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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망재 섬마을 선생님

2013.01.31 16:5301.31

섬마을 선생님





황 선생은 눈을 의심했다. 아직 3월이라 바람은 매서운데, 초지진 앞 바닷가에서 강화여상 교복을 입은 학생이 맨발로 바닷물을 밟고 있었다. 스물 아홉 난 총각 선생의 살림으로는 그나마 값나가는 것일 터인 빨간 싸이클을 어디 묶어놓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는 호루라기를 삑삑 불며 둑길을 내려와 다짜고짜 아이에게 달려갔다. 바닷물이 땅을 어루만지듯 잔 파도의 끝자락이 가만히 넘나드는 자리, 신발은 어디다 두었는지 까만 개흙땅 위에 새하얀 맨발이 선명한 그 애는, 갑자기 손목을 붙잡히고 깜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새 교복에다 아무리 보아도 앳되고 낯선 얼굴인 것이, 올해 신입생인 모양이다. 
“예서 뭐 하는 거야?”
“바다 좀 봤는데요.”
묘한 서울말씨라고 생각하는데, 그 애는 손목을 틀어 붙잡은 손을 뿌리쳤다. 정말로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일랑 없었다는 듯, 그 애는 배시시 웃었다. 
“선생님도 한번 들어와 보세요. 파도가 발목을 감았다 풀었다 하는 게, 시원해서 기분좋아요.”
“아니, 교복을 입고 이러는 녀석이 어디 있어?”
교표는 삐딱하고 이름표는 달지 않은데다, 이렇게 신발이며 양말 다 벗고 물에 들어가 노는 꼴이, 어딜 봐도 단정한 학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다, 학생과 교사가 빤히 쳐다보는 앞에서 풍선껌을 딱 하고 씹는 꼴을 보니, 황 선생은 걱정이 되어 그렇게 달려온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그는 그 애의 귀때기를 틀어잡았다. 귀를 잡힌 것이 꽤나 분했는지, 귀까지 얼굴이 빨개진 그 애가 고개를 털며 목소리를 높였다. 
“말로 하셔도 알아들어요!”
“신발은 어디다 갖다버린거냐.”
“몰라요, 잃어버렸어요.”
“허, 거 참.”
아무리 보아도 태도가 심히 불손하다. 황 선생은 귀를 틀어잡은 손에 힘을 주며, 자전거를 던져놓은 그 둑길을 향해 걸었다. 맨발로 질질 끌려가던 아이가 황 선생의 손을 뿌리쳤다. 신선할 정도로 반항적인 태도에 일단 손이 올라가려는데, 아이가 한 마디 했다. 
“지금 저한테 이러시지 말고 수협부터 가 보시지 그래요.”
“수협같은 소리 하지 말고, 너 몇 반이야?”
“이번에 우리 학교 졸업한 언니 있잖아요. 이애주 언니.”
“애주가, 왜.”
“수협에 선생님이랑 나이 비슷한 아저씨 하나 있다고요, 애주 언니한테 관심 있던데요.”
순간 황 선생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하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은 채, 짐짓 관심없는 이야기라는 듯 억지로 손에 힘을 주었다. 
“너같이 불량한 애가 그런 말을 한다고….”
“교사가 사람 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는 거죠, 그리고 선생님 애주 언니 좋아하잖아요.”
“뭐?”
“애주 언니 좋아하는 거 다 알거든요?”
“아, 너.”
황 선생은 둑길에 다 와서야, 그 애의 귀를 놓아 주었다. 까짓거 졸업한 선배가 수협 직원이랑 사귀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고 한마디 하고 학교로 끌고 가면 그만인데, 뻔히 아는 이야기인데도 학생 입을 통해 들으니 저도 모르게 낯이 달아올랐다. 
“…어디서 들었어?”
“뭘요? 수협 아저씨요?”
“….”
“선생님이 애주 언니 좋아하는 거요?”
“…설마 소문이라도 난 거냐?”
“지금 그걸 묻고 계실 때가 아닌것 같은데요. 그 아저씨, 애주 언니 데리고 읍내 고려당 빵집이라도 가자고 할 참인 모양이던데. 갓 학교 졸업한 어리버리한 신참이잖아요. 가자면 따라가야지 어쩌겠어요.”
“…….”
“안 가 보세요?”
거, 고려당 빵집이 뭔 대수냐고 한마디 하고, 이대로 자전거 짐받이에 앉혀서는 도망도 못 가게 꽁꽁 묶어다가 일단 학교로 끌고 가야 맞겠는데, 황 선생은 고개를 가로 젓다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내일 학교에서 보자. 너 내일 교무실로 안 오면, 너희 담임 선생님께 말해서 한 달 내내 변소 청소나 시킬 테니 그런 줄 알아.”


황 선생은 타지 사람이었다. 그 무렵 순위고사를 본 선생들 중 제일은 서울로들 갔고, 그 다음은 경기도에 나누어 배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오지 낙도라, 섬이나 산골짜기는 아예 등수가 떨어지는 이들이 들어가거나, 아니면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고 일찌감치 승진점수를 쌓아 장학사가 되려는 이들이 더러 자원해 들어가기도 하였지만, 이곳 강화는 물길은 거칠어도 섬이 제법 크고 김포 앞바다에서 고개만 들면 바로라, 딱히 승진점수가 쌓이는 곳은 아니었다. 
황 선생은 딱히 야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교육청에서 그리 가라고 하니 승진점수는 안 붙는 주제에 배는 타고 넘어와야 하는 그곳으로 짐 챙겨서 바로 움직이는, 얌전한 사람이었다. 사실은 야심이 없다기보다, 그런 것에 대해 가르쳐 줄 가족이 없었다고 말하는 게 옳았으리라. 전쟁 직전에 태어난 그는, 젖도 떼기 전에 양친을 다 잃었다. 드물게 고등학교까지 나와 대구에서 은행 일을 하다가, 전쟁이 났으니 조용히 숨어나 살자 싶어 일가붙이들 사는 고향 마을로 돌아가 더욱 몸을 숙이고 조용히 지내던 그의 젊은 아버지가, 어느 날 밤 누구의 발고인지도 모를 일로 국군인지 인민군인지도 모를 이들에게 끌려나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이후로, 그의 할머니는 그를, 그저 야심도 무엇도 없이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살게 하는 데만 골몰했다. 
