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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림 낙오자

2005.02.26 12:3202.26

  메이든은 하얀 기둥에 얼굴을 기댔다. 뺨에 닿는 서늘함이 오싹하고 상쾌했다. 밤은 어슬렁어슬렁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약속의 시간은 더딘 듯 하면서도 빠르게-그러니까 정확히 규칙적으로- 오고 있었다.

  메이든은 긴장을 풀기 위해 팔다리를 쭉쭉 폈다.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마을의 처녀들 모두가 치르는-가끔 자격을 얻지 못한 <불능자>를 제외하고- 시험이다. 메이든이라고 특별히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메이든은 최연소 자격자로 시험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축하해, 메이든. 이번 시험 자격자 명단에 네가 올랐어. 최연소야!"

  보름 전, 시스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메이든은 뛸 듯이 기뻤다.

  "정말요? 믿을 수가 없어요! 아직 한참 더 있어야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례적인 일이지만, 장로회가 결정했어. 다 네가 열심히 한 덕이지. 축하한다."
  "고맙습니다."

  메이든은 뺨을 붉혔다. 평소라면 겸손을 떨었겠지만 지금은 너무 기뻐서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시스의 다음 말만 듣지 않았다면, 메이든은 다음날 아침까지 그 기분으로 있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이그노도 함께야."
  "에?"

  손가락 끝까지 차 올랐던 흥분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메이든은 귀를 의심했다.

  "저와… 이그노요?"

  어느 누가 됐더라도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겠지만, 하필이면 이그노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 너희 둘이야."

  시스는 속도 모르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로서는 최연소 자격자가 자기 밑에서, 그것도 둘이나 나왔다는 것만으로 가슴 뿌듯한 얼굴이었다.

  "고맙습니다."

  메이든은 간신히 웃으며 인사했다.



  "어째서! 하필이면 그 많은 동갑내기 중에 이그노람! 갠 가슴만 큰 멍청이잖아!"

  집에 돌아오자 마자 메이든은 벽에 대고 화풀이했다. 메이든은 정말로 똑똑했고,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건 공짜는 없다. 그렇게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는지는 메이든만 알았다.

  메이든이 최연소 자격자에 뽑힌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그노는 아니었다. 그 앤 아직 버찌 열매를 따먹고, 나비를 좇다 지루해지면 아무렇게나 풀밭에 누워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게 전부인 멍청이였다. 이그노에게 노력이라는 게 한 점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았으리라.

  "후….."

  메이든은 치미는 분을 삭였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느라 체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여유가 있다면 이그노에게 본때를 보여줄 방법을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좋은 소식을 듣자고 왔는데, 어째 분위기가 흉흉하구나."

  메이든은 깜짝 놀랐다. 엄마가 문간에 서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너답잖게 잠그는 걸 잊었니?"

  엄마는 양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바구니를 문 옆에 내려놓았다.

  "어쩐 일이세요? 이 밤에?"

  메이든은 상냥하지도 차지도 않게-마치 남처럼- 엄마를 맞았다. 엄마도 새삼 많은 걸 기대하진 않았다.

  "웬일이긴? 축하하러 왔지. 오래 안 있으마. '파종'에 필요할 몇 가지 좀 챙겨 왔다."
  "이미 다 준비했어요."

  메이든은 엄마가 바구니를 풀기도 전에 밖으로 삐죽 솟은 꽃삽 손잡이와 물뿌리개 주둥이를 보고 안에 뭐가 있는지 짐작했다.

  "…그래? 그럼 찬 통만 두고 가마. 금줄 기간 동안 먹을게 없으면 곤란할 테니."

  엄마는 무안하게 허공에 팽개쳐졌던 손을 다시 바구니로 가져갔다.

  "오늘 시장에 다녀왔어요. 먹을 건 넉넉해요."

  메이든이 재빨리 말했다. 너무 빨라서 의도가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넌 여전히 빈틈이 없구나."

  엄마는 한숨 쉬었다.

  "엄마가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

  메이든은 씁쓸히 웃었다. 그들은 이상한 모녀였다. 메이든은 단 하나뿐인 딸이고 엄마의 후계자였지만, 둘은 함께 살지 않았다. 그래 봤자 열 걸음 건너 옆집이었지만, 그들 사이엔 그 열 걸음보다 훨씬 긴, 십 여 년을 꼬박 걸어야지 닿을 듯한 거리감이 있었다.

  "그래, 그럼 아무 것도 필요 없을 테니 가겠다. 뭔가 도울 일이 있으면…. 아니다 당연히 없겠지."
  "조심해서 가세요."

  메이든은 엄마를 마중하고 문을 닫았다. 그러나 엄마의 눈엔 메이든이 배웅이 아니라 문을 닫기 위해 나온 것처럼 보였다.



  "규칙은 잘 알고 있지?"

  시험 바로 전날, 시스가 메이든과 이그노를 앉혀 놓고 물었다.

  "말하지 말 것, 손 만지지 말 것, 포옹하지 말 것, 키스하지 말 것."

  둘은 앵무새처럼 지저귀었다.

  "첫 번째를 가장 조심해야 해. 그러면 다음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왜요? 말이 가장 쉬운데요?"

  메이든이 물었다. 시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가장 쉬우니까다. 말은 '위험'해. 말은 '마력'을 갖고 있어서 소통하게 하고, 위험 속으로 끌어들이지. 자, 정리할까? 마지막으로 가능하면 빨리 '씨앗'을 받아 빠져 나올 것. 이상이다."

  하루 반나절 동안 시험에 대한 모든 지도를 마친 시스는 자리를 정돈했다. 그때 불쑥 이그노가 물었다.

  "왜 키스하면 안되죠?"

  메이든은 기가 막혔다.

  "너 바보니? 몰라서 물어? <그자들>은 괴물이야, 서쪽의 나락에서 온 흉측한 괴물. 지저분한 털투성이에 냄새가 고약하고, 성질도 사납고 괴팍하다고. 거기다 흉폭하기까지 하다고 적혀 있잖아. 설마 책도 안 봤어? 아니면 괴물과 키스하고 싶을 정도로 취미가 독특한 거니?"

  숨도 안 쉬고 쏘아붙인 메이든은 스스로 떠올린 상상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 아냐, 그러니까 그런 규칙이 있잖겠어?"

  이그노는 메이든의 설명 따윈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고 천연덕스레 반문했다. 메이든은 할말을 잃었다. 뭔가 썩 옳지는 않은데 딱 그른 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답. 치명적인 독이 있으니까. 됐니, 이그노?"

  시스가 대신 대답했다.

  "그럼 유혹자는요? 샐린네 이모가 그러는데요, 유혹자들은 정말로 예쁘데요. 보석처럼 빛나는 머리에 눈도 파랗고, 아무튼 한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대요. 그런 자들이라면 당연히 만져 보고 싶겠죠? 그래서 그런 규칙이 생긴 거죠? 그렇죠?"

  스스로의 말에 홀려 황홀해 하는 이그노에게 시스가 엄히 말했다.

  "이그노,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야. 유혹자 따윈 없어."
  "그럼 <낙오자>는 왜 생기는데요? 프린이 그러던 걸요, 우리가 낙오되는 건 유혹자들 때문이라고."

  메이든은 가슴이 철렁했다. 여기서 <낙오자>란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시스의 표정도 굳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라 이그노. 자, 그만 둘 다 가서 쉬도록 해."
  "정말로, 유혹자가 없나요?"

  이그노는 끈질겼다. 메이든은 얼른 가서 쉬고 싶었지만 이그노가 시스를 귀찮게 하는 통에 번번이 때를 놓쳐 버렸다. 정말 눈치코치골치인 계집애였다.

  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없어. 만약 있다면… 아니, 아니다. 그만 가거라."

  메이든은 시스가 삼킨 말이 궁금했지만 질문할 틈을 이그노에게 가로채였다.

  "시스는… 어땠어요? 멋졌었어요?"

  메이든은 이그노가 정말 궁금했던 건 유혹자 따위가 아니라 바로 그거였다는 걸 알았다. 정말 이그노다웠다.

  "나도 괴물이었어. 이만 끝내자. 내일 너희는 어렵고 중요한 시험을 치러야 하니까 일찍 가서 쉬는 게 좋아. 꿀을 나눠주마, 자기 전에 먹어라. 마음을 안정시키고 푹 잘 수 있게 해줄 거다."
  "감사합니다!"

  그렇게나 끈질기게 굴었던 이그노는 꿀단지를 받자마자 희희낙락해서 돌아갔다. 메이든은 멀어져 가는 이그노의 발소리에서 콧노래 소리를 들었다.

  "바보 무뇌충."

  메이든은 속으로 투덜댔다. 시스가 피식 웃었다.

  "글세, 이그노가 멍청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메이든은 생각이 입밖으로 튀어 나간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아, 그게 아니라…"
  "괜찮아. 메이든. 넌 너무 눈치를 보는구나. 하고 싶은 말쯤은 해도 돼."

  시스는 메이든 몫의 꿀단지를 내밀었다. 메이든은 그걸 받고,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엄마는…… 실패자였어요. 저도 그렇게 되면 어쩌죠?"

  시스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 말은, 좀 당혹스럽구나 메이든. 엄마는 실패하지 않으셨어."
  "아뇨, 엄마는 실패했어요. 그자들을 넷이나 낳았으니까요. 가끔 생각해요. 하나도 낳지 못하거나, 다섯이나 낳았는데, 다섯 모두 그자들이면 어쩌지? 하는."

  메이든은 담담한 목소리를 내는데 꽤 힘이 들었다.

  "그럴 리 없어, 넌 지금까지 잘 해 왔고, 앞으로도 분명히 잘 해낼 거야.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엄마는 실패자가 아니셔. 네가 있잖니?"

  메이든은 그러니까 더더욱 실패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만약에 이번에 성공하지 못해도, 자신을 너무 다그치지 마라. 메이든. 이건 과정에 불과해. 다음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설사 그자가 나온다 해도, 황금 열매를 독차지하는 셈이니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

  시스가 말했다. 메이든은 그 말을 이해했다. 실은 시스가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시스도 무서웠어요?"
  "그래. 하지만 성공했으니까 괜찮아. 너도 그렇게 될 거다. 다만 조심해, 메이든."
  "뭘요?"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메이든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녀는 시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짐작은 옳았다.

  "너를 보면, 독서가 생각이 난다."

  시스는 말해 놓고 얼른 손을 저었다. 독서가는 낙오되어 죽었다.

