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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쭈글 할머니의 칼

2012.01.27 23:3201.27

쭈글 할머니의 칼


 



 엄마는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거의 낚아채듯 끌고 갔다. 모자지간이라 망정이지, 이건 거의 납치나 다름없었다. “사람 살려!” 하마터면 이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훗, 나를 납치해 봐야 당신이 얻을 건 아무것도 없을 걸. 사람 잘못 골랐어. 우리 집은 결코 부자가 아니야. 그건 내가 딱 보면 알 수 있다고. 일단 내 차림새를 봐. 이 티셔츠랑 청바지 전부 마트에서 산 거야. 세일할 때. 딱 봐도 티가 나잖아. 아, 혹시 운동화 때문인가. 그래, 이건 좀 비싸. 하지만 말이지, 똑같이 비싼 운동화라도 말이지, 그 사는 과정이 다를 수가 있어. 그거 참 중요한 문제야. 어떤 아이는 운동화 사달라는 말도 안 했는데, 엄마가 백화점 데리고 가서 운동화를 사준단 말이지. 하지만 내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았어. 내가 이 운동화를 얻기까지 엄마한테 얼마나 떼를 썼는지 알아! 정말 힘들었다고. 거의 탈진 상태까지 갈 뻔했어. 한마디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이걸 이용한 거지. 힘들긴 했지만, 어쨌든 작전이 먹혀든 거지. 훗, 그렇군. 이 운동화가 탐이 났던 거로군. 운동화 때문에 나를 납치한 건가. 당신 아들이 운동화 사달라고 떼를 쓰고 있나 보군. 역시 자식 이기는 부모 없지. 그 녀석도 그걸 이용하는 거야. 똑똑해. 하지만 말이지, 그렇다고 해서 나를 통째로 납치할 것까진 없잖아. 운동화 훔친 죄하고 납치하고는 차원이 달라. 도둑과 유괴범이라고.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기나 하는 거야! 자칫하면 당신 아들은 몇 년 혹은 몇 십 년 동안 새 운동화를 신지 못할 수도 있어. 생각만 해도 불쌍하군 그래. 그러니 이쯤에서 나를 풀어줘. 그러면 내가 모든 걸 용서할게. 물론 나를 풀어줘도 이 운동화는 못 줘. 대신 당신을 신고하지 않겠다는 거야. 그러니 어서 나를 풀어주고, 다른 부잣집 아이를 납치하라고.”
 “엄마한테 당신이 뭐냐, 당신이. 싸가지하고는. 그리고 말이다, 얘야, 너 한 번만 더 그렇게 떼썼다가는 아주 죽도록 패버릴 거다. 그러니 앞으로는 죽음을 각오하고 떼를 쓰도록 해라.”
 “죽도록 팬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데. 팬 다음에 운동화 사줄 거야? 그럼 까짓것 맞지 뭐.”
 “미친놈. 운동화가 목숨보다 더 소중하냐?”
 “아니, 목숨이 더 소중하지. 목숨이 붙어있어야 운동화를 신을 수 있잖아. 그러니까 죽이지는 말아줘. 죽도록 패는 것까지는 내가 눈감아줄게.”
 “뭘 눈감아준다는 건데.”
 “가정 내 아동 폭력. 그거 잘못하면 쇠고랑 차. 부모라도 함부로 자식을 팰 수는 없지. 그런 세상이야. 그런데 지금 나를 어디로 납치해 가는 거야?”
 “외갓집에. 외할머니가 너 보고 싶으시데.”
 “그럼 정중하게 부탁을 해야지, 이렇게 난폭한 방법을 쓰면 어떡해! 나도 나름대로 스케줄이라는 게 있는 몸이라고. 우선 일정 체크를 해보고 나서, 오늘 특별한 일이 없으면 허락을 하는 거고, 아니면 다음으로 미뤄야지. 이런 것도 일종의 폭력이야.”
 “그래, 난 폭력 엄마야. 말보다는 주먹이 앞서지. 귀찮게 언제 말로 설명을 하냐. 주먹 한방이면 바로 해결이 되는데.”
 “아들한테 참 좋은 걸 가르쳐 주시네요. 세상은 주먹으로 해결하라.”
 “그렇지. 주먹으로 해결해야지. 사내는 자고로 주먹이다. 쪼잔하게 말싸움 같은 거 하면 안 돼. 그런 놈들 보면 정말 재수 없어. 한방 제대로 먹여주고 싶다고.”
 “그럼, 나도 엄마한테 주먹을 사용해도 될까?”
 “그래. 앞으로는 떼를 쓰지 말고 주먹을 써. 운동화를 걸고 한 판 제대로 붙는 거야.”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은 틀렸다. 여기 적어도 자식 이기려는 엄마 한 명은 있다. 그것도 주먹으로.
 “그런데 우리 얼마 전에 외갓집 갔다오지 않았나. 방학 끝날 때 즈음 말이야. 아마 열흘도 안 된 것 같은데. 그것밖에 안 됐는데 또 외갓집에 간다는 거야? 외할머니는 나를 너무 쉽게 보시는 거 같아. 이렇게 아무 때나 막 오라고 하면 내가 냅다 가는 아이인 줄 아시나 봐. 나 그렇게 쉬운 놈 아닌데 말이지. 그리고 내일 당장 학교에도 가야 하고. 그 먼 데까지 언제 갔다오려고 그래?”
 “원래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하면 그냥 가는 거야. 그곳이 아무리 먼 곳이라 하더라도 말이지. 넌 도대체 학교에서 뭘 배운 거냐?”
 “난 학교에서 거의 배우는 게 없어. 이상하게 학교에만 가면 졸려.”
 “그러니까 학교에는 안 가도 돼. 내일 하루는 학교 쉬는 거다. 외갓집 가는 게 더 중요하거든.”
 “그건 좋네. 외갓집 가는 거 대찬성이야.”
 “너 아주 쉬운 놈이야.”
 그렇게 해서 나는 아주 즐겁게 외갓집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 한 시간이나 더 걸어서. 물론 걷는 동안 즐거운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짜증이 밀려와 미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역시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아홉 살 어린아이라지만, 불과 열흘 전에 다녀왔던 길을 까맣게 잊어버릴 리 없다. 물론 혼자 찾아가라면 못 찾아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외갓집 가는 길이 열흘 전과 똑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기차 타고 버스 타고까지는 맞지만, 버스에서 내려 이렇게 오래 걷지는 않았다. “엄마, 나 다리 아파.” 이 말이 나올 때 즈음이면 외갓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엄마, 나 다리 아파.” 이 수준이 아니었다. 엄살 부릴 기운조차 없었다. 다리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아팠다. 그런데도 엄마는 계속 걸었다. 그래서 나도 계속 걸었다. 다리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아팠지만, 단 한 가지 목적을 갖고 계속 걸었다. 엄마를 따라잡아 죽이기 위해서. 그래야 비로소 내 다리를 쉬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를 죽여야 내가 산다.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죽이지 않고 내가 사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없었다. 엄마가 나를 업어주면 되겠지만, 내가 아는 저 엄마는 절대 그럴 엄마가 아니다. 나를 업어주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엄마다.
 ‘모정 따위 개나 줘버려!’
 크허, 감히 어떤 엄마가 저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못 한다. 아무도 하지 못하는 저 천하의 무책임한 발언을 엄마는 서슴없이 한다.
 나는 절대 엄마한테 업힐 수 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엄마를 따라잡는 수밖에 없다.
 따라잡자. 그래야 끝낼 수 있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찾아내서 걷고 또 걸었다. 과연 내가 젖은 먹고 자랐을까 싶었지만, 지금 그걸 알아낼 여유는 없었다. 일단 먹었다 치고 무작정 걸었다.
