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오전에 전화 드렸던 오지아입니다. 이쪽은 저희 잡지 사진기자고요.”
  “아, 오지아 기자님이세요.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 있는 곳까지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우선 두 분 신분증 좀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외부인이 저희 한국히어로센터에 방문하시면 신분증 확인이 필요해서요.”
  안내데스크에 있는 여직원의 말에 오지아 기자는 자신의 신분증과 사진기자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네, 감사합니다. 여기 신분증 받으시고요, 그럼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여직원은 신분증을 오지아 기자와 사진기자에게 돌려주면서, 두 사람 곁을 지나 경쾌한 걸음으로 안내데스크를 벗어났다.
  여직원이 도착한 곳은 건물 내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오지아 기자님,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5층에서 내리시면 바로 왼쪽 편이 관리부입니다. 관리부를 지나 조금만 더 가시면 홍보실이 보이실 겁니다. 홍보실로 들어가셔서, 그곳 직원한테 다시 안내를 받으시면 됩니다. 자, 그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오지아 기자와 사진기자가 엘리베이터를 타자, 여직원은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사라졌다.
  
  “역시 능력자들이 근무하는 회사라서 그런가, 조금 긴장되네. 저 안내데스크 아가씨도 왠지 평범해 보이지는 않고 말이야. 혹시 저 아가씨도 능력자일까. 그럴지도 몰라. 서우 씨 보기에는 어때?”
  오지아 기자가 동행한 사진기자에게 물었다.
  
  “누구요? 조금 전의 그 안내데스크 아가씨요?”
  “응.”
  “글쎄요, 능력자로 보이지는 않던데요. 조금 차가운 인상을 받기는 했지만, 그냥 느낌으로는 평범한 사람 같았어요. 설마 능력자가 안내데스크에서 근무할 리는 없을 것 같은데요. 능력자라면 일단 안내데스크를 지키기보다는 유사시에 출동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가, 음, 그렇겠네. 능력자라면 일단 출동 준비를 해야겠지. 하루 종일 안내데스크를 지키고 있을 수는 없겠지. 내가 조금 긴장해서 그런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능력자처럼 보여. 그래서 굉장히 조심스러워진다고. 취재할 때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할 텐데.”
  
  “에이, 선배님답지 않게 왜 그러세요. 이번 취재도 선배님이 강력하게 밀어부쳐서 성사시킨 거잖아요. 한국히어로센터 측에서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하는데도, 선배님이 끝까지 물고늘어져서 성사시킨 거잖아요. ‘능력자들도 일반인들에게 친근감을 심어줘야 한다. 일반인들은 능력자들을 자신과는 다른 종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능력자들을 극단적으로 추종하거나 아니면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건 사회적으로도 좋지 않다. 능력자들은 분명 사회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 그런 능력자들의 역할을 일반인들이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능력자들은 결코 다른 종이 아니다. 그들도 사람이다. 일반인들에게 그 사실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능력자들의 인생 풀스토리를 다룰 필요가 있다. 일종의 인생 역정. 그런 이야기를 통해 일반인들도 능력자들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발견해야 한다. 더 이상 일반인들과 능력자들 사이에 벽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허물어뜨려야 한다.’ 기억 안 나세요? 선배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얼마나 멋있었다고요. 존경하게 됐다니까요. 그러니까 긴장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 정말 우스워져요. 전혀 존경스럽지도 않습니다.”
  
  “됐어. 너한테 존경 받고 싶은 마음 같은 거 없어. 아무튼 여기까지 와서 긴장하면 안 되지. 힘내자, 오지아!”
  그렇게 주먹을 불끈 쥐자마자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둘은 안내데스크 여직원이 설명해 준 대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왼쪽으로 갔다. 그리고 관리부를 지나 홍보실 앞에서 노크를 한 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홍보실은 일반 회사 사무실과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내심 사무실 안이 조금 특이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곳이 비록 한국히어로센터 홍보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러니까 활동부서가 아니라 홍보실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책상이 공중에 붕붕 떠다니거나 투명인간 상태로 업무를 보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린다거나 사무실 한쪽에서는 능력 발동을 연습 중인 자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몸이 물처럼 액체로 변했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연습을 하고 있는 자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무실 안은 전혀 특이할 게 없었다. 자신들이 근무하는 잡지사 사무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부서 직원 몇 명이 책상에 앉아 조용히 업무를 보고 있었다.
  덕분에 오지아 기자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월간 ‘히어로’ 잡지에서 나왔습니다. 홍보실 실장님과 미팅 약속이 되어 있어서요.”
  오지아 기자의 말에 홍보실 직원 가운데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맞이했다.
  “네, 안 그래도 실장님한테 지시 받았습니다. ‘히어로’ 잡지에서 기자님 오시면 안내해 드리라고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홍보실 직원은 두 사람을 안내해 사무실 옆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실장님, 월간 ‘히어로’ 잡지에서 기자님 오셨습니다.”
  그때 방 한쪽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둘을 반겼다.
  “아, 어서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저기, 미안하지만 여기 커피 세 잔만 부탁할게요. 참, 커피 말고 다른 거 드시겠어요? 차 종류는 많으니까 아무거나 주문하셔도 됩니다.”
  “아니오, 저희도 커피 마시겠습니다.”
  
  “제가 괜히 커피 얘기를 먼저 꺼내는 바람에…. 제가 성격이 좀 급한 편이라서요. 그럼, 여기 커피 세 잔만 부탁드릴게요.”
  그러면서 홍보실 실장이 사무실 가운데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먼저 앉았다.
  17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마른 체격,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회색 치마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얼굴도 상당히 미인이었다.
  
  오지아 기자는 소파에 앉기 전에 먼저 명함을 꺼내 홍보실 실장에게 건넸다. 그러면서 정식으로 자신의 소개를 했다.
  “전화상으로는 여러 번 인사를 드렸지만, 이렇게 찾아뵙는 건 처음이네요. 월간 ‘히어로’ 잡지에 근무하고 있는 오지아라고 합니다. 이쪽은 사진기자 지서우 씨고요. 그나저나 실장님 굉장히 미인이세요.”
  홍보실 실장이 오지아 기자의 명함을 잠시 살펴본 뒤 어서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물론 미인이라는 소리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저는 명함이 없어요. 저희는 명함을 만들지 않거든요. 아무튼 이렇게 저희 한국히어로센터에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동안 ‘히어로’ 잡지는 꾸준히 봐왔습니다. 좋은 잡지더군요. 저희 한국히어로센터 소속 능력자들의 활약상도 빠뜨리지 않고 소개해 주시고요. 그 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지아 기자님 기사도 여러 번 봤습니다. 저희 능력자가 출동할 때는 아주 용감하게 현장 취재까지 하시고, 기자 정신이 굉장히 투철해 보여서 좋았습니다. 덕분에 저희 한국히어로센터 소속 능력자들이 일반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받고 있어요. 한국히어로센터 소속 능력자들은 결코 악당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죠. 오히려 일반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줍니다. ‘히어로’ 잡지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저희 한국히어로센터 소속 능력자들을 그렇게 봐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일반인들과 능력자들 사이에는 벽이 있죠. 인정합니다.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도 생각하고 있고요. 그래서 이번에 ‘히어로’ 잡지의 특별 취재에 응하기로 한 겁니다. 일반인들과 한국히어로센터 소속 능력자들이 좀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역시 홍보실 실장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급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업무 관련 얘기부터 꺼내고 있었다.
  “네, 취재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음, 그럼 여기에서 이렇게 시간 보내고 있을 필요 없겠어요. 당장 취재 대상자 방으로 가시지요. 미리 말씀 드렸던 활동 2과 소속 헐크 부장이라는 사람입니다. 아마 헐크 부장도 지금 기자님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사람, 지금 은근히 긴장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참, 그리고 제가 헐크 부장 외모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던가요?”
  
