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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영 판타스틱 동상이몽

2005.02.26 12:0002.26

  어서와, 언니. 응, 고마워. 괜찮아, 생일 축하만으로도 충분해. 사실 다행이이라고 생각하는게 선물로 받고 싶은건 따로 있었거든. 정말 어마어마한걸 바라고 있어서…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나 언니와 나를 걸고 조르고 싶은게 있어. 우리 벌써 십년 넘게 잘 지내고 있잖아. 맞아, 오늘 나 꽤 이상할거야. 언니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이상할지도 몰라. 근데, 오늘은 꼭 그래야할 것 같아. 오늘은 말이야. 아, 그 전에 일단 뭐라도 좀 내오는게 좋을텐데. 응, 다방 커피 괜찮지. 그럼 커피는 내가 끓일 테니까, 언니는 케이크 좀 잘라서 담아줘. 먹으면서 이야기해, 우리.
  이렇게 여유있게 이야기하는 것도 오랜만이네. 맞아, 원래 이런게 정상일런지도 모르지. 세상 천지에 매일 여유있게 붙어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구. 냉장고에 없어? 다용도실에 내놨나? 겨울에는 다용도실에 내놔도 괜찮으니까 거기다 내놓았을지도 모르겠네. 거기 있어? 이상하다. 어제 내가 냉장고에 넣어뒀던 것 같은데 왜 거기있지? 찾았으니 된거지, 뭐. 내거는 좀 작게 잘라줘. 언니는 설탕 네 스푼 맞지? 항상 생각하는건데, 아무리 다방 커피라도 너무 달게 마시는거 아니야? 맞다, 전에 엄마가 그러시더라. 너희는 원두 커피 세대고, 엄마는 다방 커피 세대라고.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난 다방 커피 참 좋아하거든? 응응, 그만큼만 잘라줘. 맛있어 보이지? 하드 치즈 케이크는 그 가게만한데가 없는 것 같아, 정말로. 맛도 맛이지만, 나 그 바닥에 깔린 견과류가 참 좋더라. 그래, 오늘 다 먹어버리자. 어차피 언니랑 먹으려고 사온거니까.
  여기, 뜨거우니까 조심해. 아이, 일단 케이크 한 입이라도 먹고 시작해. 참 아까 봤어? 저번주에 거실 탁자 새걸로 하나 샀어. 원래 살 마음은 없었는데, 보니까 안사고는 못견디겠더라. 응, 이쁘지? 딱 내가 좋아하는 모양이라서, 좀 비싸긴해도 바로 샀어. 이러니까 맨날 저축을 못하지. 응, 금방 이야기할게. 케이크는 마음에 들어? 그거 한 번 바닥까지 뚝 잘라서 먹어봐.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맛난 케이크에 대한 예의는 좀 있다가 지켜도 되.
  음, 그게 좀 애매해. 부탁하는데만 한 세월 걸릴 것 같아, 글로 쓰면 소설책 한 권은 쓸 것 같구. 아니, 사실 짧게 줄여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엄청 우습게 들릴게 뻔하니까, 그건 싫거든.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하려나. 그럼 정말로 하나하나 되짚어볼게. 가장 먼저… 가장 먼저 내가 이런 생각을 왜 품었나부터 시작하면 되려나? 그게 이 탁자 사고 다음 날이야. 저녁에 밥 먹고 소파에 딱 앉았어. 그리고 잠깐 멍하니 있었지. 눈은 저기 시계를 보고 있었어. 초침 움직이는걸 가만히 새어가며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거야. 이제 뭐하지? 뭘하긴 뭘해. 당장 설거지도 해야했고, 아니면 책을 보든 TV를 보든, 아무튼 뭐든 할 수 있는게 집안에 널리고 널렸는데 말이야. 그런게 그 생각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되더라구. 이제 뭐하지? 이제 뭘 해야하지? 하구. 처음에는 그냥 내가 모든걸 귀찮아하는구나. 게으름 피우는걸 정당화하려 드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어. 무기력증, 그래 무기력증에 걸린거라구 생각했어. 아니면, 인생의 권태기를 맞이했거나. 인터넷에서는 귀차니즘이라고 부르던가? 언니는 인터넷 별로 쓰지 않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왜 할 일이 태산같이 코앞에 쌓여있는데 그걸 보면 질려서 오히려 외면하고 도망치는 경우 있잖아. 그런건가보다 했어. 젊은데 이러면 안되지 하고 생각했어. 그래서 일어나서 작업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모니터를 보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거야. 감기 걸렸을때처럼 약간 현기증이 나기도 하고… 억지로 타블렛 펜을 잡고 작업 하려는데 도저히 못하겠더라구.
