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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조개를 읽어요

2007.04.28 00:3504.28

  “교수? 영감님이? 자기가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는 그냥 선생님이라고만 불렀는데. 아, 이 나이에 내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거 보고 어느 학교 선생님일까 고민하다가 교수쯤 될 거라고 생각했구나. 글쎄. 교수라.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디 가서 학위라도 따 왔나? 모르긴 해도 저 양반 어디 한 군데 머물러 있는 꼴을 못 봤는데 그런 직함을 가질 수 있을까? 응. 맞아. 응. 글쎄, 나도 그게 궁금하긴 해. 세미나 간다 그러면서 한번씩 어딘가 갔다 오기는 하는데, 무슨 세미나에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게 있다고 그렇게 나다니나 몰라.
  아무튼, 영감님을 어떻게 만나게 됐냐고 물었지? 그냥, 한국에서 만났어. 우리 동네에 조개 무덤이 있었거든. 신석기 시대 조개 무덤. 우리야 뭐 맨날 다니면서 봐도 아무 느낌도 없었지만 그 동네 대학 고고학과 이런 데서는 거기 되게 좋아하는 그런 데가 있었어. 맨날, 봄에 꽃피고 그러면 몰려 와가지고 뭘 해 먹는데. 나중에 축젠가 뭔가 한다고 플래카드 붙여 놓고 동네 사람들한테 뭐 파는 거 보니까 걔들이 해 먹던 게 그게 신석기 시대 요리였대.
  그래. 그렇다니까. 그걸 어떻게 하는 거냐 하면은, 일단 돌을 이렇게 둥그렇게 쌓아요. 좀 높게 이렇게 쌓아가지고, 그 밑에다가 이제 불 땔 걸 주워서 넣는 거지. 그 다음이 중요한데, 해 보면 알겠지만 돌을 그렇게 둥글게 쌓아 놓으면 냄비를 걸치기가 참 힘들어. 걔들 비결이 뭐냐면은, 빗살무늬 토기를 쓰는 거 있지.
  그거 알아? 빗살무늬 토기? 옆에 이렇게 조악하게 빗금무늬 있고, 아래쪽이 이렇게 뾰족하게 튀어 나온 거 있지. 내가 어렸을 때 그 옆에 박물관에 가끔 화장실도 이용하고 하느라고 다니면서 보면, 아, 저렇게 생겨 먹은 그릇은 어떻게 세워 놓고 쓰는 거야? 뒤집어서 뚜껑으로 쓰는 거야? 그런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그때 보니까 그게 왜 그렇게 생겼는지 알겠더라.
  근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라?
  아, 영감님 처음 만났을 때. 영감님 처음 만났을 때, 그래, 거기가 그런 데였어. 대학 고고학과 학생들이 신석기 식으로 조개 삶아먹고 소주도 퍼 마시고 하는 데였는데, 스무 살 갓 됐을 때였어. 어느날 거기를 지나가고 있는데, 어떤 시커멓게 생긴 사람이 거기를 이렇게 기웃거려. 영감님이 좀 수상하잖아 왜. 그 양반은 왜 그렇게, 사람이 수상하게 구는지 몰라. 지난번에 영국 가서도 왜, 혼자 검문 당하고 그랬어. 아무튼 교수는 못 해먹을 양반이지.
  내가 이렇게 빤히 쳐다봤지. 그때만 해도 외국인이라는 게 많이는 안 보였거든. 그래도 그때 벌써 외국인들이 많이들 들어오기는 했을 거야. 우리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이렇게 가면은 그쪽에 공단이 이렇게 있었다고. 공단은 있는데, 주변에 공장에서 일한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 그럼 그 공장 다 누가 돌려? 기계로 돌리면 좋겠지만, 그 기계 살 돈 있으면 공장 건물 페인트칠이라도 한번 단체로 싹 해 줬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우선 들대. 그 동네가 그래서 동남아 쪽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물론 영감님은 인도 사람이지. 인도 사람이거나 말거나 그 어린 나이에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리가 있나. 수상하게 생긴 사람이 거기를 왔다갔다 하는데, 뭘 그렇게 열심히 적어. 그런 데에 조개 삶아먹는 거 말고는 뭐 볼 게 있나 싶어서 그 양반을 빤히 쳐다봤지. 내가 보고 있으니까 신경이 쓰이는지 쭈뼛쭈뼛하는데, 어차피 말도 잘 안 통하고 그러니까 꺼지라고도 안 하대. 그래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이 양반이 그 조개 무덤에서 조개를 쪼끄만 삽으로 퍼다가 흰 전지 위에 뿌려 놓고 사진을 찍더니만 뭘 또 열심히 적고 그래. 지금이야 그게 채집하러 간 건지 다 알지만 그때는 그래도 거기가 문화잰가 뭔가 그런 건데 말이야, 어디서 이상한 시커먼 외국인이 와서 그러고 있으니까, 어, 저거 저러고 있어도 되나 싶은 거야. 그래서 결국에 내가 뜯어 말렸다고.