 하지만 다들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그 예상이 맞다. 나는 엄마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좀처럼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좁히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어졌다. 내가 한 걸음 내딛으면 엄마는 벌써 두 걸음을 내딛었다.
 이럴 수가. 나는 젖을 먹고 자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젖 먹던 힘이 있을 리가 없다. 없는 힘을 찾아내서 걸으려 했으니 엄마를 따라잡지 못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패착도 이런 패착이 없다. 애초에 다른 힘을 찾아내야 했는데 말이다. 어쨌든 그리하여 엄마를 죽이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엄마, 아직 멀었어? 나 다리 아파 미치겠는데.”
 “거의 다 왔어. 엄살떨지 말고 얼른 쫓아와!”
 “엄살 아니야. 진짜로 다리 아파. 죽을 거 같아.”
 “그럼 죽어. 내일 오는 길에 수습해 갈 테니까.”
 뭘 수습한다는 거냐. 대체 뭘.
 “그런데 엄마, 지금 외갓집 가는 거 맞아?”
 “그럼 우리가 지금 외갓집 가지 처갓집 가냐?”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지. 그리고 외갓집이나 처갓집이나 똑같은 거 아닌가. 나한테는 외갓집, 아빠한테는 처갓집. 그런데 참, 우리 지금 아빠한테는 외갓집 간다는 말 하고 온 건가. 엄마 성격으로 봐서는 안 하고 왔을 수도 있는데. 물론 아빠 역시 별 신경은 안 쓰겠지만. 아마 우리가 집에 없는 것도 모를 거야. 한 몇 달 집에 안 들어가야, ‘어, 한별이하고 한별이 엄마가 안 보이네.’ 이러겠지. 누가 들으면 집이 엄청 큰 줄 알겠어. 축구장 서너 배는 되는 줄 알겠어. 달랑 방 두 개짜리 연립인데 말이지.
 “열흘 전에 왔을 때는 이렇게 많이 안 걸었잖아. 외갓집 가는 길이 아닌 거 같은데?”
 “시끄러워. 그때도 이렇게 많이 걸었어. 넌 이 엄마가 외갓집 가는 길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니! 이 길이 외갓집 가는 길이 아니면, 그럼 내가 널 대체 어디로 데려간다는 거냐! 같이 여행이라도 가는 줄 아냐!”
 “진짜로 이렇게 많이 안 걸었다니까!”
 “시끄럽다니까. 이제 아홉 살밖에 안 된 놈이 뭘 안다고 그래. 외갓집 가는 길 맞으니까 그냥 잠자코 따라와. 따라오기 싫으면 혼자 집에 가든지.”
 “여기서 나 혼자 어떻게 집엘 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버스 타고 기차 타고 그래야 되는데 혼자 어떻게 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흘리지는 않았다. 엄마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혼자 집에 못 간다고 했는데 눈물까지 흘리면, 엄마는 거의 나를 벌레 보듯 할 것이다. 집에 혼자 못 간다면서 질질 짜는 놈 취급을 받을 게 뻔하다.
 그래도 이 길은 정말 외갓집 가는 길이 아닌 것 같은데, 왜 엄마는 자꾸 맞는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외갓집엘 한두 번 간 것도 아니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가장 최근에는 열흘 전에 갔다왔다. 작년 여름 방학 때도 갔다왔고, 초등학교 입학 전에도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외갓집에 갔다왔다. 그러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은 갔다왔을 것이다. 기차 타고 버스 타는 방법은 모르지만, 버스에서 내려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 정도는 안다. 시골길이 낯설어서 그 길이 다 그 길 같은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오래 걷지는 않았다.
 아하, 그러면 그새 외갓집이 이사를 간 건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엄마, 엄마는 정말 못 말려. 외갓집이 이사를 갔으면, 이사를 갔다고 얘기하면 될 거 아니야. 이사 간 집 구경하려고 가는 거지, 지금.”
 “미친 놈. 외갓집이 이사를 가긴 왜 이사를 가냐. 쟤가 지 아빠를 닮았나. 어린놈이 벌써부터 정신이 오락가락하나 보네. 혼자 집에 못 가겠으면 그냥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납치하듯 나를 끌고온 사람이 누군데, 여기까지 와서 저런 소리를 하면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혼자 집에 못 가는 걸로 너무 나를 몰아세우고 있는 엄마. 이럴 때면 엄마가 진짜 밉다. 하긴 매번 당하는 나도 참 멍청하다.
 엄마는 꼭 외갓집에 갈 때면 저렇게 태도가 변한다. 평소에도 뭐 그리 다정한 편은 아니지만, 외갓집에 갈 때면 평소보다 훨씬 거친 사람이 된다. 말투에서도 거친 분위기가 철철 흘러넘친다. 마치 나를 귀찮은 혹처럼 대한다. 그걸 알면서도 매번 따라나서는 나도 문제다. 엄마랑 외갓집 가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렇게 다짐하면서도 또 따라나서니 말이다. 아, 그래서 납치하는 거였나. 귀찮아하면서도 왜 매번 데리고 오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또 변했구나. 동화 속 계모처럼 말이지. 음, 그러면 우리가 지금 외갓집 가는 게 맞는다는 건데. 엄마는 외갓집 갈 때마다 항상 저렇게 변하니까 분명 지금도 외갓집에 가고 있는 게 맞는다는 건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정말 이 길이 맞는 건가. 그러고 보니 외갓집 갈 때면 항상 이렇게 오래 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엄마 말대로 내가 진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건가. 어린놈이 참.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놈이라고 치자. 그럼 엄마는 도대체 증상이 얼마나 심각한 건지 모르겠다. 이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신을 놔버린 상태 아닌가. 정신을 놔버리고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게 아닌가. 엄마한테 이런 무서운 병이 있다는 건 몰랐다. 그동안 아빠와 나를 감쪽같이 속였겠다.
 차라리 이런 게 났다. 엄마는 지금 몹쓸 병을 앓고 있구나. 이편이 훨씬 났다. 걱정은 되겠지만, 무서워서 피하고 싶은 생각은 안 들 것 아닌가.
 나는 지금 엄마가 무섭다. 곁에서 도망치고 싶을 만큼 무섭다.
 “엄마, 여긴 외갓집이 아니야. 우리 외갓집은 엄청 큰 과수원을 하잖아. 그래서 과수원을 지나쳐야 집이 나오잖아. 여긴 진짜로 우리 외갓집이 아니라고.”
 엄청 큰 과수원은커녕 나무 한 그루 없는 집이었다.
 대문이 우리 집 안방보다 더 커서 놀랐고, 배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이 월요일 아침 조회 때 운동장에 모인 전교생들보다 많아서 놀랐다. 외할아버지하고 외할머니를 비롯해서 열 명이 넘는 외갓집 식구들 때문에 놀랐다.
 하지만 엄마가 외갓집이라고 하면서 들어선 곳은 텔레비전에서 흔히 보던 시골 허름한 집이었다. 우리 집 안방 문보다 조금 더 큰 파란색 철제 대문, 곳곳이 녹이 슬어 대문을 열 때 삐걱 소리가 났다. 듣기 싫었다. 과수원은 고사하고 우리 학교 수영장 절반 크기 정도 되는 마당, 마당 한편에 닭장이 있었다. 냄새가 결코 좋지 않았다. 단층의 허름한 집, 빛바랜 기와가 집의 가치를 한층 더 떨어뜨렸다.
