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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술을 마시면 그 여자는 개가 된다. 나긋나긋한 목소리, 우아한 걸음걸이, 햇볕 따뜻한 오후에 밖에다 널어놓은 이불 빨래에 부딪치는 빛처럼 우아한 그 여자의 어휘도, 술에 취해 개가 된 뒤에는 찾아볼 수 없다. 우주 비행처럼 높이 날고 있다고 느낄 만큼 황홀했던 그녀와의 추억도, 사소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끝없이 베푸는 그녀의 이해심과 너그러움도, 그 어린 시절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던 순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갔던 짜릿한 전율도, 여자의 입술을 훔친 투명한 술잔의 저주가 지나간 뒤에는 모두 사라지고 그 공허한 폐허에는 술에 취한 여자, 그 현실만이 남는다. 진실만이 남는다. 여자가 평소에 보여주던 완전함과, 아주 가끔, 1년에 한 번이 안될 만큼 아주 가끔 보여주는 무방비 상태 중에서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우냐고 물어 보면, 이상하게도 진실은 후자 쪽의 손을 들어 준다.
  물론 여자가 술을 마실 때마다 늘 취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는 가끔씩 친구들을 만났을 때 술을 마시고, 남편의 남동생들을 만났을 때 술을 잘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서 시원시원하게 술잔을 받아 들곤 한다. 가끔은 밤늦게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물을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가 캔 맥주 하나만 사 들고 즐거운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르기도 한다. 생활이 끊임없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가슴 아픈 일들은 여자로 하여금 술을 찾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무슨 유목 부족의 무당이 좀 더 나은 미래를 기원하는 제사에서 술을 사용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여자의 어머니가 가끔 딸을 불러다 놓고 집에서 직접 담근 달짝지근한 포도주를 따라 주기도 했다. 손수 만든 포도주는 일단 개봉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발효해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독한 술로 변해 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두 여자는 술이 변심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작년에 마셨을 때는 안 이랬는데 이 술 진짜 독하네.”
  하면서 얼굴이 벌게진 채로 노래도 부르고 낮잠도 잤다. 여자는 업무상 중요한 사람에게 명절 때 좋은 술을 선물하기도 했다. 준비하는 김에 남편 것도 챙겨다가 제발 이런 것도 돌리고 그렇게 살라고 이야기했지만, 남편은 그 술을 다른 데 가서 마셔버렸다.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은 두 잔도 못 마셨을 것이다. 때로는 술이 돌고 돈다. 작년에 선물한 술이 포장도 안 바뀌고 그대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면 기억력이 좋고 세심한 그녀는 이 술을 다시 다른 사람한테 선물해버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여자의 가장 절친한 친구들이 집에 쳐들어 와서 고스톱을 치면서 허리가 아프도록 놀 때 꺼내어 마셨다.
  그럴 때 여자는 술에 취하고 나서도 얌전했다. 그냥 피곤해하면서 몇 번이고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다가 술자리가 끝나는 분위기가 되면 얼굴 가득 반가움을 숨기지 못한 채로 부산스럽게 가방이며 옷이며 지갑을 챙기곤 했다. 한두 번쯤 지갑을 흘렸고, 한번은 비슷하게 생긴 남의 신발을 신고 집으로 간 적도 있었다. 버스에서 졸다가 한참이나 지나친 다음에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다음날 일어나면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아니면 갑자기 허전해져버린 지갑을 보고 후회가 밀려오는 날도 있었다.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합리적 행위자가 그녀 속에도 존재했다. 그녀의 합리적 자아는 자신의 비이성적 소비 행태를 보고는 땅을 치고 후회하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여자는 조용하게 취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가끔, 1년이나 2년에 한번 여자는 술에 취해 개가 된다. 그러면 여자는 명언을 남기곤 했다.
  “니들 내가 외계인이라는 사실 모르지? 모를 거야. 내가 외계인이라는 건 몰랐을 거야. 지구인들. 그러니까 우리는 이걸 마셔야 돼. 알겠어? 지구에 와서 우리가 먹고 살 수 있는 건 이거밖에 없어. 그러니까 마셔야 해.”
  “은경아. 그만 마셔라. 그거 마셔 봐야 속만 아프다.”
  “속? 아프지. 아프지. 아파야 되는데, 우리 목성인들은 이걸 마시다 보면 속이 아프고, 그때 더 많이 마시고 더 많이 마시고 더 많이 마셔서 지구인들이 다 지하철 끊긴다고 집에 가버리고 회비 2만원만 달랑 내고 안녕 하고 손 흔들면서 내일 아침에 할 일 있다고 거짓말하고 지구인 여자들이 다 집에 가버릴 때까지 더 많이 마셔서 지하철이 끊기고 기차도 끊기고 택시도 끊기고 전화도 다 끊기고 그때까지 마시면 우리 목성인들은 지구보다 더 큰 별에서 왔기 때문에 지구인 모습을 하고 살고 있던 걸 다 무시해버리고 원래 목성인으로 돌아간단 말이야. 머리카락도 없고 속눈썹이 이렇게 길고 지구인보다 훨씬 예쁘게 생긴 목성인으로 돌아갈 거니까 더 많이 마셔야 돼.”
