흘 동안 여자는 검은 나무의 품에 안겨 천천히 죽어갔다. 몸 전체가 쪼그라들고 마르고 앙상해졌으며, 등이 굽고 보드랍던 피부에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생겼다. 머리카락은 백발로 변하여 전부 위로 솟구쳐서 나뭇가지에 뒤엉켰다.
그러나 여자는 넋나간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띠고 죽은 나무의 품에 꽉 안겨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를 지켜보며 그는 함께 죽어갔다.
사흘째 되던 날 여자의 아버지가 도착했다.

**
여자의 아버지는 나귀를 따라왔다. 늙고 총명한 나귀는 집으로 도망쳐 가서 주인을 이끌고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온 것이다. 한때 나귀의 등 위에서 졸면서 느긋하게 숲을 가로질러 갔던 중년 남자는 이제 불안한 눈을 빛내면서 공포에 질려 필사적으로 나귀의 뒤를 따라 검은 나무에 도달했다.
중년 남자가 죽은 나무에 꼭 붙어선 백발 노파를 보고 자신의 딸임을 알아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겁먹고 놀라서 거칠고 신경질적인 눈을 빛내다가 중년 남자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리고 남자는 그에게 덤벼들어 때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냥 맞았다.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설명하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설명하지 않는다면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자를 구할 방법은 이제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조용한 절망으로 남자의 공포에 질려 날뛰는 불안한 절망을 받아들이며 아무 저항 없이 남자가 때리는 대로 그냥 다 맞았다.

중년 남자는 한참이나 그를 때렸다. 피투성이가 되어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뒤에야 딸을 죽은 나무에 붙들어 매놓은 것이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딸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그가 여자를 구하려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짙은 흙냄새가 섞인 돌풍이 일어나 앞을 가로막았다. 남자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발작적으로 기침을 하며 숨을 헐떡였다. 돌풍을 뚫고 나무에 다가가려고 무익한 노력을 몇 번이나 했으나 허사였다. 그렇게 몇 번이고 기침을 하고 숨을 헐떡이며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끝에 남자는 그에게 몸을 돌렸다.
그는 남자가 다시 때리려는 줄 알고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남자가 원한 것은 대답이었다. 남자는 땅에 쓰러진 그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뭐냐?”
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지 못하여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그의 멱살을 거세게 움켜잡았다. 그는 숨이 막혀 컥컥거렸다.
“저게 뭐냐고?”
남자가 다시 물었다.
“제 친구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남자는 잠깐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남자가 다시 목을 조르거나 때리기 전에 그가 물었다.
“십 년 전, 당신이 이 숲을 지나갈 때… 나귀에게 개암을 던졌던 불구의 소년을 기억하십니까?”
남자는 한순간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경악의 표정이 남자의 얼굴을 덮쳤다.
“넌, 그 때…. 하지만 저 나무는…. 나무가 왜….”
“제 친구는 불구의 몸이었고, 이곳의 땅은 비옥한 만큼이나 무엇이든 빨아들이려는 성질이 강합니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그저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장난을 좀 쳤다고 땅에 파묻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럴 리가….”
남자가 더듬거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친구의 목이, 얼굴이 단단하고 뻣뻣한 나무둥치로 변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이제는 남자가 때리든, 목을 조르든, 죽이든 –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를 도로 땅에 내던졌다. 그와 나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자는 이제 나무 줄기에 반쯤 묻혀 있었다. 코와 턱의 윤곽만 보이는 옆얼굴은 해골처럼 완전히 말라 비틀어졌고 살갗은 거무죽죽했다. 그에 비해 기괴할 정도로 새하얀 백발은 나무를 완전히 뒤덮을 정도로 길어져서 붉은 꽃이 모두 져 버린 마르고 검은 가지와 가지 사이에 하얀 실처럼 얽혀 있었다. 검은 나무의 주변에는 숨막히는 흙냄새를 뿜어내는 돌개바람이 여전히 폭풍처럼 사납게 소용돌이쳤으나 여자는 나무 줄기 속으로 점점 깊이 빠져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살아 있다는 그 어떤 징후도 찾을 수 없었다.
남자가 허리춤을 손으로 더듬었다. 허리띠에 묶어 두었던 주머니를 풀어 손에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검은 나무에 빨아먹혀 까맣게 말라붙은 옆 나무의 죽은 가지를 꺾어 들었다.
남자의 손에서 부싯돌이 탁, 탁 소리를 내며 불꽃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그는 남자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순간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말리려고 다가서자마자 남자는 그를 찼다. 그는 땅에 쓰러져 나뒹굴었다.
남자는 말라붙은 가지에 쉽게 불을 붙였다. 불 붙은 나뭇가지를 품에 감싸안고 그가 말릴 새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서 죽은 흙냄새의 소용돌이를 뚫고 여자를 빨아들인 검은 나무에게 다가갔다. 딸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품 속에 감싸 들었던 불 붙은 나뭇가지를 꺼냈다.
붉은 꽃잎의 돌개바람과 마찬가지로 흙냄새의 소용돌이도 소리가 없었다. 검은 나무는 언제나 소리가 없었다. 그 때문에 나무에 다가선 남자의 비명 같은 외침 소리가 유난히 쩌렁쩌렁하게 숲을 울렸다.
시든 나뭇가지에 간신히 달라붙은 조그만 불꽃은 검은 나무를 둘러싼 돌개바람에 휩쓸려 즉시 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타오르던 나뭇가지는 바람에 휩쓸려 수십 조각으로 찢어졌고, 그렇게 갈라진 마른 불씨는 바람에 휩쓸려 검은 나무의 주위를 휘돌고 가지 위로 타고 올라갔다. 검은 나무의 죽은 가지에 하얗게 휘감긴 여자의 마른 백발에 불씨가 닿자 그 하얀 실 같은 머리카락에 불이 붙었다.
나무는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검은 나무와 그 주위를 둘러쌌던 돌개바람이 불꽃에 휘감기며 검게 죽은 가지와 가지 사이에 빈틈없이 얽힌 여자의 백발과 함께 하늘을 향해 한 덩어리로 불기둥이 되어 타오르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꽃은 나무 주변의 대기는 물론 하늘과 땅을 모두 붉게 물들이며, 춤추며, 휘파람 같은 알 수 없는 노랫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두 사람을 잡아먹은 죽은 나무를 휩싼 마지막 불의 개화는 그가 이전에 넋을 잃고 보았던 초현실적인 꽃의 향연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더 슬프고 참담하고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는 울었다.
철없는 소년의 장난과, 지나치게 단단했던 개암과, 달아나버린 나귀와 … 죽은 친구와 그 친구에게 붙잡혀 생명을 빨아먹힌 사랑했던 여인과,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시작했던 무자비한 여행자가 모두 한데 얽혀 타오르는 광경을 보면서 잃어버린 어린 시절과 잃어버린 친구와 죄없이 희생된 사랑을 애도하며, 어이없이 조그맣고 미약한 사건에서 시작되어 돌이킬 수 없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 버린 삶의 흐름과 죽음의 불꽃 앞에 너무나 무력한 자신에게 분노하며 그는 울었다.

