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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날개

2013.01.31 16:4201.31

날개


공중에 떠 있다. 날아간다. 아니, 날아서 ‘간다’고는 할 수 없다. 같은 자리를 빙빙 돈다. 느릿느릿, 아주 천천히.
발 밑의 땅은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부서졌다. 부서진 조각들이 나와 함께 떠 있다. 
그러나 나만 돈다. 천천히. 느릿느릿. 빙글빙글. 
세상은 부서졌다. 유리 조각이 얼굴을 스친다. 나무 조각이 손가락 사이로 지나간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저 공중에 뜬 채로 천천히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애써도 내려갈 수 없다. 팔다리는 마치 허공에 묶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똑바로 선 채 먼지와 가루와 유리 조각과 나무 조각과 종이 조각 사이를 계속 같은 속도로 천천히, 느릿느릿, 빙글빙글 돌아간다. 오르골 속의 자동인형이 되어버린 것처럼.
나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숨이 막힌다.
그러나 숨을 들이쉬려 해도 허파가 움직이지 않는다. 팔도, 다리도, 머리도, 눈도, 입도 모두 풀로 붙인 것처럼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는다. 
가슴이 답답하다. 숨을 쉴 수 없다. 그리고 천천히,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의 감기지 않는 눈을 향해서 거대한 핏빛 유리 조각이 똑바로 날아온다….

… 그 순간 나는 눈을 뜬다.
이것이 나의 악몽이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고, 곧 죽을 듯한 갑작스러운 공포감이 밀려오고, 그래서 일상 생활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고, 되풀이되는 악몽을 꾸고….
이런 증상들은 모두 정상이라고 했다. 그들은 내가 그 증상들을 그 순서대로 겪어주기를 기대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사실은 뭐가 현실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공허하고 차분하다. 그 덤덤하고 무심하고 약간은 몽롱한 기분 속에서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확신만이 단단하고 뚜렷하다. 그래서 그런 확신은 오히려 안도감을 준다. 두 발이 공중에 뜬 채로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비현실감 속에서, 내가 길게 버티지는 못할 것이라는 종말의 감각만이 현실적이다.
내 말을 들으면서 그들은 나와 함께,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안심한 것 같았다. 그런 증상도 역시 정상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심지어 이런 공허와 비현실감에는 해리상태(解離常態, dissociative state)라는 멋진 이름도 붙어 있었다. 그 이름이 멋지다고 생각한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지만.
어쨌든 나는 이전의 생활로 돌아갔다. 정확히 일주일만이었다. 나흘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집에 돌아와서 사흘동안 쉬었다. 그리고 일터로 돌아가서 육 개월간 아무렇지 않게 일했다. 처음에는 모두들 걱정했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자 주위 사람들도 모두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육 개월이 지났을 때 나는 그냥 멈춰 버렸다. 마치 로봇처럼. 고장난 기계처럼. 환자의 팔에 링거를 꽂으려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병실에서 끌려나왔을 때에도 (실려나왔던 것도 같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의사가 내 눈에 플래시를 비추었을 때에도 (아마 비추었을 것이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동료 간호사가 내 팔에 주사 바늘을 꽂았을 때에도 (누가 꽂았는지는 모른다. 내가 일하던 병원이었으니까 아마 동료였겠지), 침대에 고정되어 병실로 실려가는 순간에도 나는 환자의 팔에 링거 바늘을 꽂으려던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얼어붙어 있었다고 한다.
몸은 얼어붙었지만 진짜 ‘나’는 머릿속의 조그마한 어떤 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때에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서 거대한 핏빛 유리 조각이 계속 나를 향해 다가왔기 때문에, 나는 내 안에서, 내 뼈와 핏줄 속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저 희미하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내가 갇혀있는 머릿속의 그곳은 너무 작고 검었고, 핏빛 유리조각과 함께 나는 우주에 혼자였다.
그 후의 1년 6개월을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상한 일이다. 폭발하던 그 순간만은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 영화 속 단역으로 내가 들어가 있었던 게 불운이라고, 나는 역시나 남의 일처럼 무덤덤하게 생각한다.