  "아니다. 내가 괜한 소릴. 홍반을 봐주마. 아프진 않니?"
  "참을 만 해요."

  메이든은 앞섶을 풀어 가슴 아래에 멍울진 홍반을 보여 주었다. 오므린 손등처럼 소복이 부푼 젖가슴 아래 새빨간 피멍이 눈을 찔렀다. 시스는 자기가 홍반을 받을 것처럼 욱신한 얼굴이었다.

  "그래, 착한 애다. 메이든. 부디 성공을 빈다."

  그게 바로 어젯밤 일이었다.


  메이든은 저녁 바람에 차게 식은 손을 가슴에 넣었다. 달군 바늘로 후비는 듯한 홍반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시간이 거의 다 됐을 텐데 서쪽 지평선엔 아직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자>는 늦을 모양이다. 빨리 끝내고 새벽 전에 집에 가 몸을 누이고 픈 메이든은 애가 탔다. 너무 늦는 건 좋지 않다. 적어도 오전 중에는 돌아가야지 서늘한 때에 알맞게 파종을 할 수 있었다. 저녁이 되면 씨앗이 너무 건조해져서 싹을 틔우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럼 지금까지의 노력은 모두 헛게 된다. 그건 절대로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메이든은 성공하고 싶었다. 시스가 말하는 시험에 성공이 아닌, 인생 전반에 걸친 성공을 하고 싶었다. 다섯 명의 후계자만 있으면 사회적 성공은 보장되었다. 그러나 메이든은 다섯 이상의 후계자와 그에 걸맞는 각각의 집, 그리고 늙어서 시험을 치를 수 없을 때도 충분히 먹고살 황금까지 원했다. 시스가 들으면 뭐 그렇게 까지 하느냐고 노후는 후계자들이 책임져 주는 거라고 하지만, 그건 바램일 뿐이다. 아무도 그녀의 인생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메이든은 결국엔 혼자라는 걸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엄마를 보고 알았다.

  엄마에겐 메이든이 유일한 후계자였지만, 사이가 너무 나빴기 때문에 같이 살기를 포기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엄마도 메이든도 잘 알았다. 다행히 엄마에겐 여생을 살고도 남을 황금이 있었다. 그건 실패의 증거이기도 했지만 덕분에 먹고살기는 어렵지 않았다.

  엄마는 다섯 명이나 아이를 가졌지만 그 중 넷은 애석하게도 <그자들>이었다. 덕분에 황금은 남아돌았지만 금보다 후계자 쪽이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가지는 터라 엄마는 가까스로 탈락만 면한 거였다. 메이든은 그런 엄마를 닮았을까 봐 겁이 났다. 그러나 한편으로 안심이 되기도 했다. 엄마는 비록 실패했지만 <낙오자>가 되진 않았으니까.

  낙오자는 실패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가슴의 '홍반'-신성한 자격-을 얻지도 못한 불능자들과는 달랐다. 실패-<그자들>을 낳는 것-나 실격-열매 가 열리지 않은 것-과도 전혀 달랐다. 낙오자들은 <신성한 자격>을 갖고도, 시험을 치르기를 거부한 자들이었다. 그들에겐 더 이상의 아이도 황금도 기대할 수 없었다. 실패와 실격은 다음 기회가 있지만 낙오는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만회의 기회는 없다. 아니, 그들은 만회의 기회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게 더 무서운 일이었다. 그들은 마치 정신병자나 미친 사람처럼 굴며 끝없이 추락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메이든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메이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낙오자를 딱 한번 보았다. 그녀는 뒷집의 독서가였다.


  독서가는 메이든 네 뒷집에 살고 있었다. 무척 좁은 단층집이었는데, 그나마 벽마다 책으로 꽉꽉 차서 숨 틀 곳조차 없었다. 그래도 독서가는 잘 살았고, 메이든도 그 집이 좋았다.

  햇볕이 드는 날, 보얗게 떠오른 먼지 때문에 꽉 잠긴 목과 재채기도 두꺼운 갈피 속에 흥미진진하게 벌어지는 사건으로부터 메이든을 떼어놓지 못했다. 넘실대는 햇빛과 오래되어 바삭한 종이 냄새는 환각처럼 아름다웠다. 그녀는 그 냄새가 좋았다. 어느 곳에 있어도 그 냄새를 떠올릴 수 있었다.

  독서가는 지금까지 여섯 번의 시험을 치렀었고 네 명의 아이와 두 명의 <그자들>을 낳았다. 그녀의 인생은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아무도 그녀가 낙오자가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낙오자는 메이든처럼 처음 시험을 치르는 자들 중에 나올 가능성이 가장 높았고 회를 거듭할수록 안정기에 들었다. 그런데 뒷집의 독서가는 일곱 번째의 시험을 거부해서 낙오자가 되었다. 그건 누구도 짐작치 못한 일이었다. 메이든도 몰랐다, 독서가가 낙오자가 된 줄은.

  처음, 금줄로 접근금지 표시가 쳐졌을 때도 메이든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드나들던 장소가 금지되었다는 것에 충격 받았을 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속사정을 알기에 메이든은 너무 어렸다.

  '거기 가면 안돼.'

  독서가의 집에 가는 걸 용케 알아챈 엄마가 현관에서 그녀를 붙잡았다.

  '왜요?'
  '그 사람은 아파. 그러니까 네가 가서 귀찮게 하면 안돼.'

  메이든은 본능적으로 엄마가 거짓말한다고 느꼈다.

  '싫어요.'
  '엄마 말들어라, 메이든.'
  '싫어요, 아프니까 더 가봐야죠. 혼자 사시잖아요.'
  '내가 가보마.'

  메이든은 엄마가 절대로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엄마는 독서가를 싫어했다.

  '엄마보다 저를 더 좋아해요. 그러니까 제가 가면 더 빨리 나을 거예요.'
  '메이든!'

  메이든은 엄마를 밀치고 뛰어나갔다.

  독서가는 항상 '꿈의 방'에 있었다. 책이 겹겹이 가득한 비좁은 공간 두 사람-한 어른과 한 아이-이 다리를 쭉 펴고 앉으면 꽉 차는 그곳을 메이든은 '꿈의 방'이라고 불렀다. 그곳에서 독서가는 여느 때처럼 책을 읽고 있었다.

  '어떻게 왔니? 너희 엄마가 못 오게 했을 텐데?'

  메이든을 본 독서가는 놀란 눈치였다. 반쯤 걷힌 팔엔 홍반이 번져서 끔찍하게 짓물러 있었다. 메이든은 깜짝 놀랐다.

  '아파요? 왜 그래요?'
  '괜찮아. 너희 엄마가 아무 말씀 안 하시던?'

  독서가는 얼른 소매를 내렸다. 메이든은 안타까웠지만 더 물을 수가 없었다.

  '꽃을 가져 왔어요.'

  메이든은 붉은 색과 황금색이 뒤섞인 아름다운 꽃들을 좁은 방 구석구석에 장식했다. 독서가는 놀라고 기뻐했다.

  '정말 예쁘다. 아직 꽃이 피기에는 이를텐데?'
  '제가 동쪽 숲에서 따온 거예요. 거긴 아주 많아요.'

  순간 독서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동쪽 숲?'
  '네.'

  메이든은 독서가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거기 가면 안돼. 아무도 안 말해 주던? 두 번 다시 가지 마라. 그 꽃은 당장…'

  독서가는 꽃병에 꽂던 꽃을 뽑아 내치려다가 도로 꽂았다.

  '아니다. 그래, 잘 받으마. 고맙다. 대신 두 번 다시 그 숲에 가지 않는다고 약속해라.'
  '왜요?'
  '그곳은 낙오자들의 숲이야. 네가 거기 간 걸 알면 너희 엄마도 기꺼워하시지 않을 거다.'
  '낙오자가 뭔데요?'

  메이든의 반문에 독서가는 움찔했다. 그녀는 메이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그냥 손을 내렸다. 메이든은 그게 무척 서운했었다.

  '나중에 알게 될 거다. 지금은 때가 아니구나. 그만 가라. 어머니가 마중 나오셨어.'

  독서가가 가리킨 곳을 보고 메이든은 몸을 떨었다. 엄마가 창 밖에 서 있었다. 메이든은 독서가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독서가는 외면하지도 어떤 조치를 취해 주지도 않았다. 결국 메이든은 털 깎인 고양이처럼 고분고분 그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독서가는 메이든을 배웅해 주지 않았다. 문 앞에서 만난 두 어른 여자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엄마는 메이든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머리채를 휘어잡고 질질 끌고 갔다.

  그날, 메이든은 태어나서 맞은 매를 전부 합한 거의 두 배로 얻어맞고 벽장에 갇혔다.

  '흐…엉…'

  메이든은 장속에서 짐승처럼 울었다. 아픔 반 설움 반이었다. 어렸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다시는 독서가와 만나지 못하리란 걸, 그게 엄마나 이 벽장 때문은 아니라는 걸.


  장안에 갇힌 동안 메이든은 요동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나무를 찢고 지붕을 할퀴는 바람은 여자의 비명소리처럼 섬뜩했다.

  메이든은 어둠 속에서 날을 곱씹었다. 독서가를 볼 수 있는 날은 많지 않은데, 장 속의 시간은 너무 길었다. 메이든은 그 시간이 짧기를 바라면서도 또 길기를 바랬다. 그녀가 나가는 날이 독서가의 마지막 날이라는 걸 메이든은 느끼고 있었다.


  꽉 잠긴 벽장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갔다. 메이든은 바람소리에서 새벽닭이 우는소리를 들었다.

  '나와라.'

  벽장문이 열렸을 때, 메이든은 야생 다람쥐처럼 튀어 나갔다. 엄마는 메이든을 잡지 못했다.

  메이든은 독서가의 집을 향해 달렸다. 엄마는 쫓아오지 않았다. 메이든은 굶주림에 지친 몸을 허적이며 간신히 그 집에 다다랐다.

  어스름이 내린 풍경은 사물을 더욱 가까워 보이게 했다. 창문 가에서 훔쳐본 독서가는 부엌 등잔 아래 서 있었다. 홍반이 번져서 얼굴까지 짓무른 게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이상해서 메이든은 더럭 겁이 났다.
  독서가는 완전히 죽기 전에 스스로 마당으로 나왔다. 집안에서 말라죽으면 밖으로 시체 져 나를 사람들의 수고를 덜기 위한 거였다. 생각해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피껍질이 전신을 뒤덮었고, 근육의 대부분이 이미 껍질 속에서 말라죽어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 터였다.