  남자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여자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여자는 말도 똑바로 못하고 꼿꼿하게 앉아 있지도 못하고 술을 안 넘치게 따르지도 못한다. 그리고 술 냄새가 난다. 어차피 다들 술 냄새를 풍기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술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지만 여자도 지금은 술 냄새가 난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에이 술 냄새. 여자는 아까부터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미안하다는 것일까. 여자가 왜 미안하지? 저 사과는 누가 받고 있는 거지?
  그리고 조금 더 지나자 여자는 드디어 친구들 중 하나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여자의 술 취한 모습을 자주 볼 일이 없었던 친구들은, 처음에는 술로 인한 여자의 변신을 애교로 보아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한 시간쯤 지나자 슬슬 진짜로 기분이 상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여자는 소주를 물 컵에 가득 따라서 남자 후배 녀석에게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싫은 소리를 해 댔다.
  여자는 그를, 신분이 높지 않은 집안의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그가 자기를 바라보는 방식이 썩 내 마음에 흡족하지가 않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평소에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지만 시선을 좀 더 아래쪽으로 두면 좋을 것 같으며, 자기가 여성이어서 다른 선배들보다 대하기가 편하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그 후배의 시각적 판단 능력이 잠시 정상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 자기가 그의 안구에 손가락으로 직접 충격을 좀 가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 내용이기는 하지만, 훨씬 짧고 거친 욕설이었다. 그러자 후배 녀석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가방을 들고는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고 나자 여자는 자기가 채운 잔을 거의 반 정도나 마셔버렸다. 그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양이었다. 남자는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여자의 가방을 챙겨 들고는 다짜고짜 여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밤바람이 차가웠다. 저녁부터 눈이 올지 비가 올지 뭐라도 내릴 날씨였는데, 바닥은 아직 젖지 않았지만 음산한 바람이 불었다. 해도 지기 전에 마시기 시작해서 그런지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었는데 술은 꽤 많이 마셨다.
  “너, 집은 찾아갈 수 있어? 지금 가면 지하철 탈 수 있는데.”
  여자가 말했다.
  “당연하지. 너는 내가 집도 못 찾아갈 사람으로 보이냐?”
  “잘 됐네. 집은 어느 쪽이야?”
  “우리 집. 병원 옆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서 쭉 걸어 올라가.”
  어느 병원 옆의 어느 골목을 말하는 것일까. 남자는 역시 여자를 집에까지 바래다 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여자를 데리고 지하철까지 가는 마을버스가 오는 곳으로 갔다. 스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서 있는 틈에 비집고 서서, 남자는 힘없이 비틀거리고 있는 여자를 두 손으로 잡아 세웠다. 여자는 아슬아슬하게 버스에 올라타더니 버스 카드를 동전 통에다 턱 집어 넣어버렸다. 남자도 그것을 목격했지만, 이내 카드를 돌려받는 것은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람을 빽빽하게 태우고 급출발과 급정지를 반복하면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여자는 술 냄새를 풍겼다. 남자는 자기 아내에게서 저렇게 술 냄새가 나는 게 싫었던 생각이 났다. 남자는 이미 결혼한지가 오래였다. 그리고 여자도 남편이 있었다. 남자는 뜻하지 않은, 정말 뜻하지 않은 사고 때문에 스물 셋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남자의 아내는 남자보다 두 살이 어렸다. 남자의 결혼식 날에 그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남자는 그날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동아리 사람들 중에서 그날 나타나지 않은 것은 여자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발을 노려보면서 알아들을 듯 말 듯한 소리로 말했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남자의 귀에 ‘내연’이라는 말이 또렷이 들려 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 그런 말이 필요하지. 내연. 너도 나도.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든 너와 나를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하려면 이제 그 말이 필요해.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여자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자기 발 위를 쳐다보았다. 여자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렇게 힘겹게 무언가 말은 하고 있지만 여자의 마음은 도저히 인간의 언어라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어 말을 하고 싶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 남자에게도 느껴졌다. 남자는 힘겨워하는 여자에게 귀를 바싹 갖다 댔다. 두 사람의 가장 아름답던 그 시절에 늘 그랬듯이. 여자는 남자의 귀에 대고 옆에서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말했다.
  “내연기관. 에이, 저놈의 내연기관. 내연기관은 엔진이 자꾸 부르르르 떨려서, 위에 들어 있는 술들이 놀라. 술들이 놀라면 입으로 나오는데.”
  그러자 여자와 남자 주변에 만원 버스 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여유로운 공간이 생겨났다. 남자는 한 걸음 물러나며 버스 기사에게 소리를 질러 버스를 세웠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여자는 구석으로 달려갔다. 남자가 다가가서 여자의 등을 두드렸다. 지하철역까지 택시를 타려고 했지만, 그 많은 택시들 중에서 지하철역에 가겠다는 택시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남자는 여자를 데리고 걷기로 했다. 여자가 말했다.
  “걸을 수 있어.”