 정말이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런 걸 보고 바로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하는 것이리라. 어디 하나 비슷한 구석이 있어야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나라도 ‘여기가 외갓집이었던가!’ 하고 고개를 갸웃할 텐데, 이건 뭐 고개를 갸웃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일단 두 집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보자. 도로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차바퀴에 엄지발가락이 밟혀, 엄지발가락이 으스러지면서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린 내 친구 상표. 물론 지금은 병원에서 열심히 치료를 받고 있다. 아무튼 기절한 상표를 막 흔들어서 억지로 깨운 뒤 카메라를 보여주는 거다. 이 두 집이 같은 집 같냐, 아니면 다른 집 같냐. 비몽사몽인 내 친구 상표도 별 고민 없이 다른 집이라고 말할 게 뻔하다. 상표야, 기절한 너를 깨워서 미안하다. 그럼 다시 기절하고.
 상표도 다른 집이라고 하질 않나. 그런데도 엄마는 서슴없이 허름한 파란색 철제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당에 서서 “엄마, 나 왔어!”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낯선 사람 목소리에 놀랐는지 마당에 있는 닭들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뛰었다. 더 냄새 나.
 “엄마, 내 말을 믿어줘. 여긴 진짜로 우리 외갓집이 아니라니까! 내 친구 상표를 걸고 내가 맹세할게.”
 “네 친구 상표를 걸어서 뭐하게. 발가락도 없는 놈 걸어봤자지. 하여튼 쓸데없는 놈들. 잔말 말고 너도 얼른 외할머니나 찾아봐. 엄마, 나 왔다니까!”
 하아, 상표를 쓸데없는 놈 취급하는 건 그렇다 쳐도 나까지 같은 놈 취급을 하다니. 좀 자존심이 상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때 베란다 새시같이 생긴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안에서 누가 나왔다. 웬 노파냐.
 우리 동네에 파지 줍는 할아버지가 있다. 별명이 호랑이 할아버지다. 길에 쓰레기를 버리다 그 할아버지한테 들키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일단 된통 잔소리를 들은 다음 버린 쓰레기를 도로 집어서 주머니에 넣어야 한다. 그게 끝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다음 다시는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지 말라는 훈계까지 듣고서야 풀려날 수 있다. 그 할아버지의 특징은 한복을 입고 다닌다는 것이다. 계량 한복이 아니다. 정말로 옛날 어른들이나 입었을 법한 진짜 한복이다. 그래서인지 더 무서웠다.
 문을 드르륵 열고 나온 노파는 그 호랑이 할아버지네 할머니를 닮았다. 아홉 살인 나보다도 키가 더 작은 할머니. 허리가 약간 구부정하고, 두유 색깔보다 조금 더 진한 블라우스에 엄마 몰래 마시는 커피보다 색이 훨씬 더 진한 바지. 바지는 꼭 한복 바지같이 생겼다.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넘겨 비녀를 꽂았다. 그래서 일명 비녀 할머니다. 항상 똑같은 차림인 그 비녀 할머니를 닮았다.
 참, 이 분들 얘기를 하다 보니 또 생각나는 게 있다. 방학 때면 가끔 동네 친구들과 그 호랑이 할아버지네 집에 갔다. 천자문을 배우기 위해서다. 물론 엄마가 억지로 끌고 간 것이다. 그렇게 저마다 엄마에게 끌려온 우리들은 호랑이 할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야 했다. 양반다리, 꿈도 못 꿀 일이다. 어떨 땐 1시간, 심지어 2시간 가까이 무릎을 꿇고 앉은 적도 있었다. 다리에 쥐가 나고, 그 시기가 지나면 서서히 굳어간다. 누가 내 다리에 시멘트를 발라놓은 것 같다. 그 시멘트가 굳어간다. 그런 느낌이다. 이제 다리는 딱딱해졌다. 만져도 아무 감각이 없다. 딱딱해져서 아무 감각이 없다가 더 시간이 지나면 내 다리는 완전히 사라진다. 이제 내 다리는 없다. 그런 경지에까지 다다른다. 여기에 나는 없다, 이런 게 아니라, 이제 내 다리는 없다, 이런 경지. 참으로 한문의 세계는 경이롭다.
 호랑이 할아버지는 우리가 무릎 꿇고 앉으면 항상 하는 소리가 있다.
 “그깟 언문 백날 배워봐야 소용없다. 사내는 한문을 배워야 한다. 거기에 모든 게 다 들어 있다. 무슨 생각을 갖고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한문 안에 다 들어 있다. 조상님 잘 모시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스승님 존경하고 어른 공경하고. 이 나라를 위해 장차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세상 이치가 그 한문 안에 다 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배우고 익히고 써먹거라.”
 어디 그뿐인가. 한문을 배우면 ‘이제 내 다리는 없다’를 깨우치게 된다.
 아는 애고 모르는 애고 상관없이 쓰레기 버리면 무조건 뒤통수 한 대 갈기시는 호랑이 할아버지. 날이 추워도 아랑곳 않고 항상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넘겨 비녀로 마무리하시는 할머니. 두 분은 그대로 역사십니다. 뭐, 그렇다고 대단한 건 아니고요, 그냥 우리 동네 역사십니다.
 문을 드르륵 열고 나온 노파, 비녀 할머니를 닮은 노파는 신기하게도 비녀 할머니가 늘 입는 한복 바지처럼 생긴 것과 비슷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색도 비슷했다. 저 바지가 할머니들 사이에서 유행인가. 도시와 시골 상관없이 대히트를 치고 있는 바진가 보다. 그나마 비녀를 꽂지 않아서 다행이다. 비녀를 꽂았다면 비녀 할머니가 둘이 될 뻔했다. 대신 머리카락이 심하게 뽀글뽀글했다. 얼굴은 거멓게 그을렸고, 주름이 많았다. 손도 쭈글쭈글했다.
 이 할머니는 비녀 할머니를 닮았지 결코 외할머니를 닮지 않았다. 외할머니도 시골에 살지만, 바깥출입을 자주 안 해서인지 피부가 거멓게 타지 않았다. 얼굴에 주름도 별로 없었고, 할머니치고는 손도 고왔다. 처녀 때는 손이 하도 고와서 동네 총각들이 외할머니 손 한 번 잡아보려고 기를 쓰고 덤볐다고 한다. 이해가 간다. 내 짝꿍도 손이 참 예쁘다. 그래서 친구들이 내 짝꿍 손 한 번 잡아보려고 쉬는 시간마다 난리를 친다. 나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정중하게 부탁한 적은 있다. 실은 나도 난리를 치고 싶었지만, 짝꿍이라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 했다. 어쨌든 정중하게 부탁을 했고, 단칼에 거절을 당했다. “됐어. 꿈도 꾸지 마.” 꿈까지 꾸지 말라니, 손잡는 게 정말로 싫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외할머니와는 체격에서도 차이가 많이 났다. 외할머니는 어른 남자만큼이나 키가 컸고 허리도 구부정하지 않았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이 노파가 엄마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주름투성이 얼굴이 더 흉해보였다.
 “어이구, 우리 한별이도 왔네. 어서 들어오거라. 오느라 힘들었겠다. 난 시간이 한참 지나서 오늘 못 오나 했다.”
 힘 엄청 들었지요. 그나저나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름 알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는 쭈글 할머니 말을 듣고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도대체 저 다 쓰러져가는 집엘 왜 들어가려고 할까. 집안이 깨끗할 것 같지도 않은데. 바퀴벌레가 우글거리고 집안 구석구석에 쥐똥도 수북이 쌓여 있을지 모른다. 벽지는 손때로 시커멓고,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은 수명이 거의 다해 깜빡깜빡 거릴 것만 같았다. 싱크대 주위로는 파리가 웽웽 날아다니고, 날아다니던 파리들이 방심하다 주변 곳곳에 쳐진 거미줄에 걸려 파닥거릴 것만 같았다. 그럼 얼른 거미가 다가와 파닥거리는 파리를 거미줄로 돌돌 말겠지. 제발 집안에 지린내 비슷한 냄새라도 안 나면 좋으련만.
