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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적당히 노는 이야기


 


 


 


 “아가씨. 에데사 경께서 오셨습니다.”
 
 시녀가 말했다.
 
 “웅…… 들어오라고 해.”
 
 시계가 없는 곳이라는 걸 알면서도 세미는 본능적으로 머리 맡을 더듬거리고 만다. 아, 더 자고 싶은데. 중얼거리면서 푹신한 이불에 파묻힌 채 한숨을 쉬는데, 정중하게 노크하는 소리에 이어 문이 벌컥 열렸다.
 
 “넌 왜 항상 이런 식인 거야!”
 
 놀랍지도 않을 만큼 익숙해진 목소리에, 세미는 비로소 베개에서 고개를 들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힐페 씨.”
 “아침 인사를 들을 시간은 벌써 지났다. 아드리아노플 대신관 대리께서 기다리고 계시건만 수업 시간이 지나도 레이디 엘닷사께서 출석하지 않았다더군.”
 “아, 몰라. 수업 같은 거 안 들어갈래요.”
 
 다시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고개를 파묻자 힐페릭은 성큼성큼 다가와 이불을 확 들췄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일어나…… 우왁!”
 
 하늘하늘한 잠옷 차림으로 웅크리고 있는 세미의 맨 어깨를 보고 말았는지 힐페릭은 과도하다 싶을 만큼 황급히 이불을 팽개치고 돌아섰다. 당사자인 세미는 그게 뭐 어떻다는 거냐는 듯 태연하게 상반신을 일으켜 다시 제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귀찮아요. 대신관 님 수업 지루하단 말이에요. 안 들어갈래요. 아프다고 해 줘요, 네? 내가 시키는 건 다 해준다고 했잖아요. 내 기사니까 내 말대로 해줘요, 네? 네? 힐페 씨이이이!”
 “옷이나 입어라.”
 “제 부탁 들어주신다고 하면요.”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너는 이 알텐티카 왕국의 엘닷사로서 여신의 말씀을 듣고 전할 의무가 있다. 평범한 학생이라면 수업에 빠지든 말든 개인의 자유겠지만, 네 경우는 아니야.”
 “내 의무는 말씀대로 신탁 듣고 전하는 거잖아요. 대신관 님 수업을 왜 들어야 되는 건데요?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세미는 이불을 걷어냈다. 힐페릭이 그 소리에 몇 걸음 앞으로 물러났다.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선 그를 향해 세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채로 계속 투덜거렸다.
 
 “아드리아 님 수업 너무너무 지루하고, 어차피 진짜 대신관도 아니고 대리라면서 매일 잔소리 하고 그러면서 뭐라고 대답만 하면 기절할 듯이 놀라서는…… 아무튼 아프다고 해 주세요, 네? 네? 힐페 씨, 나 진짜 수업 가기 귀찮단 말이에요. 내일부터 갈게요. 내일은 꼭…….”
 “로드 클로비스께서 귀중한 말씀을 나누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데도?”
 “갈게요!”
 “…….”
 
 힐페릭이 푹 한숨을 쉬었다. 세미는 갈아 입을 옷을 찾기 위해 잠옷 차림인 채 힐페릭의 바로 곁을 지나쳐 반대편 옷장으로 달려갔다.
 
 “너, 너는 대체 왜 항상 이런 식인 거냐! 옷 정도는 갈아 입고 나서 사람을 들여 보내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또, 세미를 보지 않기 위해 돌아서며 힐페릭이 외쳤다.
 
 “전 힐페 씨가 봐도 아무렇지도 않은 데요.”
 “무방비하다!”
 “소리 지르지 않아도 잘 들리거든요. 이 방에 힐페 씨랑 저랑 둘뿐이니까.”
 “그, 그런 말을 하는 게 무방비하다는 거다!”
 “까다롭긴.”
 
