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배명훈 철거인(鐵巨人) 6628

2006.07.28 23:1207.28

1.


  은아 슈퍼가 집에서 좀 더 가깝기는 했다. 갖다 놓은 제품 종류도 더 다양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쩐지 은아 슈퍼 쪽으로는 발길이 옮겨지지가 않았다. 이제 마흔쯤 됐을까, 아무래도 은아 아빠임이 분명한 가게 주인은 몇 주 전부터 이상하게도 손님인 그에게 반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대 놓고 말을 놓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물건을 비닐에 담으면서 암산으로 물건값을 계산하고는,
  “4천 2백 원!”
  하고는 말끝을 짧게 끊어버리는 것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거의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였고 단지 ‘~입니다.’ 라는 말을 너무 작게 얼버무려서 잘 못 알아들은 것이라고만 생각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쪽에서,
  “여기요.”
  하고 분명히 높임말로 말하는데도,
  “안녕히 가세요.”
  하는 당연한 인사 한마디조차 못 듣는 경우가 많아지자 그는 결국 발을 끊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입고 다녀서 그런가?’
  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동네 구멍가게에 가는데 무슨 준비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문제는 헐렁해 보이는 그의 용모가 아니라 슈퍼에 그가 나타난 시간인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다음부터 그는 백수로 오인받기 좋은 오전 8시에서 저녁 7시 사이에는 은아 슈퍼에 가지 않았다. 그런 저런 이유로 결국은 밤 12시가 다 돼 가는 이런 늦은 시간에도 결국 은아 슈퍼로는 발길이 가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용현 슈퍼는 사정이 달랐다. 용현 슈퍼는 은아 슈퍼보다 더 좋은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근방 슈퍼 중에서 면적이 제일 컸다. 그래서 더 깨끗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속을 보면 은아 슈퍼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용현 슈퍼 음료수 냉장고에서 1.5리터 콜라병을 들었다가 손끝에서 느껴지는 메마른 먼지의 감촉에 깜짝 놀랐다. 용현이라는 가게 간판 이름의 주인공 당사자임에 틀림없는 20대 후반쯤의 주인은 자기 얼굴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컴퓨터 모니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예 컴퓨터를 카운터 옆에 놓고 게임은 게임대로 하면서 푼돈은 푼돈대로 버는 이상적인 사업을 하는 셈이었다. 그러니 장사가 잘 될 리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용현 슈퍼에는 또 다른 주인이 있었다. 나이로 봐서는 적어도 용현이 엄마쯤은 되는 것이 틀림없는 성격 좋은 주인 아줌마가 앉아서 물건값을 받는 동안에는 그도 확실하게 손님 대접을 받을 수가 있었다. 아마도 주인 아줌마는 가게 이름을 지을 당시에는 어린 아이였을 용현이가 그 나이를 먹도록 가게를 꾸려왔을  것이다. 그 오랜 세월동안 생계를 책임지느라 몸에 익었을 듯한 싹싹함에서 그는 훈훈한 인심 같은 것마저 느끼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훈훈한 인심도 이제는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주인 아줌마 역시 어쩐 일인지 전에는 보여준 적이 없는 조급한 얼굴로 물건값 계산을 정신없이 서둘러 끝내 놓고는 그가 지폐를 내미는 사이를 못 참고 컴퓨터 모니터를 흘끔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딱! 아싸!
  그런 경쾌한 소리가 컴퓨터에서 흘러나왔다. 아들이 인터넷 고스톱을 주인 아줌마에게 가르쳐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라면과 맥주와 계란이 담긴 흰 봉투를 오른손 손목에 끼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은아 슈퍼와 용현 슈퍼 중에 하나만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는 용현 슈퍼에서 똥쌍피만큼의 관심도 못 받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나올 때 대충 계산해서 천 원짜리 몇 개만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왔는데 계산이 기가 막히게 잘 맞아 떨어져서 주머니에는 단돈 300원밖에 안 들어 있었다. 은근히 합리적인 쇼핑이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검은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자기 집 철문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이었지만 주황색 빛이 부옇게 어려 있어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불길한 습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목덜미를 감싸고 지나갔다. 비가 오면 라면 맛도 맥주 맛도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그를 살짝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대도 잠시, 그때서야 그는 바지 왼쪽 주머니에 들어있는 열쇠 꾸러미가 엉뚱한 열쇠 꾸러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문은 닫기만 하면 저절로 철컥 소리를 내면서 잠기는 평범한 대문이었다. 같이 사는 여동생이 중국 여행을 가면서 두고 간 열쇠 꾸러미에는 착각하기 딱 좋게 그의 것과 똑같은 열쇠고리가 매달려 있었다. 부모님이 일본 여행을 갔다 오면서 선물한 열쇠고리였다. 동생의 꾸러미에는 자동차 키, 사무실 열쇠 같은 것들이 잔뜩 매달려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대문 열쇠만은 동생을 따라 중국에 가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확인한 것처럼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하늘이 분명했다. 근처 열쇠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이제 도저히 느긋할 수가 없었다. 뛰다시피 하면서 걸어갔지만 열쇠집 세 군데는 이미 다 닫혀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일단 집 쪽으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시 공중전화가 있는 쪽으로 달렸다.
  전화번호라고는 기억나는 데도 없고 수첩을 가지고 나온 것도 아니어서 연락할 데도 딱히 없었지만, 그래도 단 한 군데만큼은 분명히 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공중전화에 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넣고 지섭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무 때나 전화해서 재워달라고 해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고 그저 반가운 술친구가 찾아온 것으로만 생각해 줄 친구. 그가 있던 것이다. 마침 손에는 술도 들려 있지 않은가.
  신호가 가는 소리가 한참이나 울린 뒤에야 저쪽에서 지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지섭아. 나야. 아직 안 자지?”
  “어, 민소. 아직 안 자.”
  “어, 내가 무슨 일이 좀 있어서 그러는데.”
  “야야 잠깐만.”
  하고 말을 자르고 나서 지섭은 한참 동안이나 다른 전화를 받는 것 같았다. 아직 퇴근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자인 지섭은 같이 밥을 먹을 때도 어디에서인가 전화가 걸려오면 30분이고 1시간이고 전화기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민소는 백 원짜리 하나를 더 집어넣으면서 다급한 듯 소리쳤다.
  “나 급하거든. 공중전화야. 동전 다 떨어져.”
  “잠깐만. 너는 뉴스도 안 보냐? 지금 바빠 죽겠다.”
  “뉴스 안 봐. 우리 집 문이 잠겨서 니네 집에 가서 자야 될 것 같다.”
  “뭐라고? 잠깐만.”
  지섭은 듣는 둥 마는 둥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다른 전화를 받았다. 평양에서 무슨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뭐라도 하나 터진 모양이었다. 그는 마지막 동전을 집어넣고 잠깐 동안 기다리고 있다가 공중전화에서 마지막 경고음이 울리자 다급하게 소리쳤다.
  “전화 끊긴다. 집 앞에 가서 기다릴 거니까 알아서 해.”
  “나 오늘 집에 못 가. 지금이 집에 갈 시국이냐? 뉴스 좀 보고 다녀라. 좀 있다가 전화할게.”
  지섭은 그렇게 말하고는, 동전이 채 다 떨어지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민소는 수화기를 공중전화기 위에 올려놓고 허탈하게 뒤로 돌아섰다. 공중전화 부스 밖으로 나오려는데 바닥에 빗방울이 무슨 전염병 번지듯 빠르게 번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다시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공중전화 부스 바닥의 면적을 살폈다. 웅크리고 누우면 누울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문이 안 달린 한쪽 면으로 비가 들이치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그는 한 손을 밖으로 뻗어 빗방울이 강렬해져 가는 기세를 가늠했다. 폭우가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에게는 당장 비를 피할만한 곳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때 문득 그의 손에 동생의 열쇠 꾸러미에 매달려 있는 자동차 키가 만져졌다. 그는 잠깐 뭔가를 생각하다가 곧 손에 자동차 키를 꺼내 쥐고 근처 아파트 단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집 주변에는 주차를 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동생은 근처에 사는 친구 아파트에 주차 스티커를 얻어다가 차를 대 놓곤 했다. 물론 차가 세워져 있는 곳에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걸어서 가기에 가장 가까운 쪽에 주차해 두었으리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뛰어가는 동안 빗방울이 점점 기세 좋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가장 가까운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서 한참을 헤매었으나 결국 차를 찾지 못하고 다시 지상에 있는 주차장으로 올라왔다.
  “6628. 6628.”
  그는 마치 실종된 아이 이름을 중얼거리는 부모처럼 차번호를 입 속으로 되뇌었다. 6628. 은색 액센트. 아까 지하 주차장에서 못 알아보고 지나쳤을 수도 있지만 그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가 찾아 헤매고 있는 그 차는 그가 2년이나 몰고 다녔던 차였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몰고 다녔던 차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가 그의 6628을 찾아냈을 때, 차는 주차장 구석쯤에 있는 어느 가로등 아래에 호젓하게 서 있었다. 어찌나 여유로워 보이던지, 마치 빗방울과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번갈아 차 천장을 때리면서 내는 불규칙한 비트에 즐거운 듯 가볍게 일렁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5년 만에 만난 자기 차에게 인사 한마디 건넬 여유도 보이지 못하고 운전석 쪽 문을 열고 후다닥 달려 들어갔다. 이미 비가 그의 옷을 다 적셔 놓은 뒤였다.

