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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xk160

2006.06.03 01:4706.03



경계

  jxk160



“저 녀석들 좀 재워.” 링게가 을러댔다. 빌은 몸을 게으르게 움직여서 침대 밖으로 발을 뻗었다. 떨어지다시피 해서 그는 바닥으로 내려갔다. 나무로 된 바닥은 차가웠다. 어제 갓 벌채한 숲에서 잘라서 덧댄 것이다. 빌은 문을 열었다. 벌써부터 애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층으로 올라가자, 맙소사, 난장판이다. 애들은 빌이 문을 열자 입을 딱 다물었다. 눈만 동그랗게 뜨고는 빌을 올려다보았다.
빌이 한숨을 쉬자 다들 곧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제일 작은 애들 둘은 발장난을 하기 시작했다. 빌이 머리를 내저었다. “일찍 자기로 약속했잖니.” “싫어!” 큰애가 빽 악을 썼다. 작은 애들이 <싫어, 싫어> 따라하면서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빌은 링게가 올라올까봐 겁이 났다. “알았다, 얘들아, 조용히 해. 뭐 하고 놀고 있었니? 잠이 안 오는 거야?”
“우리 잡아먹기 놀이했어.” 큰애가 말하면서 둘째 애의 팔목을 가리켰다. 둘째 애가 눈물이 글썽글썽해있는 걸 그 때에야 보았다. 빌이 신음했다. 큰 애가 다시 둘째 애 팔을 잡아당기면서 깨무는 흉내를 냈다. 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해!”
“전에 빌이 재밌는 얘기 해 줬잖아!” 큰 애가 지지 않고 소리질렀다. “따라한 건데 뭐...” “그런 얘기가 아니었잖아! 맙소사, 링게가 또 화를 내겠는데...” “뭔데, 뭔데?” 작은 애 둘이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우리 노는데, 라발이 갑자기 막 에렘벨 팔 깨물었어. 그러면서 빌이 해 준 얘기에 나오는 거랬어.” “미치겠군.” 빌이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놓았다.
“다시는 하지 마라, 라발. 말했잖니. 너희는 그런 애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건 옛날 얘기에 불과해.” “하지만 빌은 했다면서, 잡아먹었다고 했잖아.” “옛날 얘기라니까!” 빌이 소리질렀다.”
빌이 입을 다물었다. 애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작은 애 둘은 무릎을 구부리고 양 주먹을 바닥에 댄 자세 그대로 있었다. 나무 바닥은 차가웠다. 빌은 애들 건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너희들과 나는 달라.” 빌이 말했다. “그래, 나는 그 이야기에 속하지. 확실히 나는 그 이야기에 나온 어린애였지. 하지만 너희들은 달라. 너희들부터는 다른 얘기가 되는 거야.” “왜?” “그냥 좀 들어라...” 빌이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애 둘이 졸랐다. “라발만 얘기 들었대, 라발만...” “빌은 라발만 좋아하고...” “시끄러워.”
빌이 바짓가랑이에 매달린 애들을 떼어냈다. “라발이 잠이 안 온다고 옛날 얘기를 해 달라길래 해줬던 것 뿐이야. 이제 침대로 들어가. 또 떠들면 링게까지 데리고 올라올 거야.” “얘기해주면 잘 거야.” “시끄러워.” “얘기 해 주면 잘 거야. 우리도 잠 안 와.” 작은 애들이 바짓가랑이에 매달려서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빌은 비틀거렸다. 애들은 힘이 많이 세어졌다. 링게가 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오늘 하루종일 힘들었다고 했어. 지금 깨면 애들을 엄청 혼낼 거야. 하지만 깨어 주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해. 빌은 결국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래, 얘기 해 주면 정말 잘 거야?”
“응!” “약속해?” “응!” “그래.” 빌은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애들이 공손히 무릎을 꿇은 자세로 되돌아갔다. 둘째 애도 눈물을 닦고 이 쪽으로 다가왔다. 큰애는 작은 애 뒤쪽으로 돌아가서는, 자기는 다 아는 얘기라고 중얼거리면서 건방진 얼굴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빌은 다시금 숨을 내쉬었다. “이 전 시대가 보석의 시대인 건 알지? 나와 내 동족들이 살던.” “응! 링게가 실컷 얘기해줬어.” “실컷 욕을 해 댄 거겠지.” 빌이 중얼거렸다. “그 시대에는 링게는 그냥 잘못 굴러 나온 이민족이었는데. 자기가 굴러 나온 숲이나 벌채해대고... 우리 동족들도 태어나질 못하게 만들었지. 욕을 할 건 내 쪽인데 말이야. 아무튼, 이건 그 전의 관의 시대 이야기야.”
“빌이 살았던 건 보석의 시대잖아.” “그렇지.” 빌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관의 시대부터 얘기해야 해. 동떨어진 시대가 아니니까. 물론 보석의 시대는 내가 직접 기억하지만, 관의 시대는 내가 기억하는 건 아냐. 하지만 그 시대에 관해서는 당시의 기록도 유물도 많이 남아있고, 사라진 동족들이 남긴 이야기도 있으니까.”
“시내에, 높은 탑같은 것들?” “응.” 빌이 끄덕거렸다. “관의 시대의 건물이야. 근사하지? 지금 우리는 그런 걸 만들 꿈도 못 꿔. 나중에 좀 더... 숲 아래로 내려가 보면... 링게 친구가 사는 데 있잖아. 다음에 거기까지 내려갈 일이 있으면 안으로 데려가서 자세히 보여줄게. 나나 내 동족들은 자주 드나들곤 했거든. 보석의 시대 때도 그 유물들을 그대로 이용했으니까. 지금 우리는 이층 집에 살고 있지? 나무로 지은 집. 지붕을 세모꼴로 얹고. 하지만 그들은 훨씬 더 높은 집에 살았어. 저 아래 탑은 이십층이지만, 삼십층 짜리 집도 있어. 지붕 아래 부분도 전혀 다른 소재로 되어 있어. 훨씬 오래가는 소재야. 그리고,” 빌이 어딘가를 가리킬 듯이, 손가락을 약간 움직였다가 그만두었다. “지금은 물이 말라버렸지만, 도시를 둘러싸고 수로가 있었지. 물품들이 골고루 운송되었고, 다른 도시로 흘러가거나 흘러들어오곤 했지.”


1



관의 시대 문명은 찬란해서, 이민족과의 갈등이 전쟁으로까지 발전한 지역에서도 이런 유물은 차마 모욕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대한 유물들의 경우 지금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사료보관소가 속한 학회 건물이나, 그 당시 생산 양식에 관한 자료가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는 도시 중심의 기업 건물들이 그렇다.
각지 유물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나, 대부분 지역에서 기본적인 생활 양식은 비슷했다. 예컨대 도시는 삼분되어 있었는데, 이 점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른들의 거리는 도시 북쪽에 있었고, 전체 용적의 1/3 정도를 차지했다. 어린애들이 사는 거리는 도시 남쪽에 있었고, 역시 1/3 정도를 차지했다. 그 사이에 공장 부지와 광장이 있었다.
어른들의 거리 이야기를 먼저 하자. 관의 시대에 산업과 상업이 활발했던 것에 비하면 지금 우리들은 갓난아이만도 못하다. 도시 전체를 기민하게 연결하는 수로를 통해 상품을 도시 내에서 교환하거나 다른 도시까지 운송했다. 시내의 건물들은 매우 높았고, 대부분 몇십층에 달하여 걸어올라갈 수가 없어서 특수한 기계를 이용했다. 거기서는 회의나 연회만을 열었고, 실제 잠을 자는 집은 교외에 따로 있었다. 한 사람이 한 집에서 사는 게 보통이었다. 거주용 주택은 주로 단층이었고, 그리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잠을 잘 집은 자신이 설계해야 했다. 특히 관을 보관하는 방이 있는 지하 공간의 경우, 미로를 자기 손으로 설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정부의 손길은 연방까지 미치지 않고, 각 연방은 상인 동맹을 유치하기 위한 도시들의 자유로운 경쟁을 장려해, 도시들은 자치주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으며 공장들도 각 도시의 독점적인 사업가 연맹에 의해 관리되었다고 한다. 이들이 곧 주식 회사를 설립했고, 도시민 전체를 고용인으로 흡수할 만큼 성장했다. 특히 각 회사가 작가를 고용하게 되면서, 서서히 사업가와 상인 동맹의 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낮에는 항시 빛이 내렸고, 밤에는 수로와 거리를 따라 가로등을 켰다.
어린애들이 사는 거리 얘기를 하자. 그 거리는 밤이 되면 칠흑같이 어둡다. 담으로 격리되어 있고, 담 아래 도관을 통해 정화조로부터 수로로 물이 흘러나왔다. 도시 남쪽 숲에서 아이들이 태어나 기어다니기 시작하면 금방 아이들의 거리로 운반된다. 어린애들은 새벽부터 저녁까지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 아이들의 눈을 상하지 않기 위해, 공장은 낮에도 어둡게 지켜진다. 창문 하나 없고, 일하는 내내 문도 한번 열리지 않는다. 그 안은 밤의 거리와 똑같이 칠흑같이 어둡다. 십장들이 시간을 살피고 있다가 밤이 되면 일을 마무리시키고 아이들을 그들의 거리로 돌려보냈다. 어린애들은 밤 내내 거리를 헤매다가 새벽이 되면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간다. 그러다가 죽기도 한다. 어린애들의 육체는 온전하지 않다. 그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잠을 잘 수 없다. 먹을 수도 없고, 빛 아래에 놓여나면 실명할 것이다. 그들은 몸을 얻을 때까지는 노동을 바치며 살아간다. 소모적인 활동을 반복하다보면, 어린애들 중 반 이상이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 목숨을 잃는다. 이런 불완전한 몸은 썩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새하얗고 딱딱하게 변해, 한 구석에 쌓거나 묻어둘 뿐이다.
어른들은 북쪽 도시에서 사업을 관리했다. 도시 중간을 차지하고 있는 공장 부지에서 공장장과 십장이 아이들을 부려서 맡겨진 생산량을 달성해냈다. 아이들이 공장에서 일정 기간 일을 하고 나면 기록이 누적되어, 성인식 도구를 만들 만한 충분한 정보 수준에 이르게 된다. 아이들은 인가증을 받고 기다리게 된다. 인가증이 하달되면 곧 해당 부서에서 물건 제작에 들어간다. 물건 제작은 아이들 개개인의 기록 내용에 따라 시간이 달리 걸린다. 운이 좋으면 보름만에 제작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현 단위로 세어 한 달은 걸린다.
물품이 완성되면 연락이 온다. 연락이 오면 아이들은 광장의 기관 건물로 찾아간다. 십장들과 비슷한 직급의 사람들이 거기서 아이들을 상대한다. 아이가 찾아오면, 관리들이 아이를 데리고 별관으로 간다. 어린애가 별관의 독방에 들어가 완성된 물건 안에 누울 수 있도록 역시 십장 급의 관리인들이 도와준다. 이 물건을 관이라 한다.
관의 뚜껑 안쪽 면은 관 전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소재로 도배되어 있다. 그 소재를 링카라 한다. 매우 매끄럽고 광택이 있는 소재이다. 인가를 받은 어린애가 관에 들어가 똑바로 눕고, 밖의 관리들이 뚜껑을 닫아주면, 관 속의 링카가 반응하여 그의 영혼을 비춘다.
링카는 그의 노동 기록을 바탕으로 다듬어진 것으로, 그의 관에 딸린 링카에는 오직 그의 영혼만 비추어진다. 링카의 빛은 그의 눈을 해치지 않는다. 링카 위에 그의 성인으로서의 육체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나면, 그는 자신의 눈으로 그 몸을 확인하며, 그것이 자신의 육체라고 인증한다. 이것으로 계약이 완성된다.
육체를 얻고 나면 이제 눈을 감아도 무관하다. 자신의 육체에 기대어서, 어린애는 비로소 잠을 자게 된다.
최초의 잠을 잉이라고 한다. 어린애는 일주일쯤을 잔다. 자는 동안 관은 성인들의 거리에 지정된 임시 숙박소로 옮겨진다. 마침내 그가 관에서 일어나면, 그는 옷을 받아 입고, 최초로 식사를 하고, 빛 속에서 타인의 얼굴을 보며 그들의 축하를 받는다. 거기서 맞아주는 자들은 십장 급의 도태된 성인들이 아니라, 진짜 성인들이다.
그들은 당분간 그 임시 숙박소에 머무르게 된다. 거기서 매일같이 배우고 여럿이 함께 생활하며 성인의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하고, 어떤 분야를 더 배우고 싶은지 결정하고, 다른 성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집을 설계한다. 일년에서 이년쯤이 지나면 그들은 자신이 설계한 집으로 옮겨가게 되고, 성인이 되는 과정을 대충 마쳤다고 볼 수 있다.

*


스스로 설계한 집의 지하 미로에 관을 두는 것이 보통이다. 성인들은 매일 밤 자신이 설계한 미로 속으로 내려가 관 속에서 잠을 자게 된다. 그가 잠들어있는 동안에도 링카가 환하게 그의 육신을 지키고 있다. 이제 그의 육신은 온전하기에, 링카가 깨지지 않는 한 무엇으로도 그의 몸을 해할 수 없다. 누가 그의 가슴에 칼을 찔러넣더라도, 옷자락에나 흠집이 날 뿐이다. 몽둥이로 머리를 치더라도 그의 머리카락 하나 짓눌리지 않는다.
그는 즐겁게 음식과 술을 맛보기는 하되 배가 불러지거나 취하거나 살이 찌지는 않는다. 그는 맛을 느끼며 향유할 뿐, 먹는 것은 아니다. 빛을 똑바로 바라보아도 눈이 상하지 않는다. 서로 어깨를 치며 격려하더라도 그것은 관습적 의미일 뿐, 실제로 타격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 되고 나면 그들은 주로 사업을 하고, 드물게 학회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혼자서 산다. 그들은 몸을 얻고, 서로를 밝은 빛 아래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기쁨을 만끽한다. 그들은 피부를 맑게 하고, 입술을 붉게 하고, 어여쁘게 걷고, 머리를 기르고, 염색을 하고, 향수를 뿌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입히려 애쓰다가 길고 긴 수명을 누리다 재가 되어 사라진다. 링카가 흐려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관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면 그들도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안다. 그들의 몸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게 되며, 눈가가 움푹 파이고, 주름이 생겨 축 늘어지고, 눈동자 주변이 누렇게 변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스스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문을 걸어 잠그고 은닉한다. 링카가 탁해지다 못해 완전히 탄력을 잃고, 돌처럼 깨어지고 나면 얼마 안 되어 그의 몸도 재가 되어 흩어진다.


2.


1.