  “네, 얘기해 주셨어요.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외모를 갖고 계시다고요. 체격은 물론 얼굴까지 초등학교 2학년. 하지만 능력을 발동시키면 강철 같은 근육으로 뒤덮인 2미터 넘는 거구로 변한다고요.”
  “네, 맞습니다. 아주 무서운 능력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2과 부장을 보면서 어린애 취급하시면 안 됩니다. 저희 한국히어로센터에는 여러 활동 부서가 있습니다. 그중 활동 2과 소속 능력자들이 가장 탁월합니다. 그리고 헐크 부장은 그런 2과를 책임지고 있고요. 능력을 발동하기 전의 헐크 부장 외모를 보면서, 저 사람이 정말로 활동 2과를 책임지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 같은 건 하시면 안 됩니다. 그는 능력자입니다. 정말로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아닙니다. 아, 물론 그냥 노파심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활동 2과 헐크 부장님에 대한 활약상은 저희도 익히 알고 있고요. 최초의 심층 취재에 헐크 부장님 같은 분을 인터뷰할 수 있게 돼서 굉장히 영광입니다. 긴장도 되고요. 그래서 이번 심층 취재를 성사시켜 주신 실장님께 더 더욱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오지아 기자의 말에 홍보실 실장은 그냥 미소만 지었다. 이번에도 역시 감사 인사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활동 2과로 두 사람을 안내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때 마침 홍보실 직원이 커피 세 잔을 들고 오던 중이었다.
  
  
  활동 2과는 건물 8층에 있었다.
  이미 홍보실 실장은 두 사람을 헐크 부장에게 소개시켜 준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홍보실 실장은 사전에 헐크 부장에게 심층 취재의 취지를 설명한 상태였고, 헐크 부장 역시 취재에 응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굳이 자신이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자리를 떴다. 괜히 자신이 있으면 취재에 방해만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서 지금 활동 2과 부장실에는 헐크 부장과 오지아 기자, 사진기자 셋뿐이었다.
  
  “홍보실 실장 저 사람이 원래 좀 유별납니다. 뭐 하나 질질 끌거나 그러지를 못 해요. 일단 결정이 났다 싶으면 바로 진행하는 스타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없어도 될 자리에는 굳이 있으려고 하지도 않고요. 그만큼 스스로에게 완벽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자신을 칭찬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죠. 그런 말은 오히려 스스로를 나태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니까요. 아무튼 일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으니까 그런 행동도 가능한 거지요. 그래서 이번 심층 취재 건도 저 사람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겁니다. 저 사람이 판단해서 내린 결정은 따라도 됩니다. 그게 지금까지 저 사람을 지켜본 뒤 내린 제 결론이거든요. 그래도 이번에 ‘히어로’ 잡지 심층 취재에 응할 능력자로 저를 지목한 건 여전히 의문이기는 합니다. 제가 과연 한국히어로센터 소속 능력자들을 대표해서 일반인과 능력자 사이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역할을 제대로 해낼지 어떨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럴 만한 위인도 못 되고요. 하지만 어쨌든 홍보실장이 내린 결정이니까 따라야지요.”
  
  “네, 조금 전에 홍보실장님한테도 감사하다는 말씀 드렸지만, 헐크 부장님께도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저희 ‘히어로’ 잡지 심층 취재에 응해주셔서요. 사실 이번 심층 취재 기획은 오래 전부터 저희 회사 내부에서 말이 나왔었습니다. 저희는 그동안 능력자 분들의 활약상만을 소개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저희 잡지사 내부에서 부정적인 목소리가 나오더라고요. 단지 능력자들의 활약상만을 소개하는 기사가 무슨 필요가 있나. 이런 기사는 그냥 일반인들의 호기심만을 충족시켜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호기심 충족의 역할이라도 제대로 해준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우리 잡지의 기사가 일반인들과 능력자들 사이를 벌어지게 만들고 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능력자들의 활약상을 읽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들은 점점 능력자들과 자신들의 차이를 발견한다. 능력자들은 결코 자신들과 같은 일반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설문 조사가 그걸 반영해 주지 않나. 일반인들은 능력자들을 자신과는 다른 종으로 생각하고 있다. 능력자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심지어 괴물, 돌연변이 등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일반인들과 능력자들 사이에는 높은 벽이 둘러쳐져 있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어쩌면 우리 ‘히어로’ 잡지 탓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동안 능력자들의 활약상에만 집중해온 탓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동안 일반인들과 능력자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주는 기사 같은 건 전혀 쓰지도 않았다. 오직 능력자들의 활약상에만 치중해 왔다. 사람들의 호기심에만 끌려다닌 탓이다. 그리고 그런 호기심이 결국 일반인들과 능력자들 사이에 벽을 만들게 됐고. 그런데도 우리 ‘히어로’ 잡지는 여전히 방관만 하고 있다. 일반인들과 능력자들 사이에 벽이 만들어지고, 그 결과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는 일반인들까지 생겨나고 있는 시점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방관만 하고 있다. 능력자들을 극단적으로 추종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심지어 소위 악당으로 불리는 또 다른 능력자들을 추종하는 단체까지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건 실로 심각한 현상이다. 사회의 기반이 허물어질 수도 있다. 하루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 더 이상 방관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기획이 한국히어로센터 소속 능력자 분들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인생 풀스토리 같은 게 제격이라는 의견도 나왔고요. 일종의 인생 역정이죠. 능력자 분들의 인생 역정. 하지만 저희 ‘히어로’ 잡지 내부에서 반대의 목소리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능력자는 능력자일 뿐이다. 일반인들과 같은 취급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 기획은 자칫 능력자들의 위상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 ‘히어로’ 잡지의 판매 실적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뭐 그런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획이 잠시 주춤했던 겁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달랐어요. 어쨌든 능력자 분들도 자신들의 위상보다는 일반인들과의 벽을 허물기를 바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벽을 허무는 게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제가 무작정 한국히어로센터에 이번 기획 건에 대해 설명을 드렸던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한국히어로센터 측에서도 반대했지만, 결국에는 홍보실장님께서 허락을 해주셨어요. 저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계셨던 거죠. 일반인들과 능력자들 사이에 더 이상 벽이 생기면 안 된다고 판단하신 겁니다. 능력자들도 저 같은 일반 사람과 똑같이 슬퍼하고 기뻐하는 존재라는 걸 사회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신 겁니다. 한국히어로센터 소속 능력자들도 우리들 이웃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신 겁니다. 그래야 일반 사람들도 능력자들을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요. 왜곡해서 바라보지 않을 테니까요. 최소한 한국히어로센터 소속 능력자들만큼은 일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능력자들과 소위 말하는 악당들을 구분해서 판단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악당들도 자신들의 능력을 올바른 곳에 사용할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들도 이 사회에서 영원히 홀로 살아갈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마 홍보실장님께서는 이런 생각들까지 머릿속으로 그리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취재를 허락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헐크 부장님을 소개해 주셨고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헐크 부장님과 홍보실장님에게요.”
  
  오지아 기자의 긴 연설이 끝났다.
  말을 하는 내내 오지아 기자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어떻게든 헐크 부장 앞에서 이번 심층 취재에 대한 취지를 제대로 설명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단지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기 위한 기획이 아니라, 능력자들도 사회의 일원이라는 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기획임을 확실히 전달해 주고 싶었다. 사람들의 왜곡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한 기획임을 강조하고 싶었다.
  
  헐크 부장 역시 오지아 기자의 모습을 보면서, 이번 기획에 대한 오지아 기자의 확고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역시 홍보실장이야. 하여튼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결정만 내린다니까.
  “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악당들과 싸우는 법만 알았지, 이런 심층 취재 같은 건 난생 처음이라서요. 홍보실장한테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기자님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될까요?”
  헐크 부장의 말에 비로소 오지아 기자는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을 풀었다. 그러고는 해맑게 미소 지었다.
  