  남자는 여자가 자기 팔을 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뻣뻣한 걸음걸이로 몸에 힘을 주고 걸었다. 지하철역까지는 걸어도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다. 날씨가 춥지만 않은 계절이었다면 꽤 상쾌한 기분으로 산책하듯 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남자는 궁금했다. 얼굴을 보아하니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내일이 되면 전혀 기억도 못할 것이다. 같이 걷고 있었다는 것조차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와의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몇 년도에 어느 계절에 어느 거리를 왜 걸었는지는 생각이 안 나지만 언젠가 여자와 함께 나란히 서서 걸었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을 지날 때면 두 사람은 종종 떠밀려서 멀리 떨어지곤 했다. 팔짱을 끼고 옆에 딱 붙어서 지나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해류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는 속에서 여자와 남자는 지느러미 없는 해산물처럼, 해파리처럼 밀려 다녔다.
  “지나가는 사람들 잘 봐. 사람 많은 데서 더 딱 달라붙는 건 커플이고 계속 떨어지는 건 친구 사이다.”
  여자가 그렇게 말했었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을 때 여자는 그 손을 잡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꼭 잡은 손은 사람들 사이에서 떠밀릴 때 자연스럽게 떨어지고 말았다. 여자는 남자가 걷는 속도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여자는 그렇게 잠깐 떨어졌다가도 이내 남자의 옆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지하철역까지 반쯤 걸어갔을 때 남자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아내였다. 남자는 아직도 모임이 끝나지 않았다고 대충 둘러댔다. 남자가 전화에다 대고 거짓말을 할 때마다 여자가 옆에서 팔꿈치를 쿡쿡 찔러 댔다. 그리고는 갑자기 전화기 쪽으로 달려들면서 낭랑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오빠! 벌써 가시게요? 더 놀다 가요.”
  남자는 당황하며 전화기를 손으로 가렸다. 한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 다음에, 남자는 술자리가 조금 더 있다가 끝날 것 같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여자는 남자의 아내를 본 적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남자의 결혼 생활은 평범하지가 않았다. 남자의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갑자기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고 있던 것도 그녀였다. 결혼한 지 다섯 달 만에 나온 아이가 2년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남자와 아내는 엉엉 울었고, 여자는 그 무렵에 새로 만나는 남자가 생겼다. 작년에 여자의 결혼식에 남자는 아내의 손을 잡고 피곤한 얼굴을 하고 와서는 잠깐 인사를 하고 저녁만 먹고는 이내 사라졌다. 여자는 물론 그런 것까지 챙겨줄 경황이 없었다. 그래도 그날 그의 얼굴을 좀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면, 무엇인가 해 줄 말은 있었을 것이다.
  “남편은 출장 멀리 갔어?”
  여자는 마치 더 이상은 남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인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가끔씩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비틀거리면서 걷다가 남자의 어깨를 잡고 서서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경을 잃어버려서 사람 얼굴이나 눈동자가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술에 취해서인지도 모른다. 좋지 않은 시력을 쥐어짜서라도 꼭 보고 싶은 눈. 그 사람의 눈이다. 그래서 여자는 눈을 찡그렸다.
  안경이 없어서 그러는구나.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 전 술자리에서 콘택트렌즈를 빼 놓는 것을 봤는데, 그렇다면 또 흘리고 온 거다. 아무튼 이 여자는 술에 취하면 개가 된다.


2.


  한달쯤 전쯤, 남자가 안경점을 찾은 것은 눈이 너무 많이 나빠졌다고 스스로 느끼고 나서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멀리 있는 것을 정확하게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살던 그였지만, 버스 번호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자 드디어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번호를 잘못 보고는 마치 탈 것처럼 한 발 내디뎠다가 버스가 가까이 오고 나서야 번호를 잘못 본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모른 척 먼 산을 보았고 버스 기사는 싫은 눈빛을 쏘아 주고는 문을 닫고 가버리곤 했다. 번호만 알아보기 힘든 것이 아니었다. 어두운 복도 같은 곳에서는 아는 사람 얼굴을 못 알아보고 지나치는 일도 있었다. 몇 번 비슷한 실수가 있은 뒤에 남자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 청각에 의존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발소리를 구별해 내고, 목소리를 정확하게 듣는 능력을 얻기는 했지만 눈이 나빠지기 전에도 원래 사람 말은 잘 못 알아들었던 터라 결국 남자는 새 안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그러나 그 생각이 들고도 무려 여섯 계절이 바뀐 뒤에야 남자는 근처에 안경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실제로 그곳에 발을 디딘 것은 그러고도 한 계절이 지난 뒤인 어느 가을날이었다. 우연히 길에서 들은,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발소리, 그녀의 목소리. 절대 틀리지 않고 알아맞힐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꼭 그 여자의 눈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맞아 주었다. 그 안경점 주인은 손님이 오기에는 이른 시간이라고 생각했던지 안경 진열대 뒤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다가 남자가 나타나자 꽤 반가운 듯 일어나서 인사했다.
  “안경 하시려구요?”
  남자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안경들을 들여다보았다.
  “예. 안경 한 지가 좀 오래 돼서 잘 안 보이네요.”
  “네. 안경 한 번 줘 보시겠어요?”
  남자가 안경을 건네주자 안경점 주인은 무슨 기계에 안경을 올려놓고 이리저리 들여다보더니 또 다른 기계에 남자의 턱을 대게 하고는 대강 시력을 쟀다.  