 나는 얼른 엄마 팔을 잡아당겼다. 집안에 들어가지 말자는 표현이었다.
 “얘가 지금 뭐하는 거야! 외할머니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인사도 안 하고 왜 엄마 팔을 잡아당기고 지랄이지.”
 “쟤가 쟤가, 애한테 지랄이 뭐냐, 지랄이. 한별아, 거기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얼른 들어오너라. 거기 그렇게 계속 서 있으면 저 닭들이 스트레스 받아서 다 죽을 수도 있다. 그럼 한별이 너도 죽는 거고.”
 무슨 뜻이지. 닭들이 스트레스 받아서 죽으면 나도 죽는다니. 닭들이 죽는데 왜 나도 죽는다는 거지. 닭이 살면 나도 살고 닭이 죽으면 나도 죽나. 우린 서로 생과 사를 함께 하는 사이인가. 닭과 내가. 하지만 쭈글 할머니가 그 말을 했을 때의 분위기는 그런 게 아니었어. 순간적으로 나를 노려봤는데, 그 눈매가 아주 무서웠어. 마치 나를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저 닭들은 모르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나. 그래서 죽기까지 하나. 참으로 성격 예민한 놈들이네.
 내가 팔을 잡아당겨도 소용없었다. 엄마는 간단히 내 팔을 뿌리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나도 엄마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별 수 없었다. 계속 마당에 서 있으면 쭈글 할머니가 나를 죽인다고 했으니까. 이제 아홉 살인데 죽으면 상당히 억울하지. 아직 짝꿍의 예쁜 손도 한 번 못 잡아봤는데. 꿈도 꾸지 못 했는데 말이다.
 죽음 대신 택한 길.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단 하나 소원이 있다면, 당장 마당이 푹 하고 꺼져서 집이 땅 밑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소원아 이루어져라!
 가볍게 무시당한 내 소원.
 그래도 생각보다 집안이 지저분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일부러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지금 막 집안 청소를 끝마친 걸지도 모른다. 쥐똥도 다 치우고, 형광등도 새로 끼우고, 거미줄도 제거하고. 아니지, 내가 지금 이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이런 건 그 다음 문제다. 도대체 엄마는 왜 여기에 온 것일까. 저 쭈글 할머니는 도대체 누구지.
 “엄마, 저 할머니는 누구야? 우리 여기 왜 온 거야?”
 이것저것 고민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온 소리는 퍽. 누군가 심하게 뒤통수를 한 대 맞을 때 들리는 소리였다.
 “이 새끼가 정말 미쳤나. 외갓집에 와서 왜 자꾸 딴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외할머니한테 버릇없이 ‘저 할머니’라고 하고. 얘가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할까.”
 아들 뒤통수를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때리는 엄마는 없다. 내가 볼 땐 엄마가 미쳤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맞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를 때리겠다는 건 아니다. 엄마랑 싸우면 내가 진다. 아직은 엄마를 이길 수 없다. 분하다. 여기가 어째서 외갓집인지, 저 쭈글 할머니가 어째서 우리 외할머닌지 증거라도 대라고 발악을 해야 한다.
 “엄마야말로 미친 거 아니야! 여기가 왜 우리 외갓집이냐고! 우리 외갓집이 얼마나 큰데. 여기랑은 비교도 안 되게 커. 그리고 우리 외할머니는 저렇게 주름투성이에 허리 굽은 난쟁이 할머니도 아니라고. 저 할머니보다 훨씬 이뻐. 키도 두 배고. 그리고 다른 식구들은 어디에 있는데. 외할아버지랑 외숙부, 외숙모, 외삼촌 다 어디에 있냐고!”
 또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나는 방바닥으로 푹 고꾸라졌다. 얼굴도 방바닥으로 푹. 손으로 미처 얼굴을 감쌀 틈도 없었다. 그만큼 순식간에 푹 고꾸라졌다. 도대체 얼마나 세게 때린 거냐.
 “야야, 애를 때려도 좀 살살 때려라. 피난다. 방바닥에 피 다 떨어지네. 저거 얼른 닦아야지, 안 그러면 피 안 지워진다. 한별아, 그러고 있지 말고 얼른 부엌에 가서 걸레 가져와라. 얼른 가져 와서 거기 피 닦아라.”
 피.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갑자기 그렇게 세게 때리니까 내 코에서 피가 나지. 그래도 그나마 내가 반사 신경을 발휘해서 얼굴을 살짝 틀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코뼈 그냥 나갔다고. 그런데 저 쭈글 할머니는 또 무슨 심보야. 지금 내가 엄마한테 맞아서 피가 났는데, 당장 그걸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어떻게 된 게 방바닥에 피 묻은 걸 걱정하냐. 그걸 또 나보고 닦으래. 아직 피가 멈추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진짜 내 외할머니라면 저런 말 안 나오지.
 “야, 너 뭐해! 외할머니 말씀 못 들었어! 옷소매로 코 틀어막고 얼른 부엌 가서 걸레 가져와야지!”
 결국 내가 가서 가져와야 하는 거구나. 결국 내가 피도 닦아야 하는 거고. 네, 제 옷이 피로 더러워지든 말든 신경 쓰지 마세요. 물론 아프지도 않습니다. 제가 피 닦겠습니다.
 걸레로 피를 닦고 있는데, 쭈글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생각보다 걸레가 깨끗해서 의외였다.
 “한별아, 너 왜 자꾸 엄마 화를 돋우고 그러냐. 그러니까 엄마가 때리지. 외할머니보고 쭈글 할머니가 뭐냐, 쭈글 할머니가. 이 주름이 다 한별이 너 걱정하느라 생긴 거잖니.”
 “그러니까 다른 식구들은 다 어딨냐고요?”
 나는 걸레를 들고 엄마 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물었다.
 “애가 참 집요하구나. 그냥 넘어가면 될 걸 계속 파고들려고 해. 내가 외할머니면 그냥 외할머닌가 보다 하면 되는데. 집이 바뀌었어도 그냥 바뀌었나 보다 하면 되는데. 식구들이 안 보이면 그냥 안 보이는구나 하면 되는데. 애가 참 집요해. 어린 새끼가 어쩜 저렇게 집요하니. 지 애비 닮아서 저렇게 집요한 거니. 정말 짜증나는구나. 죽이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나.”
 “맞아. 쟤 아빠도 좀 집요한 구석이 있어. 둔하면서도 쓸데없는 것에 집요해. 과수원집이 진짜 내 친정집이라고 아주 철석같이 믿어. 그러면서 친정집에 왜 내 사진 한 장 없냐면서 걸핏하면 사진 타령이야. 쓸데없는 것 가지고 지랄이지. 그럴 때마다 얼마나 미웠다고. 하마터면 죽일 뻔했어. 겨우 참았지만. 한별이 얘가 지 아빠를 닮았나 봐. 그래서 가끔 얘도 죽이고 싶을 때가 있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엄마와 쭈글 할머니는 조금도 안 닮았는데. 오히려 과수원집 외할머니와 닮았는데. 닮고 안 닮고를 떠나서 만약에, 이건 진짜 만약이지만, 저 쭈글 할머니가 진짜 내 외할머니라면, 어우, 싫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저 주름투성이 얼굴과 손, 굽은 등, 썩은 냄새가 날 것 같은 외모. 쭈글 할머니가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저 쭈글 할머니를 죽일지도 모른다. 내가 엄마는 못 이겨도 저 쭈글 할머니는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제발 저 쭈글 할머니가 내 진짜 외할머니가 아니기를. 이게 내 두 번째 소원이다. 소원아 이루어져라!