  “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헐크 부장님을 뵌 것도 실은 저한테 엄청난 영광이거든요. 이 사실을 저희 부모님이 아시면 아마 기절하실 겁니다. 온 동네 자랑하고 다니실 거예요. 틀림없어요. 아, 제가 이런 얘기 할 때가 아닌데, 죄송합니다. 흠, 뭐 별 거 없습니다. 그동안 헐크 부장님의 활약상에 비하면, 이런 심층 취재는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다만 진실한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헐크 부장님의 어린 시절, 가족 이야기, 친구 이야기, 능력자 활동 회사에 입사하게 된 동기. 헐크 부장님의 머릿속에 있는 지금까지의 삶을 기억나시는 대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하루가 걸려도 좋고 이틀이 걸려도 좋고 한 달이 걸려도 좋습니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독백을 하듯 저희한테 들려주시면 됩니다. 헐크 부장님이 살아오신 지금까지의 삶, 그중에서도 지금의 헐크 부장님을 지탱해주고 있는 삶을 저희한테 들려주시면 됩니다. 그럼 나중에 저희가 편집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독자들에게 알리겠습니다. 헐크 부장님만이 간직하고 있던 모든 것을요. 인간 헐크를요.”
  
  
  본명 허부두.
  현재 46세인 그의 신장은 130센티미터다.
  정확히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성장이 멈췄다. 키뿐만이 아니라 얼굴 생김새도 그대로다. 전체적인 외모가 초등학교 2학년이다.
  46세인 허부두의 외모는 초등학교 2학년 이후 변함이 없다. 단지 나이만 변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목소리도.
  
  흔히 말하는 왜소증.
  하지만 허부두의 경우에는 왜소증 중에서도 좀 특이하다. 단지 키만 자라지 않은 것이 아니다. 얼굴 생김새와 피부까지 초등학교 2학년 때 그대로다. 그러면서도 특이하게 목소리는 중년 남성의 톤과 같다.
  의사조차도 그 이유를 모른다.
  유전적인 원인도 아니다. 허부두의 부모는 지극히 정상적인 체형이었다. 그러니 병원에서도 그냥 통틀어서 왜소증이라고만 밝혔을 뿐이다. 당연히 치료법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허부두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나서 더 이상 진학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놀림 이전에 허부두 본인이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기 때문에 외출 자체를 극도로 꺼렸던 것이다. 몇 번 허부두의 엄마가 허부두를 끌고 외출을 시도하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허부두는 실제로 숨이 넘어갈 것처럼 경기를 일으켰다. 입에 거품까지 문 채로 방바닥에 쓰러져서 의식을 잃었다. 그래서 결국 허부두의 엄마도 허부두를 진학시키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외출조차 하지 않으려는 허부두에게 진학은 무리였다. 진학보다는 자신의 아들을 살리는 게 더 급했던 것이다. 대신 허부두는 매일 집에서 엄마와 함께 꾸준히 중고등학교 교과 과정을 공부했다.
  
  그때까지도 허부두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6년이 넘도록 외출한 적은 열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밤이 깊었는데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 때면 몇 번을 망설인 뒤 용기를 내서 집 앞 공터까지 나가고는 했다. 허부두에게는 죽음을 무릅쓴 외출이었고, 그게 허부두의 유일한 외출 이유였다. 그 이유 말고 허부두가 외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허부두에게 가족이라고는 엄마가 유일하다. 허부두의 엄마 역시 허부두가 유일한 가족이다.
  하루는 허부두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왜 나는 아빠가 없어? 다른 아이들 보면 모두 아빠가 있는데, 왜 나만 없어?”
  그럴 때면 허부두의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아빠하고 엄마하고 우리 부두, 이렇게 셋이서 소풍을 갔었어. 아빠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아주 경치가 좋았거든. 그래서 아빠는 우리 부두가 조금만 크면 꼭 그곳에 한번 데리고 가고 싶어 하셨거든. 근처 숲속 야영지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꽃이랑 나무랑 곤충들도 구경하고. 그래서 마침내 우리 부두가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아빠하고 엄마하고 우리 부두 셋이서 그곳으로 소풍을 갔어. 야외에서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먹고 개울에서 헤엄도 치고 날아다니는 곤충들도 잡으면서 아주 즐겁게 놀았지. 그곳 야영지에는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었어. 다들 가족 단위로 놀러 와서 즐겁게 놀고 있었지. 그리고 날이 어두워져서 저마다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숲속 어딘가에서 사람 비명 소리가 들린 거야. 아빠는 엄마한테 우리 부두 데리고 얼른 숙소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다음, 숲속으로 달려가셨어. 그리고 그곳에서 호랑이를 만났단다. 아주 크고 힘이 센 호랑이, 사람보다 몸집이 큰 호랑이. 사람보다 몸집이 크고 힘이 센 호랑이가 숲속에서 사람을 공격하고 있어단다. 그래서 아빠는 호랑이에게 덤벼들었지. 아빠도 힘이 셌거든. 다행히 호랑이의 공격을 받았던 사람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단다. 하지만 아빠는 그러지를 못했어. 아빠도 힘이 셌지만, 호랑이가 아빠보다 더 힘이 셌지. 호랑이는 아빠를 끌고 숲속으로 들어가버렸어. 그 뒤로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단다. 그래서 우리 부두한테는 아빠가 없는 거야. 호랑이가 아빠를 데려가 버렸거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끌고 가 버렸거든.”
  
  “흥, 그깟 호랑이, 만약에 또 나타나면 내가 가만히 안 놔둘 거야. 만약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엄마를 데려가려고 하면 내가 가만히 안 놔둘 거야. 그리고 아빠도 어서 보내달라고 내가 말할 거야. 그깟 호랑이 하나도 안 무서워.”
  그렇게 말하던 허부두도 어느 때부터인가는 알게 되었다. 자신의 아빠는 호랑이에게 물려죽었다고. 그래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고.
  
  게다가 더 이상 몸도 자라지 않는 자신이 호랑이 같은 덩치 큰 짐승을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만일 호랑이가 나타나 엄마를 공격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도 다짐했다. 허부두는 매일 그런 다짐을 했다. 아빠는 잃었지만, 엄마만큼은 절대로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초등학교 2학년 학생만 한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그런 다짐을 했다. 사람을 무서워하면서도 그런 다짐을 할 때면 이마에 핏줄까지 도드라질 정도였다.
  
  허부두에게 엄마는 모든 것이었다.
  허부두는 외출을 하지 않으면서부터 사람들까지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허부두에게 있어서 악몽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사람들이 등장하기라도 하면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그 정도로 허부두는 사람들을 피했다.
  엄마가 강제로 허부두를 밖으로 끌고 나가려고 하면 숨이 넘어갈 것처럼 경기를 일으켰고, 낯선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오기라도 하면 마찬가지로 숨이 넘어갈 것처럼 경기를 일으켰다. 그래서 허부두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도 줄곧 집안에서만 지냈다.
  
  허부두의 엄마는 그런 허부두 때문에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지도 않았다. 일을 하러 갈 때면 항상 현관문을 이중 삼중으로 잠갔고, 집안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을 허부두를 생각해서 일이 끝나면 바로 달려왔다.
  
  허부두의 엄마는 10년이 넘게 그렇게 혼자서 허부두를 키웠다. 하지만 불평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허부두가 집안에서만 지내는 게 오히려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집안에서만 지내는 게 자신의 아들인 허부두에게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빠처럼 허무하고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부두가 왜소증으로 태어난 건 우리들 탓이다. 게다가 부두도 아빠를 닮았을 것이다. 그러니 엄마로서 부두를 지켜야 한다. 오히려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게 더 안전할 수도 있다. 이제 조금만 더 돈을 모으면 된다. 그러면 시골로 내려갈 수 있다. 넓은 땅을 사서, 부두를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해줘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시골에 묻혀 지내는 게 부두를 위한 것이다.
  
