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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인큐베이터

2017.10.04 23:3510.04

1.

현우의 얼굴로 스테이플러로 철한 A4 문서가 날아들었다.

“이 멍청아! 샘플을 이 꼴로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 해! 스탁까지 전부 죽었잖아!”

실험복 차림의 강민 선배가 옆구리에 손을 얹고 현우를 내려다보며 고함쳤다. 똑같이 실험복 차림인 현우는 강민 선배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말 없이 서 있었다. 강민 선배는 박사과정 중이었고, 현우는 석사 2년차였다.

“내가 시간 딱딱 맞춰서 흡광 찍고 양분 주고 분주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어!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강민 선배는 ‘딱딱’이라는 말을 할 때 현우의 눈앞에서 손날로 자기 손바닥을 두 차례 찍으며 현우를 위협했다.

“죄송합니다.”

현우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민 선배는 일그러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뭐 하다가 못한 거야!?”

현우는 그 질문에 반사적으로 ‘힘들어서.. 지쳐서..’라는 대답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뱉지 않을 분별력은 있었기에 실제로 나오는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자다가..”

강민 선배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바닥을 보며 외쳤다. 그 목소리에 울분이 서려 있었다.

“자다가!? 자다가?!”

강민 선배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현우를 노려봤다.

“그깟 몇 시간 자는 거 못 참고 일주일을 날렸다!? 여태까지 데이터 얻은 건 어떻게 할 건데! 그거 다 버려야 하잖아! 그 짓을 또 해!? 아니,”

강민 선배는 다시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생장률 보는 배지는 그렇다 치자, 표준균주 다시 주문해서 오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 일주야 일주! 그거 또 세 번 계대배양 해야 하잖아!”

강민 선배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현우의 어깨가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강민 선배는 한숨을 쉬며 이마에 손을 짚은 채로 자리에 앉았다. 현우는 잠시 강민 선배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하고는 슬그머니 작업대로 향했다.

 

현우는 잔뜩 쳐진 어깨를 한 채로, 방금 사용한 온갖 시약과 초자들이 어지럽게 늘어선 작업대 위에 놓인 곰팡이 배지를 우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한 동안 그러고 있다가는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었다.

‘실험은 또 실패다. 대체 어디서 문제가 생긴 거지?’

현우는 배지 옆쪽에 있는 실험노트를 펼쳤다. 페이지를 넘기다 오른쪽 위에 9.19라고 적힌 부분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 잠시 생각했다.

‘계량하는 데 문제가 있었나? 양이 조금 적기는 했는데,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해서 넘겨 버렸었지.’

현우는 그날 전자저울 위에 놓인 유산지에 잔뜩 긴장한 상태로 시약을 계량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현우의 손이 페이지를 반대쪽으로 넘겼다. 이번엔 페이지 오른쪽 위에 9.18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니면 부피 계량에 오차가 있었을 수도. 일회용 피펫을 쓰는 게 아니었는데.’

현우는 자신이 그 날짜에 매스실린더에 담긴 액체를 일회용 피펫을 이용해 극도로 조심히 옮기는 작업을 했다고 기억했다.

다음은 오른쪽 위에 9.17이라고 적혀 있는 페이지였다.

‘이때 실험 조건 잘못 잡았다는 거 알고 급하게 수정했었는데, 생각을 잘못 한 건가? 빨리 데이터 뽑을 욕심에 여유 없이 서두른 감이 있었어.’

그때 현우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으며 계산기를 두드리고는 실험노트에 개선된 계산 값들을 거칠게 끼적거렸었다.

9.16 페이지.

‘교반하는 시간이랑 온도... 오버슈팅이 좀 있었는데 평형상태로 만들려면 삼십분 정도 필요해서 그냥 심한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렸어.’

현우는 내내 한 자리에서 기다리다 지친 탓에 눈을 감고 어깨를 주무르다가, 휴대폰 알람이 울리자 재빠르게 가열교반기의 스위치를 내리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했다.

9.15 페이지.

‘이때 컬럼을 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프렉션 나누는 데 좀 소홀히 한 면은 있는데.’

지루한 표정으로 작업대에 엎어진 채 유리관 끝에서 엄청나게 천천히 똑똑 떨어지는 푸른 액체를 바라보던 모습이 가장 인상에 강하게 남은 기억이었다. 그러다 깜빡 잠드는 바람에 일부 시료가 시험관에서 넘쳐 바닥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실험노트는 계속해서 9.14라고 적힌 장으로 옮겨갔다.

‘이때부터 잘못되었으면 그냥 답도 없고.’

현우는 페트리 접시에 평판도말을 하는 자신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위에 9.13라고 적힌 페이지였다. 현우는 검지로 해당 페이지를 위에서부터 훑으며 빽빽하게 적혀 있는 시약 리스트를 검토했다.

‘몇몇 군데 반올림해서 계산한 부분도 있는데, 그게 문제일 수도.’

현우는 별 소득 없이 연구노트를 덮고는 한숨을 쉬었다.

‘어디선가 틀림없이 잘못된 부분이 있을 거야. 힘들고 귀찮다고 대충 넘긴 데서 분명 무언가가 있었겠지만, 이제는 모를 일이 되었어.’

현우는 배지의 내용물을 고체 폐시약통에 털어 버렸다. 시약통 바닥에 죽처럼 얹힌 배지 내용물이 일견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이번에도 무의미한 쓰레기만 만들어 버렸다.’

현우는 한 팔로는 작업대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이마를 짚은 다음 눈을 감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 단순작업들은 질릴 정도로 반복되고 끔찍할 정도로 예민하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오차가 없을 수 없을 텐데, 그런 사소한 실수 하나가 마지막에 가서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 버리는 것이다.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힘들어도 눌러 담고 더 집중해서 실험을 했어야 하는데.. 다들 겪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지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현우는 우울한 표정으로 중금속 나노입자가 담긴 녹색의 시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류수에 다른 농도로 희석한 다음 예쁜꼬마선충이 기어 다니는 배지에 소량을 붓고 뚜껑을 닫고서는 뚜껑에 매직으로 ‘add : 09-19 15:24’라고 적었다.

“선배님, 버퍼 다 만들었어요.”

후배인 명욱이가 현우의 등 뒤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안경을 쓴 유약해 보이는 인상의 석사 일 년차였다. 현우는 시큰둥하게 돌아보았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명욱이와는 구태여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응.”

현우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앞장서서 바로 앞에 있는 작업대로 걸어갔다.

“이거니?”

현우는 작업대에 놓인 5 리터짜리 유리병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네.”