환자는 들어올 때부터 혼수상태였다. 누가 응급실 문 앞에 버리고 갔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사고나 범죄다. 지갑도 전화기도 없었다. 사실은 신발도 없었다. 그래서 환자 신원을 알 수 없고 가족이나 보호자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마 후자일 것이라고 모두들 추측했다.
검사를 해 보니 추측이 맞았다. 약물중독이었다. 아주 심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핏줄 속에 흐르는 물질이 절반 정도만 자기 피고 나머지 절반은 신종 마약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인터넷 괴담이 그렇듯이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고 사실이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 혼자만 알게 되었다.
나머지는 다 죽었으니까.
어쨌든 환자의 상태는 몹시 좋지 않았다. 들어왔을 때부터 얼굴색이 푸르스름하고 호흡도 불규칙하고 맥박과 혈압과 다른 각종 수치들이 제멋대로 널을 뛰었다. 그러니까 어느 하나가 오르내려서 나머지가 따라서 널을 뛴다면 아 이건 이유가 뭐겠거니 이해를 하고 조치를 취하겠는데 그런 게 아니고 제각각 상상도 못 했던 수치를 왔다갔다 했다. 간호사 생활하면서 실습 때까지 포함해서 그런 괴상망칙한 상황은 그 때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간호사 그만뒀으니까 아마 그 때 같은 그런 상태는 평생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다.
어쨌든 그래서 우리는 몹시 애를 먹었다. 정확히 뭘 어떻게 해서 안정이 됐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이 환자는 아직 살아있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거짓말처럼 환자가 혈색이 돌아오면서 숨을 고르게 쉬기 시작했다. 좀 지켜봤는데 시간이 지나도 혈색도 그대로 좋았고 호흡도 그대로 좋았고 모니터에 나타난 수치도 혈압 120에 80, 심박 60, 그 기적같이 아름다운 숫자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그래서 일단 괜찮은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중환자실로 옮겼고, 거기서도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뭐가 더 나빠지지도 않아서 일반 병실로 옮겼고, 이렇게 옮겨다니는 동안에도 환자는 계속 잠만 잤다. 그러다 갑자기 깨어났다.
깨어나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하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사실은 굉장히 자주 생각한다. 병원에 있을 때는, 그러니까 환자로 입원해 있을 때는,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한 적도 있었다.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 환자가 다시 깨어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때의 나는 아무 것도 못 했겠지. 
그 때의 나는 그 환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 때의 나는 울고 웃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무엇보다도 환자의 상태에 마음 졸이거나 즐거워하거나 하는 평범한 간호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그냥, 무덤덤하다. 

남자는 무척 친절하다. 내가 무덤덤하기 때문에 더 친절한 것 같다. 
남자는 자기 일이 아닌데도 언제나 도와주려고 한다. 복사지 상자를 들고 날라주려고 하거나, 출력하던 종이가 걸린 걸 빼 주려고 하거나, 토너를 갈 때도 자기가 나서서 해 주려고 한다. 그리고 토너를 갈 때는 항상 얼굴 어딘가에 잉크를 묻힌다. 내가 보고 웃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웃지 않는다. 전혀 우습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남자에게 휴지를 내민다. 남자는 조금 민망해하면서 휴지를 받아 얼굴에 묻은 잉크를 쓱쓱 닦아낸다. 그리고 내게 고마워한다. 은근히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눈을 피한다.
남자의 눈이 똑바로 나에게 향하는 순간만은 무덤덤하기 힘들다. 나는 무심하게 아무렇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내가 눈을 피하면, 남자는 다시 조금 쑥스럽게 웃는다.