땅뙈기도 울타리가 되어줄 가장도 없이, 그저 친척의 호의로 마을 구석에 집을 얻어 살며, 먹고 살기 위해 품을 팔고 밤낮없이 남의 집 바느질거리며 일가 잔치 준비를 도우러 다니면서도, 할머니는 그를 중학교까지 악착같이 공부시켰다. 가진 것 없는 놈이 뭐든 하려면 배운 것이라도 있어야 했고, 없는 살림에 농고나마 갈 방법은 장학금 받는 길밖에 없었다. 죽도록 공부한 덕에 고등학교는 장학금 받아 나오긴 했지만, 동네 사람들은 동네에서 품을 파는 막일꾼이 되기에는 공부를 많이 해 버린 그를 두고, 철모르고 할머니 고생이나 시키는 놈이라며 손가락질이나 했다. 그나마 촌수를 따져보면 다 서로서로 얽혀있는 집안들이니 망정이지, 타성받이였으면 진작에 쫓겨났을거다.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손가락질 속에서 그는 늘 생각했다. 이 지긋지긋한 집성촌을 떠나야 한다고. 어떻게 남들에게 주목받는 인생을 살아보겠다거나 하는 야심은 없었지만, 적어도 온전한 여자에게 장가도 못 들고 남의 손가락질이나 받는 동네 머슴질로 평생을 보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어디로 떠나건, 젊고 건강한 몸에 고등학교 졸업장도 있으니 입에 풀칠하고 살지 못할 이유야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노구에, 손자의 고집에 낯선 곳에서 새로이 뿌리를 내리게 하시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도리가 아니었다. 무언가 바뀌지 않는 한. 그야말로 하늘에서 동앗줄이라도 내려와서, 어떻게든 여기서 떠날 수 밖에 없는 확실한 이유가 생기지 않는 한, 부모형제도 없고 제가 일굴 땅뙈기도 없는 그는 이곳의 동네 머슴 노릇을 할 팔자였다. 그래도 친척이라고 몸을 피하자며 돌아온 그의 아버지를 낼름 군인들에게 팔아먹고, 늙으신 할머니를 손발이 닳도록 실컷 부려놓고는 일가친척간에 돈이 또 무슨 말이냐며 품삯조차 제대로 챙겨주지 않다가 몇 번이나 따져 물어야 겉보리 한 됫박으로 때우려 드는 이 이악한 마을에서, 언제까지나. 
전쟁 통에 병으로 세상 떠났다는 누님의, 하나뿐인 자식을 찾아 그 두메산골까지 내려온 그의 외삼촌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렇게 언제까지나 철없는 놈 취급을 받으며 공연히 가방끈만 길어 부리는 사람마저 피곤하게 만드는 동네 머슴 노릇밖에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돈을 모은 그의 외삼촌은, 볕 잘 드는 어느 봄날 산골에 내려와, 그의 할머니와 그가 살고 있는 다 허물어져가는 집과 그 앞의 손바닥만한 남새밭을 그의 할머니 앞으로 사 주었다. 그리고는 하나뿐인 조카에게, 올해 대학에 합격할 수 있다면 학비를 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시험까지는 반년이 남았을 뿐이었다. 
새침한 서울 여자인 외숙모와 역시 영악한 깍쟁이인 사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 가운데 그는 서울 외삼촌 댁 행랑방에 몇 권 안 되는 책과 갈아입을 옷 두 벌 뿐이던 짐을 풀었다. 그 집 잡일을 도우면서도 절박하게 밤을 새워 공부에 매달렸던 그는, 그해 겨울 대학에 합격했다. 고향 마을에서 처음 나온 대학생이었다. 
이왕 대학에 가는 것, 좀 더 높이 날아오를 꿈을 꿀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사범대학에 갔다. 가진 재산이 없어도 나랏녹 먹는 일을 하면 촌무지렁이들에게 무시당하는 일 없이 살 수 있을 터다. 시골 학교에서 훈장질하며 사는 것이 적당히 존경받는 방편은 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어디 눈에 띄지 않게 얌전히 공부나 해서 학교 선생이 되는 것보다 나은 일은 없다. 대학 다니는 네 해 동안, 독재정치니 유신이니 그런 것들 물러나라고 줄을 지어 시위를 하다 잡혀가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는 몸을 사렸다. 그런 일이 마음에 켕길 때 마다, 전쟁 통에 어느 쪽 손에 죽었는지 모르게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 일을 떠올렸다. 재수가 없으면, 순위고사를 보고 신원조회를 할 적에 그 일을 들먹이며 사상이 어떻네 트집을 잡히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단 한 번도 시위에 가담하지 않고 공부만 한 덕에 합격은 무난했다. 성적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특출나지도 않았던 터라 경기도에서도 제법 대도시인 곳으로는 나가지 못하고 배 타고 잠시 들어가야 하는 이 섬에 발령을 받았다. 근무하기 편한 것도 아니고 승진점수를 받기에는 애매한 것이 어디로 보아도 좋은 구석이라고는 없었지만, 그는 무사히 교사가 된 것으로 만족했다. 쓰던 이불 한 채와 당장 갈아입을 옷 두 벌만 손에 든 채로, 그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섬에 건너왔다. 도와주기로 한 것은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만이라고 못을 박던 외숙모의 서슬에 방 얻을 보증금도 없이 빈손으로 들어와야 했지만, 같은 학교 근무하는 선생님의 형님 댁에 어떻게 곁방을 빌려 자리를 잡았다. 4년 내내 공부만 하느라 거의 볕을 볼 일이 없었던 그의 얼굴은, 섬마을 사람들과 달리 희고 창백했다. 

열아홉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 마오 가지를 마오

뭍에서 온 젊은 남자. 뽀얀 얼굴에, 자전거를 끌고 출퇴근을 하는, 날렵한 뒷모습의 젊은 체육선생이 아니라 해도 그 나이 애들일랑 어디 가나 총각 선생님 앞에서는 수줍어진다지만, 그 바로 몇년 전 이미자가 불렀던 섬마을 선생님 때문일까. 황 선생의 인기는 강화에 온 지 3년을 채우고 이제 4년째 된 지금까지도 식을 줄을 몰랐다. 심심할 만 하면 편지같은 것이 교무실 책상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왔고, 가사 실습 같은 것이라도 하면 황 선생의 자리에는 교무실의 전원을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간식거리가 쌓였다. 까불거리며 고민 상담할 게 있다며 시간 내달라는 아이들은 개중 적극적인 축이었다. 
그리고 이애주는, 그런 철없는 아이들과는 달랐다. 정말로 달랐다. 


퇴근길에 생각이 나서 들렀다며 갑자기 나타난 황 선생이 빵집에 가자고 권하자, 이애주의 뒤쪽에서 서른 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투덜거렸다.
“미스 리는 오늘 할 일 많은데.”
“그래요? 그럼 일 끝날 때 까지 요 앞에서 기다릴테니.”
“거, 또 왜 심술이야. 척 하면 몰라? 저기, 학교 선생님이 청춘사업 하러 오신 거구만.”
누군가가 한 마디 하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황 선생은 정말로 난처했지만, 애써 부정하지는 않았다. 애주는 등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까만 고무줄로 묶은 채 화장기 없는 얼굴로 황 선생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세요, 선생님.”