어른들의 거리. 집들은 교외 변에 흩어져 있고 시내 중앙으로 건물들이 점증하며 서 있다. 건물들 사이로 넓고 곧은 수로가 흘러가고 수로 위에 폭이 넓은 다리 몇 개가 놓여있다. 수로에는 화물선도 다니고 작은 배도 다닌다. 작은 배에 갓 성인이 된 사람 둘이 타고 있다. 그들은 신기한 듯이 도시를 둘러본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미소짓는다. 그들은 여기서 처음 만나 서로 알게 되었다. 공장의 같은 건물에서 일을 했을 수도 있지만, 한번도 서로의 얼굴을 본 적은 없다. 그들은 아름다운 성인으로 자랐다. 그들은 아마 아직 임시숙박소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각자 집을 설계할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걸친 옷자락을 보고 왠지 얼굴을 붉힌다. 오톨도톨한 색채가 주는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이 육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워한다. 그들은 서로의 윤곽을 조심스레 매만져보다가, 마침내 왁살스럽게 더듬어본다. 그러다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다시금 거리를 올려다본다. 수로는 이른 오후의 빛깔을 머금고 있고, 약간 둥글게 펼쳐진 다리 너머로, 건물들이 웃자라고 있다. 하늘은 새파랗게 펼쳐져 있다.
배에 탄 자들은 웃으며 서로 어깨를 기댄다. 다리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사람들도 있다. 다리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성인이 된 지 오래인 듯, 태도가 고상하고, 말과 움직임이 생김새에서 어긋나지 않는다. 둘 다 은빛 귀고리를 걸고 있고, 새끼발가락만 보이는 가죽 샌달을 신고 있다. 그들은 배에 탄 자들을 보다가 미소짓는다. 한 명이 무어라고 말하고, 다른 한 명이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본다.
그들은 귀걸이 아래로 시선을 깔고 잠시 침묵하고 있다. 손에 든 것을 보여주었던 쪽이 먼저 손을 거둔다. 키가 약간 더 큰 쪽이 마침내 말한다. “왜 그런 짓을?”
“탁해지는 게 무서웠던 거겠지.” 상대가 조용히 말한다. “추해지기보다는 죽는 걸 택한 거야.”
그들의 친구는 어제 재가 된 채 발견되었다. 둘은 며칠 전만 해도 친구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의 피부는 깨끗했고, 눈은 맑기만 했다. 그들은 친구의 관이 망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괴로웠겠지. 둘은 생각한다. 개중 한 명은 약간 탁하게 변한 유리 조각같은 것을 꽉 쥐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친구가 스스로 관 뚜껑을 열고 들어가, 멍하니 누워서 거기 비친 자신의 육체 - 탁해지기 시작한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다가 - 주먹을 내밀어 조각조각으로 깨어버리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래, 그 링카 자체는 그렇게 연약한 것을. 한 번의 주먹질로도 깨어질 만 하다. 그러므로 관은 더욱 더 안전한 곳에 숨겨두어야 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지킬 수 없지만. 잿더미에 편지칼이 묻혀있었던 것으로 보아 친구는 관을 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살한 것 같다. 어차피 링카까지 깨어버렸는데, 무작정 기다리기 두려웠던 거겠지. 아니면 - 둘은 수로의 표면을 내려다본다 - 무언가를 암시하는 걸까.
키 큰 청년이 입을 열었다. “생각해온 게 있어.” “뭘?” 청년은 수로 위를 턱짓했다. 작은 배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친구도 작은 배를 바라본다. 배에 탄 둘은 아직도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다리 위의 둘도 미소짓는다. “그래, 저 귀여운 애들을 보면서 무얼 생각하는 건데, 엥겔?” “귀여운 어른들이 아니고?” “아직 애라고 쳐도 좋아.” 친구가 돌아보았다. “몸만 컸지 아직 애들이야. 우리는 저런 열정을 잃어서 슬프다는 거야? 대신 우리는 좀 더 세련되게 굴 수 있지.” “그래.” 엥겔이 끄덕거렸다.
“우리는 여기에서 멍청하게 수로를 내려다보고 있을 수 있지. 작은 배들을 보면서, 강물이 흘러가는 걸 보고 있어. 봐, 빌. 저들은 어깨를 서로 걸치고 멀어져가는군. 웃기도 하고, 웃음소리는 수로를 따라 흘러가고. 운송되지도 않고, 반짝이다가, 사라져버려. 빛은,” 엥겔이 고개를 든다. “밤이 되면 사라지지. 한번 반짝인 물결은 다시 반짝이지 않듯이. 그 물결은 다시 일어나지도 않듯이. 새카만 어둠이 찾아와. 그런데도 우리의 관은 환하게 빛나고 있어. 나의 육체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엥겔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우리들은 말이야, 한셀.” “또 그 생각을 하고 있어.” “너는 기억이 나?” 엥겔이 다시 수로 쪽을 보았다.
“벌써 저 만큼 멀어졌군. 자네는 기억이 나나, 한셀? 저 둘은 어깨를 걸치고 있어. 둘은 서로의 얼굴을 처음 본다. 타인의 얼굴이 거기에 있다. 어떤 일방적인 감각이. 표정이. 처음으로 타인을 깨닫고, 외로움과 애정을 느끼고, 내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서의 타인의 육체에 기댄다... 그건 얼마나 강렬한 경험이었을까? 저들이 아까 서로를 쓰다듬고 매만져야만 했던 것처럼. 그런데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아. 우린 아주 오래 전에 성인이 되었지, 알아.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들은 대부분 이미 죽었고, 우리 둘을 빼면 이제, 남은 한 사람도 어제 그렇게 죽었다... 그래, 하지만 정말로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그런 강렬한 경험이?”
“엥겔.” 한셀이 미소지었다. “너 또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어.”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넌 우리와 같아.”
한셀이 엥겔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대었다가, 곧 늘어뜨렸다. “자, 이 손을 봐, 엥겔.” 한셀이 친구의 손을 잡아 가슴 앞까지 올렸다. “보이지? 너의 손이야. 이건 나의 손이고. 너는 내 얼굴을 보고 있어.”
“알아.” “관 속에서 매일 밤 네 몸을 보지? 네 육체는 허가된 거야. 너는 정식으로 이 세상에 살아있어.” “하지만 성인식이 기억나지 않아.” “나도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정말이야, 엥겔. 널 위해서 거짓말을 해 주는 것 따위가 아니야.” 한셀이 엥겔의 어깨를 다잡았다.
“정말이지 넌 변한 게 없구나. 우리 동년배 중 아무도 성인식을 기억하지 못해. 우리 성인들 중 아무도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해. 네가 몇 살이지, 엥겔? 너는 세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삼 년 전에 죽은 우리 친구 이디온, 그는 세고 있었지. 그는 사백 칠십 사 년까지 세었어. 이미 얼만큼 나이가 든 다음에 세기 시작했대도 그만한 세월이 흘렀어. 우린 성인들 중에서도 아주 나이든 편에 속해, 엥겔.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해. 저 애들이야 기억하겠지. 하지만 곧 잊어버릴 거야.”
“그럴까?” “그럴 거야. 의심이 들면, 아주 오래오래 살아서 알아봐. 학회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 회보를 받아보는 것도 좋겠군.”
“그래?” “그래. 성인식이나 어린 시절 기억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어. 네가 궁금해하는 부분과는 약간 다른 거 같지만... 말을 배우지 못했던 시절의 기억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궁금한 거야. 학회에서는 작년부터 특히 구술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어. 몇 십년 후쯤 되면 쓸만한 양이 축적되겠지.”
“그건 다르잖아. 그리고 그 애들은, 애초에 기억이 뚜렷할 때 말로 해 볼 기회를 가진다면... 그리고 그게 기록으로 남는다면 말이야.” 엥겔이 다리 난간에 기대어 턱을 괴었다. “나같은 생각을 하게 될 이유는 없겠군.”
“그래. 사료 보관소에 가서 뒤져보면 나오겠지.” 한셀이 킥킥거렸다. “걱정하지 마, 엥겔. 그런 걸로 고민하기에는 너는 너무 오래 살았고... 잘 살았어. 누구보다 아름답고, 훌륭한 친구가 말이야. 정말로 훌륭한 친구가, 왜 여태껏 그런 걸로 불안해하는지...” “나는 너무 오래 살았지, 한셀. 내 관은 아직도 흐려지지 않았어. 전혀.” “좋은 거잖아?” “너무 오래 사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제대로 태어나지 않으면 제대로 죽을 수도 없겠지.” “오, 엥겔!” 한셀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정말 어린애 같다니까. 늘 불안해하기 때문에, 한 순간도 안심하지 않기 때문에 나이를 먹지 않는 건지도 모르지. 그래, 계속 불안해 해 봐. 나만 잘못 태어난 게 아닐까, 나만 뭔가 이상한 존재가 아닐까. 내 친구들은 사실 다 성인식을 기억하고 있는데 날 위해 거짓말을 해 주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확신에 차 있을 리가 없지. 아니, 젠장! 네 성격이 꼬인 걸 우리가 거짓말쟁이인 탓으로 돌리다니! 그것도 사백년 넘게! 하긴 그건 직업병일지도 모르겠군.” “그만해!” 한셀이 장난스레 이야기를 꺼내자 엥겔이 손을 내저었다. 한셀은 가차없이 말했다. “작가 나으리.”
“그만해!” “도시의 구원자!” 한셀은 반지를 낀 검지를 움직이며, 다소 과장스럽게 말했다. “레스텔의 든든한 동반자! 세계의 창조자, 아니, 구매자들의 신! 공로는 너에게 있지만, 열매는 모두 총수에게 돌리고, 돈은 그들의 손에서 돌고 도는데, 우리의 누더기를 입은 작가 나으리는...” 한셀이 있는 대로 찡그리고 있는 엥겔의 목을 끌어당겨, 뒤에서 안다시피 했다. 구름이 지나가면서 그림자가 그들 얼굴을 스쳐갔다. “하긴 들어오는 선물만으로도 먹고 살 만 하지, 엥겔?” “어차피 연방을 떠날 수도 없잖아.” 엥겔이 웃었다. “다른 도시에서 몰래 편지도 많이 오지. 구미가 당길 만한 자료도 보내오면서 말이야. 난 한번도 응대한 적 없어. 나는 이 도시가 좋아. 내 친구들이 일하는 회사가 좋고. 연방에서도 우리 도시가 성공했으면 좋겠어. 아무리 그래도 좋아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어.”
“곧 제작에 들어갈 상품들 디자인과... 대강의 구상을 네게 보낼 거래. 아니, 보여줄 거라고 하던가. 넌 또 바쁘겠어.” “과연.” “이 녀석.” 한셀이 웃었다. 엥겔은 한셀에게 반쯤 안긴 채, 샌달의 끈에 신경 쓰고 있었다. 산 지 나흘도 안 된 물건인데 벌써 바느질한 부분이 위태로워졌다.
“오늘은 쉬는 날인데.” 엥겔이 가죽의 뻣뻣해져가는 부분을 걱정하고 있을 때, 한셀이 중얼거렸다. “내일은 또 물감 틈에서 살겠군. 기름 냄새나 몸에 배고...” “난 그 기름 냄새 좋던데. 물감의 기름 냄새는 특별해.” 엥겔이 한셀의 팔에 턱을 댄 채 말했다. 한셀이 투덜거렸다. “비웃는 거야, 작가 선생?” “넌 쉬는 날이 있잖아! 불쌍한 작가 선생은 쉬는 날이라곤 없다구. 말이 자유로운 직업이지, 매일매일 알아서 일하라는 거나 마찬가지야.” 엥겔이 한셀의 팔을 두드렸다. “쉬는 날이니, 제대로 보내자고. 난 배를 타고 싶어.”
그들은 분위기를 내 보기로 했다. 그들은 선착장으로 갔다. 한셀이 나이 들어서 이런 짓이나 하다니 불쌍하다고 투덜거렸다. 엥겔이 으쓱해 보였다. 한셀은 묘한 표정으로 엥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셀은 최하급직에 머무르고 있다고 봐도 좋다. 전시회에 나갈 모형이나, 협상할 때 들고 나갈 도면에 색을 칠해준다. 물감을 섞는 기술이 필요하긴 하지만 기술뿐이다. 그는 어두운 방에서 혼자 일하고, 남이 정해준 색상명을 색상표에서 찾아내어 공식에 따라 배합한다.
엥겔은 작가로, 보통은 작가들이 동아리를 만들어 계약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 도시에서는 엥겔 혼자서 대부분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 그는 탁월한 장면들을 생산해내며, 그의 글은 바다 건너로도 실려나간다. 그의 뒷모습도 언제나 멋진 장면을 만들지. 한셀은 엥겔이 뺨이 드러나게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드리우고는, 등뒤로 주름을 잡은 윗옷 자락을 바람에 맡긴 채, 아무렇지도 않은 걸음으로 나아가는 걸 바라보았다. 하늘이 엥겔의 갈색 머리채 주변을 감싼 채 느린 리듬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한셀은 한숨을 내쉬고는 엥겔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작은 배 위에 올라타고는, 아까 그 <몸만 큰 어린애들>처럼 굴어보려고 애쓰며, 몇 가지 될 만한 장면을 만들어보려다가 실패했다. 지루함같은 것이 잠시 떠돌았고, 마지막에는  재가 된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침묵했다. 그들은 시계를 보고는 움찔했다. 배는 수로가 꺾이는 곳마다 드나들며 빙빙 돌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
“나가는 게 좋겠군.” 그들은 방향을 잡고 노를 저었다. 엥겔은 돌아앉아 있었기 때문에 물이 도시 밖으로 흘러나가는 끝을 볼 수 있었다.
엥겔은 노를 저으며, 밤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물이 흘러나가는 부분과 하늘 사이를 구분하는 아스라한 선이 어느 순간 더 짙게 변한다 싶었다. 다음 순간 그 구분이 사라졌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눈 바로 아래의 수로의 표면에는 부서지는 빛살이 노닐고 있었다. 시선을 멀리하자 수로는 끝부터 시커먼 한 칼로 잘려나간 듯 했다. 엥겔은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았다. 하늘의 반이 어둠에 먹혀 있었다. 한 끝은 완전히 어두웠고, 반대편 자락은 아직 새파랗게 도시의 반대편을 향해 펼쳐져 있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추적당해 먹혀버렸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묵묵히 있었다. 곧 가로등이 켜졌다.
수로 주변부터 시작해서, 도시 전체에 가로등이 켜졌다. 그들은 픽 웃고는 다시 노를 젓기 시작했다. 가까운 선착장에 닻을 내리고 밧줄로 묶어두었다. “재미있었어.” 한셀이 엥겔의 어깨를 두드렸다. 엥겔이 가로등 아래에서 몸을 휙 돌렸다. 빠른 움직임이었는데, 귀걸이에 머리카락 몇 올이 걸려들었다. 한셀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까지 갔었지?” “응?” 한셀이 갸웃하며 되물었다. “빙빙 돌았잖아? 중앙 다리에서 출발해서, 쭉 왼쪽으로 가다가 공장 부지 옆의 담을 끼고 돌았지. 그쪽 물은 좋지 않지만. 그래서 금방 빠져나와서 헨스탑 건물 근처로 지나왔어.” “담을 넘어가면 공장 부지가 나오고,” 엥겔이 선착장에 서서 멀리 수로 저 편을 손가락질했다. 그 다음에는 어린애들의 거리지.” 엥겔은 중얼거렸다. “거기는 지금 칠흑같이 어둡겠지. 가로등 하나 없이. 우리가 있었던 때도 그랬겠지.”
“그래.” 한셀이 금방 답했다. 그는 친구가 성인식 생각을 떨쳐버린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그러나 엥겔이 으쓱해 보였다. “저 어둠 속에서 아이들은 일을 하고, 거리를 헤매고 있어. 애들 손으로 닦아내고 만들어낸 물건들을 우리가 쓰고 있어.” “마음이 안 좋은 거야?” 한셀이 친구를 불러 세웠다.
“아니, 나는....”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아.” 한셀이 말했다. 엥겔은 그의 어투에서 손쉽게 낌새를 읽어낼 수 있었다. 한셀은 엥겔 자신이 어떤 장면에서 써먹었던 것과 똑같은 투로, 똑같이 뒷짐을 진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엥겔은 자신이 말하려던 것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퇴직할 거야, 한셀?”
“글쎄.” 쑥스러웠던지, 한셀이 얼른 돌아보고는 얼버무렸다. “너야말로, 엥겔? 뭐라고 하려고 한 거야?” “말 돌리지 마.”
엥겔이 말했다. “나는 별 얘기 하려고 했던 게 아니야. 어린애들은 물건을 잘 만들지. 어둠 속에서도 참 잘 만들어내. 주어진 생산량에도 기간에도 딱딱 맞추어주지. 너도 알겠지만 나는 아이들을 동정하지 않아. 도우려 했다가 무슨 일이 났던지 잘 기억하고 있지. 성인식은 기억 안 나지만, 그건 잘 기억나거든. 열심히 일하는 이상, 어차피 애들은 성인이 될 거야. 그러면 문제 해결이지.” “인가를 받기도 전에 태반이 죽어.” “한셀.” 엥겔은 뭐라고 대꾸하려 했지만, 한쪽 샌들의 끈이 완전히 끊어져버렸다.
엥겔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셀은 친구가 창피해하고 있는 걸 눈치챘다. “가면서 이야기하자구, 친구. 나도 어제에야 수락한 이야기야.” 한셀이 슬쩍 팔을 둘러 주었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서, 엥겔은 절뚝거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2.