마약의 이름은 Aripi – 날개라는 뜻이다. 원래 이름 외에도 발음에 따라 알파벳 철자를 따서 R.E.P, “렙”, 그 외에도 수많은 별칭이 있었다. 약은 거리에 풀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마른 벌판의 불길처럼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특히 10대와 20대의 젊은 층에서 엄청나게 인기가 좋았다. 가격도 비싸지는 않은 편이라서 더 빨리 퍼졌다.
소문에 의하면, 그러니까 그 소문이 소문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걸 몰랐을 때였지만, 소문에 의하면 아리피는 초능력이 생기는 약이라고 했다. 만화에 나오는 수퍼히어로 같은 능력이 진짜로 생긴다는 것이었다. 하늘을 날거나, 물건이나 사람을 순간이동시키거나, 자기가 순간이동을 하거나,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나오거나, 뭐 기타등등. 
다만 어떤 종류의 초능력을 가지게 될 지는 미리 알거나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냥 랜덤으로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약을 하고 나서 얼마나 지나야 그 능력이 나타나는지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약 먹고 눈 감았다 뜨니까 당장 능력이 생기는 사람도 있었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서 기다리다 실망해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다음날 하루 다 보낸 뒤에 저녁에 갑자기 효과가 나타나는 사람도 있었다. 
마약은 보통 안정제, 흥분제, 환각제,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소위 “뽕 맞았다”라고 표현하는, 그러니까 몸이 흐물흐물 풀리면서 히죽히죽 웃으면서 넋놓고 늘어지는 게 안정제 계열인데 대표적인 게 아편, 아편을 합성한 모르핀, 그 모르핀을 또 합성한 헤로인 등등이 있다. 반대로 흥분해서 눈을 번쩍번쩍하면서 이틀이고 사흘이고 내리 잠도 안 자고 두근두근 막 뛰어다니게 되는 게 흥분제 계열인데 대표적으로 코카인과 암페타민 계열이 있으며 앞서 말한 “뽕 맞았다”는 표현에 등장하는 필로폰도 본래 일본에서 군용 각성제로 개발한 중추신경 흥분제다. 한편 먹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는데 베란다 밖을 내다보니 공룡이 지나가더라는 게 환각제 계열인데 대표적으로 LSD나 “엔젤더스트”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PCP가 있다. 큰 종류는 대략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여기서 갈라져 나온 약 종류는 세 가지를 삼십 번 제곱한 것만큼이나 다종다양하며 개개인에게 미치는 효과도 약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어쨌든 “날개” - 아리피는 먹으면 초능력이 생긴다고 했기 때문에 일단은 환각제로 분류되었다. 
그래서 뭐 환각이라고 치자. 아리피의 또 다른 특징은 위에서 말한 대로 어떤 효과가 언제 나타날지도 모를 뿐더러 그 효과가 얼마나 지속될지도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효과가 나타났다고 좋아하는 동안에 사라져버리는 사람도 있었고 약 한 번 먹었더니 효과가 한 달 지속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약을 더 먹는다고 효과가 일정하게 더 오래 가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 마약이 그렇듯이 아리피도 먹으면 먹을수록 약효가 지속되는 시간이 짧아졌다.
아리피가 경찰과 의학계의 관심을 끌게 된 이유도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아리피를 먹고 약 이름대로 날아다닐 수 있게 됐다고 치자. 날 수 있게 됐으니까 막 옥상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육교나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그런다. 그리고 죽는다. 그것도 곱게 죽는 것도 아니다. 온 몸의 뼈라는 뼈는 다 부서진 채로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구급차 안에서 체액과 내장을 질질 쏟다가 구급대원 품에 안겨서 “어제는 날 수 있었는데…” 이런 바보같은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제대로 치료도 못 받아보고 숨이 멎는 것이다. 겨우 열 다섯, 열 여섯, 잘 해야 스무 살에, 앞이 창창할 나이에.
그리고 이런 경우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사건의 내용이나 전개 과정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결말은 언제나 같았다. 그래서 경찰에서는 아리피를 대대적으로 단속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그러하듯이 아이들은 선생님과 부모님과 경찰과 기타 등등 청소년보호, 범죄예방, 수사 분야 관련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잡아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더욱 귀신같은 방법으로 약을 숨겨서 사고 팔고 전달했다. 
그러면 도대체 아이들이 이 약을 어디에서 구해 오는 것이냐,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경찰에서도 당연히 여기에 집중했다. 그러나 약을 가지고 있다가 잡힌 아이들은 자기는 친구한테 얻었고, 친구는 아는 선배들에게서 받았고, 그 선배들은 아는 후배들에게서 샀고, 아는 후배들은 이런저런 친구의 친구들에게서, 친구의 친구들은 또 다른 친구들…에게 얻었다는 식이라서 캐면 캘수록 한 줄기로 수렴하는 게 아니라 점점 퍼지기만 했다. 그러니 약의 원출처는 커녕 공급체계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미성년자는 약을 사고 팔다 잡혀도 학교와 부모가 쉬쉬하며 야단을 좀 치고 말거나 경찰에 잡히더라도 훈방되었고, 그리하여 학교로 거리로 돌아가서 아이들은 다시 아리피의 소비자 겸 공급책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날개”는 이름대로 날개를 달고 20대에 이어 30대, 일반인, 직장인들 사이에도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병원이 폭발했다.

나는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동시에 병실 안의 다른 물건들, 그러니까 의자, 탁자, 물병, 환자의 슬리퍼, 담요 따위도 함께 떠올랐다. 환자의 슬리퍼가 눈앞에 떠오른 것은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환자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환자가 깨어난 순간에 나는 병실에 있었다. 왜 들어갔더라? 뭔가 특정한 이유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환자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서였을 지도 모른다.
들어갔을 때 환자는 이미 일어나서 침대 위에 똑바로 앉아 있었다. … 앉아 있었나? 아니면 그대로 누워 있었던가? 여전히 잠들어 있었나? 내가 들어갔기 때문에 깼던 것일까?
폭발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고, 병실 안의 모든 물건이 나와 함께 떠올랐고, 병실 창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환자의 슬리퍼가 떠올랐고, 그 슬리퍼 뒤로 벽에 걸린 시계가 둥실 떠오르려다가 못에 고정된 부분이 걸려서 뒤집힌 것도 기억한다. 그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오후 두 시 사십 분이었다.
그러나 환자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폭발이 있던 날,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오후 두 시 사십 분까지, 내가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었는지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던 그 하나의 기억… 환자의 슬리퍼와 담요가 함께 떠오르던 순간이, 그 날의 나머지 기억들을 지우고 내 삶의 다른 시간들, 생의 모든 희로애락이 간직되어 있던 자리까지 전부 차지해서 뒤덮어버린 것만 같다.