  마당에 선 독서가는 바람이 불어올 때면 <서쪽>을 향해 '괴괴'하고 울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건 성대에서 소리가 아니었다. 성대는 이미 피껍질로 굳어졌으므로, 그건 말라붙어 부서진 몸 어느 구석에 바람이 들었다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몸 안의 동공에서 몸부림치는 소리였다. 메이든은 어깨를 떨었다. 너무나도 낯설고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독서가가 완전히 말라죽자, 사람들은 그녀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메이든은 몰래 그들을 따라갔다.

  사람들이 도착한 곳은 동쪽 숲, 메이든이 꽃을 따온 곳이었다. 거기에는 말라죽은 독서가와 무척 닮은 붉은 나무들이 즐비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 숲이 바로 낙오자들의 무덤이었다.

  메이든은 그때까지도 낙오자가 뭔지 알지 못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독서가가 왜 죽었는지, 그 숲이 뭔지 설명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메이든은 독서가가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너무 오랫동안 방구석에서 책만 봤기 때문에 책 곰팡이가 옮은 병이었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낙오자의 증상을 듣고 이해하기 전까지 메이든에게 독서가는 책곰팡이에게 살해당한 사람이었다.


  독서가가 죽은 뒤에, 메이든은 더 이상 그 집에 가지 않았다. 독서가는 자기 딸들이 아닌 메이든에게 그 집을 물려주었지만 -딸들 중 누구도 먼지에 책투성이 좁은 집을 원한 사람은 없었다- 메이든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엄마는 기뻐했다. 엄마는 원래부터 메이든이 독서가의 집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나마 독서가가 성공한 사람이고, 어린 아이 때는 뭐든 좋아하는 걸 하고 노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내버려뒀지만, 책을 읽는 건 반대였다. 엄마는 늘 메이든이 지나치게 책을 읽는다고, 너무 많은 지식은 '독'이 된다고 말했었다.

  엄마는 메이든이 독서가를 싫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메이든은 독서가가 싫어진 건 아니었다. 그녀는 다만 두려웠다. 부엌 불빛 아래 맴돌고 있는 섬뜩한 웃음과 홍반이 번져 피껍질 속에 말라죽는 기이한 병이.



  메이든은 다시 뜨끔뜨끔하기 시작한 가슴을 눌렀다. 이번엔 참기 어려울 만큼 아팠다. 홍반이 성공을 향한 기회의 증거라지만 메이든은 이 통증이, 불쾌감이 결코 익숙해질 거 같지 않았다. 너무 아파서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이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나 보군요."

  그때 서늘한 것이 그녀의 눈가에 닿았다. 메이든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눈앞에 <그자>가 있었다.

  메이든은 의아했다. 그자는 괴물도, 유혹자도 아닌, 메이든 네 마을 사람들과는 좀 다르게 생겼지만 똑같은 사람이었다. 키는 나무처럼 컸지만 무척 말라서 폭력적이라거나 위압감을 주지도 않았다.

  "털북숭이 괴물이라던데?"

  메이든은 무심결에 말해 놓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첫 번째 규칙, 말하지 말 것.

  그자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대게는 털북숭이 상태죠. 오늘은 수염을 깎고 왔어요. 당신들이 싫어한다는 거 아니까. 보기 좀 덜 나쁘죠?"

  그자는 매끈한 턱을 쓱 만졌다. 두툼하고 단정한 손가락에 고르게 깎인 다섯 개의 손톱이 눈을 끌었다. 메이든은 어쩐지 전에도 그를 만났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쪽이랑 말하면 안돼요. 말 걸지 말아요."

  성난 고양이처럼 앙칼진 메이든의 경고에 그자는 움찔했다.

  "아, 규칙. 그랬죠. 너무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군요."

  그자는 가까운 대리석 계단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말을 참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닌데…. 아무튼 노력해 볼게요."

  그자는 정말로 제 멋대로였다. 메이든은 뭔가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 같아서 불쾌했지만 따질 수가 없었다. 얘기하자니 말싸움이 날 테고 그건 더 바라지 않는 바였다.

  "당신은 시험을 치르기엔 좀 어려 뵈는군요."

  그자는 물끄러미 메이든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눈이 물처럼 예쁜 파란 색이었다. 메이든은 갑자기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이걸 가지러 온 거죠?"

  그자는 뒤적뒤적 위아래 주머니를 더듬더니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메이든은 반사적으로 덥석 그걸 잡았다. 그러나 주머니는 사라졌고 메이든은 계단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꺄!"
  "엇차!"

  메이든이 험악하게 나동그라지기 직전에 그자의 손이 메이든의 몸을 붙잡았다. 메이든은 갑자기 아득하게 밀려오는 향기에 어찔해졌다. 그에게선 꿈의 방 냄새가 났다. 바삭한 햇볕 냄새와 책곰팡이 냄새, 바로 독서가에게서 나던 냄새였다. 메이든은 갑자기 울컥 눈물이 솟았다. 눈물은 방금 패인 샘처럼 끝없이 끝없이 솟아나 메이든의 뺨을 적셨다.

  그자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 했다.

  "놀려서 미안해요. 어디 다쳤어요?"

  메이든은 고개 저었다. 다친 데는 없었다. 단지 오래 전에 묻어 둔 둑처럼 감정이 터져 나왔을 뿐이었다. 독서가가 죽었을 때도 메이든은 울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메이든은 독서가가 없다는 게 사무치게 슬펐다.

  그자는 말없이 메이든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큰 손의 울림이 기분 좋았다. 두 번째 규칙을 어겼다는 걸 알면서도 메이든은 몸을 뺄 수 없었다.

  "<씨앗>을 주세요."

  그러나 메이든은 목적을 잊지 않았다. 뜨거운 눈물과 상반되는 얼음장같은 음성에 그자는 흠칫 손을 땠다. 메이든은 갑작스레 밀려오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그렇게 서두를 거 없잖아요. 이 씨앗은 당신 거예요. 어차피 당신이 가져가 주지 않으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시들어 버릴 거니까.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당신 마을에 '이든'이란 여자가 있죠?"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무척 친숙한 것인데도 낯설었다. 그건 독서가의 이름이었다.

  "이든을… 알아요?"
  "아는군요!"

  그자의 눈이 흥분으로 빛났다. 메이든은 갑자기 그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잘 있나요? 그녀는? 좋은 여자였어요. 말이 통하는 여자였죠."

  순간 메이든의 가슴에 칼이 떨어졌다. 어딘가 썩둑 베어져 나갔는데 그게 뭔지 확인할 틈도 없이 공포가 밀려들었다.

  "이든과… 말했어요?"

  메이든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독서가는 죽었다, 낙오자가 되어서. 그건, 그자와 말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무섭게 심장이 뛰었다.

  "씨앗을 주세요."

  메이든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나 그자는 고개 저으며 씨앗을 등뒤에 감췄다.

  "내 부탁이 먼저예요. 이든에게 전해 주세요. 나는 기억하고 있다고. 약속대로 내 이름을 기억하느냐고 물어 봐주세요."

  메이든은 피가 식는 것 같았다.

  "그런 거 몰라요. 못 물어 봐요. 씨앗이나 내놔요!"
  "물어 봐 줄 거라고 약속 안 하면 못 줘요."
  "이든은 죽었어요! 그녀는 낙오됐어요! 같은 방법으로 나도 낙오시킬 건가요? 그래요? 그럼 이제 됐군요. 그녀는 당신이랑 말해서 낙오자가 됐어요. 그러니까 나도 낙오자가 되겠죠!"

  메이든은 울음을 터트렸다. 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든이 낙오 됐어요? 어째서?"

  그자는 무척 놀란 눈치였다.

  "당신이 이든의 일곱 번째 남자였나요?"
  "아니오, 난 여섯 번째였어요."

  그렇게 대답한 그자는 한참 말이 없었다.

  "미안해요. 씨앗은 가져가요. 만약에 보름까지 꽃이 피지 않으면 여기 다시 와요. 다른 씨앗을 줄게요."
  "하지만 그건…"

  그건 규칙 위반이었다. 황금 나무는 대게 보름에 꽃이 피고 여섯 일곱 달 즈음에 열매를 맺었다. 한 달 안에 꽃을 피우지 못하면 <실격>이었다. 하지만 씨앗을 다시 받고 다시 시도하면 성공할 수도 있었다. 메이든은 가슴이 뛰었다.

  "내 사과의 표시예요. 그리고, 증거를 받아 가죠."

  그자는 메이든의 목에 걸린 리본과 머리카락을 한울 가져갔다. 씨앗의 대가였다.

  "보름에 씨앗을 가져올게요. 만약에 내가 올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이 대신 올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잘 말해 둘 테니. 당신이 오지 않으면 성공한 걸로 알게요. 축복을."

  그자에게 씨앗을 받자마자 메이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헉헉…"

  등뒤에서 그자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말라죽은 독서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너는 그녀를 닮았어.'

  갑자기 시스의 음성이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아니야!"

  메이든은 고개 저었다. 그녀는 기필코 성공할 거였다. 절대로 낙오자가 되진 않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 메이든은 가장 먼저 화단으로 달려갔다. 신전에서 받은 검붉은 흙으로 채운 화단은 아직 촉촉했다. 메이든은 씨앗을 꺼냈다. 겉이 반지르르하고 통통한 좋은 씨앗이었다. 싹을 틔워서 정성껏 기르면 황금 열매가 열리고 안에선 그녀의 아이가 자라게 될 것이다. 메이든은 씨앗을 심고 흙을 덮었다.

  꽃이 피기 전까지 정원은 외부인 출입 금지였다, 메이든은 울타리에 금줄을 걸었다. 그때 문득 독서가의 집이 눈에 뜨였다. 막 그 집 지붕에 도착한 아침 햇살이 기왓장 모서리를 날카롭게 빛냈다.

  메이든은 갑자기 그 집에 가보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메이든은 흙 묻은 손을 씻고 겉옷을 걸쳤다. 금줄 기간엔 외출도 금지였지만, 새벽부터 그녀를 감시할 사람은 없었다.


  독서가가 떠난 날을 마지막으로 그 집에 드나든 사람은 없었다. 현관 문고리에는 켜켜이 먼지가 쌓이다 못해 바싹 말라서 메이든의 손이 닿자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메이든은 계단 밑에서 열쇠를 찾아내 먼지 낀 구멍에 밀어 넣었다. 억지로 돌려진 문고리 안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메이든이 도끼를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에 문이 열렸다.