 옅은 베이지색 언더스커트 위로 새하얀 상의를 겹쳐 입고 프러시안 블루 빛깔을 기조로 한 조끼 형식의 전통복을 또 걸친다. 여러 색의 실을 꼬아 견고하게 만든 허리띠를 묶은 뒤 라피스라즐리와 수정 같은 걸 엮은 그럴싸한 형태의 ‘부적’을 매달면 ‘알텐티카의 엘닷사’로서 밖으로 나설 준비를 마친 것이다.
 
 “힐페 씨야말로 언제까지 너, 너, 하실 거예요? 좀 더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시라구요. 아시겠어요?”
 “네 이름 같은 거 부르고 싶지 않다.”
 “냉정해라. 난 힐페 씨가 좋은데.”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은 삼가라. 네가 항상 그런 식으로 무방비하게 구니, 폐하께서도 염려하시는 거다.”
 
 진심으로 짜증이 난 얼굴로 힐페릭이 말했다. 세미가 그의 눈 앞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돌며 어떠냐는 듯 우쭐대자 그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은 채 뒤쪽 탁자에 놓인 머리 끈을 가지고 와 내밀었다.
 
 “아, 맞다. 머리 올려 묶는 거 잊었네. ……그러나저러나 또 무슨 말 들었군요? 오늘따라 무방비 하다고 몹시 새삼스럽게 야단치시는 걸 보면.”
 “…….”
 
 명백히 어색한 침묵 후에 시선을 피하며, 힐페릭은 우물우물 답했다.
 
 “……별 거 아니다.”
 “흐음. 이번엔 뭘까. ‘아가씨랑 잤어?’ 라든가……?”
 “무, 무, 무, 무, 무…… 무, 무슨 소리를!”
 
 탕,
 탁자를 내리치며 새빨개진 그를 담담한 얼굴로 구경하며 세미는 긴 머리를 꼼꼼하게 땋아 올려 묶었다. 머리끈 역시 허리에 맨 띠와 마찬가지로 지정된 실로 된 물건. 세공이 들어간 은으로 된 장식이 달려 있다.
 
 “정말이구나. 어차피 루페 님은 그냥 장난치시는 건데 이제 슬슬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어요? 힐페 씨. ……아무튼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요?”
 “여, 여, 여자애가!” 타앙, “그런 말!” 타앙, “하지 마!” 타앙!
 
 탁자야 어서 내려 앉아라, 하는 기세로 내려치는 그를 여전히 즐겁게 구경하며 세미는 속으로 ‘한 대 패주고 싶은 건 탁자가 아니라 나겠지’ 하고 생각했다. 고생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 저 사람을 놀리는 건 재미있다.
 사실 그런 정도 낙도 없으면 하루하루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시녀들과 제관 일동만 쳐다보면서 말라 죽을 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클로비스 님이 기다리고 계신다는 건 진짜죠?”
 “나는 누구와 달라서 거짓말을 못한다.”
 “어머, 나도 거짓말 안 해요!”
 “어제 국왕 폐하 앞에서 빈혈이 있다며 쓰러진 건 어디의 누구였지?”
 “어머나, 누굴까요. 폐하의 등에 업힐 수 있었는데 가로챈 사람은.”
 “배가 터지도록 저녁을 먹고도 케이크를 일곱 개나 더 먹은 여자를 업었다간 루페르트 님의 허리가 남아나지 않았을 거다. 부탁이니 알텐티카의 미래를 좀 생각해 주지 않겠나? ‘엘닷사’ 님.”
 “알게 뭐야, 그런 거. 누가 ‘여신의 대리인’ 같은 거 하고 싶댔어요?”
 
 아무렇게나 말하며 방을 나서자 몇 걸음 떨어져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던 시녀가 길을 비켜 주었다. 세미는 잘 닦아 반짝반짝 윤이 나는 바닥을 쿵쿵 울려대며 내달렸다.
 