“…씨.”
뭔가 내 어깨를 건드린다. 나는 깜짝 놀란다.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 일어난다.
“미안해요, 놀랐어요? 미안해요.”
남자가 거듭 거듭 사과한다.
나는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의 말이 귓가를 스쳐서 그대로 흘러 떨어져 사라진다. 여기가 어디인지, 눈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 공중에 붕 떠 있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와 현실로 돌아오기는 쉽지 않다. 남자의 말이 귀에 들리게 된 뒤에도 나의 인지와 현실을 갈라놓는 머릿속의 무감각한 안개는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괜찮아요?”
남자가 걱정스럽게 물으며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여전히 무감각한 와중에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나는 깜짝 놀란다.
그리고 나는 남자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그의 입술에 입맞춘다.

남자의 손가락이 내 팔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등으로, 등에서 허리로 움직인다. 나는 그 손가락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남자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남자의 손가락이 다시 내 어깨로 돌아온다. 내 뺨에서 이마로 움직인다.
“사고 당한 거예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교통사고 같은 거예요?”
다시 눈앞에 남자의 얼굴이 있다. 눈이 마주쳐서 나는 화들짝 놀란다.
남자는 웃는다.
“왜 그렇게 놀라요… 사고 당했냐고 물었어요.”
비로소 나는 남자가 흉터에 대해서 묻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얼굴의 흉터는 많이 옅어졌다. 화장을 하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나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침대에서 일어선다.
뭔가 나를 잡아당긴다. 나는 돌아본다. 남자가 내 팔을 잡고 있다.
“미안해요, 여자한테 흉터 같은 걸 물어보는 게 아닌데…. 화 났어요?”
나는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의 눈이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머릿속의 사고회로가 완전히 차단된 기분이다.
남자가 내 팔을 부드럽게 당긴다.
“화내지 말아요…. 자기 얘기를 전혀 안 하니까, 궁금해서 그랬어요.”
나는 그대로 반쯤 침대에 걸터앉은 채 남자를 멍하니 쳐다본다.
남자가 다시 달랜다.
“가지 말아요….”
남자의 눈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고분고분 다시 침대로 들어간다.

발견되었을 때 나는 엎드린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얼굴의 상처는 심하지 않았다. 내 등 위에 건물의 잔해와 사람들의 잔해가 쌓여 있었다. 내 어깨와 등에서 유리 조각과 콘크리트 조각과 사람 뼈 조각을 열댓 개쯤 꺼냈다고 한다. 다 꺼내지 못한 몇 개는 지금도 그대로 박혀 있다. 지금도 가끔 찌릿찌릿하게 아플 때가 있다. 
내 동료들 – 친구들, 선배들 – 그리고 우리가 돌보던 다른 환자들이 갈기갈기 찢어져 내 등 위에 쌓여 있었다. 
내가 돌보았던 마지막 환자의 잔해는 내 밑에 흩어져 깔려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옷을 벗듯이 살가죽을 벗어서 태워버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

