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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세번째 계단

2012.02.24 23:1402.24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계단을 달려내려가던 중이었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일곱 칸짜리 계단이었다. 나는 아래에서부터 세번째 칸에 서 있었다. 그런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전혀. 내가 서 있는 곳 바로 한 칸 위, 네번째 계단을 지나던 순간의 기억마저. 전혀 없었다. 아무것도. 나는 누구일까. 여기는 어디일까.
 계단을 달려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한 건 내 몸에 남아 있는 관성 때문이었다. 움직이던 물체가 갑자기 멈춰 섰을 때의 느낌. 내 몸을 이루는, 질량을 갖는 모든 것들이 동시에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나. 불과 0.1초 전, 딱 계단 한 칸을 내려올 만큼의 과거. 그때의 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긴장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왜 긴장했을까. 나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었던 걸까. 알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기억이 너무 짧았다.
 다시 계단을 달려내려갔다. 몸에 남아 있는 메시지를 들어야 했다. 빠른 속도로 달려내려가던 물체의 관성, 그리고 두근거리는 심장. 그게 나였다. 나의 흔적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긴박한 순간이 틀림없었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쫓고 있거나. 어느 쪽이 됐든 계속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안 그랬다가는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여기는 어디일까? 그보다 어떤 시간대일까?
 주위를 살폈다. 웅장한 석조건물이 빽빽하게 늘어선 좁은 골목. 한눈에 시대를 짐작하기 어려운 경관. 정면에 아치로 장식한 골목길 입구가 보였다. 어딘가로 통하는 문이라는 뜻 같았다. 그곳으로 들어서자 그다지 넓지 않은 광장이 나왔다. 오층 높이의 석조건물들로 둘러싸인 광장 한가운데, 구멍 뚫린 돌바닥에서 물줄기가 뿜어져올라왔다. 시원하다는 느낌보다는 차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얼른 눈을 들어 사람들의 옷차림을 살폈다. 어두운 색. 두꺼운 외투를 걸친 사람들. 겨울옷이었다. 내가 느끼기에 그렇게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곳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지금이 바로 겨울이라는 뜻이었다. 겨울인데도 분수가 얼지 않고 물을 뿜을 만큼 따뜻한 곳. 대강 어디쯤인지 알 것 같았다. 창백한 피부에 눈 주위가 움푹 들어간 사람들의 얼굴 생김새, 광장을 둘러싼 석조건물들의 장엄한 인상. 제국을 경험했거나 지금도 제국인 곳.
 달려가던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시야에 들어오는 간판 몇 개로 눈을 돌렸다. 눈에 들어와 박히는 간판은 없었다. 눈에 익지 않은 글자들. 모국어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곳은 내 존재를 설명해줄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아무리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려봐야 내가 누구인지 알 만한 단서는 나오지 않을 거라는 의미였다.
 그럼, 지금의 나를 서술하고 있는 이 언어는 뭐지? 이건 어떤 사람들이 쓰던 말일까?
 달려갔다. 딱 세번째 계단에 서 있던 순간에 느꼈던 관성만큼의 빠르기였다. 모두가 돌아볼 정도는 아니지만 광장 구석까지 발소리가 메아리칠 정도는 되는 속도. 도망치는 속도는 아닌 것 같았다. 누군가를 멀리서 뒤쫓고 있었던 듯했다. 모퉁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그 사람이 모습을 감춘 뒤에야 다음 모퉁이로 재빨리 달려가 다시 그 사람이 향하는 방향을 확인하는 식의, 추적. 그러니까 내가 멈춰 서야 할 곳은 바로 저 앞에 있는 모퉁이였다.
 그곳에 다다랐다. 광장 한쪽 구석, 또다른 골목으로 이어지는 경계지점. 잠깐 숨을 고른 다음, 고개를 내밀어 골목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좁고 긴 골목. 삼층 높이의 건물들이 골목길을 양옆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늘진 한쪽 벽면이, 볕이 드는 다른 쪽 면과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 길을 지나 걸어오는 사람들. 그리고 서서히 멀어져가는 뒷모습들.
 그중 어떤 사람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좌우로 찰랑거리는, 뒤로 묶은 검은 머리.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밝은 회색 니트에 그보다 좀 짧은 자주색 외투. 유자색 목도리. 외투로 덮어도 가려지지 않는 몸의 생김새와 움직임. 도드라진 어깨에, 눈에 익은 각도로 구부러진 팔꿈치. 거기에 걸려 있는 가방. 어디로 향하는지 방향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시원시원하고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확신이 들었다.
 저 사람을 알고 있다!
 
 뒤를 밟았다. 그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자 그 길을 따라 세계가 펼쳐졌다.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세계. 골목을 지나면 또 골목. 조그만 광장. 골목보다 조금 좁은 일방통행 도로. 울퉁불퉁한 돌바닥 위, 돌돌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차들. 다시 골목.
 그 길 끝에서 밝은 빛줄기가 퍼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이, 그 여자가, 그 빛줄기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골목 끝에 다다른 순간.(,) 바다가 나왔다. 잔잔한 바다. 눈이 부셨다. 멀리 방파제가 보였다. 방파제 안에는 돛을 접은 요트들이 잔뜩 들어차 있었다. 길옆에 바짝 붙어있는 게 아니라 주차장처럼 방파제 안 넓은 공간 전체에 늘어서 있는 배들.
 주차장이라고?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지 않은 개념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주차장이라는 말. 내가 속한 세계에서 가져온 기억이겠지. 그렇게 하나하나 세계가 떠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 여자를 돌아보았다. 그 여자가 향하는 곳. 해변을 따라 쭉 늘어서 있는 노천카페였다. 노천카페와 바다 사이에는 조금 전에 지나온 광장보다도 오히려 폭이 넓어 보이는 인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 사이로 나 있는 좁은 도로. 길을 건너려는데 차 한 대가 지나갔다. 차창에 내가 비쳤다. 내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도. 내 얼굴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서 누가 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차가 지나갈 때는 오른손을 들어 턱을 매만졌다. 나라는 표지였다.
 저게 나군. 동양인이었어.
 동양인. 새로운 개념이 떠올랐다. 동양이라는 세계. 이곳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상의 반쪽. 세계의 절반이 만들어졌다. 나는 거기에 속해 있었겠지.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 여자의 위치를 곁눈질로 확인했다. 계단을 내려온 이후, 처음으로 그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얼굴. 눈코입 하나하나가 전부 획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종이에 힘 있는 필치로 그려낸 선명한 획. 그 획들이 모여 만들어낸 그 여자의 얼굴. 표정이 너무나도 선명해 보였다. 시선 하나하나, 눈썹이 움직이는 모양 하나하나, 입술을 비죽거리는 작은 동작 하나까지. 상형문자처럼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는 표정.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저 여자도 나와 같은 인종이겠군. 동양인. 아니, 어쩌면 좀더 가까운.
