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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영 판타스틱 입맞춤

2005.07.30 17:5107.30

그녀는 거칠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열릴 떄 한 번 커다란 소리를 낸 문은 힘에 물려 벽에 부딪히며 비명을 지르고, 그 반동으로 닫히며 마지막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나 주섬주섬 윗몸을 일으켜 세워보니,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그녀가 보였다. 단정한 짙은 회색 양복에 검은 스타킹,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긴 머리가 정신 없이 일렁인다. 아름다운 편이지만, 늘 차가운 표정이라 정감 없는 얼굴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체, 버릇처럼 손톱을 물어 뜯는다. 무언가 밖에서 나쁜 일을 겪었다는 증거다. 손톱을 입에 물고, 중얼거리는 그녀의 혼잣말은 마치 저주의 주문처럼 집안을 이리저리 오간다. 그야말로 정신 사납다고 할 수 있지만, 달리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고 싶어도, 그녀는 아무런 신호도 주지 않는다. 표정에도 몸짓에도 그리고 주문에서도 이제 말을 걸어도 괜찮을 만큼 감정을 추슬렀다는 신호를 읽을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마냥 기다리는 것뿐이다. 눈치 없이 끼어들어 일을 키우는 것보다는, 그냥 너는 나한테 관심이 없느냐고 큰소리를 한 번 듣는 편이 낫다. 차마 말을 붙일 수가 없더라고, 매번 똑 같은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으니까.

“야.”

마침내 집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저주의 주문을 읊던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소파 위에 엉거주춤 앉아있는 이쪽을 노려본다.

“응.”

그 한 마디 부름 뒤에 터져나올 고함 소리를 한참이나 기다리다, 결국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 오늘은 정말 특별하게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늘 죽일 듯이 쏟아내는 고함 소리가 없다. 그저 여전히 손톱을 물어뜯으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릴 뿐이다. 사람을 부르고, 말없이 시선을 돌리는 그녀의 모습에 문뜩 정신이 든다. 신호다. 사귄 후로 처음 보내오는 신호다.

“무슨 일 있었어?”

알 수 없는 확신에 이끌려, 평소에는 한 번도 건네지 못했던 질문을 던진다. 그녀가 그제서야 입에 물고 있던 손톱을 뱉는다. 이리저리 어긋나던 시선이 다시 한 번 이쪽을 바라본다.

“시집 가래.”

울음에서 눈물만을 뺀 것 같은 목소리로 짧게 말한다.

“누가 그래?”

뻔히 알면서도 그냥 물어버린다.

“우리 엄마.”

한숨을 내쉬듯이 대답한 그녀는 금방 누구를 때려주기라도 할 듯이 온몸을 웅크리더니, 한 순간 발을 구르며 팔을 크게 휘젓는다.

“일부러 그런 소리 하는 거야! 분명히 알면서 저러는 거라구!
  여태까지 얼마나 많이 눈치를 줬는데, 모를 리가 없는데!
  선 보라는 것도 아니고, 시집을 가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냐구?”

그리고 다음에는 마치 기도를 올리듯이 두 손을 모아 쥐고, 눈을 감는다. 한바탕 거칠게 밀려들어온 파도가 힘없이 물러가는듯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난 분명히 말했다구. 너랑 같이 살거라구. 너랑 집세를
나눠 내는 게 아니라, 같이 사는 거라구 말했단 말야. 어쩌면 너랑
평생 같이 살 수도 있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 하고 이야기 하고
이야기했는데, 왜 이제 와서 또 이 난리냐고. 내가 엄마, 엄마 딸은 동성애자여요,
라고 대놓고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하냐구?”

물어와도 대답할 수가 없다. 그런 생각도 마음도 들지 않는다. 사람이 광폭한 바다에 아무런 수를 지니지 않은 것 마냥, 나는 그녀가 잦아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괜시리 그 풍파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도 없다. 왜 동성애자라고 말하지 않았어-라고 묻는 순간, 더 이상 바라보는 입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인생 왜 이리 거지같지?”