폭발 규모가 너무 크고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수사는 오래 걸렸다. 아무리 조사를 해도 병원의 잔해에서 의도적인 방화나 폭발물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론은 흔히 갖다 붙이는 ‘누전에 의한 가스 폭발’이었다. 그러니까 원인을 모르겠다는 뜻이다.
누전이나 가스 폭발이 아니라는 말을 나는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다. 정신병동에 있었던 1년 6개월 동안에도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돌보았던 신원불명의 환자가 초능력이 생기는 약을 먹고 병원을 폭발시켰다는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일언반구도 비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더라면 나는 아직까지 그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을 것이다. 
내 영혼의 일부는 머릿속의 조그맣고 검은 우주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몸까지 현실의 조그맣고 어두운 방에 갇혀 있었던 것은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떠 다니는 핏빛 허공은 나만의 것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야, 너는 거짓말도 그 따위밖에 못 하냐고, 강아지가 혼자서 그걸 어떻게 다 먹냐고.”
이야기하면서 남자는 웃는다. 나는 웃지 않는다.
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자의 목소리는 귓바퀴를 타고 흐르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서 의미 없이 흩어져 버린다.
“내 말 듣고 있어요? 나 혼자서 떠드는 거예요?”
남자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자요?”
남자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는다.
남자가 이마에 입맞추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남자는 나를 끌어당겨 꽉 안는다.
남자의 가슴은 따뜻하다.
나는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남자의 심박을 아무 생각 없이 세기 시작한다.
남자의 심장이 뛰는 소리는 머릿속을 언제나 가린 무감각의 안개를 뚫고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전달된다. 잠들려는 순간 남자의 심장소리는 허공으로 떠오르려는 내 몸을 붙잡아 땅 위, 남자의 곁 침대 속에 안착시킨다. 
그래서 나는 안심한다. 
오늘 밤에는 공중으로 떠오르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남자는 자기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말투로 보아 이 도시 출신은 아니다. 그러나 어디서 왔는지, 언제 왔는지, 전에 살던 곳에서는 무엇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굳이 물어보지도 않는다.
남자가 먼저 내게 묻는다.
“고향이 어디예요? 원래 여기 출신 아니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모호하게 고갯짓으로 곤란하다는 뜻을 전한다.
남자는 굽히지 않는다.
“여기서 오래 살았어요? 가게에 오기 전엔 무슨 일 했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더 확실하게 고개를 젓는다.
남자가 부드럽게 묻는다.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한 거 알아요?”
나는 고개를 젓는다. 몰랐다.
남자가 다시 묻는다.
“나한테 그 때 왜 키스했어요?”
나는 남자를 쳐다본다. 모른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수줍게 웃는다.
“아니, 싫다는 건 아니구요…. 궁금해서.”
나는 남자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그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남자가 그런 나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끌어당겨 입맞춘다.