 그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은경씨.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은경이. 그렇게도 부른 것 같았다. 동경하던 이름,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친근하게 부르던 이름. 혀에 남은 감각을 떠올렸다. 아니, 저절로 떠올랐다. 입속으로 그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에.
 은경이.
 그 이름 주위에 얼기설기 얽혀 있는, 정확한 명칭을 OK 알 수 없는 소중한 감각들.
 그 낯익은 감각을 따라 그 사람의 세계가 떠올랐다. 그 사람이 사는 방. 모서리가 둥근 문. 요란한 잠금장치. 방문 밖에 나 있는 좁은 통로. 골목이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좁은 길. 그 길 끝에 나 있는 계단. 그리고 또 통로. 통로 옆에 늘어서 있는, 모서리가 둥근 문들. 이따금씩 흔들리는 바닥.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출입 통제구역. 격납고. 격납고 위 활주로. 정찰기. 카메라. 항공모함. 무인정찰기. 초고고도 요격미사일. 위성사진 분석. 실험용 요격미사일들의 궤적지문. 기종별 궤적분석 데이터. 비밀열람절차. 전시 비밀반출훈련. 그 사람이 일하는 곳. 그 사람이 사는 방. 그 사람이 속한 세계. 그리고 연합해군 정보분석요원, 김은경!
 어디와 어디가 연합한 거였더라.
 항공모함이 정박해 있는 항구와, 뭍으로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 여자도 그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렇게 그 여자의 세계가 떠올랐다. 완전히 똑같은 세계는 아니겠지만, 내 세계와 맞닿아 있는 세계이기도 했다. 그런 그 여자의 세계를 따라 내 세계가 만들어졌다. 무인정찰기가 날아다니는 세계. 초음속으로 날아가는 미사일을 요격하는 미사일과, 그 미사일들이 날아가는 궤적을 모아놓은 자료가 제조사별로 차곡차곡 쌓여 있는 세계.
 곁눈질로 위를 확인했다. 뭔가가 보였다. 검은 점 같은 것이 공중을 맴돌고 있었다. 저런 궤적이면 정찰기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내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훈련을 받았다. 무인정찰기를 알아보는 훈련을. 그게 내 세계였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행하는 법을 알고 있고, 아무도 눈치 못 채게 곁눈질로 사람의 표정을 살필 줄도 알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 자세한 건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제 뭘 해야 할까. 저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네번째 칸 이전의 기억을 갖고 있던 나는, 뭐하려고 저 여자를 미행한 걸까. 그냥 이렇게 감시만 하고 있으면 되는 건가, 아니면 보호해야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혹시 납치? 아니면 암살?
 세번째 칸에 멈춰 선 순간이 떠올랐다. 내 몸에 남아 있던 관성. 두근거리던 심장. 그건 살의가 아니었다. 좀더 친숙하고 복잡한 감정이었다.
 고민 같은 거 길어져봐야 도움될 거 없어. 다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번에도 역시 내 목소리일지도 몰랐다. 고민을 접고 주위를 살폈다. 주어진 정보만 놓고 생각했을 때, 지금 당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무인정찰기. 그리고 감시.
 그 여자의 표정을 읽었다. 초조함. 기다림. 상형문자처럼 그런 글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걸 보니,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만남을 감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 말고도 여럿이었다. 누구를 만나려는 걸까. 저 가방 안에는 뭐가 들었을까.
 그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가정하고 주위를 살폈다. 누군가 그 여자를 노리고 있다면? 사람이 많은 곳이니 당분간 납치는 어려울 것 같았다. 저격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거는 없었다. 직감이었다. 그 여자가 앉아 있는 곳 뒤쪽, 길가 나무에도 시야가 가려지지 않는 건물 세 채가 보였다.
 하지만 저건 너무 가깝지. 좀더 먼 쪽으로 눈을 돌렸다. 사각인 듯하지만 잘만 하면 저격 정도는 가능할 것 같은 육층짜리 건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때, 별로 특이할 것 없는 택시 한 대가 나타나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이는 남자 하나를 건물 앞에 내려놓고는 왔던 길로 돌아갔다. 평범한 등장. 하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특이한 타이밍. 무인정찰기가 위치를 확인해줬으니, 공격조가 배치된다면 딱 그때쯤일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무인정찰기의 시야에 닿지 않을 만한 곳을 통해. 건물 입구에 다다랐다. 문을 열었다. 크고 묵직한 문이었다. 문을 닫고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희미한 조명 아래 계단이 보였다. 위로 통하는 계단이었다.
 계단을 올라갔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로. 이제 뭘 하면 되지? 방금 들어간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찾아낸 뒤에는 어떻게 하지? 상대편 요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그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을까? 그러나 고민을 길게 이어가지는 않았다. 고민이 길어져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일을 하도록 훈련받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오층에 다다랐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발걸음을 멈췄다. 오층 복도로 들어섰다. 어두운 복도 안. 어느 방 문 앞에 다시 멈춰 섰다. 그리고 벽에 바짝 붙어섰다.
 문이 열리고,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칼이 들려 있었다.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나를 향해 날아오는 손. 칼날이 벽에 꽂혔다. 얼굴 바로 옆. 한 뼘 길이의 칼날. 거칠어 보이는 손.
 그래, 내가 찾아내기 전에 저쪽에서 먼저 나를 찾아오게 돼 있었군. 내가 이 건물에 다가서는 순간부터 기다리고 있었겠지. 그런데 나는, 정말로 싸우는 법을 알고 있는 걸까. 그냥 정보분석요원 같은 거였으면 어쩌지? 아니면 그냥 좀 위험한 일을 하는 사설탐정이었거나.
 문이 활짝 열리고, 사람이 튀어나왔다. 평범한 인상. 그쪽이야말로 현장요원이 아니라 고등학교 화학선생님 같은 인상이었다. 어느 나라 사람일까. 동양인은 아니었다. 사설탐정, 화학선생님, 동양인. 직접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 내가 속한 세계에서 가져온 개념들. 그것과 연결된 다른 개념 몇 개. 수학선생님, 교장선생님, 그리고, 살기.
 혼란스러운 기억을 뚫고 칼을 든 그의 손이 내 목을 향해 날아왔다. 허리를 틀어 칼날을 피했다. 다시 날아오는 칼날. 이번에는 발이 먼저 움직였다. 가까이. 칼을 휘두르는 팔의 반경 안으로. 허리를 숙여 공격을 피해 넘기자 목표를 잃은 칼날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 손목을 향해 이번에는 내 손이 먼저 뻗어나갔다. 강하게 때리면 칼을 놓칠 만한 곳. 거기를 노려 친다. 강하고 정확하게. 힘없이 떨어지는 칼날.