아이들은 부품을 만들고, 조립한다.
공장의 분업 체계는 아주 분명하게 되어 있다고 들었다. 어른들의 거리의 수로는 반짝이며 흐른다. 물은 강으로 향한다. 공장에서 나오는 물은, 정화된 후 흘러나오지만 수로 다른 부분의 물처럼 맑지는 않다. 그러나 수로를 흐르며 몇 개의 시설을 거쳐 다시 찰랑이며 부드러워진다. 물은 작은 배들과, 물건을 실을수록 안정감이 생기는 큰 배들을 각기 장소로 데려다주고, 특히 작은 배들과 노닐고 서로 어루만지며, 귀여운 <몸만 큰 어린애들>이 뱃전 밖으로 늘어뜨린 손을 스치고, 뺨을 비추고, 물결마다 반짝인 후 저녁 즈음엔 숨이 죽어서, 어둠이 찾아오면 가장 먼저 체념하고 만다. 수로 변의 건물 낮은 층에 머무르거나, 선착장에서 떠나 가로등 새하얀 불빛 아래를 걸으려면 들리는 물소리, 물소리. 묵직하게 거치적거리는. 검은 기름 같고 타르 같은 물소리. 꾸물쩍거리며, 사람들의 귀를 따라온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뻥 뚫린 얼굴같은 물.
엥겔은 그 물을 내려다본다. 물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철썩댄다. 아이들이 일하는 공장 안에는 부품들을 실은 벨트가 철컥철컥 돌아가고 있다. 아이들은 서로 등을 보이는 자세로 빙 둘러서있고, 일정한 소리를 내며 달군 금속에 물이 부어지거나 부품이 가슴 앞에 도착한다. 그들은 한 사람이 한가지 작업만 한다. 조금 익숙해지거나, 숙련된 아이들이 인가를 받아 나가서 자리가 비면 다른 아이가 올라가기도 한다. 상자를 접어 모양을 만들거나 나사를 끼우는 건 초보자들의 일이다. 압착기를 조절하거나 도료를 내뿜는 기계를 건드리는 건 고급 일이다. 도착한 원료를 정리하는 건 가장 나이가 적은 애들이 한다. 아직 힘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인가증을 받을 때 즈음이 되면 앉아서 하는 일만 시킨다.
십장들이 그 애들을 관리한다. 십장들은 어둠 속에서 잘 본다. 어린애들보다 훨씬 잘 본다. 어린애들보다 훨씬 빛에도 강하다. 그들은 중재자로서 안성맞춤이다. 그들은 어깨가 넓고, 다리도 길고 단단하지만 성인은 아니다. 키는 성인들 가슴까지나 올까 말까하고 어린애들보다는 머리 하나는 큰 채로, 새까만 눈이 번쩍번쩍한다. 그들은 기이한 존재들이다. 그들을 매일 마주치는 공장장이나, 광장에서 볼 일이 있는 하급 관리같은 성인들도 이 기이한 존재들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지난달에 인가를 받은 애들 중에서 둘이나 압착기에 들어가 죽었다. 아주 어린 아이 하나도 분쇄기에 빠져서 갈려나갔다. 십장은 공손한 태도로 사건의 전말을 보고했다. 엥겔은 어린애들의 시신을 본다. 시신이 무더기로 쌓여있다. 어린애들은 모두 죽어서 썩지 않은 채 굴러다녔다.
엥겔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는 겨우 눈을 뜬 채, 마찬가지로 눈을 뜨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링카 속의 육체를 본다. 엥겔은 관 뚜껑을 밀어젖히고 일어난다.
그는 겉옷을 대충 걸쳐 입고 한셀을 만나기로 한 장소로 나갔다. 중앙 다리 위였다. 한셀도 여느 때보다는 덜 치장하고 나왔다. 엥겔은 녹이 약간 슬기 시작한 귀걸이를 그대로 차고 왔는데, 잠시 침묵하고 있는 동안 재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소매 한 쪽도 헤어지기 시작했다. 한셀은 그에 비하면 깨끗하게 차리고 나왔다. 최소한 눈에 띌 만큼 부식된 것은 없었다. “한 쌍의 부랑자 같군.” 한셀이 장난스레 말했다. 엥겔은 웃지 않았다. 그들은 잠시 수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작은 배들이 없었다. 엥겔이 중얼거렸다. “나쁜 꿈을 꾸었어.”
“무슨 꿈?” “너 때문이야.” 한셀이 듣고는 미소지었다. 엥겔이 찡그렸다. “네가 헛소리를 해서 그래, 한셀.” “난 헛소리하지 않았어.” “선생이 되겠다니.” 엥겔이 조그맣게 중얼거리고는, 이어 말했다. “내가 프린키에게 말해볼게.”
“프린키?” “알잖아. 인사과 담당이야. 내 원고 담당원이랑 알고 지내는 사이니까, 나랑도 친분이 있다고 볼 수 있지.” “무리하지 마, 엥겔.” “무리하는 게 아니야. 벨은 내가 부탁하면 소개시켜 줄 거야. 지금이라도 목록에서 뺄 수 있어.” “청탁 받은 게 아니야.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을 선생으로 쓰려고 하겠어? 지원자도 많은 판에. 나야말로 수를 써 가며 청한 거야.” “한셀.” 엥겔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 이백년 전의 꿈을 꾸었어.”
눈이 마주치기 전에 엥겔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난 지금의 십장 제도를 반대했어. 그냥 그 전처럼, 십장 일은 계속 성인들에게 시키자고... 그 쪽에 표를 던졌는데.” “그래. 그랬더라면 지금 나는 십장을 키워내는 일을 맡는 게 아니라, 여전히 십장 일을 하고 있겠지.” 한셀이 웃으며 말했다.
엥겔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한셀이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넌 작가야, 엥겔.” 엥겔은 어깨를 움찔했지만 딱히 뭐라 하지는 않았다. “넌 작가야. 난 모형이나 색칠하지. 너는 수십 수백 개의 상품 기획들을 끌어 모아 글을 쓰지. 네 글이 출시된 다음에야 물건들이 세상에 나오지. 그러면 네 글은 실제로 몸을 얻어 어디서나 문화가 되지. 네가 만든 장면들은 관습이 되고, 네가 쓴 몸짓들은 인사가 되고 사랑이 되지. 엥겔. 넌 이 도시의 회사에서 생산하는 상품들 대부분을 맡고 있어. 난 뭐지?” “자신을 비하하지 마.” “진심으로 내가 내 직업에서 재미라든가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 그건 오만이야, 엥겔. 나도 똑같은 크기의 욕구가 있어. 보잘것없는 일인 걸 알면서도 거기 맞추려고 내 욕망까지 줄여야 하나? 내가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 자신을 정당화시켜야 하나? 나는 나야. 내 마음에 비해 내가 부족하다는 걸 알고 사는 게 나아. 그건 최소한의 긍지야.”
“나는 단지 네가...” “내가 전에 <몸만 큰 애들>이라고 했지. 그건 나야.” 한셀이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너는 성인식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 나도 기억나지 않아. 그런데 차이가 뭔지 알아, 엥겔? 너는 네가 잘못 태어난 거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어. 무언가 특별하게 태어난 거지. 나는 그저 내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거 같아. 물감 기름 냄새 말이지 - 기름과 타르 냄새. 나는 아직 공장에 있는 거야. 성인들의 세계에 있지만, 여기서도 나는 공장에 있어. 나 자신이 어린애니까. 어린애들은 어둠 속에서 일하지만, 성인들의 세계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뿐이야. 너는 성인식 따위 필요 없어. 너는 이미 훌륭하니까.” 한셀이 엥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엥겔은 친구의 목소리를 바로 귀 옆에서 느꼈다. “우리 친구들도 다 훌륭했지. 건축 설계사 딜렘, 작곡가 에민스트리, 기획자 이디온, 얼마 전에 재가 된 티고네, 우리들은 아무도 성인식을 기억하지 못했지. 그건 아마 너희가 바로 이 세상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거야.” 한셀은 마지막 문장을 아주 부드럽게 떨리는 목소리를 내어 말하면서 친구의 눈을 마주보았다. 엥겔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한셀은 친구의 뺨을 쓰다듬었다. “너는 천진하고, 아름답고, 앳되고 훌륭하지. 너는 갓 태어난 성인이야... 어른이라는 종족이야. 너는 - 너희들은 가장 바르게 태어났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그리고 그는 친구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엥겔은 잠시 복종하고 있었지만, 곧 입을 열었다. “한셀...” “쉿.” 한셀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어린애를 받으면 잘 키울 거야.” “왜 하필 선생이 되고 싶어? 이백년 전을 기억해 봐. 그런 모습이 변할 수가 있나? 나는 왜 우리가 비슷한 일을 여태껏 시도하고 있는지 이해가...” “엥겔.” 한셀이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너 어젯밤 정말 엉망진창인 꿈을 꾼 모양이야. 우리는 동의했잖아. 시도 자체는 옳은 거였어. 헬라는 존재해. 어긋나게 된 건 어른들의 실수야.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잘 키우겠다는 거야.” 한셀이 엥겔의 뺨을 두드리며 씩 웃었다. 그는 이백년 전의 문구를 되풀이해서 말했다. “<우리의 아이들이야>” “죄책감 때문이야?”
엥겔이 묻자 한셀은 조용히 있었다. 그는 잠시, 아주 잠시동안은, 그가 바람이나 하늘과 수로의 배경 속에서나 옷자락과 귀걸이와 어울려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잊어버린 듯 했다. 아니면 저것도 한가지 장면인지도 모른다, 엥겔은 생각했다. 한셀이 정신을 차리고는 웃음 지었다. “다시 악몽은 꾸지 마, 엥겔.”


3.

엥겔은 샌달을 신은 발을 의자 밑으로 늘어뜨린 채, 발목을 까닥거려 보았다.
섬유로 엮은 것이 아니다. 가죽을 묶어 덧댄 신발이다. 당분간은 멀쩡하리라. 엥겔은 기분 좋게 흥얼거렸다. 그는 음악을 틀어놓고 앉아 있다가, 술잔을 입술에 댔다. 잔을 내려놓고 엥겔은 뒷맛을 즐기고 있다. 잔 속의 술은 줄지 않았다. 입술에 대었다 떼고, 다시 잔을 기울여 한 모금을 즐길 때까지도. 엥겔은 절인 과일을 먹는다. 과일은 전혀 줄지 않고, 엥겔의 입술에 닿은 후에도 축축하고 말랑말랑한 그대로 접시에 남아있다. 그러나 엥겔의 손이 떨어지자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술에는 곧 침전물이 쌓이더니 텁텁하게 말라버렸다. 엥겔은 가죽처럼 변한 과일 껍질을 창을 열고 멀리 던져버린다. 그러자 이내 재로 변해 사라졌다. 엥겔은 새 술잔을 꺼내야 했다.
그는 술을 목으로 넘긴다. 여전히 마시는 동안에는 술이 줄지 않는다. 엥겔은 자기 발치에 무언가 달라붙어 있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발을 들어올려도 사라지지 않는다. 쩍쩍 달라붙는 어둠이다.
엥겔은 내려다본다. 링카에 이런 것은 비치지 않았는데. 그것은 자기보다 조금 작지만, 분명히 자기 머리 모양과 입은 옷 모양을 하고 있는 어둠이다. 조금씩 너울거리고 있기도 하다. 발에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엥겔은 뒷걸음질쳐서 책상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러자 저 쪽에서도 책상 위에 올라앉은 모양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엥겔은 무언가 착각했다고 생각한다. 그건 자기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어린애들 여럿이 뭉쳐있어서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엥겔은 종이 자르는 칼을 들고, 다시 바닥에 서서는 어린애들을 자기 발로부터 잘라내려고 해 본다. 엥겔은 몇 번 더 시도하다가 으쓱하고는, 다시 책상 위에 올라앉아 어둠을 바라보았다. 어린애들이 꿈틀거리면서 엥겔에게로 기어올라왔다. 한 명이 결국 엥겔의 손목을 꽉 깨물었다.
어린애는 열심히 깨물어댔다. 엥겔은 손을 내민 채 어린애가 애쓰는 모양을 응시했다. 어린애의 이빨이 닿은 부분이 변형되기 시작했다. 좁은 틈이 생겼지만 아이 이빨에는 묻어나는 것이 없었다. 어린애는 하릴없이 입맛만 다시다가 엥겔을 버리고 가 버렸다.