  “좀 오래 되셨나 봐요. 안경이랑 시력이 꽤 차이가 나는 것 같은데, 생활하시는 데 불편한 점은 없으세요?”
  “잘 안 보여서 왔는데요.”
  안경점 주인은 웃으면서 남자를 또 다른 의자로 데리고 가서 앉혔다. 시력 검사가 끝나자 주인은 남자를 안경 진열대 쪽으로 데리고 갔다. 보석 진열대처럼 유리로 된 진열대 안에는 안경들이 조금씩 겹쳐져서 쭉 늘어서 있었다. 남자는 진열대 유리에 얼굴을 바짝 갖다대고는 눈 주위를 찌푸리면서 한참동안 안경들을 바라보았다.
  “잘 안 보여서 그런데 여기 건 다 공장에서 만든 건가요?”
  “예? 아, 자연산으로 보시겠어요?”
  “물론이죠.”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짧게 대답했다. 안경점 주인은 그 옆에 있는 커다란 수조 쪽으로 갔다.
  “오늘 아침에 들어온 거예요. 한번 골라 보세요.”
  남자는 원래 쓰고 있던 안경을 다시 쓰고는 수조 속을 들여다보았다.
  “싱싱해 보이기는 하는데, 이거 양식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희는 부산에서 하루에 한번씩 비행기로 직송하거든요. 보세요. 안경들이 힘이 있잖아요. 양식은 더 통통해요. 이렇게 날렵한 건 자연산이에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는 안경점 주인 쪽으로 한번 눈길을 주지도 않고 뚫어져라 수조 안을 노려보았다. 꽤 큰 수조 안에는 서른 마리쯤 되는 안경들이 다리를 움직이면서 가볍게 헤엄을 치고 있기는 했다. 공간이 좁아서 더 빨리 헤엄치지는 못하겠지만 싱싱해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솔직히 자연산이라는 말은 믿음이 안 갔다. 안경이라는 게 원래 눈이 나빠진 사람들이 쓰는 것이어서 자세히 보고도 자연산인지 양식인지 식별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짙은 색 안경 하나를 고르자 안경점 주인은 그물로 안경을 건져 내어 물기를 말린 뒤에 남자에게 한번 써 보라고 권했다. 얼굴 형태와 잘 어울린다느니, 샤프하게 보인다느니 하는 말들을 들으면서도 남자는 그다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게 그거 같기도 하고.
  “이걸로 하시겠어요? 음. 한 15분 정도 걸릴 거거든요. 저쪽에 잠시 앉아 계시겠어요? 차 한 잔 하세요. 녹차나 커피로 드릴까요?”
  5만원이나 주고 새 안경을 맞춘 다음에 남자는 집으로 돌아갔다. 거의 4년 만에 새 안경을 한 탓인지 어지러웠지만 반대로 거의 4년 만에 선명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은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안경을 새로 맞추었다는 말을 했을 때, 남자의 아내가 그의 기분을 망가뜨려 놓는 바람에 그는 좀 언짢아졌다.
  “오빠. 이거 중국산이네, 완전. 그 나이 되도록 물건 참 못 고른다.”
  새 안경에 대한 타인의 핀잔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출근하고 나서도 남자는,
  “좀 귀찮아도 그런 건 수산물 시장에 가서 사야지. 그게 뭐니?”
  “그거 유행 좀 지나간 거 아니에요?”
  “착실해 보이네요. 고시생같이.”
  같은 말들을 들어야만 했다.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는 원래 이런 디자인을 고르려고 생각한 것이고, 그렇게 비싼 안경을 살 생각이 없었으며 이제는 시력을 위해서 자주자주 바꿀 생각이니 다음에는 참고하겠다고 대꾸했다. 개중에는 들으라는 듯 이런 소리들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말 나왔으니 말인데 안경 잡으러 가자.”
  “하나만 있으면 됐지 뭐.”
  “아니 그걸 두세 개씩 한꺼번에 다 쓰고 다니려고 잡냐? 1.5 1.5인 놈은 그럼 안경은 왜 낚냐? 손맛으로 가는 거지.”
  “하긴. 안경 아직도 나와?”
  “이제 거의 마지막이지. 올해는 좀 일찍 추워져서 이번 주 지나면 안경 안 나올 것 같은데. 가자. 일요일에.”
  “그래? 안되는데. 마누라한테 욕먹겠는데. 요새는 마누라, 낚시 가는지 출근하는지 귀신같이 알아요. 싸움 나.”
  “그래? 그럼 뭐 나하고 우진석이하고 둘이서 가지 뭐.”
  “의리 없게 그러기냐?”
  “나는 마누라 대전 친정에 보냈거든. 일요일 밤에 올 거야.”
  안경 낚시 이야기를 듣자 남자는 예전에 가 본 안경 박물관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 안경 박물관에서는 안경을 종류별로 전시하기도 했지만, 바로 옆에 안경 연구 시설이 붙어 있어서 야외에 안경을 배양하는 큰 배양지가 있었다. 배양지에는 종류별로 예쁜 색깔의 안경들이 천 마리씩 오백 마리씩 어른 안경이 될 때까지 배양되고 있었다. 그렇게 길러진 안경들은 다시 강에 방류된다. 낚시꾼들은 그런 안경들을 낚는다.