  메이든은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집안에 갇혀서 세월과 함께 썩어 가던 공기가 메이든을 밀치고 달아났다. 훅 끼쳐진 퀴퀴한 냄새 때문에 숨쉬기가 거북했다. 메이든은 캄캄한 복도로 미끄러져 들어가 창문을 벌컥벌컥 열었다. 햇살 속에 먼지들이 춤췄다.

  집안은 모든 것이 그대로, 조금 낡아진 모습 정도의 변화만 있었다. 침실 앞에 어지러운 발자국이 몇 개 남아 있었는데 유품을 정리하러 온 딸들의 것이 분명했다. 메이든은 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머리맡 장식 대에 잠잘 때 보던 책이 두어 권 꼽혀 있었다. 메이든은 독서가가 생각이 나서 코끝이 시큰해졌다. 독서가는 다소 무심한 면이 있지만 좋은 사람이었다.

  메이든은 꿈의 방으로 건너갔다. 방 앞에는 오간 흔적이 전혀 없었다. 딸들 중 누구도 진짜 독서가의 유품을 가져가진 못했다. 아무도 제대로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메이든은 서운한 한편으로 뿌듯한 만족감을 느꼈다.

  꿈의 방은 집안의 모든 방들 중에서 가장 볕이 많이 드는 방이었다. 책에 습기 차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빛이 가득한 방바닥에 큰 유리창에 엉긴 담쟁이가 우아한 그림자를 찍었다. 천장을 떠도는 먼지는 10여 년 전과 다름없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메이든은 시간이 되돌아오는 걸 느꼈다. 부엌에선 갓 구운 과자와 흙내가 도는 부드러운 녹차 냄새가 솔솔 풍겼다.

  독서가는 기분이 좋을 때면 과자를 구웠다. 맛보다는 실험 정신이 투철한 과자였지만 메이든은 좋아했다. 실은 과자 보다 독서가가 웃는 게 좋았다. 그녀를 웃게 할 수 있다면 새카맣게 탄 과자도 초콜릿처럼 달콤하게 먹을 수 있었다. 메이든은 기다렸다. 오늘은 또 어떤 이상한 맛의-혹은 모양-의 과자가 나와서 그들을 즐겁게 해줄까?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독서가는 오지 않았다.

  "또 태웠어요?"

  메이든은 부엌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독서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순간 환상이 사라지고 낡은 부엌으로 시간이 되돌아왔다. 불꺼진 화덕에는 먼지만 하얗게 끓고 있었다. 메이든은 잠시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독서가는 없다. 그녀는 낙오되었다.

  메이든은 더럭 겁이 났다. 금줄 기간에 괜한 곳에 온 게 아닐까? 낙오자가 어떤 경로로 발병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옮지 않는다고 확언한 사람은 없었다.

  "아니야, 독서가가 도와줄 거야."

  메이든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독서가는 여섯 번이나 열매를 얻었다. 그건 굉장한 성공이었다.

  어느새 어둠이 밀려왔다. 방은 노을로 가득 찼지만 부엌은 이미 컴컴했다. 메이든은 찬장을 더듬어 촛불을 켰다. 실로 몇 년만에 집안에 밝혀진 불이었다. 메이든은 별이 내리는 창 밖을 보다가 문득 그곳이 이든이 마지막 서 있던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독서가의 기묘한 미소가 아직 천장에 걸려 있었다. 그때 독서가는 뭘 보고 있던 걸까? 메이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특별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메이든은 독서가가 아끼던 법랑 주전자를 꺼내 닦았다. 진흙 냄새 나던 그 값진 찻잎은 여전히 제자리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메이든은 깊이 묻힌 흙항아리에서 찻잎을 덜고 아궁이에 불씨를 살렸다. 그때 문득 빨간 책이 눈에 걸렸다. 그 책은 아궁이와 벽 틈 사이에 교묘하게 끼어 있었다. 메이든은 그걸 끄집어냈다. 부엌에 책이 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책이 망가질까 봐 염려가 대단했던 독서가답지 않았다. 메이든은 책의 앞 뒤, 옆모서리를 살폈다. 제본 방식이 지금까지 그녀가 봐 온 것과는 달랐다. 그 책은 꿈의 방에 있는 모든 책들과도 달랐다. 메이든은 두근거리면서 첫 장을 넘겼다.

  <이든에게, 마일드가… 환영월력 그림자 해 여름 첫째 달 여드레 날>

  메이든은 전율을 느꼈다. 혹시? 아닐 거야. 하지만, 이게 정말 <그자>의 이름이라면?
  메이든은 부서질 것처럼 낡은 책장을 넘겼다. 손의 떨림을 최대한 자제하더라도 검붉은 얼룩으로 덩어리 채 달라붙은 책장은 좀처럼 떼어 내기 어려웠다. 메이든은 결국 포기하고 맨 뒷면을 펼쳤다.

  <마일드에게,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는 이든이  환영월력 물 해 여름 둘째 달…>

  무척 이상한 글씨였다. 삐뚤고 제멋대로 끊겨서 앞장의 이름을 먼저 보지 않았다면 읽을 수 없었을 거였다. 메이든은 그맘때에 무슨 일이 있었나 떠올렸다. 여름이 무르익은 저녁이었고, 동공에 갇혀 울부짖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피껍질로 치장한 독서가가 마당에 서 있었다.

  '나는 여섯 번째 남자였어요.'

  메이든은 오싹 소름이 끼쳤다. 독서가는 그자 때문에 울었다. 그자 때문에 일곱 번째 시험을 거부하고 피껍질 때문에 손가락이 들러붙어도 몇 번이고 책장을 넘겼다! 메이든은 타오르기 시작한 아궁이에 책을 던져 넣었다. 온 몸이 덜덜 떨렸다. <그자들>에게 마음을 주다니! 나락에서 기어 나온 괴물과 사랑하다니!

  메이든은 도망치다 시피 그곳을 떠났다. 너무 서둘러서 문을 잠글 틈도 없었다.

  숨이 턱에 닿도록 달리면서, 메이든은 비틀린 애정이 찐덕찐덕한 손으로 그녀를 잡으러 오는 상상을 했다. 거기 닿으면, 메이든도 낙오될 것이다. 독서가처럼!

  집에 돌아오자 마자 메이든은 몸을 씻고 향을 피웠다. 그 집에서 묻어 온 불길함이 씨앗에 옮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그날 밤, 메이든은 꿈을 꾸었다.

  '이든…'

  고양이 걸음처럼 다가온 잠 속에 그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다정하고 침착한, 기분 좋은 음성이었다.

  '마일드.'

  메이든은 어깨에 감아 오는 그자의 팔에 기댔다. 아주 편하고 안심이 됐다. 꿈속이니까 그가 그녀를 뭐라 부르건, 그가 누구 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자가 그녀의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메이든은 반쯤은 알아듣고, 반쯤은 간지러워서 웃었다.

  '깔깔깔……'

  커다란 웃음소리에 메이든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방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메이든은 귓전에 출렁이는 웃음소리를 털었다.

  "미쳤나 봐…."

  독서가의 집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일까? 아니 시험 때문에 날카로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메이든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컴컴했다.

  "후…."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떨치고 씨앗에 물을 주러 나갔다.



  사흘이 지났다. 씨앗에서 싹이 움틀 무렵이었다. 메이든은 아침나절부터 수시로 화단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의아함이 불안으로 바뀔 무렵 갑자기 날카로운 환호가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다. 이그노의 음성이었다.

  "세상에! 정말 싹이 났어요!"

  메이든은 폐가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뚫어져라 화단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작은 초록색이 얇은 흙을 뚫고 삐죽이 솟아 잎을 펼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매정하게도 화단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메이든은 그날 낮과 밤을 꼬박 화단 앞에서 보냈다. 몸만 상할 뿐, 싹이 트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다른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흘이 가고 닷새, 엿새가 되었다. 보름이 되어 꽃이 필 무렵인데 봉오리는커녕 싹도 없었다. 메이든은 절망했다, 씨앗은 죽었다. 그녀는 실격되었다.

  "흐…."

  가슴 밑 홍반이 거세게 날뛰었다. 너무 아파서 까무러칠 거 같았다. 심장이 멎어서 죽고 싶지 않다면 신전에 가서 경과를 보고하고 치료제를 얻어야 했다. 그러나 메이든은 그러기 싫었다. 동정과 비웃음-특히 이그노의-을 받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만약에 보름까지 꽃이 피지 않으면 여기 다시 와요. 다른 씨앗을 줄게요.'

  갑자기 <그자>의 목소리가 퍼뜩 뇌리를 스쳤다. 메이든은 하늘을 보았다. 달이 젖가슴처럼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메이든은 신전을 향해 달려갔다. 아무 생각도, 계산도 없었다. 다만 <그자>만이 도울 수 있다는 절망적인 희망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헉헉…."

  신전에 도착한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인기척은 없었다. 메이든은 퍼뜩 겁이 났다. <그자>가 약속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메이든을 속였는지도 모른다. 끝장이라는 생각에 덜컥 눈물이 났다.  

  "당신이군요."

  그때 메이든의 머리맡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든은 퍼뜩 얼굴을 들었다. <그자>가 서 있었다. 마일드가 아니라 메이든 또래의 낯선 얼굴이었다.

  "서쪽 신전지기?"

  <그자>의 흰옷을 보고 메이든은 더럭 겁먹었다. 신전지기는 동쪽-메이든의 마을과 서쪽-그자들의 마을에서 각각 한 명씩 선출됐다. 평소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지만 지금 메이든이 하려는 일에서는 절대로 만나선 안 되는 자들이었다.

  "퇴근했어요. 좀전에."

  메이든이 경계하는 걸 눈치 챈 서쪽 신전지기는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 안 주머니에서 씨앗 주머니를 꺼냈다.

  "이걸 가지러 왔죠?"

  메이든의 눈이 빛났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제정신이 돌아왔다.

  "절 시험하시는 건가요?"

  서쪽 신전지기는 한숨을 푹 쉬었다.

  "말했잖아요. 퇴근했다고. 마음이 편치 않으면 여기 둘게요. 가져가요. 그럼 난 이만."

  서쪽 신전지기는 겉옷을 싸안고 홀홀이 오솔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메이든이 부르자 서쪽 신전지기가 돌아보았다.

  "마일드는….요?"

  메이든은 흠칫 입을 막았지만 이미 이름이 튀어 나간 다음이었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알았죠? 그가 말해 주던가요?"

