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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복 신데렐라의 칼

2005.01.28 20:1701.28

  [물론 그녀는 남은 이틀간도 무도회에 모습을 나타냈다. 매번 다른 옷으로 몸에 걸친 금과 은 의 양은 더욱 늘었고, 대신에 옷감이 차지하는 면적은 비례적으로 줄어가서 빼어난 미모보다도 시선 끌 곳이 많았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 그녀의 변화가 재미있어서 빠지지 않고 어머니를 졸라 무도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달아나던 그녀가 어설프게 황금신 한 짝을 놓고 달아났을 때는 정말 소름끼치는 유치함에 배꼽잡고 웃었다. 근래에 일어난 일들 중에 이 정도로 나를 즐겁게 한 에피소드는 없었다. 살짝 얽히기만 해도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금은 덩어리는 흔적도 없이 고스란히 가져가고 그렇게 과격하게 춤을 추어도 발에 달라붙은 듯 떨어지지 않던 신발 한쪽을 잃어버리고 갔다면 어느 누가 납득할까? 떨어트리고 간 것이 손수건 보다 많이 비싼 황금 신이란 것만 다르지 남자의 관심을 끌고 쫓아와 달라고 꼬리치는 요부가 쓰는 수법과 다를 바 없는 방법이었다. 그녀는 그 부분에서 나에게 낙점을 받았다. 그러나 왕자님께는 적당히 잘 먹혀든 모양이었다. 왕자님은 너무나도 소중하게 그 신을 안아 들었던 것이다. 하긴 젊고 아름답고 섹시한 것이 전부일 왕자님의 평가 기준에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 고발자 (은림)



  “내 생각에 아버지란 새끼들은 정말 개 같은 새끼들이야. 아니 그거보다 더해!”

  내가 주장했다. 엘라는 대꾸 없이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사실 엘라가 ‘그래, 맞아 전부 개 같은 새끼들이지’라고 맞장구 쳐 줄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적어도 이 얘는 그 못돼 빠진 두 언니 년들 보단 한참은 어수룩하니깐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고개를 한번 끄덕거리더니 내 말이 맞다고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저녁에 뭔가 이상한 거라도 먹인 것 같았다. 그 괴팍하고 재수 없는 계모가 무언가 먹였다면 말이다. 한 참후 엘라는 나를 힐끗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엄마를 잊어버린 건 나쁜 일 같아. 묘지에 꽃을 가져다 놓지 않는 것 말야.”

  나는 종알종알 떠들어댔다. 그 재수 없는 딸년들과 계모는 말할 것도 없고 엘라의 아버지와 견주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내 아버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술주정뱅이에다가 노름꾼에 틈만 나면 날 때리기도 하는 적어도 엘라의 아버지는 그녀를 때리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면 어떻게 버틸 수 있겠어? 그러나 옆집 사는 엘라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생화(生花)를 못사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대신 그녀는 종이로 만든 꽃을 가지고 있었다. 좀 우스꽝스럽지만 뭐 상관없었다. 그나마 우리가 이른 저녁에 산책하듯이 엘라 어머니의 무덤까지 올수 있는 것은 온 나라가 떠들썩한 왕자의 무도회 덕분이다. 엘라의 자랑스러운 두 언니와 계모는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온갖 치장으로 하고 무도회장으로 가벼렸기 때문이다. 무도회에서 밤새 춤을 추고 수다를 한껏 떨고는 새벽이 돼야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것 때문에 엘라를 덜 괴롭히는 것 같았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왕자에게 머리 숙여 감사해야할 정도다. 무도회는 이제 막 시작했다. 그게 지난주였던가. 놀랍게도 무도회는 100일간 열린다고 한다. 그동안 엘라가 질질 짜는 일은 많이 줄어들 것 같았다. 어쩌면 정신 나간 왕자가 그녀의 언니중 하나를 신부로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럼 적어도 지금보단 덜 불행하겠지. 성안에 들어가면 대놓고 엘라를 괴롭힐 순 없을 테니깐, 다행히 그 언니라는 것들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물론 겉모습만은 말이다. 왕자를 충분히 홀릴 수 있을 터였다.


  회색 벽의 어둡고 좁다란 경사진 골목길을 빠져나와서 작은 아치형 다리를 건너서 좀 더 걸어가면 공동묘지가 보였다. 엘라 어머니의 무덤은 개암나무 밑을 지나면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종이꽃이 진짜 꽃이라도 된다는 듯 소중하게 두 손으로 꼭 안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에겐 생화를 살 돈 따위가 없었다.

  개암나무 밑을 막 지나칠 때였다.

  “먼지투성이 소녀야!”