엥겔은 눈을 뜨고 있었다. 링카의 어렴풋한 빛 속에서, 자신의 육체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엥겔은 일어나려고 하다가, 가만히 누운 채 링카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 한 쌍과 마주쳤다. 그는 아직 나른한 상태였다. <몸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 단계야> 엥겔은 생각한다.
<육체를 얻는 것.  링카에는 온전한 육체가 비추어진다. 그 육신을 보고 자신의 육체라고 인증하는 것이, 성인식의 첫 단계다. 성인은 그 육신을 신뢰한 채 잠이 든다. 링카의 품에 안겨서,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의식을 꺼 버리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거라는 불안 없이. 자신의 육신에 기대어 잠이 든다. 깨어나면 육체는 여전히 링카에서 자신을 굽어보고 있다. 성인식을 치른 자들은 몸을 얻는다. 잠들 수 있는 자리를. 나는 성인식이 기억나지 않아. 그러나 얼마든지 상상할 수는 있다. 나는 매일 일어나 저것과 눈이 마주치니까. 나의 육신과. 나의 육신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저 시선 아래 자고 깨어나며 깔린 듯이 누워있다. 나는 늘 수치감을 느낀다. 깨어날 때마다 매번> 엥겔은 링카에 비친 자기 육체를 흘끔 보고는, 손을 약간 비껴서 관 뚜껑을 밀어냈다.
<그런 것이 성인식이란 말이야? 스스로가 수치스러워지는 것이. 물론 나는 육체 덕분에 잠을 잘 수 있지. 이 관 속에서 잠을 잘 수 있다. 그렇게 치면 나는 잠을 얻은 것이다. 몸을 얻어서 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잠과 몸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몸은 잊혀지기 위한 것이다. 깨어나면 몸은 갑자기 무시무시하고 변함없는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결코 잊지 못하고 저것이 나라는 것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나의 시선 아래 묶이고 만다. 오늘 밤 잠을 자기 위해서! 성인식이란 그렇다면 참 이상한 계약이다. 망각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니. 그래서는 안 되는 건지도 모른다. 몸은 늘 잊혀져있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매일같이 생을 어색하고 수치스럽게 만들어서, 그 시선에 털끝 하나 빼놓지 않고 좌우되며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고만 있을 수는 없지> 엥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서 있었다. 관에서 빠져나오며, 그는 방금까지 자신이 무엇인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가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갸우뚱거리며 그는 계단 여러 개를 거쳐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는 자기 방에 도착해서 버릇대로 한쪽 벽을 열고 신중하게 옷을 골랐고, 갈아입는 동작에 신경을 썼으며, 조심스럽게 양손을 목 뒤로 돌려 입은 그의 생김새와 너무 완벽하게 어울리는 바람에 오히려 눈에 띄지도 않을, 그래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할 목걸이를 걸었고, 조각된 부분이 정확히 목깃 바로 아래에 오도록 했다. 보드라운 발을 뭉툭한 밤갈색 구두에 넣고 나자 그는 서재로 갔다.
오늘은 십장들에 관한 꿈은 꾸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도 기분이 좋지 않다. 엥겔은 맑은 잔에 술을 따라 입술에 댔다. 꿈의 파편 하나가 갑자기 떠올라서 엥겔의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찡그리고 있는 사이에 파편은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엥겔은 책상 구석으로 가서 종이칼 하나를 집어들었다. 어제 작업을 하던 흔적이 남아있다. 종이가 삭아버리기 전에 마쳐야 할 텐데. 그는 다시 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보라색 얼룩만 남아있었다.
그는 종이칼을 자기 몸에 이리저리 가져다 대어 보았다. 매끄럽고 기분 좋게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책상 위에 내려놓자 녹이 슬기 시작했다. 그는 칼을 작은 기름통에 담구어두고나서, 집 안을 쭉 둘러보았다. 벨이  오후에 원고를 받으러 오기로 되어 있다. 집을 좀 치워두는 게 좋을 것이다. 그는 녹이 슬기 시작한 곳을 씻어내고 구석에 쌓인 잿가루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일전에 선물받은 술이 잘 보관되어 있는지도 확인했다. 벨에게 쉽지 않은 부탁을 할 텐데, 비싼 물건 두어 개는 필요할 것이다. 그는 무심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매끄러웠고, 손가락들은 마디마다 조금씩 굴곡이 져 있었고 약지에 새로 낀 가느다란 반지는 어딘지 수줍은 인상을 더해 주었다. 엥겔은 보석에 가장 좋은 각도에서 빛이 스미도록 손 모양을 만들어보았다. <헬라>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백년 전 어느 오후, 아이들 백 오십 명이 죽었다. 어린애들이 몇 명인지 세어본 것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숲에서 운반해오면 즉시 공장으로 보냈고, 그렇게 태어나는 아이들과 거리에서 헤매다가 죽는 아이들 수의 차이를 그때그때 덧붙여가면서 인원수를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십장 일은 아직 어른들이 맡고 있었고 그들의 눈으로는 어둠 속에서 아이들을 가려낼 수가 없었다. 십장들을 배려하느라 어렴풋하게나마 일터에 불을 밝혀두어야 했고 아이들은 그 덕분에 눈이 나빠졌다. 당시에는 평균 생산량도 지금보다 훨씬 떨어졌고 계획을 잡기도 힘들었다. 도시에서는 보다 안정적인 노동력을 원했다.
성인 사업가들은 아이들이 덜 죽어나가길 원했고, 눈도 나빠지지 않았으면 했다. 수를 세어 관리할 수 있었으면 했고 실수나 태업을 막을 수 있었으면 했다. 요지는 수가 많고도 건강한 아이들을 원했다는 것이다. 회사는 내부적으로도 연구 부서를 두고 있었지만 후에는 학회에도 연구를 위임했다.
이후 오십 여 년쯤 성과 없는 실험을 반복하다가 부서는 해체되었다. 학회는 결과를 내지 못하면서 영향력을 잃어갔다. 그래도 그러는 동안 어린애들에 대한 정보 여럿을 얻어낼 수 있었다. 어린애들은 맛볼 수 없다, 그들은 짐승이 하는 식으로 입으로 씹어 넘기지만, 짐승과는 달리 소화하지 못하고 동화되고 만다. 그들은 먹고 나면 자아를 상실하고, 육체도 변형을 거쳐 심하면 죽고 만다. 그 시신은 역시 썩지 않고 굴러다닌다. 심한 빛 아래에서는 눈뿐만 아니라 피부도 견디지 못한다. 결국 부서에서 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맛있는 것을 주어 미끼로 쓸 수도, 눈을 즐겁게 해서 기운을 북돋아 줄 수도 없었다. 사망률은 일정하게 유지되었고 실명율도 마찬가지였다. 성인 십장들은 또 성인들 나름대로 지독한 작업 환경 때문에 자주 항의를 했고 봉급이 적어도 좋으니 하루에 세 번 교대하는 것으로 근무 시간을 바꾸자고 했다. 그때 우연히도, 파업에 참가하지 않았던 십장들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엥겔은 잔을 닦아내며 상상한다. 그는 그 자리에는 없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더듬으며, 순전히 공상된 과거.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이백년 전의 어느 오후. 공장 부지와 어린애들의 거리에는 하늘의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직 일터에서는 어린애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공장 건물 하나에만 갑자기 불이 켜졌다. 십장들이 불을 켠 것이다. 어린애들은 입에 서로의 헬라를 묻힌 채 십장들을 바라보았고, 주저하더니, 도망치기 시작한다.
정리하는 데에는 한 나절쯤 걸렸다고 한때 십장이었던 한셀은 말했다.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몇 분이 지나자 다들 침착하게 어린애들의 머리를 부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애들은 무언가를 맛볼 수 없다. 먹을 수도 없다. 먹은 것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먹는다는 개념이 없다고 보는 게 좋다. 그 애들로서는 먹는 거나 먹히는 거나 다를 바가 없다. 짐승들은 소화한다. 성인은 향유한다. 어린애들은 동화된다. 겨우 십장 몇 명의 보고로부터 학회가 중요한 착상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오십 년 간의 실패로부터 나온 그런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애들은 동화된다. 그렇다면 성인에 동화되는 것은 상관없지 않은가?
  엥겔은 손을 내려다본다. 그는 이제 반지를 끼고 있지 않다. 매일 밤 매일 아침 링카에는 손의 형태가 비친다. 손가락들의 날렵한 선. 엥겔은 이제 보석빛은 남아있지 않은 손을, 순진하고 우아한 모양으로 잡아보려 애쓴다. 링카에는 어떤 붉은 액체도 비치지 않는다. 이백년 전 우연히 그 액체를 발견한 이후 헬라라고 불러왔다. 종족의 증거.
은닉된 정수. 종족이 아니고서는 드러나지 않는 고유한 육체. 성인식의 이유. 당시에는 십장들을 성인들 중에서 뽑아서 쓰고 있었다. 한셀의 말은 틀리지는 않다. 어린애들 눈이 상하더라도, 실명율이 높더라도,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성인들에게 십장 일을 시키고 있었다. 지금도 그러했더라면 한셀은 십장으로 보내졌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예전 같으면 십장으로 보내졌을 별다른 능력 없는 성인도 회사의 잡일을 맡아보며 한평생 어른들의 거리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지금의 제도를 확립시키는 데에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십장들은 보수도 적었고 대우도 형편없었다. 하루의 삼분의 이 이상을 컴컴한 일터에서 보냈고 잠을 잘 때에나 겨우 어른들의 거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셀을 보면 알지만, 능력이 떨어진다고 해서 인성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루 삼교대와 보수 인상을 요구하며 뭉칠 때는 격렬했지만 아이들은 별개의 대상이었다. 자신들과 비슷하게 약하고 가엾은 존재들이다. 성인 십장들은 대부분 차분하고 인내심 깊었으며 어린애들을 동정하고 있었다. 그래도 가끔은 화를 내는 때가 있었다고 한다. 한셀의 말에 따르면, 낮 내내 침침한 곳에서 생활하니 어쩔 수 없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데, 성인들 입장에서 보면 뻔하게 쉬운 일을 비틀거리면서 망쳐놓고 있으니 짜증이 날 만하다. 언젠가 십장 중 한 명이 기계 속에 잘못 들어간 아이를 끌어내다가 아이가 십장의 손등에 이빨을 댄 적이 있다.
십장은 멍하니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잠깐동안이었지만 그는 자기 손에 기묘한 틈이 생기고, 갈라져서, 변형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틈에서 헬라를 발견했다.
손의 변형은 곧 사라졌고 흘러나오고 있던 헬라도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가 처음으로 그런 변형에 대해 보고할 용기를 내었다. 어린애들은 약하다. 그들은 일에 바쁘고 눈이 부셔 어른들을 쳐다보지도 못한다. 이빨을 댄 것은 우연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어떤 종류의 접촉이 일어나면 성인의 몸에 변형이 생기는 것이다. 변형은 경우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졌지만 여지없이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 십장은 며칠을 자신이 무슨 의미 있는 일을 맞이하고 있거나, 미쳤거나, 비정상적인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그는 맨 처음의 물음을 선택했다. 동료들에게 조심스럽게 그 일에 관해 털어놓은 것이다. 그는 다행히, 다른 십장들도 비슷한 경험을 해 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료들 중 몇몇이 이미 <헬라>라는 단어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공식적인 의미가 붙지 않은, 묘한 느낌뿐인 단어를 통해 그 독특한 경험을 일터에만 숨겨두고 있었다. 그는 동료들을 설득해 이 일을 보고하게끔 했다.
학회에서 특히 놀라워했다. 사업장들도 관심을 보였다. 회사에서는 다시 특수 분과를 소집하여 학회와 연대시켰다. 그들은 헬라를 추출하여 검사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어떤 다른 수를 써서도 성인의 몸에는 변형이 생기지 않았다. 링카가 탁해지지 않는 한 성인의 몸은 온전하다. 링카가 탁해지기 시작한 성인들의 경우에도 눈 밑이 쳐지거나 얼굴이 쭈그러들었을 뿐 헬라는 비치지 않았다. 어떤 붉은 액체의 징후도 없었다. 어린애들이 이빨을 대어서 헬라를 보았다는 경우에도 이빨이 떨어져나가자마자 헬라는 굳어지고 재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학회에서는 종족의 증거를 찾았다고 결론 내렸다. 어린애와 어른의 특수한 접촉, 둘의 접촉에 의해서만 실재하는 육체.
어린애가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 링카는 어린애에게 온전한 육체를 준다. 그러나 링카가 비추어내지 못하는 정수가 있다. 사물은 자기 자신의 운명을 비추지 못한다. 헬라는 링카에 우선한다. 어린애에서 어른으로 자라나는 과정에 속한 것이 아니라, 어린애와 어른의 속 자체이기에. 링카의 존재가 침묵하고 있던 것 - 종족의 약속.
초기에 수많은 성인들이 자진해서 실험 대상이 되었다. 어린애들의 이빨이 닿자 그들의 손목에서 헬라는 여지없이 붉게 흘러나왔고, 매료될 만한 색채와 진득한 질감, 몸에 닿는 축축한 느낌, 성인들이 팔을 뻗고 몸을 구부리고 앉은 앞에 다시 무릎을 꿇은 어린애의 작은 몸. 생전 처음 바라본, 아직 써 낼 수도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장면. 어린애만이 성인에게서 그 정수를 증거할 수 있었다. 다른 어떤 외부의 시도에도 그것은 꽉 닫혀있고 은닉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인연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오직 고유한 형태로만 열려있는 육신이다.
그렇게 해서 잠시나마 담을 헐려는 시도가 있었다. <우리의 아이들>이라고 그 때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임의로 골라낸 몇 명에게만 헬라를 주었다. 성인의 헬라를 마시고, 성인의 헬라와 동화되어, 그들의 뺨은 환해졌고 팔은 매끄러워졌다. 그 다음에는 스무 명을 뽑아서 지원자들로 하여금 정기적으로 헬라를 주게 하고 몇 주일쯤 관찰했다. 아이들은 금세 건강이 좋아졌다. 일터에 돌아가서도 명민하게 일하고 있다는 보고가 돌아왔다. 그 애들은 이제 비실거리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는다. 빛에도 강해져서 십장들과 인간적인 소통도 가능했고 지시도 더 잘 이해했다. 성인 십장은 아이들을 달랠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깨물리기도 했지만.
스무 명의 아이들을 일터에서 관찰한 결과 성공적인 보고가 돌아오자 본격적으로 계획을 짰다. 보수를 인상하자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발탁된 성인들 각자 몇 명의 어린애들을 할당받았다. 선택된 아이들은 학회가 지정한 건물로 운반되어 각자 방을 지정 받는다. 성인들이 당분간은 매일같이 들러서 헬라를 주어 어느 정도 건강하게끔 만든 다음 일터로 돌려보냈다. 이후에는 어린애들이 일터로 보내진 후에도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이 성인들이 정기적으로 들러서 헬라를 주고 오는 식이다.
어린애들은 커지고, 팔다리도 강해졌다. 이런 식으로 실험된 아이들 백여 명이 일터로 돌려보내졌고, 정기적으로 헬라를 보급 받았다. 선발된 아이들은 한 건물 안에 모여 일했다. 생산력을 분명하게 비교해보기 위해서였다. 넉 달쯤이 지났다. 삼백 명의 아이들이 한 건물에서 일하고 있었다. 누구나 이제 곧 성인들의 거리와 공장, 아이들의 거리 사이의 담이 헐리고, 성인들이 아이들을 하나 둘 씩 품에 안고 키우게 될 거라고 믿었다. 엥겔도 의심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친구들과 아이들을 어떻게 데리고 놀지, 아이들이 어른들의 거리에 잘 적응할지, 집을 재설계해야 하지는 않을지 걱정했고 또 설레어했다. 아이들에게 헬라를 주고 건강하게 키우리라. 그들이 인가를 받아 성인이 될 때까지 건강한 아이들로 지켜주리라. 그것이 성인의 책임이리라. 종족의 구성원은 작은 손과 큰 손을 맞잡고 행복하게 지내리라. 불길한 전조는 행복의 구름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생산성의 증가가 주춤하기 시작했다는 것. 뒤늦게야 십장들과 공장장들은 일이 자신들의 통제 범위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내용의 공식적인 보고를 올렸다.
어린애들은 어둠 속에서 잘 보게 되었다. 어린애들은 건강해졌다. 어린애들은 힘이 세졌다. 어린애들은 헬라의 정기적인 보급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찾아와주는 성인들의 팔에서 이빨을 떼지 않으려고 한 지는 꽤 되었다. 십장들이 붙잡고 억지로 떼어내야 했다. 그들은 이제 빛에도 어느 정도 견딘다. 아이들은 성인들을 건드릴 수 없다. 그러나 성인들은 공장의 그 어렴풋한 빛 속에서는 잘 보지 못했다. 밤에 아이들의 거리로 내보내고 나면, 성인의 눈은 더 이상 닿지 않는다. 노동 보급률의 감소 추세는 단기적으로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어린애들이 일하다가 쓰러져나간 만큼 다시 보충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전보다 많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십장 한 명은 선발되었던 아이들 둘이 일을 하다가 싸우고 있는 걸 보았다. 한 명이 다른 쪽의 목을 깨물었다.
아이들의 몸에도 헬라가 있다. 서로에 의해서 드러나는, 붉은 액체. 아직 성인의 몸에서처럼 정화되지 못한 헬라. 그들은 서로 물어뜯은 만큼 더 추해지고 육체가 변형되어간다. 성격은 나빠지고, 점점 더 굶주림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일하기도 귀찮아했다. 이미 인가를 받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아남기 위해 헬라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헬라 자체가 중요해졌다. 굶주림에 들떠 있는 상태, 광기가 서로를 덮쳤다. 그들은 성인식이나 링카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싸움 도중 설비가 망가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면서 생산성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십장들이 말리려 들자 머리가 좋아진 어린애들은 점등기를 고장냈다. 난장판이었다. 보조 전원을 돌렸지만 점등했을 때 이미 건물 안 아이들의 수는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더 이상 달랠 수도 어렴풋한 빛 속에서 통제를 가할 수도 없었던 십장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보고했고, 회사에서는 짧은 회의를 거친 후 도시민에게 통보했다. 십장들은 무기를 들고 공장의 당 건물로 들어가야 했다. 십장들은, 십장들끼리만 남아 복잡한 기계를 점검할 때나 쓰던 그런 수준으로, 광도를 최대로 높였다. 점등하자 극심한 불빛 속에서 어린애들이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십장들은 철붙이를 이용했다. 그런 차가운 물건에 의해서는 헬라는 나오지 않았다. 어린애들의 몸뚱이는 종이처럼 쉽게 절단되어 단면을 드러냈고, 그대로 새하얗게 굳어서 일터를 굴러다녔다. 십장들은 시신을 한곳에 치우고 돌아왔다. 보고를 받고 이틀 후 회사는 실험이 실패했다고 전 도시민에 공지했다.
엥겔은 잘 닦은 잔들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벨은 금방이라도 도착할 것이다. 그들은 먼저 기획안에 대해 가볍게 논쟁하고, 벨은 엥겔의 지난 원고에 대해 쓴소리도 몇 마디 건넬지 모른다. 엥겔은 왜 이런 공상에 가까운 과거가 자기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한셀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백년 전 아이들을 죽이고 돌아온 후 한셀은 다시 십장직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가기를 거부한 십장들이 많았다. 급히 발탁된 하급 직원들이 교대제로 일터를 관리했다. 효율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한셀은 며칠 간 엥겔과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 후 몇 달 동안 도시민들은 헬라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지 못했다. 도시는 침체되어 있었다. 철폐될 위기에 다다른 학회가 교육에 대해 언급했다. 어린애들은 소양을 갖추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먹거나 맛볼 수 없었기에 욕구도 없었다. 성인들이 인내와 절제를 갖추듯이, 헬라를 입에 댄 이상 마찬가지로 절제심을 갖추어야 한다. 그들은 욕망만 부여받고 걸맞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어른들은 몸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다듬어주어야 했다. 보다 완전한 육신에는 보다 절제된 영혼을. 그건 그저 학회의,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서 투정하는 소리처럼 들렸고 도시민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업가들은 책임을 기피했다. 학회의 특히 권위 있는 학자들이 모두 뒤집어쓰고 철폐될 위기에 몰렸고,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다고 여겨질 만한 젊은 학자들은 회사의 적당한 부서에 편입될 것이다. 학회의 편을 들어 준 것은 십장들이었다. 그들은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일에 말려들어 뒤처리를 감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눈에 비친 장면을 씻어내길 원했다. 시신은 상품이 아니다. 썩지도 않고 타지도 않는 아무 쓸모 없는 것. 아무도 그에 대해서는 글을 써 줄 수 없었다. 생산이 뒤따르리라 가정하는 그런 글을. 무언가를 낳을 수 있으리라 예정된 글을. 엥겔을 비롯해 작가들은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뿐,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당시 성인 십장들의 주장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실험이 개시되었다.
극소수의 아이들만 선발해서, 성인 각자에게 맡기고 함께 지내며 교육하도록 했다. 전처럼 헬라만 주고 떠나는 것이 아니다. 집에 데려가 온종일 아이와 함께 지내며 교육을 맡는다. 학회에서 교육 방식에 대해 도움을 주기로 했고, 정기적으로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기로 했다. 이전의 십장들 중 다수가 그 일에 지원했다. 한셀은 지원하지 않았다. 그는 이전의 실험에도 딱히 찬동하지 않았다. 그는 나이가 많은 만큼 오랫동안 어린애들을 겪어보았고, 그 본성이라는 것이 어떤 경우에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할 수 없다고 엥겔에게 말하곤 했다. “아이들은 연약하고 순수하지.” 한셀은 겨우 저녁 시간에나, 엥겔과 만나서 수로 가의 둑 위를 걸으며 이야기했다. 물이 철썩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스며들어와, 그의 목소리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링카를 받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일해. 비실거리긴 하지만, 최선을 다 하지 않는 아이는 없는 거야. 너무 힘들면 쉬기는 하지만 그걸 태업이라고 부르기는 무리가 있지. 정신이 나간 상태라는 게 옳지. 그렇게 어른이 되려고 하는 이유가 헬라라고 지금 학자들은 말하고 있어. 그것이 종족성이라고. 그렇다면, 그런 식의 욕망이 헬라라면 헬라란 정말 무서운 거야. 종족이란 ...” 한셀은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흐름을 잃어버렸고, 그 동안 물소리가 완전히 그의 목소리를 흩어버렸다. 한셀은 입을 다문 채 체념하고 걷기만 했다.