“아니, 그냥......”
빵집으로 향하다 말고, 황 선생은 양품점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양품점 안에도 머리를 묶는 큼직한 핀이 있었다. 학교 여선생님들이 하고 다니는. 그런 것은 얼마나 할까. 틀림없이 비쌀 테지. 애주는 아직 어렸고, 졸업을 한 지금도 학생처럼 이렇게 단정하게 묶고 다니는 것이 썩 어울리기는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설픈 화장이나 수수하지만 멋을 내 보려 한 흔적이 엿보이는 얌전한 가디건에 치마보다는, 교복이 조금 더 잘 어울렸다. 모든 학생들은 언젠가는 어른이 되는 법이지만, 억지로 어른이 되려 애쓰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어른이 되지 못하게 막았으면서도, 막상 졸업한 뒤에는 여전히 교복이 잘 어울리는 소녀로 남아주기를 바라다니, 이 무슨 심술궂은 생각인가 싶었지만. 
“요즘 바쁜가?”
“수협 일이야 늘 그렇죠.”
“수협에서 몇 년은 일한 것 같이 말하는 걸. 이번 공일에…….”
막상 말을 떼고 보니 뭐 생각해 둔 것도 없었지만, 황 선생은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이, 뒤통수 한 번 긁적이지 않고 말을 꺼냈다. 
“…배드민턴이나 치지.”
“배드민턴요?”
“그래, 학교 다닐 때 몇 번인가 봐 주었지?”
“글쎄요….”
애주는 난처한 듯 웃었다. 황 선생은 여자애의 마음 같은 것은 알 도리도 없었지만, 애주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애주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황 선생을 쳐다보았다. 
“김순자가 대학에 갔대요. 실습도 안 나오고… 그러더니.”
그 말 한 마디면 다 알겠다. 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았다. 결코 내보이고 싶지 않은, 그러나 이 아이의 옷차림에서,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검은 고무줄에서 그대로 엿보일 수 밖에 없는 감정이 낡은 펌프에 마중물을 붓듯 그의 머릿속에 있는 힘껏 내던졌던 옛 기억들을 끌어올렸다, 배드민턴을 치거나, 책을 읽거나 예쁜 옷을 구경하는 것조차도 사치로 느껴질 수 밖에 없을 이 아이의 스무살. 고입시험을 군에서 남녀 합쳐 1등으로 봐 놓고도, 학교에서 자기보다 못했던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아야 하는 이 아이는, 차라리 주변에 대학생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던 자신의 그 시절보다 훨씬 더 참혹한 감정을 느낄지도 모르지. 황 선생은 아이를 달래듯 애주의 어깨를 토닥거리고 싶었다. 그래도 되는 일이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너 대체 몇 반인거냐?”
혼자 읍내를 돌아다니며 기웃거리던 그 아이를 다시 붙잡은 것은, 며칠은 더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 사이, 바쁜 와중에도 출석부란 출석부는 싹 들여다 보았는데도, 황 선생은 그 아이를 찾아내지 못했다. 살면서 남들보다 눈썰미가 떨어지는 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엄지손톱만한 흑백사진 위에 다들 실물보다 조금씩은 뭉개져 있는 어린 얼굴들 속에서 그 당돌한 서울 말씨 쓰는 아이를 골라 내는 것은 영 쉽지 않았다. 
“명찰은 왜 안 달고 다녀?”
“밖에서 명찰 달고 다니면 혼나지 않아요?”
“누가 그래?”
“아, 여긴 안 그런가.”
“서울에선 그랬나보지?”
“누가 서울이래요.”
아이는 소리죽여 웃었다. 
“선생님 저랑 내기할래요?”
“학생이 내기는 무슨 내기냐.”
“제 말이 틀리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하고 다닐지도 몰라요.”
“뭔데.”
“3월이 가기 전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평화 조약을 맺어요.”
시골 여고생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낯선 먼 나라의 이름들이, 마치 튀밥이 부풀어 오르듯 터져나왔다. 
“그리고 미국에서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나요. 아, 이건 바로 우리 나라에 들어오진 않을 지도 모르겠다. 선생님 TIME 봐요?”
“......”
“하긴, 서울도 아니고 강화 촌구석인데. 들어와봤자 미국에 불리한 소리는 다 먹칠되어서 들어온다고 했고.”
“너!”
“사실이잖아요. 선생님 대학 다닐 때 그런 것 안 봤어요? 남들 보는 거, 옆에서라도.”
황 선생은 머리가 아팠다. 대체 이 녀석 어느 반이야. 담임 선생님께 따끔하게 주의를 주시라고 말씀드려야 할 텐데. 대체 이 당돌한 아이의 부모는 애한테 뭘 가르쳤기에, 아무리 봐도 열 일곱 살은 안 넘어보이는 아이가 이런 헛소리나 늘어놓고 있는 건가. 그것도 이런 시골에서 여상 다니는 아이가. 
“너희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쳤어?”
“뭘요?”
“사람은 은혜를 입었으면 고마운 줄을 알아야 하는 건데.”
“아, 미국요? 참전해서 싸워 준 것도 구호물자 보내준 것도 고맙긴 하죠. 근데 그거 어차피 그 사람들 장기 투자 하는 거였잖아요.”
“뭐?”
“산타클로스가 아닌 것 다 알잖아요. 대가 없이 누굴 도와주는 사람은 있어도 대가 없이 누굴 도와주는 나라는 없어요. 아시면서.”
“......어쩌자고 여자애가 그렇게 반골같은 생각을 하면서.”
“아, 좋아요. 좀 더 해 봐요? 올 여름에 신민당 총재가 제명당해요. 그것때문에 부산과 마산에서 항쟁이 일어날 거예요. 대통령은 여자 끼고 술 마시다가 중앙정보부장 손에 죽을 거고요.”
“그만 해!”
“아, 그런데 이 말을 어디다 알려 봤자, 선생님만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 들어요. 조심하세요.”
아이는 교복 주머니 깊숙이 손을 찔러넣으며 방긋 웃었다. 
“일단 시험해 보자고요. 올 3월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 말이 맞으면, 내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주시면 되는 거죠. 어때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기 하자니까요.”
“무슨 내기를!”
“내 말이 틀렸으면, 교복 얌전히 입고 없는 듯이 살게요. 그런데 내 말이 맞으면.”
아이는 황 선생의 턱 밑까지 다가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선생님이 이애주와 인연이 있다는 것도 좀 믿어줬으면 좋겠어요.”
“......왜 자꾸 애주 이야기를.”
“내가 하는 이야기, 무슨 점장이가 하는 말 같이 안 들려요? 아, 큰일났네.”
“어디서 미신을 들이대고 있어.”
“그러니까 미신인지 아닌지는 3월 지나고서 보자니까요.”