  메이든은 고개 저었다.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말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에게 전해 주세요. 약속을 지켜 주신 대가로, 이든이 마일드를 기억하고 있었다고."
  "내가 왜요? 난 신전지긴데. 그건 규칙 위반이예요. 지금 무척 위험한 거 알아요? 당신 혓바닥이 마일드를 처형시킬 수도 있어요."
  "퇴근했다면서요."

  메이든은 씨앗 주머니를 달랑거렸다. 서쪽 신전지기는 푹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군요."
  "왜요?"
  "그는 죽었어요."

  서쪽 신전지기의 음성이 너무 덤덤해서 메이든은 귀를 의심했다.

  "에? 어째서?"
  "글쎄요. 그거야 알 수 없죠. 하지만 당신 씨앗이 죽은 것과도 관계가 있을 거예요. 씨앗은 주인의 생명력에 영향받으니까."

  메이든은 당황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서쪽 신전지기는 이미 모든 것을 꿰고 있었다.

  "서둘러 가는 게 좋을 거예요. 동쪽의 신전지기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면."

  그리고 서쪽 신전지기는 가 버렸다.

  메이든은 홀로 암흑을 마주보고 서 있었다. 등뒤에서 밝아 오는 여명과 함께 자박자박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메이든은 숲 그늘로 몸을 피했다. 동쪽 신전지기가 그녀가 숨은 덤불 곁을 스쳤다. 메이든은 두근두근한 심장을 움켜쥐고 숨을 멈췄다. 홍반의 통증이 박동에 전이되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메이든은 비명이 새어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죽었어요.'

  홍반이 아니라 마음이 아팠다. 아무 상관도 없는데, 마음이 아팠다.

  "안돼, 메이든, 정신차려."

  메이든은 머리를 흔들었다.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다. 지금 중요한 건 싹을 틔우느냐 마느냐였다. 메이든은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되돌아와 씨앗을 심었다. 눈물 때문에 따로 물을 줄 필요는 없었다.



  "어머, 메이든! 정말 오랜만이다! 시험은 어땠어? 씨앗은 잘 크고 있어?"

  메이든이 오랜만에 신작로로 나가자 큰 버드나무 아래 진치고 있던 참새 떼들이 몰려들었다. 통금은 진즉에 풀렸지만, 메이든은 싹이 나길 노심초사 기다리느라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렇지 뭐."

  메이든은 적당히 대답했다. 그녀는 이 패거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너무 수다스럽고 -메이든의 기준에서-감성적이며 안일했다. 개중에 특히나 지금 말을 걸고 있는 프린이 그랬다. 프린은 상대가 자기를 꺼리는지 아닌지의 살피는 눈치조차도 없었다.

  "참 들었어, 들었어?"
  "뭘?"
  "이그노의 열매는 쌍둥이래."

  순간 메이든은 질투와 모욕을 삼키느라 안색이 굳었다.

  "그래? 축하할 일이네. 전해 줘."

  프린은 메이든의 무관심한 반응은 아랑곳없이 자기 좋을 대로 떠들어댔다.

  "마침 저쪽에 있어, 정말 굉장하지 뭐야? 동갑내기 중에서 두 사람이나 최연소로 시험에 들었는데, 하나는 쌍둥이라니! 우리 연배는 다들 굉장해! 분명히 다들 성공할 거야!"

  메이든은 어떻게 '두 사람'의 성과가 '또래 전체'의 성공을 보장해 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지 경악했지만 따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프린이 '나는 아무 것도 몰라요' 표정을 들이대면 이쪽은 이길 수가 없었다. 알아듣게끔 설명하는 동안 더 많은 오해를 낳을 테니까. 메이든은 그녀 또래에서 가장 낙오자가 많이 나올 거라고 장담했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첫 번째는 프린이었다.

  "개화가 늦었다며? 실격하는 줄 알고 걱정했어. 너무 다행이다. 요즘 날씨가 꽤 좋으니까, 분명 멋진 열매를 맺을 거야. 축하해."

  이그노는 분홍색 통통한 뺨을 빛내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소녀들의 한가운데서 마치 여왕님처럼 앉아 있었다. 그리 작지 않던 배가 요사이 엄청 불어서 마치 열매를 화분이 아닌 그 속에 키우는 건 아닐까 싶었다. 아마 싹이 튼 뒤로 희희낙락해서 매일매일 먹고 자고 뒹굴 대고 있음이 분명했다.

  메이든은 뱃속이 꿈틀댔다.

  "쌍둥이라며, 축하해."

  메이든은 최대한 기뻐 보이게 웃느라 입술 끝이 불편했다.

  "고마워. 네 열매도 분명 크고 멋질 거야. 넌 나보다 훨씬 똑똑하잖니."

  이그노도 웃으며 화답했다. 메이든은 그 미소가 너무나도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어쩐지 '흥, 똑똑한 체 하더니, 봐라. 내가 더 먼저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무척 걱정됐겠다. 보름까지도 싹이 돋지 않았다면서?"

  이그노가 그 말을 했을 때, 메이든은 갑자기 자리가 불편해졌다. 이그노는 아까와 다름없이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음험해 보였다.

  "응, 다행이지 뭐."

  불안이 두근두근 심장을 두드렸다. 이그노가, 뭔가 알고 있는 걸까? 설마 저 멍청이가 결코 그럴 리 없다.

  "시장보고 왔어? 되게 무거워 보인다. 좀 앉아서 쉬다가. 갈 때 들어다 줄게."

  프린이 사근사근하게 권해 왔다. 메이든은 수다쟁이들 사이에 끼고 싶은 맘은 조금도 없었지만 이미 참새 떼들이 빙 둘러싸서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참새들은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단순한 목적만으로도 퍽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메이든은 딴 때도 좀 그래 보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았다.

  "…고마워."

  결국 메이든은 이그노와 곁에 안고 말았다.

  "정말로 끔찍한 괴물이야? 잡아먹힐 뻔했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프린의 질문이 너무 바보 같아서 메이든은 웃음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잡아먹힐 뻔했다던데?"
  "누가?"
  "음…. 누군진 잘 기억 안 나지만 샐린이 그랬는 걸? 그렇지 샐린?"

  프린이 돌아보자 샐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이모한테 들었어. 이모가 옆집에서 들은 거래, 분명 사실이야."

  메이든은 그렇게 둘러 온 자체가 사실이 아닌 거라고 말해 주려다가 말았다. 공연히 입만 아플 것이다.

  "그거 진짜야."

  이그노의 목소리에 메이든은 깜짝 놀랐다. 이그노는 능글능글하게 거짓말을 엮어 나갔다.

  "나도… 실은 아슬아슬 했어. 눈이 네 개, 다리가 세 개인 끔찍한 괴물이 잡아먹자고 달려드는데…"

  이그노는 허풍을 떨고 있었고, 그래도 들통나지 않는다는 걸 즐기고 있었다.

  "정말? 너무 끔찍해!"

  소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그노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그래서 씨앗을 받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데, 다리가 세 개니까 자기 다리에 걸려 넘어져서 쫓아오질 못하더라. 천만 다행이었지."

  그 말을 하면서 이그노는 메이든을 쳐다보았다. 마치 '지금 사실을 폭로하면 나도 너에 대해 폭로 할거야'라는 으름장 같았다. 메이든은 순간 불안해졌지만 가슴을 폈다. 확실히 드러나지도 않은 사실에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메이든은 '나는 비밀 따위 없어, 유치한 장난에 끼기 싫으니까 말 안 하는 거야'라는 뜻으로 그녀를 되쏘아 보았다.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그노의 허풍은 금방 화제에서 밀려났다.

  "그나저나 소문 들었어?"

  수다쟁이 프린이 다시 주도권을 잡았다.

  "무슨 소문?"

  누군가 반문했다.

  "서쪽 신전지기가 여기에 와 있대."
  "서쪽 신전지기라면…. <그자>아냐? 그자가 왜 우리 마을에?"

  소녀들은 듣는 것만으로 대경 질색했다.

  "말도 안돼! 아무리 신전지기라지만 <그자>를 마을에 들이다니! 우리 신전지기께선 뭐라셔?"
  "거기 까진 모르겠고, 아무튼 중요한 건 그 신전지기가 무척 근사하게 생겼다는 거야. 우리 또래인데, 털북숭이도 아니고…"

  프린은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붉혔다. 메이든은 그녀가 서쪽 신전지기에게 반했다고 확신했다.

  "그자인데, 어떻게 괴물이 아닐 수 있지? 이그노도 그랬잖아? 다리가 셋에 눈이 네 개라고."
  "다 다르게 생겼나 보지."

  샐린이 이그노를 편들었다. 이그노는 아무 말 없이 흐뭇하게 웃었다.

  "와아, 그럼 상대로 나온 그자가 꼭 괴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네? 나도 잘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다 유혹자가 걸리면 어쩌려고? 그럼 직빵 베베 꼴 나는 거야."
  "베베?"
  "그래, 옆 마을의 베베. 이번에 낙오되서 죽었어."

  거품처럼 부풀었던 공기가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소녀들의 눈에 불안이 감돌았다.

  "하지만, 베베의 상대는 유혹자가 아니라 대머리에 뚱보였다는데?"

  트릴린이 신중히 입을 열었다.

  "설마! 어쩜, 말도 안돼! 낙오되는 것도 억울한데 그런 엉터리한테?"

  프린이 거품을 물었다.  

  "유혹자도 아니고 괴물 때문이라니, 믿을 수 없어! 바보 아냐?"
  "그러니까, 낙오자는 병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자들 때문에 미래의 행복을 차 버리고 끔찍하게 말라죽겠어? 안 그래, 메이든?"

  이그노가 물었다. 메이든은 이미 독서가 생각에 빠져 제대로 듣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못 들었다 긴 싫어서 대강 맞장구쳤다.

  "아, 응 물론이지."
  "무슨 얘기 중이었어?"

  느직하게 도착한 더비가 무리에 끼었다. 프린이 냉큼 대답했다.

  "서쪽 신전지기가 왔대. 무척 멋지다던데?"
  "아아, 멋있더라."

  무심한 더비의 대답에 소녀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뭐야? 봤어? 어디서?"
  "우리 신전지기하고 어딘가 가던걸?"
  "언제? 어디로? 어떻게 네가 그자를 봤어?"

  프린이 덤빌 듯이 물었다. 더비는 느적하게 대꾸했다.

  "야, 침 튄다. 신전지기 일에 왜 네가 난리야? 너 설마 반했어?"
  "무슨 소리야! 말도 안돼!"