 상대보다 내 손이 더 빠르다. 게다가 눈은 손보다도 더 빠르다.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다. 거의 사무적인 절차라는 느낌마저 든다. 발길질을 막아내고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날아오는 주먹을 손바닥으로 쳐낸 다음 다시 빠른 발걸음으로 세 걸음 다가선다. 뻗어나가는 손. 상대의 목을 친다. 그리고 귀를 기울인다. 흡, 하는 소리가 들린다. 숨이 막히는 소리. 작은 걸음으로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큰 동작으로 날아오는 상대의 공격을 막아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일곱번째 공격부터 속도가 느려진다. 호흡이 없는 동작. 틈이 보인다. 다음 공격이 빗나가는 순간 거리를 좁힌다. 팔꿈치를 들어올려 상대의 머리를 후려친다. 힘없이 쓰러지는 몸. 살기가 사라진다. 쓰러진 그의 발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방 안으로 들어섰다. 창문 옆에 놓여 있는 가방. 조립하다 만 저격총. 창밖에 그 여자가 앉아 있는 곳이 보였다. 그 여자의 얼굴에 상형문자 몇 개가 떠올랐다. 호기심. 여유. 그런 표정들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걸 보니 당분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그 여자가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채기라도 한 듯. 창문 옆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이쪽을 본 걸까? 그냥 스쳐지나가는 눈길이었을까? 나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 여자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전에 본 적은 없지만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깊고 짙은 표정. 그리움이었다.
 그리움? 이 상황에?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 저격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까지는? 그래, 미끼로 이용되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렇다면 표적은 저 여자가 아니라 저 여자와 만날 사람. 누가 누구 편이지? 누구의 미끼가 된 거야?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다녀간 택시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건장한 남자 두 명이 택시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지원병력인 듯했다. 자리를 피해야 하나, 제압해야 하나. 한둘을 제압한다고 끝날 일은 아니겠지만, 일단은 내 선에서 처리를 한 다음 시간을 버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네번째 계단 이전의 나라면 반드시 그렇게 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이라고 다 옳은 판단이었을까?
 장갑을 끼고 창문 앞에 놓여 있는 총을 조립했다. 한 명은 일층을 지키고 한 명은 계단을 따라 올라오겠지.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손을 끌어다 총을 쥐여주었다. 방아쇠울에 그 사람의 손가락을 찔러넣은 다음 팔을 질질 끌어 계단 쪽으로 가져갔다. 사층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느릿느릿, 조심조심, 잔뜩 긴장한 듯한 발소리였다.
 사층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육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그 사이 층계참의 난간 사이에 총구를 찔러넣고, 쓰러진 사람의 손가락을 눌러 방아쇠를 당겼다. 소리없이 총알이 발사됐다. 두 발이었다. 뭔가가 툭 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총을 그대로 버려둔 채 난간에 의지해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을 뒤로하고, 삼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접어들었다. 밑에서 올라오는 발소리. 쓰러져 있는 쪽이 선임자인 듯, 아까보다 훨씬 조심성 없고 다급해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마음이 놓였다. 생각보다 일이 쉬울 것 같았다.
 갑자기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리고 상대와 마주쳤다. 당황한 듯한 표정. 몸을 돌려 계단 위쪽으로 올라갔다. 그가 황급히 내 뒤를 쫓아 계단을 뛰어올라왔다. 나는 딱 두 걸음을 더 뛰어올라간 다음, 난간을 짚고 재빨리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 반동을 그대로 이용해서, 난간을 뛰어넘어 곧장 아래쪽 계단으로 뛰어내렸다. 다음 순간,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그의 얼굴을 향해 내 왼쪽 무릎이 매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그의 손에 든 총이 햇빛에 번쩍였다. 소리없이. 고요하게.
 어디서 이런 걸 배웠을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머리로 생각하고 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세계에 속한 내가, 그 세계로부터 받은 육신과 에너지로 이루어진 내 몸이, 내가 미처 판단하기도 전에 스스로 알아서 움직였다. 그게 바로 나였다.
 나는 누구지? 아니, 정확히 어디까지가 나지?
 편안한 호흡. 마음의 여유. 놀라움과 함께, 잠시 미뤄둔 궁금증이 다시 떠올랐다. 네번째 계단 이전의 기억들. 그건 언제까지나 공백으로 남겨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 사라진 기억을 되돌려줄 유일한 단서.
 
 계단을 내려와 건물 문을 나섰다. 믿기지 않을 만큼 밝은 햇빛.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로운 광경. 달랑 문 하나를 경계로 나눠진, 일상과 전쟁터 사이의 잔인한 대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길을 걸었다. 그 여자가 내 쪽을 잠깐 바라보더니 곧바로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쪽을 보고 있지 않았지만, 곁눈질만으로도 그 여자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획 같은 눈길, 획 같은 입술. 정말이지 표정을 전혀 숨기지 못하는 얼굴. 새삼,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느낌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저 사람,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모른 척하는 거지? 같은 편인가? 아니면, 둘 사이에 약속된 규칙? 그렇다면 그 여자를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춰야 했던 건 그 여자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 때문이었다. 내가 그 여자를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편이었군. 역시 저 여자가 미끼인 임무였어. 하지만 나는 임무 내용을 전혀 모르는데. 이대로도 괜찮을까. 저쪽에서 자꾸 나를 쳐다보는 건, 내가 이미 뭔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내 상태를 알려야 하지 않나? 그런데 누구에게? 내가 아는 건 저 사람밖에 없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임무 수행중인 동료에게 다가가, 우리 두 사람 모두의 정체를 노출시킬 만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여자와 내가 같은 편이 아닐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무언가 훨씬 더 복잡한 사연이 있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망설임을 모르는 내 몸이, 곧장 그 여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었을까. 삶이라는 게 이렇게 단순해도 되는 건가. 그 여자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황한 얼굴. 제발 그러지 말라는 표정. 아, 역시 이게 아닌가!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 여자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를 들은 듯한 동작. 나 역시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날의 표적. 번듯하게 생긴 중년 남자. 나는 세번째 계단을 내려온 이후 처음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저건 뭐지? 저 이상한 분위기는! 저런 임무였던가. 미끼라는 건. 악수 대신 긴 입맞춤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그런 임무. 그리고 저 야릇한 광경.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시선은 바다 쪽을 향한 채로. 하지만 흘끗흘끗 그쪽을 돌아볼 때마다 몇 번이고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곤란한 얼굴, 난처한 얼굴, 원망 섞인 얼굴. 그러다가도 이내 그 남자를 바라보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웃고 있는, 얼굴.