 “부탁이니까 없는 기품이라도 있는 척 굴어 줄 수 없나?”
 “클로비스 님이 지쳐서 돌아가 버리면 안 되잖아요.”
 “하아…… 너는 정말 미남을 좋아하는군.”
 “그거 말고 이런 만리타향에서 무슨 재미로 살겠어요?”
 “간식 시간마다 먹는 재미로 산다고 주장하고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다만.”
 “지금은 간식 시간이 아니니까.”
 
 석 달 전에 갑자기 이 ‘알텐티카’로 끌려왔다.
 끌려왔다, 는 건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굳이 말하자면 ‘쏟아졌다’ 쪽이 가까운 표현이겠지. 윤세미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부모님과 대학생 오빠와 함께 살던 집에서 오전 일곱 시 반쯤 학교를 향해 나섰던 길에 ‘엘닷사’ 곧 ‘알텐티카 여신의 신성한 대리인’으로 당첨 당했다. 힐페릭은 ‘당첨’이 아니라 ‘선택 받은 것’이라고 강하게 말하지만 세미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이 곳에 오던 날까지 이런 세계가 어딘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들어보지 못한 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여고 1학년 학생이었으니, 뭘 보고 ‘선택’을 받는단 말인가? 역시 ‘당첨’ 이다. 자주 가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 이용자 중 무작위로 선택해 설문조사 메일을 발송하는 것처럼, 아이스크림 체인점의 일만 번째 결제 손님처럼, 그냥 적당히 골라 잡은 것이 틀림 없다.
 
 고귀하신 알텐티카 여신께서는 제비 뽑기를 하셨던 거다.
 
 [어서 오십시오, 신이 선택한 아가씨.]
 
 신호등이 푸른 색으로 변하자 횡단보도를 향해 한 발 힘차게 내 디뎠는데 갑작스런 섬광과 더불어 몸이 살짝 떠올랐다. 어라, 하고 의아해 할 새도 없이 발을 조금 더 아래로 디디자 눈 앞이 환해지며 웬 산속에 떨어져 있었다.
 오호라, 이렇게 죽는구나. 분명 수면제 같은 걸 먹고—영화에서 본 건 많아서 망상은 하늘을 뚫는다—끌려왔다가 장기라도 뜯긴 후 운 나쁘게 살아남았구나! ……까지 생각이 미칠 듯 말 듯 할 때에 데리러 온 힐페릭을 만났고, 알텐티카 왕국의 이레네 성으로 안내 받았다. 대신전에서 마주한 위엄 넘치는 대신관(대리)와 대마법사(대리) 이하 제관 일동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던 것을 세미는 잘 기억하고 있다.
 
 그야 보통은 그런 걸 잊지 못하겠지.
 
 [저희들은 알텐티카 왕국의 ‘일곱 기둥’을 대신해 신의 선택을 받아 들였습니다. 저희들의 부름에 응답해 이곳까지 납셔 주심에, 알텐티카의 모든 백성과 국왕 폐하를 대신해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 한 번도 본 적 없는 옷을 걸치고 있었다. 세미는 어안이 벙벙해서 멀뚱멀뚱 거기에 서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이곳’이 다른 세계이고 어떤 이유에선지 세미는 이리로 불려 왔다는 걸 겨우겨우 이해하게 된 다음, 그녀가 처음으로 떠올린 것은 ‘말이 통해서 그래도 다행이다’ 라는 감상 정도였다. 이상하게도 겁은 나지 않았고 어차피 수학 과제도 안 했는데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탄하거나 두려워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까.
 
 세미는 당장 위협받지 않는 한 꽤 긍정적이고 대범한 편이었다.
 
 [그래서 저한테 무슨 용건이세요?]
 
 선선히 그렇게 묻자 대신관과 대마법사라는—엄밀히 말하면 대신관 대리와 대마법사 대리—두 남자는 서로 얼싸안고 감격에 차 눈물까지 흘렸다.
 
 ……그랬던 시절도 있다는 이야기다.
 
 “클로비스 님, 좋은 아침이에요!”
 