  허부두의 엄마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노력했다.  
  허부두의 눈에 그런 엄마는 고달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였다.
  아빠는 죽었다. 자신은 왜소증에 외출을 기피하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두려워한다.
  아빠는 죽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으로 살아 있다.
  그러니 결국 엄마는 나 때문에 힘든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죽으면, 나도 아빠처럼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그때는 엄마가 조금은 편해질까. 조금은 남들처럼 편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가끔 허부두는 그런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내가 죽으면 되는 건가. 엄마를 위해서 내가 죽으면 되는 건가.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수록 허부두는 오히려 더 엄마에게 집착했다. 심지어는 혹시라도 엄마가 자신을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도 안 자고 엄마를 지켜보기도 했다.
  
  자신이 죽으면 엄마가 편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생각 다음에는 곧바로 엄마에게 집착하는 경향이 몇 배는 더 강해졌다.
  그러니 허부두의 머릿속은 하루 종일 엄마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내가 죽으면, 엄마가 나를 버리면.
  
  허부두에게 있어서 엄마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었다. 생각의 시작과 끝이 모두 엄마였다. 그래서 엄마가 가끔 늦게 돌아올 때면, 허부두는 죽음을 무릅쓰고 집 앞 공터까지 가서 엄마를 기다렸다.
  
  하루는 엄마가 평소보다 늦었다.
  허부두는 한 시간이 넘게 방과 현관문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현관문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왔고, 현관문까지 갔다가 또다시 되돌아왔다.
  엄마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감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불쑥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빠는 잃었지만, 엄마만큼은 절대로 잃지 않겠다.
  
  허부두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숨을 헉헉 대며 집 앞 공터까지 힘겹게 걸어갔다. 그리고 집 앞 공터 벤치에 앉아 멀리 큰길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숨을 헉헉거리고 있었다. 숨을 헉헉거리면서 동시에 잔뜩 몸을 움츠려 주변을 경계했다. 밤이라 공터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일 어디에선가 불쑥 사람이 튀어나올까 봐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만일 낯선 사람이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허부두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입에 거품을 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허부두는 지금 공터에 나와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부두는 그렇게 삼십 분을 공터 벤치에 앉아서 엄마를 기다렸다.
  삼십 분은 허부두에게 있어서 삼 일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몸을 움츠리며 주변을 경계하느라, 이미 허부두의 온몸 근육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그래서 마치 삼 일을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사람이나 겪을 만한 근육 통증을 겪었다. 그만큼 허부두는 육체적 한계를 느끼면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십 분이 넘어설 즈음 큰길 아래에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허부두의 엄마였다.
  
  허부두는 엄마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당장 벤치에서 일어났다. 벤치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온몸의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통증이 밀려와 하마터면 다시 벤치에 주저앉을 뻔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다리에 힘을 줘 위기를 넘겼다. 그러고는 엄마한테 달려가려는 찰나, 허부두는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그 상태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몸을 잔뜩 움츠린 상태로 바들바들 떨었다.
  
  떨고 있는 다리를 손으로 붙잡으려고 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까지 바들바들 떨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이를 악 물고 다리를 붙잡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러면서도 허부두는 계속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소리가 작아서 엄마한테까지 들리지 않을 것 같아서 더 크게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엄마를 부르는 허부두의 목소리는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되지 않았다.
  마침내 허부두의 엄마가 벤치 아래에 쓰러져 있는 허부두를 발견했다.
  
  “미안해. 너 먼저 갈래? 우리 아들이 너를 보더니 경기를 일으킨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매번 혼자 가겠다고 한 거야. 우리 아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보면 저렇게 경기를 일으키거든. 미안해. 될 수 있으면 빨리 우리 아들 시야에서 벗어나 줄 수 있겠어! 안 그러면 우리 아들이 너무 힘들어하거든. 그럼 내일 보자.”
  그러면서 허부두의 엄마는 서둘러 허부두에게 달려갔다. 달려가서 벤치 아래에 쓰러져 있는 허부두를 끌어안은 채 이를 악 물었다.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 물었다.
  
  “엄마가 다니는 회사 동료 아줌마야. 같은 아파트에 살아. 오늘 야근이 있어서 늦게 끝났거든. 끝나자마자 엄마 혼자 얼른 오려고 했는데, 저 아줌마가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하면서 아파트까지 같이 가자고 하잖아. 자기 좀 부축해 달라고 하면서…. 그래서 이번에는 거절하지 못했어. 매번 같이 가자는 걸 거절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더라고. 아프다는 사람 뿌리치고 혼자 올 수는 없더라고. 그래서 여기까지 같이 온 거야. 안 그래도 또 우리 부두가 밖에 나와 있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밖에 나와 있다가 괜히 저 아줌마 보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다 엄마 잘못이야. 그래도 혼자 왔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어. 이럴 때는 정말 전화기라도 한 대 들여놓고 싶은데, 그러면 미리 전화로 ‘엄마 조금 늦을지도 모르니까 걱정하지 말고 집에 있어.’ 이렇게 말하면 마음 편한데, 부두 네가 또 전화벨 소리를 워낙 싫어 하니까 그렇게 하지도 못하잖아. 하여간 엄마 힘들게 하는 데에는 뭐 있다니까. 아주 엄마 힘들게 하기로 작정을 하셨어요, 우리 부두가.”
  
  바들바들 떨던 허부두도 입만큼은 덜덜 떨지 않았다. 엄마 품에 안겨서도 여전히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지만, 입만큼은 떨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를 꽉 깨문 채 울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자, 부두야, 눈 감아. 눈 감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그러니까 눈 감아. 눈 감고 엄마랑 같이 집에 가자. 엄마가 안아줄 테니까, 눈 감고 엄마랑 같이 집에 가자.”
  
  허부두의 엄마는 초등학교 2학년 학생 체격 그대로인 스무 살 허부두를 안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은 허부두가 가장 좋아하는 크림 스파게티로 근사한 만찬을 즐겼다. 물론 와인과 콜라가 빠질 리 없었다.
  하지만 근사한 만찬을 즐긴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허부두는 또 한 번 방과 현관문 사이를 왔다갔다 해야 했다. 근사한 만찬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허부두는 다시 한 번 현관문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왔고, 현관문까지 갔다가 또다시 되돌아왔다.
  
  아빠는 잃었지만, 엄마만큼은 절대로 잃지 않겠다.
  이번에도 허부두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숨을 헉헉 대며 힘겹게 집 앞 공터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공터 벤치에 앉아 큰길을 내려다보았다.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주변을 경계하는 것도 여전했다. 육체적 한계를 느낄 만큼 엄청난 근육 통증을 느끼면서 삼십 분이 넘게 벤치에 앉아 엄마를 기다렸다.
  
  이제 곧 엄마가 올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자.
  허부두는 울음 대신 근육 통증을 참기 위해 이를 꽉 깨물며 엄마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큰길 아래쪽에서 낯익은 사람 모습이 보였다. 허부두의 엄마였다.
  허부두는 이번에도 우두둑 소리를 내며 전해지는 뼈마디의 통증을 참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엄마한테 달려가려는 찰나, 허부두는 다시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그 상태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거 놔, 이 미친 자식아! 감히 어디에다 함부로 손을 대는 거야! 당장 저리 꺼지지 못해! 당장 꺼지지 않으면 경찰 부를 거야! 미친 듯이 소리 질러서 온 동네 사람들 다 모여들게 할 거라고! 그러니 얼른 저리 꺼져! 저리 꺼져, 이 미친 자식아!”
  “호, 제법 성격이 날카롭네. 그게 더 매력적이지. 순순히 손을 잡아주는 여자는 매력 없어. 당신처럼 이렇게 발악을 해야 군침이 확 돌아.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 해야 한다고. 너무 심하면 안 좋아. 괜히 목숨까지 잃는 수가 있거든. 잠깐 나랑 어디 조용한 데라도 가자고. 잠깐이면 돼. 그러고 나면 순순히 풀어줄게. 내 말 듣는 게 좋을 거야.”
  