현우는 유리병의 눈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부피는 지시한 대로 제대로 맞춰져 있었다. 현우는 유리병을 든 채로 몸을 돌려 원래 자신이 작업하던 작업대로 걸어갔다.

“엘라이자하는 법 알려줄 테니까 와 볼래.”

현우는 작업대 앞에서 시종일관 시큰둥한 표정으로 찬장에서 이것저것을 꺼냈다.

“일단 네가 만든 버퍼는 스탁이라서 증류수로 사용 가능한 농도까지 희석할 거야.

현우는 팔콘튜브를 꺼내고 매직으로 유리병에 ‘acetate buffer stock’이라고 쓴 다음 튜브로 대충 내용물을 부었다. 그러다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붓는 것을 멈추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현우는 튜브를 코에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왜 아세트산 냄새가 안 나지?”

“아..”

명욱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벌린 채 실험노트를 가슴께에 안고 있을 뿐이었다.

“레시피 줘 봐.”

현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만 후배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명욱이 불안한 표정으로 노트를 건네자 현우는 노트를 건네받고 눈만 움직여 내용을 살폈다.

“어떻게 만들었어.”

현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듐 아세테이트 계량하고...”

“그리고.”

명욱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아세트산 안 넣었지?”

명욱은 고개를 숙이며 대꾸하지 않았다. 현우는 실험 노트를 작업대 위에 세게 내리쳤다. 그리고 한숨을 쉬고는, 소리쳤다.

“아세트산 안 넣으면 그게 버퍼냐? 아세테이트 버퍼라고 아세테이트만 들어가는 게 아니야. 짝산 짝염기가 다 있어야지 버퍼잖아. 안 그러냐?”

명욱은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현우는 시선은 그대로 정면에 고정한 채 실험노트를 집어 다시 명욱에게 주며 말했다.

“너 시험기간이라 힘든 건 아는데, 그래도 꼼꼼하게 실험해야 할 거 아냐. 이거 가지고 실험하면 대체 뭐가 나올 것 같아? 쓰레기 밖에 더 만들어? 매뉴얼 숙지하고 다시 만들어.”

“네.”

명욱은 시무룩한 얼굴로 실험노트를 건네받고 터벅터벅 시약장으로 걸어갔다. 현우는 다시금 한숨을 쉬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돌아섰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강민 선배가 현우를 보며 ‘너도 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현우는 그 시선을 애써 피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단순작업에서도 보람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면 좋을 텐데. 멀리 볼 필요도 없이 당장 매뉴얼대로만 작업하면 결과는 알아서 나오는 것일 테니까.’

현우는 자신이 새로 담당하게 된 대장균 배지가 담긴 인큐베이터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배양하는 일도 고통스럽지 않을 거고.’

 

2.

하늘에는 달이 떠 있고 어둠이 내린 교정은 인적 하나 없이 고요했다. 약간 열린 실험실 문으로부터 불 꺼진 복도로 하얀 빛이 비췄다. 실험실 안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아아아아아아악~!”

검은 츄리닝 차림을 한 현우였다. 문이 활짝 열린 인큐베이터 앞의 작업대에 앉아 두 손으로 배지를 감싸 쥔 채로 잔뜩 움츠린 모습이었다.

“미친 대체 뭐가 섞인 거야.”

현우는 배지를 그대로 작업대 위에 떨어뜨렸다. 그러고 한숨을 쉬고서 머리를 감싸 쥔 채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건 또 왜 이러냐. 그렇게 신경을 썼는데 색깔이 왜 변한 거야 대체. ”

현우의 찡그린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걱정 때문에 눈가에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얘는 나한테 왜 이래 진짜. 내가 밥도 주고 집도 주고 그러는데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현우는 머리를 감싸 쥔 채로 한 동안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느닷없이 눈을 크게 뜨고는 상체를 일으키더니 발로 작업대 안쪽을 차면서 몸부림쳤다.

“시발, 이게 왜 내 책임이야! 난 할 만큼 했어! 매뉴얼에 적힌 대로 그대로 했다고!”

현우는 다시 작업대에 엎어져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이 사태를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생각하면서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이내 현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랍을 열고 백금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고개만 돌려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배지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배지의 위쪽에 붉은 포말이 만들어져 콜로니가 변색되어 있었다. 현우는 그 보기 싫은 꼴을 보며 중얼거렸다.

“난 매뉴얼대로 그대로 따랐어. 그럼 난 된 거야.”

 

“오! 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강민 선배가 감탄사를 뱉더니 웃었다. 실험할 때만 끼는 강민 선배의 안경에 흡광 스펙트럼이 비춰지고 있었다. 현우가 강민 선배의 뒤를 지나가자 선배가 현우를 돌아보더니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건 데이터가 진짜 잘 나오네. 흡광 결과가 이렇게 칼리브레이션 대로 매끄럽게 나오는 건 처음이야.”

현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네가 잘 길렀나 보다.”

“잘 돼서 다행이네요.”

현우는 계속 어색하게 웃으면서 이렇게만 말하고는 강민 선배가 다시 컴퓨터 화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화급히 자리를 피했다.

“얘 이름이라도 좀 지어줘야 할까봐.”

강민 선배가 실없이 싱글벙글 거리며 곁에 앉아 있는 학부연구생 수연에게 말했다.

“이름이요?”

수연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컴퓨터 화면에 두고 물었다.

“네이쳐라고 짓자. 이쳐라고 부르는 거야.”

“아...”

그 말에 별 가치를 느끼지 못한 수연은 그렇게만 반응한 채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두고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교수는 삐딱하게 앉아 미간을 찌푸린 채 입에 손을 얹고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그 도수 높고 큼지막한 안경에 파워포인트 화면이 비춰졌다.

“이 데이터가 맞는 거야? 실험했더니 이렇게 나왔어?”

강민 선배는 천 스크린에 띄워진 PPT 화면 앞에 서 있었다. 질문을 받고는 약간의 침묵 끝에 간결하게 대답했다.

“네.”

교수는 팔짱을 끼며 한숨을 쉬었다.

“봤을 때는 좋아 보이지만... 너무 좋아 보인다는 말이야.”

교수의 눈이 강민 선배를 향했다.

“실험 조건 제대로 잡고 실험한 거지?”

강민 선배의 낯빛이 안 좋아졌다.

“네.”

교수는 발을 잠시 까딱거리다가 말을 덧붙였다.

“데이터가 너무 좋을 때는.. 의심해 봐야 해. 네가 딱히 조작을 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확증편향이라고 있지? 그 얘기 하는 거야.”

강민 선배는 이미 잔뜩 기가 죽어 있었다.