 아무튼 그것이 정확히 석 달 전.
 석 달 사이 편안하고도 안락한 생활에 길이 들어 피부에서 윤이 나기 시작한 세미는 대신전 응접실의 문을 노크도 없이 요란하게 열었다. 안쪽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던 대신관(대리)의 흰 얼굴이 더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대신관(대리)는 심약한 남자였으며 석 달이 되도록 윤세미라는 ‘구원자 아가씨’의 시끌벅적 쾌활한 성격에 전혀 적응을 못 하고 있었다.
 
 “아침 인사를 들을 시간은 아닌 것 같군요. 레이디 엘닷사. 건강하신 걸 보니 기쁩니다.”
 
 대신관 앞에 앉아 있던 우아한 남자는, 싸늘한 표정을 바꾸지 않고 그렇게 답했다. 타르홀름 후작령의 주인이며 국왕의 숙부인 클로비스 경은 방글방글 웃으며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세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자 마자 세미가 아니라 그녀의 뒤쪽에 서 있던 힐페릭을 향해 여전히 조용한 음색으로 말했다.
 
 “에데사 경. 엘닷사의 신변 보호를 맡은 건 틀림없이 자네겠지. 아가씨께서 서두르다 다치기라도 하시면 어떻게 책임을 질 생각인가?”
 “죄송합니다.”
 
 둘만 있었다면 ‘이 바보가! 뛰지 말라고 말 했잖아!’ 하고 소리쳤을 힐페릭이지만 남 앞에서는 표정 없이 정중한 ‘기사님’으로 돌아간다. 세미는 단 둘이 남았을 때의 힐페릭을 제외하면 이 왕국 어디에도 자신을 야단칠 사람이 없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알텐티카 여신의 신성한 대리인이신 엘닷사 님’이란 꽤 즐거운 자리다.
 
 “타르홀름 경께서 조언을 구하고 싶으신 게 있으시다고 합니다. 아가씨, 신께 뜻을 여쭐 수 있겠습니까?”
 “오늘 밤이 신탁일이었어요? 어머, 잊고 있었네.”
 “……에데사 경. 아가씨의 일정을 챙겨 주시라고 말씀 드렸을 텐데요…….”
 
 대신관(대리)의 얼굴에서 다시 핏기가 가셨다. 힐페릭은 그의 완곡한 질책에 ‘죄송합니다’ 하고 답했을 뿐이었다. 잊은 건 세미지만 야단 맞는 건 힐페릭. 그 구도 역시, 세미는 이레네 성으로 온 지 사흘 만에 이해하고 말았다.
 
 “만약에 시간이 남으면 꼭 여쭤 볼게요. 클로비스 님의 부탁이니까.”
 “고마운 말씀.”
 
 클로비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웃지 않았다. 세미는 대신관(대리)가 내 준 자리에 사양 앉아 앉아 무릎을 모으고 턱을 괸 채 방글방글 클로비스를 올려다 보았다. 겉보기 나이는 서른 초중반 정도. 먼지 한 톨 날아 다니는 것에도 신경이 곤두서는 게 아닐까 싶은 신경질적인 미모가 눈을 즐겁게 했다.
 
 ‘알텐티카 왕가의 핏줄은 정말 위대해.’
 
 세미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보기 드문 미모를 자랑하는 이 왕국의 젊은 국왕을 생각했다.
 
 [흐음. 그래서 정말로 그대가 ‘우리들의 구원자’라는 거지? ……의외네.]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금발에 신이 내렸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푸른 눈을 가진, 역시나 신이 내린 미모의 소유자인 루페르트 국왕 폐하께서 입을 열 때마다 세미는 그림이 말을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리곤 했다.
 
 [국왕 폐하 앞입니다! 엘닷사 님, 부디 예의를……!]
 [괜찮아. 우리들의 구원자잖아. 어지간한 귀족 나부랭이보다야 훨씬 귀한 몸이시지.]
 […….]
 