  뭐라 그러긴 뭐라 그래. 그 나이에, 나도 영어가 짧아서 긴 말은 못하고, 노! 그랬지. 그랬더니 그 양반, 처음에는 아주 들은 척도 안하고 있더니만 내가 계속 노, 노 그러니까 와서 뭐라 그러는데, 하아, 이게 참. 나는 영어가 짧지, 그 양반은 여기 인도 발음으로 말하지. 이게 뭐,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딱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아, 도망가야겠다.
  나는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있는데, 이 양반은 또 말문이 한 번 트이고 나니까 놔 주지를 않아. 그래서 손짓 발짓 다 해서 설명을 하는데. 아마 모르긴 몰라도 허가서를 받아 와서 하는 일이라고 설명을 한 것 같아. 그렇지 않을까 싶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알아들을 재주가 없지. 이 양반이 그 뒤부터 자기가 무슨 일 하고 있는지 아주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설명을 하는데, 그때 엮인 거야. 처음 만난 날 그렇게 딱 엮여버렸지.
  그 양반이 뭘 보여주는데, 조개를 쭉 늘어놓고 찍은 사진이야. 그 밑에 영어로 설명이 있는 거야. 뭐 별 건 없었어. 그게 벌써 10년 전인데, 그때만 해도 해석 이론이 완전히 엉터리였다고. ‘블루,’ ‘블루,’ ‘블루,’ ‘블루’가 한 서른 개쯤 이어져 있고 그 사이에 한 개가 ‘웨이브’였거든. 말로 하는 영어는 못 알아들어도 우리가 또 왜 짧은 단어로 단답식으로 하는 영어는 소통이 되잖아. 그걸 보면서 이 양반이 설명을 해 주는 것 중에서 띄엄띄엄 귀에 들어오는 단어만 가지고 내 마음대로 설명을 듣고 있는데, 그 웨이브 조개하고 블루 조개가 어떻게 다른가 설명해 주는데. 하, 이게 또 재미가 있어. 그게 그 양반이 나한테 해준 패류 해석 첫 강의였지.
  근데, 내가 그 양반 하는 일에 끌렸던 게, 사실 내 쪽에는 또 나대로 사연이 있었거든. 문제의 그 조개껍데기였어. 집에 모셔 놓고 있었거든. 누가 나한테 쓱 내밀고 간 거였는데, 그거 받고는 한참동안 이게 뭐 하자는 뜻인가 했거든. 응. 여자야. 맞아. 하하. 사귀자는 뜻인가, 꺼지라는 건가 했지. 왜 꺼지라는 뜻이냐고? 그거 있잖아. 그리스 도편추방법. 어디서 그 이야기를 주워듣고는 조개껍데기를 주는 게 꺼지라는 의미인가 했지.
  글쎄 그 영감 설명을 듣고 있다 보니까 그게 생각이 난 거야. 벌써 몇 달인가 된 거였는데, 집에 그대로 모셔 놨었거든. 내가 영감님한테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고 집에 가서 그걸 가져 왔는데, 갔다 와 보니까 이 영감이 어디 가고 없는 거야. 김이 팍 새는데, 그래도 어쩌겠어. 이제는 내가 궁금해 죽겠는데. 기다렸지. 며칠을 죽치고 있었는데, 5일만인가, 이 양반이 5일 전에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또 나타나지 뭐야. 그 옷을 10년이 지난 바로 어제도 입고 돌아다닐 줄은 그때는 몰랐지. 헛허허.
  그래서 가서 물었어. 왓 이즈 디스? 했지. 셸이라고 그러대. 조개껍데기가 맞긴 맞는데 내가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이건 무슨 의미인가 하고 물어야 되는데, 영어가 짧잖아. 민. 왓. 워드. 그랬나, 하여튼 뭐라 그랬는데, 이 양반이 그제서야 내 걸 받아들고는 유심히 보는 거야. 눈이 번뜩 하더라고. 내가 그 눈 번뜩이는 걸 똑똑히 봤거든. 근데 한참을 그걸 들여다보고 있더니 이 양반이 딱 이러는 거야. 아이 돈 노. 몇 번을 더 물어봐도 자기는 모르겠대. 모르겠으면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느냐고 묻고는 싶은데, 그건 또 너무 긴 문장이잖아. 짧은 영어로 그 말은 도저히 못하고 왓 이즈 디스만 계속하고 있는데, 이 양반이 뭐라고 뭐라고 한참 이야기를 하더니 명함을 주고 갔어. 내가 무슨 말이 하고 싶었는지 눈치를 챘나봐.
  그래서 인도까지 오게 된 거야. 응. 이래봬도 명함 받고 왔다고. 그때는 나도 여기 면접이 그렇게 센 줄도 몰랐는데, 명함 받고 와서 그런지 그냥 받아 주더라고.
  하하. 사도는 무슨. 영감님이 무슨 예수야? 명함 던져준다고 바로 따라 나서게. 한 4년 넘게 잘 알아보고 갔어. 군대도 갔다 오고. 영감쟁이, 좀 수상하게 생긴 사람이라야 말이지.
  그 여자? 과외 선생님이었는데. 은경이 누나라고, 나보다 한 네 살 많았겠지? 아마. 이래봬도 내가 중학교 때는 수학을 곧잘 했는데, 고등학교 딱 가니까 점수가 바닥으로 내려가. 아직 적응이 안 돼서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고 버텼는데, 웬걸. 7점 받아 봤어? 그것도 120점 만점에 7점. 옆에서 찍은 놈은 15점이 나오는데, 열심히 푼다고 앉아 있었던 놈은 7점이 나오니 황당하지 뭐. 그때 담임선생님 말이, 객관식만 잘 찍어도 기대값이 17점은 넘는데 7점 받은 놈은 운명을 거스르는 놈이라고.