  그래서 그 날 하루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잠을 자고, 다음날 출근하고, 또 밥 먹고 그러는데 계속 그 생각이 떠나질 않는거야. 이제 뭐 하지? 이제 뭐 하지? 내가 무슨 정신병에 걸린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계속 생각나더라. 편집증인듯 싶기도 하구. 결국 시키는 일 빼고는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구. 심지어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만화책도 못보겠는거야. 머리가 멍해서, 멍해서 짜증나는데 계속 뭘 해야하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몇 일 지나고 나니까 너무 죽겠어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로 했어. 내가 왜 이런 생각에서 헤어나질 못하나. 그게 무의식이나 뭐 육감이나 그런 것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무엇을 바라고 나에게 던지는 질문일까 하고 말이야. 근데 중이 제 머리 못깎는다잖아. 도저히 어떻게 해야 질문을 이해하고 파악하고 대답할 수 있을지 감이 오질 않아서, 오히려 몇 배는 괴로운 거야. 그러다가 몇 일전에 방법을 찾았어. 바로 언니야, 언니. 언니가 있으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더라. 언니, 언니가 나 좀 도와줘야해.
  내가 두 명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거든. 근데 나한테는 언니가 있잖아.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지내는 언니가 있잖아. 솔직하게 말해서 난 언니가 또 다른 나같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어. 길을 걸을때나 뭘 먹을때나, 어디 놀러갈 때나. 항상 언니는 내가 생각하거나 원하는 대로 먹고 말하고 선택하고는 했거든. 말은 안했지만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랐어. 언니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나 싶을만큼 말이야. 혼자서만 생각한거지만, 난 언니 영혼이 내 영혼의 대부분과 똑같이 생겼을거라고 믿고 있었어. 거기다 우린 십년도 넘게 알아야할거 몰라야할거 가리지 않고 나누며 사귀어 왔잖아? 나한테 믿을 사람은 이제 언니밖에 없어. 그러니까, 언니, 언니가 잠시만 내 행세를 해줬으면해. 알아, 그러니까 나와 언니 사이를 걸고 부탁한다고 이야기했잖아. 위험한 짓이란거 나도 잘 알아. 응, 웬만하면 하지 말아야한다는 것두 잘 알아. 지금 내가 참 못된 짓하고 있다는 사실도 뼈저릴만큼 잘 알아. 나와 언니 사이를 핑계 삼아서, 무기 삼아서, 언니에게 나 살려달라고 협박하는 행위나 다름없다는걸 왜 모르겠어. 근데 어쩔 수가 없어. 어쩔 수가 없을만큼 너무 괴로워. 이러다가 창밖으로 뛰어내릴 것 같아서 무서워. 정말 견딜만큼 견뎠고, 버틸만큼 버틴 것 같아. 나 이번만 이렇게 제멋대로 굴게. 언니가 이해해주리라 바라지도 않아. 그냥 동정이라해도 좋아. 언니, 한 번만 내가 되어줘. 이야기 해줘. 난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아.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아. 언니라면, 정말 언니만이 내가 될 수 있을거야. 언니 영혼은 내 영혼이랑 너무 많이 닮았으니까, 그리고 서로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까. 어설프게 넘겨 짚는 일도 없을거고, 그냥 느끼는대로 생각하는대로만 말해주면, 그게 바로 나일거야. 틀림없이 그럴거야. 그러니까, 제발 내가 되어줘.