조용히 시간이 흘렀다. 한셀이 일을 하지 않고 엥겔에게 가끔 얻은 돈으로나 겨우 옷을 입고 사는 사이에, 엥겔이 조금씩 이 친구에 대해 짜증이 나기 시작했을 때 즈음, 학회에서는 두 번째 실험을 위해 선발되었던 어린애들 중 두 명을 공개했다. 일 년쯤이 지난 후의 일이다.
아이들은 주춤거리며 샌달을 신고 걸어나왔다. 그 애들은 이제 두꺼운 옷을 걸친다면 낮의 하늘 아래에서도 걸어다닐 수 있다고 성인들은 동료들 앞에 소개했다. 성인들은 초기에는 아이들을 지하에서 키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상의 방에서도 키울 수 있었노라고 했다. 반년쯤이 지나자 눈가리개도 풀 수 있었다. 어린애들은 조금 변한 것 같았다. 키가 컸고, 콧날도 제법 날카롭게 솟았다. 눈은 검게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회사에서 개최한 연회 때 그들은 주춤주춤하며 성인들 사이를 걸어다니다가, 보드라운 입술을 움직여 뭐라고 인사를 했다. 서투르긴 했지만 말 몇마디를 내놓은 것이다. 성인 십장은 아이가 전등빛에 겁을 내자 불러들여서 뺨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아이는 가만히 있다가 눈을 감았다. 엥겔도 그 자리에는 있었다. 좋은 장면이었다.
교육의 효과는 좋았다. 한 명을 빼고 성인들 모두가 성공했다. 전직 십장들은 사실 학회로부터보다 서로에게서 훨씬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매주 함께 모여 서로의 교육 내용을 밝혔다. 초기에는 힘들고 불안했다. 돌아보면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꼴을 볼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헬라를 공급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목적은 절제를 가르치는 데에 있었다. 누군가는 벌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어린애들의 육체는 너무 약해서 벌을 주기도 쉽지 않았다. 누군가는 말을 가르쳐 보려고 했다.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누군가는 헬라를 먹고 싶으면 혼자 할짝대며 더듬거리는 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성인이 알아볼 수 있게끔 자신을 표현해야 했다. 교육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무조건 소리를 내야만 했다. 최소한 발을 구르거나 직접 다가와서 이빨을 들이대야 했다. 혼자서 입맛만 다시면 안 된다. 혼자서 욕구를 달래려고 자기 팔을 깨물어서도 안 된다. 원한다면 성인에게 요청해야만 했다. 성인들은 헬라를 주거나 아니면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거부했다. 격렬하게 요구했고, 할 수 있는 한 격렬하게 거부했다. 싸움처럼 보이는 일종의 대화가 생성되었다. 아이들이 헬라의 공급이 아니라, 성인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게 되는 대화. 어떤 성인은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한참 앉아있으려니 아이가 와서 성인의 손에 자기 뺨을 대었다. 성인은 아이가 깨물려는 줄 알고 체념하고 앉아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성인의 손을 한참동안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헬라는 없으므로.
성인은 아이를 꽉 껴안았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 매만지며 느끼고 있었다. 오랜 꿈이 실현되는 것 같았다.
아이는 말을 배우려고 했다. 아이는 밝은 곳에서 보고 싶어했다. 아이는 성인의 손을 잡고 다녔다. 헬라를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면 조심스럽게 성인에게 가서 조그만 머리를 갸웃거리며 달랬다. 어쩌다 익힌 단어 몇 개를 웅얼거렸다. 아이는 성인의 표정에 나타나는 변화를 예민하게 살폈고, 그 과정을 즐겼다. 성인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침울해하면서 필사적으로 더 조르거나, 체념해버렸다. 헬라를 받을 때도 아이들은 할짝거리다가 꽉 깨물거나, 슬그머니 깨물 듯 말 듯 하다가 엄지가 있는 쪽을 아프게 콱 물어버리거나, 대담한 아이들은 목을 깨무는 것도 즐겼다. 간지럼 태우기, 매만지기, 쓰다듬기, 애태우기, 물었다 놓기, 빨아들이기, 핥아대기, 놀이가 늘어갔다. 아이는 그럴 때마다 성인의 얼굴을 보고, 말을 듣고, 반응을 이해하길 즐겼다.
아이들은 많은 단어를 익혔고, 성인과 교감할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성인들끼리 보다도 더 예민하게.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도 보았지만, 밝은 곳에서 성인과 함께 마주보는 것을 좋아했다. 서툴게나마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했다. 아이들은 이미 일터에서 단순 노동만 맡기에는 너무 풍부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교육을 마치면 십장으로 보내지기로 정해져 있었다. 그 정도 직종에 적격인 듯이 보였다. 기존의 십장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그 일이 자신들에게 돌아올까봐 겁에 질려있던 하급직 직원들이 크게 찬성했다. 아이들은 일터로 되돌아가기 몇 주 전부터 성인들의 표정에서 묘한 기색을 읽어냈다. 그들은 기껏 졸라 놓고도 헬라를 마시지 않았다. 그들은 무언가 다른 것을 원했다. 지금 입안에 들어올 헬라보다 더한 확답을 원했다. 그 붉은 것보다도 훨씬 더 한. 마침내 그 날이 다가오자 아이들은 미칠 지경이 되어 있었다.
성인들은 아이들을 꽉 붙잡고, 성인이 되어서 만나자고 했다. 아이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성인들은 아이들의 팔을 꽉 붙잡고 열심히 일하라고 했다. 링카를 얻으라고 했다. 너희들이라면 일년 내로, 늦어도 일년 반을 지나지 않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손가락으로 달 수를 세어 보이며 말했다.
새 제도가 채택된 이후로 가끔 의심스러운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터의 어린애들은 전보다 잘 관리되기는 했지만, 간혹 압착기에 괴상한 모양으로 빨려 들어가 죽거나 목이 절단된 채 발견되기도 했다. 십장들의 짓이라는 보증은 없었다. 딱 한번 정확한 장면이 목격된 적은 있다. 검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런 전희도 없었다. 어린애의 목을 붙잡고 그는 이빨을 박아 넣었다. 성인 공장장이 하급 관리들과 함께 실시하는 현장 점검 때 성인들은 철컥철컥 돌아가는 벨트 뒤편에서 그 장면과 마주쳤다. 점검을 위해 점등해 둔 어렴풋한 빛이 거의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성인들과 눈이 마주치자 십장은 고개를 들더니, 어린애의 몸뚱이를 잘 보이게 들어올린 채 어린애가 죽어서 딱딱해질 때까지 순식간에 헬라를 빨아들였다. 그러더니 어린애의 시체를 휙 바닥에 집어던졌다고 한다.
그 아이들이 십장 일을 마치고, 인가를 받아 예전의 성인들과 재회할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아이들은 링카를 거치고 나면 대부분 어릴 때의 기억을 상실한다. 십장들의 경우는 따로 기록해 두었지만, 역시 성인식을 치르고 나자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고, 선생들은 회사로부터 전해들었다.
일터에서는 단 한번 빼고는 정확한 경우가 목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 실험의 악몽을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엥겔은 헬라에 대한 그들의 욕구가 진정되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성인과의 관계에 대한 온갖 미담들도 그리 믿지 않았다. 직접 선생 일을 맡아보았던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말이다. 사실은 훨씬 더 엄한 교육이 진행되었으리라고 믿었다. 성인들은 온종일 어린애 곁에 있으면서 감시했을 테니까. 벌을 주는 효과적인 방법을 익혔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것도 임시책에 불과하다. 엥겔은 직접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자신이, 어째서 이백년 전의 악몽에 이렇게 붙들려있는지 자문해보곤 한다. 한셀도 오랫동안 그 악몽에 붙들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조차도 이제 선생 일을 맡아보러 나선 것이다.
성인들의 억압이 없는 가운데, 이 제도는 헬라를 맛본 어린애들을 자유롭게 풀어준 것에 불과하다. 자기보다 작고 눈도 침침한 어린애들을 마음껏 물어뜯은 다음 압착기에 처넣어버려도 성인들은 알아채기 어렵다. 이 어린애들은 소위 교육받은 덕분에 노동 보급률을 적당히 유지하면서 자기들 식욕을 채울 만큼 영악해지고 만 것이다. 엥겔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마침 탁자 위도 대충 채비가 되었다.
벨이 들어왔다. 그들은 탁자에 앉았고, 일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다. “지난번에는 기획에 없는 소재도 몇 가지 쓰셨더군요.” 벨이 말했다. “우리 상품이 아닐 뿐더러, 그 소재들은 아예 상품이 아니었어요. 아시다시피 그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우리 기획의 상품들로만 써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기획안과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어요. 슬프게도 그 장면들이, 제가 보기에도 가장 탁월했습니다만, 이러면 연이어 출시될 상품들로 구매자들이 교체하려 들지...” “벨.” 엥겔이 손을 들어 막았다.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먼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개인적인 일입니다.” “저런.” 벨이 미소를 띄었다. “어쩐지 너무 좋은 술을 내놓으셨다 했습니다.” 엥겔은 벨의 얼굴을 보았다. 벨은 그리 나이가 많지 않다. 육십 살이나 겨우 넘었을 것이다. 조용한 성품에 일 처리는 확실하기 때문에 평판이 좋았지만, 몇 년 전에 흠집이 하나 났다. 엥겔은 프린키와 아직도 친하게 지내냐고 물었다. 벨이 갸웃했다. “원하신다면 소개시켜 드릴 수는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친구가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위험한 일이요?” “아시잖습니까, 벨.” 엥겔은 벨 쪽으로 턱짓해 보이고는 가만히 있었다. 벨이 웃음 섞인 소리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엥겔이 답하며 벨의 잔에 술을 더 따라주었다. “프린키에게 그를 목록에서 제외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 봅니다. 요즈음은 선생 지원자가 많으니까요. 그리고 당신도 그를 설득할 수 있을만한 말 몇마디를 남겨주시면 좋지요. 전직 선생 아니십니까.”
“저는...” “그리고 다시는 선생 일을 맡아보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벨은 여전히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지만, 시선을 피했다.
선생들 중 두 번 이상 계약을 맡는 숙련자가 되는 사람이 다수인가 하면 벨처럼 도중에 기피하는 사람도 있다. 선생 일은 최소 오 년을 단위로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교육에 있어서 숙련도는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다. 벨처럼 아이 하나만 맡아보고 나서 계약을 해지하려면 계약금의 두 배를 반환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간 받았던 보수의 삼분지 일을 벌어들이는 데에 해당하는 기간만큼 하급직 봉사 명령을 받는다. “당신은 성품이 강한 분이신데, 많이 힘들어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점을 제가 한셀에게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힘들지 않았습니다.” 벨이 답했다.
“아이가 힘들었을 겁니다.” “그거야...” “아이는 헬라를 원했습니다.” 벨이 말했다. “보고 있기 힘들 정도로 원했습니다. 늘 제 몸을 깨물려고 들었습니다. 그 애를 가르치는 데에 성공해서 소통이 가능해진 후에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애는 몇 번이나 무는 척을 하며 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게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이백년 전에도...” “아니,” 벨이 말을 끊었다. “그보다는 더한 겁니다. 훨씬 더 나아갔지요.”
엥겔이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더 나아졌다는 뜻이신지요?” “그때보다...” 벨이 가만히 엥겔이 내려놓은 잔을 응시했다. “그 때보다는 훨씬 더...”
벨은 가만히 말을 이었다. “글쎄요, 엥겔. 대화가 가능하다는 건 뭘까요? 그 애는 처음에 저를 보지도 못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제가 있다는 걸 알지도 못했을 겁니다. 헬라를 먹고 싶으면 먹고 싶어하면 그만입니다. 설사 얻지 못하더라도요. 원하는 걸 얻든 얻지 못하든 근본적으로 전능한 상태에 있습니다. 욕구 자체는 무한하고 완전합니다. 그걸 버리고 그 애는 제게 복종했습니다. 욕구가 채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복종하고 유한한 존재로 돌아가버렸어요. 아니,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애는 욕구가 채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복종한 걸까요? 아니면 더욱 더 큰 욕구를 따른 걸까요? 훨씬 더 무한하고 더 결핍된 욕망 말입니다. 대화가 가능하게 된 이후, 우리가 놀이를 하고 있을 때, 그 애가 깨물었다 놓으면서 안타까운 얼굴로 저를 볼 때, 헬라를 제멋대로 재촉하지 않게 되었을 때 즈음 말입니다... 그 애는 그 붉은 것보다 훨씬 더한 것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한 답변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헬라라는, 욕망 자체에서 빠져나와서 그 애는 제게로 왔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드디어 우리가 그 애를 데리고 나왔는데...” 벨이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꽉 쥐었다. “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애가 다른 것을 원한다고 느꼈습니다. 영원한 것을. 살 수 있는 것을. 헬라에 대한 욕구와는 다릅니다. 맛보거나 먹기를 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헬라에 대한 욕구는, 그 욕구가 무한해서 채워지지 못하는 만큼 생을 위협합니다. 다시 비실거리고 연약해져서 숨이 끊어지고 말겠지요. 헬라에 대한 욕구의 무한성은 생의 유한성과 겹치고 맙니다. 그건 무한해질 수 있는 욕구가 아니에요. 다른 것이 있었지요. 나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합니다. 대화가 시작되고 나면... 이야기가 시작되고 나면... 당신이 글을 쓰는 것처럼, 엥겔. 무한한 욕망이 무한한 생을 안착시키는. 한없이 확장되는. 영원을 약속하는.”
엥겔은 맨 뒷 문장을 발음하는 벨의 어조에서 묘한 낌새를 읽어냈다. 엥겔은 좀 더 직접적인 단어를 꺼내어 되물었다. “죽음을 넘어서는?” 벨이 빙그레 웃었다. “특정한 단어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종족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벨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그는 말을 이었다. “초기 선생들 가운데, 단 한 명 실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에 대화를 제시한 사람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벨이 말했다. “관심이 생겨서 선생 일을 하던 중에도 학회의 논문관이나, 사료보관소에 찾아가 보곤 했습니다.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몇몇 자료들로부터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헬라를 계속 공급했다고 합니다. 대화가 가능해진 후 제법 시간이 지나서, 밝은 방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몇 가지 단어로 어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머뭇거리며 깨물었다 놓았다 하고 있을 때 마음껏 마시라고 자기 목을 내밀었습니다. 성인 쪽에서 아이를 놓아주지 않고 계속 헬라를 마시게끔 했답니다. 아이는 처음에는 주저하다가도 나중에는 계속 마셨다고 합니다. 거의 반나절을 헬라를 빨고 있었습니다. 가장 탐욕스런 시기의 어린애도 원래는 그렇게 오랫동안 헬라를 마시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학회의 자료에 기록되어 있었던 겁니다. 늦은 오후부터 한밤중까지 일곱 시간동안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아이는 빠른 속도로 자라났다고 합니다. 사지도 길어지고 순식간에 아름다워졌습니다. 그러나 곧 이상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성인의 품에서 빠져나가서, 방 구석에 웅크리고 찡그렸습니다.”
“찡그려요?” “우리 식 표현으로는 <울었다>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보이고 싶지 않은 표정을 할 때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이들은 엉망으로 찡그린 채로도 그냥 얼굴을 내놓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찡그릴 때 실제로 특별한 반응이 일어나지요. 아이들 눈은 늘 축축해 보이지요? 아, 실제로 본 적은 없으시군요. 여하튼 평소에도 얼만큼 액체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액체는 눈 아래쪽 피부에 뚫린 작은 구멍에서 항시 분출되는 거고요. 그래야 안구가 잘 돌아간다나. 운다고 할 때는 심하게 찡그리는 것도 있지만, 그 액체량이 훨씬 늘어나는 걸 말합니다. 눈 밖으로 흘러나오지요.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실제로 보면 꽤 귀엽습니다. 드물게는 꼭 찡그리지 않아도 물을 흘리기도 합니다만 그것만해도 충분히 이상한 표정이에요. 사실 최고로 이상한 표정이지요. 아이들은 그런 표정을 해도 얼굴을 가리지 않습니다. 선생들끼리 쓰는 표현이지만, 아이들 경우에 <울었다>는 것은 찡그렸다기보다도 눈물을 흘렸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 어린애는 울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 일곱 시간을 보낸 후에는요. 성인은 아이를 달래려고 해 보았지만 다시 곁에 오지 않으려고 했고요. 헬라를 맛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이는 다시 약해졌어요. 빛 속에서는 견디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다시 일터로 돌려보내졌지만, 일을 하려 들지 않았고, 곧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벨이 말했다. ”얼마나 주려 하든, 아이가 얼마나 울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실패했다고 말하지요. 아니, 그 사람은 헬라를 통해 갈 데까지 가 보았던 겁니다. 최소한 그런 용기가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실패했습니다. 말씀드렸던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이 실험도 이미 실패한 겁니다.“ 엥겔은 비로소 안도하고는, 다시 잔을 들어올렸다. ”첫 번째 실험보다 훨씬 더 나아가서, 훨씬 더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헬라 자체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성공이라고 부르는 건, 예정된 실패를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을 오지 않게 만드는 장치 같은 것이지요. 성인과 아이 사이에서, 헬라는 실패했습니다. 종족성의 약속도 실패했습니다. 이 종족은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습니다.“ 벨이 손을 쥐어 보였다. ”이 종족은 실패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린애를 떼어 보낼 때, 나는 무언가 이해할 수 없어졌어요.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자는 말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일을 열심히 하라는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대체 뭐하러?“
벨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성인식을 마치고, 내겐 별다르게 바라지도 않는, 헬라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 그런 존재와만 어울려 살 수 있다면, 헬라는 의미가 없어요. 링카는 성인식의 도구입니다.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고 하지만, 성인식이기에 아이와 어른을 갈라놓습니다. 저 담과 같은 것. 내 어린애를 죽이고 멀쩡한 성인으로 만들어 놓겠지요. 나는 그걸 기쁘게 받아들여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린애에게 아무 일도 해줄 수 없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우리의 헬라가, 한없이 붉은 만큼 한없이 무력하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스스로 말씀하셨다시피, 비약하시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벨이 미소지었다. “여하튼 엥겔, 당신의 제안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당신의 친구는 누구인지 알겠습니다. 드리기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압니다.” 엥겔이 손을 저어 보였다. 엥겔이 친구라고 칭할 만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프린키는 소개해드릴 수 있습니다. 목록에서 빼 줄 수야 있겠지요. 하지만 굳이 그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한셀은 직접 청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도 직접 청했지만 그만두지 않으셨습니까. 선생을 맡은 사람들 중 일부는 당신처럼 마음이 상하곤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많이 상한 친구예요. 죄책감 때문에 일을 맡으려는 거지요. 그런데 당신 말처럼, 더 좌절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전부입니까?” “나는 십장들이 제대로 일하고 있으리라고 믿지도 않습니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들이 어떻게 된 소행인지 모를 노릇입니다. 그런 일에 내 친구가 동참하는 게 싫습니다.” “한셀은 당신의 하나 남은 친구입니다.” 벨이 말했다.
“당신은 일전에 제게도 물으셨지요. 성인식을 기억하느냐고요. 당신은 여러 사람에게 그 질문을 하셨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낫겠습니다. 당신이 자꾸 당신의 육신에 의심이 간다면, 선생이 되면 됩니다. 한셀이 당신을 위해 거짓말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간다면, 한셀이 당신과는 달리 헬라를 몸에 지니고 있을까봐 두렵다면, 당신도 헬라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면 됩니다. 혼자서 잘못 태어난 것이 아닌가 두렵다면 당신도 우리의 종족임을 확인하면 됩니다. 당신은 두려운 것 뿐입니다.”
벨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두려움은 성인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식욕 같은 겁니다. 저는 거기에 손을 보태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없이 잔을 나누었다. 둘은 기획안의 세부 사항에 대해 잠시 더 논하였다. 출시 날짜를 약정하고 나서 벨은 엥겔과 악수를 나누고, 가방에 서류를 챙겨 떠났다. 엥겔은 벨을 문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와 혼자 앉아서 잔을 내려다보았다. 술은 말라버리고 없었다.