  첫날, 바닥에 탁자 하나 깔고 마주 앉아서 그 이야기를 해 줬지. 그러니까 이 누나가 삭 미소를 짓는데, 아, 아무리 거스르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게 있구나 싶대.
  미모라. 미모의 여대생이었나. 글쎄. 그보다는, 좀 희한한 사람이었지. 나중에 나 대학 들어가고 나서 그런 소리를 하는데, 자기는 누구한테 수학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수학에 대해서 알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거야. 아주 얄팍했다는 거지. 실력이 탄로 나면 다음 주에라도 그만둬야지 하고 일단 시작은 해 본 거였는데, 그래서 올 때마다 불안불안했대. 선생과 제자 사이를 가르는 그 얇은 막이 왜 끝까지 안 깨졌냐면은, 그게 내가 또 워낙 공부하는 데 관심이 없잖아. 나는 뭐 물어보는 걸 싫어했거든. 그쪽에서 보기에는 위태위태했다는 거야. 내가 뭐 하나만 더 물어보면 머리를 긁적긁적해야 되는 상태였는데, 세상에 2년 동안 한 번도 가르쳐 준 것보다 더 많이 물어본 적이 없어서, 그냥 그냥 그러고 넘어갔다고.
  누나는, 신비한 데가 있었어. 신기한 데가 있었다고 해야 되나 모르겠지만. 어느 날은 갑자기 머리가 막 아파서 과외 못하겠다고 전화해 놓고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오던 길에 연락 받아서 일단 오기는 왔다고 그러면서 누나가 집에 왔더라고. 머리를 이렇게 짚어보는 것처럼 하더니, 대뜸 자기를 따라하라 그러네. 뭐하는 짓인가 싶으면서도 따라는 했지. 시키면 또 시키는 대로 잘 하잖아 우리가. 체조 비슷한 걸 시키는데, 팔을 뭐 이렇게 꼬고 무릎을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왼쪽으로 반 바퀴 돌고 뭐 그런 걸 시키는데, 그거 열 번을 하고 자라 그러대. 그러고 누나는 바로 집에 돌아갔는데, 진짜 그거 열 번을 하고 나니까 머리가 안 아파. 하, 신기하다 하면서 잤는데, 다음날 되니까 바로 까먹어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나. 그때는 그것도 왜 안 물어봤나 몰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얄팍하면 얄팍한 대로 그냥 넘어가는 스타일이라. 근데 지금은 그게 참 궁금해. 누나의 정체가 뭐였을까.
  왜 그러고 살았냐고? 왜 그러고 살았냐면. 행복하잖아. 나는 주는 밥 먹고 조용히 사는 게 좋더라.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 짓 하고 있는지 몰라. 그 영감 때문이지 뭐. 영감쟁이, 나는 여기 와서 한 몇 년 붙어 있으면 말해 줄 줄 알았거든. 그 여자가 준 조개를 봤을 때 그 번뜩이는 눈빛 말이야. 뭔가 알고 있지만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그런 눈이었는데. 근데 말이야, 진실이 뭐였는지 알아? 수상한 영감! 진짜로 몰랐던 거야. 작년엔가 그러더라고. 그때는 진짜로 몰랐다고. 그때야 패류 해석계 자체가 워낙 영세하기도 했지만, 하하.
  하여튼 영어 좀 할 줄 아는 인도 사람이 다 그렇지 뭐. 그런 영감들 때문에 착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 욕을 먹는다니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내가 물어봤거든. 그때 그 눈빛은 뭐냐고. 아주 딱 잡아떼는 거 있지. 하긴 내가 잘못 본 건지도 몰라. 여기 사람들 눈 좀 봐봐. 큼지막해가지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쳐다만 봐도 시비 걸려고 째려보는 것 같잖아. 그냥 그 눈에 속았던 게야.
  아이구, 저 소 눈 좀 봐라. 나는 여기 처음 와서 저 소들이 제일 신기했어. 도로로 가다가 뒤에서 차가 빵빵거리면 갓길로 삭 비켜서는 거 있지. 쟤들이, 아침에 저렇게 풀어 놓으면 해질 때까지 해변에서 뭐 주워 먹고 있다가 나중에 해빠지면 줄지어서 집으로 들어가는데, 그거 본 적 있어? 무슨 개 키우듯이 소를 키운단 말이야.
  오늘도 꽤 덥네. 저 백인들 말이야. 뭐가 좋다고 저렇게 살을 벌겋게 태우고 있는지 몰라. 살도 좀 적당히 태워야지, 저렇게 소세지색 되도록 태워먹고 있는 거 보면 내가 다 근질근질해. 어이구, 저거저거 피부 다 상할 텐데. 하하. 영어가 짧아서, 제발 좀 제때 제때 뒤집어가며 구우라고 말해 줄 수도 없고.