  안경들은 깨끗한 물 속을 유유히 헤엄쳤다. 천 마리가 무리를 지어 줄을 이루어 서서히 떠가는 모습은 그날의 날씨만큼이나 여유로웠다. 그는 자판기에서 파는 500원짜리 안경 먹이를 한 봉지 사서 몇 개씩 물 위에 던졌다. 물 위에 떨어진 먹이들은 수면에 물결을 일으키면서 퍼져나갔다. 천 마리의 안경들이 먹이들을 동시에 발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중 단 몇 마리만이 먹이를 발견하고는 수면을 향해 헤엄쳤다. 그러면 그 주변에 있던 안경들도 처음 몇 마리를 따라서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이내 천 마리 전체로 퍼져 나가고, 이미 수면 위에는 먹이가 하나도 안 남아 있는데도 안경 떼는 우아한 소용돌이를 만들면서 물 속을 휘감았다.
  쪼그리고 앉아서 안경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 기억 속에 남자의 옆자리에는 역시나 그 여자가 같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여자가 말했다.
  “안경 좀 봐. 참 예쁘다.”
  “응.”
  “얘들 크면 예쁘겠다.”
  “지금도 예뻐.”
  “나도 요즘 눈이 나빠져서 이렇게 얼굴 찡그리고 봐야 잘 보이는데 누가 예쁜 안경 하나 선물해 줬으면 좋겠다.”
  “안경을 어떻게 선물하냐?”
  “그런가? 그러네. 시력을 모르니까.”
  “차라리 속옷을 선물하라면 어떻게 한번 사이즈 때려 맞춰 보겠다만.”
  “에이그, 인간아.”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다가, 남자는 그 여자의 안경이 자기 책상 서랍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달쯤 전에, 그때는 친구 녀석 결혼식 피로연에서 또 개가 되어버린 여자가 흘려 놓은 안경. 새로 한지 한 달밖에 안 된 것이었는데도 서로 바빠서인지 만나서 돌려줄 기회가 없었다. 여자도 평소에는 콘택트렌즈를 끼고 다녔기 때문에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우라면, 시력을 알 수 있었고 안경을 사줄 수도 있었다.
  남자는 늘 아내에게 충실한 남편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부산으로 출장을 갔을 때, 놀랍게도 그 여자의 안경은 아내 몰래 그의 여행 가방 속에 들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자갈치 시장에서 온갖 해산물들 사이를 걷고 있을 때 그 여자의 안경이 그 남자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자가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의 책상 서랍 속에는 똑같은 시력의 안경이 하나 더 늘어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특별한 안경이었다. 어느 자갈치 아지매의 악력에 이끌려 그 안경 앞에 섰을 때, 그는 한눈에 그놈을 알아보았다. 그 시끌벅적한 시장 안이 갑자기 적막해지는 듯한 순간의 마력. 매끈하고 날렵한 곡선, 그물에 담겼을 때의 그 생동감 넘치는 파닥거림. 상냥하고 밝고 경쾌한 놈이었다.
  “삼촌. 한번 써 보이소. 안경은 그냥 봐서는 모린다. 써 봐야 안다 아입니까.”
  그는 고무장갑 낀 투박한 손에 들려 있는 안경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 순간에 안경이 다시 한번 파닥거려서 손에서 미끄러져 나갔다.
  “꼭 쥐소. 널찝니데이.”
  그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안경을 쥐고는 렌즈를 눈에 갖다 댔다.
  아!
  그는 갑자기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아! 이런 거였나. 남자는 감탄하면서 자기 안경을 벗고 손에 든 안경을 썼다. 세상이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었다. 물론 시력은 그의 눈에 맞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세상은 놀라웠다. 3차원 공간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공간의 일부는 2차원으로 보였다. 2차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눈에 들어오는 것의 일부는 3차원이 되었다. 마치 잔잔한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의 탄력처럼, 몇 마리의 3차원이 2차원의 평면 속으로부터 파닥파닥 튀어 올랐다가 다시 2차원의 평온함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이걸로 하실 거지예? 위에 올라가 있으이소. 금방 따듬어가 올려 드릴께예.”
  태어나서 두 번째였다. 세상이 그렇게 보인 것은 그때가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그 여자를 처음 만났던 날이었다. 그 안경을 통해서 보이는 세상은, 완전히 사랑에 빠진 스무 살짜리 남자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그 안경은 그 여자에게 선물하는 것이 하나도 안 이상할 만큼 특별하다. 그러나 그렇게 특별한 것을 아내가 아닌 여자에게 선물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변명했다. 아내는 안경을 안 쓰니까. 눈이 좋으니까.
  역시 이 정도 되면 불륜인가? 내연인가?


3.