2.


  그가 처음으로 6628의 주인이 되었을 때만 해도, 차는 완전히 애물단지였다. 차는 원래 동생이 타고 다니던 것이었다. 마침 동생이 어학연수다 뭐다 해서 외국으로 나가 버리는 바람에 차를 몰 사람이 없어졌던 것이다. 당시에 그는 지방의 작은 도시 근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생활 여건이 딱 그랬다. 차만 있으면 어지간한 도시 생활은 다 누릴 수 있지만, 차가 없으면 딱히 할 일이 없어지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운전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굳이 차를 쓰려고 하지 않고, 유배와 다름없는 생활을 반년이나 꾸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답답해 보였던지 동생은 가끔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차 준다니까. 그런 데 틀어박혀 있으니까 여자친구도 없고 결혼 생각도 못 하지. 지금 오빠 나이면 여유 있는 것도 아니거든. 차 가지고 놀러나 좀 다니고 친구들 만나러 서울에도 가끔 가고 그러면 좋겠구만.”
  “친구도 별로 없는데 뭘. 결혼 같은 거 생각 없어. 평생 여기서 일할 것도 아니고 돈 좀 모으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할 거라니까.”
  “오빠야. 시골구석에서 그러고 있다가 나중에 베트남 처녀랑 결혼해도 나는 모른다.”
  “베트남 처녀가 어때서?”
  “솔직히 말해, 오빠. 차 가지고 집에서 거기까지 갈 자신이 없어서 그러지?”
  결국 동생은 나중에 한국에 들렀을 때 6628을 그의 회사 숙소 주차장에다 곱게, 그것도 후진주차까지 해 놓고 돌아갔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차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면허는 있었지만 그나마 학원에서 배워서 제대로 딴 것도 아니고 동생이 억지로 데려다가 인적 없는 길바닥에 테이프로 줄을 그어 놓고 날림으로 가르쳐서 따게 만든 면허였다. 무엇보다 그는 운전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차장에다 차를 한 달이나 그대로 묵혀 두었다. 회사 동료들이 오다가다,
  “이거 누구 차지? 동네 사람이 여기에다 주차해 놓고 다니나?”
  “아니.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고 버티고 있던데.”
  “버린 거야? 멀쩡한데. 1주일만 더 있어 보고 주인 없으면 내가 타고 다녀야겠다.”
  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때에도 그는 전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나이 또래 남자들이 차를 무슨 자기 분신인 것처럼 애지중지하는 것을 우습게 생각했다. 그래서 동료들이 주말마다 차를 몰고 여행을 떠나거나 애인이나 가족들과 함께 어디론가 신나게 달려가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무슨 구도자라도 되는 것처럼 숙소 근처에서 밤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물론 큰 길 한가운데로 소달구지가 이따금씩 지나다니는 시골의 밤하늘은 꽤 경이로웠다. 빛이 개입하지 않은 투명한 밤하늘을 통해, 수억 년 전에 수억 광년 떨어진 곳으로부터 출발한 별빛들이 무수히 날아와 박혔다. 그는 시골구석에 박혀 있다고 자신을 무슨 정신 장애를 가진 사람처럼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가소로웠다. 그들은 발이 묶이면 마음도 좁아지고 답답해져 버릴까봐 걱정해 주고 있었지만, 그는 저 거대한 우주를 바라보는 데 지금보다 더 빠른 발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차는 그저 애물단지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이었다. 모두가 주말을 즐기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주차장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6628을 제외하고는 단 한 대의 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을이 깊어가고 날씨가 점점 추워지자 그의 별 관찰도 조금씩 곤란한 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유성들이 비처럼 떨어진다는 그날 새벽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망원경을 밖에다 꺼내 놓고 옷을 잔뜩 껴입은 채로 주차장을 어슬렁거렸다. 유성은 비처럼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열 몇 개의 빛줄기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그 광경을 축하하기 위해 혼자서 맥주 캔으로 축배를 들었다. 세 캔 째 마시고 나서 슬슬 취기가 올랐을 무렵 문득 누군가가 같이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물론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은색의 6628만이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싸늘한 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그는 숙소로 올라가 주섬주섬 차 열쇠를 가지고 와서,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들어가 넓은 자동차 앞 유리에 비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닦아 주지 않았으므로 유리에는 먼지가 잔뜩 끼어 있었다. 그는 차 키를 돌려 전기 장치를 켰다.
  ‘와이퍼가 뭐더라.’
  그는 깜빡이를 켰다 껐다 하다가 드디어 와이퍼 돌리는 법을 알아냈다. 스틱을 당기자 세제가 유리창을 향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마치 누군가가 얼굴에 대고 물총을 쏴 대는 것만 같아서 깜짝 놀랐다. 그는 혼자서 깔깔거리고 웃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평소에는 혼자서 중얼거리거나 혼자서 깔깔거리고 웃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는 깨끗해진 앞 유리에 맺힌 맑은 우주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차 안은 따뜻했다. 그리고 꽤 넓게 펼쳐진 앞 유리를 통해서 들어오는 광경이 한결 시원해 보였다. 그는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도 별 좀 볼 줄 아는구나.”
  그러나 그 일이 있고도 둘 사이는 금방 좋아지지가 않았다. 그가 아침까지 차 안에서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6628의 주인이 바로 그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핀잔을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왜 그 차가 자기 차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지도 않고 모른 척 하고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핀잔은 별 문제가 아니었으나 운전 연습을 시켜주겠다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그는 골치가 아팠다. 심지어 외근 나갈 일 시킬까봐 일부러 운전 못하는 척 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듣고 나자 이제는 슬슬 운전을 익히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역시 아무도 없는 주말 오후에 그는 면허를 딴 지 열 달 만에 다시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처음에는 시동이 잘 안 걸리는 바람에 당황했지만 이내 클러치를 꾹 밟아 줘야 시동이 걸린다는 점을 기억하고는 시동을 거는 데 성공했다. 스스스스 스르릉.
  오랜만에 느껴 보는 자동차 엔진 진동에 당황한 나머지 그는 브레이크를 꾹 밟았다. 그러나 기어를 중립에 놓고 있어서 어차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서서히 발을 뗐다. 1단 기어를 넣고 클러치를 살짝 떼면서 액셀러레이터에 오른발을 살짝 올렸다. 그런데 차가 앞으로 가지 않는 것이었다. 차는 꼼짝도 하지 않는데 엔진은 더 심하게 돌면서 무서운 소리를 냈다. 그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덜컹 하는 충격과 함께 시동이 꺼졌다. 너무 오래 묵혀 놓아서 차가 이제 잘 움직이지도 않나 싶었지만 사실은 사이드 브레이크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야. 다 너 때문이야.”
  그는 차를 탓하며 이번에는 제대로 시동을 걸고 제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서서히 앞으로 움직였다. 움직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갈 데가 없었다. 그저 회사 근처를 빙빙 돌 뿐이었다.
  다음 주말에는 근처 딸기밭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시골길이라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아서 좋았다. 두 시간에 한 번 불규칙하게 오는 버스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먼 길을 걸어가기로 마음먹은 인근 마을 사람들은 그의 6628이 언덕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손을 뻗어 태워 달라는 시늉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그쪽으로는 눈길 한 번 보내지 않고 단칼에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경사 급한 언덕에서 차를 멈췄다가는 시동이 꺼진 채 뒤로 슬슬슬 굴러가는 꼴을 보이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완전히 독학으로 운전을 다시 익힌 셈이었다. 도로에 나가 차선을 바꾸고 좌회전 신호를 받을 수 있게 되기까지 무려 두 달이나 더 걸렸다. 그 동안 6628은 별 말썽 없이 그의 명령을 묵묵히 따랐으나, 지나가는 차들이 빵빵거리거나 아예 창문을 내리고 뭐라고 욕을 해 대는 것을 애써 외면해야 할 때면 그는 늘 그렇게 중얼거렸다.
  “너 때문이야.”