한숨과 함께 눈을 뜨고 두 손을 거칠게 떨구며 읊조린다. 파도가 물러가고, 그 아래 남은 헐벗은 모래 사장처럼 인생을 푸념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고개와 시선은 축 내려간 어깨와 맞물려 오히려 측은하고, 엉거주춤 버티고 선 다리와 허벅지께 에서 힘없이 흔들리는 두 팔이 위태롭다. 이쯤에서 껴안아주기라도 해야 하는 걸까.

“키스하자.”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고개와 시선으로 불쑥 명령도, 부탁도 아닌 말을 뱉는다. 그렇다고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 망연한 모습에 언제나처럼 마음이 동한다. 대답 없이 소파에서 일어서 그녀에게로 다가선다. 벽에 걸린 인형처럼 축 늘어져있던 그녀가 순간 와락 달려든다. 거칠다기 보다는 그저 부자연스럽고 어색할 뿐이다. 덮치듯이 달려드는 얼굴과 입술, 그리고 갈팡질팡 헤매는 혀가 키스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외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 점이 마음에 든다. 이쯤에서 그만이라는 신호를 보내주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입을 맞추고 있을 그녀가 마음에 든다. 어설프게 사랑을 쏟아 붓는 키스가 마음에 든다. 어머니에게 사랑을 떳떳이 말하지 못했다는, 그 죄책감을 갚으려는 듯이 아프게 조여 들어오는 두 팔도 마음에 든다. 미안하고 미안해서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귓가를 스치는 그 숨소리마저도.

“회사는?”

키스를 그만 두고, 얼굴을 마주한다.

“그냥 왔어.”

아직 저녁도 아닌 시간이다. 그 울듯 말듯한 표정을 두 손을 들어 쓰다듬어본다. 손바닥으로 부드러운 볼살이 뜨거운 습기를 머금은 체 달라붙는다. 어색한 키스에 수많은 감정을 쏟아 부은 탓이다. 정말 용케도 울지 않았구나.

“쉬더라도 일단 전화부터 해.”
“응.”

고개를 끄덕이고 걸어가 거실 TV옆의 전화기 앞에 쪼그려 앉는다. 여자치고는 꽤 큰 키인데도 쪼그려 앉은 뒷모습이 어쩐지 가엾을 만큼 귀엽다. 어쩌면 나에게 전화하던 날도 저렇게 앉아 있었을까?

“여보세요, 유경씨? 나 화영이에요.”

울먹이던 그 목소리를 아직도 떠올릴 수가 있다.

“몸이 안 좋아서 아무래도 오후에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헤어진 남자 친구의 아기를 임신했다고 울면서 한탄했다. 전화를 끊더니, 그 다음에는 받지도 않더라고, 혼자서 산부인과에 들어갔었다고, 멍청하게 생긴 치마를 입고 누워서 초음파 내시경으로 모니터에 뜬 애기 집을 보고 왔다고, 지금 막 수술 날짜를 잡고 돌아왔다고, 냉정하고 담담하게 담배를 한 대 피우려는데 임산부 경고문을 보는 순간 눈물이 터졌다고, 역시 억지로 남자를 사귀는 게 아니었다고, 다 그 녀석 때문이라고,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아뇨,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에요.”

사실 그녀를 동정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걱정하지도 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로 당장 목숨을 끊을 것만 같은 울음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 우는 목소리는 이렇구나. 그래도 끝까지 욕은 쓰지 않는구나, 역시 입이 곱구나. 영화라도 감상하듯이 그렇게 하나 하나 짚어 보고 있었다.

“오늘 하루, 주사 맞고 약이나 타다 먹으면 될 거 같아요.”

겨우 그런 것 가지고 자신이 레즈비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 지금 중요한 문제는 네가 임신했다는 그 사실이야. 거기에 집중해야지. 그 말을 무심코 꺼내려다 말았다. 모를 호기심이 정체성에 대한 충고를 억누른 때문이었다. 내가 어째서 헤테로에게 끌리는가, 하는 드문 감정을 파헤쳐보고 싶었다. 평소부터 눈 여겨 보았으니까. 처음 만난 이후로 줄곧 마음이 있었으니까. 그녀가 정말로 남자에 서툰 여자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네, 내일 오후에는 출근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 어디냐고 묻고, 다음날 만나기로 했다. 그녀가 날 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중절 수술을 코 앞에 두고, 나에게 전화해서 자기는 역시 남자를 사랑할 수 없는 것 같다고 한탄했으니까.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상처를 일부러 만지작거리며 느끼는 쾌감처럼, 나 역시 그녀를 원하고 있었으니까. 상처가 덧나 버린다 해도 상관없을 만큼이나.