  아무튼 그래서 말이야, 그런 좋은 시절이 있었다고. 덕분에 수학 점수는 40점대까지 올랐어. 나중에는 60점까지 간 적도 있었지만, 더 좋아지지는 않더라. 40점이나 7점이나 그게 그거지 뭐.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나 싶어.
  그 당시에 내가 용돈이 한 달에 만 오천 원인가 그랬는데, 그 중에 5천 원은 다 누나가 가져갔어. 시험 볼 때마다 점수 가지고 내기를 했는데, 분명히 내 쪽이 남는 장사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었어. 나는 65점을 넘기면 5만원을 받게 돼 있었으니까. 물론 그 점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지만.
  누나가 왜 그렇게 좋았냐고? 하하. 글쎄. 그 왼쪽 눈에 있는 네 겹짜리 쌍꺼풀 때문인가. 그때는 그걸 갖고 그렇게 놀려줬는데, 지금 누나 얼굴을 떠올리면 그게 제일 먼저 떠올라. 그러면 진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져. 그게 뭐냐고? 첫눈에 반해본 적 있어? 요즘은 그런 거 안 믿지? 근데 그걸 어떻게 더 설명하냐고. 그냥, 그 순간에는, 아, 내가 왜 이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
  누나는, 그런 이야기를 해 주곤 했어. 돌아갈 데가 있다고. 언제든 거기에서 자기를 부르면 돌아가야 한다고. 그때까지 이 세상에서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게 자기는 그렇게 괴로운 일이었대.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싫은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그러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 줬는데, 자기가 떠나온 곳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이었어. 떠나온 곳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나는 누나가 곧 세상을 떠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응.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말이야. 그래서 누나를 좋아했다 그러면 이상하지? 그냥, 내가 좀 멍청했던 것 같아. 그냥 그 신비한 느낌이 끌렸어.
  누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어땠을 것 같애? 멍청하다고 생각했겠지 뭐. 아무튼 누나도 나를 꽤 귀여워해 줬어. 말 잘 듣는 학생이었잖아.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갑자기, 이제 과외를 그만 둬야 할 것 같다고 그러는 거야. 이유는 자세하게 이야기 안했는데, 그냥 어디로 가게 돼서 그만 둔다고 부모님들한테 이야기하는 걸 들었거든. 그걸 듣고 있자니 철렁하고 뭔가 내려앉는 느낌이 드는 거 있지. 그러고 나서 1주일동안 내내 가슴이 답답한 게 숨이 막히는 거야.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거 알아? 숨 막히는 느낌이라는 거. 진짜로, 물리적으로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사람들이 왜 그 느낌을 숨 막히는 기분이라고 표현하는지를 알겠더라니까.
  1주일이 지나고 난 어느 날이었어. 비가 내리고 있었거든. 나는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두통 해소 체조를 하느라 몸을 뒤틀고 있었어. 초인종이 울려서 엄마가 문을 열어 주러 갔다가 내 방에 오더니, 은경이가 보러 왔다고, 누나가 왔다고 그러는 거야. 나는 쪼르르 달려 나갔어. 누나도 참, 미리 말이나 하고 왔으면 머리나 감고 있었지.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나는 마지막으로 해줄 말 한마디도 준비 못하고 있었어. 정말 아무 말 안 하고 현관을 막고 서 있었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이미 길을 나섰던 건지, 누나는 커다란 여행가방을 옆에 세워 놓고, 물이 뚝뚝 흐르는 우산을 만지작거리면서, 곧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힘없이 웃었어. 나는 그냥, 응, 하고 대답했어. 멍청한데다, 숫기 없는 고등학생이었거든. 그래도 속으로는, 그렇게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게 싫어서 뭐라도 하고 싶었는데, 아무 말도 준비한 게 없었으니까 아무 말도 못하겠는 거야. 그 한마디 말고는 누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누나의 정체는 대체 뭐였을까? 물어보지도 못했는데, 누나는 그 조개껍데기만 내 손에 꼭 쥐어주고 떠나버렸어.
  하아, 한심하지? 그 뒤로는 소식을 몰라. 완전히 사라져버렸어. 과외 자리 소개해 준 아줌마가 그러는데, 자기 딸하고도 소식이 끊어졌대.
  에? 후회되지 않냐고? 왜? 아. 첫사랑의 추억 같은 것 때문에 이런 일을 택하게 돼서? 하하. 낭만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안 그래. 그 영감을 그렇게 만나서 그렇지, 꽤 오랫동안 알아보고 정한 일이지 그런 낭만적인 동기 때문에 시작한 일은 아니야.
  이것 봐. 얼마나 멋지냐고. 아라비아 해를 따라 쭉 넓게 퍼져 있는 이 모래밭이 내 일터라고. 여기 얼마나 좋아. 낙원이 따로 있나. 동네 어디를 가도 파도소리가 들려. 평소에는 딴 생각 하고 있느라 못 느끼지만, 들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동네 어디에서나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잖아. 무슨 삶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 같지 않아? 그런 쪽에 관심 없나? 보기보다 속물인데. 흠. 그럼 이건 어때? 킹 피셔 맥주! 해변 카페에 앉아서 끝내주는 맥주 한 병 마시는데 우리 돈으로 5백 원!
  어? 그것도 싫어? 까다로운 여성이었구만. 그럼 그냥 일 이야기나 해야 되나? 에이. 에이.