 심약한 신경줄 때문에 종잇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안절부절못하는 대신관(대리) 곁에서 세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루페르트를 올려다 보았다. 똑바로 쳐다보는 그녀를 향해 루페르트는 여유롭게 웃었다.
 
 [이런이런. 이러다간 ‘대재앙’이 오기 전에 아가씨의 눈빛에 찔려서 먼저 죽겠네.]
 [하지만 역시 질리지 않는걸요. 루페르트 님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봤어요. 저기, 다시 손을 잡아 봐도 돼요?]
 
 그러면서 벌떡 일어났더니 대신관(대리)는 가슴팍을 부여잡고 호흡 곤란으로 기절해 버렸다. 대마법사(대리)는 안경을 코끝에 걸친 채 멍하니 세미의 발 뒤꿈치에 시선을 박고 입을 뻐끔거렸다. 정작 당사자인 루페르트는 키득키득 소리 죽여 웃으며 주위를 둘러 보고 말했다.
 
 [그대는 우리들의 구원자니까 바라는 바 무엇이든 들어 드려야지. 그대처럼 귀여운 아가씨라면 구원자가 아니어도 당장 품에 안고 싶을 정도인걸.]
 [어머, 그건 안 돼요. 마음의 준비가 안 됐거든요.]
 
 그 말에 대마법사(대리)마저 멍한 눈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일대 소란이 일어난 가운데 루페르트는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듣고 계십니까? 엘닷사 님.”
 “응? 아, 네! 타르홀름 서북쪽 지방에 비가 안 온다고 말씀하셨죠?”
 “그렇습니다. 원래 이 시기는 비가 잦아 침수를 걱정해야 하는데 이상할 정도로 맑은 날이 지속돼, 관리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웅…… 그런데요 클로비스 님. 가뭄보다 홍수가 나은 거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향후 얼마나 가뭄이 지속될지 알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됩니다. 비가 온다면 언제쯤일지 하는 것과 혹 특정한 원인이 있다면 그에 관해서도 부탁 드리겠습니다.”
 “물어 볼게요.”
 
 신탁이란 별 게 아니다. 신성하게 꾸민 대리석 바닥 위에 반듯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몇 시간이고 여신의 응답을 기다리면 된다. 목소리가 들리면 그것을 멀찍한 곳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신관들에게 큰 소리로 전해 준다. 그걸로 끝. 다리가 저리고 졸려서 못 견디겠다는 걸 빼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초등학생도 할 수 있다.
 
 “힐페 씨, 차 한 잔만 부탁해요. 달콤한 걸로.”
 “분부대로.”
 
 대신관(대리)는 힐페릭이 시녀의 손에서 차 주전자를 받아 들고 익숙한 듯 세미에게 차를 따라 주었을 때, 다시 새하얗게 질렸다. 세미는 차를 향만 즐기고 내려 놓았다.
 
 “케이크도 부탁해요. 빨간 걸로.”
 “분부대로.”
 
 시녀가 미리 준비해 놓은 트레이에서 케이크를 꺼내 가지고 오는 힐페릭을 보고, 대신관(대리)의 하얗게 질린 얼굴은 새파랗게 색을 바꿨다. 세미는 당연하다는 듯 케이크를 받아 들고 서슴없이 포크를 꽂았다.
 
 “에데사 경. 엘닷사 님의 식단 역시 자네가 책임지고 있는 건가?”
 “아닙니다. 로드 클로비스, 그저 아가씨께서 분부 하시면 따를 뿐입니다.”
 
 한쪽 어깨를 으쓱 해 보이며 힐페릭이 말했다. 세미는 지당하신 말이라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도 손에서 포트를 놓지 않았다.
 
 “건강을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단 음식은 좋지 않습니다. 엘닷사 님.”
 
 대신관(대리)가 대단히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세미가 일 미터만 뛰어 올라도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질 준비부터 하는 그로서는 대단한 용기였다.
 