“네.”

“재현실험을 해 봤어야지. 그래도 결과가 비슷하게 나오면 평균 구하고 표준편차 구해서, 오차가 얼마나 나오는지도 보고.”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전에 똑같은 균주로 실험했을 때는 이렇게 안 나왔던 것 같은데. 같은 은행에서 같은 균주 사서 똑같은 조건으로 배양했는데 이 정도로 결과가 심하게 차이가 나면 그 점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봐야지. 그렇게 대충 실험할 거야?”

“아닙니다.”

강민 선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즉각 대답했다. 교수는 그 이상 별 말없이 실험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강민 선배가 현우를 넌지시 바라보며 물었다. 살짝 따지는 말투였다.

“돌연변이나 그런 건 아니겠지? 제대로 배양한 거 맞지?”

현우는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매뉴얼 그대로 따라서 했습니다.”

 

3.

어두운 밤에 현우는 홀로 츄리닝 차림으로 실험실에서 인큐베이터를 열었다.

‘문득 내가 첫 랩미팅에 참여했을 때 교수님이 해 주신 말이 생각났다. 실험의 실패는 새로운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현우는 인큐베이터에서 배지 하나를 꺼내고 인큐베이터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백금선을 분젠버너에 달구었다.

‘그때 제거한 붉은색 물질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배지에서 배양해 보았다. 혹시 모를 일이지 않은가. 플레밍이나 노다 나오노부처럼 나에게도 우연히 기적 같은 행운이 찾아올지.’

현우는 소독한 백금선으로 배지의 붉은색 물질을 조심스레 걷어내기 시작했다.

‘붉은색 물질 자체가 균이었거나, 그 물질과 균이 함께 배지에 이식되었거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이 새로운 종류의 균은 배지 위에서 꾸준하게 성장해 콜로니 위에 지속적으로 정체불명의 붉은색 포말 덩어리를 번성시켰다.’

현우는 붉은색 물질을 모조리 걷어내 배지를 하얗게 만들고는 다시 인큐베이터를 열어 또 다른 하얀색 배지를 꺼냈다. 새로 꺼낸 배지의 뚜껑에는 강민 선배의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었다. 현우는 두 배지의 뚜껑을 바꿔친 다음 연구노트에 무언가를 끼적였다. 그러면서 무심코 자각 없이 중얼거렸다.

“난 그냥 매뉴얼대로 했을 뿐이야. 실수는 전혀 없었어. 그 이상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거야. 그걸로 만족해야 해.”

현우는 인큐베이터를 열고 새롭게 작업한 배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것을 세 번 반복하자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 현우가 마지막으로 인큐베이터 문을 닫았을 때 갑자기 현우의 등 뒤에서 연구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깜짝 놀라 겁먹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강민 선배와 수연이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수연이 처음으로 현우를 발견하고 목례했다. 이어서 강민 선배가 현우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안녕하세요.”

현우가 인사하자 강민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현우에게는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수연에게 지시했다.

“바로 시작하자. 늘 하던 대로 준비해 둬.”

수연과 강민 선배는 문 옆 옷걸이에 걸린 하얀 실험복을 몸에 걸쳤다. 현우는 몸을 낮춘 채 슬그머니 문 쪽으로 향했다. 강민 선배를 스쳐 지나가는데 옷을 입은 선배가 현우를 돌아보고는 실험복의 단추를 잠그면서 물었다.

“이제 가?”

현우는 연구실 문을 열고 복도로 몸을 빼려다가 강민 선배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네, 이제 자러 가려고요.”

선배는 졸린 눈으로 잘 잠기지 않는 단추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잘 가.”

강민 선배는 대수롭지 않게 다시 단추 채우는 데 집중했다.

 

대학 교정은 한 낮이었다. 쉬는 시간이었기에 대학생들이 여기저기로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현우는 연구동 복도를 걸었다. 평상복 차림에 옆구리에는 두꺼운 파일철을 끼고 있는 모습이었다. 현우가 연구실 문을 여는데, 연구실 내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루루루루루 까꿍!”

실험복을 입은 세 사람이 연구실 복판에 서서 무언가를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한 명은 명욱이었고, 나머지 둘은 연구실의 마지막 식구인 지혜와 민식이었다. 지혜와 민식은 서로 사귀는 사이였다. 연구실 내에서는 교수만 모르는 사실이었다. 현우는 문을 열고 연구실 안으로 들어오다가 연구실 내의 기이한 광경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강민 선배가 얼굴을 두 손으로 덮었다가 펼치면서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며 ‘까꿍’!이라고 외쳤다. 현우는 강민 선배 앞에 놓인 네 개의 배지를 볼 수 있었다. 하나같이 붉게 변성된 배지였다. 선배 곁에는 수연이가 앉아 있었다. 수연이는 백금이로 새 고체배지에 붉은색 포말을 1분할법으로 획선도말하고는 뚜껑을 덮어 강민 선배의 앞에 두었다. 강민 선배는 배지들의 양 측면을 두 손의 검지로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아이구 좋아?”

그러고는 와르르 웃더니 사람들을 돌아보며 웃음기 있는 표정을 지었다. 수연은 피로한 표정이지만 역시 웃음기 있는 얼굴로 강민 선배와 함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이거 봤어? 지금 새 집에 들어간 애가 웃었어.”

강민 선배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배지들에게 까꿍을 하기 시작했다. 수연도 다시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배지를 쳐다보았다. 현우는 나머지 사람들이 서 있는 곳에 와서 명욱의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명욱이 현우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현우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먼저 나서며 말했다.

“선배, 이쪽으로.”

커플은 그 자리에 남았고, 명욱만이 현우를 데리고 앞서서 연구실 문을 나섰다. 명욱은 문을 닫고 연구실 문을 불안한 눈으로 본 다음 잠시 복도바닥을 바라보다가 현우에게 말했다.

“오늘 출근했는데 둘이 저러고 있었어요. 저러는 거 말고도 계속 저 빨간 배지를 가지고 이것저것을 하더라고요.”

현우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것저것?”

“계속해서 분주해서 배지 숫자만 늘리는 것도 있는데, 무슨 배지를 아기처럼 다루더라고요. 제가 처음 출근했을 때는 실험실에 불도 안 켜고 배지를 애처럼 품에 안고는 우쭈쭈거리고 둥개둥개도 하고 그러고 있더라니 까요.”

현우는 입을 벌린 채로 명욱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명욱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후로 계속 인큐베이터를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배지를 꺼내서는 업기도 하고 안기도 하고, 자장가도 불러주고 뭐 하냐고 말을 걸어도 얘 예쁘지 않느냐는 말이나 하고. 그냥 그러고 있어요. 이거 교수님에게 알려야 하는 거 아닐까요?”