 거짓말!
 세상을 움직이는 정교한 기계장치들 사이에서 어느 날 갑자기 툭 빠져나온 나사처럼, 이 모든 일의 맥락을 알지 못하는, 세번째 계단 아래에 선 내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누구에게? 또다른 나에게? 그 자아마저도 내가 아니란 말인가? 그럼 그 광경을 내 자신에게 삼인칭으로 서술하고 있는 나는, 또 세상 어디쯤에 자리를 잡고 있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통증. 저 여자는 나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은경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조건반사처럼 혀끝을 맴도는 아련한 느낌. 어떤 일인가가 무수히 반복해서 일어난 뒤에나 생길 법한, 부드러운 퇴적층 같은 몸의 기억.
 내 임무가 뭘까? 지금 상황을 어디까지 알려야 하지? 정확히 뭘 조심해야 할까? 기억을 매개로, 세상으로부터 나에게 직접 주입되었을, 세상이 부여한 복잡한 역할들. 무슨 일을 하면 안 되고 무슨 일을 꼭 해야 되는지를 꼼꼼하게 적어놓은, 아주아주 세밀한 눈금으로 측정된 나의 위치.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의 아주 정확한 좌표. 그 좌표계를 몽땅 잃어버린 나. 그런 내 몸에 남아 있는 세상의 관성. 두근거리는 심장. 그리고 이 서술자.
 나는 그 여자에게 의존해야 했다. 확신을 갖고 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좌표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지형지물. 그런데 그 사람은 낯선 남자에게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네번째 계단 위에 선 나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참아 넘길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세번째 계단 아래에 선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 미끼. 작전. 임무. 연기. 역할. 사실 그 모든 게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갑자기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 맨 앞줄 아무 빈자리에나 털썩 주저앉아버린 주연배우처럼. 그리고 아직 무대 위에 있는 또다른 주연배우를 극중 인물이 아니라, 출연료를 받고 발성연습을 하고 분장을 한 다음 떨리는 표정을 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무대 위에 설 수 있었던 그냥 좀 잘 아는 신인 여배우 보듯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는, 어딘가 낯설고 어긋난 시점.
 문득.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남자의 손이 그 여자의 얼굴에 닿을 때마다. 그 여자의 목이 자신도 모르게 흠칫흠칫 놀라며 움츠러드는 걸 볼 때마다. 부러뜨리고 싶은 손목. 뭉개버리고 싶은 그 남자의 얼굴. 칼을 들고 덤벼들던 저격수를 대할 때처럼 저절로 반응하는 내 몸의 감각기억들. 그 기억들이 모두 그 여자를 향하고 있었다. 어째서 너에게 그런 일을 맡긴 걸까? 그렇게 위험하고 지저분한 일을.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제발 그러지 마.
 그 여자가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에 가려 언뜻언뜻 비치는 얼굴. 그 여자의 두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쩌라는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리를 맴돌았다. 아무 사이도 아닌 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혹은 누가 볼까봐. 그러나 시선을 뗄 수는 없었다. 눈길이 계속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보란 듯이 그 남자의 목을 감싸안았다. 입술이 닿았고, 몸이 닿았다. 그 자세 그대로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어때? 이제 됐어? 그러니까 그만하라고.
 그 여자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새겨졌다. 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려는 걸까, 저 여자는. 우리 둘 사이에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두 가지 큰 사건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수천수백 가지 작은 일들이 쌓여서 만든 퇴적층. 그 속에 묻혀 있는 화석 같은 마음. 잃어버린 기억. 그 기억을 찾기 위해, 결국은 내가 먼저 말을 건네야 할, 소중한 사람. 은경이.
 이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이야.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내 표정도 저 여자의 얼굴에 떠오르는 글자들처럼 선명하게 보일까.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은경이에게 나는, 네번째 계단 위쪽의 나는, 그렇게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은경이에게 말해주지 않은 것. 은경이가 지금 하는 일이 그렇게 위험한 일인 줄을 모르고 있다면, 그건 오로지 내가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그런 것까지 일일이 말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쁜 놈일지도 모른다. 저 여자와 같은 편인 게 확실하다 해도, 우리 둘 다 나쁜 편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무기밀매. 기밀유출. 혹은, 무기밀매를 가장한 함정수사. 어느 쪽이든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정확히 어떤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은경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위험한 일 아닌가. 만약 우리가 어떤 큰 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내가 기획자고 은경이가 연기자. 거기에 두세 명의 브로커만으로 이루어진 작은 범죄조직이라면.
 알려야 돼. 이건 외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내가 모른 척한다 해도, 나나 저 여자의 시야에 닿지 않는 곳, 세상 저편에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몰라. 이미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 한가한 광경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잖아. 내가 모르는 세계가 지금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
 무인정찰기가 세 대. 아까보다 두 대가 늘어 있었다. 세계가 점점 더 좁혀들어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정상적인 움직임일까, 아니면 돌발변수일까.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은 건물 아래로 몸을 숨겨 무인정찰기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저격수가 배치됐던 건물을 살폈지만, 새로 지원 병력이 온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오는 사이, 그 남자가, 표적이, 전화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방금 전에 확인해 둔, 위험해 보이는 지점 몇 군데. 수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전화기를 들고 테이블 주위를 어슬렁거리더니 한 걸음씩 슬며시 그 여자가 앉아 있는 곳 뒤편으로 물러났다. 딱딱한 표정. 일 때문일까, 아니면 집에서 걸려온 전화? 후자가 더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은경이와의 거리. 그 말투. 손으로 입 주위를 가리는 모양새.
 그런데 그때였다. 남자가 완전히 등을 돌리고 선 순간, 그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다가왔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그러나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 은경이가 말했다.
 “이러지 마. 자꾸 내 주위에 나타나면 안 돼.”
 익숙한 목소리였다. 내 머릿속, 그 여자의 목소리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기억들이 하나둘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소중한 기억들. 그런 느낌들!
 하지만 감상은 뒤로 미뤄야 했다. 나는 은경이의 눈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기억을 잃었어. 정말이야. 조금 전부터 기억이 하나도 없어. 내가 누군지, 그쪽이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러니까……”
 “알아.”
 “응?”
 “기억을 잃었다는 거, 알아. 아무튼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내 주위에 있지 마. 너 이러면 안 돼.”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는 은경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리를 꼬고 바다 쪽을 바라보는 그 여자의 얼굴.
 알아? 뭘?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그건 어떻게?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은경이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쓰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까딱까딱.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누구의 시야에도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저건 연기일까, 진심일까.
 다시 갈피를 잃었다. 내가 틀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확신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상이, 전혀 확실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말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다시 그 사람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라고. 사라져. 제발 그러고 있지 말고.