아이는 얼른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붙잡으려 했지만, 다람쥐같이 잽싼 아이였다. 3월이라. 3월이라고 해 봐야 벌써 중순인데.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뭐, 자신이 무슨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모양인데, 저 나이 때 여자아이들이 흔히 빠지는 과대망상증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심했다. 그런 농담을 하고 싶다면 그냥 누구랑 누구가 사귄다거나 가수나 영화배우 아무개가 어떻게 된다거나 하는 정도면 족한데. 신민당 총재면 김영삼이잖아. 그 양반은 또 왜? 그리고 뭐야, 부산에서 항쟁이 일어난다고? 각하께서 어떻게 되신다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황 선생은, 어쩌자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누구라도 붙잡고 좀 묻고 싶었다. 아니, 이런 일을 의논한다면 첫 번째로는 저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되어야 하겠지만. 일단 저 녀석, 대체 어느 반이야. 바로는 나오지 않는 걸, 학교를 탈탈 털어서라도 어디에 어느 녀석인지 찾아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누가 방해라도 하는 것 처럼 일이 생겼다. 황 선생은 매일 투덜거렸고, 매일 녀석에 대해 찾아보는 것을 잊어버렸고, 그리고 잊은 채로 교무실 문을 잠그고 나오다가 집 앞에 다 당도해서야 그걸 오늘도 못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다. 뭐, 강화는 섬이니 털다보면 나오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매번 넘어가긴 했지만, 어딘가 입맛이 썼다. 
이스라엘이 무슨 평화 조약을 맺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4월 중순께의 일이었다. 


이애주와 인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발칙한 아이의 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평화조약 이야기를 듣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참, 멍청한 짓이다. 배울만큼 배운 사람이, 고작해야 여상 다니는 어린애가 한 말에 이렇게 혹해서는 지금 뭘 하는 짓이람. 황 선생은 라면을 사러 나왔다가 문득 술집에 들어가 안주도 없이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다가, 애주네 집 근처를 공연히 기웃거렸다. 애주의 집 근처에는 커다란 고인돌이 있었고, 그 앞에는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언젠가 애주는 이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 이 나무 밑에서 도깨비가 나온대요.
- 도깨비?
- 예, 도깨비랑 씨름을 해서 이기면 부자가 된다나요.
귀신에 홀렸지, 내가 도깨비에 홀린 게지. 열 살이나 어린, 졸업까지 한 여제자가 뭘 어쨌다고 지금 이 밤중에 술까지 마시고는 어딜 기웃거리는거야. 멀리 고려산의 산그림자가 커다란 짐승처럼 도사려 앉고, 언젠가 누군가의 무덤이었을 커다란 바윗덩이가 사방을 호령하는 이곳에서, 대체 무슨 짓이야. 그것도 도깨비가 나온다는 이야기나 떠돌더라는 그런 당산나무 아래에서. 그는 혀를 차다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섰다. 젊은 여자의 새된 비명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
“언니!”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여자를 향해 손을 뻗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는 사람의 모습이 낯익었다. 애주였다. 시각이 꽤 늦었는데, 설마 읍내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것일까. 황 선생은 가슴이 먹먹했다. 언제 이만큼 또 자란 것일까. 불과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그저 우리 학생이다 싶었는데, 며칠 못 본 사이에 애주는 그만큼 더 성숙해져 있었다. 마치 봄 밤 메밀밭 위에 뜬 새하얀 달처럼, 애주는 달빛 아래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채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넋을 잃을 세라 바라보는데, 애주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하세요, 선생님.”
용케, 그 당산나무 아래의 남자가 황 선생인 것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황 선생은 귀 밑까지 새빨개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술 드셨어요?”
“어, 어......”
황 선생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라면을 불쑥 애주에게 내밀었다. 
“저기, 라면...... 먹을래?”
“저녁은 드셨어요?”
“어, 그게......”
“라면 끓여드릴까요?”
“어?”
“저희 집, 요 앞이거든요.”
하마터면 그러자고 따라나설 뻔 했다. 애주네 집에는 아버지도 오빠나 남동생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낸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해 떨어진 시각에, 과부 어머니와 말만한 처녀 단 둘이 사는 집에 총각 선생이 기웃거리더라는 이야기는, 애주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 없었다. 황 선생은 복잡한 속내를 감추며 그저 벙긋 웃기만 했다. 
“아니다, 다음에 낮에 빵이나 먹자.”
돌아오는 내내, 도깨비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갑자기 사람이 자라기도 하던가. 마치 봉오리 흔적이나 겨우 보이던 어린 장미나무에 어느 순간 찬란하게 꽃망울이 열리듯, 애주는 피어나고 있었다.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그 감정은 뭘까. 총각이 처녀에게 이런 설레는 마음을 품는 거야 이상할 일이 아니지만, 애주는 그의 제자였다. 졸업을 했다고 해서 제자가 제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도 젊은 남교사가 섬에 부임했다가 섬 처녀와 혼인을 하고 아예 눌러앉는 경우도 있고, 혹은 건드렸다더라는 소문만 남기고 육지로 도망가버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느 쪽이라도 한참은 이런저런 뒷말을 듣게 되는 것을 그는 뻔히 보아 왔다. 혼례도 치르기 전에 어떻게 했다는 둥, 옛 방앗간 터에서 둘이 손 잡고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둥, 대학까지 나온 육지 사내가 얼굴 검은 섬 처녀와 혼인하는 것 보면 책임 질 일 저지른 게 분명하다는 중. 그는 그런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 혼자 감당할 일이면 모르겠는데, 애주를 두고두고 사람들 입초시에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가 자라면서 사람들이 “황 선생 댁 자식이라지. 그러고 보니 황 선생이 결혼 전에......” 하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섬 사람들은 말수가 적은 듯 하면서도 입이 쌌다. 외지인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말을 만들어내곤 했다. 황 선생은 그런 것이 무서웠다. 전쟁 중에 어느 편에 살해되었는지도 모르게 돌아가신 아버지도, 아마도 사실은 그런 사람들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을 거다.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남 잘 되는 꼴은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 황 선생은 사람좋아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다녔지만, 속내만큼은 결코 드러내지 않으려 늘 애를 썼다.
“거 봐요, 얼굴에 고민이 가득한데.”
그 속마음이, 이 어린 여학생 앞에서는 그저 여과없이 드러나곤 했다. 또다시 제 앞에 나타난, 아직도 어느 반 누구인지 미처 파악치 못한 그 아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황 선생은 퉁명스레 물었다. 
“너, 점쟁이냐?”
“그렇다고 하면, 믿을 거예요?”
“......”
“걱정마세요. 난 미신은 믿지 않거든요.”