  “미친 새끼. 나이도 처먹을 대로 처먹은 새끼가 이런 쓰레기 같은 짓이나 하고 다니냐! 그 나이 되도록 여자 한 번 안아보지 못했나 보지! 그래서 나처럼 이렇게 나이 든 여자라도 한번 안아보겠다는 거냐! 미친 새끼.”
  “말이 너무 심해졌어. 내가 정도껏 하라고 했잖아. 내 말 우습게 들리는 거야?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 너, 죽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제 그만 발악해야 돼. 안 그러면 죽어. 내 손에 죽는다고.”
  그러면서 사내가 다시 허부두의 엄마 손을 잡아챘다.
  
  그때 허부두의 엄마가 주머니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내 사내의 얼굴에 뿌렸다. 호신용 스프레이였다.
  허부두의 엄마는 호신용 스프레이를 사내의 얼굴에 뿌린 뒤 아파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공터 벤치 밑에 허부두가 쓰러져 있는 것도 모르고 미친 듯이 아파트를 향해 뛰어갔다.
  
  허부두의 엄마가 아파트를 향해 뛰어가는데 뒤에서 난데없이 짐승 소리가 들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르 주저앉을 만큼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밤의 적막을 갈기갈기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허부두의 엄마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무언가 거대한 팔이 허부두의 엄마 얼굴을 휘갈겼다.
  그 일격으로 허부두의 엄마는 공중으로 몇 미터를 날아오르더니 곧이어 땅바닥에 쓰러졌다. 공중으로 날아오르기 전에 이미 턱 뼈가 완전히 으스러진 채였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머리가 아스팔트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그 충격으로 한쪽 눈알까지 쏟아져 나왔다.
  
  “거봐, 내가 너무 발악하지 말라고 했잖아. 너무 발악하는 바람에 이런 꼴이 됐잖아. 아주 보기 흉하게 됐다고. 이래 가지고는 전혀 군침이 안 돌아. 오히려 구역질이 다 난다고.”
  그러면서 사내는, 아니 반은 사람 반은 호랑이인 능력자는 앞발을 치켜들어 허부두의 엄마 얼굴에 또 한 번 일격을 가했다. 그 일격으로 허부두의 엄마 얼굴은 목에서 뜯겨져 나가 어둠 속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굴이 뜯겨진 곳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 피를 맞으며 반은 사람 반은 호랑이인 능력자가 앞발을 휘두르며 포효했다.
  
  허부두의 엄마가 죽었다. 그것도 능력자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 목에서 얼굴이 뜯겨진 채 피를 분수처럼 뿜으며 죽었다. 그리고 지금, 능력자는 얼굴 없는 허부두의 엄마 시체를 또 한번 앞발로 마구 휘저을 작정이었다.
  호신용 스프레이 공격을 받아서 눈이 따끔거렸다. 코에서도 콧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 분노가 아직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허부두는 능력자의 포효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공터 벤치 밑에 쓰러져 있었다.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계속 엄마를 부르기만 했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소리가 작아서 엄마가 못 듣는 거야. 소리가 작아서 엄마가 대답을 안 하는 거야. 소리가 작아서, 엄마를 부르는 내 목소리가 작아서, 그래서 엄마가 나한테 달려오지 않는 거야. 나를 안아주지 않는 거야. 내 목소리가 작아서. 내가 이렇게 바들바들 떨고 있어서.
  그래서 엄마가 죽은 거야.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허부두의 목소리는 능력자의 포효 소리보다 컸다. 엄마를 부르는 허부두의 목소리는 능력자의 포효 소리를 잠재울 만큼 컸다. 능력자의 포효 소리 대신 허부두의 목소리가 밤의 적막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리고 더 이상 허부두는 바들바들 떨고 있지 않았다. 공터 벤치 밑에 쓰러져 있지도 않았다.
  
  허부두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우뚝 섰다. 130센티미터 키가 아닌 2미터가 넘는 키로 땅에 우뚝 섰다. 온몸은 터질 듯한 근육으로 뒤덮였고, 근육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허부두는 단숨에 엄마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얼굴이 뜯겨져 나간 자리에서 분수처럼 피를 뿜어대는 엄마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엄마의 시체 앞에서 앞발을 들어 포효하고 있는 능력자를 보았다.
  
  “호랑이, 아빠를 죽인 호랑이. 네가 숲속에서 아빠를 죽인 호랑이인가. 아니래도 상관없다. 이제 너는 엄마를 죽인 호랑이야. 아빠는 잃었지만, 엄마만큼은 절대로 잃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네놈 때문에 나는 맹세를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다시 맹세한다. 네놈을 죽일 것이다. 살덩어리들을 조각조각 뜯어서, 백 개, 천 개, 만 개, 십만 개, 아니 그 이상으로 살덩어리들을 조각조각 뜯어서 죽일 것이다. 나는 맹세한다!”
  그러면서 허부두는 능력자에게 덤벼들었다. 엄마를 죽인 호랑이에게 덤벼들었다.
  
  “뭐냐, 너도 능력자냐. 흥, 그런데 엄마가 죽을 때까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 무서워서 벌벌 떨다가 왜 갑자기 나타난 거야. 엄마가 죽으니까 갑자기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보네. 겁이 없어진 거야 뭐야. 숲속, 숲속에서 사람 죽인 게 어디 한둘이냐. 그중에는 네놈 아비도 껴있을지 모르지. 아무튼 잘 됐다. 네놈 어미 때문에 아직 분이 다 안 풀렸거든. 그러니까 네놈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놔야 분이 풀릴 것 같다. 너는 내 소문도 못 들었냐. 타이거야. 내가 그 유명한 타이거라고. 인간 수백 명을 죽인 악명 높은 타이거!”
  
  타이거도 포효하며 허부두에게 달려들었다.
  타이거는 오른쪽 앞발을 휘둘러 정확히 허부두의 턱을 노렸다. 그런 타이거의 앞발 공격은 바람보다 빨랐다. 앞발이 허공을 가른 뒤 한참이 지나서야 바람 소리가 뒤를 따랐다.
  
  허부두는 타이거의 앞발을 왼팔로 막은 뒤 그대로 돌진했다. 타이거의 가슴을 잡고 단숨에 갈비뼈를 으스러뜨릴 작정이었다.
  타이거는 재빨리 뒤로 몇 걸음 물러선 뒤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 몸놀림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었다. 가볍게 땅을 박찼는데도 공중으로 3미터 이상 뛰어올라 어느 틈에 허부두의 뒤에 서 있었다.
  
  “크아아아항!”
  타이거는 땅이 흔들릴 만큼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날카로운 발톱을 앞세워 앞발로 허부두의 가슴을 공격했다.
  허부두는 타이거의 앞발을 두 주먹으로 후려친 뒤 그대로 몸을 숙여 타이거의 턱밑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오른팔에 온힘을 실어 타이거의 턱에 꽂아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허부두의 오른팔이 타이거의 턱에 닿을 즈음, 타이거는 다시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튀어오르면서 동시에 뒷발로 허부두의 가슴을 찼다.
  그 일격으로 허부두의 몸은 3미터나 뒤로 튕겨 나가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강철 같은 근육 덕분에 타이거의 발톱이 허부두의 살을 찢지는 못했다.
  
  “크항, 꽤 단단한 근육인데. 뒷발 공격은 영 효과가 없네. 하지만 단단한 근육도 내 이빨을 견뎌내지는 못할 거야. 네놈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을 거라고. 그때까지만 어떻게든 버텨보라고, 크항!”
  그러면서 타이거는 다시 공중으로 튀어올라 네 발로 허부두의 몸을 짓누르려고 했다. 쓰러져 있는 허부두를 네 발로 제압한 뒤, 이빨로 허부두의 목을 물어뜯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허부두는 타이거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는 대신 오히려 몸을 쭉 펴서 타이거가 쉽게 네 발로 자신의 몸을 짓누를 수 있도록 도왔다.
  