4.

하늘은 검게 변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고, 우르릉대는 소리가 났다. 빛이 어느 때보다 선명한 날이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쏟아져내려, 투명하고 새카맣게, 성인들의 얼굴과 어깨에 싸늘한 얼룩을 만들곤 했다. 성인들은 그 날 온종일 빛에 어루만져졌고, 묘한 기분에 시달렸다. 생산성이 가장 떨어지는 날이었다.
티고네 같군. 엥겔은 생각했다. 티고네의 앞을 볼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닫혔다. 밤이 다가왔다. 곧 가로등에 불이 켜졌다.
엥겔은 친구의 집 문을 두드렸다. 찾아가도 되는 걸까 여러 번 고민했다. 한셀은 다행히 금방 모습을 보여주었다. 엥겔을 보고 한셀은 빙긋 웃었다. “기껏 저녁 시간에 찾아와놓고,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기야?”
그러나 엥겔이 얼어붙어 있자 한셀은 손을 뻗어 친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들어와. 그런가, 벌써? 불도 어둡게 해 두었는데. 아이 때문이긴 하지만.” “아니야. 지금 네 얼굴 잘 보이지도 않아. 살피느라 찌푸린 거지.” “일부러 어두운 시간에 찾아와 준 건 고마워. 너도...” 한셀이 엥겔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장난스레 말했다. “너도 정말이지 누더기를 걸치고 와 준 것도 고맙군! 이런 희생을 무릅쓰지 않는 배려심이라니. 하지만 아예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엥겔은 한셀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온기와 매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친구의 손에 박힌 반점들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눈을 감고 매만지기만 하고 있자면, 얇아지기 시작한 피부는 오히려 더 매끄러워진 것 같았다. 마음 속에서 무언가 치솟으려 하다가 공허해졌다. 한셀이 엥겔의 손을 맞잡고 두드렸다.
“들어와. 문 앞에 서 있게 할 수도 없고...” 한셀은 엥겔을 거실의 푹신한 의자에 앉혔다. 엥겔은 한셀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과연 불빛은 어렴풋했다. 그래도 노화는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한셀은 머리에 아무 장신구도 달고 있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빠지게 될 뿐이라고 그는 재미있게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엥겔의 표정을 보고 그만두었다. “너무하네. 차라리 울어버리라구.” “어린애는?”
엥겔은 말을 돌렸다. “맡고 있던 어린애가 있잖아.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게. 맡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말이야.” 한셀이 킥킥거렸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선생 일을 주지 않는 이유가 있다니까. 나도 첫 애를 맡고 바로 링카가 탁해져버릴 줄은 몰랐어. 아직 닷새나 지났나... 그래, 헬라를 얼마 주지도 못했는데.”
엥겔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모르겠어. 다른 지원자에게 맡겨야겠지. 그래도 아직 초기라 다행이야. 성인 한 사람에게 익숙해지고 나면 바꿔주기가 힘들대. 닷새라고는 해도 이미 헬라의 맛이 다른 건 알 텐데... 무책임한 사람이 된 기분이야.” “너 예뻐.”
“응?” “자주 오게 해 줘.” 한셀이 듣고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엥겔은 한셀을 똑바로 보면서 그 말을 했지만, 곧 얼굴을 가려버렸다. 한셀이 그가 앉은 쪽으로 옮겨가 엥겔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엥겔이 한셀의 팔을 꽉 잡았다. 한셀이 신음했다. “아야.”
“응?” “이제...” “왜 그래?” 엥겔이 고개를 들었다. 한셀이 웃어 보였다. “이제 육체가 조금씩... 늙어보면 알아, 친구.” 그리고 팔을 흔들며 덧붙였다. “너무 꽉 잡지 마. 빠른 속도로 치지도 말고. 종이 자르는 칼 같은 것도 조심해서 가지고 다녀줘. 아, 정말 이 감각은 싫거든...” “티고네는...” “티고네는 자살했지. 그래. 나는 아직 불쾌한 감각을 느낄 뿐이야. 처음에는 잠시면 사라지곤 했는데... 이젠 네가 손을 떼었는데도 여전히 팔이 이상하거든. 나도 이제 곧 감각뿐만이 아니라 육체에 변형이 생기게 될 테고... 티고네처럼, 치명적인 변형을 입을 수도 있겠지.”
엥겔은 한셀이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정말 끔찍한 느낌이겠지>중얼거리면서 자기 팔을 쓰다듬는 걸 보았다. 엥겔이 멍하니 있자 한셀이 금방 달랬다. “나도 그러겠다는 건 아니야. 이 팔만 해도 <아야!>인데 뭘 하겠어?”
그가 엥겔을 일으켰다. “가자.” “응?” “보고 싶지 않아? 어린애는 아직 지하에 있어. 당분간 가짜 침실에서 키울 생각이었지.” 한셀이 엥겔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늘 설마 어린애를 산책시킨 선생은 없겠지? 빛이 쏟아지더라. 어린애가 맞았으면 큰일이야.”
엥겔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자신이 지하 미로에 발을 들여도 되는가 생각했다. 관이 있는 방을 지나치게 된다면? 친구끼리라고 해도 결코 관의 장소는 알려주지 않는다. 친구의 집에 가도 설계를 자세하게 묻거나 지하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건, 상대에게 갖출 기본적인 예의다. 엥겔은 머뭇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거절하려던 찰나, 한셀이 빙긋 웃으며 턱짓했다. 엥겔은 고개를 돌려 지금껏 앉아있던 거실의 긴 의자 뒤편을 굽어보았다.
그들은 지하로 갔다. 가짜 방 입구 여럿과 직각처럼 보이지만 직각보다 큰 각으로 꺾인 통로들을 지나쳤다. 꺾일 때마다 전등 하나씩이 있었고, 사람이 근처에서 움직이면 켜지는 듯 했다. 엥겔은 한셀의 설계를 칭찬해주었다. 한셀은 으쓱해 보이며 받아넘겼다. 한셀이 작은 방 하나로 안내했다.
문을 약간만 열어둔 채, 한셀이 엥겔에게 손짓했다. 엥겔은 방 안에서 어린애를 보았다. 꿈틀거리는 작은 덩어리같았다. 작다, 그저 그렇게만 생각할 수 있었다. 한셀이 고개를 저으며 다가가서는 어린애를 어르려고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엥겔은 한마디 소리를 들었다.
한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한없이 펼쳐진 하늘. 정신을 차려보니 한셀이 반복해서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난 괜찮아, 엥겔. 괜찮아.” “정말이야?” “그래. 감각일 뿐이라니까.” 그러나 엥겔은 한셀의 목소리에 아직 낌새가 남아있다고 느꼈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너야말로 괜찮아? 그렇게 채어가서는. 계속 들고 있으면 깨물릴 거야.”
“아.” 엥겔은 어린애가 킁킁대는 소리를 내는 걸 들었다.
어린애는 머뭇거리며 귀에서부터 어깨까지 탐색하고 있다.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다. 그러나 곧 적당한 곳에 이빨을 댔다.
어린애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편안하고 규칙적인 소리가 엥겔의 귀에 닿았다.


3


1.