“네가 어떻게 이스라엘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알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아이는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이 누군가를 닮은 것 같다고, 황 선생은 생각했다. 그런 웃음을 어디서 보았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세월이 좀 더 지나고, 아이가 좀 더 나이가 들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이는 제방에 걸터앉아, 맨발을 허공에 까딱까딱 흔들어대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위험하니까 좀 올라오지 그러냐.”
“안 위험해요. 기껏해야 폴리곤인걸.”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제 말에 그렇게 반응하시는 거, 애주 언니 때문인 거죠?”
“......”
“애주 언니에 대해, 궁금한 게 생기신 거죠.”
“알았으니까 제발 좀 올라와.”
“올 여름에, 인천시에 체육교사 결원이 두 명 생겨요.”
“뭐?”
“그럼 아마도 결원이 생기는 만큼, 새 학기에 맞춰서 선생님을 새로 뽑겠죠. 선생님, 원래 특기 있잖아요? 검도.”
“대체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거야?”
“어떻게 아는지, 그런 건 신경쓰지 마시고요. 선생님 대학 다닐때 세부전공으로 검도 하셨잖아요. 생각보다 소질이 있어서, 그걸로 전국체전에서 은메달도 받지 않았어요?”
“......”
“인천이 스포츠 쪽에 약해요.”
“좀 그렇긴 한데.”
“이번에는 성적도 성적이지만 특기를 우선 보고 두 명을 뽑을 거예요. 한명은 펜싱으로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땄던 선생님이고, 다른 한 명이 선생님이 되겠죠. 아, 선생님이 이번에 내신서를 낸다면요. 이번에 기회를 놓치면 아마 다음 기회는 적어도 10년은 더 있어야 할 텐데, 생각 좀 해 보세요.”
솔깃하기는 했다. 섬에서 학생들부터 학부모, 심지어는 생판 모르는 이에게까지 외지에서 온 총각 선생이랍시고 남의 눈길을 끌고 살기보다는, 어딜 가나 외지인 천지인 뭍에서 조용히 사는 쪽을 늘 바랐으니까. 전에 강화에 오는 길에 인천에서 하루 묵었던 적이 있다. 뭍에는 논밭과 공장이 뒤섞여 있고 바다에는 염전이 줄을 지은, 항구 근처에는 중국인들이 무리를 짓고 살고 있는, 뭔가 두서없는 느낌을 주는 소도시였다. 그래도, 그곳에는 늘 외지인들이 있었다. 외지에서 온, 빨간 사이클을 끌고 다니는 젊은 총각선생 따위는 아무도 돌아보지도 신경쓰지도 않을 그런 곳. 어딜 가도 남 말하는 이들은 있겠지만,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당하는 듯한 여기보다는 분명히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에 뭔가가 묵직하게 얹혔다. 그 얹힌 것이 애주라는 것을, 황 선생은 경악하는 마음으로 깨달았다. 
“......거기, 작잖아.”
그래서 황 선생이 겨우 뱉어낸 대답이라는 것을 듣고, 아이는 깔깔거렸다. 
“왜.”
“거기, 지금은 아직 경기도 인천시죠?”
“무슨 소리야. 거기야 원래 경기도 인천시지.”
“2년만 있어봐요. 거긴 부산 못지 않은 직할시가 될 테니까. 돈 없어요? 돈 있으면 저기 땅이라도 좀 미리 사 놓으라고요. 지금은 논밭이라도 10년 안에, 강남에 있는 것 같은 고층 아파트들이 줄줄이 들어설 거예요.”
“먹고 죽을 돈도 없어.”
“농담이 아닌데. 아, 좋아요. 땅투기 같은 건 예정에 없긴 하니까. 지금 가는 게 여러 모로 좋아요. 인천은 점점 더 커져서 여기 강화까지 다 인천에 포함될 지도 모르고, 지금은 스포츠라면 바닥을 박박 기지만 언젠가 한 삼사십 년 뒤에는 아시안게임도 할 지 모르죠. 아, 그 전에 서울에서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이나 다 하겠지만. 그거 알아요? 한 이십오 년 이대로 그 도시가 순조롭게 성장하면 국제공항이 생길 수도 있는 거.”
아이는 줄줄 읊어대다가, 이 이상 떠들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황 선생에게 손짓을 했다. 황 선생은, 그녀가 걸터앉은 제방의 모퉁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점쟁이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난 그런 일을 할 돈도 없고.”
“선생님보고 지으라고 한 거 아니에요. 인천에 들어가서 살 월세보증금만 있으면 좀 뭐든 해보라는 거죠.”
“좋아, 그렇다고 치고. 그럼 애주는.”
“애주 언니요?”
“......애주에 대해 말을 하길래. 애주에 대해서도 뭔가 아는 것 아니었어?”
“결혼해버려요.”
“뭐?”
“뭐, 어차피 장모님이 반가워하진 않겠지만. 장모님 모시고 같이 인천으로 가면 되잖아요.”
“야, 내가 아직 할머니도 못 모셔왔는데.”
“두 분을 같이 모시고 살면 되죠. 방 두 칸 짜리 집을 구해서, 한 칸에서는 두 분을 모시고 다른 칸에서는 애주 언니랑 살면.”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째서 이런 생각을 해 내지 못했을까, 그는 아이의 생각에 속으로 탄복했다. 그래, 그러면 되는 일이지.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정, 아침에는 그의 어여쁜 아내가 밥을 차려주고, 출근해서 일하고 돌아가는 길에는 할머니께 드릴 과자가 손에 들려 있는, 그가 결혼을 하고, 비로소 가족이 모여 사는 따뜻한 모습. 그의 마음 속에는 어느새 흑백 텔레비전 속 드라마의 한 장면같은 풍경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애주 언니야 여상에서도 날리는 성적이었으니까, 인천에서도 다시 취직해도 되고.”
“결혼을 했으면 집에서 살림을 해야지.”
“김칫국이에요, 애주 언니에게 좋아한다는 말이나 했어요?”
“어......?”
“뭐, 싫어하진 않겠지만, 가서 말이라도 해 보는 게 낫지 않아요?”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아, 지금도 상상한 거죠? 애주 언니랑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지 하고.”
“넌 어린애가 좀.”
“뭐, 가서 말이라도 해 보시지 그래요.”
아이는 제방 위로 두 발을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맨발을 대충 털고, 양말도 신지 않고 신발을 꿰어 신고, 아이는 폴짝 뛰어 황 선생을 향해 돌아섰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라고요.”


아이의 말이 맞기는 맞았다. 인천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컵이 없으면 못 마신다고, 인천시로 들어갈 수 있고 그 인천시가 장차 크게 번영할 것이라고 해도, 애주에게 뭐든 말을 하지 않으면 그곳에서 같이 사는 미래같은 것은 없기야 없지. 그래도, 대체 이런 말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냥, 내 마음은 이렇게 넘쳐 흐르는데 그냥 알아봐주면 안되는걸까. 잔뜩 긴장한 채, 애주를 불러냈다. 빵집에서 크림빵 두 개에 커피 두 잔을 시켜놓고, 그냥 한숨만 쉬었다. 