 “불쌍한 것. 두 번째 소원 역시 안 이루어졌구나. 내가 한별이 네 진짜 외할머니란다.”
 “엄마, 쟤 또 소원 빈 거야? 쟤는 걸핏하면 소원 빌어. 그런데 매번 무시당해. 쟤도 참 재수 진짜 없어.”
 보통 소원은 마음속으로 빌지 않나. 방금 나도 그랬고. 그런데 왜 그 소리가 엄마와 쭈글 할머니한테 들린 거지. 너희들이 신이라도 되는 거냐. 내 소원을 관장하는 신이냐.
 “그럼 설명을 해줘. 왜 여기가 외갓집이고, 왜 저 쭈글 할머니가 내 외할머니야?”
 여전히 엄마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간단하지. 진실이란 건 원래 간단한 거야. 내가 너희 아빠를 속였거든. 결혼하려고. 너희 아빠, 보기보다 알부자야. 재산 장난 아니게 많다. 결혼 전부터 오로지 일만 하던 사람이야. 그리고 운도 좀 있었고. 그래서 일찍 재산을 모았어. 그리고 한 푼 안 쓰고 재산 불렸고. 그게 탐이 났거든. 그래서 가짜 외갓집엘 데려 갔지. 물론 그 집에는 그 만한 보상을 해줬어. 그깟 돈 안 아까웠거든. 시간이 지나면 너희 아빠 재산 다 내 게 될 테니까. 과수원집 한 번 갈 때 마다 그 집에 돈 꽤 갖다줬다. 비밀 꼭 지켜달라고 말이지. 그 집도 집만 컸지 실은 빚이 많아. 그래서 당장 내가 주는 돈이 아주 고마웠을 거야. 당연히 내 부탁 들어줬고. 가짜 외갓집 흉내를 아주 잘 내줬지. 너 오면 ‘우리 한별이, 우리 한별이’ 하고 노인네들이 아주 연기를 잘 했잖아. 덕분에 한별이 너도 깜빡 속았고. 그러고 보면 노인네들이 아주 영악해. 어쩜 그리 연기를 잘 하던지. 옆에서 웃음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더 얘기하기도 귀찮다. 아무튼 그렇게 된 거야. 그리고 이제 너희 아빠 있잖아, 재산 거의 바닥났어. 아마 본인은 그것도 잘 모를 거야. 그 놈 날 너무 믿어.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이제 그 놈 집 아니야. 우리 엄마 집이다. 가방 공장도 우리 엄마 거고. 땅은 거의 내 앞으로 돌려놨지. 조만간 쪽박신세야. 돈 한 푼 없는 인간하고 내가 같이 살 이유가 없잖아.”
 너무 대충 뼈대만 얘기하고 있다. 이래서야 어디 내가 이해를 할 수 있겠냐. 어른이면 좀 어른답게 관용을 베풀라고. 아이한테 설명할 때는 좀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줘.
 “과수원집이 가짜 외갓집이었다고? 거기가 가짜고 여기가 진짜 외갓집이라고?”
 “그래.”
 “애초에 왜 속였는데?”
 “너도 봤으니까 알 거 아니냐. 우리 엄마가 좀 흉해. 원래 저렇게 주름이 많았지. 등도 애초에 굽었고. 그뿐인 줄 아냐. 음식도 못 만들어. 사위가 오면 닭이라도 잡아줘야 하거든. 그런데 죽일 줄만 알지, 요리를 못해. 닭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죽이는데.”
 “그럼 마당에 있는 닭들은 그냥 죽이기 위한 것들이야?”
 “그래. 엄마는 가끔 닭이라도 죽여야 하거든. 안 그러면 자꾸 사람을 죽이려고 해서 말이지. 아마 네 아빠가 여기 왔으면, 우리 엄마가 홧김에 네 아빠도 죽였을 거야. 그럼 말짱 꽝이잖냐. 얼마나 돈이 아깝니.”
 “못 믿겠어. 과수원집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예뻐해 주셨는데. 전화라도 하게 해줘. 내가 직접 물어볼게.”
 “안 하는 게 좋아.”
 “왜.”
 “받을 사람이 없어. 아무도 못 받을 거야.”
 “못 받는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집에 아무도 없어?”
 “없지. 대신 과수원에 있지. 과수원 어딘가에 파묻혀 있어. 막 서로 뒤섞어서 과수원 이곳저곳에 파묻었거든. 그래서 전화 못 받아.”
 “다 죽였단 말이야?”
 “다 죽였어. 열흘 전에 네가 본 게 마지막이야. 내가 다음 날 다시 가서 다 죽였으니까.”
 “왜 죽였어?”
 “질문이 웃긴다. 당연한 거 아니니. 살려두면 안 돼. 그럼 계속 돈을 요구할 테니까. 뻔하잖아. 그 인간들 돈에 환장해서 너한테 그렇게 잘해준 거거든. 얼마나 돈에 환장했으면 그렇게까지 연기를 잘 했겠냐.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돈을 요구할 인간들이야. 그런 인간들은 바로 죽여야 해.”
 “돈에 환장한 건 엄마도 마찬가지 아니야?”
 “어머, 그렇구나. 그래도 그런 말을 엄마 앞에서 막 하면 어떡하니. 애가 참 싸가지가 없어. 죽일까 보다.”
 “그런데 난 여기 왜 데려왔어? 데려올 필요가 없었을 것 같은데. 엄마는 이제 나도 버릴 거 아니야? 아빠도 버리고 나도 버리고. 아빠하고 난 완전 거지 된 거네.”
 “그렇지. 완전 거지 된 거지. 그런데 네 외할머니가 한별이 너 한 번만 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 의외로 외할머니 고집이 세더라고. 한별이 너한테 꼭 닭이라도 한 마리 잡아주고 싶단다.”
 죽일 줄만 알면서, 그걸 잡아서 대체 어쩌려고. 설마 죽은 생닭을 먹으라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한별이 너는 핏줄 아니냐. 네 아빠하고는 다르지. 너 얼굴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더라. 같은 핏줄인데, 그깟 요리 못 하는 게 뭐 흉이냐. 흉 될 것 없지. 그보다는 맛없는 거라도 한 번 먹이는 게 도리일 거 같아서 말이다.”
 도리, 쭈글 할머니 입에서 도리라는 말이 나왔다. 저런 단어도 안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맛없는 거 먹기 싫다. 끔찍하게 싫다. 나한테는 그런 거 안 먹이는 게 도리다.
 “그리고 내가 하룻밤 재워주고 싶기도 하고. 진짜 외갓집에서 하룻밤은 자봐야 하지 않겠냐. 가짜 외갓집 말고 진짜 외갓집에서. 안 그러면 평생 후회하면서 살 거 아니냐. 나는 진짜 외갓집 한 번 못 가본 놈이라고 후회할 거 아니냐.”
 말 하는 것만 들어도 저 쭈글 할머니가 제 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어느 게 나를 더 평생 후회하게 만드는 건지 잘 판단이 안 서나 보다. 엄마가 나와 아빠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 전에 엄마가 도망가지 않게 내가 더 잘 했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한다. 내가 알던 외갓집은 가짜다. 엄마가 나와 아빠를 속였다. 엄마는 나를 진짜 외갓집에 데려가 주지 않았다. 후회스럽다. 가짜 외갓집이라는 걸 진즉 눈치 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후회스럽다. 닭을 죽이지 않으면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는 내 진짜 외할머니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해서 후회스럽다.
 같은 핏줄이라고 해서 나까지 사이코라고 생각하나 보다. 오히려 진실을 알게 돼서 몹시 후회스럽다. 내가 저 흉한 쭈글 할머니 외손자라는 게 몹시 창피하다. 어쩜 저렇게 엄마랑 하나도 안 닮았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굉장히 예쁜데, 저 쭈글 할머니는 밤이 아니라 낮에 마주쳐도 섬뜩한 외모다.