현우는 잠시 고심하더니 명욱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고 말했다.

“아냐, 일단은 두고 보자. 교수님 바쁘신데, 괜히 시끄럽게 만들면 오히려 저 두 사람만 곤란해 질 수 있을 것 같아.”

현우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강민 선배는 예의 붉은 균주가 들어 있는 인큐베이터를 두드리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곁에서는 수연이 역시 문에 난 유리를 통해 인큐베이터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빠 여기 있다.”

지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방금 들어온 현우를 돌아보았다.

 

4.

현우는 자리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네, 교수님. 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현우는 의자 깊숙이 앉으며 손으로 머리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턱을 손으로 쥔 채 약간의 고민을 했다. 잠시 뒤 현우가 턱에서 손을 내리며 말했다.

“명욱아.”

마이크로피펫을 다루며 엘라이자를 하던 명욱이 현우의 목소리에 현우를 돌아보았다. 현우는 손짓으로 명욱을 불렀다. 명욱이 장갑을 벗고 현우에게로 다가왔다. 현우는 의자를 돌리고는 명욱을 올려다보면서 용건을 말했다.

“나 갑자기 출장이 잡혔다. 저번에 배지 다루는 거 알려줬었지? 잘 적어놨지?”

명욱은 노골적으로 껄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오늘 밤에 배지 관리를 해야 하나요?”

강민 선배가 인큐베이터 문을 열면서 안에다 대고 ‘까꿍!’을 외쳤다. 강민 선배가 자꾸만 인큐베이터 문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자 현우가 강민 선배를 넘겨다보며 소리쳤다.

“형! 자꾸 그러시면 배지 상해요!”

현우는 다시 명욱을 바라보았다. 명욱은 불안한 눈으로 강민 선배를 넘겨다보며 말했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제 생각에는 무슨 시약 부작용 같은 거 아닐까요?”
현우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자세를 잡았다.

“사용하는 시약이라고 해봤자 다 거기서 거긴데 무슨 부작용. 그냥 재현실험이 안 돼서 스트레스 받은 걸 거야. 졸업논문 시즌 다가오면 저러는 사람들이 많대.”

명욱은 그 자리에서 대꾸를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현우는 명욱을 돌아보며 화난 얼굴로 꾸짖듯이 말했다.

“너도 데이터 제대로 못 뽑아서 시간에 쫓기기 전에 남 걱정 말고 네 걱정부터 해. 남의 실험 도와서 2, 3저자라도 들어가야 논문수도 늘어나고 졸업해서 뭔 얘기를 할 게 생기지. 알겠어?”

명욱은 시무룩하게 바닥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현우가 마우스를 몇 차례 클릭하자 곁에 있는 프린터기가 종이를 뱉어냈다. 현우가 출력된 종이를 집어 명욱에게 건네며 말했다.

“여기 매뉴얼 다시 줄게. 인큐베이터 안에 IV라고 적힌 배지는 녹여서 흡광 찍어야 해. 흡광기 한 시간 동안 미리 예열하는 거 잊지 말고.”

명욱이 종이를 두 손으로 받으며 물었다.

“저 배지들.. 오염된 거 같은데 흡광 찍나요?”

현우는 컴퓨터 화면을 주시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책임자인 강민 형이 별 말 없으니까.. 우리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해야지. 괜히 쓸데없는 거 생각하지 말고 머리 비우고 작업해. 그래야 편해.”

 

다음 날 현우는 학생들이 바글거리는 한 낮에 연구동으로 들어왔다. 연구동은 인적이 드물고 어둑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들고 있는 서류철로 부채질을 해 땀을 식혔다.

“시발. 외부 전문가 서명은 대충해도 되는데 쓸데없는데 시간낭비하게 하고 있어.”

이내 엘리베이터에서 벨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현우는 승강기를 타고 연구실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 현우가 연구실 문을 열고 막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선배님!”

연구실 문 오른쪽에 나열된 책상 끝에 앉아 있던 민식이 현우를 조심스레 부르며 허리를 숙인 채 다가왔다. 민식의 뒤쪽, 현우에게서 더 먼 쪽에서는 지혜가 역시 책상에 앉은 채로 불안한 얼굴로 현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민식이 실험실 안쪽을 보며 현우에게 소곤거렸다.

“저기 증류수기 있는 쪽에... 강민 선배랑 명욱이 형이 하는 일 좀 보세요..”

현우는 그 말을 듣고 실험실 안쪽을 보았다. 실험실 구석, 어두운 곳에 실험복을 입은 사람 둘이 모여 무언가 속닥거리고 있었다. 현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천천히 그 쪽으로 다가갔다. 그 두 사람은 실험대에서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집중해서 하고 있었다.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두 사람은 명욱과 강민 선배였다. 명욱은 실험대를 보았다 성경을 보았다 하면서 실험대에 놓여 있는 작은 배지들을 내려다보며 성경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강민 선배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배지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면서 그 뚜껑을 쓰다듬고 있는 것이었다. 현우가 그들 뒤로 걱정스런 얼굴을 한 채로 다가섰다. 현우는 작업대 위에 놓인 수많은 배지들을 볼 수 있었다. 하나같이 붉은색의 포말이 콜로니 위에 형성되어 있는 것이었다.

굳어 있는 현우의 뒤로 민식이 슬그머니 다가오며 말했다.

“아침에 오니까 명욱 선배도 저렇게...”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설마 아니겠지.’

현우는 컴퓨터를 보며 작업에 집중하려 했다. 무언가를 잊어버리려 노력하는 사람처럼 얼굴이 화난 것처럼 굳어 있었다. 연구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네이쳐를 보러 왔어요.”

수연이었다. 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똑같은 표정으로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보았다 컴퓨터 화면을 보았다 하며 타자치는 작업에 열중했다. 수연은 잰걸음으로 실험실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 인큐베이터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강민 선배의 ‘우쭈쭈 우쭈쭈’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잠시간의 침묵 뒤 이번에는 갑자기 서럽게 흐느끼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이 소리를 듣고는 키보드 위에 손을 멈춘 채 시선을 책상 위의 서류에서 서서히 정면으로 들었다. 컴퓨터 화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정면을 멍하게 보는 것이었다.

창가에 서 있는 수연은 방금 분주한 배지들을 햇빛이 닿지 못하도록 와이퍼올로 감싸고는 아기처럼 품에 깊숙이 안고서 훌쩍이고 있었다. 강민 선배는 그 뒤에서 수연의 어깨에 손을 얹고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명욱도 그 곁에 앉아서 역시 침울한 표정으로 획선도말을 하고 있었다. 수연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다들 저렇게 볕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놀러 다니는데...”