3.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지섭은 정신이 없었다. 일이 일이니만큼 관할 구역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은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문화부 기자가 적극적으로 나설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지섭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이번 사건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평양에서 대폭발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얼마나 큰 폭발인지, 그 일의 여파가 얼마나 클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누군가는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부나 군 관계자들은 아직 파악이 되지 않았다고만 했다. 사건이 발생한지 겨우 여덟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럴 만도 했다.
  뉴스는 거의 같은 이야기만 두 시간째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평양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맨 처음 미국 언론 쪽에서 흘러나왔다. 북한에 폭발이 있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이 관측된 적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핵실험이다 아니다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다만 그 파급 효과가 적지 않은 만큼 늘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룡천 열차 폭발 때도 김정일을 암살하기 위한 테러였다는 설이 있었는데 문제는 북한 관련 소문이 대개 그렇듯 확인할 길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 식의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속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는 아무 이야기도 안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뭔가 좀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도 있고, 외신 평가를 들려줄 수도 있지만 전문가나 외신들도 평양에서 대폭발이 있었다는 사실만 가지고는 더 이상 구체적인 이야기를 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는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는 이야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들이 전문가이고 권위 있는 외국 언론사지, 딱 거기까지만 알고 있으면서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만큼 신뢰는 받을 수 없어지는 셈이었다.  
  문제는 조금 전에 미국 쪽 언론에 공개된 위성사진이었다. 당연히 미국 쪽에서는 폭발 현장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이야기만 반복해서 떠들어대는 뉴스보다 할 말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르겠다고만 말하고 있다. 어쩌면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에서도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중국은 물론이고 어쩌면 일본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얼마 전에 띄운 인공위성은 그러려고 띄운 것이니까. 하지만 뭔가를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모르겠다고만 대답해도 되는 정도의 일일까? 지섭은 혼란스러웠다. 신의주 근처 룡천이 아니라 수도 평양에서 일어난 폭발이었다. 정부에서 추정하고 있다고 발표한 것처럼 질산암모늄 운반 열차가 폭발한 것이라고 치자. 룡천 폭발 때와 똑같은 경의선으로 똑같이 가공할 폭발력을 지닌 질산암모늄을 운반해서 그것도 수도 평양까지 들어가겠다는데 위에서 그렇게 얼렁뚱땅 허락이 났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그 정도만 돼도 북한 내 권력 마찰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핵폭발이었다면? 최소 6개쯤 된다는 그 핵무기를 김정일이 아닌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서울을 공격할지 안 할지 알 수 없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모른다고만 해도 되는 문제인지, 아니면 그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시나리오들이 권위 있는 언론이 상상해낼 수 있는 수준에 못 미치기 때문에 드는 생각인지 그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진짜 알 수 없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미국이 왜 현장 사진을 흘린 거지?”
  최 선배도 그렇게 물었다. 지섭에게도 그 부분은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위성사진이야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실시간 사진은 아니다. 미국 측의 이야기는 국방부가 현장이 찍힌 사진을 실수로 언론 브리핑 때 흘려버리고는 허겁지겁 보도를 중지시켰다는 소리였지만 어쩐지 믿음이 안 갔다. 미국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믿기보다는 그런 식으로 해서 정보를 일부러 흘린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왜? 그는 머릿속에 또 하나의 시나리오를 그려 보기 시작했다. 평양에 떨어진 것은 핵폭탄이 맞고 김정일을 암살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 측 혹은 한국 측 첩보에 따르면 핵무기는 김정일이 아닌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있다. 미국은 이 사람들이 서울이든 어디든 공격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하자고 주장하고 우리 정부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버티고 있고, 그래서 미국은 우리 여론을 자극해서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서 사진을 흘렸다.
  그러나 그는 그 시나리오를 곧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진에 뭐라고 나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누군가가 여기저기 전화를 해가며 짜증스러운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국방부 뭐래?”
  “아직 검토 중이라는데요.”
  “비공식 라인도 없어?”
  “찾아보고 있습니다.”
  “국방부 흉내내냐? 우리도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민간 전문가 없어? 일본이나 미국에라도. NRDC 같은 데서 핵 시설 위성 감시 브리핑하잖아. 거기 전문가 없대? 찾아봐야 될 거 아니야.”
  지섭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번쩍 눈을 떴다. 민간 전문가라는 소리를 듣자 지섭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한참 후에, NRDC에서는 그쪽에 협력하고 있던 폭발 현장 분석 전문가가 얼마 전에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바람에 자기들로서도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고 누군가가 대답했다. 지섭은 아까 자기 집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지만 받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공중전화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지섭은 계속해서 그에게 전화를 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자기 집 앞에 가 볼 생각이었다.

4.