 “하지만 신탁을 받으려면 별 수 없잖아요. 몇 시간이고 앉아 있다가 목소리가 들려오면 온 몸에서 힘이 빠진단 말이에요. 배가 고파서 쓰러지고 말 걸요? 지난 번처럼.”
 
 물론, 그 지난 번의 ‘기절’ 역시 반쯤은 세미의 게으름이 불러 일으킨 연극이었다. 그러나 온 왕성에서 그 누구도 세미에게 참견하거나 야단 치거나 그녀가 불러주는 신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여신의 목소리는 절대적인 것이었으므로. 알텐티카는 언제나 여신의 축복과 인도 아래 번영해 온 나라였으므로.
 
 “엘닷사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뭐…….”
 “그렇다니까요. 케이크 일고여덟 개 정도를 아까워하시면 안 되죠!”
 “아, 아까워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건강을 염려해서…… 저기…….”
 
 일방적으로 밀리는 말씨름을 구경하며 힐페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석 달 전, ‘구원자께서 부름에 응하셨다’는 전언을 듣고 한 달음에 왕국의 드넓은 국토를 가로지를 적엔 설마하니 이런 여자일 줄 짐작도 못했다. 쉴 새 없이 말을 재촉해 황야와 초원을 달리며 닷새 밤낮을 말 위에서 지샜다.
 엘닷사를 모시기 위해.
 
 “그러면 타르홀름 문제, 부탁 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어, 클로비스 님, 벌써 돌아 가시게요? 루페 님은 만나러 가지 않으세요?”
 
 루페 님.
 멋대로 줄여 부르는 데도 빙글빙글 웃으며 ‘아가씨 뜻대로’ 하고 과장되게 허리를 굽혀 주었던 것은 루페르트 국왕 본인이었다. ‘루페 씨라고 불러도 좋고 뭐라도 좋아’ 라고 한술 더 뜨기까지 했다. 그러나 본인만 괜찮다는 게 문제였다. 힐페릭은 소심한 대신관(대리)가 그 호칭에 대경실색해 뜨거운 차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을 흘끔 바라 보았다. 보나마나 저 ‘신성한 엘닷사’는 대신관(대리)의 그런 반응 역시 즐기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쯤 되면 이런 여자를 만나려고 꼬박 닷새 동안 알텐티카의 대지 위를 내달렸던 석 달 전의 자신이 가엾어 질 지경이다.
 
 “선왕께서 오랜 병환 끝에 붕어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국왕께서도 분주하신 와중입니다. 이러한 때 왕족의 몸으로 괜히 폐하를 뵙는 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조카니까요. 사랑스럽잖아요?”
 “…….”
 
 타르홀름 후작이자 선왕의 이복동생. 현 국왕 루페르트와 그의 동복 여동생인 유디트리히 공주를 제외하면 알텐티카에서 가장 왕좌와 가까울 서른 넷의 남자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한 번도 감정이 떠오른 일 없는 입술을 비틀어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클로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왕족에게는 사랑스러운 것보다 지켜야 하는 법도가 더 앞서는 것입니다. 부디 무정하다 여기지 말아 주시길, 레이디 엘닷사.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으음…… 그치만요, 사랑스럽지 않으면 지킬 필요도 없지 않아요?”
 
 케이크 위의 딸기를 오물거리는 세미를 향해 클로비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히는 소리도 길게 떨쳐 입은 법복이 흔들리는 소리도 남기지 않고 떠나 버린 남자의 빈 자리에는 그의 머리 색 같은 어둠만 차 올랐다.
 
 “엘닷사 님 방금의 그 발언에는 문제의 소지가…….”
 
 대신관(대리)가 다시 큰 용기를 냈다. 세미는 클로비스가 없어지고 난 후 급속도로 만사에 흥미를 잃어버린 듯 포크를 쥔 채 생크림 케이크와 초코롤 케이크의 가장자리를 들쑤시고 있었다. 듣는 흉내도 내지 않고 뚱한 얼굴로 케이크 학대에 몰두하는 ‘신성하고 고귀하며 알텐티카에서 유일무이한 레이디 엘닷사’에게 대신관(대리)는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떨며 피를 토하듯 말을 이었다.
 