수연은 자기 품의 배지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이쳐는 세균이라는 이유로 어둡고 습한 데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건가요?”

그러고는 강민 선배의 품에 얼굴을 대고 오열했다. 그들을 돌아보던 현우는 아무것도 못 본 척 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몸을 컴퓨터 쪽으로 돌리고 작업에 다시 집중했다. 그 위 칸막이 너머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한 민식이 입을 벌린 채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민식이 현우에게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같이 실험하던 사람들이 다 이상해졌어요. 어디서 뭐가 새는 게 아닐까요? 가스라던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현우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계속 작업하면서 짜증스럽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같은 실험실에 있는 우리는 괜찮잖아. 생각 중이니까 기다려. 어차피 심리적인 문제일 테지만.”

현우는 작업을 멈추고 민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실험실에서 사고라도 난 거라고 잘못 알려지면 교수님한테 깨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안전처에서 검열 나오는 것까지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야. 시끄러워진다고. 너 그거 책임질 수 있어?”

민식은 대꾸하지 않고 세 명을 다시 쳐다보았다. 현우는 다시 컴퓨터에 시선을 돌리고 작업을 재개했다.

“책임 못질 거면 입단속 해.”

 

5.

교정은 다시 밤이 되었다. 현우가 츄리닝 차림으로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어두운 실험실 안쪽에서 뭐가 둔탁하게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화급히 전등을 켰다. 강민 선배와 명욱, 수연이 바닥에 놓인 인큐베이터에 손을 대고 현우를 놀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현우가 의문스럽다는 얼굴을 하고는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뭐 하세요?”

현우는 세 명이 손을 짚고 있는 인큐베이터를 살짝 기울인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세 명을 일별했다. 현우는 손가락으로 인큐베이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뭐고요.”

강민 선배가 몸을 곧게 세우고는 자못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인큐베이터가 새로 왔기에 옮기고 있었어.”

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인큐베이터요? 새로 입찰 올리라는 말 못 들었는데? 우리 필요도 없잖아요.”

강민 선배는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선배를 노려보았다.

“설마 연구비 유용한 건 아니겠죠?”

강민 선배는 이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충 사태를 파악한 현우는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더니, 허리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인 채 짜증스레 말했다.

“다들 왜 이래요 대체! 갑자기 뭐가 문제냐고요!”

현우는 걱정스런 얼굴로 인큐베이터를 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오른손을 들어 허공을 휘휘 저었다.

“난 이거 못 본 걸로 해줘요. 난 아무것도 못 봤어요.”

 

현우는 광학현미경을 보며 예쁜꼬마선충의 개체수를 카운트하는 작업을 했다. 현우의 뒤쪽에서는 실험복을 입은 강민 선배가 대량의 배지들을 새 인큐베이터에 옮겨 넣고 있었다. 작업하던 중에 몇 차례나 슬그머니 현우를 돌아보고는 다시 일에 열중하는 것을 반복했는데, 현우의 정면에는 포스트잇을 붙일 수 있는 아크릴판이 있어서 현우는 강민 선배의 그런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다.

현우가 액체배지에다가 마이크로 피펫으로 배양액을 계량할 때에는 그 뒤에 명욱이 전자저울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명욱도 역시 몇 차례나 조심히 현우를 돌아보고는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현우는 제 일을 끝내고 아무 말 없이 실험실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새로 만든 고체 배지에 붉은색을 도말하던 나머지 세 명은 현우가 나가자마자 한 데 모여 새 인큐베이터를 조심스레 실험장 아래에 숨겼다. 세 명은 허리를 숙여 실험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셋 다 웃는 얼굴이었다. 수연은 배지에게 손키스를 날렸고, 명욱은 손을 흔들었다. 수연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고 실험장 문을 닫았다.

“잘 자. 이따가 또 올게.”

 

교수가 유전학 교과서를 옆구리에 낀 채로 실험실로 들이닥쳤다.

“일들은 잘 되가니.”

지혜와 민식은 작업하던 컴퓨터 앞에서 고개를 들었고, 현우는 분젠 버너 앞에서 몸을 돌리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곁에 있는 책상에 책과 인쇄물을 두고는 말했다.

“내가 일요일에 출장 가야 해서 랩미팅을 못 해. PPT 없이 데이터만 봐도 되니까 지금 실험 업데이트 된 것 좀 보자.”

현우는 컴퓨터 앞으로 이동했다.

 

“나머지는 그만하면 됐고. 너는 뭐했냐.”

강민 선배는 컴퓨터 앞에 앉지 않고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는 교수 앞에 서 있었다.

“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한 거 아무거나 띄워 봐. 여태 보여줄 게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 돼? 너는?”

교수는 그 옆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명욱에게로 걸어가 턱짓으로 모니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명욱은 교수를 올려다보면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교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명욱을 노려보았다. 명욱은 그런 교수의 시선을 피하며 더듬더듬 변명했다.

“저도.. 사정이 있어서.”

“하나도 없다고?”

명욱이 손을 조물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배양을 하다 보니까.”

교수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삐딱하게 숙였다.

“바빠서 잠깐 신경 안 썼다고 금방 이 꼴이 나면 어떻게 하냐.”

그러더니 고개를 들고는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실험실 인원들은 고개를 숙인 채 일렬로 작업대 앞에 정렬했다. 그 앞을 교수가 서성거리면서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꾸짖었다.

“너희 이렇게 풀어지면 제대로 연구자 구실 못해.”

교수는 강민 선배 앞에 멈추고 선배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네가 하는 건 독성연구라서 몇 달 잡고 실시간으로 실험해야 하는 거잖아.”

강민 선배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말했다.

“균주가.. 배양이... 오염이..”

교수가 그 말을 다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무슨 소리야. 똑바로 말해.”

“표준균주를 새로 주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교수가 아무 말 없이 터벅터벅 인큐베이터로 걸어가 문을 열어보았다. 교수는 내부에 있는 배지들을 꺼내 뚜껑을 살피더니 강민 선배를 돌아보며 말했다.

“있잖아? 분명 네가 저번에 그 얘기해서 또 새로 주문했었던 거 같은데.”

“그게.. 주문을 했는데, 그게 현우가 배양을 잘못해서.. 또 표준균주까지 오염되어서.”

현우는 거센 목소리로 항변했다.

“새로 온 건 제대로 배양하고 있어요! 계속 배양하는 거 보셨잖아요!”