 “네 엄마 수술한 거다. 돈 많이 들었어. 네 외할아버지도 인물은 별로였다만 체격 하나는 좋았지. 그거 하나 보고 결혼했다. 적어도 막노동이라도 하면 밥은 안 굶기겠구나, 그런 생각이었지. 그런데 이 양반이 결혼하고 몇 년 뒤에 홱 뒈지더구나. 공사판에서 일하는데, 뭐가 무너졌던가, 하여튼 그 밑에 깔려서 뒈졌어. 보상금이 얼마나 적던지,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화가 치민다. 이 양반이 덩치만 컸지, 아주 쓸모없었던 모양이야. 그러니 그렇게 껌값밖에 안 나오지. 그래서 내가 생각을 했다. 내가 호강할 수 있는 방법은 이제 딸밖에 없다. 얘를 잘 키우자. 그래서 내가 공사판 식당 전전하면서 돈을 악착같이 벌었어. 딸 하나 잘 키우려고. 그런데 얘가 지 아빠를 닮아서 크긴 잘 크는데, 얼굴이 영 꽝이야. 내가 봐도 흉하더구나. 그래서 고등학교만 졸업시키고 나서 수술을 시키자. 그래야 내가 호강한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또 생각을 했다. 한별이 너도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니까 딸아이 얼굴이 아무리 못 났어도 전혀 걱정이 안 됐다. 대신 수술비만 열심히 모으면 됐지. 그래서 수술 시켰다. 대성공이었어. 역시 돈이 좋더구나.”
 또 다른 진실을 알게 됐다. 정말 후회스럽다.
 “아, 엄마는 뭐 수술 얘기까지 하고 그래, 애 앞에서 창피하게.”
 “창피할 것도 많다! 부모자식 간에 감출 게 뭐가 있다고. 사람 죽인 얘기까지 다 했는데, 그깟 수술 얘기야 뭐 아무것도 아니지. 그리고 이제 며칠 지나면 쟤 안 볼 건데 뭐 어떠냐.”
 “그렇긴 하네. 어차피 이제 볼 날도 며칠 안 남았는데, 할 말 못 할 말 신경 쓸 필요 없지.”
 “그래, 그딴 거 신경 쓰지 마라. 자잘한 거 신경 쓰면 큰 일 못 하는 법이다.”
 도대체 저 둘에게도 인격이라는 게 있을까 싶다. 만일 사람 하나를 만드는 데 백 가지 재료가 필요하다면, 저 둘은 각각 90가지 재료만 갖고 만들었을 것이다. 10프로가 부족하다. 둘의 대화를 듣다보면 10프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도대체 너흰 어떤 재료들이 빠진 거냐.
 코피는 멈췄다. 코에 피딱지가 들러붙어서 숨 쉬는 데 조금 불편했지만, 더 이상 옷소매로 코를 감싸고 있지 않아도 됐다. 그것만으로도 몸이 자유로워진 거 같아서 상당히 홀가분했다.
 “그런데 엄마,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지?”
 “뭐, 수술비 얼마 나왔냐고?”
 도대체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그런 걸 궁금해할 것 같냐. 넌 10프로가 아니고 20프로였냐. 재료비를 너무 아낀 거 아니야!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거.”
 “수술비는 비밀이다. 정말 많이 나왔거든. 창피해서 말 못 해. 다른 거라면 얼마든지 물어봐라.”
 “도대체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죽인 거야? 거긴 엄마보다 힘 센 사람들도 많았잖아. 외숙부랑 외삼촌 같은 사람들.”
 “뭐냐, 겨우 그거였어? 간단하지. 네 외할머니의 도움이 컸다.”
 “역시 우리 한별이도 같은 핏줄이라 그런 것에 관심이 많구나. 자랑스럽다. 외할머니가 비법을 알려줄 테니까, 나중에 요긴하게 써먹어라.”
 네, 라고 말해야 하나. 어른이 비법을 알려주신다는데, 대답을 하는 게 도리인가.
 “외할머니 전공이 뭐겠니. 닭 잡는 거다. 요리는 못 해. 닭만 잘 잡지. 공사판 식당에서도 난 닭만 잡았다. 요리는 안 했어. 요리 했다가는 당장 쫓겨나지. 대신 닭들을 아주 기가 막히게 잡았어. 비록 죽어서 털 다 뽑힌 닭들이긴 했지만, 그걸 칼로 싹둑 싹둑 못 자르는 년들이 태반이었다. 난 그걸 무 자르듯이 단칼에 퍽퍽 잘랐어. 우선 대가리부터 퍽, 다리 퍽, 날개 퍽, 몸통 퍽. 삑사리 한 번 안 났다. 그냥 단칼이야. 내가 닭 자르는 소리는 흡사 다듬이질 소리와도 같았다. 사람들이 감탄을 했어. 하도 내가 닭을 잘 자르니까 나중에는 식당 주인이 살아 있는 닭들을 가져오더구나. 재료비도 아낄 겸 그냥 살아 있는 닭 잡아서 쓰자고. 그게 더 쌌거든. 엄청 쌌지. 그러니 나야 뭐 주인한테 인정받아서 좋고, 아무래도 내 전문이 죽은 놈보다는 살아 있는 닭 잡는 건데, 내 전문성 살려서 좋고. 일타이피 아니겠냐. 그래서 더 열심히 잡았다. 내 손에 죽은 닭이 아마 1톤 트럭으로 수백 대는 될 거다. 그걸 먹고 일꾼들이 힘을 냈어요. 그 힘으로 신도시 아파트를 다 지은 거다. 내가 산업 역군이야. 나 없었어봐라. 한창 아파트 붐 일어났을 때, 어떻게 그 많은 아파트들을 지을 수 있었겠냐. 나 같은 사람, 나라에서 표창장 줘야 한다.”
 또 네, 라고 말해야 하나. 맞장구치기가 참 애매하다.
 “자고로 닭이고 사람이고 간단하다.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다. 모가지만 따면 된다. 칼로 퍽 내려치면 되지. 그런 다음 모가지 잡고 다리 퍽, 몸통 퍽. 순서 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다. 일단 모가지만 따면 그 다음부터는 아무 데나 퍽퍽퍽이야. 그러면 된다. 대신 중요한 게 있지. 칼이 좋아야 돼. 무슨 말이냐, 항상 칼을 예리하게 갈고 또 갈아야 한다는 거지. 갓난아기가 내려쳐도 뎅강 잘릴 수 있도록 갈고 또 갈아야 한다. 그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귀찮아서 그걸 안 하지. 진실은 의외로 간단한 법. 자고로 고수란 그 귀찮은 걸 하고 또 하는 사람이란다. 해서 이 집 칼도 나는 매일 갈고 또 간단다. 이것만 하면 된다. 정작 죽이는 건 간단해. 재미도 있고.”  
 아, 칼만 잘 갈면 뎅강이구나. 도대체 외할머니란 작자가 외손자한테 뭘 가르쳐 주는 거냐. 그리고 요긴하게 써먹긴 또 뭘 요긴하게 써먹어.
 “진짜 우리 엄마 칼 가는 솜씨 하나는 끝내준다. 닭 잡는 것만큼이나 환상적이야. 슥삭슥삭과 뎅강. 이 집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다. 실제로 이런 소리가 들릴 리는 없다만, 네 외할머니 칼 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또 닭 잡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진짜로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네 외할머니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그건 슥삭슥삭과 뎅강이다.”