 저건 또 무슨 의미일까. 사라지라니. 주위에 있지 말라니. 잠복하라는 걸까, 아니면 가버리라는 걸까? 하지만 어디로? 나한테는 갈 곳이 없는데.
 
 일단은,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어들어갔다. 큰길에서 벗어난 으슥한 곳.
 전혀 안전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영역에 발을 들이자마자 어디선가 주먹이 날아들었다. 고개를 숙여 주먹을 피했다. 다시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주먹, 발, 다시 주먹. 훈련된 솜씨. 계획된 순서. 군더더기 없는 날카로운 동작.
 그래도 내 손이 더 빨라! 상대보다 한번 더 움직이는 손. 날아오는 주먹을 손으로 쳐내면서 그 손으로 곧바로 인중을 노린다. 팔을 휘두르기에는 짧은 거리지만, 발을 재빨리 움직여 무게를 싣는다. 그 공격에 상대의 동작이 끊어진 순간, 리듬을 놓치지 않고 배와 목을 노린다. 셋에 하나는, 막아서는 손보다 빨리 노린 곳에 가 닿는다. 털썩 쓰러지는 육중한 몸체. 이겼다. 하지만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왔다. 좁혀들어오는 세계. 벌써 바로 근처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물론 세계가 직접 온 것은 아니었다. 그 세계를 대신해서 온 사람들. 어느 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를 노렸다면 내가 보호해야 할 사람도 노릴 게 분명한, 잘 훈련받은 현장요원들. 그 사람들이, 저 한가해 보이는 무대 바로 뒤쪽, 조명이 들지 않는 어두운 대기석에 다음 막을 기다리며 잠복해 있었다.
 도대체 몇이나 있는 거야?
 그 사람들을 다 막아설 수는 없었다. 이제 한두 명쯤은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었다. 서른 명일지 백 명일지 알 수 없는 조직 규모의 병력을 맨몸뚱이만으로 막아낼 수는 없었다.
 알려야 했다. 은경이에게. 자리를 뜨는 게 더 안전해 보였다.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을까. 확신은 없었지만, 네번째 계단 위의 나라면 어떤 방법이든 마련해뒀을 것 같았다. 만약 정말로 그런 게 있다면, 때를 놓치기 전에 그 방법을 따라야 했다. 늦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은경이에게 그 절차대로 하라고 일러줘야만 한다.
 큰길로 나갔다. 수상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가 어떻게 수상한 걸까. 잠깐 사이에 사람이 많아진 것? 혼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늘어난 것? 건물마다 한두 명씩,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거슬렸다. 이상한 징후들. 불길한 예감. 멀리서 검은 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 빗방울 몇 개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다시 은경이가 있는 곳. 바람에 날리는 은경이의 머리카락.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 불안한 전조. 하지만 사실 그렇게 큰일은 아닌. 그래봤자 그냥 비 내리는 겨울날. 은경이에게 다가간다. 그쪽으로 걸어간다.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내 쪽을 빤히 쳐다보는 은경이. 아까와는 다른 표정이 얼굴에 떠오른다. 저격수가 숨어들어간 오층 창문 위에서 내려다본 얼굴. 그때 그 얼굴에 새겨져 있던 상형문자 같은 표정. 그리움. 연민. 동정.
 그 표정은, 내가 불쌍하다는 거야? 왜? 기억을 잃어서? 하지만 다 알고 있다며.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말해주기 전부터. 뭔가 이유를 알고 있을 거 아냐?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당연히 해결할 방법도 알고 있을 거고…… 아니야?
 무인정찰기가 다섯 대로 늘었다. 나는 판을 깨기로 마음먹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누구를 미끼로 어떤 임무를 수행하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 임무를 차단하기 위해 누가 어떤 작전을 꾸미고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 상태 그대로는 조금도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은경이에게 다가가 그 말을 해야 했다. 달아나라고. 상황이 꼬일 대로 꼬인 것 같다고. 그러나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은경이는 또다시 다가오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단호함. 굳은 의지. 그사이에 잠깐씩 떠올랐다 사라지는 또다른 표정들. 절망. 자괴감. 무너져버릴까 하는 마음.
 너한테는 내가 절망이었니?
 은경이는 나를 모른 척했다. 나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모른 척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내 이야기 들어.”
 그래도 은경이는, 아무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 남자와 나란히 길을 걸어갔다. 관객이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지만 태연히 독백장면을 연기하는 연기자처럼. 너는 있어도 없는 거야 하고 말하는 듯한 태도. 그 옆에서 걷고 있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소리가 들리긴 할 텐데.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렇게 말을 거는 상황 자체가 이상한 일일 텐데. 아무래도 은경이가 미리 무언가 이야기를 해둔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이 있으니 신경쓰지 말라고.
 두 사람을 따라갔다. 차 한 대가 나타나 남자를 태워갔다. 은경이는 작별 키스를 하고는 손을 흔들어 그를 보냈다. 나는 작별인사가 끝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은경이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됐지? 이제 가자. 여기 위험해.”
 은경이는 여전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계속해서 귀찮게 말을 거는 상황. 수상한 광경이었겠지만,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관심. 관심은 있지만 대놓고 표현하지 않는 것. 오래전에 도시화가 끝난 곳들을 걸을 때 받곤 하는 느낌. 분명히 보이지만, 없는 걸로 치자. 그래야 공간이 더 넓어 보이니까.
 하지만 우리를 쳐다보는 눈들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었다. 그 남자가 사라진 뒤에도 그가 가버린 방향으로 옮겨가지 않고 여전히 나와 은경이를 쫓고 있는 눈. 콕 집어서 누구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여러 개의 강렬한 시선.
 “피해야 돼. 어서.”
 “어디로?”
 “잘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내가 이야기해둔 거 없어?”
 “없다니까. 너 자꾸 이러면 안 돼. 나 힘들었단 말이야.”
 “미안해.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과할게. 그래도 지금은 이야기해야겠어. 그러니까 날 피하지 마.”
 “무슨 이야기? 주위에 사람들이 깔려 있다고? 그 사람들이 다 나를 노리고 있고, 포위망을 뚫을 방법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이야기?”
 은경이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알고 있었어?”
 “알고 있다고! 다 안다고! 그러니까 나한테 이러지 마.”
 알고 있다고? 그럼 어쩔 셈이지? 이게 아닌가? 내가 또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어쩌려고?”
 내가 물었다. 조심스럽게.
 “뭘 어째? 아무것도 안 해. 그냥 숙소로 돌아갈 거야.”
 “뭐?”