교수는 강민 선배를 한 동안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한 채로 입을 열었다.

“너희가 실험하러 왔지 균 기르러 왔냐! 재현실험 얘기 나온 후로 아무 결과도 없다는 게 난 납득할 수가 없다. 이따 저녁 먹고 올 테니까 내가 보는 앞에서 실험해! 얼마나 시간이 걸리던 그 데이터는 확인을 하고 가야겠어. 준비해 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지혜가 허둥대며 교수가 놓고 가버린 책과 프린트물을 집어 들고 교수를 따라 나갔다.

 

연구실의 시계가 여섯시 반을 가리켰다. 현우는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건너편의 커플에게 말했다.

“너네는 안 가?”

민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현우에게 말했다.

“교수님 오시는 데 남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흰 일단 남아서 눈치 보고 갈게요.”

현우는 가방을 매고 연구실을 나서며 대답했다.

“맘대로 해. 난 교수님한테 약속 있다고 말해 놔서.”

현우는 급하게 실험실을 나섰다. 어두워진 연구동 밖으로 나와 잰걸음으로 걸으면서 잠시 하늘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무심하게 떠 있었다. 현우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 균 때문은 아니겠지. 아닐 거야. 논리적으로 생각하자, 논리적으로.”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현우는 출근시간에 실험실 문 앞에 다가와 섰다. 그리고 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크게 쉬고는 문손잡이를 세게 돌려 문을 열었다. 그러나 실험실 안으로 들어서려던 현우는 그 안의 광경을 보자 굳은 표정으로 멈추어 섰다.

강민 선배가 몰래 산 최신식 인큐베이터가 실험실 가운데의 작업대 위에 다 보이게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인큐베이터는 분홍색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색종이로 꾸민 판넬로 인큐베이터 문 위에 ‘네이쳐의 집’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인형 뽑기에서 구해온 것으로 보이는 인형들이 인큐베이터 주위에 잔뜩 늘어서 있었다.

강민 선배와, 명욱, 그리고 지혜와 민식이 문 근처에 있는 작업대 앞에 나란히 서서 배지에 붉은색의 무언가를 열심히 획선도말하고 있었다. 현우는 문 앞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민식에게 물었다.

“얘들아. 이거 무슨 일이야?”

민식과 지혜가 주인공을 돌아보며 웃었다. 지혜가 말했다.

“이쳐가 좀 더 편하고 걱정 없이 자랄 수 있도록 집을 좀 꾸며줬어요. 예쁘죠?”

민식도 말을 덧붙였다.

“진짜 잘 자라고 있어요. 이거 보세요.”

민식이 붉은색이 획선도말된 배지를 현우에게 들어 보였다. 내열유리제의 값비싼 배지였다.

 

현우가 겉옷도 벗지 않고 컴퓨터 앞에서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며 넉 나간 듯이 앉아 있는데 문이 열렸다. 교수가 모빌을 들고 나타났다. 그러면서 즐겁게 외치는 것이었다.

“이쳐야~! 나 왔다!”

그 뒤를 작은 상자를 든 수연이 따라 들어왔다.

수연이 모빌을 인큐베이터 위에 달았다. 강민 선배가 모빌을 손으로 가볍게 쳐서 움직이게 했다. 모빌이 빛을 반사하며 짤랑거렸다. 모두들 박수를 쳤다. 민식과 서로 손을 잡은 채 지혜가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이쳐한테 모빌을 좀 보여줘도 될까요?”

교수가 곤란하다는 웃음을 지으며 인큐베이터를 보면서 말했다.

“너무 자주 여닫으면 이쳐에게 좋지 않을 텐데. 그래도 새 모빌 정도는 보여주는 게 좋겠지.”

지혜와 수연은 두 손을 들고 가볍게 환호했다. 수연이 인큐베이터를 열었다. 그 안에는 가격이 상당한 고 내열성 유리제 페트리 접시가 가득 차 있었다. 교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장갑을 낀 채로 그 배지를 한 손에 하나씩 꺼내서 껴안기도 하고 위로 들어 모빌을 보여주기도 했다. 현우는 그들 뒤에서 두려운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도망치듯이 실험실을 나갔다.

 

6.

‘그것이 진짜 시작이었다. 그 후로 실험실은 오로지 ‘네이쳐’의 배양만을 위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연구실 사람들은 실험복을 입은 채로 즐겁게 웃고 떠들며 하루 종일 도말을 했다. 수많은 배지가 그들 사이의 작업대 위에 쌓여갔다.

현우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하고 있을 때였다. 연구실을 찾은 교수가 여느 때처럼 ‘이쳐야~!’라고 외치면서 실험실 안쪽으로 걸어갔다.

“교수님!”

현우가 교수를 불렀다.

“이 데이터 좀 봐주셨으면.”

하지만, 교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그리고 교수는 다시 갈 길을 갔다. 시무룩한 표정이 된 현우는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우리 이쳐! 쑥쑥 크네!”

 

‘교수님은 연구비를 무리하게 돌려 값비싼 페트리 접시와 인큐베이터, 한천 등을 대량으로 구입했다.’

교수의 사무실 안. 교수가 창문을 등지고 컴퓨터 책상에 앉아 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우는 그 앞에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서서는 교수에게 말했다.

“교수님, 이번 학회 사전등록 일정이 나왔는데요, 등록 때문에 그러는데 연구비 카드를 좀 받아갈 수 있을까요.”

교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다시 컴퓨터를 보며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다 같이 학회를 못 갈 것 같다.”

현우가 다급히 말했다.

“저, 저번에 이번 학회에서 구두발표하면 수상확률이 높을 거라고 언질 주셨는데...”

교수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대꾸했다.

“연구비 집행에 문제가 좀 생겨서 말이야. 다음에 가자.”

잠시 간의 침묵 끝에 체념한 현우가 말했다.

“네..”

현우는 인사를 하고는 침울한 얼굴을 한 채 사무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실험대 위는 인큐베이터들이 점령했다. 그리고 이 인큐베이터들 안에는 그 붉은 포말을 생성하는 정체불명의 균이 가득 채워져 있다.’

누구든 연구실 안에 들어서면 작업대 위에 가득 찬 인큐베이터들을 볼 수 있었다. 정상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연구실 내부는 장식품 때문에 전체적으로 분홍 색조를 띄었다. 아기 방과 같이 다양한 모빌, 인형, 장난감 등이 흩어져 있었다. 현우는 구석에 있는 작업대에서 쓸쓸히 곰팡이가 핀 배지에 이산화티탄 나노입자를 처리했다.