  여자는 아까 교통 카드를 버스 동전 통에 넣어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지 못하고 지하철 개찰구에다 지갑을 댔다. 문이 열릴 리가 없었다. 그녀의 뒤로 줄을 선 사람들이 짜증을 냈다. 남자가 표를 사러 간 사이에 여자는 아래로 기어서 개찰구를 통과했다. 하필 그때 ‘요원’이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목격하는 바람에 실랑이가 벌어졌으나, 여자가 만취해 있고 남자가 곧바로 표를 사서 나타났으므로 험악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지하철 막차를 탔다. 지하철 안은 따뜻하고, 여기저기 얼굴을 벌겋게 해 가지고 술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 사람은 문 앞에 섰다. 이따금씩 문이 열릴 때마다 바깥 공기가 안쪽 공기를 정화하는 듯 했다. 바깥 공기라고 그렇게 좋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안경 통을 만지작거렸다. 케이스 안에서 이따금씩 안경이 파닥거렸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은경아. 안경 있잖아.”
  여자는 아무래도 대답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마음이라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상태는 더더욱 아니었다. 추억이라는 것을 더듬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닐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다시 말을 멈추고 말았다.
  어느 역에선가 열차가 멈추었다가 사람들을 또 한가득 싣고 나서 문을 닫기 직전에 여자가 문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나가다가 거의 문에 낄 정도로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어서 남자는 손을 써 볼 도리가 없었다. 따라 나갈 수도 없었다. 다만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한 유리창 저편으로 그녀가 쓰레기통에 허리를 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그 속에 들어 있던 괴로운 것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느라 괴로워하는 뒷모습일 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무표정하게 서 있는 그를 누군가가 불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창밖으로 검은 풍경이 지나갔다. 검은 풍경 속에 남자의 모습이 반사됐다.
  남자는 다음 역에서 내려서 지하철 역 밖으로 나갔다. 먼 데까지 간다고 말해서 택시를 잡아탄 다음에 지하철역이 보이자 내려버렸다. 지하철 역 안으로 들어갔다. 막차가 이미 떠났다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지만 지하철 타는 곳으로 내려갔다. 기둥 뒤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 여자를 발견할 때까지 한참이나 뛰어 다녔다.
  “은경아. 우니?”
  여자는 울고 있었다.
  “걸을 수 있어?”
  하고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남자는 여자를 업었다. 술에 취해 개가 된 여자는 굉장히 무겁다. 길에 앉아 울고 있는 여자의 무게도 만만치 않다. 업힌 쪽에서 제대로 매달려 주지 않으면 여자를 업고 계단을 올라가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여자가 남자의 목만 팔로 대충 감고 거기에 체중을 실어서 매달려 있으면 숨을 쉬기도 만만치가 않다. 결국 남자는 계단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다 여자를 내려놓았다.
  “너 참 여러 가지 한다. 너 술 마시면 이렇게 되는 거 남편도 아냐?”
  “그 사람은 모르지.”
  “다행이다. 아직은 비밀이어서. 언제부터 그랬냐?”
  언제부터? 언제부터냐고? 여자가 술을 마시고 처음으로 필름이 끊긴 것은 그 남자가 갑자기 결혼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 날이었다. 그때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 여자 혼자서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좋은 계기로 하게 된 결혼도 아니고, 나름대로 집안에서 시끄러운 일도 많았다니까 떠들고 다니면서 자랑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쉬쉬하게 된 것은 여자도 이해했다. 그런데 그렇게 쉬쉬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여자는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것처럼 태연한 척 말했다.
  “아, 그거? 나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사실은 몰랐다. 정말 몰랐다.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죽어도 몰랐다. 그냥, 이 남자, 머지않아 고백을 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뭐라고 대답해 줄까? 부끄러운 척 할까? 니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다고 말해 줄까? 나도 그렇다고 말해 줄까? 그런데 갑자기 연락이 뜸해지더니 딴 여자 임신시켜서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흘러흘러 들려왔다. 그녀가 설 자리는 없었다. 정작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에는 괜찮았다. 그런데 다음날 오후에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다가 비로소 폭발하고 말았다. 그날 친구 둘을 앉혀 놓고 기억이 끊기도록 술을 마셨다.
  조금 쉬고 나서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갔다. 막차가 지나가고 난 뒤여서 ‘요원’들이 혹시 남아 있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러 돌아다녔기 때문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남자는 이제 여자를 업고 계단을 오르겠다는 시도 같은 것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 지상으로 나와서 택시를 잡았다. 차는 여자가 말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여자는 이제 내연기관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자기 다리 위에 머리를 올리고 잠들어 있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남자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힘든 나날들이었다. 지금의 아내가 전화로 그렇게 말했다. 임신한 것 같다고. 그는 덜컥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많은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집에서 난리가 나고, 아내의 어머니는 그의 뺨을 쳤다. 아내는 끝도 없이 한 열흘을 울었다. 그러더니 두 집안 어른들이 만나고 날짜가 잡히고 결혼한 뒤에 같이 살 곳이 정해졌다. 언제까지 졸업하고 언제 무슨무슨 직장에 취직하는데 그때까지 돈은 어떻게 충당될지가 정해졌다. 아내는 언제 휴학해서 어떻게 아이를 낳은 다음에 언제 학교를 마쳐야 할지가 정해졌다. 목적지를 말하면 거기까지 알아서 가버리는 택시처럼 많은 일들이 착착 만들어졌다.