남자의 손가락이 내 등에 닿는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촉각을 통해 전달된다. 그 방향이나 모양새로 보아 남자는 언제나 하듯이 내 흉터를 만지는 것 같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
남자의 질문이 마음에 남는다. 나는 어째서 남자에게 입맞추었을까.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남자에게 무관심하다.
그 ‘어째서’보다도,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훨씬 더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나는 아무 맥락 없이 남자의 눈을 생각한다.
남자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무슨 생각 해요?”
나는 고개를 돌려 남자의 입을 쳐다본다.
“내가 왜 당신한테 키스했을까.”
남자는 웃는다.
“날 사랑하니까?”
나는 남자의 웃는 입술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묻는다.
“여기로 오기 전엔 어디서 살았어요?”
“어, 나 여기 출신이에요.”
남자가 여전히 웃으며 대답한다. 나는 조용히 말한다.
“거짓말.”
“진짜예요.”
남자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춘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내 눈을 들여다본다. 
남자의 눈이 정면으로 쳐다보면 나는 조용하고 얌전해진다. 남자는 이 사실을 너무 일찍 눈치챈 것 같다. 내가 반박을 멈추자 그는 웃으며 내 이마에 쪽, 소리 나게 뽀뽀한다.
“학교 마치고 다른 도시에서 일했었어요. 아마 그래서 말투가 달라졌을 거예요. 좀 오래 있었으니까.”
“어디?”
남자가 말하는 도시의 이름을 듣고 나는 흠칫 놀란다.
내가 살고 일했던 곳… 오래 전에 떠나온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모든 걸 다 잃었다…
“당신은요?”
그가 묻는다. 나는 듣지 못한다. 그가 부드럽게 내 머리에 손을 얹으며 다시 묻는다.
“여기 오기 전엔 어디서 살았어요?”
“왜 떠났는데요?”
대답 대신 내가 묻는다.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뭐가 떠나요?”
“거기서 오래 있었다면서요. 오랫동안 살면서 일했는데 왜 떠났어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내 머리에서 손을 뗀다.
표정을 보고 나는 그가 몸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침대에서 나가라고 명령할 것이라 예상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는 다시 내 머리에 손을 얹는다.
“친구들이 죽었거든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대답이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대답한다.
“당신이 왜 미안해요. 사실 나도 공범이었어요. 누구 탓할 사람도 없어요.”
나는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을 잡는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손바닥에 조심스럽게 입맞춘다.
그는 나를 끌어당겨 폭 감싸 안는다. 나는 머리가 그의 가슴에 눌려 움직일 수 없다. 그렇게 품 안에 나를 가둔 채로 그는 그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묻는다.
“내 친구들 어떻게 죽었는지 얘기해 줄까요? 아마 말해줘도 안 믿을 거예요.”
나는 그의 가슴에 대고 머리를 끄덕인다. 그가 조용조용 이야기한다.
“약이 있거든요…. 초능력이 생기는 약. 그걸 먹더니 친구가 눈에서 불을 뿜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 동생하고, 같이 있던 다른 친구 하나가 그걸 맞고 죽었어요. 약을 먹었던 그 친구도 막 미친듯이 괴로워하다가 결국 죽었는데, 나중에 부검해 보니까 뇌가 다 타버렸더래요.”
나를 가슴에 꽉 끌어당겨 안고 있기 때문에 그는 내 표정을 볼 수 없다. 내가 움직이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것을 경청으로 잘못 생각하고 그는 말을 잇는다.
“나는 그게 그런 약인 줄 몰랐어요…. 친구 말이 농담인 줄 알고, 안 믿었거든요. 그래서 같이 덥석 먹었어요. 그런데 말예요. 그걸 먹었더니 갑자기 막 별 게 다 보이는 거예요…. 벽 안쪽도 보이고, 바닥 아래 땅속도 다 보이고, 친구 머릿속도 보였어요…. 그래서 나는 피했어요, 미리… 다 보였거든요…. 머릿속이 불덩이로 변하는 게…. 그래서 도망쳤어요…. 너무 무서워서….”
그는 잠시 말을 끊는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다시 말한다.
“근데 진짜 웃겼던 게 뭔지 알아요? 나중에 경찰에서 하는 말이, 강도가 들어와서 내 친구들이랑 친구 동생을 죽이고 도망쳤다는 거예요.”
그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린다. 소리로만 판단하면 웃는 것 같다.
“웃기죠? 도망친 건 난데, 강도가 죽이고 도망쳤다고…. 그렇게 따지면 내가 강도라는 얘기잖아요, 도망쳤으니까… 친구들이 다 타 죽게 내버려두고 혼자 도망친 강도….”
남자의 가슴이 점점 더 빠르게 오르내린다. 
“친구는 머릿속이 불에 타고 있었는데, 다들 타죽었는데, 나는 혼자 도망쳐서, 살았어요….” 
남자는 기침하는 듯한 소리를 낸다.
“그러고 나서 며칠동안 눈이 안 보였는데요, 그게 진짜 무서웠어요…. 왠지 알아요?”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진다.
“눈이 안 보이는 건 상관 없었어요…. 안 보이는 건 괜찮은데, 그러다 어느 날 나도 갑자기 내 친구처럼 그렇게 눈에서 불 뿜으면서 죽을까봐, 재수 없이 그 때 내 주변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 다 태워 죽일까봐… 그게 제일 무서웠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눈… 남자의 눈.
환자의 눈. 깨어나서 나를 보던 환자의 눈. 
병원이 폭발하기 직전, 환자의 눈.
남자가 갑자기 몸을 떼고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왜 아무 말 안 해요? 너무 황당해서 대답 못 하는 거죠?”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남자의 입은 즐겁다는 듯이 웃는다. 그러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
“내 얘기 안 믿죠? 에이, 안 속네. 재미없다.”
“눈….”
내가 말한다. 머릿속이 어지러워서 제대로 된 질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혼란 속에서 모든 것이 어쩐지 분명해진다.
“눈은… 그 때부터 그렇게 된 거예요?”
“뭐가요?”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나는 천천히 묻는다.
“눈에…. 초록색 점…. 그 때부터 그렇게 된 거예요?”
그는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어떻게….”
그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침대에서 일어선다.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친다. 몸을 숙여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를 주우면서도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남자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말없이 재빨리 옷을 입는다.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다.
도망쳐야 한다.
남자가 침대에서 내려온다. 똑바로 서서 나를 쳐다본다.
“당신, 예전에 그 무너진 병원에서 혼자 살아남은 간호사, 맞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상태를 확인하려고 병실에 들어갔다. 늘 하던 일과였다. 그런데 환자가 깨어났다.
눈을 뜬 환자의 홍채에는 초록색 얼룩이 있었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환자가 깨어났으니 나는 의사선생님을 부르려고 했다. 그 때 환자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환자는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내가 대답했다.
“병원이에요.”
“병원요?”
환자는 어리둥절한 얼굴에서 점차 겁에 질린 표정이 되었다.
“나 여기 얼마나 있었어요? 아니, 그것보다도….”
환자는 뭐라고 어물거리더니 주섬주섬 일어나려 했다. 나는 놀라서 말렸다.
“일어나지 마세요. 며칠동안 혼수상태셨어요. 의사선생님 불러올게요.”
“아니, 의사선생님보다도, 저기….”
그러나 거기까지 말하고 환자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어졌다.
“그러지 말고 누우세요, 의사선….”
그러나 나는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일어서려는 환자를 도로 침대에 눕히려는 순간, 얼어붙은 환자의 눈이 똑바로 나를 향했다. 그 눈동자에 박힌 짙은 초록색 얼룩이 터질 듯이 선명하게 보였다.
다음 순간 나는 공중에 떠 있었다.
병실 안의 모든 것이 흔들리며 떠올랐다. 떠올라서 흔들리며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건물이 무너지기 직전에 환자는 내 눈앞에서 반으로 갈라져 터졌다.
낯선 사람의 피가 나를 덮쳤다. 피가 내 몸을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뒤덮었다. 눈으로, 귀로, 입으로 피가 흘러들어갔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이어서 건물이 무너져내렸다.