  그 시각에 지섭의 집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민소는 온통 축축하게 젖은 몸으로 6628에 앉아 히터를 틀어 놓고는,
  “너 때문이야. 지금 평양에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는데 전문가께서 지금 이러고 있어서야 되겠냐? 왜 열쇠는 바꿔치기해 가지고.”
  하고 6628에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심지어 그녀를 맨 처음 만나던 그 토요일 오후에도 그는,
  “너 때문이야.”
  하고 6628을 나무랐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운전 미숙 탓이었지 6628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는 후다닥 차에서 내려서 차 뒤쪽으로 갔다. 다행히 그녀는 심하게 부딪치지는 않았는지 쓰러져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쇼핑 카트가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열 번쯤 한 뒤에도 그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가 다친 데는 없느냐는 말과 죄송하다는 말을 한 열 번쯤 더 하고 나서야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다친 데는 없고, 좀 놀라서 그래요. 조심하셨어야죠.”
  마침내 그녀가 꽤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는 긴장이 풀렸는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병원에는 안 가도 될 것 같고, 집에나 데려다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너무 미안해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바람에 하는 소리였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조수석에 앉았다. 그가 길을 하나도 몰랐기 때문에 그녀는 마치 네비게이션 장비라도 되는 것처럼 자세하게 길 안내를 해야만 했다. 그는 시내 주행이 처음이었다.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창문을 조금 내려야 할 지경이었다. 우회전해야 하는 곳 앞에서 오른쪽으로 차선을 바꾸지 못해서 한참을 더 간 뒤에야 유턴해서 돌아와야 했다. 그의 손에는 땀이 잔뜩 배어 있었다.
  미숙한 실력에 시내 주행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주차 문제도 있고 해서 그는 언제나 할인매장과 숙소 사이만을 오갔다. 그것도 매번 같은 길로만 가다가 그나마 요즘은 다른 길을 통해 가 보기도 하는 정도였지만, 완전히 낯선 길을 가는 모험을 할 때는 아직 아니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험의 순간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다.
  그녀는 창문 위에 달려 있는 손잡이를 한 손으로 꼭 쥐고도 목소리만은 침착하게 유지하면서 그에게 길 안내를 했다. 마침내 집 근처에 다다라 차가 멈춰 섰을 때 그녀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도 역시 따라 웃었다. 그러나 차를 인도 쪽으로 바짝 붙여 세워 두지 못한 바람에 뒤에 서 있던 차가 경적을 울려댔다. 그러자 그녀는,
  “안 되겠다. 제가 어서 내릴게요.”
  하고 말하고는 허겁지겁 짐을 챙겨서 차 밖으로 나갔다. 그는,
  “혹시 어디 아픈데 생기면 꼭 연락 주세요.”
  하면서 명함을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녀는 대답할 여유도 없이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차를 출발시키느라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는 그를 보면서 그녀는 또 한번 깔깔거리며 웃었다.
  “너 때문이야.”
  하고 그는 6628을 나무랐다. 하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아까 조금만 더 세게 부딪쳐서 내일쯤 갑자기 어딘가가 진짜로 아프게 만들어 버렸으면 연락이 꼭 왔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금방 사라졌다. 그 순간 그에게는 당장 해결해야 할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6628에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다음날 저녁에 그녀는 특별히 아픈 데가 없는데도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주말에 그는 난생 처음으로 6628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은색이라 비를 맞든 황사가 지나가든 크게 티가 나지는 않는 편이었지만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보니 그 강인한 은빛 피부가 한층 돋보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오래오래 이어졌다. 그녀를 만나는 동안 그는 한결 남자다워졌다. 덕분에 6628도 내부까지 한결 깨끗해질 수 있었다. 6628은 야성미가 물씬 풍기는 우아한 코너링으로 그 작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누볐다.  그는 곧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녀의 성장 과정과 그녀의 꿈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다. 그러니까 둘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자기가 간직한 꿈의 정체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해 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6628에게도 해 본 적이 없고 자기 자신에게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비밀이어서가 아니고 할 이야기가 없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끝을 알 수가 없었다. 아무 길이나 대충 가 보는 식의 모험을 할 준비는 아직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막연한 동경 같은 것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를 할 것이라는 생각은 장래에 대한 계획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현재의 상태보다 훨씬 더 불확실한 상태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가 6628과 함께 한 마지막 반년에 이르렀을 때 그는 그녀를 이미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굳은 사랑은 이미 끝을 향해 아슬아슬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집안에서 이제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냐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따금씩 그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농담처럼 가볍게 털어놓곤 했다.
  “결혼할 것도 아니면 그만 정리하고 선이나 보래.”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결혼이 아무리 촌스러운 관습이라고 해도 영영 모른척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청혼하는 장면을 몇 번이나 상상해 보았다. 낭만적으로 청혼해서 그녀를 감동시킬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모험은 다시 한 번 미처 준비가 끝나지 않았을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그가 그 작은 도시를 떠나 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슬퍼하거나 섭섭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축하해 주었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이다. 물론 그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뜯어 말리느라 바빴다. 그는 그 사람들에게 일일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해명할 도리가 없었다. 몇 년 돈을 벌어 봤지만 이 길로도 장래가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라고 대답하는 것이 다였다. 그것은 어쩌면 어리고 대책 없게만 들리는 대답이었다.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가장 친한 친구인 지섭 역시 대답할 수 없는 물음들만 그에게 던져댔다.
  “바디 카운트라고? 그게 뭔데?”
  “시체 세는 거.”
  “시체? 그거 하면 전공 살릴 수 있냐? 지금처럼 물리학 전공 살려서 잘 나가고 있으면 됐지 십대도 아니고 이제 와서 무슨 방황이래?”
  지섭의 반문에 그는 또 말문이 막혔다.
  “아 몰라. 나는 할 거야. 무조건.”
  그는 대답을 끝마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가 시체 세기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그는 책을 읽다가 1차대전 2년째인 1915년 1월에 독일군 병력이 4,357,934명이었다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는 난생 처음으로 학문적인 차원에서 진지하게 궁금증이 생겨났다. 아니 그 시절에 도대체 어떤 군대가 1단위까지 정확하게 병력을 셀 수 있단 말인가. 4백만도 아니고 4백 30만도 아니고, 전쟁 중에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아니면 몰래 어디로 도망가서 살아 있는지도 모르는 마지막 1명까지 세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 사람들은 어떻게 그 숫자를 만들어낸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지만 확인해 볼 길은 없었다. “이히 리베 디히.(Ich liebe dich.)”밖에 모르는 실력 가지고는 독일어를, 그것도 옛날 독일어를 읽을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제를 약간만 비튼 것이,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세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 숫자는 늘 말썽이었다. 어디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정부군이 총질을 해 댔다는 뉴스 뒤에는 열 명쯤 죽었다는 정부 측 발표와 최소 500명의 시체를 봤다는 서양 사람들의 발표가 뒤따른다. 전쟁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융단폭격 후에 몇 명이나 죽었는지를 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융단폭격을 하기 전에 몇 명이나 죽을지를 계산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큼 써먹을 데가 많은 일이다. 자기 군대 병력을 만 단위까지 셀 수 있는 나라와 1단위까지 셀 수 있는 나라가 싸우면 1단위까지 세는 나라가 이기는 법이니까. 그래서 그런 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국내에는 없었다. 그는 바로 그 사람들과 연락이 닿았다. 그 사람들이 말했다. 핵무기 사상자 수를 평가하는 일인데 지원해 보라고.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체 세는 방법을 공부하러 미국에 간다는 말에 일단 독실한 기독교인인 부모님들이 경악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공부하러 간다고만 하고 떠났으면 별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럴 것을, 시체를 세러 간다는 친구를 뜯어 말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발 벗고 나섰다.
  반대하지 않는 것은 6628과 그녀뿐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다가 돌아오라고 말했다. 기다리겠다고 말하려는 그녀를 그는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의 말은 그녀가 끼어들 틈도 없이 거세게 몰아쳤다. 긴 이야기였지만 요지는 간단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아니, 돌아오지 않는다. 기다리지 마라. 그 순간에 그는 직감했다. 알았다고 말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는 그녀였지만 아마도 그녀는 계속 그를 기다릴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작별하고 6628로 돌아와 보니, 6628의 시야에 그와 그녀가 마지막 작별의 말을 나누던 곳이 넓은 유리창을 통해 훤히 내다보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멋쩍게 말했다.
  “다 봤어?”
  시동을 걸고 후진 기어를 넣는데 추운 날씨에다 습기까지 차서 그런지 벨트에서 끼이이이익 하는 처량한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러자 그는 또 6628을 나무랐다.
  “어쩌라고. 다 너 때문이잖아.”
  숙소로 돌아와 곧바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새벽 세 시에 잠이 깬 뒤로는 통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별이 보이고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이 보였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자 6628이 보였다. 그는 옷을 하나 걸쳐 입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는 무슨 북쪽 나라 마법사의 마법에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서리로 온통 덮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서리 결정이 쭈뼛쭈뼛 얼어 들어간 흔적까지 선명했다.
  “나 잘 하고 있는 걸까? 별 것도 아닌데 고민하고 있는 거 아니야? 니 생각은 어때? 세상에 여자는 많잖아. 세상에는 직장도 많고, 돈도 많고. 어때, 니 생각은?”
  6628은 말이 없었다. 다만 그가 운전석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마치 겨울만 끊임없이 계속되는 북쪽 나라의 어느 들판에서 눈보라에 꽁꽁 언 몸으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거대하고 충직한 철거인이 그 육중한 팔을 뻗어, 전쟁의 상처로 싸늘하게 체온을 잃어가는 주인을 변함없이 강인한 그 품속에 끌어안아 올리듯, 뻣뻣하게 얼어붙은 앞문을 열고 조용히 그를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5.