  조개들은 말이야. 딱 한 마디 말만 해. 태어나서 평생 죽을 때까지 딱 한 마디만 하는 거야. 여기 봐. 조개껍데기를 보면 이 안쪽에서부터 점점 몸집이 커지면서 자라 온 흔적이 보이지? 나이테같이 생긴 이거. 근데, 세월이 흐른 흔적은 몸에 남길망정 세월이 변해도 두 마디를 남길 수 있는 놈은 드물어. 어렸을 때 한번 ‘파랗다’고 말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죽는 순간까지 다른 말은 못 해. 딱 한 마디만 할 수 있거든. 나중에 시커먼 물 속에 살게 돼도 파랗다고만 말하는 거야.
  물론, 영감님쯤 되는 사람한테 가 보면 두 마디를 남긴 놈도 있긴 해. 근데 그런 건 손톱만한 놈도 3억은 해. 드물거든.
  딱 한마디만 남기는 거지만, 세상에 조개가 얼마나 많이 있었겠어? 그 조개들 다 합치면 진짜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 거야. 조개 하나하나가 다 한 개씩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거거든. 아, 물론, 그 이야기들 대부분은 다 별 의미가 없어.
  하하. 쓰나미 때 태어난 조개들 얼마나 웃긴지 알아? 전에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의뢰해서 영감님 따라서 채집하러 갔었는데, 조개 한 마리에 한마디씩 하는 이야기가 그냥 이래.

  어어. 어어. 어어. 어어. 밀려. 밀려. 밀려. 밀려. 어어. 밀려. 어어. 밀려.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어어. 어어. 어어. 밀려. 어어. 어어.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어어. 어어. 어어. 나도. 어어. 떠올라. 떠올라.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부딪쳤어. 부딪쳤어. 부딪쳤어.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너도? 너도? 너도? 너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밀려. 밀려. 떠올라. 떠올라. 떠올라. 졸려. 어어. 어어. 어어. 어어.

  그런데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는 건, 조개를 읽는 방법이 어디에서부터 왔느냐 하는 거야. 인도 사람들도 자기네가 원조라고는 하는데, 사실 이 전통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는 것 같아. 신화 같은 데 보면 세상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조개를 읽는 능력이 신에게 있었다는 것 같은데, 그거야 알 수 없고. 외계인이 주고 갔다는 사람도 있고 뭐 그래.
  솔직히 나도 몇 년째 이거 채집하고 다니고 있지만 어휘나 문법 쪽 하는 이론가들은, 어이구, 평균 아이큐가 170이라나. 내 알 바 아니고. 아무튼 이건, 한 번 알아내기만 하면 신석기 시대나 중생대 같은 시대에도 똑같은 문법을 적용할 수 있는 언어라서, 꽤 유용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지 않겠어? 절대 유행을 안 타는 지식이라니.
  재밌어. 이 일이 좋아. 큰 욕심 같은 건 버리게 돼. 물론 이 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야심이 대단한 사람들도 있어. 조개가 지구보다 늦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몰랐던 고대에는, 세계가 창조되는 순간에 ‘창조다!’라고 말한 조개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믿었어. 그래서 그걸 찾으려고 온 세상 바닷가를 헤매고 다니는 성자들도 있었어. 요즘도 그래. 해빙기가 시작되는 시절에, 빙하가 쪼개지는 순간에 태어난 조개 30만 개 세트 같은 건 진짜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렸거든. 비키니 섬 핵폭발 실험 때 옆에서 태어난 애들 있거든.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아야. 아야. 아야. 아야. 나도. 나도. 나도. 아야. 나도.
  
  하는 조개 세트를 2간 개 세트로 해서 팔았는데, 히로시마 원폭 박물관에서 무지하게 큰 돈 주고 사 갔다고. 일본 놈들.
  희귀한 문법으로 희귀한 문장을 구사하는 비싼 조개를 찾으려는 사람들도 많아. 딱 한 마디만 던질 수 있는 건데도, 주변의 컨텍스트들 사이에 놓이면 복잡한 그림 문자 한 글자처럼 꽤 긴 문장들을 담을 수 있는 조개들이 있거든. 유명한 ‘떠났다’ 조개처럼 말이야, 조개는 단순하게 떠났다고 한 마디만 던지고 있는 건데, 해석가들은 이제 그 조개가, 뭐가 어디를 떠나는 순간을 말하고 있는 건지를 알아냈잖아. 조개는 그냥 파랗다고만 말해도, ‘하늘이 파랗다’로 새기는 글자가 있고 ‘바다가 파랗다’고 새기는 글자가 있으니까, 얘들이 하는 말이 한 글자라도 그걸 구분해서 사람의 말로 바꾸면 뜻이 더 길어지거든. 그래서 이 ‘떠났다’ 조개 글자의 해석은 이래. ‘돌아온 위대한 흰 고래가 침묵의 바다를 영원히 떠났다’ 글자는 짧지만 그 뜻은 길지. 이 조개 글자는 세상에 단 10개밖에 없어. 게다가 그 뜻이 비장하잖아. 그래서 값이 400억이나 하지만.