 “……마, 만약에 엘닷사 님께서 알텐티카를 사랑스럽다고 여겨 주신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시기라도 하면…….”
 “케이크는 사랑스러우니까 괜찮아요.”
 “이 나라의 가치는 케, 케이크가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 대신관(대리)는 자기 목소리에 소스라쳐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누가 뺨이라도 때리면 곧바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다. 힐페릭이 대신관(대리)의 평온한 정서를 위해서라도 어차피 수업 들을 생각이 없는 이 성가신 ‘엘닷사 님’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어머나.”
 
 그녀의 새하얀 스커트 위로 초콜릿 케이크가 뚝 떨어졌다.
 
 “와, 옷이 더러워졌네요. 이런 옷으로 신탁 받으러 갈 순 없겠죠?”
 
 천연덕스럽게 재잘거리며 혀를 날름 내밀어 보이는 세미 곁에서, 대신관(대리)는 드디어 기절해 버렸다. 머리에서 반듯하게 쓰고 있던 신관 모자가 미끄러지고 앙상한 어깨가 허공에서 제법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기울었다. 힐페릭은 익숙하고도 신속하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등을 받쳐 주었다.
 
 “시간이 없으니 어서 의복을 갈아 입도록. 레이디.”
 “힐페 씨, 화 났어요?”
 “안 났다.”
 
 그런 것 치고는, 대신관(대리)를 다른 신전 시종들에게 부탁한 후 다짜고짜 세미의 팔을 잡고 질질 끌고 가는 기세가 제법 살기등등하다. 세미는 성큼성큼 걷는 힐페릭의 걸음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팔도 잡혔고—장신구가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의 경보 하듯 움직였다.
 
 “저기…… 힐페 씨, 아까 스커트에 떨어뜨린 건 진짜 실수예요. 이번에는 진짜라구요.”
 “호오, 이번에는? 그거 아주 흥미로운 말씀이시군요. 레이디 엘닷사. 그러면 어제 밤 침대에 떨어뜨린 케이크 쪽은 역시 ‘고의’ 셨던 겁니까?”
 
 덕분에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힐페릭은 세미의 호출을 받았다. 이번에는 혹시 큰 일일까 싶어 ‘늑대다!’에 속는 순진한 동네 사람들마냥 완전무장을 하고 대령한 힐페릭은, 안절부절 못하는 시녀를 대동한 채 잠옷 차림으로 침대 위에 당당하게 앉아 ‘침대가 더러워졌으니 잠을 안 자겠어요!’ 를 주장하는 세미와 조우해야 했다. 몇 번이고 다시 말하지만 왕성에서 ‘알텐티카 여신의 대리인’이자 ‘신탁의 매개’인 ‘엘닷사 님’에게 반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웅…… 그, 그건 힐페 씨가 보고 싶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은!” 탕, “하지 말라고!” 타앙, “몇 번을 말 해야 알아 들엇?” 타앙!
 
 탁자도 없는데 탁자 내리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거야말로 조건반사, 라고 세미는 생각했다.
 
 “아픈데. 손목.”
 “아, 실례.”
 
 힐페릭이 손을 놓아주자 세미는 대신전 정원 쪽으로 난 회랑 바닥에 덜렁 주저 앉았다. 이 아가씨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으므로 힐페릭은 나무라지 않고 곁에 섰다. 아무리 정론을 펼쳐도 들어줄 리 없는데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킬 만한 방법도 없으므로 이 소녀는 그냥 움직이고 싶은 대로 두면 된다는 진실을 그는 오래 전에 배우고 말았다.
 