  지섭이 자기 집 앞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차로 민소의 집 근처로 향했을 무렵, 민소는 이미 차를 몰고 서울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꿈에서 가끔 6628을 운전했다. 어렵게 익힌 기술을 잊지 않기 위해서 사람의 뇌는 그런 식으로 가끔씩 복습을 한다고 했다. 그가 유난히 운전하는 것을 싫어했던 까닭인지 꿈에서도 그는 운전만 했다 하면 사고를 내곤 했다. 새로 차를 사지도 않았다. 유지비를 대기가 어쩐지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귀국하고 나서도 6628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그는 어쩐지 6628을 보면 그녀가 생각날 것만 같았다.
  6628은 나이에 비해서 잘 달렸다. 6628의 시야를 통해서 보는 밤거리는 시원시원했다. 낮에는 차들이 많아서 운전하기가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지만 밤에는 달리는 기분이 났다. 기분 같아서는 바다까지라도 쭉 달려 보고 싶었지만 기름도 충분하지가 않았고 기름을 더 넣을 돈도 없었다. 사실은 바다까지 가는 길도 몰랐다.
  아침이 얼마 안 남았고 비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집을 알고 있었다. 영원히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던 그녀는 그가 떠나고 1년 만에 결혼해서 서울에 정착했다. 귀국하고 나서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집으로 바래다주는 길에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걸었다. 그러고 보니 늘 차를 타고 다녀서 그런지 그렇게 긴 거리를 같이 걸었던 적이 별로 없었다. 둘은 별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잘 살고 있느냐고 서로에게 묻지도 않았다. 성공하고 잘 살고 그래 보겠다고 떠난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헤어지기 전에 그녀가 작별인사 대신 이렇게 말했다.
  “아직 못 들었나보네. 나 이혼했어. 그 사람 나를 잘 모르더라.”
  그는 그 말을 따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술을 움직였다. 그는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눈동자 속에 있는 머나먼 은하로부터, 5년 전에 출발한 별빛이 그의 눈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그 별빛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그는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못 본 척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어떻게 아는 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6628을 나무랐다.
  “너 지금 은경이네 집 쪽으로 가고 있는 거냐? 아직 못 들었나보네. 은경이 결혼한 데다 애도 있어. 이 야심한 밤에 찾아갔다가 덜컥 애까지 딸린 여자를 맡아 버리면 내 앞가림도 못하는 마당에 낭패다, 낭패.”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방향을 돌렸다.
  “너 때문에 이렇게 멀리까지 왔잖아. 아침부터 할 일도 많겠구만.”
  그는 아침이 밝자마자 지섭이 다짜고짜 달려들어 이것저것 물어볼 것을 상상했다. 어쩌면 지금도 그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괘씸한 놈, 룡천 같은 촌구석도 아니고 대동강 줄기에서 폭탄이 터진 마당에 전문가를 문전박대했겠다. 문전박대가 뭐야. 문 앞에 가 보지도 못하게 하다니.’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자신의 존재감이 커질 것 같은 기대로 서서히 부풀어가고 있었다.
  ‘뭐, 뉴스 좀 보라고? 하루 종일 뉴스만 들여다봐라. 쓸만한 소리가 나오나.’
  그는 라디오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지금 막 기억해 냈다는 듯 라디오를 켰다. 그러고 보니 궁금했다. 앞으로 학계에서 몇 년은 우려먹을 수 있는 대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순간에 정작 자신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지 않은 것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는 뉴스가 나올 때까지 라디오 채널을 돌렸다. 6628 곁으로는 검은 차 수십 대가 지나쳐 고속도로 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라디오 음량을 높였다. 경의선 서평양역 부근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발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가 생각한대로 자세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아무도 모를 리는 없는데. 국방부라던가 정보기관의 누군가는 알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순간에 또 검은 차들이 줄을 지어 6628을 앞지르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또다시 라디오에서는 위성사진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연 치고는 너무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는 어쩐지 저승사자를 백 명쯤 실은 검은 차의 행렬이 남쪽으로 달려가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뭔가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그는 근처 지하철 역 근처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워 놓고 역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저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워낙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어서 그런지 텔레비전이 일찍부터 켜져 있었다. 분위기로 봐서 뉴스는 아마 밤새 계속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한 10분쯤 말없이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라디오에서 이야기한 위성사진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사진이 15초쯤 화면에 비쳤다. 그는 순간 호흡이 아랫배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가슴께까지만 들어갔다가 다시 뱉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너무 짧은 시간이라서 자세히 볼 수 없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않았다. 또 한참을 기다렸다. 폭발을 설명하기 위한 시나리오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시 문제의 위성사진이 나왔다. 사진은 폭발의 중심에서 비껴 있었다. 충격을 줄이기 위해 누군가가 일부러 고르고 고른 사진이었다. 위성 자체는 너무나 정직해서 사건의 초점을 그렇게 비껴서 담지 않는다. 그것은 폭발 장소를 중심으로 해서 찍은 영상이 아니라 폭발의 직접 영향을 받은 거대한 원의 가장자리 부분 한 군데만을 확대해서 찍은 것이었다. 폭발의 중심은 훨씬 북서쪽에 있었다. 화면에는 다만 폐허가 그려내고 있는 부채꼴의 일부가 북서쪽에 나타나 있고 나머지 부분에는 무너진 건물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온 몸이 빳빳하게 굳어버린 것 같았다. 5분쯤을 그렇게 서 있다가 그는 공중전화로 달려가서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지만 지섭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섯 번쯤 더 통화를 시도했는데도 연결이 되지 않자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계단을 다시 뛰어 올라갔다. 지하철역에서 나오는데 검은 차 일곱 대가 줄을 지어 달려가는 모습이 또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무렵에 지섭은 방송국으로 돌아가서, NRDC에서 말했던 민간 전문가를 추적했으나 행방을 놓치고 말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전화기를 자기 차에 던져두고 내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위성사진이 공개되고 이미 몇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사진에 대한 해석도 하나둘씩 나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들 추측이라는 말을 꼬리에 달고 있는 해석이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의견 일치를 보이는 부분들도 있었다.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아도 시가지의 폐허는 대강 부채꼴 모양의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 곡선을 검토해 볼 때 폭발의 중심은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은, 평양시 북쪽의 경의선 서평양역과 지하철 붉은별역 사이 어디쯤이라는 것이다. 거리로 따지자면 서평양역보다는 오히려 붉은별역에 가깝다는 것이 공통된 해석이었다.
  물론 건물의 붕괴 정도가 워낙 광범위해서 지도와의 대조도 어렵고 곡선의 모양도 정확한 원의 일부라고 보기에는 많이 일그러져 있었지만, 이 해석이 틀리지 않다면 룡천 사고 때처럼 질산암모늄 혹은 다른 종류의 화학 물질을 실은 기차가 경의선 위에서 폭발한 것 같다는 정부 발표는 믿을만한 게 못 됐다. 민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확신을 가지고 내리는 결론은, 최소한 지진은 아니라는 것 뿐이었다.
  그는 한 시간 동안이나 들여다보고 있던 평양시 지도 북서쪽에 있는 축적을 손으로 쟀다. 한 칸이 500m, 두 칸이 1000m. 어림잡아도 붉은별역에서 능라도 공원까지는 거의 3km나 떨어져 있었다. 붉은별역에서 능라도 5? 경기장 사이에 있는 모든 건물을 붕괴시킬 수 있는 폭발물이라면 적어도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선배. 지금 제가 생각하는 거 말고 선배가 아는 폭발 중에서 저렇게 큰 폭발이 또 있어요?”
  “가능하다잖아. 폭발 위력 자체는 그만큼 클 수도 있대. 핵무기가 아니어도.”
  “진짜일까요?”
  “진짜겠지. 금방 들통이 날 거짓말을 왜 하겠어? 아 근데 군 관계자들은 다 어디에 있다는 거야? 자리에 있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언론 너무 따돌리는데. 정부 관계자들도 아예 행방을 모르겠다는데. 어디 모여서 동원 선포할까 말까 회의라도 하고 있는 거 아니야? 혹시 가족들이라도 몰래 빼돌릴 궁리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나같이 할 일 없는 스포츠 전문 기자는 고위층 가족들 행방이나 추적해야 되나?”
  선배는 장난처럼 말하고는 실없는 농담이었다는 듯 가볍게 웃으면서 지섭에게 말했다.
  “그 민간 전문가라는 친구나 찾아 봐.”
  “그러게 말이에요. 자식이 갈 데도 없는데. 학교에라도 갔나?”
  “전화해 봐.”
  지섭은 자기 전화기를 찾는 대신 회사 전화기를 들고는 사무적인 투로 민소가 강의를 나간다는 학교 아무 경비실이나 대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6.