“겁주려던 게 아니에요. 당신인 줄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남자가 말한다. 내가 경고한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남자는 멈추어 선다.
“당신 눈동자에도 가끔 초록색 얼룩이 보였어요. 그래서 나는 당신도 나와 같은 줄 알고….”
“뭐?”
이번에는 내가 한 걸음 다가선다. 남자는 어째서인지 조금 안심한 표정이 된다.
“당신 눈동자에도 있어요, 초록색 얼룩. 평소에는 잘 안 보이지만 가끔 커질 때가 있었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그 간호사인 줄은 몰랐어요.”
내 눈에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나는 아리피를 포함해서 마약을 해 본 적이 평생 한 번도 없다. 눈동자의 얼룩에 대해서 이제까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남자의 눈동자에 어째서 그렇게까지 매혹되었는지, 왜 그 눈동자에 그렇게 집착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전혀 자각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했다. 
“거짓말하지 마.”
“정말이에요.”
남자는 내 말을 오해했다.
“정말로 당신인 줄 몰랐어요. 몇 년이나 지난 일이고, 그 때 뉴스 같은 데서 보긴 했지만 그냥 잊어버렸어요….”
말하면서 남자는 점점 가까이 온다. 
“당신이라면 말해도 될 것 같았어요. 그 일 있고 나서 아무한테도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어요, 말해도 아무도 안 믿어줄 테니까. 차라리 붙잡혀서 감옥에 가는 편이 나았을 거예요. 나는 도망쳤는데, 친구들은 타 죽었어요….”
남자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그러나 ‘타 죽었다’는 그의 말과 남자의 눈동자에 박힌 선명한 초록색 얼룩은 그가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나는 경고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침대가 흔들리면서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책상도, 의자도, 침대 위의 베개도, 이불도, 바닥에 흩어져 있던 그의 옷가지도 조금씩 조금씩 공중으로 떠오른다. 
동시에 남자도, 나도 떠올랐다. 
남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선 허공에 떠 있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초록색 얼룩이 선명하게 박힌 갈색 눈동자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본 순간, 남자는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아 종이 인형처럼 구겨진 채 바닥에 내던져졌다. 동시에 나도 바닥에 떨어졌다.
‘훈련된 본능’이라는 표현은 모순이라고 나는 언제나 생각했다. 그러나 훈련된 본능만큼 강한 것은 없다. 나는 반사적으로 달려가서 남자를 살펴보았다.
남자는 살아 있었다. 내가 목에 손을 대자 신음하며 일어나려 했다. 
그래서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기 전에, 다시 나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나는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밤새 앉아 있었다. 앉아서 생각했다. 눈동자. 폭발 전의 순간들. 악몽. 다시 한 번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던 느낌.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너무 크게 다쳐서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대면하고 나는 그만큼 무섭고 두려웠던 것이다. 병원에서 다시 간호사로, 그 뒤에는 환자로 살았던 2년과, 이곳으로 도망치듯 떠나와서 지냈던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 합해서 거의 4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내 마음 속의 시간은 폭발의 그 순간에 머무른 채 단 1초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삶의 모든 순간을 허공에 뜬 채로 다시 한 번 폭발과 죽음을 기다리며 지냈고, 깨어 있는 순간은 물론 잠든 순간까지도 선명한 녹색 얼룩이 박힌 그 무시무시한 갈색 눈동자에 지배당했다. 
외상(外傷) - 트라우마란 그런 것이다. 상처가 삶을 지배하고 죽음의 공포가 생의 모든 순간을 붙잡아 맨다. 결국은 내 존재 자체가 평생 짊어지고 싸우며 생존해야 할 하나의 커다란 상처가 된다. 
그러나 내게는 이 모든 것 위에 한 가지 짐이 더 얹혀 있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정신병원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지 않다면 이 짐은, 이 상처는 나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이제까지 그렇게 혼자서 감당해 왔다. 그리고 혼자 짊어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나는 기억을 일부분 막아두었다. 그러나 남자의 눈동자 덕분에 이제는 전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니 앞으로는 잃어버렸던 마지막 한 조각의 기억, 결코 되살리고 싶지 않았던 순간의 기억까지 포함해서 모두 다 나 혼자서 안고 가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평생 혼자서, 나는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밤새 생각해낸 끝에 찾아낸 대답은 이것이었다.
혼자서 견뎌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혼자서 “어떻게” 견뎌내느냐의 문제다.
그러니 일단은 지금만 생각하자.
도망치자.