“그럼 끊을게요, 죄송해요.”

그 다음 날, 위협 같은 고백을 듣고 처음으로 입을 맞췄다. 눈을 질끈 감고, 짓뭉개려는듯이 입술을 부딪히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듯이 거칠게 오가는 혀놀림이 재미있었다. 이성에게 더 이상 사랑을 줄 수 없다고 말했으면서도, 동성에게 처음으로 입을 맞춘다는 두려움과 불안이 요동치는 그 입맞춤이, 이제는 널 사랑할거라고, 널 사랑해야만 한다고, 사랑해보이고야 말겠다고 악을 쓰는 것만 같은 그 혀놀림이 마음에 들었다. 짜증이 날만큼 서툰 키스에 그렇게 매료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배고파.”

전화를 마친 그녀가 쪼그려 앉은체 중얼거린다. 수술을 마치고 난 그녀가 처음에 했던 말과 똑같다.

“먹고 싶은거 있어?”
“별로.”

먼저 한 말을 부정하면서 그녀는 주춤거리며 일어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는 한숨을 내쉰다. 스스로에게 몰두하는 자세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생각을 시끄럽게 움켜쥐고 흔드는 행위다. 보다 빠르게, 보다 쉽게 피곤해지기 위해서 하는 짓이다. 잠이 들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잘래?”
“응, 샤워할래.”

손바닥에 눌린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한참이나 그렇게 서있다가 문득 걸음을 옮긴다. 내가 없는 듯이 돌아보거나 시선조차 주지 않고 샤워기가 딸린 화장실로 들어가 버린다. 닫힌 문 너머로 옷을 벗는 소리가 들린다. 합성 수지 슬리퍼가 화장실 바닥을 오가는 소리에 아무런 리듬도 없다. 양치질을 하는 소리가 잠깐 들리고, 세수를 하는 거친 물소리와 호흡이 들린다. 그리고 욕탕에 걸어둔 커튼을 열고 욕탕으로 들어서는 발소리가, 다음으로 샤워기 소리가 흘러나온다. 거기까지만 귀를 기울이고, 소파에 걸어가 깊게 눌러 앉는다. 기분 좋은 날이거나, 분위기가 무르익은 날이었다면 좀 더 예민하고 철저하게 귀를 기울였을지도 모른다.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그녀의 머리와 목을 타고 어디로 흘러내리는지, 그녀가 지금은 어디를 씻고 있는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그 물소리를 들으며 음미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아니다. 물소리는 물론이고, 대화에서마저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고, 알 수 없다. 소파 곁의 작은 탁자 위에 놓인 담배를 집어 물고 불을 붙인다.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타 들어가는 담배를 바라본다. 건조한 담배 잎사귀 가루가 작은 소리를 내며 불덩어리로 변해가는 모습이 즐겁다. 그 모습을 즐기며, 여유 있게 한 개비를 피우고 남은 꽁초를 재떨이에 던져 넣는다.

“담배 피워?”

짧은 사이, 샤워를 마친 그녀가 목욕 수건을 두른 체 나와 묻는다. 엷게 달아오른 얼굴에 피곤이 살짝 드리운다.

“피울래?”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소파로 걸어와 앉고는 내 무릎 위에 쓰러지듯 눕는다. 어지간하면 볼 수 없는 그녀 나름의 어리광이다. 집에 좋아하는 주인이 없으면, 아쉬우나마 아무 사람에게나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쉬는 애완 동물 같은 어리광이다. 내 무릎에 누워서도 나를 올려다 보면서도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다. 체념을 담은 눈동자가 말한다. 잃어 버렸다고,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아 버렸다고, 그래서 여기서 쉰다고 말한다.

“잘래.”

졸린 표정을 짓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싫어, 담배 피웠잖아.”

싫다는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포개고 힘을 주어 누른다. 길게 혀를 내밀어 그녀를 흉내 내어 본다. 사랑한다고, 너를 사랑해 보이겠다고, 그렇게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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