  그 무렵 6628은 방송국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민소는 길가에 공중전화 부스가 나타나자 갑자기 차를 세우고 문도 제대로 닫지 않은 채 그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오는 동안 아무 구멍가게나 들어가서 나라 일을 하는 사람이니 전화 한 통만 급하게 쓰자고 말해 봤지만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정보기관 요원 흉내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날이 밝아오는데도 지섭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신자 부담으로 114에 전화를 걸어서 방송국 전화번호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 자식은 도대체 뭐하는 거야?”
  그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라디오에서는 뭔가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부분에 가서는 역시 모르겠다고만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말밖에 못하면서 전화도 받지 않고 바쁘게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을 지섭이 고약하게 여겨졌다. 생각해 보면 자기 전화를 기다리고 않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사실 자신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위성사진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아니다. 외국에서 활동할 때도 겪었지만 중요한 사건의 실시간 사진은 민간에는 공개도 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미국이든 러시아든 정찰기에서 찍은 사진부터 위성사진, 무인 항공기 사진까지 수십 년 동안 내내 그런 귀한 사진만 보고 살아온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방송국에서 이미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쯤 전문가를 구했다면 굳이 지섭이 자신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시동도 걸지 않은 자동차 계기반을 보면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신이 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비아냥거리느라 한 말마따나 지금이야말로 시체를 원 없이 셀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다고 밖에 말하지 못하지만 자신만은 분명히 말해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유학을 떠난다고 했을 무렵이나 지금이나 그를 지지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때도 6628과 그녀를 빼고는 아무도 그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지 않았다.
  라디오 뉴스에서 이때까지는 못 들어본 이야기가 새로 들려왔다. 역시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부 공식 논평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이 입을 열었다는 것이었다. 중국은 미국을 비난했다. 그는 호흡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왜 중국은 다짜고짜 미국을 비난하고 나섰을까. 왜 이때까지는 침묵을 지키다가 이제 와서 침묵을 깼을까? 저 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내내 입을 꼭 다물고 있다가 이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로 자기들끼리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는 6628에게 말했다.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하나 날아올 것 같다.”
  그는 신호도 무시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위반 단속 카메라가 6628의 은빛 자태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래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단지 연료가 얼마나 버텨 줄지가 걱정이었다. 해가 길어서 날이 금방 밝아 오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차들이 늘어서기 시작하면 낭패였다. 그는 조금 전에 본 위성사진을 떠올리면서 6628에게 투덜거렸다.
  “너 때문이야.”
  채 3분도 되지 않아서 그는 다시 차를 길가에 세우고 아무 가게나 들어갔다. 그는 주인아줌마에게, 아내가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빨리 진통이 와서 병원에 갔다는데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위치도 확인 못하고 아무것도 안 가지고 왔노라고 대충 둘러대고는, 전화기를 빼앗듯이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114에 전화해서 방송국 전화번호를 물었다. 몇 번을 거친 끝에 마침내 통화가 연결되자 그는 소리부터 질러 댔다.
  “아, 드디어 받는구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거래? 500미터 상공에서 폭발했어. 도대체 왜 아무 것도 없는 석촌동 숲 위에다 터뜨린 거야? 김정일 암살이야 뭐야? 거기에는 왜 갔대? 사냥이라도 갔대? 몰라? 그럼 어느 관저에 있었을 것 같대? 거기에 터뜨려 가지고 15호 관저고 동평양 관저고 기별이나 가? 지붕 위에 터뜨려도 안 무너진다며. 국방부는 뭐래? 몰라? 북한 애들 그렇게 조그만 걸로 쪼개서 가지고 있으면 도대체 몇 개나 가지고 있는 거야? 여섯 개밖에 안 가지고 있는 거 맞아? 그만한 거면 열 개도 넘게 가지고 있겠던데. 몰라? 미국에서는 뭐래? 그것도 몰라? 김정일은 뭐라 그랬대? 살아 있대? 핵무기 가진 놈은 누구래? 김정일이 실수한 거래? 모른대? 도대체 어느 공무원 놈이 그것도 모른대? 동원령은 내렸어? 데프콘은? 그래? 그럼 군에서는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미국은 사진 왜 흘렸지? 우리 정부에 압력 넣는 거 맞지? 확인 안 돼? 그것도? 맞을 거야. 군 장성들 소재 모르지? 없대? 연락 안 된대? 도망간 거야, 선제공격하려는 거야? 벌써 전쟁 시작한 거 아니야? 그게 아니면 중국은 왜 갑자기 미국을 욕하고 나오는 거지? 중국 대사관 날려버린 건 미국이 아니잖아. 아니, 알아낸 것도 하나도 없으면서 왜 전화도 안 받아?”
  지섭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전화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소는 답답했다. 그는 자꾸만 검은 차들의 행렬이 마음에 걸렸다. 본부로 내려가는 건가? 자기들은 벙커에 들어가고 가족들만 옮긴 건가? 어느 쪽이든 군인들은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섭이 물었다.
  “사진은 어때?”
  민소는 다시 한 번 갑갑함을 느꼈다. 그는 소리를 질렀다.
  “어떻긴 뭐가 어때?”
  그는 조금 전에 본 위성사진이 핵폭발 흔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을 할 수가 없었다. 미국이 폭발 현장의 한 구석만 공개한 것은 그 와중에도 남한의 노약자와 어린이를 배려한 미국식 인도주의 정책이 틀림없었다. 그 정도면 폭발 지점으로부터 반경 150m 정도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폐허가 되어 있거나 먼지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불길에 쓸려간 영혼조차 안 남아 있을 것이다. 나머지 평양시 대부분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을 것이고, 그 위로는 시속 800km 이상의 후폭풍이 지나간 흔적이 사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건물 잔해가 폭발 중심 쪽으로 쓸려간 흔적이 있었고 김일성 종합 대학은 아예 녹아내려 있었다. 화면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중국 대사관 부근까지는 전부 그 모양으로 녹아 내렸을 것이다. 모란봉 공원은 불덩어리일 거고, 장군님 미라가 모셔져 있는 금수산 기념 궁전도 최소한 지상 구조물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있었다.
  “그만한 게 서울 시청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청계천이나 명동 같은 건 먼지 하나도 안 남아. 그 순간에 그쪽을 보는 사람은 전부 다 눈이 멀어. 수도권에 있는 사람 누구라도 그쪽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눈이 멀어. 오늘 날씨가 어떻다고 했지? 바람이 남동풍이었나? 그럼 낙진은 북쪽으로 갈까? 야! 지섭아! 정신 차려! 너 그러고 있을 때 아니야. 뭐든 해. 뉴스에 내. 핵폭발 맞아. 내가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핵폭발 맞아. 정부에 압력 넣어. 차라리 선제공격하라 그래! 안 그러면 우리가 먼저 다 죽어. 이번에는 미국 말이 맞아! 토마호크나 그런 걸로 핵탄두 딱 열다섯 개만 떨어뜨려 달라고 그러라고!”
  망연자실해 있는 지섭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모두 다 해 주고 전화 인터뷰 녹음까지 다 해주고 나서 그는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가게 주인 아줌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뭐랴? 산모는 괜찮지? 애는 괜찮여?”
  그는 잠깐 동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주인 아줌마를 바라보고 있다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그 표정을 보고는 그때서야 ‘아 귀가 잘 안 들리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까는 ‘진통’이라는 말 정도만 대충 알아듣고는 그의 옷차림이나 행동을 보고 눈치껏 추측한 모양이었다. 한순간 꽉 들어차 있던 긴장이 풀어지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편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다 괜찮대요.”
  “첫 애지? 첫 애 낳을 때는 다 그랴.”

7.