 “그렇지. 난 슥삭슥삭과 뎅강이지.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걸로 내가 너를 키웠다. 수술비도 마련했고. 너도 알고 있겠지만, 그게 어디 보통 수술이었냐. 말 그대로 대공사였잖냐. 수술비 정말 많이 나왔다. 그걸 슥삭슥삭과 뎅강으로 마련한 거다.”
 “수술 얘기는 또 왜……. 아무튼 과수원집 갈 때 준비해 갈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네 외할머니의 칼.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갓난아기가 내려쳐도 뎅강 하고 잘리는 그 칼. 도대체 다른 게 또 뭐가 필요하겠냐. 필요 없다. 난 그것만 가져갔다. 그러고는 다들 잠들 때까지 기다렸지. 우선 안방으로 갔다. 가짜 외할아버지와 가짜 외할머니가 자고 있는 방. 겁이 나지는 않았다. 내겐 칼이 있었으니까. 찌르고 베고 쑤시고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모가지 위에서 칼을 툭 떨어뜨렸다. 뎅강이더구나. 뼈 잘리는 소리조차 안 났다. 마치 칼이 허공을 가르는 것과 같았다. 네 외할머니의 칼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 그냥 허공이다. 사람 모가지조차 그냥 허공에 불과하다. 허공을 가르듯 그렇게 모가지도 잘린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 방, 다음에는 저 방. 돌아다니면서 다 죽였다. 한별이 너라도 쉽게 할 수 있었을 거다. 그냥 허공만 가르면 되는 거였으니까. 대신 뒤처리가 좀 힘들었지. 모가지를 먼저 자르고, 그 다음 팔다리를 뎅강, 몸통도 뎅강, 아무튼 닥치는 대로 뎅강 뎅강 잘랐다. 그게 나르기도 훨씬 쉽지 않겠냐. 그런데 본래 목적은 그거였는데, 자르다 보니 정말 재미가 있었다. 갖다대면 뎅강 하고 잘리니 어떻게 신이 안 날 수가 있겠냐. 그래서 정신없이 뎅강 뎅강 잘랐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주 무 자르듯이 잘게 잘라놨더구나. 혼자 많이 웃었다. 한별이 너도 알다시피, 내가 평소에 무를 얇게 못 자르지 않았냐. 그런데 나도 하면 되더구나. 그걸 깨닫고 혼자 많이 웃었다. 그런 다음 그걸 다 한 군데 모아서 과수원 여기저기에 골고루 파묻었다. 어떤 조각이 어떤 사람 조각인지 모를 정도로 잘게 잘라서 골고루 섞은 다음 파묻었어.”   
 잘 하셨습니다.
 괜히 물어봤다. 속이 메슥거려서 계속 서 있을 수 없었다.
 “엄마, 나 화장실 좀 갔다올게.”
 “그래라. 거기 문 옆에 있다.”
 안방을 나와 자연스럽게 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게 있었다.
 싱크대 위에 걸려 있는 칼. 일반 가정집에서 쓰는 식칼보다 훨씬 길고 얇았다. 횟집에서나 쓸 법한 칼이었다.
 얼마나 갈고 또 갈았으면 저렇게 빛이 날 정도로 하얄까.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칼날의 예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시멘트벽도 단 한 번에 가를 것만 같았다.
 저 쭈글 할머니의 슥삭슥삭은 정말 대단한가 봐. 신의 경지인가 봐. 칼을 보니까 그렇게 보여. 느껴진다.
 그런데 정말 뎅강 뎅강 잘린 닭을 먹고, 게다가 이 집에서 하룻밤 자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안 해줘도 전혀 후회스럽지 않은데. 오히려 여기에서 자고 나면 더 후회할 것 같아.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것도 별로 없었지만, 아무튼 화장실에서 뱃속에 있는 것들을 시원하게 게워냈다. 덕분에 살짝 배도 고팠다.
 배가 고프니 생각이 또 달라졌다. 지금이라면 뎅강 뎅강 잘린 닭이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번 더 뱃속에 있는 걸 게워내면 확실하다. 뱃속을 텅텅 비워두면, 그까짓 것 못 먹을 것도 없다. 일어설 기운도 없는데, 그깟 뎅강 뎅강 닭이 문제냐, 생닭도 가능하다. 그런 희망이 보였다. 그리하여 또 한 번 우웨엑!
 정신을 차리니 안방이었다. 우웨엑과 동시에 쓰러졌나 보다.
 “야, 넌 먹은 것도 별로 없으면서 왜 갑자기 토를 하고 지랄이냐. 그것도 오늘 처음 온 외갓집에서. 하여튼 애가 버르장머리가 없어.”
 처음 온 외갓집에서 토를 한 거하고 버르장머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남의 속도 모르면서. 내가 뭐 토를 하고 싶어서 한 줄 아나. 일부러 토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뎅강 뎅강 닭을 먹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단 말이지.
 아무튼 두 번이나 우웨엑을 한 덕분에 맛없기로 소문난 쭈글 할머니의 뎅강 뎅강 닭백숙 한 그릇을 간신히 다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참 먹으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대체 닭백숙을 하는데 누가 닭을 이렇게 뎅강 뎅강 잘라서 넣냐. 이럴 거면 차라리 닭볶음탕을 하지. 진짜 아홉 살인 나보다도 요리에 대한 지식이 없다. 쭈글 할머니는 닭을 무조건 뎅강 뎅강 자르고 본다.
 그래도 참 닭 하나는 잘 잘랐다. 어쩜 이렇게 표면이 깔끔하게 절단됐는지 신기할 정도다. 마치 대리석 표면 같다.
 “아유, 우리 한별이 아주 잘 먹네. 이건 웬만한 사람들은 못 먹는데. 나도 내가 만든 건 잘 못 먹거든. 난 자르는 게 전공이지 만드는 건 꽝이야. 그런데 한별이는 아주 식성이 좋구나. 한 그릇 더 주랴?”
 정중하게 사양했다. 두 번의 우웨엑 덕분에 겨우 먹기는 했지만, 먹고 나서 다시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그럼 세 번이다. 하루에 세 번 우웨엑 했다가는 내 속이 다 뒤집히고 만다.
 “그래, 한 그릇 다 먹은 것도 어디냐. 아마 내가 만든 닭백숙을 한 그릇 다 비운 사람은 한별이 네가 처음일 거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구나.”
 “그러게. 나도 엄마가 만든 닭백숙은 진짜 못 먹겠던데. 한별이 얘도 가만 보면 참 기특한 구석이 있어. 외할머니 기분 맞춰주느라 억지로 먹은 건 아닌가 몰라.”
 “아닐 거다. 그게 어디 내 기분 맞춰준다고 해서 먹을 수 있는 그런 거더냐. 아무도 그렇게는 못 한다. 너도 못 그러지 않냐. 한별이 얘가 특이 식성이라서 그런 거다. 내 기분 맞춰주는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제발 저 둘은 대화하는 걸 자제했으면 싶다. 가뜩이나 속도 안 좋은데, 뱃속을 더 불편하게 만든다.
 “엄마, 나 밥도 먹고 그러니까 좀 졸린데. 걷기도 많이 걸었고. 피곤이 확 몰려 와. 먼저 자면 안 될까?”
 “오오, 닭백숙 한 그릇 다 먹었다고 당당해진 저 말투. 하긴 대단한 일 하셨지. 그동안 아무도 해내지 못한 걸 해내셨으니까. 그래, 당당해질 만하다. 먼저 자라. 옆에 작은방에 가서 자. 거기 이불 있을 거야. 엄마는 이따가 외할머니랑 여기에서 잘 테니까.”