  그렇지만 이 일을 하고 있다보면 큰 욕심보다는 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게 더 좋아지는 것 같아. 지금 여기, 눈앞에 펼쳐져 있는 모래밭에 조개들이 뭐라고 써 놨는지 읽어 줄까?

  비다. 엄마. 하늘이 파래. 나도. 하늘이 파래. 졸려. 엄마. 졸려. 하늘이 파래. 나도. 나도. 나도. 나도. 엄마. 하늘이 파래. 나도. 하늘이 파래. 차가워. 차가워. 졸려. 아야. 비다. 차가워. 하늘이 파래. 끼야. 졸려. 아야. 졸려. 야. 비다. 야. 차가워. 졸려. 하늘이 바람. 엄마. 하늘이 파래. 하늘이 파래. 졸려. 엄마. 나도. 끼야. 졸려. 나도. 졸려. 엄마. 졸려. 하늘이 파래. 나도. 비다. 비다. 비다. 차가워. 졸려. 비다. 비다. 야. 끼야. 나도. 나도. 하늘이 파래. 차가워. 차가워. 졸려. 아야. 비다. 나도. 나도. 차가워. 하늘이 파래. 비다. 졸려. 엄마. 끼야. 비다. 나도. 하늘이 파래. 비다. 비다. 나도. 하늘이 파래. 하늘이 파래. 아야. 아야. 아야. 하늘이 파래. 나도. 나도. 엄마. 하늘이 파래. 야. 야. 하늘이 파래. 비다. 비다. 하늘이 파래. 하늘이 파래. 아야. 아야. 비다. 차가워. 졸려. 비다. 비다. 야. 졸려. 하늘이 파래. 야. 야. 끼야. 비다. 나도. 끼야. 졸려. 졸려. 나도. 나도. 야. 비다. 야. 차가워. 졸려. 하늘이 바람. 나도. 나도.
  아, 그리고 이건, ‘별이 아름다워.’ 이건, ‘조개가 아름다워.’

  어때? 얘들 말하는데 욕심 같은 거 끼워 넣고 싶지 않잖아. 얘들이 하늘 파란 건 어떻게 아냐고? 별이 예쁜 건 어떻게 아냐고? 몰라. 그냥 언제부턴가 그렇게 읽으라고 전해내려 왔어. 그렇게 읽는 거래. 조개들이 스스로 말하는 건지, 바다가 자기 말을 조개껍데기에 새기는 건지 그건 아무도 몰라.
  하하. 우리 영감쟁이가 중국에서 발견한 조개 화석 군락 중에 영감쟁이가 제일 좋아하는 곳에는 뭐라고 써있는지 알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간지러.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근사하지 않아? ‘간지러’ 조개 하나에 ‘나도’ 8백 40개.
  아, 저기 파도 지나간 다음에 모래 속으로 휙 숨고 있는 소라게가 등에 무슨 말을 짊어지고 있는지 읽어 줄까? 자, 봐. 어디 보자. 어, 얘도 ‘나도’다. 하하하하하. 뭐 겨우 ‘나도’ 같은 걸 배달하려고 그 무거운 걸 여기까지 짊어지고 왔냐? 니들은 거기에 뭐가 적혀있는지 읽을 줄도 모르냐? 부실한 놈.
  아, 잠깐만. 뒤로 저쪽에 좀 숨어 있다가 오자. 어? 저기 저 모자 쓴 인도 남자 있잖아. 어. 저 사람 안 만나려고. 에이, 빚은 무슨.
  어? 쟤? 돌고래 보트 하는 애야. 모래밭에 널려 있는 배들, 고기잡이배가 아니고 관광객들 실어다가 바닷가에 나갔다 오는 거거든. 아니, 나 맨 처음에 온 날부터 쟤가 호객하러 왔는데, 내가 다음에 가자 그랬거든. 그랬더니 이게 만날 때마다 다음에 언제 가냐고, 오늘 준비 됐냐고 그러는데, 계속 다음에 가자고 그랬어.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바다에 나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 연구원들하고 같이 가 볼 생각을 하고 쟤를 찾았는데, 그날따라 얘가 또 없네. 그래서 옆에 있던 ‘바부’라는 쌍둥이들 보트를 탔는데, 물론 아무리 가도 얘들 말처럼 돌고래가 물 위로 튀어 오르는 건 안 보이더라만. 그래도 나름 재미있게 타고 바닷가에 돌아왔는데, 아 글쎄 쟤가 띡 나타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라고 막 그러잖아. 바부 쌍둥이들도 그렇고 다들 민망해 하는데, 나도 뭐 할말이 있어야지. 그래서 다음에는 너랑 가자 그랬더니, 애가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니면 장사속인지, 볼 때마다 배 타라고 난리네.
  응? 그건 꼭 그렇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하기에 무리가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아? 에, 뭐 그래. 이 짓 오래 해도 역시 작은 돈 앞에서는 부들부들 떨게 돼. 지구 문명의 신비를 밝히는 연구팀의 일상사치고는 좀 그렇지?
  응? 아, 그건 모르고 온 거야? 우리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 몰라? 이 양반이, 그럼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그들이 왔어’ 조개 말이야. 몰라? 이 바닥에서는 난린데. 사람들이 조개 읽는 법이 외계에서부터 왔다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이 나라에 전수되어 오는 조개 읽는 법에 ‘그들’을 지칭하는 어휘가 있는 거야. 그래도 주류에서는 이건 외계인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에 포함된 어휘가 아니라 신화에서 파생된 것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거든. 실제로 있는 조개에 쓰이는 어휘는 아니고, 상징적인 어휘라고 생각한 거지.