  “애는 잘 낳을 자신 있는데.”
  너는 도대체 잘 하는 게 뭐냐고 장난처럼 묻는 말에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가 반문했다.
  “뭐?”
  “딸이면 딸, 아들이면 아들, 맞춤형 주문 생산으로다가 낳아줄 수 있을 것 같아. 아, 누가 프러포즈 좀 안 해 주나.”
  그 작은 도시 근교 시골길에서 눈 덮인 도랑에 빠져 꼼짝도 못 하고 있는 동안에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바득바득 우겨서 눈길에 운전대를 잡았다가 낭패를 보게 된 게 민망했던지 쉴 새 없이 뭐라고 떠들어 댔다.
  그와 헤어지고 2년 뒤에 낳은 그녀의 첫 아이는 코만 엄마를 닮은 딸아이였다. 어느 날 문득 전화가 걸려오더니,
  “나 딸 낳았어.”
  하고는 무슨 대답이라도 기다리는 듯이 아무 말이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그는 그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 역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침묵이 길어지자 그는 점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없는 주변머리에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그는 한참을 더 망설이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그 말을 꺼냈다.
  “그 아이 혹시, 내 아이니?”
  잠깐 동안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거의 소리를 지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미친 거 아니야? 너 거기 간지 2년이나 됐잖아.”
  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사이에 그녀는 머나먼 국제통화 전화선 저편에서 수화기를 들고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웃겨. 너 내가 제왕절개 안 한 게 다행인 줄 알아라. 아, 배야. 어디서 책임지지도 못할 개그를.”
  그녀는 그렇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걱정 없이 웃을 수 있어서 좋다고도 했다. 또 그가 말할 차례가 되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어색한 침묵만이 흐르다가 그녀가 먼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정말로 뻔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 순간에도 그가 불러만 준다면 그녀는 당장에라도 자기 삶을 떠받치고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달려올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첫 아이. 이혼하면서, 그녀는 코를 쏙 빼 닮은 그 아이를 아이 아빠에게 보냈다고 했다. 직접 묻지 않아도 그런 소문은 바람을 타고 꽤 멀리 전해졌다.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아이를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 말조차 건네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영영 그러기가 힘들어질 것 같았다.
  6628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집 쪽이었다. 6628은 그에게, 왜 살 수 있는 쪽으로 가지 않고 죽기 딱 좋은 쪽으로 달려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방송국 쪽으로 가느라 낭비한 시간이 아까울 뿐이었다. 그래도 중간에 전화 통화가 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직 출근할 시간은 아니었다. 그녀가 출근하기 전에 만나야만 했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죽음은 그의 머리 위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가느다란 실에 매달린 거대한 검은 덩어리가 모두의 머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게 떨어질 정확한 순간은 알 수 없었다. 어디에 떨어질지도 몰랐다. 혹시 그게 바로 머리 위에 떨어지는 순간에는 그도 6628도 한 순간에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혹시 저 앞쪽 먼 곳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곧바로 눈이 멀어버릴 것이고, 그러면 자기 대신 6628이라도 알아서 길을 찾아가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운전하고 있는 철거인은 그 정도의 인공지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6628은 다른 차들보다 섬세한 감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섬세한 신경 다발도 핵폭발 때 방출되는 어마어마한 전자파 때문에 곧바로 갈가리 찢겨나가고 말 것이다. 그러면 6628도 멈춰서야 한다. 그러고 나면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온 도시를 뒤덮는 검은 비를 바라보면서 그 비가 그칠 때까지 꼼짝없이 길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옆 자리에 놓여 있는 라면과 맥주와 계란은 마지막 만찬의 재료가 될지도 모른다.
  맹렬하게 질주하고 있는 6628의 기세와는 달리 그는 점점 침울해져 갔다.
  ‘얼마나 많이 죽어나갈까? 60만? 100만? 모르겠다. 그냥 아무도 떠나지 말걸. 나는 왜 그런 걸 공부해 보겠다고 떠났을까.’
  때늦은 후회가 밀려 왔다. 끔찍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운 좋게 살아남는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폐허가 되어버린 이 끔찍한 두 도시의 위성사진을 읽는 일을 그에게 부탁할 할 것이다. 거절할 수 있을까? 그 속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팔다리를 추려 내서 시체가 몇이나 되는지 세어 보라고 누군가가 시킨다면 과연 발뺌할 수 있을까. 그 일을 시키는 사람이 은경이라면 싫다고 할 수 있을까. 자기를 떠나서 그따위 일을 배워 왔으니 이제 어디 원 없이 세 보라고 비아냥거린다면 그때도 숨을 곳을 찾을 수 있을까.
  ‘아! 그냥 구멍가게나 지키면서 오락이나 하고 있을걸.’
  때늦은 후회였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많이 와 있었다.
  위성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뭔가 다른 존재가 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저 아래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사람은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을 거인의 시점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주는 우월감을 그는 몸 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가상의 프로젝트에서였지만 그는 위성사진을 통해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스무 개도 넘는 핵무기를 평양에다 떨어뜨려 보았고 서울 시내에도 구석구석 열네 개나 되는 핵무기를 떨어뜨려 보았다. 결과는 언제나 비슷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인간의 죽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원래는 반대쪽을 찍고 싶었다. 내려다보는 쪽이 아니라 허블 망원경처럼 그렇게 높은 데까지 올라간다고 해도 더 높은 곳만을 올려다보고 싶었다. 그는 6628에게 말했다.
  “너 때문이야.”
  그는 자신이 무슨 거인이나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라디오에서는 드디어 평양 폭발 사고가 핵폭발로 밝혀졌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마침내 군인들은 세 시간 전에 이미 북한 핵 시설로 추정되는 곳 최소한 일곱 군데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했다는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그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니 어쩌라고? 공습경보가 울리면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뛰기라도 하라고?’
  은빛의 철거인 위에 아침 햇살이 내려와 앉았다가 눈이 부시도록 강렬한 빛으로 모습을 바꾸고 어디론가 반사되어 나갔다. 6628은 그의 이야기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남쪽 나라의 마녀가 만들어낸 붉은 용의 머리 셋 중 가운데 머리를 향해 달려드는 거대한 철거인처럼 금속으로 된 매끈한 피부가 서서히 열로 뜨겁게 달구어져 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가슴에는 붉은 용의 신기루에 마음까지 지쳐버린 하얀 피부의 주인이 쉴 새 없이 마녀에게 신의 이름으로 저주를 퍼부어 대고 있었으며, 자신은 이제껏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는 속도로 오래 전에 떠나온 그녀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6628은 어쩌면 속으로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가 기다려주지 않을까봐 두려웠고,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는 거절당할까봐 겁이 났고 지금은 괴물처럼 일그러진 자신을 그녀가 무서워할까봐 망설이고 있었지만, 사실은 몇 년을 기다려 달라고 하든 누구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몇이나 낳았든 그가 어떤 사람으로 변했든 그녀는 늘 그를 바라보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에 하나 그녀가 퇴짜라도 놓는다면 그때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은 늘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러나 모험은 언제나, 근사한 정장에 넥타이를 빼 입고 있지 못해서 근사한 고백을 하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을 때 시작되는 법이다. 예를 들면, 생애 마지막 날에.
  주인은 아직도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있지만 아마도 그녀라면 그를 이해해 줄 것이다. 지금 곧 그녀를 만나서 어서 타라고 말 해 주기만 하면 그녀는 자세한 것은 더 묻지도 않고 6628의 어깨에, 주인의 옆자리에 올라탈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주인을 진정시켜줄 것이다. 주인이 똑바로 핸들을 잡아주지 않으면 자신은, 다시는 이렇게 터져오를 것만 같은 심장을 가진 철거인이 되어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이르기에는 아직도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어느 가로수길 위를 온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었을 때, 저 먼 곳에서부터 덜컥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뜬금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민소는 액셀러레이터를 꾹 밟으면서, 저녁에 애국가도 안 틀어주기 시작한지가 언젠데 도대체 이런 깔끔한 도시의 어느 구석에 저런 처량 맞은 공습경보를 틀어 대는 스피커가 숨겨져 있었는지가 의아하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mirror
댓글 24
  • No Profile
    yunn 06.07.29 12:58 댓글 수정 삭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시나리오긴 하지만, 그래서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사랑 이야기군요.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민소 06.07.29 14:58 댓글 수정 삭제
    갑자기 제 이름이 튀어나와서 정말 놀랬습니다; 흔하지 않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마주하게 되네요. 왠지 실현가능성이 있을것 같은 설정이군요.
  • No Profile
    06.07.29 22:25 댓글 수정 삭제
    제목만 보고 철인 28호를 상상했던 전......;;;;