 은경이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표정을 읽었다. 결심. 이 짓을 또 해야 되나 하는 생각. 그래, 한번 더 싸우자. 어디 하는 데까지 해보자. 그런 표정. 하지만 나는 싸우고 싶지 않은데.
 은경이가 말했다.
 “어디까지 알아냈어?”
 “응?”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냐고? 초고고도 요격미사일 기종별 궤적지문 분석자료 이야기는 생각이 나?”
 “그래.”
 “함정수사는? 기밀유출 첩보가 있어서 연합해군에서 함정수사 했던 것도 알아? 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그래. 미끼 역할일 거라고 생각했어. 내 생각이 맞는지 확신은 없었지만.”
 “좋아. 맞아. 그럼 네가 나한테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응. 위험하다는 거.”
 “역으로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었고, 실제로 정보가 새나가면서 무기상들이 오히려 우리를 포위했어. 기억나?”
 저 사람들은, 무기상이었구나. 그럼 위험할 텐데. 많이. 하지만 어떻게 된 거지? 다 알고 있었다니. 그것까지 다. 내가 모르는 것까지 전부. 어떻게 된 걸까. 혹시 은경이가 이중첩자?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건 너무 이상하잖아.
 “그다음은?”
 은경이가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다음이라니. 그런 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도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됐냐고!”
 “몰라.”
 “알아! 잘 생각해봐. 넌 알고 있어. 기억을 더듬어봐.”
 “무슨 기억을 더듬어? 그럴 시간이 없어.”
 “많아. 시간.”
 “어째서?”
 혼란스러웠다. 나는 입을 꼭 다물고 은경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층 다급해졌다. 그런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은경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만이었어. 이런 지중해 서쪽이 아니라.”
 “응?”
 “그 작전이 펼쳐진 곳. 무기상을 유인했고, 걸려들었다고 생각했지. 네가 나를 뒤에서 엄호했고,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였어. 나를 지켜주고 있을 거라고. 거꾸로 포위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어.”
 “그건, 내가 말해주지 않아서야?”
 “그래. 그다지 위험한 일은 아닐 거라고 했어. 그런데 그렇지 않았지. 제3의 조직이 우리 거래장소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정확한 첩보는 없었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 너는. 나는 몰랐지만.”
 “그래서 저격수가 있었구나.”
 “그래. 저격수. 육층짜리 건물 오층 창가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었어. 가방에, 진짜 데이터베이스에서 가져온 샘플이 들어 있었으니까. 기억나? 우리 거래상대가 가짜 자료에 속아 넘어갈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진짜를 가지고 나가기로 했던 거.”
 다시 어렴풋이, 기억이 떠올랐다. 은경이의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그래, 기억나. 그리고 우리 요원은 최소한으로 배치하기로 했고.”
 “맞아. 그쪽은 내부자일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어차피 조직을 움직일 수도 없었지. 무인정찰기 몇 대만 보내기로 했어. 그러다 그 무인정찰기가 저격수를 발견했고. 기억나? 그 건물 오층 창문에서. 진압조를 보냈는데, 시간이 부족했어. 가까이에 배치된 요원이 거의 없었으니까. 사실 너밖에 없었지.”
 “그래. 그래서 내가 아까 그 건물로 올라가서……”
 “아니야, 그런 거!”
 “응?”
 “여기 알리칸테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너는 알리칸테에 와본 적도 없어. 내가 말하는 건 대만에서 있었던 일이야.”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짓으로,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저격수를 잡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결국 총이 발사가 됐지. 두 발. 표적은 나와 접선중인 무기상이었어. 이마에 한 발, 가슴에 한 발. 거래선을 노출당할까봐 제거한 거겠지. 그리고……”
 은경이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호흡이 한층 격해진 것 같았다.
 “한 발이 더 날아왔어. 바로 이어서 날아오지 않은 걸 보면, 처음에는 쏠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알 것 같았다. 그 짧은 간격. 보복을 하기로 한 거겠지. 일차 목표를 제거하고 나서, 누군가 배후에 있는 자가 보복을 지시했을 것이다. 작전과는 상관없는 감정적인 판단. 맨얼굴을 드러낸 진짜 폭력. 그리고 나는 그 간격이 낯설지가 않았다. 아니, 아주 익숙했다. 나도 그런 지시를 받아본 적이 있었겠지. 그것도 많이. 아마도 여러 번.
 은경이가 말했다.
 “그렇게 세번째 총알이 날아왔어……”
 그리고 그 순간, 은경이의 얼굴에 다시 그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움. 그리고 미안한 마음. 원망. 후회. 정체를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이야기. 할 수만 있다면 다시는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기억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말을 잇지 못하는 은경이를 대신해서 내가 말했다.
 “내가 맞았구나.”
 “그래. 몸으로 나를 감싸다가.”
 “그다음은? 그다음은 전혀 기억이 안 나.”
 “기억이 안 나야지. 넌 그때 곧바로……”
 “즉사했구나.”
 은경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래. 즉사. 그 말. 아직도 그 부분은 힘들어. 나한테는. 바로 옆에서 봤으니까. 내가 아는 그 얼굴이 맞는데, 뭔가가 완전히 빠져나간 얼굴이었거든. 그 뭔가가.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 뭔가가 바로 너였다고. 직업이든, 네가 사는 집이든, 네가 좋아하는 것들, 유머감각, 나한테 들려주곤 했던 재미있는 생각들, 그런 게 전부 소용이 없더라고. 딱 그거 하나가 사라져버렸으니까. 그게 너였는데. 영원히 사라진 거지. 영원이라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내가 영원을 살아보기나 하겠냐고. 근데 그 짧은 순간에 그 영원이 뭔지 알아버렸어. 너를 되돌릴 수 없는 시간.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 그 불가능이 지배하는 영역의 최대 범위가, 그 불가능의 이름이 바로 영원이라는 걸.”
 불가능. 그리고 나. 나는 불가능한 사람이었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나는…… 내가 물었다.
 “그럼 나는……, 누구야? 나는 유령이야?”
 은경이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너는 나야.”
 “내가 너라고?”
 “응. 그 일이 있고 나서 이 년 뒤부터 네가 계속 나타났어.”
 “왜?”
 “그리웠으니까. 내가 너를 못 잊고 내내 그리워하고 있었으니까. 알아? 우리 아주 오랫동안 친구였어. 그리고 결국에는 연인이 됐고. 좋았는데. 사이도 좋고, 그냥 같이 앉아서 이야기만 나눠도 재미있고 행복하고. 나는 그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진짜로 영원한 건 그쪽이 아니었어. 아, 길바닥에서 이게 무슨 짓이람.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잖아. 너 때문이야. 너만 나타나면 이렇게 돼.”
 “울지 마.”