  고마워, 언니. 일단 무조건 고맙구, 또 미안해. 나도 불안해, 그리고 무서워. 하지만, 이상하게 이번 일로 언니랑 나 사이에 별 다른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아.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그냥 그럴 것 같아. 응, 그래, 이왕 하기로 한거 천천히 확실하게 해볼께.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짚어가면서, 반드시 이 고민을 풀어버릴께. 언니를 협박하기 까지 하면서 벌리는 일이니까, 꼭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할께. 사실 어디부터 시작해야할는지 아무 생각도 해두지 않은건 아니니까. 응, 맞아. 더 이상 시간 끌 필요는 없겠지. 그럼, 이제부터 언니는 나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영혼까지 나야, 알겠지? 시작할께.
  그럼 평범한 것부터 물을께. 지금 기분이 어때?
  복잡해. 좀 자세하게 말해줘야 하려나? 사실 이런 일은 중학생도 하지 않을 것 같아. 의미는 있을듯 싶지만, 어딘가 심하게 유치하다는 생각이 드니까. 또 스스로 약간 미친게 아닐까하는 불안감도 들어. 위안을 해보자면, 그래, 해보고 싶은걸 하고 있다는 점 정도일 것 같아. 정직하게 또 한 걸음 나아가서 이야기한다면, 이게 과연 도움이 될런지도 의심스러워. 아무튼 그래. 복잡해. 마음도 머리도 복잡해. 그 외에 다른 말은 할 수 없을 것 같아. 참 그리고 좀 무서워. 이건 방금말한 거랑 좀 연관이 있는데, 이런 짓을 벌이는게 미친 짓이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이야. 내가 이래도 되나하고 불안하고 또 무서워. 보는 눈은 없으니까, 어쩌면 양심이 찔리기 때문인지도 몰라. 대답은 여기까지만, 기분에 대한 설명은 한도 끝도 없을 테니까. 그냥 간단하게 줄이자. 난 지금 무섭고, 또 복잡해.
  다음으로 시작점을 찍어야 할 것 같아. 나는 왜 굳이 이런 방법을 택한걸까?
  글쎄? 내가 특별하길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리고 성숙하더라도, 그런 유치한 바람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모여서 지병 이야기를 늘어놓고, 또 누가 더 불행한지 경쟁하는 것처럼 말이야. 나는 특히 창작하는 집단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 누군가는 영화를 찍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고, 또 행위도 하고, 연기를 하고…… 흔히 예술이라고들 하지? 난 그 바탕에는 예술혼 이전에 그런 유치한 바람이 있다고 생각해. 나도 그림을 그리지만, 길이 남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 이전에 내 자신이 한 폭이 그림이길 원하는 충동을 지니고 있거든. 내 자신 자체가 한 장의 멋진 그림으로 모두를 매혹케했으면 좋겠다는 바람 말이야. 드러내놓고 말하자면, 자, 나를 인정해줘 하고 온몸으로 울부짖는거지. 그건 내가 그림으로 돈을 벌기 전에 혼자서 습작하던 시절에도 품고 있던 욕망이었고, 또 동기이기도 했을거야. 분명히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일거야. 다들 스스로가 한 편의 영화이기를, 소설이기를, 행위이기를, 배우이기를 원하겠지. 하지만, 참는거지. 그게 유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함부로 입밖에 내지 못하는건 물론이고, 은근히 돌려말하거나 표현하지도 못하는거야. 그렇게 눌러담고 담다가 가끔 이렇게 폭발하는거지. 개중에는 그런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긴 있지만서도. 난 그런 것 같아. 난 지금 특별하길 너무나 원하니까, 내가 한 폭의 멋들어진 그림이길 원하니까. 그렇다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순 없으니까. 일부러 은밀하게, 이런 장소, 이런 시간, 이런 순간을 노린거고, 지금도 스스로 부끄럽다는 감정을 눌러참고서 이러고 있는 걸거야. 말이 길어지는데, 딱 부러지게 정리를 할 수가 없네. 대답은 여기서 끝내자.