  묘하고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속에서 큰 날개를 접고 숨죽이고 있어서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주의 깊게 살펴보자 어둑한 달빛에 살짝 비친 칠흑처럼 검은 눈이 반짝였다. 큰 갈까마귀 한 마리였다.

  “니가 말 한 거니?”

  엘라는 반쯤 죽어가는 개암나무 가지에 앉아있는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은 힐끔 우리를 쳐다보더니 큼직한 날개를 한번 펄럭이며 엘라의 어깨위에 사뿐히 내렸다. 그리곤 갑자기 날렵한 고양이의 몸으로 변했다. 똑같은 검은 색이였다.

  “예쁜 꽃이군요. 아가씨!”

  검은 고양이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더니 소녀가 두 손으로 감싸 안듯 들고 있는 종이꽃 위로 뛰어 내렸다. 그리곤 종이꽃에 입을 맞췄다.

  놀라운 일이였다. 종이꽃은 조금씩 빛나더니 가늘고 긴 짙은 푸른색 줄기가 길게 자라났다. 곧 그 줄기 사이사이에서 붉고 예쁜 꽃이 꽃망울을 활짝 폈다. 겹겹이 얇고 연한 붉은 색 꽃은 마치 봄날 처녀의 치마 자락처럼 한들거렸다. 엘라는 놀라움과 경이감에 꽃이 변해가는 걸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달랐다. 개암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 부러뜨린 후 고양이를 후려치려고 달려들었다. 교활한 고양이 녀석은 다시 가볍게 땅바닥으로 훌쩍 뛰어 내리더니 손쉽게 공격을 피해 다녔다.

  “이 요물 같은 게 어디서 사람을 홀리려구!”

  버럭 소릴 지르자 고양이는 훌쩍 점프를 뛰어 다시 개암나무 가지 위로 올라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는 신경질적으로 개암나무에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앙칼진 목소리로 울더니 땅위로 다시 내려와서는 엘라에 품으로 달려들었다. 소녀는 붉은 꽃을 이미 무덤 앞에 내려놓은 후였다. 소녀는 아기처럼 고양이를 안았다.

  내가 화가 나서 고양이 목을 조르려고 달려들자. 소녀는 나에게 등을 보이며 검고 작은 고양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만둬 이베트, 꽃을 준거뿐이잖니”

  고양이 녀석도 볼멘 목소리로 항변했다.

  “착한 소녀의 말을 들으렴, 성격장애, 신경질쟁이야!”

  엘라는 고양이를 꼭 끌어안고 ‘다치지 않았니?’라고 물어본 후에 ‘얼마나 놀랐을까? 불쌍한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고양이는 가르릉 거리더니 원망하는 듯한 울음소리를 잊지 않았다. 엘라는 고양이 따위가 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붉은 꽃으로 변한 종이꽃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런 일은 흔한 게 아니었다. 특히나 이런 음침한 묘지에선 말이다.

  호의를 베풀 천사는 이 세상엔 없다. 저 요물이 뭔가 대가를 바라고 접근한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릴 홀리려고 한다던가. 그게 무엇이든 엘라는 상관없다는 투였다. 나는 당장 목이라도 졸라서 그 속셈을 들어보고 싶었지만 녀석은 어수룩한 소녀의 품속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그 후로 우리는 그 꺼림칙한 고양이를 자주 만났다. 탐탁지 않았지만 엘라가 졸라서 매일같이 녀석을 만나러 갔다. 검은 고양이가 입을 맞추면 어떤것이든 신기하고 화려한 것들로 변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이 환상이란 걸 알았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 환상들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름 모를 화려하고 예쁜 붉은 꽃도 다시 종이꽃으로 돌아갈 뿐이다.

  엘라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금방 시시해졌고 왠지 모르게 불길해서 묘지에 가는 걸 꺼려했다.


  그 후에 내가 고양이를 만난 것은 며칠이 더 지나서였다. 엘라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오늘 저녁엔 꼭 고양이를 만나러 가야한다고 졸라댔기 때문이었다. 무도회 때문에 계모와 두 딸이 집을 비운사이 우리는 다시 고양이를 만날 수 있었다.

  “무도회 갈 준비는 다 됐나요? 아가씨들!”

  고양이는 어둠속에서 걸어 나오며 속삭였다.

  “무도회 따위는 가서 뭐하게?”

  “나 꼭 가보고 싶어서 고양이에게 부탁했어. 이베트, 너도 같이 가자? 응??”