“선생님?”
“애주야.”
뭔가 말이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대학 때 보니 다른 친구놈들은 연애도 잘 걸고 다니더만, 대체 이럴 때는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은 것일까. 
“저......”
“말씀하세요.”
“너, 시집 안 올래.”
“예?”
“선생님한테...... 시집오지 않을라니.”
“......”
역시 글렀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어째 의자를 빼고 일어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눈만 들어보니, 애주는 귀까지 새빨개진 채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크림빵을 바라보다가, 공연히 빵집 입구를 한 번 바라보다가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황 선생은 용기를 내어 다시 한 번 입을 떼었다.
“애주야.”
“함...... 여쭤보고요.”
“응?”
“어머니한테.”
애주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빵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커피는 싸늘하게 식었지만, 두 사람은 그냥 빵과 커피가 놓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좀 논다 하는 강화여상 아이들이 떼를 지어 몰려나올 주말에, 학교 선생님이 졸업생 언니와 마주 앉아서 서로 눈도 못 마주치고 앉아있는 것을 누군가 보았음직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들었지만, 어디든 다른 데 가 보자든가, 그런 말을 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사실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체 학생 선도는 언제 할 거예요?”
사랑에 빠진 남자가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것을 보며, 아이는 놀려댔다. 남자는 한숨을 쉬다가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너, 대체 몇 반이냐?”
“아직도 그거나 찾고 있었어요?”
“야.”
“그 지푸라기라도 잡는 듯한 표정은 뭐예요. 내가 무슨 점쟁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황 선생은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푹 쉬며 무릎 사이로 이마를 처박았다.
“......아니지.”
“해버려요.”
“뭐?”
“야반도주요.”
고개를 들었다. 눈 앞의 여자애는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지금의 이 상황이 무척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야!”
“사랑의 도피라든가.”
“......내가 너같은 애한테 물어본 게 잘못이지.”
“아니면 어쩌려고요.”
뭐, 답이 없기는 없었다. 애주가 아직 어리기도 어렸다. 이제 갓 스무 살 된 아이에게 다짜고짜 선생님에게 시집오라고 했으니. 그 어머니가 도둑놈의 새끼라고 욕을 하며 빗자루를 들고 달려나와 등짝을 내려찍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은 아니었다. 세상 모든 부모에게, 사위가 되려고 찾아온 남자란 곱게 기른 딸자식 빼앗가려 온 도둑놈이나 다름없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것도 홀어머니에 외동딸이라면. 그리고 남자가, 고향마저 멀고 먼 외지인이라면. 
“모시고 살아도 되는데.”
“......글쎄요.”
“어차피 그 애주네 어머니도, 전쟁 때 혼자 내려오신 분이라서 따로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가 쪽으로라도 친척이 있겠죠. 애주 언니네.”
“그렇다고 해도.”
그런데다 빚이 있다고 했다. 애주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 누워 계시던 시절의 빚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그 돈 다 갚기 전에는 애주는 어디도 못 간다고만 하셨다. 그 빚을 다 갚아줄 남자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시집 가는 건 어림도 없다고. 그런 혼처를 구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어디서 가난뱅이 선생을 물어오느냐고. 어떻게든 취직해서 그 빚 다 갚으라고 무리해서 고등학교까지 보낸 거라는 말씀도 하셨다. 
- 스무 살 나자 마자 시집갈 생각이나 할 줄 알았으면, 국민학교만 마치고 공장에 보냈지.
애주는 울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언제나처럼 담담했다. 귀까지 빨개진 채 그를 훔쳐보던 소녀가 아니라, 빚에 찌들어버린 어머니의 분노를 그저 묵묵히 받아내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빗자루로 황 선생을 때리려 하던 애주 어머니는, 애주가 가로막자 애주에게 미친 년이라고 욕을 하며 빗자루로 등짝을 내리쳤다. 억지로 붙잡아 뜯어말리자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악다구니가 쏟아졌지만, 텃밭을 일구다 들어온 애주 어머니의 부르튼 손을 보니, 어떻게 더 드릴 말씀도 없었다. 차라리 지금 사는 집을 처분해서 빚부터 갚고, 함께 뭍으로 나가면 안 되는 걸까. 그 작은 집이 애주 어머니에게는 살아온 터전이라는 것도, 애주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라는 것도 알지만. 
그 빚이라는 게, 애주가 수협 다니면서 어떻게 할 수 있을만한, 그런 빚이 아니었다. 달러 빚을 썼다고 들었다. 사람 살려 보겠다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그렇게 꾼 돈은, 애주의 평생을 다 어떻게 해 보아도 되지 않을 터였다. 쓰러져 가는 집을 팔아서 원금이라도 메우고 그저 머리숙여 빌지 않는 한 답도 나오지 않을 액수를 듣고, 황 선생은 가슴이 먹먹했다. 가진 거라곤 이 몸뚱이밖에 없는 학교 선생으로서는 도저히 애주를 구원할 수 없었다. 그 빚과, 난과, 막막한 내일로부터. 
“......내가 뭐라도 가진 게 있었다면.”
“그랬으면 선생님 하셨겠어요?”
“그야 그렇지만.”
“답답한 건 아는데, 그 빚, 다 안고 가면 선생님은 어쩔 건데요?”
“......”
“둘 중 하나죠, 뭐. 애주 언니 포기하고 그냥 가든가, 아니면 야반도주라도 하든가.”
“사람 심각한 데 그러는 거 아니다.”
“저도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다른 답 있어요? 아니면, 그냥 짝사랑만 계속 하면서 여기 이 섬에 눌러앉을 거예요?”
그럴 수 없으리라는 것을, 황 선생은 알았다. 애주는 퍽 고운 아이였고, 그 애를 눈독들이는 남자가 없지는 않을텐데, 황 선생을 두고 가난뱅이라고 욕을 하던 애주 어머니라면 어떻게든 그 빚을 다 갚고 두 모녀 의탁할 수 있을 만한 남자를 찾아내어 애주를 시집보내려 하겠지. 그렇지 않으면, 애주는 정말로 할머니가 될 때 까지 빚만 갚아야 할 지도 모른다.
“이 섬에 있어봐야, 좋은 꼴은 못 보겠지?”
“그렇겠죠.”
“어차피 여기선 언제까지나 외지인 소리나 들을 테고.”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네 말대로 인천에 기회가 있다면...... 떠나는 게 방법이라는 건 알겠다. 그래, 할머니도 모셔와야 하고.”
황 선생은 중얼거렸다. 
“그래야지, 뭐. 그래. 그렇게들 사는 거지.”
“정말 그럴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라고.”