  어쨌든 나아가야 할 것 같아. 두려워해서는 물거품이 되겠지. 이런 마음이 자기 합리화에다 부끄러움을 감추는 구차한 선언이라고 해도 말이야. 그러니까 또 물어볼거야. 그 날, 나는 무엇 때문에 그런 고민에 빠졌을까?
  사실 그건 누구도 모를거야. 다만, 그건 분명히 게으름이나 귀차니즘같은건 아닌듯 싶어. 그렇다고 엄청나게 포장할만큼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확신도 들진 않아. 그저 뭔가 있는게 아닐까. 질문 자체도 너무 광범위하고, 대답은 수천가지가 있을 수 있을거야. 이 질문은 무의미한 것 같아. 그리고 난처하고 곤란해.
  어떻게든 대답을 찾아야해. 수천가지 중에 하나만 짚어내는 오류를 범하더라도, 나는 대답을 듣고 싶어.
  정히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말이나 글로 정리할 수 없는걸 굳이 결론내려 들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아아, 이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인데. 어쩐지 머리가 아파, 그리고 짜증도 나려고해. 귀찮기도 하고, 불쾌해.
  그래서 더더욱 대답을 듣고 싶어. 내가 나에게 대답해주지 않으려는 부분이잖아. 그 안에 뭔가 있지 않을까?
  스스로라고 해서 스스로에 대한 모든 걸 알 수 있는 권리가 있을까? 무의식은 최소한의 방어 기재야. 마치 심장의 박동이나 백혈구의 멸균 작용 같은거야. 의지대로 조절할 수 없는게 맞는거라구. 그걸 자기 스스로 무너뜨려서, 그 안에 들어있는걸 끄집어내서 어디다 쓰고 싶은데? 어떻게 보면 자학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도 좋아. 내가 내 목을 조르는 행위라고 해도 좋아. 대답해줘.
  더 두려운 건, 그 끝에 대단한 것 하나 없을지도 모른다는거야. 붕뜬 이야기만, 나도 모를 감정만 들쑤시는데 그치면, 오히려 허무하고 허탈하겠지.
  대답해줘.
  나도 몰라. 그저, 그냥, 그래, 단지 피로가 쌓였기 때문일수도 있겠지.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피곤했기 때문일지도 몰라. 나는 한 폭의 그림으로 살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거기다 마땅히 순수한 예술혼을 지녀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사는 편이니까, 스스로가 그런 저열한 욕망을 품고 있다는데 스트레스도 받았겠지. 그럼 뻔한 질문이 나오는거야. 인생, 왜 살지? 하고 말이야. 그걸 단지 말만 바꿔놓았을 수도 있어. 이제 뭘 하지하고 바꿔놓은거지. 왜 살지? 하는 질문이 얼마나 어이없고 무가치한지 잘 알고 있으니까. 다 똑 같은 질문인데, 한 폭의 그림이고자 하는 욕망이 살짝 그걸 비틀어놓은거야. 아마도 틀림없이 그럴거야. 예술혼을 불태우지도 못하고, 한 폭의 그림이라는 욕망도 채우지 못하고, 그런 욕구불만은 쌓이고 쌓여가는데, 그에 대한 출구는 찾을 수가 없는거지. 그나마 떠오른 고민이 이제 뭘 하지? 라는게 다행인지도 몰라. 의미를 붙여보면, 그래도 전진하고픈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으니까. 만약 그림이 정말로 내 길일까? 같은 의문을 품었다면, 아주 지랄 같았을지도 몰라. 그야말로 자학에 불과했겠지. 아, 정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난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과는 만나기도 싫어했는데 말이야.