현우 외의 연구실 사람들은 도말작업 중에 잠시 쉴 목적으로 실험실 가운데, 인큐베이터가 늘어선 작업대 앞에 의자를 둥글게 가져다 놓고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지혜는 작은 인큐베이터가 담긴 요람을 한 손으로 가볍게 흔들었다. 수연이 상체를 숙인 채 손짓까지 섞어 가며 기분 좋은 얼굴로 열성적으로 이야기했다.

“엄마가 그러는데, 제가 어릴 때 엄청 많이 울었대요.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잠도 잘 잤는데 계속 울어서, 하루는 엄마가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안 하고 옆에서 저랑 같이 있었는데 글쎄...!”

사람들이 그 얘기를 듣고 왁자지껄 웃었다.

 

현우는 잠시 하던 실험을 멈추고 우울한 얼굴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왜 나에게는 저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붉은색 포말보다는 그 기저에 있는 균이 일종의 정신적 효과를 나타낸다고 의심해볼 수 있을 뿐이었다.’

현우 외의 모든 사람들이 다시 작업대에 늘어서서 배지에 백금이로 붉은색을 칠했다.

‘나 외에는 누구도 배양 이외에 제대로 된 실험을 하지 않았다. 수상쩍은 대장균은 거듭된 배양으로 무의미하게 늘어만 갔다. 그러나 모두들 그런 끔찍스럽게 의미 없는 단순작업만으로도 이상하게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어!”

현우는 보라색과 연한 노란색이 어지럽게 흩어진 엘라이자 플레이트를 보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의미 있는 데이터가! 나왔다!’

현우는 허리를 펴고 계속해서 플레이트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놀라움이 웃음으로 바뀌었다.

‘됐어! 드디어! MTT 결과가 예측대로 나왔어!’

현우는 서둘러 실험대 주변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빨리! 반복실험해서 피규어 데이터 얻고, 서스 찍어서 단백질 분석해야지.’

현우는 작업대 서랍들을 차례로 열고 안을 뒤적거리다가 고개를 돌리고 명욱이에게 물었다.

“명욱아! 플레이트 다 썼어?”

“네! 예전에 엘라이자 하면서 다 썼어요!”

“그걸 여태 주문 안 하...”

현우는 여기까지 말하다 멈추더니 장갑을 벗고는 빠르게 연구실을 나섰다. 그러나 즉시 다시 돌아와 자신이 꺼내 놓은 배지들을 인큐베이터 안에 넣었다. 그 와중에 이렇게 작게 소곤거리는 것이었다.

“상한다, 상한다.”

현우는 다시 연구실 문을 열고 나갔다. 연구실 문 가까이에서 강민 선배, 지혜와 민식, 수연이 나란히 서서 내열유리제의 새 배지에 붉은색을 도말하고 있었다. 수연은 기분이 좋은지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현우가 포장된 새 플레이트를 손에 들고 급하게 연구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서둔 걸음으로 자기 샘플이 있는 인큐베이터로 가다가 싱크대 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현우는 외마디 소리를 내며 싱크대에 손을 짚고 그 안을 보았다. 싱크대 안에는 현우가 기르던 배지들이 꺼내져서 쌓여 있었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내 PDA 배지들!”

무리들 사이에 섞여 도말 중이던 명욱이 현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거 이쳐가 쓸 인큐베이터가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뺐어요.”

명욱은 그렇게만 말하고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현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명욱을 노려보았지만 명욱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작업에만 열중하며 현우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현우는 인큐베이터가 늘어선 작업대를 쳐다보다가 방금 전 자신이 PDA 배지를 넣어 놓았던 인큐베이터가 그 사이로 옮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7.

현우는 모든 웰이 노란색 액체로만 가득 찬 엘라이자 플레이트가 놓여 있는 작업대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그 플레이트 옆에는 싱크대에서 꺼낸 곰팡이 배지들이 꺼내져 있었는데, 배지 밑에 와이퍼올이 깔려 있고 그 와이퍼올에는 많은 양의 물이 스며들어 있었다. 증류수기에서 버려진 오염된 물 때문에 그 짧은 시간 동안 배지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상해버린 것이었다. 절망한 현우의 뒤편에서 사람들이 즐겁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우는 엘라이자 플레이트를 오른손으로 거세게 치며 작업대 위에 엎어졌다. 플레이트가 벽에 튕겨져 나와 작업대 위에 내용물을 쏟고는 아무렇게나 내팽겨 쳐졌다.

 

‘모두들 즐겁게 균을 키운다. 그러나 그들이 생산하는 것은 진정한 쓰레기와 무의미함이다. 그것은 역병처럼 번져 내가 만든 의미 있는 결과까지 집어삼켰다.’

현우는 어두운 실험실 안에서 손전등을 들고 인큐베이터를 열었다. 그리고 불안한 표정으로 그 안에 있는 배지들을 거칠게 꺼내 작업대 위에 쌓아 두었다.

‘이젠 알겠다. 이제까지 내가 하던,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작업들의 의미를. 그것들은 쓸모 있는 데이터의 생산에 약간이라도 진전을 일으키기 위한 고행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시적인 시선으로 눈앞의 작업에만 몰두해서는 어떠한 의미도 도출해낼 수 없었다. 그저 작업의 맥락 없는 성과물들만 늘어날 뿐.’

현우가 마지막 배지를 작업대 위에 놓았다. 모든 인큐베이터가 열려 있었다.

‘늦었지만 내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연구실이 망하는 것을 막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놓기 위해서는 이제 이 방법밖에는 없다.’

배지의 양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배지가 탑처럼 쌓여 있어 젠가를 방불케 했다.

‘무슨 조화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현재까지 관찰한 결과에 따르면 이 붉은 균이 원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정말로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의 정신을 조종해서, 스스로의 유전자를 번성시키는 것을 생존전략으로 하는 기생생물인 것이다.’

현우는 네모난 스테인리스 스틸 용기를 창가에 있는 작업대 위에 놓고 창문을 죄다 열었다. 그리고 용기 안에 황산과 증류수를 차례로 쏟아 붓고 뚜껑을 연 배지들을 그 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집어넣고는 위를 유리판으로 막아 놓았다. 창가 쪽에는 약간의 틈을 내 놓아 가스가 빠지도록 했다. 잠긴 배지들에서 피와 같은 것이 서며 나오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 꾸준히 배양해온 배지들의 양은 보통이 아니었다. 쉽게 처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현우의 손이 가스밸브를 돌렸다. 분젠버너에 불이 켜졌다. 현우는 뚜껑이 열린 붉은 배지를 집게로 잡고 분젠버너 위에 거꾸로 둔 채 콜로니를 가열했다. ‘찌직’거리는 기묘한 소리가 났다. 현우의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반응이 이상하다. 역시 정상적인 이콜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언가 다른 것이 틀림없다.’