 오오, 닭백숙 한 그릇 다 먹었다고 해서 이런 은혜를 입을 줄이야. 저 쭈글 할머니랑 같이 자는 게 아니었단 말이지. 나 혼자 잔단 말이지. 우웨엑의 효과. 이렇게나 클 줄이야. 그렇다면 뭐 이 집에서 못 잘 것도 없지. 단 하룻밤이다. 일찍 잠들어서 얼른 하루를 보내버리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작은방에 온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건 누가 보더라도 방이 아니었다. 창고였다. 왜 창고를 집안에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벽에 벽지도 안 발랐다. 시멘트벽 그대로다. 바닥도 마찬가지였다. 장판을 안 깔았다. 역시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한쪽 구석에 수북이 쌓인 칼들. 녹이 슨 칼도 있고 보기에 멀쩡한 칼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이가 나갔다. 쭈글 할머니가 평생 사 모은 칼들인가 보다. 양이 엄청나다. 그리고 저걸 뭐라고 하지. 그냥 숫돌이라고 하나. 칼 가는 도구들. 벽돌보다는 조금 작고 긴데, 전부 가운데 부분이 움푹 들어간 걸 보니, 갈고 또 갈았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칼과 숫돌이 이렇게나 많은 집이 또 있을까. 정말로 저 쭈글 할머니가 죽인 닭들이 1톤 트럭으로 수백 대는 될 것 같았다. 저 쭈글 할머니는 조금의 부풀림도 없이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구나. 그게 더 신기하다. 조금은 뻥을 튀겼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인간이 1톤 트럭 수백 대 분량의 닭을 죽여. 그런데 그게 사실인가 보다.
 창고는 창곤데, 수명 다 한 칼과 숫돌만 보관하는 창곤가 보다. 그런 창고가 필요하다는 게 더 이상해. 그리고 그 창고 구석에 납작한 담요와 솜이불이 있었다. 아마 내가 온다는 걸 알고 오늘 갖다 놓은 거겠지.
 우웨엑을 하지 않았어도 나는 어차피 창고 신세였구나. 맛없는 닭백숙을 싹 다 비운 게 억울했다.
 외할머니라면서 어떻게 처음 보는 외손자를 창고에서 재우냐. 그것도 칼과 숫돌 보관 창고에서.   
 그래도 쭈글 할머니와 함께 자는 것보다는 낫다. 역시 사람은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혹시라도 자려는데 저 쭈글 할머니가 자기 젖이라도 만지라고 하면 어떡하나. 껍질만 남은 축 쳐진 젖. 생각만 해도 우웨엑이다. 악, 저 쭈글쭈글한 손으로 내 고추라도 만진다면, 난 거품 물고 기절할지 모른다. 혼자 창고에서 자는 게 훨씬 낫다.
 시멘트 바닥에 납작 담요를 깔고 누웠다. 형형색색의 싸구려 담요. 덮는 이불도 그냥 솜이불이었다. 따뜻하지도 않으면서 쓸데없이 무겁기만 한 솜이불. 몸이 솜이불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울컥, 울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참았다. 젖과 고추를 생각하면서 참았다.
 울컥, 젖과 고추. 울컥, 젖과 고추. 그러다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안방에서 들리는 희미한 소리에 잠이 깼다.
 “그래서, 넌 한별이 쟤를 아침에 그냥 보내겠다고?”
 “보내야지. 엄마가 도리 운운하면서 데려오라고 해놓고서는, 갑자기 그렇게 죽이겠다고 하면 어떡해.”
 “처음에야 그랬지. 얼굴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까 또 그게 아니잖냐. 넌 사극 같은 것도 못 봤냐. 나중에 저런 애가 화근이 된다. 꼬맹이 하나 살려두는 바람에 일이 커지잖냐. 꼬맹이가 무술의 고수가 돼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잖냐. 나보다 더 많은 닭의 모가지를 뎅강 뎅강 자른 뒤에 찾아오는 거지. 그러고는 내 모가지를 뎅강. 끔찍하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냐. 지 애비 재산 다 빼앗았다고 나중에 커서 우리 찾아오면 어떡하냐. 그러니 애초에 화근을 없애야지. 그게 나은 것 같다. 암만 생각해도 그래.”
 “엄마는 혼자 있으면서 너무 텔레비전만 봤어. 그런 건 그냥 드라마일 뿐이지. 이제 당장 며칠 있으면 완전 알거지 될 텐데, 그런 애가 뭘 할 수 있겠어. 어디 가서 굶어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래도 그건 모르는 거라니까. 나도 맨손으로 너를 이렇게 키웠잖냐. 수술까지 시키면서 말이지. 쟤 애비도 그러지 말라는 법 있냐. 복수를 위해서 지 아들을 살인귀로 만들 수도 있는 거다. 딸은 수술, 아들은 살인귀, 뭐 이런 공식이 있지 않겠냐. 그러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저 놈 애비는 이제 나이 들어서 별 볼 일 없다. 그냥 놔둬도 돼. 알아서 폐인이 될 거다. 하지만 저 놈은 안 된다. 어떻게 변할지 몰라. 죽이자.”
 “하여튼 엄마는 너무 죽여.”
 “그거 나쁜 거 아니다. 살려면 죽여야 한다.”
 “알았어. 그럼 나 지금 피곤하니까 일단 자고 내일 죽여.”
 “내일은 무슨 내일. 그냥 지금 해치우지 않고. 금방 끝날 거다. 뎅강인데 뭐.”
 “어차피 저 닭백숙 버리기도 아깝잖아. 그냥 내일 아침에 저 닭백숙 한별이 먹으라고 줘. 그 다음 죽여도 되지. 그리고 금방 끝나기는 뭐가 금방 끝나. 그냥 뎅강만 하면 끝인가. 뒤처리는 안 해! 마당에 묻든가 뭘 하든가 해야 할 거 아냐. 지금 피곤해 죽겠는데 그 뒤처리를 어떻게 해.”
 “아 참, 그렇구나. 그 생각을 못 했네. 알았다. 그럼 내일 아침에 닭백숙 먹이고 처리해 버리자. 그럼 이만 자거라. 많이 피곤하겠다.”
 그리고 딸깍 하고 불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젖과 고추도 통하지 않았다. 주르륵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저 둘이 불쌍해서. 불쌍한 저 둘을 생각하니 눈이 아플 정도로 눈물이 흘렀다.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년들. 불쌍하다. 가진 게 없어 죽이는 것만 배운 불쌍한 년들.
 불쌍해. 불쌍해. 불쌍해. 불쌍해. 불쌍해…….
 한동안 계속 그 말만 되뇌었다. 나도 모르게 그 말만 계속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불쌍해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 시간, 두 시간.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칼과 숫돌 보관 창고에서 무거운 솜이불에 짓눌린 채 주르륵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저 두 사람을 가여워하고 있었다.
 이제 충분히 가여워했다. 이만하면 내 도리는 다 했다.
 나는 조용히 창고에서 나왔다.
 그리고 싱크대 위에 있는 쭈글 할머니의 칼을 들고 안방 문을 열었다. 
 뎅강, 뎅강, 뎅강, 뎅강, 뎅강…….
   
 우린 같은 핏줄이잖아. 피는 못 속여. 그걸 계속 신경 썼어야지. 왜 게으름을 피워, 게으름을 피우긴. 쭈글 할머니의 말을 들었어야지.
 그러니까 나를 바로 죽였어야지. 불쌍한 년들.
 역시 엄마를 죽여야 내가 사네.
 그나저나, 이 집 칼 진짜 잘 들어. 칼날이 아주 예리해. 그냥 뎅강이야. 내려칠 때 힘 줄 필요도 없어. 칼날에 닿기만 하면 뎅강이야. 칼이 아니고 완전 전기톱 수준이야. 역시 달라.
 정말 요긴하게 써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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