  모든 일이 이렇게 시작됐다. 고양이가 엘라에게 입을 맞추자. 그녀의 더럽고 평범한 옷이 멋진 이브닝드레스로 변했다. 반짝거리는 유리구두와 팔꿈치까지 오는 흰 장갑, 어깨를 살짝 덮은 얇고 화사한 숄,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 사파이어, 백금으로 장식된 귀걸이며 목걸이 머리장식 팔찌 같은 장신구가 달빛에 반짝였다. 그녀의 얼굴엔 더 이상 상처가 없었다. 계모나 언니들이 달아준 상처나 멍 따위는 말끔히 사라졌다. 뭔가 엘라 같지가 않았다. 단지 몰골이 초라하고 얼굴과 몸엔 상처투성이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아윈 몸은 적당히 살이 올랐고 얼굴 턱선은 좀 더 갸름해졌고 눈동자는 촉촉하고 밝게 빛났다. 어머니가 살아계셨고 아니 그녀의 아버지가 좀 더 제정신 이였더라면 저런 모습으로 켰을까? 왠지 서글퍼졌다. 고양이의 키스는 나에게도 통했다. 엘라는 모르겠지만 평생 이런 화려한 옷을 입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해봤다. 왠지 거추장스럽고 우스꽝스러웠다.
  겉모습만 바뀐다고 뭐가 틀려지니? 내가 고양이에게 투덜대자 녀석은 의기양양해져서는 모든 게 다 잘 풀릴 거라고만 얘기했다. 녀석은 또 12시가 지나면 마법이 풀릴것이며 그전에 무도회장을 빠져나와야 한다고 충고 했다.

  이번엔 바닥에 떨어진 개암나무 열매에 입을 맞추자 둥근 열매는 빛을 내더니 순십간에 마차로 변했다. 개암나무 잎은 말로 변했고 마부는 검은 예복을 입은 고양이가 담당했다.
  고양이는 한껏 과장된 몸짓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마차의 문을 열었다. 우리는 마차에 탔으며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무도회장에 도착하자. 모든 일들이 고양이의 말처럼 순조롭게 풀렸다. 정문 앞 경비병은 순순히 문을 열었다. 초대장을 요구하는 일은 없었다. 엘라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사람들은 마치 엘라가 이곳의 주인이라고 되는 양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왕자를 사로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뭘 했냐고? 몇 번 시시한 녀석들이 춤을 청해서 한 번도 배워 본적 없는 춤을 추거나-놀랍게도 춤을 잘 추게 됐다. 이것도 녀석의 마법이겠지, 사람들과 수다를 떤 것이 전부였다. 무슨 질문을 하던 입에선 적당한 대답이 거짓말처럼 술술 나왔다. 엘라는 무척 행복해보였다. 나는 엘라의 계모와 두 언니를 그 안에서 찾아냈다. 그녀들은 오늘밤 한 소녀를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쳐다보겠지. 그녀들의 아름다움은 왠지 우리가 고양이의 키스로 초라한 외모를 감춘거와 비슷해 보였다. 아름다운 속에 추악함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불쾌하고 슬퍼보였다. 이런 밤들이 계속 되면서 나는 왠지 더 불안했다.  


  한번은 무도회장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내가 말했다.

  “엘라, 우리 무도회 가는 거 그만 두자. 왠지 불안해.”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뭔가 딴생각을 잔뜩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심이 가득한 불안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 정말 기분이 별로였다. 특히나 마법이 풀릴 때 정말로 기분이 별로였다. 왠지 큰 죄를 짓는 것 같았고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정말로 초라하고 불쌍하게 느껴진다는 거였다. 엘라의 경우는 더했다. 그녀는 마법이 풀리면 너무나 슬픈 표정을 하곤 했다. 고양이의 키스는 마약과도 같았다. 12시가 되기 전에 우리는 서둘러 무도회장을 빠져나오건 했다. 고양이의 말대로 마법은 풀렸다. 화려한 드레스는 더럽고 볼품없는 옷으로 변했다. 반짝이는 유리구두나 빛나던 장신구 따위는 없었다. 얼굴에 상처와 멍들은 여전했다. 그녀는 마법이 풀릴 때 마다 가슴을 꼭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했다.

  엘라의 고통은 가슴과 가슴사이에 나타난 검붉은 발진 때문이었다. 다음날엔 부풀어 올라 혹이 생겼다. 그것은 조금씩 켜져 가는것 같았다. 고양이에게 혹에 대해서 물어보자. 녀석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엘라의 어깨에 올라타더니 그녀에게만 속삭이든 뭔가 얘기한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물어봐도 녀석도 엘라도 입을 다물었다. 혹은 점점 켜져 갔고 고통도 심해지는 것 같았다. 엘라는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단지 무도회장에서만 행복해보였다. 적어도 마법이 풀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마법이 풀리면 엘라의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혹은 마치 마법의 대가처럼 느껴졌다. 단지 다음날 밤을 기다릴 뿐 이였다. 달콤한 고양이의 키스를…….