  타이거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허부두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네 발로 허부두의 몸을 짓누르면서, 동시에 이빨을 드러내며 허부두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고 했다.
  그때 허부두는 두 손으로 타이거의 앞발을 붙잡은 뒤, 자신의 목을 물어뜯으려고 내민 타이거의 얼굴을 그대로 이마로 들이받았다.
  
  타이거의 입에서 피가 터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허부두는 타이거의 앞발을 잡고 있는 손을 놓은 채 재빨리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역시 타이거는 동물적인 몸놀림을 보이면서 위기를 넘겼다. 허부두가 자신의 앞발을 풀어주자마자, 얼른 앞발로 허부두의 얼굴을 할퀴며 껑충 뛰었다. 껑충 뛰어 허부두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그 틈에 허부두도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얼굴이 따끔거렸다. 손에는 약간의 피도 묻어났다.
  
  “흠, 뒷발보다는 앞발이 제법 파괴력이 있나 보군. 내 얼굴에 상처를 냈어.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아.”
  그렇게 말하면서 허부두는 씨익 웃었다.
  타이거의 얼굴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허부두의 이마 공격으로 타이거의 이빨 몇 개가 부러졌다. 그래서 부러진 이빨 사이로 피가 흘러 타이거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허부두는 그런 타이거의 얼굴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상대가 안 되잖아. 기껏 호랑이 한 마리가 나를 이긴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러면서 이번에는 허부두가 먼저 타이거에게 돌진했다. 허부두의 돌진에 땅이 다 출렁였다.
  타이거는 재빨리 껑충 뛰어 뒤로 몇 미터 물러난 뒤, 그 탄력으로 땅을 차며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빠른 속도로 허부두의 몸통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허부두의 몸통으로 파고드는 듯하다가 재빨리 몸을 비틀어 허부두의 뒤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잔뜩 몸을 낮춰 10센티미터는 될 법한 송곳니를 허부두의 왼쪽 허벅지 안으로 쑤셔넣었다.
  허부두의 이마 공격에 송곳니 하나가 부러지기는 했지만, 아직 오른쪽 송곳니는 멀쩡했다. 타이거는 오른쪽 송곳니를 최대한 깊숙이 허부두의 왼쪽 허벅지 안으로 쑤셔넣었다.
  
  “으악, 이 호랑이 새끼!”
  허부두는 비명을 지르면서 왼쪽 발을 공중으로 휘휘 저었다. 그 힘에 타이거가 허부두의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크항, 역시 네 강철 같은 근육도 내 이빨은 못 막는구나. 꽤 아프겠어.”
  타이거는 또 한번 입에서 피를 흘리며 허부두를 비웃었다. 하지만 이번에 흘리는 피는 타이거의 것이 아니었다. 허부두의 피였다. 허부두가 허벅지를 물리면서 흘린 피가 타이거의 입속으로 스며든 것이었다.
  
  “아파도 상관없다. 어쨌든 나는 맹세했다.”
  허부두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타이거 주위를 맴돌았다.
  허부두의 동작에 맞춰 타이거도 천천히 주위를 맴돌며 빈틈을 찾으려고 했다.
  
  둘의 싸움은 말 그대로 거대한 맹수끼리의 싸움 같았다. 다른 짐승은 도저히 끼어들 수 없을 만큼 거칠고 잔혹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처절한 싸움이었다. 상대 중 하나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싸움이었다. 그런 싸움에 감히 끼어들 수 있는 짐승 따위는 없었다. 이건 오직 둘 만의 싸움. 그래서 더욱 잔인한 싸움이었다. 피 냄새가 진동할 만큼 잔인한 싸움이었다. 그래서 연락을 받고 모여든 몇 몇 능력자들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두 짐승의 싸움을 지켜보기만 했다.
  
  둘은 상대의 빈틈을 찾으려고 한동안 주위를 맴돌았다.
  둘 다 거칠게 호흡을 내뱉으면서 슬금슬금 거리를 좁혔다. 거친 숨소리만으로도 둘의 싸움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 건 허부두였다.
  
  허부두가 껑충 뛰어서 타이거를 덮치려고 했다. 하지만 몸놀림은 타이거가 조금 더 날렵했다. 타이거는 허부두의 동작을 보면서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뒤로 몇 미터 피했다.
  물론 허부두 역시 예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몸을 날려 타이거를 덮치려는 순간, 타이거는 이미 뒤로 몇 미터 달아나 자신의 공격을 가볍게 피할 거라는 걸 예상했다. 그걸 알면서도 허부두는 껑충 뛰어 타이거를 덮치려고 했다. 타이거 옆에 커라단 바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조경용 바위였다.
  
  타이거가 뒤로 몇 미터 달아나자 허부두는 곧바로 옆에 있는 바위를 들어올렸다. 어른 키보다 큰 바위, 무게만 3톤이 넘었다.
  허부두는 3톤이 넘는 조경용 바위를 가볍게 들어올려 타이거를 향해 던졌다.
  3톤이 넘는 바위치고는 날아가는 속도도 제법 빨랐다. 웬만큼 반사 신경이 뛰어나지 않고서는 쉽게 피하지 못할 만큼의 속도였다. 게다가 날아오는 건 무게 3미터가 넘는 거대한 바위였다. 어지간한 능력자라도 겁에 질려 바위에 깔릴 게 뻔했다.
  
  순간 타이거 역시 당황했다. 도저히 피할 곳이라고는 없어 보일 만큼 거대한 바위였다. 거대한 바위가 시야 전체를 가리면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위 뒤에는 허부두가 있었다. 허부두도 바위를 던지자마자 곧바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그래서 타이거가 만약 바위를 피하더라도, 미처 공격이나 방어 자세를 취하기 전에 타이거에게 일격을 가할 셈이었다. 그런 계산까지 한 뒤 허부두는 타이거를 향해 무게 3톤이 넘는 거대한 조경용 바위를 던진 것이었다.
  
  비록 거대한 바위가 자신을 향해 날아왔지만, 타이거의 반사 신경은 뛰어났다. 시야 전체를 가리면서 날아온 바위였음에도 불구하고 타이거는 잠시 움찔 하다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면서 힘차게 도약했다. 덕분에 바위 낙하 지점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피하느라 착지 동작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발을 헛디뎌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슬아슬하게 바위를 피한 타이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숨 돌릴 여유는 없었다.
  바위가 땅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허부두가 바위를 밟고 다시 타이거가 있는 곳으로 도약했다.
  바위는 땅에 떨어지면서 엄청난 충격음을 냈다.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음이었다. 충격음 속에는 허부두의 괴성도 섞여 있었다.
  
  “우어어어어어어!”
  어느 짐승의 울부짖음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그만큼 온몸으로 분노를 토해내는 울부짖음이었다. 상대의 기를 꺾어놓기에 충분한 울부짖음이었다.
  무게 3톤이 넘는 거대한 바위도 피한 타이거였지만, 미처 바닥에서 일어날 사이도 없이 달려든 허부두를 보면서 타이거는 한순간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타이거는 땅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 자신에게 달려드는 허부두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머릿속이 텅 빈 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졌다.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허부두의 체중이 실린 오른쪽 무릎이 타이거의 얼굴을 정통으로 짓눌렀다. 그 충격으로 타이거의 얼굴 밑에 있는 땅바닥까지 움푹 파였다.
  
  타이거의 얼굴은 완전히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허부두의 엄마 때와 마찬가지로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허부두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온몸에 힘을 줘 괴성을 질렀다.
  “우어어어어어어!”
  괴성을 지르는 허부두의 몸에서 강철 같은 근육이 더욱 꿈틀거렸다. 어른 손가락만 한 굵기의 힘줄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일어나! 넌 아직 죽으면 안 돼! 벌써 죽으면 안 돼! 나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다. 아직 너를 용서할 수가 없다. 어서 일어나! 일어나서 조금만 더 발악을 해라! 부탁이다. 어서 일어나!”
  그러면서 허부두는 이미 얼굴이 산산조각 난 타이거를 일으켜 세워, 어른 얼굴만 한 크기의 주먹으로 타이거의 가슴을 힘껏 쳤다. 그러자 타이거의 갈비뼈 일부가 부러지면서 살을 뚫고 등 뒤로 튀어나왔다. 그렇게 허부두는 연거푸 자신의 주먹으로 타이거의 가슴을 쳤다. 그때마다 타이거의 등 뒤로 갈비뼈가 튀어나왔다.
  