 

 

**

 


검은 나무는 오랫동안 불탔다.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곳에 서서 울부짖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불이 타오를 만큼 타다가 마침내 모두 꺼졌을 때, 그는 늙고 볼품 없지만 총명하고 다정한 나귀를 끌고 그곳을 떠났다.

 

 

**

 


그는 오랫동안 울었다.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 친구가 아직 살아 있었을 때 높은 나무 위에 함께 앉아 웃으며 내려다본 세상이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행복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평선을 둘러싼 산 너머의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그는 이제야 비로소 완전히 이해했다. 어린 시절의 숲을 울리던 그와 친구의 웃음소리, 죽은 나무에서 피어나 대기를 간지럽히고 하늘을 물들이며 피어나던 오색의 꽃들, 그의 이름을 부르던 처녀의 목소리와 손에 와 닿던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 그리고 분노에 찬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중년 남자의 얼굴과 죽은 딸의 이름을 외쳐 부르던 아버지의 오열과 여자의 생명 잃은 거무죽죽한 얼굴을 끌어안고 놓지 않던 죽은 나무와 그 나무의 검은 가지와 함께 하늘을 향해 불타 오르던 여자의 백발과…
그 모든 것이 그의 세상이었고, 그의 삶이었다.
여자에 대한 죄책감과 바닥을 알 수 없는 슬픔과 무겁게 짓누르는 회한과 가슴을 찢는 비탄도 또한 모두 그가 지고 가야 할 짐이었다. 그것은 지금부터 죽는 날까지 평생 그에게 삶의 일부로 남을 것이었다. 그는 그 짐을 내버리거나 도망칠 만큼 나약하거나 비겁하지 않았다. 다시 춥고 배고프고 연약한 외톨이로 돌아왔으나 그는 이제 아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어른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독과 상실과 슬픔과 그리움을 짊어지고 끝없이 넓고 검고 어둡고 찬란한 세상을 향해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길을 따라 발을 내디뎠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 없었지만, 떠나가서 살아남아 기억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의리이고 책임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후회하고 모든 것에 통탄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간직한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가슴 찢어지는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살아가야 할 그 막중한 책임에 대해서만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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