  프린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높았다. 더비는 손사래 쳤다.

  "아니면 됐지 왜 화를 내? 윗동네로 가는 거 같더라."
  "윗동네엔 왜?"
  "그걸 내가 아니? 궁금하면 직접 물어 보면 되잖아. 아, 날씨 덥다. 왜 이렇게 몸이 찌뿌둥한지."

  더비는 느릿느릿 귀퉁이 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때 프린이 벌떡 일어섰다.

  "서쪽 신전지기 보러 갈 사람?"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트릴린이 반색했다. 프린은 꽤 적극적이었다.

  "신전지기도 <그자들>이잖아? 어차피 내후년이면 시험에 들텐데 미리 봐 두면 참고가 되잖겠어?"

  그럴싸한 핑계였다. 소녀들은 서로서로 눈치를 살폈다. 샐린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나 갈래."
  "나도 가."

  트릴린도 끼었다.

  "나도 궁금해."

  대다수의 소녀들이 찬성했다. 프린의 눈은 흥분으로 반짝였다. 뺨의 홍조도 짙어졌다.

  "그럼, 지금 가자. 어디쯤이라고 더비?"
  "윗동네로 올라가는 길이던데…. 잠깐 뭐야, 나 지금 왔다구."

  아무도 더비의 투덜거림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소녀들은 호기심과 흥분으로 완전히 들떠 있었다. 낙오자 따윈 엊저녁 반찬으로 다 까먹은 것이 분명했다.

  "난 집에 갈래."

  메이든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가. 짐 들어줄게."

  이그노도 따라 일어섰다. 메이든은 사양했다.

  "괜찮아. 애들이랑 구경이나 가."
  "됐어. 어차피 화단을 돌봐야 하는 걸. 열매가 둘이라 얼마나 물을 많이 먹는지, 하루에 다섯 번은 줘야 한다니까? 덕분에 밤잠도 설쳐."

  이그노가 시장 바구니 하나를 들고일어나자 메이든도 더 거절할 수 없었다. 둘은 갓길에 난 풀을 뜯으며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메이든, 너 얼굴이 창백한데 괜찮아?"

  불쑥 이그노가 물었다.

  "응?"
  "아까부터 계속 굳은 얼굴이었다고. 네가 걔네들 안 좋아하는 거 알지만 그렇게 티낼 필요는 없잖아? 프린은 말하면서 계속 네 눈치만 봤다고. 걔가 원래 말이 많긴 하지만, 네가 너무 조용하니까 어색해서 다른 애들이 더 무리하잖아. 알아?"
  "…알아."

  실은 몰랐었다. 그리고 이그노가 이런 식의 얘길 할 수 있는 애란 것도 몰랐다.

  "뭐랄까, 너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난 시험 덕분에 좀 편해졌어. 다들 알고, 나도 인정하다시피, 난 멍청한데다가 감정적이잖아. 엄마가 무척 걱정하셨거든. '너 같은 애가 <그자들>의 마수에 걸리기 딱 좋다'고. 그런데 막상 대해 보니 그렇지도 않던걸. 각오를 단단히 해서일까? 아무튼 결과가 좋으니 다 좋은 거겠지만."

  메이든은 묻지도 않은 얘길 조잘대는 이그노가 짜증스러웠지만 대꾸할 힘이 없었다. 아까부터 홍반이 욱신대서 신경이 온통 그쪽에 가 있었다.

  "왜 프린이랑 안 갔냐면, 실은 서쪽 신전지기 전에 봤어. 금줄 기간에 외출했다면 야단 맞으니까 숨기고 있었는데… 너도 알잖아? 그게 엄청 답답한 거. 그래서 새벽에 산책 삼아 신전 쪽으로 갔는데, 서쪽 신전지기가 있더라. 한눈에 알겠던 걸."

  순간 메이든은 창백하게 굳었다. 설마, '그날'일까?

  메이든은 곁눈질로 이그노의 안색을 살폈다. 이그노의 얼굴은 평소처럼 태평했다. 뭔가 음흉하거나 꿍꿍이가 있어 뵈진 않았다. 메이든은 이그노가 뭔가를 숨길만큼 요령이 좋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만약을 무시할 순 없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상이 목을 옥죘다.

  "누구랑 뭘 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랑은 아무 상관없으니까 그만 좀 떠들래?"

  메이든의 앙칼진 대꾸에 이그노는 어처구니없어 했다.

  "무슨 소리야? 메이든, 너 요즘 이상해. 왜 그렇게 곤두서 있어? 씨앗 때문이야?"
  "다 알면서!"

  메이든은 확 쏘아 버리고 후회했다.

  "뭘 말이야?"

  이그노는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니야, 괜찮아. 피곤해서 그래. 내버려 둬."
  "메이든!"

  이그노의 부름을 무시하고, 메이든은 시장 바구니를 빼앗듯이 받아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 문고리를 걸자마자 벽에 기대 주저앉아 버렸다. 이그노는 아무 것도 모른다. 메이든은 성공할 것이다. 그런데도, 뭔가가 석연치 않았다. 죄책감 때문은 아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그쯤은 얼마든지 눈감을 수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그들>이였다. 이든과 마일드.

  메이든은 욱신한 가슴을 눌렀다.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아무 관계도 없는, 이미 죽은 자들인데 살아 있는 자들보다도 그녀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씨앗을 돌보는 것보다 감정적 피로가 그녀를 더 힘들게 했다.

  메이든은 앉은 그대로 바닥에 눕고 싶었다. 그때 공교롭게도 엄마가 찾아왔다.

  "메이든, 안에 있니? 엄마다."

  보통 모녀라면 이 기회에 버럭 짜증을 내고 응석을 부리는 게 마땅했지만, 메이든은 투덜댈 힘도 없이 창백한 손으로 옷 주름을 펴면서 문을 여는 게 전부였다.

  "어쩐 일이세요?"
  "잠깐 들어가마."

  메이든은 한 걸음 물러서 들어올 공간을 두었다. 엄마는 등뒤의 문을 닫았다.

  "'그 집' 열쇠, 네가 갖고 있니?"

  엄마가 다짜고짜 말했다. 메이든은 엄마의 어느 집을 말하는지 깨닫고 조금 놀랐다. 엄마 입에서는 절대로 나오지 않을 얘기였다.

  "아뇨?"

  독서가의 집 열쇠는 언제나 그 집 계단 아래 있었다. 최근에 메이든이 문을 열 때도 거기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나오면서 어디에 두었더라? 갑자기 기억나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썼어요. 그런데 열쇠를 어디 뒀더라?"
  "어디 뒀는지는 상관없다. 열려 있길래 도둑이 든 줄 알았는데, 네가 다녀온 거면 됐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메이든은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집이 열려 있는 걸 엄마가 어떻게 알아요?"

  엄마는 지나가다라도 절대 그 집에 갈 사람이 아니었다.

  "서쪽 신전지기가 찾아 왔었다, 네가 없을 때. 그 집에 용건이 있으시다더구나. 주인이 없으니 내가 대신 집을 안내했지. 잠겨 있을 줄 알았는데, 열려 있는 걸 보고 놀랐다."
  "…신전지기가 그 집에 왜요?"

  메이든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랬지만, 지나친 바램이었다.

  "그야 나는 모르지. 그 분들의 일이니까."
  "그래서요? 그 다음은요?"
  "그래서긴? 안내해 드리고 난 왔지."
  "같이 안 나오구요?"

  엄마는 눈을 크게 떴다.

  "거기 볼일이 있는 것 같았다. 사제도 아닌 내가 그걸 일일이 물어 볼 수는 없지. 별일이구나, 네가 남의 일에 관심을 다 보이고."

  메이든은 뭐라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엄마는 더 묻지 않았다.

  "아무튼, 별일 없는 거 같으니 됐다. 열쇠를 찾으면 잠궈 두거라. 아무리 네 거라지만, 그 집 자식들이 보기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네. 살펴 가세요."

  메이든은 좁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까지 엄마를 마중했다. 그리고 돌아서는데 키 큰 나무 뒤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꺄…"

  비명이 목구멍에서 빠져 나오기도 전에 침입자의 손이 메이든의 입을 덮쳐 누르고 집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쉬, 해 끼치지 않을 테니까, 소리지르지 말아요."

  메이든은 낯익은 음성임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서쪽 신전지기?"  

  다른 사람과 착각하고 말고 할 여지가 없었다. 등잔 아래서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한 메이든은 어이가 없었다.

  "마을에 와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직접 왕림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오늘은 늦게 퇴근했나 보죠?"

  신분에 걸맞지 않은 행실을 비꼬는 그녀의 말에 서쪽 신전지기는 쓴웃음 지었다.

  "말장난 할 틈 없어요. 전 지금, 아주 중요한 걸 찾으러 왔어요."
  "뭔진 모르지만 저랑 관련 있을 거 같진 않은데요?"

  메이든은 쌀쌀맞게 대꾸했다. 서쪽 신전지기는 바지에 손을 비볐다.

  "제 생각엔, 있어요. 당신만큼 그 집의 책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 순간 메이든은 서쪽 신전지기가 찾고 있는 게 빨간 표지의 그 책이라는 걸 알아챘다.

  "알기야 알죠. 하지만 주인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겠죠."
  "그 집의 주인은 낙오됐지 않나요?"

  메이든은 피가 식었다. 별로 친절히 굴고 싶진 않았지만 더더욱 그럴 맘이 없어졌다.

  "그래서요? 뭘 찾는 데요?"

  그녀의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지나치게 쌀쌀맞았다.

  "마일드가 그 집주인한테 준 선물이요. 빨간 표지 책. 거기 없더군요. 당신이 갖고 있죠?"
  "아뇨, 무슨 책인지 몰라도 나한테 없어요. 난 그 집에서 아무 것도 갖고 오지 않았거든요."

  서쪽 신전지기는 연신 바지 자락에 손을 비벼댔다. 등잔 불빛이 그리 밝지 않은데도 밝은 색 바지 천에 베인 땀얼룩이 똑똑히 보였다.

  "정말이예요?"

  메이든은 그가 약간 불쌍해졌다.

  "그게 어떤 책인데요?"
  "마일드가 직접 쓴 책이예요. 굉장히 오래된 거라 낡아서 너덜너덜하죠."
  "설마,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메이든은 어이가 없었다. 낡은 책 한 권을 찾아서 금역까지 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게 다는 아니지만, 중요한 부분이죠. 다른 사람, 특히 당신네 서쪽 신전지기한텐 절대 말하면 안돼요. 전 지금 우리 쪽에서 일어난 기이한 일이 동쪽에도 일어났는지 확인하러 온 것뿐이니까."
  "서쪽에서 일어난 일?"