 그 말 말고는 해줄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은경이가 눈물을 멈출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던 몇 분. 한참 뒤에 은경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좀 이러다 말겠지. 한두 번도 아닌데. 넌 내 환각이야. 나도 알고 있어. 처음 봤을 때도 알았는데, 알면서도 반가웠어. 너는 정말 진짜 너처럼 말했거든. 그래서 좋았어. 행복하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어. 그대로 계속됐으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으면. 그래서 어땠는지 아니? 네 말대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적도 있었어. 넌 나타날 때마다 늘 지금 같은 이야기를 하거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어줬고. 물론 포위망 같은 건 없었어. 너한테만 보이는 거고, 가끔은 내 눈에도 보이지만, 그게 진짜가 아니라는 건 알아. 그래도 너랑 같이 다니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아서, 그렇게 했어. 잠적을 했고, 두 달 동안 너랑 지냈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두 달이야, 두 달. 솔직히 행복했어. 그런데 망가졌어. 그런 식의 행복이 다 그런 것처럼. 알지? 너무너무 좋지만 언젠가 사라질 게 뻔한 그런 행복. 그 행복을 갉아먹고 살았어. 그래서 모든 걸 잃었지. 아깝지는 않았는데, 그게 영원할 수는 없었거든. 그래서 어느 날 현실로 돌아왔어. 아무것도 없는 현실로. 내가 돌보지 않은 동안 모든 게 피폐해져버린 내 세계로.”
 무슨 말이든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말문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그럴 수가. 어떻게 그럴 수가. 그랬구나. 얼마나 힘들었을까.
 은경이가 다시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나을 수 있댔어. 사실 완전히 나은 줄 알았지. 지난 구 개월간 너를 한 번도 못 봤거든. 병원에도 다니고 약도 꾸준히 먹고. 겨우 이겨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내가 나타났을 때 그렇게……”
 “그래,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이번에 또 그러면 정말로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고. 한순간이나마 그냥 무너져버릴까 생각도 했고. 미안해. 하지만, 그래. 나, 힘들게 싸우고 있어. 너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절망했어. 미안. 어쩔 수 없었어.”
 빗방울이 떨어졌다. 은경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으로 한 걸음만 비켜서봐. 네가 서 있던 자리에 빗방울이 떨어져 있지? 너는 그래. 내가 아니면 아무도 못 봐. 그러니까 너랑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면 안 돼. 넌 그냥 나니까. 언제까지나 나하고만 이야기하고 살 수는 없잖아. 이제 좋아졌다고 생각했고, 완전히 다 나았다고 믿었어.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고, 요즘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 좋은 사람이야. 그 사람. 여기 온 것도 사실 그 사람 만나러 온 거야. 잠깐 출장을 와 있거든.”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잔뜩 덮고 있었다. 내 표정이 저럴까.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나를 향해 날아오던 빗방울들이, 아무런 감촉도 남기지 않고 나를 그냥 지나쳐갔다. 차갑지도 않은 겨울비. 그런 건 별로 쓸쓸하지도 않아.
 뒷걸음질을 쳤다. 두 걸음이었다. 은경이가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은경이의 얼굴에 글자 하나가 상형문자처럼 떠올랐다.
 미안해. 너도 겁나고 당황스럽지?
 나도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내가 더 미안해. 내가 너에게 절망일 줄은 몰랐어.
 “그러니까 이제 사라져줬으면 좋겠어. 영원히.”
 차가운 목소리로, 은경이가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해변이 끝날 때쯤 주택가가 나왔다. 문이 열려 있는 조그만 연습실. 나이 어린 남녀 한 쌍이 손을 마주 잡고 서서 춤곡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음악이 시작되기 전에 다시 서둘러 발걸음을 뗐다.
 언덕을 끼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올라갔다. 요새로 올라가는 입구가 보였다. 수백 년 넘도록 그 자리에 서서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는, 구불구불한 성벽으로 이어진 언덕 위 요새. 꼭 거기로 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꼭 가야만 할 데라는 게 남아 있지 않아서, 그냥 눈에 띄는 곳으로 한없이 걸었을 뿐. 단지 은경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기만 하면 됐다. 그냥 그곳에서 조용히 지워지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사라질 수 있을까. 존재가 그렇게 쉽게 지워지나.
 한참을 걸어 정상에 다다랐다. 동쪽으로 지중해가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해적들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을 요새. 내 눈에만 보이는 무기상 조직원들이, 해적들처럼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며 요새 가까이로 접근해왔다. 그리고 무인정찰기들이 다섯 대. 모두 나를 따라온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저것들까지 다 끌고 올 수 있어서.
 요새 망루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내 종말이 언제인지 알 것 같았다. 은경이가 다시 약을 먹는 때. 약효가 언제쯤 나타나려나. 갑자기 싹 지워지는 건가? 아니면 그전에, 은경이가 마음을 굳게 먹고 내 존재를 지워버리기로 하는 순간 끝이 나는 걸까. 아무튼 둘 중 하나는 끝이겠지.
 수평선 너머에서 큰 배 한 척이 나타났다. 서서히 내 쪽으로 다가오는 배. 항공모함. 은경이의 방이 있던. 그리고 은경이의 연구실이 있던. 어느 나라 영토에도 속해 있지 않아서 비밀스러운 연구를 하기에 딱 좋았다는 그곳. 피식 웃음이 났다. 말도 안 돼. 아무리 환각이라도 저건 좀 심하잖아. 항공모함 갑판에서 비행기들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내 머리 위를 맴도는 전투기들.
 그리고 그때였다.
 촥!
 어디선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하늘 한가운데에 커다란 금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성벽을 올라오던 무기상 조직원들이 모두 고개를 들어 그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뭔가를 하고 있구나. 은경이가.
 프리즘을 통해 보듯, 공간이 이상한 모양으로 일그러져 보였다. 더 먼 데 있어야 할 풍경들이 가까이 다가와 보이고, 가까이에 있던 것들이 먼 데로 옮겨가 있었다. 일그러지는 공간. 세계가 일그러지고 있다. 구겨지는 세계. 쓰다 버린 종잇조각처럼. 절대 곱게 펴서 버리는 일 없이, 항상 찢고 구겨서 아무 데나 내팽개쳤던, 잘못 쓴 메모지처럼. 굳이 남길 필요는 없지만, 또 굳이 남기게 되는, 마음에 안 드는 실패한 이야기라는 의미의 표지들. 꾸깃꾸깃.
 다시 무언가 거대한 것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하늘 전체에 아까보다 더 많은 금이 가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수평선 바로 위에까지, 번개가 친 흔적처럼 작은 금들이 뻗어 있었다.
 사라진다. 저 세계가 다 무너지면 나도 그만 사라져줘야지. 영원히.