“그럼 맘대로 해요.”
아이는 화가 난 듯 했다. 왜, 남의 일에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마음대로 하세요. 여기 떠나고, 그리고 가끔 강화에서의 일을 생각할 때 마다 좋아했는데 가난해서 같이 살 수 없었던 여자에 대해 생각도 하고, 결혼해서 애 낳고 살다가도 가끔씩 그때 그 여자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도 하고, 그러다가 그녀가 아직도 결혼도 못 하고 수협에서 늙어가고 있더라는 이야기들 들으면서, 안타까운 한편으로 아직도 날 좋아하는 건 아닐까, 뭐 그런 헛된 망상도 하면서 남들 사는 대로 사세요. 누가 말리겠어요? 선생님 인생인데.”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살아.”
“하고 싶은 대로 한 게 하나라도 있긴 있고요?”
“......”
“왜, 사람 하나 구제하는 셈 치고 데리고 도망을 못 쳐요?”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러긴요. 왜 그렇게 못 해요?”
그 아이의, 화난 목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던 황 선생은 손을 뻗어 아이의 팔을 낚아챘다. 손아귀에 잡히는 아이의 손목은 가늘었다. 아이는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아이의 셔츠 소매 위로 붉은 점이 떠오른 것을 알아챈 것은 그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
붙잡아 앉히고 소매 단추를 끌렀다.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오른팔에는 칼날이며 가위며, 아이가 접할 수 있을 만한 날붙이로 만들어 낸 상처의 흔적들이 새하얀 살갗 위에 얼룩덜룩한 자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피는, 아직 다 아물지 않은 몇몇 상처에서 배어나온 것이었다. 황 선생은 아이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누가 이렇게 한 거야.”
“......”
“말을 해 봐, 그래야 선생님이 도와 줄 거 아냐.”
“됐거든요.”
“이 녀석이?”
“10월에 대통령이 서거할 거예요. 여자 끼고 술 먹다가 부하에게 살해당할 건데 언론에는 그렇게 안 나올 지도 모르겠네요. 12월에는 군부가 반란을 일으킬 거고, 내년 5월에는 그 군부가 광주 시민들을 학살할 거예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서울에서는 아시안 게임도 하고, 앞으로 10년 안에 올림픽도 할 거예요. 내 말 좀 똑바로 들어요.”
“이 녀석이...... 지금 어디서 헛소리를 하고 있는거야......”
“왜요. 내 말이나 좀 들으라니까요. 그러니까 만약에, 지금 내가 한 말들이 다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그렇다면.”
아이는 붙잡힌 팔을 애써 빼고, 소매를 내려 단추를 채우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나랑 약속해요. 애주 언니 데리고 야반도주를 하건 말건, 역사가 어떻게 바뀌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건 내 알 바 아니지만.”
“......”
“언젠가 선생님의 아이가, 제발 나 좀 살려달라고 말할 지도 몰라요.”
“......?”
“그러면, 화 내지 말고 이야기 좀 똑바로 들어요.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건, 무슨 소리를 하건, 일단은 좀 이야기를 들어 봐요. 어떻게든 도와주라고요. 선생님이잖아요. 봐요, 지금도 이름도 모르는 학생이 팔에 상처낸 것 갖고도 이렇게 걱정했잖아요. 할 수 있잖아요.”
“내 아이가 이런 짓을 할 리도 없겠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선생님 자유긴 한데.”
“잠깐만, 지금 네 말이 다 사실이라고 치면.”
황 선생은 머리를 긁적였다.
“애 엄마는? 애주인거야?”
“......”
“어떻게 앞날을 아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서 자꾸 애주 이야기를.”
아이는 그 말에 대한 대답 대신, 쓰디쓰게 웃었다. 
“정말로, 이번에도 답이 안 나오네.”
“뭐?”
“그냥 약속이나 해요. 그 애가 언젠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지금 들은 이야기,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
“아빠잖아요.”
아이는 울 듯이 웃었다. 황 선생은 아이의 눈썹과 눈매가 사진으로만 보았던 어머니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아니, 그럴 리 없지. 그런 거야말로 어린 아이들이 보는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 타임머신 같은 거, 과거로 갈 수 있는 기계 같은 것은. 하지만. 
“......약속하면 되는 거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바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직은 차가울 바닷물은 아이의 발목까지 잠기다가, 어느 순간 무릎 깊이로 깊어졌다.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황 선생은 가위에 눌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이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가고, 아이의 어깨가 바닷물에 잠기는 것을 보며, 황 선생은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심장이 고통스럽게 고동쳤다. 그는 죽을 힘을 다 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떴을 때, 아이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뭐야.”
그리고 황 선생의, 아이에 대한 기억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 선생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손에 들린 술병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반 병쯤 마시긴 한 것 같은데, 아무리 애주 어머니에게 그렇게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해도 이렇게 청승이나 떨고 있어서는 될 일도 안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이야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애주의 실망이야 오죽할까. 황 선생은 반쯤 비운 소줏병을 발치의 뻘밭에 비스듬히 꽂아놓고 몸을 일으켰다. 읍내에 가 봐야겠다. 애주가 일하는 수협 사무실에도 찾아가고, 애주 어머니에게도 다시 말씀을 드려야겠다. 인천으로 옮겨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교육청에 줄이 닿은 선생님을 통해 넌지시 알아볼 생각도 했다. 
뭔가 꿈을 꾼 것 같았다. 아주 길고 복잡한 꿈.
그러나 결코 생각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꿈. 




“대체 저 양반은 오프닝만 몇 번을 보는 거야.”
흰 그림자가, 사방이 투명한 유리벽으로 된 방을 들여다보며 혀를 찼다. 
“스킵 할 줄 모르나? 벌써 몇백 번 째 하는 게임인데. 하긴, 저렇게 게임을 반복하는 데도 한 번도 클리어를 못 하는 것도 재주는 재주지. 정말 모를지도 모르겠네.”
“왜 그래, 본인은 심각하게 하는데.”
“그래, 나도 알지. 진짜 심각하게 한다. 여기서 나갈 생각이 없는 것 처럼 목숨걸고 하긴 하는데, 어쩌면 저렇게 못 하냐고. 봤지? 좀전에 게임 도우미까지 넣어놓았는데도 매번 하던대로만 하잖아. 아, 정말.”
“설마 멀쩡한 엔딩을 하나도 안 넣은 건 아니지?”
“아냐, 멀쩡히 클리어하고 나가는 사람들 봤잖아. 내가 무슨 저 사람하고 웬수 진 것도 아니고.”
“정말?”
“자살하지 않는 엔딩도 있긴 있어. 저 사람이 게임을 너무 못하는 거지.”
“못한다기보다는...... 매번 하던대로만 한다며. 그래서 그런가보지.”