“이리 와.” 엥겔은 팔을 뻗었다.
아이가 팔짝팔짝 뛰어서 엥겔에게 안겼다. 지나가던 성인들이 쳐다보았다. 아이가 엥겔에게 달라붙어서 목을 무는 척을 했다. 엥겔이 웃다가 정색을 했다. “거리에서는 안 돼. 아니, 안 된다니까...” 엥겔은 두리번거리다가 아이의 등을 탁탁 쳤다. 아이가 까만 눈으로 엥겔을 올려다보았다. 아랫입술을 약간 내밀고 있었다.
엥겔이 한 손으로 아이를 받쳐 안고, 한 손을 들어 아이의 덜 여문 코끝을 꾹 눌렀다. 아이가 뭐라고 칭얼거렸다. 엥겔은 아이를 내려주었다. 아이가 엥겔의 손을 잡았다. 발걸음은 아직 불안정했지만 그럭저럭 걸을 수 있었다. 엥겔이 걷자 보폭을 맞추려고 애썼다. 하늘은 새하얗게 펼쳐져 있었다.
다른 때보다 하늘이 낮고, 회색에 가깝게 희다. 어린애를 데리고 산책하기 좋은 날이다. 빛을 하늘이 가득 머금고 있느라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다. 오히려 공기 중에 있는 어떤 향기에 가까운 빛까지도 빨아올려가서 무거워지고 만다. 이런 날은 시내 중앙을 바라보면 건물들이 거꾸로 서 있는 것 같다 - 높은 건물의 꼭대기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닿아있다.
드물게 잡아내지 못한 빛이 어렴풋이 새어나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잿빛을 띈 공기. 어린애의 이마에 닿을까봐 엥겔은 몸을 구부려 아이의 머리에 두건을 깊이 씌워주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하늘이 번쩍이고 있을 때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엥겔은 거실 구석으로 가서 뚜껑을 열고 확인했다. 아직은 괜찮았다. 그러고는 서재로 가서 탈고한 원고를 탁탁 두드려 모서리를 맞추었다. 어린애가 책상 위로 답싹 올라앉아 엥겔을 바라보았다. 이제 키가 커져서 책상 위로도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엥겔이 허리를 잡아 내려놓고는 원고를 첫장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표시해 둔 부분을 손보고 나면 작업은 끝난다.
늦게 벨이 도착했다. 엥겔은 술을 준비했다. 어린애는 엥겔의 뒤를 따라다니다가, 벨을 흘끔 보고는 방으로 도망가버렸다. 벨은 자줏빛 숄을 걸치고 있었다. 엥겔은 벌써 올이 다 풀린 숄이라고 생각했지만, 가볍게 칭찬의 말을 건넸다. 벨은 응답하고는, 엥겔이 권한 자리에 앉으며 어린애의 뒷모습을 보았다. “화가 났군요.”
“화가 난 겁니까?”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빠르군요. 제가 기르던 아이는...” 벨은 입을 다물었다.
엥겔이 술을 권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벨은 엥겔의 원고가 짧지만 강한 면이 있다고 평했다. 예전의 감각이 남아있다. “회사에서는 여전히 당신이 선생 일을 그만두길 원합니다. 훨씬 좋은 조건을 권해줄 수 있답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답니까?” “소품 청탁만 받으시니...” “그것만해도 어렵습니다. 아이가 늘 따라다니니까요. 그리고 저는 아주 오래 살았습니다. 어차피 회사는 제 다음의 사람을 찾아두었어야 합니다.” “그럴 만한 사람은 한동안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벨은 엥겔을 보고 웃었다. “그렇다 해도 선생 허가를 받으신 건 신기한 일입니다. 제가 프린키에게 부탁하긴 했지만 그는 자기 위치에서는 무리일 거라고 했습니다. 나이도 있으시고, 계약 조건이 복잡하신 분이니까요.” “잘 빠져나온 거지요.” 엥겔이 웃음 지었다. 벨도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역시 두려우십니까?” “무슨 뜻이신지...” “드리기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이런, 벨. 저는 당신이 <드리기 송구한 말씀입니다만>하고 시작하실 때가 싫습니다.”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친구 분의 링카가 깨어진 후에야 선생직을 맡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엥겔은 찡그린 채 벨을 바라보았다. 벨은 미소짓고 있었다. 엥겔은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그리 두렵지 않습니다.”
벨도 빙긋 웃으며 창 밖을 보았다. 하늘이 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로등이 켜진 후에야 떠날 수 있을 모양이다. 엥겔은 마지막 남은 술을 권했다. 병 속에서도 거의 굳어버리고 얼마 없었다. 그들은 약간 텁텁해진 술을 잔에 따라 맛보았다.
어린애가 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둘을 번갈아 보고는 도로 들어가 버렸다. 엥겔은 벨의 표정을 보았다.
잠시 말이 없었다. 엥겔이 가만히 물었다. “다시 선생 일을 맡아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벨이 엥겔을 돌아보았다.
“아이를 역시 잊지 못하신 것 같으니...” “링카에는 헬라가 비치지 않습니다.” 벨이 말했다.
그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시선을 떨구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가끔씩 손가락들을 움직여보았다. 엥겔은 그가 아무 장신구도 끼고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저는 관에 들어가서 잠을 잡니다. 자려 할 때나 일어날 때나 그 육체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헬라가 비치지 않는 육체. 깨어날 때마다 지독한 느낌이 듭니다. 아이가 없다는 것... 내 아이가 없다는 느낌 말입니다. 링카에는 나 자신밖에 비치지 않는다는 것. 그 육체란 나 자신일 뿐이라는 것. 그것이 온종일 나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나는 온종일 그 시선 아래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의 빛이란 그런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게 해서, 가두어버리는 것. 나와 나의 시선 가운데에. 영혼을 가두어버리는 것. 링카에는 나밖에 없습니다. 내 아이가...” 벨이 약간 쉰 듯한 소리로 말했다. “내 아이가 보고 싶어요. 매일 밤 그렇게 생각합니다. 매일 밤, 매일 아침. 아이가 내 곁에 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밤이 되면 나는 혼자 지하로 가서 관에 들어가야 하니까요. 아이는 그 밖에서 잠을 자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녔겠지요. 아침에 제가 깨어나서 올라가 보면 웅크리고는 안절부절 못 하고 있곤 했습니다. 한번이라도 같이 잠들었으면 했습니다. 제가 잠들면 그 애가 깨워주었으면 했습니다. 링카가 아니라. 내 육체의 시선이 아니라. 나는...” 벨이 무어라 더 말하려다가, 얼굴을 가렸다.
“그건 내가 아니었습니다. 링카에 비친 건, 더 이상 내가 아니었어요. 나는 아이를 만났습니다. 내 아이가 나를 깨워주어야 했습니다. 그게 나예요. 그런데 아이가...” “성인이 되면...” 엥겔이 말했다. “한번 찾아보십시오. 제 연이 닿는 사람이 있으면 부탁하겠습니다. 학회에는 아는 사람이 몇 있습니다. 따로 기록해두고 있으니,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기억은 하지 못하더라도요.” “나는 그 애들이 성인이 되었으리라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엥겔이 몸을 약간 탁자 쪽으로 구부렸다. “대부분의 경우 십장들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몸이 훨씬 강하니까요.” “나는 링카에 타인의 육체가 비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벨이 조용히 말했다. 엥겔이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십장이 될 아이들은 여기서 충분히 타인의 헬라를 마셨고, 간혹 일터에서도 의심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그 애들이 링카를 얻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육체를 쓰는 노동이 아닌 다른 종류의 노동을 하고 있는데도 기록이 쌓일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헬라는 타인의 육체가 아니라는 거지요. 헬라라는 것이 애초에 한 종족의 증명이라는 거지요. 학회에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엥겔, 당신은 헬라를 준 다음에야 안심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제 충고가 옳았다고 하신 건 기쁩니다. 당신은 헬라를 준 다음에야 당신 자신이 성인이라고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헬라를 줄 수 있는 존재로서요. 나 또한 그랬습니다. 헬라를 발견한 후 우리 모두 그랬습니다. 종족을 약속받은 후 우리 모두 그랬습니다. 헬라를 주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성인식이었습니다. 그들의 의식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 때 종족은 실패했다고 말했습니다, 벨.” “아니, 나는 이 종족은 실패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나는 내가 속한 종족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헬라가 새로운 종족을 약속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겁니다, 엥겔.” 하고 벨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진지하게 되물으시니... 그렇다 쳐도 아직 우리의 성인식은 불완전합니다.” 엥겔이 약간 머쓱한 표정으로 물러가 다시 뒤로 기대어 앉았다. 벨도 편안히 등을 기대고 말했다.
“예전에, 나는 아이들이 우리에게 아무 답도 받을 수 없어서 울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아무것도 줄 수 없어서 울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일곱 시간동안 깨물고 헬라를 빨아들여도 우리가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힘들어 보였다고 말씀드렸지요. 우리는 힘이 들지 않습니다. 아이를 안은 채 가만히 있기나 하면 됩니다. 탐욕에 찌들고, 괴로워하고, 울고, 애쓰는 것은 그들이 합니다. 우리들은 갇혀있고, 변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아이의 곁에서 잠들고 싶지만, 내 육체가 지켜주는 곳으로 도망쳐야 합니다. 아이를 잃고, 칠 년이 지나고 나서야...”
벨이 이어 말했다. “당신은 비약이라 하실 지 모르지만, 나는 이 심정을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럴 자격은 내게도 없을 겁니다. 칠 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 애를 따라가야 했다는 걸 압니다. 그 애가 아니라 내가 버림받았다는 걸 압니다. 내가 어떤 약속을 받았는지 알고, 내가 그 약속을 놓쳐버렸다는 걸 압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옳은 벌을 받는 겁니다.”
벨이 미소지었다. “혹은 우리는 말입니다.” 엥겔이 묘한 낌새를 느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벨이 먼저 말했다. “제 링카가 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엥겔이 한참 후에 말했다. “그럼... 선생이... 되실 수는 없겠군요.” “이제 그럴 수 없지요.” 벨이 답했다. 밤이 완전히 깊어진 가운데 가로등 빛이 여기저기 동그랗게 모여 있었다. 그들은 잔을 들려 했지만, 병은 비어 있었다. 엥겔은 악수를 나누고 벨을 되돌려보냈다.


2.

벨은 아직 젊다.
엥겔은 창 밖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벨이 떠나간 후로 탁자를 정리하지 않았다. 어린애가 안절부절 못 하고 그의 곁에 있었다. 엥겔의 손에 뺨을 대거나 무릎에 와서 안기려고 하거나 하면서 보채고 있었지만, 엥겔은 가끔씩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 딱히 응하지 않았다.
벨은 아직 젊다. 그는 채 칠십 살이 되지 않았다. 벌써 링카가 탁해진다니 말이 되지 않아. 백 살을 채우지 못하고 재가 되는 성인은 드물다. 엥겔은 이제, 이디온의 계산을 기준으로 삼으면, 오백 살이 넘어간다.
엥겔은 자신의 목에 매달려 깨물어대던 첫 아이를 기억했다. 한셀의 집이었다. 어둠 속에서 아이가 입맛을 다시던 소리. 한셀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재로 변했다. 마지막 몇 주 동안은 역시 함께 할 수 없었다. 노화가 심해지면 그들은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엥겔이 처음 소식을 듣고 찾아갔을 때도, 한셀의 관은 지하에 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관을 거실에 꺼내두고 있었다. 티고네가 자살한 후로는 하루에도 스무 번씩은 링카를 확인하곤 했다고 그는 말했다. 매번 지하로 내려가서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도 링카는 갑자기 흐려지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한셀이 사라진 후로 엥겔도 관을 거실에 꺼내놓고 있다. 구석의 긴 의자 뒤편에 숨겨두었고 이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갈수록 두려움이 심해진다. 벨이 말했던 것과 같다. 지나치며 몇 번씩 관을 열어볼수록, 매일같이 더 자주 열어보게 되지만, 더 괴로워진다.
헬라를 주고 나서야 자신이 성인인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벨의 말이 맞아.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아이가 성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지. 어린애는 어린애일 뿐이야. 내가 성인인 만큼. 엥겔은 어린애의 얼굴을 보았다. 마침내 엥겔의 관심을 끌었다고 생각했는지 어린애가 조금 입을 삐죽거렸다. 벨은 링카를 증오하는 거야. 엥겔은, 아무리 가르쳐도 결코 완전한 언어를 익히지 못하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단어 하나씩을 작은 물결 조각처럼 뱉어내는 입술을. 한번 반짝인 물결은 다시 일지 않고. 벨은 그 미움 때문에 죽는 거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벨은 이백년 전의 그 자리에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당시 상황을 알지. 끔찍한 실패였어. 두 번째 시도도 실패로 드러나면 학회는 완전히 철폐되어 버릴 상황이었어. 회사가 독재하게 되었겠지. 하급 직원들은 새로 바뀐 십장제 덕분에 안심할 수 있었지. 둘이 결탁했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아. 선생들이 성공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백년동안 교육을 확대하는 걸 미루어왔지. 몇 년 전의 나처럼, 여전히 첫 번째 실패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제까지는 그렇게 두렵지 않았는데. 한셀이 사라졌지만, 당신이 남아있었어. 당신을 만난 건 행운이라고 생각했지. 나보다 몇 백 살이나 젊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이젠 정말로 두려워.
혼자 죽고 싶지 않아. 엥겔은 생각했다. 친구들이 하나씩 사라지면서 수없이 되뇌어 왔다. 혼자서 사는 것은 두렵지 않다. 글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내가 써 내려간, 아직 식지 않은 말로 인사를 하겠지. 영원히라도 글은 쓸 수 있다. 사는 게 두려웠던 게 아니다. 벨의 얼굴이 떠오르자 언젠가와 비슷한 느낌이 마음 속에서 치솟으려다가, 공허해졌다. 한셀의 목소리가 함께 떠올랐다. 그는 엥겔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건 엥겔이 써 내려간 것은 아니었지만, 훨씬 오래된 누군가가 써 내려간, 한셀이 비슷한 귀걸이와 조끼를 걸치고 비슷한 모양의 다리 위에서 되뇌인 대사에 불과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아야만 한다. 엥겔이 화가 나 있기 때문이다. 한셀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한셀이 엥겔의 뺨에 손을 댔다. <너는 아름다운...>
<너는 천진하고, 아름답고, 앳된... 너는 갓 태어난 성인이야... 어른이라는 종족이야> 한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엥겔이 낮게 속삭였다. “나는,” 하고 그는 어린애의 볼을 건드렸다.
어린애가 고개를 흔들흔들하며 손가락을 자기 볼에 눌렀다 말았다 했다. “벨의 말은 맞지만, 내가 두려워한 건 그게 아닐 거야. 나는 내가 성인일까봐 두려워했다고 생각해. 늘 죽는 게 무서웠어. 혼자 죽는 게 무서웠어. 성인이 아니라면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었겠지. 그들이 있는 곳으로.” 어린애가 엥겔의 무릎으로 뛰어오르려고 눈치를 보았다. “너처럼 말이야.” 하고 엥겔은 왠지 투덜대는 듯한 투로 말하며 어린애의 뺨을 꾹 찔렀다.
잔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술이 말라붙어 있던 자리부터 천천히 금이 가서, 곧 깨어져버렸다. 마개도 반쯤 부스러져 있었다. 입은 옷의 어깨 부분이 헤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한 방향으로. 엥겔은 돌아섰다. 어린애가 따라오려다가 그가 거실 구석으로 가는 걸 알고는 체념해서 가만히 있었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자 어린애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보았다. 엥겔이 더 이상 빛을 내지 않는 조각들을 밟고 서 있었다.
엥겔이 이 쪽으로 걸어오려다가 찡그렸다. 어린애는 그의 발에 생긴 변형을 보았다. 어린애가 갸웃거리고 있자, 엥겔은 더 걸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관 뚜껑을 닫고, 그 위에 걸터앉은 채 아이를 불렀다. “이리 와.” 어린애는 달려와서는, 비로소 엥겔의 무릎에 폴짝 뛰어올랐다. 엥겔의 팔이 등을 감았다. 엥겔은 뭐라고 속삭였다. 한동안 어르고 재촉하다가, 어린애가 비로소 엥겔의 목에 이빨을 댔다. 엥겔은 눈을 감았다.
엥겔은 몇 번인가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냈지만, 곧 잠잠해졌다. 어린애는 이빨을 떼고 엥겔을 내려다보았다. 팔이 풀려나가고 엥겔은 관 위에 바로 누웠다. 어린애는 몇 번 더 깨물어보았다. 헬라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목덜미에 깊고 좁은 변형이 생겨 있었다. 어린애는 엥겔의 어깨를 흔들며 깨우려고 해 보았다. 엥겔의 몸이 재가 되어 흩어졌다.
어린애는 멍하니 있었다. 처음 겪는 감각이 그를 덮쳐왔다. 어린애는 눈을 깜박거렸다.
잠이 쏟아졌다.


3.