  피곤했을 뿐인걸까?
  그럼 달리 뭐가 있겠어. 또 꾸미기에 따라서는 무슨 말이들 못하겠어?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이유는 없잖아.
  정말 그럴까?
  같은 말 여러 번 반복하고 싶지 않아. 하나 더 덧붙여볼까. 피곤하기 때문이고, 스스로 그 피곤함을 떨어낼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뭔가 대단한 벽에 봉착이라도 한 듯이 현실도피하는데 그치지 않을수도 있어. 당장 순수하고 높은 경지에 이를 순 없고, 그렇다고 그 경지에 이르기위해 먹고 살 방편을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먹고 살기 위해 하고 있는 짓이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스트레스는 쉼없이 쌓이고, 그래서 피곤해지고, 창밖으로 뛰어내릴 용기는 없는거지. 그래서 고뇌를 핑계 삼아 현실 도피하는 것뿐이야. 아니, 이렇게 표현할 필요도 없을지도 몰라. 쉽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어. 그래, 이건 그냥 학생이 공부는 하기 싫은데, 시험은 잘 보고 싶은거랑 똑같은거야. 변명의 여지는 없어. 그런거랑 똑같아.
  마치 자학같아.
  그러길 바랬잖아. 좀 더 말해줄까? 해결책?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해. 학생은 꾹 참고 공부를 하면 문제는 절로 해결되.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예술혼을 버리던지. 아니면 다 포기하고 예술혼에 집착하고 그 길로만 나아가거나.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하면 그만이지. 근데 그럴 수 없어서 현실도피하고 있을 뿐이잖아. 어딘가 두려우니까. 내가 정말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이룰 수 있다해도 거기까지 가는 길은 얼마나 험난하고 또 오래 걸릴까. 두려워서 견딜 수 없겠지. 생각만하고 첫 발을 내딛지도 못하는거야. 나는 시류와 대세에 따라 시키는 일만 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살거야하고 생각해도, 자존심이 살아 있고, 취향이라는게 있고, 꿈이라는게 있으니까, 그 쪽으로 또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겠지. 이런 걸 뭐라고 줄여 말하는지 잘 알잖아? 쓸데없이 생각만 많다고 하는거야.
  기분이 이상해.
  나는 느껴. 나는 이런 자학을 하면서도 어딘가 희열을 느끼고 있어. 더 말할 나위없을만큼 구차한 자학이라지만, 어딘가 특별한 느낌을 받으니까 말이야. 완전한 착각에 지나지 않지만, 무의식보다 깊은 무언가가 그렇게 포장을 하는거지. 아, 난 참으로 고뇌하는구나. 아, 난 지금 너무나 괴롭구나. 아, 난 지금 스스로에게 엄격하구나. 아, 이런 짓을 하다니 난 이 얼마나 특이한 사람인가! 아니라고 부정을 해도 어쩔 수 없어. 난 지금 희열을 느끼고 있으니까.
  메저키스트 같다.
  별 다를바 없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어떤 방향으로도 걸어갈 수 없고, 중도를 걸을 수도 없다면, 이 희열만으로 버티고 또 버텨야 하는걸까? 그럼 이 고민이 사라질까?