  이 이상하고 무서운 일들은 모두 사흘째 밤에 일어났다. 엘라는 여전히 무도회장에서 부러움과 시기를 동시에 받고 있었다. 왕자는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엘라에게 청혼을 할 준비가 되어 보였다. 물론 그녀의 마법 풀린 초라한 모습도 상관없다면 말이다.

  늘 그렇듯이 시간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고양이의 마법처럼 말이다. 시간이 다 되어갔다. 곧 12시가 될 테고 그럼 마법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엘라 우린 돌아가야 해.”

  “아직, 시간이 …….”

  엘라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가슴을 두 손으로 꼭 안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창백한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눈가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살짝 패인 드레스 안쪽으로 부어 오른 혹이 어느 때보다 커보였고 검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너무나 불길했다.

  “엘라, 돌아가자. 응?”

  소녀는 한쪽 손으로 명치를 꼭 누른 채 대꾸하지 않았다. 마치 딴 사람 같았다. 이전에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사람 같았다. 물론 그 고양이의 얄팍한 마법으로 겉모습이 바꿨다 해도 말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느다랬고 고통이 묻어났지만 단호했다. 나는 엘라를 부축했다.

  “오늘 밤이 지나면 모든 게 바뀔 거야.”

  그녀는 나를 밀쳐냈다. 고통 속에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고양이가 나에게 속삭였어. 자신의 마법은 영원할 수가 없대. 하지만 내 분노는 가슴속에 담고 가라고 했어.”

  그녀는 한손으로 가슴과 가슴사이에 불길하게 부어오른 혹을 꼭 감싸 쥐고는 천천히 유리구두를 벗었다.


  지금에 와서 그때의 일들은 왠지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때 일을 제대로 표현해낼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모든 게 고양이 키스처럼 환각일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다 해도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분명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

  엘라는 유리구두를 벗었다. 무도회에서 가장 빛났던 소녀는 맨발로 차디찬 대리석 바닥을 밟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졌다. 음악소리는 멈췄고 주변의 소란스러운 잡음들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숨을 멈췄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가는 것만 같았다. 소녀의 긴 드레스가 바닥에 끌리고 왕자가 그녀를 보더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조금씩 뒷걸음 쳤다. 이제 곧 마법이 풀릴 참이었다.

  맨발의 소녀는 고통을 참지 못한 듯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꼭 끌어 않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고양이의 목을 조르려고 했을 때 그녀가 녀석을 보호하려고 꼭 안고 몸을 웅크리던 것을 연상케 했다. 왕자가 다가왔다. 뭐라고 묻는 말, 여기서는 들리지 않았다. 소녀가 왕자를 밀쳐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가슴사이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마치 소녀의 몸속 깊숙이 박혀있는 길고 치명적인 쇳덩어리 같았다. 그 날카로운 쇳덩이가 엘라의 몸속에서 끄집어내지는 게 보였다. 저 작고 연약한 몸에서…….

  힘없고 가느다란 엘라의 팔이 길게 아래에서 위로 큰 반원을 그렸다. 비명소리, 아니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사람들을 봤을 땐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고 입은 최대한 벌리고 있었다.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쏠려있었다. 나는 계속 뒷걸음질 쳤다. 더 빨리, 더 빨리…….

  왕자의 목이 깨끗이 잘려나가는 것이 보였다. 왕자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더니 천천히 몸에서 떨어져 내렸다. 차디찬 대리석 바닥에 탄성 없는 공처럼 떨어지더니 대굴 대굴 굴러 다녔다. 머리가 없는 몸은 오랫동안 서 있었다. 목에서 세찬 피가 뿜어져 나왔는데 마치 분수 같았다. 사방으로 피가 솟구쳤다.


  나는 미친 듯이 달려서 무도회장을 빠져 나갔다. 힐끔 뒤돌아봤을 때.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무도회장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위협적인 모습의 경비병은 온데간데없었다. 종탑의 시계는 곧 12시의 첫 번째 종소리를 울리려고 하고 있었다. 마법은 곧 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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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은림 05.01.30 01:25 댓글 수정 삭제
    헉! 오빠... 우린 성별이 바뀐거 같아 어째6^;;;
  • No Profile
    미주 05.02.28 23:01 댓글 수정 삭제
    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리는듯해요.
    어느새 이베트가 되서 글을 읽고있었어요.
    신데렐라가 대체 왜 왕자를 찌른걸까..?
    이베트의 머릿속에 가득 떠올랐을 생각이 아니였을까.
    아르하님글은 계속해서 뭔가가 이어질듯.
    정말 섬세한 묘사가 돋보여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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