어린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었다. 주변은 어두웠지만, 어린애는 쉽게 사물을 분별할 수 있었다. 그는 관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잿가루가 옷에 묻어있었다. 어린애는 희미하게 기침을 했다.
머리가 멍했다.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어떤 목소리가 속삭인 기억이 났다. 그저 소리의 조각 같았는데, 천천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데려가 줘> 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어린애는 잠시 자기 가슴 밑을 누르고 있었다. 깊고, 규칙적인 고동이 전해져왔다.
어린애는 갸웃하며 시선을 옮겼다. 그는 관 위에 놓인 것을 바라보았다. 잿더미 속에서, 그 물체를 손에 쥐었다가 바로 놓쳐버렸다. 짓찧기는 느낌과 함께 손에 변형이 남았는데, 울긋불긋하게 변해서 매캐한 냄새를 내면서, 한참을 기다려도 사라지지 않았다.
“엥겔.” 하고 어린애는 속삭였다.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엥겔.” 그는 자신의 가슴을 짓눌렀다. 타인의 헬라가 고동치고 있었다. 그는 지칠 때까지 울었다. 가끔 정신을 차리고는 관 위의 물체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어린애는 마침내 일어나서, 엥겔의 서재 쪽으로 갔다.
그는 창가의 탁자를 지나쳤다. 환한 밤이었다. 잔 속에 맑은 술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서재의 책상 위에 종이칼이 놓여있었다. 날이 은빛을 띄고 반짝거렸다. 어린애는 서랍을 뒤져 적당한 주머니 하나를 찾아냈다. 잡아당기면 끈이 제법 길게 늘어났다. 그는 가시지 않은 손의 통증을 달래며 관으로 돌아가, 보석을 주머니에 넣고 목에 걸었다.
얇은 천일 뿐인데, 손으로 쥐어도 이제 아무 느낌이 없었다. 단순한 양감만 느껴졌다. 어린애는 가슴께에 놓인 보석을 감싸쥐었다.
그는 자신이 이 모습 그대로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의식을 치른 것이다. 무엇도 그를 해할 수 없고, 그를 변하게 할 수 없으리라. 보석 외에는. 그는 가슴 위에 놓인, 사라진 자의 죽음을 감싸쥐었다. “나는, 당신은, 결코.” 어린애는 속삭였다. “외롭게 죽지 않아.”
그는 관 앞에 무릎을 꿇고 잠시 머물렀다.


4



“그 둘이 내 종족의 최초의 조상이라고 알고 있어.” 빌은 자기 가슴의, 보석이 있던 자리를 더듬었다. “한 사람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름도 없었으니까. 엥겔이라는 이름은 남아있지만, 사실 이 발음이 정확한지도 잘 모르겠어. 그때 글자를 읽는 방식은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 거라고 해.” 큰애도 어느새 이 쪽으로 다가와 있었다.
큰애가 일어서면, 빌보다 벌써 키가 조금 더 크다. 사지도 훨씬 튼튼하다. 잘 자라고 있는 거야. 빌은 미소지었다. “그럼 빌의 보석은?” 하고 둘째 애가 물었다. “아아,” 빌이 가슴언저리를 더듬던 손을 내렸다. “링게에게.”
“응?” “그리고 너희들이 태어났지.” 둘째 애가 갑자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럼 우리가 보석이야?”
“그럴 지도.” “그럼 빌을 건드리면 안 되는 거야?” “지금까지 잘만 안기고 놀았잖아.” 빌이 또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 너희들은 다른 애들이라니까. 보석은 링게가 삼켜버렸어. 너희들은 링게가 낳은 거야.”
빌은 앉은뱅이 다리를 하고 있다가, 무릎을 끌어당겨 앉으면서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는 이민족들과 싸우던 것을 기억했다. 아이들은 숲에서 나온다. 그러면 빌의 동족들은 몇 명씩을 데려와서 헬라를 주고 키웠다. 그러다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의 목에 물려받은 보석을 걸어주었다. 보석을 줌으로써 그들은 영원한 죽음을 잃어버린다. 그러면 그들의 몸에서 불멸은 빠져나간다.
보석은 아직 아이의 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보석을 목에 건 채 아이는 여느 때처럼, 자신을 키워준 사람의 목을 물어뜯는다. 키워준 사람이 그렇게 죽고 나면 아이는 심장에 타인의 헬라를, 목에는 아이 자신의 몸을 태울 보석을 물려받게 된다. 나머지 아이들은 보석을 물려받은 형제가 맡아 키우게 되거나 다른 보석을 가진 자에게 물려진다. 그들은 계속해서 헬라만 마시며 살 수도 있고, 언젠가는 보석을 물려받을 수도 있다.
이민족들도 숲에서 나왔다. 그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며 과연 같은 종족인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비슷한 이목구비와 얼굴이 있었고, 짐승과 달리 털이 없었으며 날씬한 두 다리로 걸어다녔다. 손가락과 발가락 수도 같았고, 입술이 붉고 눈의 색이 다양한 것도 같았다. 그들도 헬라를 마시면 자라나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몸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다. 빌의 동족들은 그들에게 보석을 물려주기를 기피했다. 그들에게 헬라를 주기도 두려워했다. 결국 그들은 대부분 빌의 동족들과 비슷한 체형일 때에, 더 이상 변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었다.
그들은 언젠가부터 따로 동아리를 지어 살기 시작했다. 종국에 그들은 아예 숲에 숨어살기 시작했다. 숲은 가장 어린 아이도 눈을 다치지 않을 만큼 늘 어두웠고, 체온과 유사하게 따스했으며, 거기에서 자기와 닮은 아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숲은 모든 아이들이 태어나는 곳이다. 그 좋은 환경도 태어나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려는 이유가 아니라면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 빌의 동족들 중 발탁된 몇 명이 통제하러 갔지만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빌의 동족들은 그 <다른 아이들>이 아예 나뭇가지를 뚝뚝 꺾어내고 있는 걸 목격했다. 그들은 아마 모여 살기 위해 거처가 필요했을 것이다. 숲에서는 관의 시대 유물들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족들은 빠져나와 보고했다.
실제 이종족들을 처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빌의 동족들로서는 숲에 들어가서 멋대로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그들은 숲 자체를 인질로 잡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보석을 도난 당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빌의 동족들은 결의하게 되었다.
힘으로 보면 빌의 동족들이 유리한 싸움이었다. 그들은 장성한 상태였고, 더 강했고, 보석을 가진 자들은 다칠래야 다칠 수도 없었다. 보석을 빼앗기지 않는 한. 이종족은 어렸고, 쉽게 해를 입었고, 서로 헬라를 나누기는 했지만 웬만큼 자라기도 전에 대부분 죽었다. 숲의 이종족은 자기들 중 강한 자를 선별해서 약한 자의 헬라를 몰아주는 방식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우두머리가 된 이종족 아이는 일단 자신이 나가서 옷을 훔쳐오고, 그 훔쳐온 옷을 다시 자기들 중 아주 어린애들에게 입혀 내보내서 빌의 동족 아이들 틈에 섞이게끔 하기도 했다. 보석을 빼앗아 올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실제 도난 당한 경우 빌의 동족들은 숲의 일부를 불사르다시피 하며 거처들을 찾아냈다. 이종족들을 만나게 되면, 보석을 그저 빼앗아간다고 불멸을 얻는 게 아니라고 수없이 설명하려고도 해 보았다. 그러나 숲의 어린 이종족은 결코 언어에 눈을 뜨지 못했다.
빌은 기억하고 있다. 여러 곳에 불을 놓고 연기로 몰아간 결과, 이종족의 거처를 찾아냈다. 한 명이 자신의 나뭇가지 집에 웅크리고 보석을 꼭 쥐고 있었다. 보석을 달라고 하자 그 어린애는 삐적 마른 몸을 떨면서 빌의 동족들을 한 명씩 번갈아 보았다. 빌을 포함해서 다섯 명이 그 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린애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갑자기 입을 벌리고 보석을 삼켜버렸다. 어린애의 몸이 변했다.
그 애는 한때 이종족들이 동족으로 간주되어 헬라를 얻어 마시며 자랐을 때와도 비슷한 모양으로 변했다. 키는 빌보다 조금 더 컸다. 가슴 양 쪽이 부풀어오르고, 이목구비는 비슷한 키의 빌의 동족들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 보였다. 당황한 동족들은 산 채로 배를 가르자고 했다. 뱃속에서 보석은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어린애들이 죽을 때 그렇듯이, 그 애도 순식간에 딱딱하고 하얗게 변해버렸다.
숲의 거처들에서 여러 번을 싸웠다. 큰 싸움이 하루가 멀다하고 있었다. 보석을 빼앗기는 경우는 여전히 종종 발생했다. 먹어버리는 이종족 아이들도 가끔 있었다. 어느 때부터 알아차렸는지 모르겠다. 빌은 그가 살던 도시에서 처음으로 의식이 바뀌었을 때를 기억했다. 보석을 가진 자들 중 다수가 드디어 아이들을 키우는 대신 아이들을 낳자는 데에 합의를 보았다. 오랜 싸움으로 숲이 망가져, 그때 즈음해서는 숲에서 태어나는 아이 수가 극히 적었다. 보석을 가진 잉에가 융카 어린애 앞에 섰다. 잉에는 사죄하는 의미에서 융카 어린애 앞에 무릎을 꿇는다. 어린 융카는 손을 뻗어 잉에의 보석을 거두어 가 목에 삼킨다.


빌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발이 그새를 못 참고 둘째 애의 머리를 꾹꾹 눌러대고 있었다. 빌은 둘을 떼어놓았다. 라발이 못이기는 채 손을 놓았다. 작은 애 둘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가 물었다. “그럼 빌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응?” “보석이 없잖아. 링게가 먹어버렸다면서.” “난 곧 죽어.” 빌이 말했다. “다를 바 없어. 보석을 아이에게 내어준 다른 동족들이나 마찬가지지. 링게는 오래 살아. 나보다 이제 훨씬 크잖아. 너희들을 낳으면서 더 강하게 자랐지.”
너희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빌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에는 둘째 애가 라발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조용한 애지만 한번 화가 나면 집요해진다. 라발이 얼른 피해서 빌의 옆자리로 왔다. 빌이 둘째 애를 쳐다보면서 손을 들어 보였다. “나중에 해라, 얘야. 지금은 잠자리에 들고...” “링게는 죽지 않는 거야? 예전에 빌이 그랬듯이?” “아니, 너희들이 다 자랄 때 즈음이면 아마 죽을 거야.”
빌이 말했다. “너희들은 - 그러니까 이제 너희 종족은 말이야. 잉에와 융카로 된 종족은 수명이 짧아. 자라는 것과 노화가 구분되지도 않고, 다치는 게 일상이고, 이상하게 육체가 변형되기도 하고, 육체의 일부를 영영 상실하기도 해. 그건 내 옛 기억에 비추어 보면 이상한 일이야. 보석의 시대의 입장에서 보건 관의 시대를 생각해보건 그래. 이 종족은 한 번도 죽음을 얻지 못해. 그러니 불멸도 얻지 못해. 성인식을 거쳐 생사가 분리되지 않아. 종족의 계승이란 죽음을 계승해주는 게 아니라, 그 애를 낳아놓는 게 전부란 말이야. 자신의 링카를 가지지 못하고, 링게의 품 속에서 잠을 잤지. 덕분에 너희들은 죽음이 예정된 존재로 태어나서, 누구도 성인이 되어보지 못하고 모두가 죽어가면서 살아가. 묘한 일이야. 하지만 그래서 안심했어. 보석이 보이지 않게 되어버려서 불안했지만... 너희들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겠지.”
“뭘?” 작은 애들이 눈을 깜박이며 쳐다보았다. 빌은 창 쪽을 올려다보았다.
빌은 자기 가슴 한 쪽에 손을 댔다. 작은 애가 갸웃하며 빌의 얼굴을 살폈다. 빌은 눈을 뜨고, 그 애에게로 몸을 기울여 이마에 입술을 닿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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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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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6.06 21:05 댓글 수정 삭제
    다 읽었습니다. 아. 어려워요.
    이 글에서 읽어 내야 하는 것이 어느 부분인지 모르겠어요. "경계"라는 분류는 무엇과 무엇의 경계인가요. 제 취향이 "경계"라는데,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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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xk160 06.06.07 01:38 댓글 수정 삭제
    와와. 댓글 달렸다고 좋아하며 클릭했습니다. :D
    글쎄요. '경계'가 뭘까요? 이 글은, 처음부터 특정 장르의 글을 의뢰받은 게 아니라 편집진들이 나중에 읽어보시고 장르를 정해주신 거라... 나중에 slip stream정의를 찾아보긴 했는데, 더 모르겠네요. 사실 이 글은 '판타지' 정도면 안전하게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다른 글에 대해서도 제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장르의 느낌이 든다고 하신 분들이 계셔서, 궁금하긴 해요. 제가 장르를 많이 읽지 못해서 모르는 면도 많겠지만... 도움이 안 되는 답글이군요. 그런데 사실 저도 이 글이 왜 경계인지, "경계 소설"이란 어떤 기준으로 분류되는 것인지 궁금했던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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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6.07 09:15 댓글 수정 삭제
    진짜네요. slip stream을 찾아서는 더 알 수 없네요.
    음. 이 글에 대해서 다시 곰곰이 생각을 해 보고 있는데요, 우선 대단히 지적인 글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건 단점이 아니라 장점일 텐데, 인간에 대한 탐구를 중간에서 멈추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쯤에서 "하지만"이 나와야 하는데요, 음... 대단히 정교하게 가다듬은 설정을 읽으면서도 이 설정, 이 세계관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읽어내는 것은 까다로웠어요. 정답을 작가 본인에게 가르쳐달라고 할 수는 없지만 궁금해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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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xk160 06.06.07 23:07 댓글 수정 삭제
    헤헤. 근데... 설정들 재미없나요? 사실 그냥 생긴 그대로 흥미로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하긴 늘 그게 먹히지 않으니 슬퍼해야 하는 걸까요!) 굳이 의미라든가 상징같은 거 따지지 않구요. 설정 자체가 재미없기 때문에 따지게 되는 걸까 뭔가 글이 압박을 넣는 면이 있는걸까...orz 아아, 스토리랑 결합되지 않는 듯이 느껴져서? 그렇다면 정말 슬픈데.

    읽어주시고, 생각해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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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6.08 09:19 댓글 수정 삭제
    헤헤헤. 좌절하지 마시고. 좋은 글이니까요. 괜히 남의 글에다 대고 이상한 소리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지잖아요.
    뭐 이런 소리예요. 밥 대신에 잔소리를 들어야 배가 부른 세계를 설정했다고 가정해 봐요. 그러면 아침에 엄마가 애를 붙들고 잔소리를 마아아아악 해 대는 장면이라든지, 점심때 도시락 가방에서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엄마가 졸린 목소리로 정성스럽게 싸 준 잔소리가 마아아아악 흘러나오는 장면을 쓸 수 있잖아요. 거기에서 "풍자"가 나오지 않을까요. "엄마의 잔소리를 밥처럼 먹고 산다." 잔소리 -> 내리사랑. 하지만 먹기 싫은 반찬.
    뭔가를 비틀었을 때는 작가가 그 비틀림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가 궁금해져요.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요. 그걸 알 수 없으면 독자는 뭔가를 놓치고 읽었다고 생각하게 되고. 제가 지금 그래요.
    하지만 글이 꼭 그래야 한다는 건 제 생각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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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unn 06.07.02 10:25 댓글 수정 삭제
    으... 쥐섹님 글은 모니터로 읽기 힘들어요. 역시 종이에 프린트해서 봐야 할 듯 ㅠ_ㅠ (덧글이랍시고 이런 엉뚱한 소릴 하고 도망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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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unn 06.07.22 16:23 댓글 수정 삭제
    -> 나중에 책으로 읽고 다시 댓글. 재미있습니다! 어딘가 '밤 너머에'가 연상되기도 하는데요, 굳이 말하자면 그쪽은 완전히 닫힌 세계였고 마지막에 '정말 이렇게 닫힌 채로 끝인가?'라는 의문을 던졌다면 이 글은 좀 더 열려 있네요 0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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