  타이거의 몸은 죽어서도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부러진 갈비뼈가 살을 찢으면서 등 뒤로 튀어나왔고, 그 사이로 내장 일부도 쏟아져 나왔다. 끈적끈적한 핏덩어리도 울컥거리면서 쏟아졌다.
  허부두는 거의 이성을 잃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채 타이거의 몸 구석구석에 있는 뼈를 주먹으로 완전히 부수고 있었다. 이미 시체가 된 타이거의 몸을 한 손으로 집어들고는 다른 한 손으로 연거푸 공격을 퍼부었다.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였다.
  
  “허부두, 이제 됐으니까 그만 해라!”
  이성을 잃은 채 주먹질을 퍼붓던 허부두를 향해 누군가가 소리쳤다. 하지만 허부두는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됐어, 이제 그만 하면 충분하다. 그만큼 했으면 부모님 원수는 갚았다. 그러니 이제 그만해, 허부두!”
  그제야 허부두는 타이거의 시체를 땅에 내던지고 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에게 소리 친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누가 방금 나한테 명령을 내린 것이냐. 나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누가 나한테 그만 두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냐. 이제 나는 과거의 허부두가 아니다. 나는 너희들이 두렵지 않다. 너희들을 보면서 입에 거품을 물며 바들바들 떨던 허부두가 아니다. 이제는 너희들이 나를 보면서 거품을 물 차례다. 그런데 감히 어떤 놈이 나한테 명령을 내린 것이냐. 나와라.”
  허부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멀찌감치 떨어져서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들 가운데에서 한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마흔을 훌쩍 넘긴 왜소한 체격의 중년 사내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그는 죽었다. 타이거가 아무리 악당이었다고 해도, 우리는 죽은 자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 그게 악당과 능력자의 차이다. 우리는 시신까지 훼손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너도 그만 분노를 거둬들여라.”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너도 보통 인간은 아닌가 보구나. 타이거라는 놈보다 강한가? 그래야 한다. 그래야 타이거보다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다. 그 전에 한 가지만 묻겠다. 너는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인가?”
  
  이 사내 역시 능력자다. 아직 한국히어로센터가 생기기 전, 서울의 한 능력자 활동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이거와 낯선 능력자 사이에 결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곧장 능력자 활동 회사로 전달됐고, 사내 역시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다. 결투 장소를 확인하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달려와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쪽에 나뒹굴고 있는 허부두의 엄마 시체를 보면서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을 만지작거리며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허부두, 허서의 아들. 허서는 10년 전 숲속에서 악당의 손에 죽었다. 가족과 함께 한 나들이였는데, 우연히 그곳에서 악당을 만났다. 악당은 그때 숲속을 걷던 일반인을 공격했고, 일반인의 비명소리를 듣고 허서가 현장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그리고 악당과 결투를 벌였지만, 불행이도 악당의 손에 죽었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슬퍼했다. 특히 내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허서, 그는 내 가장 친한 벗이었다. 벗이자 회사 동료였다. 나는 벗이자 회사 동료였던 허서를 잃었다. 네 아버지를 잃었다. 네 아버지는 능력자셨다. 정의감이 투철한 존경받는 능력자셨다. 너는 그런 자의 아들이다.”
  
  허부두는 어느 틈에 사내 앞까지 와 있었다. 그리고 사내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버지의 친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당신은 제 아버지를 아십니까? 어머니는 저한테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물어봐도 그냥 숲에서 만난 커다란 호랑이에게 끌려갔다고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당신은 제 아버지를 아십니까? 제 아버지와 친구 사이셨습니까?”
  
  “네 아버지는 훌륭한 능력자셨다. 나와 함께 능력자 활동 회사에 입사해 악당들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지켰다. 항상 자신보다는 일반인들을 위해 희생하면서 살아왔다. 자신의 능력을 오로지 일반인들을 위해서만 사용하면서 살아왔다. 악당들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무서운 존재로, 일반인들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연약한 모습으로 행동하던 능력자셨다. 그리고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너희 엄마를 만났고, 결혼해서 너를 나았다. 너희 엄마는 능력자가 아니셨다.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늘 네 아빠를 걱정했다. 혹시나 악당한테 당하면 어쩌나 늘 초조해했다. 능력자 활동 회사 그만 두고 시골에서 조용히 살면 안 되겠냐는 말도 가끔씩 하고는 했다. 하지만 너희 아빠는 그러지 못했다. 너희 엄마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을 악당들로부터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능력자인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희 아빠가 숲속에서 악당에게 목숨을 잃었을 때부터 너희 엄마는 맹세했다. 허부두, 자신의 아들 허부두만큼은 능력자로 키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래서 너희 엄마는 끝까지 네게 능력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대신 악착같이 돈을 모아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살려고 했다. 단 둘이 살려고 했다. 그게 너를 잃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너희 아빠처럼 너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네 능력을 숨기고, 너희 아빠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 아버지는 능력자셨군요. 그리고 저 역시 능력자고요. 그래서 제가 지금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고요. 하지만 어머니는 제게 그런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빠처럼 저도 언젠가 악당에게 목숨을 잃게 될까 봐, 제가 능력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계셨던 것이군요. 하지만 결국 제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로 저는 능력을 발동시켰습니다.”
  
  “그래. 본래 능력자란 자신의 마음대로 능력을 발동시키고 거둘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능력자라는 걸 알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너는 자신이 능력자라는 걸 몰랐기 때문에 그동안 능력을 발동시킬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결국 네 안의 엄청난 분노가 능력을 깨운 것이다. 설사 자신이 능력자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주체하지 못할 만큼 큰 분노를 느끼면 능력이 발동된다. 네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를 죽인 악당은 누구입니까? 아직 살아 있습니까?”
  “죽었다.”
  “당신이 아버지의 복수를 해주신 겁니까?”
  “아니다. 네가 했다. 타이거, 저 자가 네 아버지를 죽인 악당이다. 네가 방금 아버지의 복수를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제 아버지의 복수를 하지 않았습니까? 저 자에게 당할까 봐 겁이 났던 겁니까?”
  
  “기다렸다. 네가 아버지의 복수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계속 네 엄마를 설득했다. 당신의 아들에게 사실을 말하라고 설득했다. 당신의 아들은 능력자다. 그 사실을 아들에게 말하라고 설득했다.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다. 언젠가는 당신의 아들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능력자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만약 타이거가 이미 다른 능력자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면, 당신의 아들은 당신을 원망할 것이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지 못하게 한 당신을 원망할 것이다. 그렇게 설득했다. 하지만 네 엄마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남편처럼 아들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네가 언젠가는 스스로 능력을 발동시킬 날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나도 스스로 능력을 발동시켰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복수를 하기에는 늦어버렸다. 복수할 상대는 이미 죽은 뒤였다. 나를 대신 해서 다른 능력자가 그 자를 죽였다. 그때의 괴로움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내가 직접 그 자를 죽이지 못한 괴로움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기다렸다. 너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런 너에게 또 한 번 괴로움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타이거만큼은 네 손으로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사내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허부두에게 건넸다.
  작은 유리병이었다.
  유리병 안에는 타이거의 털이 한 움큼 들어 있었다.
  “처음 네 아버지를 발견했을 때, 네 아버지가 쥐고 있던 것이었다. 아마도 악당의 정체를 우리들에게 알리고 싶어서였겠지. 나는 이걸 줄곧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네가 능력을 발동하게 되면, 그때 너한테 주려고 했다. 그때까지 만이라도 타이거가 살아 있기를 빌었다. 네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도록, 그때까지는 타이거가 꼭 살아 있기를 빌었다.”
  사내는 잠시 말이 없었다.
  