    뭔가 뒤에 더 이어지는 내용이 있을 법 한 느낌이에요.
  • No Profile
    민소라는 이름이 실제로 있군요! 이 글 읽으면 서울에 절대 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있을 법한 전개.
  • No Profile
    배명훈 06.07.30 13:39 댓글 수정 삭제
    처음 쓸 때만 해도 실현가능성이 더 멀었는데 장군님의 도움으로 현실성이 아주 많아졌죠.
  • No Profile
    이이 06.07.30 16:36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이대로 계속쓰셔도 괜찮을거 같아요.. 미국에서 위성사진 흘린거보고 정동영씨 생각났어요.. 정말 뒷얘기가 많을것 같아요... 읽고 계속 생각나더라구요
  • No Profile
    yunn 06.07.30 21:46 댓글 수정 삭제
    실현 가능성 부분에 이야기가 집중되는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덧글을. 사실 전 마지막 부분이 굉장히 좋았어요. 저도 시나리오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모두 마지막 장면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했거든요 :)
  • No Profile
    배명훈 06.08.01 08:58 댓글 수정 삭제
    더 쓰면 사후세계를 다뤄야 할 것 같아서 자제하려구요. 제가 여기다 야만적으로 작가의 의도는 이러했다고 밝혀서 될 것도 아닌 것 같고, 무엇보다 더 길게 이야기하면 스포일러 노출 우려가.. 글 올라온지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저 관심을 갖고 읽어 주시는 데 감사. 하지만 아무래도 완결된 한 편의 글로 봐 주셨으면 하는 바람만은 어쩔 수 없네요.
  • No Profile
    fool 06.08.13 19:51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완결된 글 맞는데요, 뭘. :)
  • No Profile
    ida 06.08.18 01:16 댓글 수정 삭제
    사후세계 속편... 에 잠깐 혹했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멋진 글입니다.
  • No Profile
    배명훈 06.08.18 09:58 댓글 수정 삭제
    앗, 리플이 두 개나 더...
    재미있으셨나요.
    숨겨진 비화 하나. 제 친구가 하나가 기자인데, 어느날 당직이라 그래서 심심하면 이거나 읽으라고 줬거든요. 그런데 하필 그날 그날 북쪽에서 미사일을 쏴 댔다지요. 방송국에서 밤새면서 이걸 읽고 있는데 그 일이 터졌다더군요.
  • No Profile
    배명훈 06.10.28 21:52 댓글 수정 삭제
    허허. 이 위에 달린 건 어떻게 지운다죠?
  • No Profile
    진아 07.01.29 19:06 댓글 수정 삭제
    제가 지웠습니다.;
  • No Profile
    배명훈 07.03.21 13:38 댓글 수정 삭제
    <전장의 기억>이라는 책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2차대전 때 나가사키에 살던 어떤 중학생인가가 어느날 배가 아파서 학교를 못 갔는데 그날 핵폭탄이 떨어져서 봉사활동하러 나갔던 반 친구들이 모두 죽었답니다. 책에는 나가사키 지도와 핵폭탄이 떨어진 지점, 그리고 반 친구들이 죽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그려놓으니까 사람 사는 이야기가 되어버리더라구요.
    구글 뭔가를 검색해서 평양시 위성사진을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평양시 지도를 보고 위성사진에 나온 곳의 행정구역이나 지명 같은 것들을 대조해 가면서 들여다봅니다. 위성 사진에는 차들이 지나가는 모습도 보입니다. 거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가 내리는 어느날, 민소(고시생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민사소송법" 책을 보고 지은 이름입니다.)는 집 밖으로 내몰립니다. 방 안에 틀어박히지 말고, 동네에만 어슬렁거리지도 말고, 밖으로 나가서 세상을 봐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나 보호받고싶기만 한 나의 자아를 이제는 철갑으로 무장하고 이 시대에 우리가 대항해야 할 적을 찾아서 맞서 싸울 준비를 해야죠.
    아, 그런데 어쩌죠? 누가 봐도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적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 No Profile
    볼티 08.03.12 13:29 댓글 수정 삭제
    대한민국 최후의 날 치고는 참 서정적이고 훈훈한 이야기네요.
    '청혼'때도 느꼈듯이, 전술적 박진감과 남녀의 감정을 잘 어우르셨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로 흥미진진한 글이었어요.

    건필하세요!
  • No Profile
    배명훈 08.03.14 06:04 댓글 수정 삭제
    네에!
  • No Profile
    배명훈 08.04.14 10:23 댓글 수정 삭제
    謹弔 6628.
    아침에 형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새벽에 차가 불에 탔다고.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방화가 아닐까요. 좋은 차도 아니고, 액센트에 불을 지르다니!
    이제 다시는 6628을 볼 수 없겠네요. 故車의 명복을 빕니다.
  • No Profile
    볼티 08.04.14 19:31 댓글 수정 삭제
    철거인 6628호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다음 세상에 더 멋지게 환생하길...
  • No Profile
    cinephile 09.04.15 17:56 댓글 수정 삭제
    이 소설은 북한에 관한 어떤 뉴스들이 들릴때마다 자꾸 찾아 읽게 됩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남북문제라는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개인적으로 각성하게된 계기가 된 소설이기도 하구요, 감히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해보자면 나중에 영화화 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드는 소설입니다^^
  • No Profile
    배명훈 09.04.16 08:59 댓글 수정 삭제
    아마 그럴 날이 오겠죠. 언젠가 누군가는 꼭 이 이야기를 가지고 만들지 않더라도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소재니까요. 지금은, 정치적으로 민감해서 안 만드는 걸까요...
  • No Profile
    영식 09.08.03 15:37 댓글 수정 삭제
    철거인 6628호는 여기서 나오는거였군요. 듬직합니다. 매 장면들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 No Profile
    배명훈 09.08.05 09:51 댓글 수정 삭제
    공부 열심히 해서 쓴 글인데, 필 받아서 뚝딱 쓴 글보다 반응이 덜 좋은 글이 있거든요. 이 글이 딱 그런 글인데요, 그래도 역시 공들인만큼 시간이 지나도 우러나는 맛이 있네요.
  • No Profile
    09.10.15 17:04 댓글 수정 삭제
    [운 좋게 살아남는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폐허가 되어버린 이 끔찍한 두 도시의 위성사진을 읽는 일을 그에게 부탁할 할 것이다.] <-부탁할 할 것이다라고 되어있네요.

    호오. 민감한 소재인데 말이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No Profile
    지유 10.12.02 14:07 댓글 수정 삭제
    북한이 연내(=요번달안)에 경기도에 포격하겠단 뉴스보고 읽으니 긴장감이;;;
분류 제목 날짜
초청 단편 월더빌 살인사건3 2006.07.28
배명훈 철거인(鐵巨人) 662824 2006.07.28
배명훈 355 서가20 2006.06.30
김이환 종이 바깥의 영화9 2006.06.30
곽재식 흡혈귀의 여러 측면 (본문 삭제)24 2006.06.30
초청 단편 Why do I need feet when I have wings to fly?2 2006.06.30
초청 단편 태그Tag1 2006.06.30
赤魚 나비, 꿈꾸다 - 본문 삭제 -4 2006.06.03
赤魚 걸어 다니는 화석 - 본문 삭제 -4 2006.06.03
곽재식 신비한 사랑의 묘약4 2006.06.03
곽재식 황야의 무직자8 2006.06.03
jxk160 7 2006.06.03
김수륜 옛날옛날옛날에 - 본문삭제 -4 2006.06.03
정대영 푸른 숲의 남자2 2006.06.03
배명훈 16 2006.06.03
곽재식 월척8 2006.06.03
초청 단편 황금알 먹는 인어6 2006.06.03
pena 적백화면 2006.04.29
초청 단편 쓰레기 같은 시간2 2006.04.28
정소연 마산앞바다 - 본문 삭제 -4 2006.04.28
Prev 1 ...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