 “아, 배고프다.”
 “그렇게나 케이크를 먹어대 놓고 또 배가 고프다고? 너는 왕실 창고를 먹어서 바닥 낼 작정이냐?”
 “케이크만 먹었지 밥을 안 먹었잖아요. 아침도 점심도 못 먹었다고요.”
 “기상한 시각이 이미 점심시간 후였다는 건 생각하지 않는 거냐?”
 “먹는 꿈 안 꿨는걸요. 꿈에서 내내 힐페 씨한테 야단만 맞았어. 완전 손해 봤어요.”
 “평소의 행실이 반듯하지 않으니 꿈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거다. 조금쯤 반성을 해라.”
 “하고 있어요. 아까 클로비스 님을 따라갈걸…… 같은 반성.”
 “……그건 불가하다.”
 
 슬슬 옷을 갈아입고 다시 대신전으로 오지 않으면 신탁 시간에 맞출 수 없다. 힐페릭은 그것을 전하기 위해 세미 쪽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무, 무, 무슨 짓이냐!”
 “엉? 뭐가요?”
 “왜 오물을 주워 먹는 거냐!”
 “오물이라뇨? 치마에 아까 떨어뜨린 케이크라도 먹을까 하고 생……. 힐페 씨?”
 
 치맛자락의 초콜릿을 손가락으로 찍어내 먹겠다고 선언하는, 어이가 없다 못해 상상을 초월한 여자아이 앞에 힐페릭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부탁이니 바람직하지 않은 일은 하지 마라.”
 
 손수건을 꺼내 손가락의 초콜릿을 닦아내 주는 힐페릭을 멍하니 바라보며 세미는 눈을 깜박거렸다.
 
 “힐페 씨 기준에서 어디까지가 바람직하지 않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적어도 그만 두라고 말하는 일을 그만 두면 된다.”
 “밤에 괜히 불러내거나 수업에 빠지거나 신탁을 받다 말고 기절한 척 하거나…… 그런 거요?”
 “그래.”
 “그렇지만.”
 
 힐페릭이 애써 닦아 준 손가락을 그의 눈 앞에서 흔들어 보인 즉시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면서, 세미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힐페 씨랑 노는 거야말로 제 삶의 낙인걸요. 이 정도는 봐 줘요.”
 “네 삶의 낙은 많기도 하군.”
 “그렇게 어이 없다는 표정 짓지 마세요. 대신 힐페 씨의 유일한 삶의 낙은 제가 돼 드릴게요.”
 “필요 없다.”
 
 냉정하게 일어서는가 싶더니 그는 세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세미는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쭉 뻗은 대신전의 회랑을 따라 걸었다. 기교 없이 깎아 세운 기둥이 창살처럼 빼곡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긴 길의 끝에 저녁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뭐 한 것도 없는데 노을 지네요. 이 나라는 하루가 너무 짧아서 뭘 할 수가 없다니까요.”
 “적어도 남들이 일어나는 시간에만 일어나면 지금의 세 배는 길어질 거다.”
 “늦잠 자는 게 삶의 낙인데.”
 “……하아.”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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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No Profile
    갈원경 12.12.29 00:32 댓글 수정 삭제
    아아, 사랑스러운 소녀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No Profile
    해망재 12.12.29 06:29 댓글 수정 삭제
    우와, 진짜 귀여워요. 무엇보다 저런데 갑자기 떨어져서 저렇게 많은 삶의 낙으로 살아가는 것이 대단. 힐페 경...... 감상에 어울리지 않지만 "ㅋㅋㅋㅋ" 자음연타 서른번쯤 하고 싶었어요.
  • No Profile
    미로냥 12.12.29 23:26 댓글 수정 삭제
    갈원경 님/ 소녀 좋죠 소녀 (수군수군)
    해망재 님/ 적당히 노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소녀는 소중합니다. 여고생이! 좋아요!!!!! :D
  • No Profile
    빛의피날레 13.02.05 22:37 댓글

    똑부러지는 마이페이스 아가씨네요 ㅋㅋㅋㅋㅋ 귀여워라! 이런 사랑스러운 여고생이면 미워할 수가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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