  그렇게 다 결정이 되었을 때, 남자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자기 마음속에서 끝없이 메아리치고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아! 은경이!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은경이니?”
  “그런데요. 누구세요?”
  “나. 내 목소리도 모르니?”
  “아, 너구나. 목소리가 딴 사람 같아서. 오랜만이네.”
  “오랜만이지?”
  “잘 사니?”
  “응.”
  “나도.”
  “은경아.”
  “응?”
  “아니야.”
  “뭐냐? 뭔 일 있냐?”
  “은경아.”
  “응?”
  “나중에 또 전화할게. 안녕.”
  “뭐야 이게. 싱겁기는. 그래. 안녕.”
  그랬었지 하면서, 남자는 잠들어 있는 여자를 흔들어 깨웠다. 여자는 택시 기사에게 어디 어디 골목으로 들어가 달라고 한 다음에 대충 이쯤에서 세워 달라고 했다. 남자는 여자를 부축해서 바람이 쌀쌀한 골목길을 지나 여자의 집 앞까지 걸어갔다. 여자가 말했다.
  “잘 들어가. 그리고 오늘 본 건 잊어.”
  남자는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골목길을 돌아서는데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안경이었다. 남자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가지고 집에 들어갈 수도 없는 물건이고, 뒀다가 딴 사람한테 선물할 수도 없는 물건이다. 결국 그것을 여자에게 전해 주기로 하고 발길을 되돌렸다. 좀 더 좋을 때 선물하는 것도 좋겠지만, 상관없지 뭐. 저 녀석 아마 내일이 되면 저 안경이 왜 자기 집에 있는지 기억도 못 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러고 여자의 집까지 가 보니, 여자는 아직도 문 앞에 서 있었다.
  “뭐하니?”
  “응? 너 아직 안 갔니? 열쇠가 없어서. 혹시 내 열쇠 못 봤니?”
  여자는 딱 술 취한 사람의 동작으로 가방 속을 뒤지고 옷을 뒤졌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가 보려고도 했지만, 너무 먼 길이었다. 지하철역에 혼자 앉아 있을 때 철로에 던져버리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여자는 이내 포기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남자는 일이 난감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대로 놔두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집에 안 돌아갈 수도 없었다. 아까부터 아내가 계속해서 전화했었다. 지금 바로 집으로 출발하기 시작한다고 해도, 그를 기다리는 것은 대책 없는 부부싸움뿐이었다.
  “잘 좀 찾아 봐.”
  남자는 여자의 가방 속을 허겁지겁 뒤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열심히 찾아 봐도 열쇠는 없었다. 그러자 남자는 여자의 주머니 쪽을 뒤졌다. 더듬을 의도 같은 게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그때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소리가 퍼져 나가는 동안에는 바람소리도 잠잠해져 있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면서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곳 옆으로 가서 털썩 앉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담을 넘어가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주저앉아 있는다고 뭐가 되지도 않는다. 남자는 안경을 꺼내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자에게 씌워 주었다. 그렇게 5분쯤 말없이 앉아 있다가 여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는 그를 보았다. 바로 그 얼굴이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느낌. 저 사람.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멎게 만들었던, 진짜 말 그대로 숨쉬기가 힘겹도록 가슴 설레었던 그 사람의 얼굴. 가슴이 벅차올랐다. 왜지? 왜 갑자기 달라 보이는 거지? 술 때문인가?
  “나는 이제 집에 들어가면 마누라한테 죽었다. 너는 어떻게 할래? 여기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어디 찜질방이라도 가서 자라. 남편은 내일은 온대?”
  “아니. 하루 더 있어야 돼.”
  “날 밝으면 열쇠 하는 사람 불러야겠네.”
  “응. 친정집에 가지 뭐.”
  “집에서 참 좋아하시겠다. 여러 가지 해서.”
  안경을 통해서 보는 여자의 눈이 예쁘다. 아니 저 눈은 원래 예뻤다. 그런데 그 눈에 눈물이 글썽거린다. 울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운다. 울고 있는 여자의 무게는 업혀 있지 않을 때에도 만만치 않다.
  “은경아.”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여자는 더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그 순간에 그게 궁금했다. 저건 술주정의 일부일까? 여자도 그게 궁금했다. 나 지금 왜 우는 거지? 시계와 핸드폰과 울고 있는 여자를 번갈아 보면서 남자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드디어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근데 나 화장실이 급해.”
  아직도 남은 게 있었단 말인가. 아주 미칠 노릇이다. 비틀비틀 잘 걷지도 못하는 여자를 데리고, 혹은 업고 그 시간에 어디를 가서 화장실을 찾아낸단 말인가. 유흥가도 아닌 그야말로 조용한 주택가 골목에서.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겨 있는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열릴 리가 없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아까부터 계속 참았는데.”
  남자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이제는 도저히 방법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여자는 앞에서 종종걸음을 치고, 진동으로 해 놓은 핸드폰은 울리는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윙윙윙. 또각또각또각. 문 두드리는 소리 철렁철렁철렁. 한겨울 날씨도 꽤나 춥다. 신은 남자에게 그런 극한 상황을 풀어갈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런데 이건 또 뭐란 말인가. 신은 그런 극한 상황을 헤쳐 나갈 용기와 결단력을 정녕 이 여자에게 허락했단 말인가. 여자가 용단을 내렸다.