새벽녘에 나는 짐을 챙겼다. 가진 현금을 전부 긁어모아도 이번 달 공과금이나 될락말락했기 때문에 월세와 모자라는 돈은 나중에 집주인에게 부쳐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옷가지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몇몇 물건들만 간단하게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짐은 많지 않았고, 그래서 챙기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집을 나와서 문을 잠근 뒤에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 아래 층계참에 그가 앉아 있었다. 나를 보고 그는 일어섰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었다. 시선을 피했다.
“떠날 거예요?”
그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지 마세요.”
그가 말했다.
그의 눈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냥 지나쳐서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그가 길을 막고 있었다. 
“우린 서로 좋아했던 게 아니에요.”
내가 여전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둘 다 외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마음 속에 박혀 있던 기억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나타나니까, 거기에 무조건 집착했던 거예요. 그렇게 해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을 현실에서 계속 반복해서 재현하려고 했던 거예요.”
“어째서요?”
그가 묻는다. 나는 조용히 대답한다.
“살아 남았다는 걸 확인하고, 외상을 치유하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상처로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어떤 상처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다.
남자가 반박한다.
“하지만 최소한 가능성은 있다는 뜻이잖아요… 나는 당신한테서, 당신은 나한테서 그 가능성을 봤다는 뜻이잖아요.”
말하면서 남자는 계단을 올라올 듯한 자세를 취한다. 남자의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나는 흠칫 뒤로 물러선다. 
“겁내지 마세요.”
남자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다시 제자리로 물러난다.
“내가 너무 성급했어요.”
남자가 부드럽게 달래듯이 말한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털어놓고 싶었어요. 너무 절박해서, 너무 괴로워서…. 당신을 괴롭히려던 건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라면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를 이해하기에는 나 자신의 짐이 너무 컸다. 그 사실을 나 스스로 깨닫지도 못한 채로 몇 년이나 지났다. 그러나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 늦었다.
그래서 나는 계단을 내려가 그에게서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든 도망치기로 마음먹은 순간 그가 다시 말했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도… 내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처음으로 나는 그 눈동자의 녹색 얼룩이 아니라 남자의 눈을 마주보았다.
“이해하지 못해도, 들어줄게요.”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가지 말아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전혀 뜻밖에도 이 말을 듣고 나는 울기 시작했다.
그가 천천히 계단을 올라왔다. 흐느끼는 나를 감싸안았다.
계단에 선 채로 나는 오랫동안 그에게 안겨서 울었다.
눈물 속에서 나는 피투성이 허공에 홀로 붙잡혀 있던 영혼이 처음으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하더라도 발 아래 확실히 존재하는 땅, 디디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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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No Profile
    미로냥 13.02.04 23:42 댓글 수정 삭제

    로맨스다!!! 로맨스가 나타났다! 라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으앙 ㅠㅠ 사랑합니다 ㅠㅠㅠㅠ

  • No Profile
    정도경 13.02.04 23:45 댓글 수정 삭제

    아 저는 댓글이다!! 댓글이 나타났다! 라고 외치고 있었지요;;; 미로냥님 최고 ㅠㅠ)b 저도 사랑합니다 ㅠㅠ)♥

  • No Profile
    pena 13.02.05 11:13 댓글

    음. 언제나처럼, (이라기엔 언제나 그런 것 같진 않으니 대체로, 라고 할까요) 혼자서 다 껴안고 도망치거나 달아나거나 하지 않고 붙잡혀줘서 다행이에요. ...

     

  • pena님께
    No Profile
    정도경 13.02.05 14:07 댓글 수정 삭제

    우왕 또 댓글이다 신난다 *^O^* (정신차려)

    처음부터 붙잡히는 결말로 생각하고 쓰긴 했는데 불륜도 치정도 아니고 얌전하게 붙잡혀서 끝나니까 어쩐지 마음이 불안합니다.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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