  근데 또 어느 바닷가에서 얘들이 무더기로 나왔다 또.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먹고 덤벼들다 보니까 ‘그들이 떠나’ 조개가 또 튀어나오는 거야. 응. 상징적인 조개라고만 생각했던 애들이 실제로 막 튀어 나오는 데다가 그게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러니 센세이셔널 할 수밖에. 대박 노리고 달려드는 놈들이 많은 모양이야. 우리 영감님도 재주 좋게 그 눈먼 무리에 끼었더라고.
  그래서. 응?
  그런가? 아무래도 좀 그렇지.
  그래.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 앞뒤가 딱딱 맞기는 해. 하지만 꼭 그렇게 봐야 되는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어. 외계인이라. 하하. 설마. 누나가 외계인이라고?
  맞아.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것도, 처음에는 내 조개가 도대체 무슨 뜻을 가진 조개인지를 알아내려고 시작한 것이기는 해. 하지만 지금은, 아까도 말했지만 이렇게 널려있는 애들 읽는 것만 해도 재미가 있어. 이건 말이야, 영어처럼 짧으면 소통이 안 되는 언어가 아니거든. 단답식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면 얘들이 뭐라 그러는지 놓치지 않고 속속 알아들을 수 있어서 좋단 말이야. 바닷가 모래밭을 포크레인으로 긁어다가 조개들만 골라서 해독 장치에 좌르르 쏟아버리는 놈들은 절대 이해 못하는 얘들만의 소소한 뭔가가 있다고. 이 일은 말이야, 빨로렘 해면 조개 중 몇 %가 ‘나도’라고 말했다, 이런 거 밝히려고 하는 작업은 아니야. 얘들 하나하나가 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다 생생하게 느껴져야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처음 발을 디디게 된 동기가 어쨌건.
  아, 물론 그래. 하지만 나는 내 조개가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비싼 조개일 줄은 몰랐어. 우리 영감님, 내가 처음 내밀었을 때 갖고 튀지를 않은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그 양반,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몰랐어도 엄청나게 값나가는 물건이라는 건 알아 봤으니까. 그리고 영감님이 그때 그 조개껍데기의 현금 가치를 말해 줬으면, 나는 지금처럼 이 일을 좋아할 기회가 한 번도 없었을지도 몰라.
  누구는 그렇게 묻더라. 누나가 왜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비싼 물건을 나한테 양도했을까 하고 말이야. 어마어마한 재산을 양도받은 심정이 어떠냐고. 흠. 글쎄. 2년을 가르쳐 보고 나니 얘는 도저히 잘 먹고 잘 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평생 먹고 살 수단을 쥐어준 걸지도 몰라. 하하하.
  하지만 말이야, 그런 식으로 묻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어. 누나가 그 비 오는 날 혼자 길을 떠나면서 나한테 쥐어준 게 그저 시가 500억짜리 희귀 조개껍데기였다고 생각하라고? 나보고? 미안하지만 나는, 그 조개도 역시 그냥 여기 이 모래밭에 널려있는 조개껍데기들처럼 세상에 하고 싶던 말 한마디 남기고 떠나가는 한 개의 글자라고 생각해. 누나가 나에게 남겨준 한 글자짜리 메시지라고. 나는 그냥 그게 무슨 의미일지가 너무 궁금해서 나를 둘러싸고 있던 행복한 일상의 껍데기를 깨고 여기 이 고아 주 해변까지 날아와서 모자 쓴 보트 주인의 눈을 피해 숨어 있는 사람이라고.
  물론, 언제나 그랬듯이, 그 외계인이 다녀가곤 한다고 말하는 조개들이 이번에도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면 누나가 하는 말이 더 잘 이해가 되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게 사실로 밝혀져서 누나가 준 조개껍데기 값이 두 배가 되건 세 배가 되건, 나는 이걸 도저히 팔아먹을 수가 없지 않겠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의 조개껍데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이 분야 종사자를 제외하면 조개껍데기가 하는 말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전 세계에 이 분야 종사자의 숫자는 이제 막 500명을 넘어섰다. 나는 그에게, 그 조개껍데기의 뜻을 다시 한 번 직접 읽어 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푸른 영혼을 가진 전사가 자신이 떠나온 별의 부름을 받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전쟁에 나서다.’
  하아, 감동적이지? 그런데 나는 말이야, 아무래도 여기에 씌어 있는 말이 제발 사실이 아니었으면 더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어. 언젠가 꼭 돌아오겠다는 이야기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근데 다시는 못 온다는 이야기였다니. 에휴. 나는 뭐, 그래.”
mirror
댓글 21
  • No Profile
    fiori 07.04.28 16:19 댓글 수정 삭제
    멋진 이야기네요..
  • No Profile
    배명훈 07.04.29 00:49 댓글 수정 삭제
    고맙습니다. 오늘은 뭔가 씁쓸한 기분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그 한마디에 다시 허전했던 마음이 사그라집니다.