  “망 봐 줘.”
  “은경아!”
  남자는 할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섰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지 벨트를 풀고 있었다. 남자는 급히 다가가서, 화장실을 찾아보자고 말하면서 풀어진 벨트를 다시 채웠다. 그래도 여자는 막무가내였다.
  “급하단 말이야!”
  “은경아. 좀!”
  여자가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리는 것을 남자가 막아내지 못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골목을 지나가던 어떤 발자국 소리 하나가 모퉁이를 돌다가 멈춰서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여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예상대로 적막이 흘렀다. 그런데 이상하다. 적막이 생각보다 길다. 남자는 차마 고개를 돌려서 상황 파악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길어져버린 적막감이 수상했다. 발소리의 주인은 왜 이런 광경을 보고도 딴 데로 피해 주지 않는 것일까? 하필 재수 없게 100명에 한 명쯤 걸릴까 말까한 뻔뻔한 인간에게 이런 민망한 광경을 들켜버린 걸까?
  남자는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예쁜 눈이다. 정말 예쁜 눈이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의 눈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담아 주고 싶었던, 사랑스러운 눈이다.
  그때, 그 사랑스럽던 여자의 목소리가 남자의 귀에 들려왔다.
  “여보!”
  남자는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여보라면, 출장 갔다가 이틀 후에나 돌아온다던 그 여보를 말하는 것인가. 하필 그날 출장 가 있지 않았다면, 내가 이 여자를 데리고 그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어도 될 그 여보를 말하는 것인가.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도대체 어떤 광경일까.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두 남녀. 그리고 여자의 바지는. 남자는 오래 전에 여자의 집 앞에서 여자에게 담배를 가르쳐 주다가 여자의 언니에게 발각되었던 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아, 이 뜬금없는 추억은 또 뭐람.
  어떻게 해야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미친 척 할까? 여자가 또 울기 시작한다. 아! 저 아름다운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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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
  • No Profile
    fool 06.01.28 22:01 댓글 수정 삭제
    미친 척 할까? 가 압권이군요. ;-) 뮌히하우젠 남작을 연상시키는 위 단편이 더 좋았지만, 지구에서 외계인이 먹을 거라곤 술 밖에 없다는 말에 꽂혀서;; 이쪽에 덧글 답니다. 물론 두 편 모두 즐겁게 읽었습니다. :)
  • No Profile
    06.01.29 17:35 댓글 수정 삭제
    미친척 하는 게 좋겠습니다! (진지함)
  • No Profile
    배명훈 06.02.01 08:03 댓글 수정 삭제
    미친 척 해야겠죠? 다음에 저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래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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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naor 06.02.03 18:43 댓글 수정 삭제
    저 여자 혹시 저인가요? 눈이 예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스마트 D'부터 열심히 따라오고 있는 독자입니다.
  • No Profile
    배명훈 06.02.04 08:40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인물은 가상 인물이어서 아마 누구라고 집어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눈이 예쁜 건 안경 때문입니다.
  • No Profile
    배명훈 07.03.19 15:01 댓글 수정 삭제
    이 글은 "판타지가 뭐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쓴 글입니다.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판타지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아주 조금 다르거나 세상 자체가 다른, 그런 세상을 그리면서 그 차이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는 것. 독자가 그건 왜 그렇게 되는 거냐고 묻는 대신에 작가가 사용한 장치에 동의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그 느낌이 바로 판타지의 판타스틱한 미학이 아닌가. 바로 그 미학을 중심으로 써 내려간 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사용한 장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은 대개 "이게 뭐냐"는 반응을...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작업이 곧 SF의 미학일 텐데요, 딱 그 부분에서 판타지의 미학과는 다르겠죠.
  • No Profile
    볼티 08.03.10 14:57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엇나간 사랑은 항상 가슴 아파요.
    그런데 굳이 판타지의 틀이 아니어도 좋은 결과물이 나왔을 것 같네요. 판타지의 틀을 써서 더 유쾌하긴 합니다만.

    아무튼...일부일처제는 민주주의 만큼이나 허점이 많은 제도입니다. (딴소리)
  • No Profile
    배명훈 08.03.14 05:37 댓글 수정 삭제
    "판타지의 틀"을 사용했다는 표현은 날을 품고 있군요. 그 날이 뭔지 모를 때 쓴 글이지만 그 날을 의식하면서 거울에 실은 글이니 다행히 방어할 수는 있을 것 같네요.
    피를 충분히 머금은 민주주의는 어리석어도 가치가 있으니까 이해하세요.
  • No Profile
    이형 08.04.07 21:29 댓글 수정 삭제
    여러 은경이분들 중에서 이 작품 속의 은경이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으흑.
  • No Profile
    배명훈 08.04.07 22:00 댓글 수정 삭제
    마음에 든다는 건, 혹시 공감?
    이 글의 은경이는 모델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좀 더 살아있는 것 같은 은경이가 됐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은경이는...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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