  “덕분에 타이거는 네 엄마의 원수까지 되고 말았구나. 너에게 기회를 주려다가 결국 타이거는 네 엄마까지 죽이고 말았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내가 타이거를 죽이지 않고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바람에, 너는 엄마까지 잃고 말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타이거와의 인연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를 용서하지 마라.”
  
  허부두는 줄곧 유리병만 쥐고 있었다. 그리고 사내의 마지막 말을 들은 뒤, 가볍게 손에 힘을 줘 유리병을 깨뜨렸다.
  유리병이 깨지면서, 그 안에 있던 타이거의 털이 바람에 날아갔다.
  허부두는 그 털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용서하겠습니다. 대신 저를 능력자 활동 회사에 취직시켜 주십시오. 당신의 부하가 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능력자 활동 회사에 들어가, 앞으로는 저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악당들이 무고한 시민을 헤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악당들의 손에 부모를 잃는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저는 제 아버지 뒤를 따르겠습니다. 나보다는 일반인들을 위해 희생하겠습니다. 내 능력을 오로지 일반인들을 위해서만 사용하며 살겠습니다. 악당들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무서운 존재로, 일반인들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연약한 모습으로 행동하는 능력자가 되겠습니다. 비록 그게 어머니의 뜻이 아닐지라도 저는 제 길을 가겠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허부두가 아닙니다. 허부두는 없습니다. 헐크입니다. 헐크인 저를 당신의 부하 직원으로 삼아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헐크는 사내를 따라 정식 능력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사내의 지시를 받아 악당들을 물리치면서 일반인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사내가 은퇴를 결심할 즈음, 헐크는 한창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불리던 한국히어로센터에 스카우트되었다.
  
  헐크는 한국히어로센터 활동 2과 부장으로 스카우트되면서 주로 현장 출동보다는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후배들을 지도했다. 그리고 활동 2과를 한국히어로센터 내에서도 가장 우수한 활동부서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활동 2과 소속 능력자인 아수라는 헐크 부장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헐크 부장님 너무 귀여운 분이세요. 가악, 제발 변신했을 때 고함 좀 지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우어어어어어!’라니, 도대체 고함은 왜 지르는 거죠. 들을 때마다 괴롭습니다. 귀가 아파요.”
  
  
  ‘히어로’ 잡지 특집호 발행에 맞춰 한국히어로센터 측에서도 잡지 200권을 주문했다. 그리고 각 활동부서 소속 능력자들에게 한 권씩 전달한 후 일부는 회사 입구에 비치했다.
  헐크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히어로’ 잡지를 보았다.
  ‘히어로 특집 심층 취재. 최초로 밝히는 한국히어로센터 소속 활동 2과 부장 헐크의 모든 것. 지금 당장 페이지를 펼치세요. 우어어어어어!’
  
  ‘우어어어어!’가 뭐야. 혹시 내 흉내를 낸 건가.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질렀다고, 참. 그리고 카피가 영 형편없잖아. 이래가지고는 독자들이 안 산다고. 기껏 심층 취재에 응해 줬더니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헐크는 잡지를 펼쳤다. 오지아 기자 앞에서 삼 일 동안 이야기한 자신의 과거가 어떻게 편집이 되어서 엮어졌는지 궁금했다.
  
  헐크는 잡지에 실린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읽어내려 갔다.
  이건 뭐야. 내가 언제 입에 거품까지 물었다고. 그냥 조금 침이 흘러나왔을 뿐이라고 했건만. 그리고 나는 아버지 친구 분 앞에서 무릎까지 꿇지는 않았단 말이야. 게다가 눈물을 흘렸다니. 나는 그 분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 이건 오지아 기자가 완전히 소설을 쓴 거잖아. 이건 애초의 취지와는 달라. 이러다가는 능력자들과 일반인들 사이가 더 멀어진다고. 우어어어어어!
  
  그때 컴퓨터에서 ‘딸랑’ 하고 경쾌한 소리가 연속으로 울렸다. 모니터를 확인해 보니 한국히어로센터 소속 능력자들과 일반 직원들의 축하 메신저였다.
  ‘기사 잘 읽었습니다. 감동했어요.’
  ‘지금 막 잡지 펼쳐서 읽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다 떨려요.’
  ‘헐크 부장님에게 이처럼 아픈 과거가 있었네요. 그런데도 묵묵히 한 사람의 능력자로 활동해 오신 헐크 부장님이 존경스러워요.’
  ‘결국 타이거와의 악연이 헐크 부장님을 강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늘 저희들의 강한 부장님으로 남아주세요.’
  
  ‘헐크 부장님 덕분에 능력자들이 일반인들한테 더 큰 사랑을 받을 거 같습니다. 능력자들이 일반인들에게 한 걸음 다가간 느낌이 들어요. 잘 읽었습니다.’
  ‘어머님의 뜻까지 거스르면서 능력자가 되셨군요. 분명 헐크 부장님은 많은 능력자들의 존경을 받을 거예요. 앞으로도 영원히 한국히어로센터의 든든한 능력자로 남아주세요.’
  ‘헐크 부장님에게 그런 아픔이 있었다니. 그래서 헐크 부장님의 포효는 언제나 서글펐던 거군요. 우어어어어!’
  
  나 참, 또 우어어어네.
  헐크는 일단 메신저로 일일이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내선번호 135를 눌러 아수라와 통화했다.
  “이봐 아수라, 지금 바쁜가?”
  “아니오, 안 바쁜데요. 지금 부장님 기사 읽고 있는 중이었어요. 막 감동 받고 있었거든요.”
  아수라는 여자 목소리로 헐크 부장과 통화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지금 당장 내 방으로 좀 와. 자네 말고 다른 아수라로 변해서 와. 가악, 하고 변하면 되지? 도대체 말이야, 우어어어가 뭐야, 우어어어가. 당장 내 방으로 와!”
mirror
댓글 3
  • No Profile
    사은 09.05.30 09:00 댓글 수정 삭제
    끝에 가서는 저도 모르게 으흐흐흐 하는 웃음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아이 09.06.01 06:26 댓글 수정 삭제
    사실 끝 부분에서 '독자가 좀 웃어줬으면' 하고 필사적으로 썼습니다. 유머 감각도 별로 없는데 쥐어짜느라 애먹었습니다. 웃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 No Profile
    카프카 10.06.23 10:47 댓글 수정 삭제
    히어로센터이야기가 더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헐크부장님의 귀여운 포효 소리가 듣고 싶은데요~! 정말 잘 봤습니다^^
분류 제목 날짜
아이 한국히어로센터 - 1. 파이어 대 고슴도치 2009.06.26
정도경 바늘 자국3 2009.06.26
배명훈 예비군 로봇25 2009.06.26
갈원경 날개의 밤 (본문 삭제)6 2009.05.29
아밀 야간산책 - 본문 삭제 -4 2009.05.29
아이 한국히어로센터 - 2. 능력자이자 인간 헐크3 2009.05.29
정도경 내 이름을 불러 줘6 2009.05.29
정도경 귀향 - 본문 삭제 -6 2009.05.29
정도경 전화 (본문 삭제)2 2009.04.24
배명훈 마리오의 침대 - 본문 삭제 -26 2009.03.27
해외 단편 울름 (An Ulm)2 2009.03.27
해외 단편 열쇠8 2009.03.27
초청 단편 우주인류학개론10 2009.02.27
초청 단편 누에머리손톱6 2009.02.27
정도경 차가운 손가락 -- 본문삭제2 2009.02.27
정도경 물고기8 2009.02.27
김이환 소년의 하루5 2009.01.31
초청 단편 백사1 2009.01.31
정도경 어두운 입맞춤 - 본문 삭제 -5 2009.01.30
정도경 몸하다 -- 본문삭제11 2009.01.30
Prev 1 ...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