  • No Profile
    07.04.30 20:46 댓글 수정 삭제
    오늘도 멋지군요. ... 하아, 감동적이지? 하고 묻는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네요.
  • No Profile
    배명훈 07.04.30 21:36 댓글 수정 삭제
    너무 추켜세워주지 마세요. 버릇 나빠져요. ㅎㅎ
    ida님 글에 은근히 자극받고, 뽀 님의 리플에 은근히 힘을 얻고 그래요. 언제부터냐면, 과학기술창작문예에 응모하려고 전년도 수상작품집을 뒤적거렸을 때부터. 흐흐. 작가로서, 도전 정신에 아주 불을 지피시죠.
  • No Profile
    07.07.01 00:24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 전 추켜세우지 않는데. 항상 진실만을 말합니다. 선서!
  • No Profile
    가연 07.07.01 22:20 댓글 수정 삭제
    도대체 이런 생각은 어디서 나와요! (괜히 버럭 ...)
  • No Profile
    배명훈 07.07.02 12:59 댓글 수정 삭제
    인도 갔을 때 바닷가에서요, 파도가 모래를 쓸고 지나가고 나면 조개들이 모래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후다닥 땅을 파고 다시 들어가는 걸 봤거든요. 소라게들도 많고. 한가하게 그걸 보고 있자니 얘들이 저 먼 바다에서부터 뭔가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취재여행을 다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많이 보면 더 많이 느끼고 더 쓸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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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아 07.07.04 14:27 댓글 수정 삭제
    취재여행.............. (아련)
  • No Profile
    Inkholic 08.02.10 01:16 댓글 수정 삭제
    마지막 '에휴, 나는 뭐, 그래'가 가장 좋습니다. 주인공이 만약 조개라면 평생 남길 한 마디로 이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 No Profile
    배명훈 08.02.10 18:13 댓글 수정 삭제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괜찮은 아이디어에요.
  • No Profile
    배명훈 08.03.20 17:37 댓글 수정 삭제
    이건 좀 스포일러같습니다만. 흠..
  • No Profile
    볼티 08.03.20 20:11 댓글 수정 삭제
    중요한 건 그것의 의미이지 그것의 시가가 아니라는 생각에 적었습니다.
    독자들의 감상에 크게 지장을 끼칠 만한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시면 자진 삭제 하겠습니다.^^;
  • No Profile
    배명훈 08.03.21 08:31 댓글 수정 삭제
    볼티 님.
    독자 중에서 누군가가 스포일러라고 지적했을 경우에는 독자의 감상에 영향을 미치는지가 판단 기준이 될 수 있겠지만, 작가 본인이 지적했을 경우에는 작가의 표현에 영향을 미쳤는지가 기준이 될 것 같아요.
    어떻게 읽으셨을지, 다른 독자는 어떻게 읽을지 모르겠으나, 위에 패러디하신 부분은 본문의 딱 저 지점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어야 한다는 게 작가의 표현 의도였습니다. 숙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의견이나 리플은 환영이에요.
  • No Profile
    볼티 08.03.21 09:55 댓글 수정 삭제
    삭제했습니다.

    아무튼 잘 읽었습니다. 조개를 읽는다는 것도 새로웠고 조개들의 말도 귀여웠어요.
    분위기가 신비롭네요.
  • No Profile
    배명훈 08.03.21 15:36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감상평도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이형 08.04.07 21:19 댓글 수정 삭제
    저는 명훈님 작품 중에 이게 제일 맘에 듭니다. (커밍아웃)
    간지러 조개 부분 읽을 때는 정말 바닥을 구르면서 웃었다는.
  • No Profile
    배명훈 08.04.07 22:10 댓글 수정 삭제
    꺄. 커밍아웃이다! 영광이에요.
    그 해변에서, 파도가 모래를 살짝 쓸고 지나가면 그 밑에 숨어있던 조개나 소라게 같은 애들이 순간적으로 정체가 탄로가 나거든요. 그러면 얘들이 동시에 땅을 파고 밑으로 기어 들어가기 시작해요. 조개들도 일제히. 그게 참 좋았어요. 얘들 살아 있구나..
  • No Profile
    lordofyk 08.08.31 04:41 댓글 수정 삭제
    간지러에서 피식, 재밌당~
  • No Profile
    자하 08.11.25 16:10 댓글 수정 삭제
    많은 걸 보고 듣는다고 해서 그걸 다시 다듬어내는 사람이 흔하진 않죠. 존경합니다! ...
  • No Profile
    hxu202 10.04.16 22:38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정말로 이런일이 있다면 세상이 더 재밌어 질 텐데요
    마지막이 가슴아픈건 저 뿐인가요 흑흑
  • No Profile
    길손 12.06.24 17:34 댓글 수정 삭제
    조개탕을 시켜 하나씩 꺼내 먹으면서 읽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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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배명훈.배명훈.배명훈.배명훈.배명훈.배명훈.배명훈.배명훈.배명훈.
    끝내줘.끝내줘.끝내줘.끝내줘.끝내줘.끝내줘.끈내줘.끈?끝내줘.끝내줘.끈?
    끝내줘. 끝내줘.끝내줘.끝내줘.끝내줘.끝내줘.끝내줘.끝내줘.끝내줘.끝내줘.끝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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