  메이든이 반문하자 서쪽 신전지기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무 대가 없이 너무 많이 알려고 하는군요. 서로 주고받기로 하죠. 정말로 그 책에 대해 아는 거 없어요?"

  메이든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누가 궁금하대요? 그쪽이 먼저 줄줄이 말해 놓고. 몰라도 되니까 그만 가보시죠?"

  갑자기 서쪽 신전지기의 얼굴에 슬픔이 감돌았다. 언제나 상냥함을 갖춘 개구진 소년의 가면이 부서지자 메이든은 약간 놀라고 당황했다.

  "저는 그 분의 유품을 찾는 거예요. 마일드는, 제게 무척 중요한 사람이었어요."

  서쪽 신전지기의 목소리는 처음과 다름없이 무덤덤했다. 마일드의 죽음을 전할 때도 그런 목소리였다. 메이든은 그가 너무나 슬프기 때문에 더욱 아무렇잖은 투로 말한다는 걸 알았다.

  "허락 받았대도, 여기 있는 거 들키면 안돼죠?"

  메이든은 서쪽 신전지기에게 연민을 느꼈다.

  "자격 박탈은 당연하고 처형당할 수도 있죠."

  서쪽 신전지기는 자기가 죽는 얘기를 '퇴근했어요'라고 말할 때와 다름없는 어투로 말했다. 메이든은 그게 무척 마음에 걸렸다.

  "실은 그 책, 봤어요."

  메이든은 말해 버리고 말았다. 서쪽 신전지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메이든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책에 대해 말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어디서요?"
  "그게… 저도 찾아 봐야되요. 그때 너무 경황이 없어서…. 아무튼 그 집에 있을 거예요. 가져오지 않았거든요."

  서쪽 신전지기는 고개 저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어요. 숨겨 뒀나요?"
  "봐야 알 거 같아요. 당장 기억 나진 않아요."

  메이든은 미간을 문질렀다. 서쪽 신전지기가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같이 가서 찾아봐요."

  메이든은 당황했다.

  "지금 당장요? 이런 한밤중에?"

  서쪽 신전지기는 씩 웃었다. 상냥하고 장난스런 얼굴이 되돌아 왔다.

  "그럼, 제가 밤새 여기 있길 바라나요?"
  "절대 아니죠."

  메이든은 당장 등잔을 챙겨 들고 앞장섰다.
  문밖을 나서기 전에, 그녀는 겉옷 소매 안에 빛을 숨겼다.

  "눈은 금방 익숙해 질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 서로 들켜서 좋을 건 없잖아요?"

  서쪽 신전지기는 약간 의외라는 얼굴로 끄덕끄덕했다. 메이든은 씨앗을 다시 얻으러 간 탓에 많이 얕보였구나 싶어서 언짢아졌다.

  그들은 어두운 길을 되짚어서 독서가의 집에 다다랐다. 집안에 들어가서도, 메이든은 빛이 새 나가지 않도록 창문과 커튼을 꼭꼭 닫았다.

  "잠깐 들고 있어요."

  등잔을 서쪽 신전지기에게 맞긴 메이든은 화덕 근처를 꼼꼼히 살폈다. 분명히 처음에 발견했을 땐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달리 옮겨 둔 기억도 없었다. 그땐 나오느라 바빠서 그럴 틈도 없었다.

  "에이 참."

  메이든은 소매 끝에 주전자 주둥이가 걸린 줄 모르고 돌아서다가 주전자를 엎어트렸다. 땡그랑-!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바싹 마른 녹차 잎이 우수수 쏟아졌다. 메이든은 흠칫했다. 그녀가, 그 책을 아궁이에 넣었다!

  "미안해요…"
  "뭐가요?"

  서쪽 신전지기가 다급히 물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메이든은 신중치 못한 자신을 질책했다.

  "그 책은 없어요. 제가… 그때 아궁이에 넣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서쪽 신전지기는 등잔을 팽개치고 비좁은 아궁이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잠시 동안 뒤적이는 소리와 잿먼지가 화덕 틈새로 비져 나왔다. 그리고 한참 동안 조용했다. 메이든은 그가 잿먼지에 질식해 죽었을까봐 더럭 겁이 났다. 다행히 서쪽 신전지기는 살아 있었다. 메이든은 그의 등이 엷게 들먹이는 걸 보고 안심한 한편으로 불편해졌다. 그녀는 말 없이 복도로 나왔다. 좀 있다가 얼굴의 재를 대강 닦아 낸 서쪽 신전지기가 나왔다. 아무리 봐도 실컷 운 얼굴이었지만 메이든은 모른 척 했다.

  "찾았어요?"
  "아뇨."

  무너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의 목소리는 처음처럼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좀 더 마음에 걸렸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어요?"
  "아무 것도."

  서쪽 신전지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요, 이젠. 제가 괜한 욕심을 부렸어요. 그건 마일드가 당신네 그녀한테 선물한 거였어요. 그리고 이제 영원히 그녀의 것이 됐군요."

  서쪽 신전지기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볼썽사나운 꼴을 보였군요."    
  "난 아무 것도 못 봤어요."

  메이든이 대꾸했다. 서쪽 신전지기는 가만히 서 있다가 그녀의 손에서 등을 건네 받았다.

  "잠깐 따라 와 볼래요?"

  메이든은 얼결에 그를 따라 나섰다.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들었지만 살필 틈이 없었다.

  서쪽 신전지기는 동쪽으로, 동쪽으로 걸었다. 숲으로 들어서자 어둠이 그들을 바싹 뒤쫓아 왔다. 앞장선 서쪽 신전지기의 등과, 그 앞의 반쯤 가린 작은 등잔만이 메이든이 볼 수 있는 전부였다. 그녀는 마치 세상 끝으로 향해 걷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락이 불쑥 그녀를 삼켜 버릴 거 같아서 더럭 겁이 났다.

  "다 왔어요."

  메이든이 정말로 세상 끝에 가는 게 아닌가 걱정할 즈음 서쪽 신전지기가 가렸던 등잔을 완전히 드러냈다. 순간 숲 전체가 거대한 등불처럼 타올랐다.

  "아…!"

  메이든은 탄성을 질렀다. 서로 가지를 얽은 붉은 나무들은 경이로우면서도 소름끼쳤다.

  "이리로."

  서쪽 신전지기가 안내한 것은 독서가의 나무였다. 메이든은 어둠 속에서도 그 나무를 금방 알아봤다.

  "이 아래에는 큰 공동이 있고, 거기 강이 흐르고 있어요."
  "강?"
  "세상의 대동맥이죠."

  메이든은 반은 이해하고 반은 이해하지 못했다. 용어는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 뭐가 있는 지 알아요?"

  메이든은 고개 저었다. 서쪽 신전지기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메이든은 물러섰지만 서쪽 신전지기는 놔주지 않았다. 메이든은 갑자기 몸이 땅속으로 함몰되는 것을 느꼈다. 그건 무척 이상한 경험이었지만 무섭진 않았다. 서쪽 신전지기의 체온이 느껴져서 안심되었고 이동 자체가 마치 꿈에서 꿈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곳에는, 이든과 마일드가 있었다. 그 둘은 나무였다. 하나는 동쪽 끝에, 하나는 서쪽 끝에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지하 깊은 수맥을 통해 뿌리가 닿아 있었다.

  그들은 무척 행복하고 편안해 보였다. 바람이 그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가끔은 시냇물이, 가끔은 나비가, 새가,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그들의 대화를 전했다. 그들은 꿈의 방에 책 얘길 하고 있었다. 마일드는 그 방을 꼭 구경하고 싶다고 했고, 이든은 언젠가는 볼 수 있으리라고 말해 주었다.

  '언젠가 그 방에서 당신과 얘길 나누고 싶어요.'

  연인들은 속삭였다. 메이든은 혼돈을 느꼈다. 그건 지독히 부당한 일이었지만 지극히 당연해 보였다.

  '안돼요…'

  메이든은 이든을 붙잡았다.

  '그자를 만나면 안돼요. 그자에게 가지 마요. 안 그럼, 당신은 낙오될 거예요.'

  메이든은 독서가가 이미 낙오자가 됐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는 다만 이든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놔주렴 메이든, 난 어느 때보다도 지금이 가장 행복하단다. 그러니까, 너도 행복해지렴.'

  잎이 피지 않은 나뭇가지들이 부스럭댔다. 메이든은 독서가의 포근한 손이 어깨에 닿은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러나 그건 서쪽 신전지기의 손이었다.

  "그녀는 갔어요."

  메이든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바싹 마른나무 둥치를 안고 울고 있었다.

  "내가 그 책을 없앴다고 복수하는 건가요?"
  "아니예요."
  "나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거죠. 당신도 그자니까, 날 낙오시키려는 거죠! 난 안 속아요. 난 성공 할거야."

  메이든은 울부짖었다. 서쪽 신전지기는 담담히 고개 저었다.

  "난 단지 그들이 행복하다고 말해 주고 싶었어요."

  
  
  거친 밤이 지나고 새벽이 왔다. 메이든은 홀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 갔다 오는 거니?"

  메이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담 그늘에서 쪼그리고 있던 누군가가 일어섰다.

  "엄마?"
  "너 지금 제정신이니?"

  메이든은 머래채를 잡힌 채 집안으로 질질 끌려 들어갔다. 독서가네 집에 갔다고 머리채를 잡힌 이후로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너 미쳤니?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고작 하고 다니는 짓이 이거야? 다른 사람이 봤으면 어쩔 뻔했어! 아무리 신전지기라지만, 엄연한 그자다. 줄초상 치르는 꼴보고 싶어?"

  우박처럼 쏟아지는 엄마의 질타에 메이든은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만 모른 척 해주면 되요."

  메이든은 엄마를 마주 보았다. 엄마와 딸이 아닌 한 어른 여자가 다른 어른 여자를 보는 시선이었다.

  "그러면 아무도 몰라요."

  엄마는 기가 막혀서 입을 떡 벌렸다.

  "나쁜 것! 잘못했단 소린 요만치도 않고 고작 하는 소리가 그거냐?"

  메이든은 쏟아지는 뭇매를 그냥 다 맞았다. 어릴 때만큼 아프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메이든의 의연한 태도에 더 약이 오른 엄마는 부지깽이를 집어들었다가 팽개쳤다.