  솔직하게 이야기 해봐. 이런 고민을 하는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이런 유치한 짓거리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 셀 수도 없을만큼 이런 자학을 하고 또 했을걸. 궁상맞게 주변 사람을 귀찮게 해가면서, 이런 방법으로 한 폭의 그림이 될 수 있진 않을까 착각하면서 말이야. 아마 어떻게 극복했는지, 무엇을 계기 삼아 헤어날 수 있었는지 떠올리기는 힘들거야. 나름대로 부끄러운 기억일 테니까. 철저히 묻어두고, 지워겠지. 단지 다음에 자학하기 딱 좋을만큼만, 그런 부분만 골라서 기억에 남겨 두었을거야. 내가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버티는거야. 가능하면 종이와 펜을 늘 가지고 다녀야겠지. 그러다 어느 순간 기분이 좀 나아지거나, 고민의 농도가 좀 엷어진다 싶으면 그때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종이에다 기록하고 나중에 참고 삼는거야. 좋잖아. 스스로가 특별한 것 같은 희열을 좀 즐기다가, 이제 안되겠다 싶을때쯤 관두는거야. 이렇게 좋게좋게 생각하는 편이 제일 나은 방법이 아닐까?
  한순간에 이상한 인간으로 변해버린 것 같아. 내가 그렇게 이상해?
  위로를 구하는건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질문인지 모르겠네. 세상 사람이 다 그 놈이 그 놈이라고 하잖아. 누군들 속 편하게만 살 수 있겠어. 어딘가 뒤틀리고, 또 어두운 구석을 지니고 있겠지.
  그래, 근데 어쩐지 이야기가 겉돌고 있는 것 같아. 불쾌하고 짜증나는 이야기만 연거푸 내뱉고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분위기를 이끌어서 더 중요한 무언가를 감추기 위하려 드는 것만 같아. 내 착각일까?
  착각? 아마 틀린 생각은 아닐거야. 여태까지 한 이야기를 간단히 줄이면, 나는 자학을 통한 현실 도피로서 약간의 쾌감을 느끼고 있는데 불과하니까. 실은 스스로를 주춤거리게 물러나게 할 만큼 짜증나게 말을 쏘아대는 것도 어쩌면 그 뒤에 숨기고 싶은 이면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을거야. 그럴 경우를 무시할 순 없지. 하지만, 내가 과연 거기까지 파고 들 수 있을까? 아마 그 부분은 심장의 박동이나 백혈구의 멸균 작용과 같은 영역일 수도 있어. 그야말로 인생 왜 사는가에 대한 해답이 숨어있는 곳일지도 모른단 말이야.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도 읽을 수 없는 곳일거야.
  한 귀퉁이라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찔러보고 싶어도 방향조차 알 수 없으니 무리야. 어쩌면 알아서 좋을게 없을지도 몰라. 인생 왜 사는지에 대한 진리 같은 대답이 그냥이라면, 그것도 나름대로 괴로울 테니까. 정말 그럴 수도 있고,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어쩐지 나른해보인다.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질 때가 온 것뿐이야. 채찍 뒤에는 당근이 있어야지. 아무리 가혹하고 냉랭한 자신이라도, 스스로를 돌아올 수 없는 절벽 아래로 내던지지는 않아. 그건 본능이니까. 넌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화를 내고, 하지만 그 짓을 끝까지 해나간다면 뭔가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여주는거야. 힘든 하루 끝에 퇴근이 있지만, 퇴근 다음에 다시 출근이 있는 것처럼, 가혹한 굴레를 씌우는거지. 당장 살기 위해서는 달리 수가 없잖아.
  자학의 희열도 나름대로 효과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처는 어루만져도 어쨌든 낫긴 낫는 법이니까. 아픔에서 오는 희열 속에는 어제보다는 덜아프다는 확인도 들어있을 테니 말이야. 내버려두면 더 빨리 낫겠지만, 그 위에 뭘 씌워놓지 않는 이상은 힘들지.
  불평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갑작스레 너그러워진 것 같다. 뭔가 어색해.