“맞아. 그게 제일 큰 문제긴 해. 그건 그렇고, 바꾼다고 용을 쓰는게 갈수록 안좋은 쪽만 고른단 말야. 그러니까 자살 방법이 매번 점점 더 심란한 것으로 바뀌지. 지난번에는 도로에 드러누워서 머리가 날아가는 엔딩도 나왔는데.”
“우와.”
“그리고는 애가 집을 나가서 안 돌아온다고 경찰서 가서 길길이 뛰었단 말이죠? 그거 내 자식 아니니까 돌아와서 싹싹 빌어도 다시 볼 일 없다고 그랬나. 같은 시각에 애는 영안실에 있었는데 말야. 뭐, 알아볼 방법이 없긴 했지. 머리가 없고, 이름표는 안 달고, 주민등록할 나이는 아직 아닌데다 학생증도 안 들고 다니니까.”
“야, 너 그거 정말 악취미.”
“악취미 아니거든.”
흰 그림자가 검은 그림자에게 웃으며 대꾸했다. 
“다른 분기점의 그녀들 중 한 명은 정말 그렇게 죽었으니까.”
“보기보다 과격하네.”
“......그냥 창의력 대장이라고 해 두자.”
사람을 구성하는 물질 중, 일부는 노화하고 소멸하지만 일부는 재활용될 수 있는 것이라. 사람이 죽은 뒤에도 간이나 심장이나 안구는 다른 사람에게 이식될 수 있듯이, 인간의 영혼 또한 불멸까지는 아니라도 재활용을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한 영혼이 한 시대에 태어나, 수많은 선택 속에서 수천 수만가지의 분기를 맞이하다가, 한 시기가 지나 되돌아오면 재생된다. 그런 것은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윤회나 사후세계와는 조금 다른 형태였지만, 본질적인 부분은 같았다. 사람은 죽은 뒤 이전 세계에서의 삶에 대해 휴지기랄까, 나름대로 반성의 시간을 가진 뒤 다음 세계로 나아간다. 계단을 밟아 오르듯, 아주 조금 더 진화한 영혼을 품은 채로. 그 반성의 시간이란, 사람들이 죽기 전 생각하던 지옥이나 천국과는 또 다른 형태였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삶을 반추하고, 다음 인생에 대해 구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 살아서는 황 선생이라 불렸던 남자가 선택한 방식은 바로 이것이었다. 방에 갖혀서, 자신이 실패했다고 믿는 그 인생을 몇 번이라도 다시 복기해 보는 것. 흰 그림자와 검은 그림자가 그 반성과정을 위해 준비해 준 것은, 그때 그 순간을 좀 더 생생하게 복기해볼 수 있는 자료가 첨부된, 게임이었다. 모든 삶의 분기마다, 그들이 수집할 수 있는 모든 평행우주의 가능성을 부여한. 
“뭐 모듈이 있고 데이터가 있으니까 어렵진 않았는데, 대체 왜 그런대?”
“몰라. 그래도 자식이 그랬으니까 안타깝다고 생각했나보지.”
“아들도 있었잖아.”
“그렇다고는 해도,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그래도 더 아픈 손가락은 있나 보지.”
“살아있을 때 좀 그렇게 봐 주지. 수도 없이 많은 우주에서 똑같은 환경에 똑같은 영혼이, 열네 살 부터 서른 네 살 사이에 수천가지 방법으로 자살을 하는 동안에, 대체 저 아저씨는 뭘 한 거야? 다른 집 아이들보다 똑똑할 땐 그렇게 예뻐하다가, 아이가 힘들어하고 엇나갈 땐 자기 인생의 오점 취급이나 했으면서.”
“야, 부모 탓이라고 말도 안했는데 알아서 저러는 것 봐라. 사랑하지 않은 거야 아니지.”
“사랑하는데 불량품이니 실패작이니 그러냐.”
“됐어,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잖아. 어차피 가해한 놈들은 따로 있었고, 그녀는 살해당한 게 아니라 자기 판단으로 자살했던 거야. 수천 가지 다른 우주에서 수천 가지 다른 방법으로. 어쩌겠어.”
“그야 그렇지.”
두 그림자는 수많은 평행세계의 가능성을 찾아 아마도 영원히 게임을 반복할 남자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차피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황 선생에게 들릴 가능성은 없었지만.
“가끔 보면 신기해, 어떻게 저렇게 앞뒤의 시간이 죽 이어져있다고 생각하고 인과에 집착할 수 있는 건지. 스위치가 눌린 쪽과 눌리지 않은 쪽 처럼, 그런 독립상태, 그런 분절된 상태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해보고 사나.”
“뭐야, 스위치를 누르는 게 그냥 0하고 1의 문제는 아니잖아.”
“0하고 1의 문제지, 왜.”
“내 말은, 시작과 끝은 분명 그건데, 그 사이에도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잖아. 저들의 세상은 그, 안 눌려있던 스위치를 꾹 하고 누르는 과정 같은 거지.”
“알긴 아는데, 딱 와닿질 않으니까.”
“그래서, 그녀의 영혼은?”
흰 그림자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이번에는 글을 쓰고 있는 모양이던데.”
“이야기를 쓴다고?”
“그래, 한 영혼으로 한 시기에 수천 번을 죽어서 그런가, 사람 죽는 이야기만 계속 쓰는 모양이야. 그쪽이야말로, 이전 계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채로, 그냥 글만 쓰고 있긴 한데.”
“한데?”
“자살하지 않는 엔딩이 있었다고 했잖아?”
검은 그림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흰 그림자는 검은 그림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녀는 자살하지 않은 유일한 엔딩에서, 결국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어. 뭐, 그쪽도 아버지와는 사이가 나빴고 말도 안 하고 살았던 것 같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단 말이지.”
섬마을의 젊은 선생님이, 사랑하는 소녀와 함께 도시로 떠나고. 그렇게 분명히 시작만큼은 사랑으로 태어났던 아이가, 살아가거나 혹은 삶을 포기하는 그 모든 과정의 궤적과 수천수만의 분기를 스스로의 선택으로 눈물과 고통으로 되밟아가는 남자를 들여다보며, 두 그림자는 수군거렸다.
“그때 글을 써서 살아남았다고 지금도 또 글을 쓰나?”
“그런가봐. 아마 그게 그녀가 찾아낸 솔루션인 모양이지.”
“괜찮네. 솔루션을 찾았으면.”
“그러게. 그거 괜찮지. 응.”
mirror
댓글 1
  • No Profile
    pena 13.02.04 18:20 댓글

    음, 잘 읽었습니다. 처음엔 선생님이 주인공이라서 이렇게 될까 저렇게 될까 저 아이랑 연관이 있겠지 생각하면서 봤는데, 이런 이야기였군요. 이렇게 아픈 이야기.

     

    내용은 커다란데 우다다다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썼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게 좀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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