  "그래! 네 눈에 내가 얼마나 하찮을지 않다. 그 여잔 넷이나 가지고도 하나를 꼭 더 갖는구나. 너는 그 여잘 가엽다 하겠지만 난 조금도 가엽지 않다. 죽어서도 살아서도 모두 다 가졌는데 무어가 불쌍해?"

  엄마의 눈이 벌개졌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메이든은 당황해서 방으로 도망쳤다. 잠시 후 울음소리가 낮아지더니 곧 완전히 멎었다. 그리고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적막은 불청객처럼 찾아왔다. 메이든은 침대 위에 몸을 웅크렸다.



  시간이 쥐죽은 듯 흘렀다.

  어느 날 새벽, 메이든은 파란 꽃이 지고 쬐그만 열매가 맺힌 걸 발견했다. 작지만 선명한 금빛 줄무늬가 반짝였다. 메이든은 이 순간을 상상할 때마다 무척 기쁘고 뿌듯하리라 기대했었다. 그런데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메이든은 서운함을 느끼며 화단에 물을 주었다. 그때 담 너머에서 이그노가 그녀를 불렀다.

  "메이든!"

  메이든은 고개를 내밀었다.

  "이그노? 꼭두새벽부터 어쩐 일이야?"
  "큰일났어, 큰일!"

  이그노는 숨을 몰아쉬며 집안으로 쳐들어왔다. 그녀는 문을 닫기 전에 밖을 꼼꼼히 살피고 안에서 단단히 잠갔다. 메이든은 이그노가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래?"
  "이번 자격자들 중에서 부정을 저지른 사람이 있대. 서쪽 신전지기까지 관련되어서, 신전지기는 지금 유폐되었대."

  메이든은 가슴이 철렁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신전의 일을 아무나 함부로 알 수는 없었다.

  "내 쌍둥이들이 가장 먼저 의심받았어. 어젯밤에 조사 나왔었거든. 당연히 아니지만 말야. 오늘은 너네 집에 온 댔어. 너 뭐 찔리는 거 없지?"

  메이든은 고개 저었다. 행여나 입을 열었다가 비밀이 새어나갈까 두려웠다.

  "하긴 똑똑한 네가 그런 바보짓을 했을 리 없지. 그럼 대체 누굴까?"

  이그노의 눈이 빛났다. 메이든은 그녀가 모른다고 믿고 싶었다.

  "근데 너, 엊그제 밤에 누구랑 있었어?"

  그러나 바람은 비켜 나갔다. 메이든은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누구…냐니, 난 그냥 집에서…"
  "어제 너네 엄마가 신전에 오셨어."

  그 말이 결정타였다. 메이든은 뒤통수가 아찔했다. 엄마가 배신했을거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도 봤어. 네가 서쪽 신전지기랑 가는 거."

  이그노는 사냥감의 목덜미를 단번에 물어뜯었다. 메이든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난 네가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서쪽 신전지기랑 있었다는 게 들통나면 꽤나 의심받을 거야."

  메이든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눈앞이 캄캄했다.

  "너, 어떻게 할래?"

  그건 메이든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너, 도망가."

  이그노가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뭐?"
  "짐 싸 갔고 튀라고. 만약에 네가 걸리면 너희 집 대는 끝장이야. 완전히 실격 당할 거라고."

  메이든은 달아나는 게 더 의심받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부정을 저지른 게 자명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도망치면?"
  "그 다음은 네 똑똑한 머리로 알아서 생각해. 이번처럼 바보짓 하지 말고."

  메이든은 이를 악물었다. 귓볼이 뜨거웠다. 이그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메이든은 방으로 뛰어갔다. 창 밖은 아직 새벽의 푸른 기운으로 가득했다. 메이든은 그게 너무 눈부셔서 울었다. 그러나 계속 울고 있을 틈은 없었다. 그녀는 뺨을 때리며 필요한 것을 생각해 내려 애썼다. 머리가 멍해도 몸은 저절로 움직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메이든은 장을 열고 필요한 것을 마구잡이로 챙겼다. 기왕이면 깨끗한 걸로 가져가고 싶었는데, 어디나 다 검붉은 얼룩 투성이였다. 순간 메이든은 깨달았다. 얼룩은 원래 거기 있던 게 아니라 방금 메이든의 손에서 묻은 거였다.

  "꺄악!"

  비명 소리를 듣고 이그노가 달려왔다.

  "왜 그래? 괜찮아?"

  메이든은 재빨리 침실 문을 걸어 잠갔다.

  "괜찮아. 쥐가 나왔어."
  "저런! 아직 거깄어? 잡아 줄까?"
  "됐어. 방금 도망갔어."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어?"
  "괜찮아. 망이나 잘 봐줘."

  메이든은 이그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었다. 그녀는 문고리를 쥔 채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바닥에 질척하게 고인 핏자국에 메이든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각인 되어 있었다. 피 길의 끝엔 그녀의 다리가, 무릎이, 납작한 배가, 그리고 가슴이 있었다. 그 피는 홍반에서 흘러나온 거였다. 진즉 사라진 줄 알았던 홍반이 안에서 곪아터진 거였다. 메이든은 자기가 죽을 거라는 걸 알았다. 낙오자가 되어서 죽을 거라는 걸.

  "후…"

  메이든은 눈을 감았다. 달아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멀리서 그녀의 집을 향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동쪽 신전지기이리라. 메이든은 조롱과 비난 속에서 끌려나가는 붉은 몸뚱아리를 보았다. 그건 메이든 자신이었다. 동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그노도 프린도 고소해 했다. 그러나 엄마는, 엄마만은 무척 슬픈 얼굴이었다. 메이든은 엄마가 엄했던 건 자기를 걱정했기 때문이란 걸 그제야 알았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메이든은 바닥을 더듬었다. 아까 장을 뒤지느라 팽개쳐 둔 약상자가 근처에 있었다. 메이든은 상자 뚜껑을 열고 작고 날카로운 칼을 쥐었다. 피에 젖어 미지근한 손에 선뜩한 한기가 들었다. 메이든은 심호흡했다.

  "난 낙오자 따윈 되지 않아."

  메이든은 스스로 목을 찔렀다. 독서가의 웃음이 떠올랐다. 메이든도 웃고 있었다.



  어젯밤 신전에 다녀온 뒤로 밤새 뒤척이던 엄마는 새벽에 눈을 떴다.

  '이번 시험에 부정을 저지른 자가 있습니다.'

  동쪽 신전지기가 말했다.

  '어떻게 그런!'
  '부끄럽게도 우리들 신전지기가 관련되어 있다더군요.'

  엄마는 기막혀 하는 한편으로 신전지기가 왜 일부러 자기에게 그런 얘길 하는지 의아해 했다.

  '그래서, 누군지 알아 냈나요?'

  동쪽 신전지기는 고개 저었다.

  '아뇨. 그래서 직접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이그노였고, 내일이 댁의 따님입니다. 그래서 행여나 너무 놀라지 마시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저희가 돌아가면 어머니께서 따님을 안심시켜 주세요. 열매는 키우는 사람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니까요.'

  엄마는 신중히 물었다.

  '밝혀지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지요?'
  '꽃은 꺾이고 영구 실격 처리됩니다. 낙오되지 않더라도, 두 번 다시 자격을 받을 수 없지요. 하지만, 실은 밝히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씨앗은 이미 싹이 텄으니 모양으로 구분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부디 부정한 자를 찾아내기를…'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러나 속으로는 반대로 말하고 있었다. 어떤 짓을 했건 간에 일단 꽃을 피웠다면 그건 누구도 빼앗아선 안됐다.

  엄마는 그 길로 총총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서야 그 말이 다시 생각났다.

  '우리 신전지기가 관련되어 있다더군요.'

  그때, 서쪽 신전지기가 왜 메이든을 찾아 왔었지? 그 생각을 하느라고 엄마는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결국 새벽에 깬 엄마는 곧장 메이든 네로 갔다. 조급할 일은 전혀 없는데 자꾸만 걸음이 빨라져서 숨이 턱에 받혔다.

  엄마가 메이든의 집에 도착했을 때, 안에는 이그노가 있었다.

  "왜, 네가 여기 있지?"

  이그노는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아줌마 전…"

  엄마는 이그노를 밀치고 메이든의 방문을 열었다. 방은 잠겨 있었다. 엄마는 열쇠 통에서 열쇠를 찾아내 문을 열었다. 피투성이의 작은 몸뚱아리가 소리 없이 문밖으로 밀려나왔다. 이그노는 비명을 틀어막았다. 엄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애에게 무슨 소릴 했니?"

  이그노는 고개 저었다.

  "전 그냥… 별소리 안 했어요. 좀 놀려 주고 싶어서… 심술이 나서…"
  "그만 가거라."

  엄마는 엄히 말했다.

  "여기서 일어난 일은 잊어. 왔었다는 말도 하지 마라."

  이그노는 울음을 삼키며 돌아갔다. 엄마는 죽은 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피가 옮겨 묻지 않게 옷을 벗었다. 그리고 부엌에서 물을 떠다가 문과 바닥의 핏자국을 말끔히 씻어 냈다. 메이든의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깨끗한 침대에 누운 메이든은 잠자고 있는 것 같았다. 목을 찌른 칼자국은 깊지만 작아서 머리카락으로 감추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엄마는 피묻은 옷과 시트를 허브와 함께 태워서 집안의 피냄새를 말끔히 없애고 처음처럼 옷을 입고 집을 나왔다. 지금쯤 신전에서 메이든을 조사하러 출발했을 것이다.

  엄마는 마당에서 말없이 갓 꽃피기 시작한 연두색 나무를 쳐다보았다. 삐죽이 내밀어진 꽃잎은 물처럼 파란 하늘색이었다. 엄마는 화단에 물을 주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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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 No Profile
    날개 07.11.26 17:02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어요. '낙오자'라는 키워드에 흥미를 가지면서 이야기의 끝을 읽을 때까지 정신없이 읽게 되는 듯.
  • No Profile
    은림 08.03.30 20:55 댓글 수정 삭제
    문득 예전 글들을 다시 뒤적였는데.... 이 낙오자는 버젼 0.9네요^^;;; 1.0은 전자책이나 종이 책에 있어요. 다시 읽어주실 분이... 계실런진 모르지만요^^;;
  • No Profile
    배명훈 08.03.30 21:13 댓글 수정 삭제
    앗, 최근에 다시 읽을 때 이 버전으로 읽어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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