  의심스러워도, 곡해할 필요는 없을 거야. 원래 추락은 한순간인 법이니까. 앞뒤 가리지 않고 화를 낸 다음 순간, 화를 냈다는 사실에 후회하고 심하면 겁을 먹듯이 말이야. 좀 더 높은 곳에서 오랜 시간 떨어진다면, 좀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대신에 죽을 수도 있을거야. 생존 본능을 이겨낼 만큼 진정하고 진실하게 절박한 순간이 오면 반대편까지 꿰뚫어버릴만큼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을거야. 그런 날이 오길 바라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
  높은 곳이 아니더라도, 반복하면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을까?
  자기하기 나름이겠지.
  성의없네.
  너그러움 뒤에는 게으름이 오기 마련 아니겠어. 그리고 그 질문에는 위로도 해주고 싶지 않고, 질책을 해주고 싶지도 않아. 굳이 고상하게 꾸며 말하라고 하면, 팔자 소관이라 답하고 입을 다물거야.
  그런데 신기하다.
  뭐가?
  제대로 정리한게 없는데도, 시간을 낭비한 느낌이라거나 속만 상하고 말았다거나 하는 느낌이 들지를 않아. 게다가 알고 싶은 부분에는 손조차 뻗지 못했는데 말이야.
  어쩌면 내가 나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의심은 품은 적 없어? 다른 영혼이 너를 평가하고 논하고 있다는 느낌 말이야.
  게으름 뒤에는 심통이 오는거야? 나도 너그러워지고 싶어. 사람이란, 다 그 놈이 그 놈이라고 했으니까. 아무래도 좋을거라고 생각할래.
  이미 충분히 게을러진 것 같은데?
  그럼 마지막 질문이 남았네. 더 이상 게을러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들기 전에 물어봐야겠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겠지. 그럼 나는 이제 뭘 하면 좋을까? 뭘 해야할까?
  이왕이면 알고 싶은 사실에 대해서는 방향이나 가닥조차 잡지 못했는데, 마음은 상할대로 상했다는 슬픈 기억은 잊어버리는게 좋을거야. 기왕이면 지금 당장 잊어버리는게 좋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기분을 좋게 만들 필요가 있고, 기분이 좋아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뭔가 맛있는 걸 먹는게 제일 좋을거야. 이를테면, 커피 한 잔에 치즈 케이크를 곁들인 다과상 같은거 말이야. 따끈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치즈 케이크를 견과류 바닥과 함께 듬뿍 잘라 먹자. 그 다음에 고마운 사람에게 고맙다고 다시 한 번 말해주고, 평소의 나로 돌아가면 그만일거야.
  고마워, 언니. 아니야, 뭔가 도움이 된 것 같아. 언니가 뭐가 미안해. 설사 언니가 내가 아니라 언니로서 나를 대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다 내가 자초한거고, 또 모든걸 감수할 각오도 하고 있어. 그냥 언니한테 무리한 부탁해서 내가 너무 미안해. 응, 기분도 많이 좋아지고, 고민도 멈춘 것 같아. 근데, 언니, 언니는 나처럼 이럴때가 있어? 이럴 때 어떻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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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환 껍데기1 2005.03.25
갈원경 죽음의 샘 - 본문 삭제 -2 2005.03.25
양원영 천년의 동화 - 본문 삭제 -3 2005.03.25
초청 단편 날개(과욕) - 신화 삐딱하게 보기. 2005.02.26
김수륜 Love affair - 본문 삭제 - 2005.02.26
赤魚 옥션 - 본문 삭제 -3 2005.02.26
赤魚 어떤 밸런타인데이 - 본문 삭제 -1 2005.02.26
갈원경 보름의 밤 - 본문 삭제 -4 2005.02.26
은림 태양을 삼키다1 2005.02.26
은림 낙오자3 2005.02.26
정해복 고양이의 언어5 2005.02.26
미로냥 마왕에게 꽃다발을3 2005.02.26
아밀 키리에 - 본문 삭제 -1 2005.02.26
김이환 천사가 지나갔어3 2005.02.26
정대영 피곤하면, 이리와요, 혜경씨.2 2005.02.26
정대영 판타스틱 동상이몽 200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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