 그리고,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네번째 계단 위의 나, 세번째 계단 아래로 달려내려온 나. 그 두 개의 자아 모두를 남 이야기하듯 내내 서술하고 있던 나. 그 절대적이고도 견고했던 존재의 외골격. 그 모든 것들이 다 그 사람의 절망. 또한 그 사람의 길고도 고독한 싸움. 나 때문에 시작된. 하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닌. 절망.
 “안녕. 이번엔 꼭 나아야 돼!”
 무너져가는 세계를 바라보며, 어딘가에 있을 은경이에게 소리쳤다. 나는 너니까, 어디를 보고 소리치든 너에게 닿겠지.
 “그럴게. 고마워.”
 어디선가 메아리처럼 은경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을 일깨우는, 아름다운 목소리.
 “그리고, 사랑해.”
 그래. 알아.
 다시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겨울 하늘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mirror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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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m 12.03.06 22:45 댓글 수정 삭제
    세번째 계단에서 쓰러지셨는데 네번째 계단에서 다시 일어나셔서 재미난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은 두연인의 아름다운 연애 이야기즉 그러니까 대만에서 첩보활동중에 일어나는 두연인의 생사를 넘나드는 험난한 임무수행 속에서 피어나는 러브스토리의 추억을 듣고 싶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열렬히 사랑했는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그녀가 그를 잊지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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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m 12.03.06 22:57 댓글 수정 삭제
    도입부, 라스트 씬 찡했어요. 단편이라 아쉽군요.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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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12.03.09 12:26 댓글 수정 삭제
    세번째 계단에서 쓰러졌다는 말은, 뭔가 망했었다는 말인가요? 털썩.
    두 연인의 아름다운 연애 이야기는, 음... 환경영향평가가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이 글에서 그쪽을 강조해 버리면, 망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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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m 12.03.09 17:43 댓글 수정 삭제
    쓰러졌다는 것은 연인을 대신하여 총을 맞고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저의 표현이었습니다. 소설적장치 훌륭하구요, 흡입력 좋습니다. 다만 길을 잃고 헤메이다, 대면의 순간 . 나는 너야, 임팩트 조금 약했습니다. 독자들이 아그랬었구나의 순간이 한문장인것이 감칠맛은 있는데.... 조미료 팍팍 뿌려줬음합니다. 해소의 순간 의 여운이 짧았습니다. 그리고 조금어려웠습니다. 대중소설의 독자라고 하면 조금 난해한면을 쉽게 읽혀지게 해줬음 감사합니다. 너무 무리한 부탁이겠군요. 독자를 끌어가는 궁금증이 지워지지 않을까. 양날의 칼의 문제가 발생되나요?지적인 게임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감상 할것입니다. 제가 장편대중소설을 주로 읽다보니 단편에 대한 갈증이들군요. 다음번엔 장편도 한번써주시죠. 재미있게 읽는 독자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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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ssud... 12.03.10 00:44 댓글 수정 삭제
    아, 어쩐지 아련한 글이네요. 개인적으로는 '차갑지도 않은 겨울비. 그런 건 별로 쓸쓸하지도 않아'라는 문장이 온도를 가진 메아리처럼 마음 속에 울렸습니다. 자아를 가진 환각이라는 거, 굉장히 쓸쓸할 것 같은데... 오히려 글에는 어슴푸레한 겨울하늘을 바라볼 때 느낄 수 있을법한 온기가 느껴져요. 행복하게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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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12.03.10 08:58 댓글 수정 삭제
    jamm 님, 대중소설의 독자가 하나의 평면에 놓여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눈이 곧 대중의 눈이라는 사람을 다섯 명쯤 알고 있는데 그 사람들끼리도 보는 눈이 서로 달라요. 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게 아니고, 대중이 단일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설명의 수준이나 장르농도 등에서 모든 사람을 타겟으로 할 수는 없고 그 중 한 집단을 대상독자로 해서 쓸 수 밖에 없는데, 자기한테 정면으로 다가오는 글이 아니어도 약간 삐딱한 각도에 서 있는 대중독자도 어느 정도는 그걸 읽어낼 수 있다는 가정을 하는 수밖에 없어요. 관용에 대한 믿음..
    아무튼 그래서 이런 글도 쓰고 저런 글도 씁니다. 장편도 쓰고 단편도 쓰고 중편도 있고 동화도 있고요. 장르농도가 짙은 것도 있고 옅은 것도 있고 설명이 쉬운 글도 있고 생략하는 글도 있고.. 그렇습니다. 무리한 부탁은 아닌 것 같아요.

    dkssud... 님, 행복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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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ybull 12.03.21 20:35 댓글 수정 삭제
    '친구/연인이 있는데 알고 보니 나의 분열된 인격'이란 식의 이야기는 많이 봤지만
    '알고보니 내가 그 사람의 분열된 인격'은 새롭습니다.
    전 달콤한 러브스토리...같은건 취향이 아닌지라 이 정도가 딱 좋군요.

    '안녕 인공존재'랑 '타워'읽은지 꽤 됐는데 이런 사이트가 있는지는 어제야 알았네요.
    좋아하는 작가가 올린 글에 리플 달고 또 대답을 받을 수 있다니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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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12.03.21 23:19 댓글 수정 삭제
    네, 이런 데가 있어요.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내용이 살짝 스포일러... 하하.. 하하..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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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구다구 12.04.08 04:19 댓글 수정 삭제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지금 시각 새벽 4시 20분... 방금까지 일(?) 하고 있었지요
    요즘 너무 바쁜 탓에 글을 읽을 짬이 나질 않아서 힘들었는데 단비같은 단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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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성훈 12.04.11 15:30 댓글 수정 삭제
    전혀 다른 소재의 이야기인데도, 이렇게나 같을 수 있다니요. 안녕, 인공존재에서 작가님이 얘기하고자 한 좀처럼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존재에 대한 사유. 그 사유가 더 깊어진 듯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신의 궤도 이후 오랜만에 읽은 작가님의 글이었는데 매우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배명훈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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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12.04.14 08:24 댓글 수정 삭제
    에이고, 언제 또 이런 반가운 리플들이... 마음에 가 닿았군요. 감사합니다. 어디어디에 발표한 글인데 너~무 반응이 없어서 여기에 다시 올렸는데, 오, 역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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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태운 12.05.18 20:56 댓글 수정 삭제
    아름다운 소설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천상열차 이후 21개월만에 거울에 공개하신 단편이라니. 라스트 씬의 미쟝센은 저도 언젠가 꼭 묘사해보고 싶은 장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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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식 12.07.04 16:17 댓글 수정 삭제
    은경의 독백이 찡하네요. 비슷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어서 더 와닿습니다. 축에 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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