 

그때 갑자기 실험실 문이 벌컥 열렸다. 현우는 깜짝 놀라 가열하고 있던 배지를 놓치고 반사적으로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문에 교수를 제외한 연구실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현우는 경악하며 외쳤다.

“어떻게 알고!”

현우의 주변을 살피던 수연이 현우가 방금까지 가열하고 있던 연기 나는 배지를 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강민 선배가 고함쳤다.

“너 뭐하는 거야! 죽여 버리겠어!”

남자들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현우에게로 달려왔다. 현우는 잽싸게 작업대 위에 있던 새 배지를 들며 붉은 콜로니를 사람들 앞에 내보였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배지를 살짝 앞으로 기울여 배지 뚜껑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더 다가오면 이거 바닥에 던지고 밟아버릴 거야!”

남자들은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명욱이 인큐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수많은 멀쩡한 배지들이 거기 쌓여있었다.

 

현우는 실험실 안쪽 모서리에 있는 고장 난 구형 SEM에 묶였다. 두 손이 등 뒤로 돌려져 엄지손가락은 케이블 타이로, 손목은 파라필름으로 칭칭 동여매졌다. 상체도 안 쓰는 실험복과 파라필름으로 고정되었다. 머리에서는 한 줄기 피가 얼굴 측면으로 흘러 내렸고, 왼쪽 눈은 맞아서 멍이 들어버렸다.

현우의 눈앞에 실험복을 입은 강민 선배와 명욱이 현우를 노려보며 위압적으로 서 있었다. 명욱은 손에 묵직한 광학현미경을, 강민 선배는 금속제 원심분리기 로터를 들었다. 둘 뒤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교수가 뒷짐을 진 채 안경 너머로 현우를 노려보고 있었고, 수연이 교수보다 약간 뒤에 서 있었다. 분홍 리본으로 꾸며진 인큐베이터들은 현우에게서 먼 곳으로 옮겨져 있었는데, 지혜와 민식이 실험복을 입은 채로 인큐베이터들 앞을 지키고 있었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교수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파문이다.”

강민 선배가 현우의 바로 앞에 서더니 두 손으로 로터를 움켜쥐고 현우의 머리를 내려치려는 것처럼 높이 들어올렸다. 현우는 공포에 질려 묶인 몸을 풀기 위해 발버둥 치다 여의치 않자 이렇게 외쳤다.

“화이자! 화이자! 노바티스! 머크!”

그 말에 강민 선배가 내리치던 로터가 허공에서 정지했다. 현우는 눈앞까지 다가온 로터를 겁에 질린 표정으로 올려다보다 눈물을 흘렸다. 현우는 그 상태로 잠시 동안 정신을 챙기고는 급하게 소리쳤다.

“제발 다들 정신 차리세요!”

현우가 크게 뜬 눈으로 사람들을 훑어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조금만 진정하고 우리가 저 균을 왜 키워야 했는지를 생각하세요.”

“이쳐...”

강민 선배가 다시 로터를 슬그머니 들어올렸다. 현우가 다시 화급히 외쳤다.

“셀! 사이언스! 네이쳐! 셀! 사이언스! 네이쳐!”

강민 선배의 로터가 다시 멈췄다. 현우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내 말은, 저건 단순히 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실험에 쓰기 위해 키운 거잖아요. 독을 먹여서, 마이크로입자, 나노입자, 이온, 미셸, 분자, 고분자, 탄소미세구조 같은 걸 먹여서, 그래서 얼마나 죽었는지를 비교하고, 소기관과 세포질의 형태랑 생화학 특성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확인하고, 왜 죽었는지를 알아내고. 그걸 바탕으로 어떤 물질의 위험도는 얼마다, 독성은 어떻게 줄일 수 있다, 어떻게 처리해야 환경영향성이 줄어든다는 것 같은, 이런 정보를 알아내려고 하려던 거잖아요! 그걸 생각해요!”

“독..”

명욱이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현미경을 들고 현우를 내려치려고 했다. 현우는 다시 황급히 외쳤다.

“생공연! 질본! 식약처!”

“윽!”

명욱이 하려던 동작을 멈추더니 심장에 손을 짚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인큐베이터 앞에 있던 지혜와 민식이 눈을 들며 놀란 표정으로 현우를 보았다. 현우는 최대한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끌어내려 노력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다들 잊은 거예요? 좋은 데이터를 얻기 위해 잠도 못 자고 노력해왔던 일들을 전부 잊은 거냐고요! 다들 저런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세균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데이터를, 저널에 실린 자기 논문을, 이력서에 쓸 업적 한 줄을 사랑하던 거 아니었어요?”

지혜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 나는...”

그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기억해요! 셀! 사이언스! 네이쳐! 그리고 연구비! 교수님! 연구비!”

역시 아련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교수가 연구비 소리에 새삼스레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교수님! 과제연구비 말이에요! 교수님이 제일 좋아하던 거!”

교수의 눈에도 초점이 돌아왔다. 교수는 아련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래.. 절대 잊을 수 없는 거지.”

현우는 모두를 하나하나 쳐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진짜 우리가 사랑하던 것을 기억해 내요! 그것들을 얻기 위해 미생물을 길러왔다는 것도요! 단순히 미생물을 기르기 위해 기른 게 아니라고요! 지금 모두들 저 이상한 세균한테 속고 있어요! 교수님도 그러셨잖아요! 실험을 할 때는 항상 눈앞의 단순작업뿐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의미를 봐야 한다고요!”

사람들이 정상으로 돌아온 눈으로 서로서로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래.. 그랬던 것 같아.”

갑자기 교수 뒤에서 뚱한 표정으로 서 있던 수연이 걸어 나오더니 현우에게 세게 쏘아붙였다.

“그건 말도 안 돼! 대가를 바라고 생명을 기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닥쳐라 학부연구생.”

교수가 수연의 앞쪽으로 걸어 나오며 말을 끊었다.

“넌 아무 것도 모른다.”

교수는 현우를 딱딱한 눈으로 쏘아 보았다. 하지만 그 시선에 더 이상 악의는 없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어.”

교수는 실험실 한 가운데로 두 팔을 하늘로 벌린 채로 걸어가며 외쳤다. 그 시선은 허공을 본 채였다.

“현우를 풀어 줘라!!”

명욱과 강민 선배가 현우를 풀어주었다. 현우의 귀에 교수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미국에서 태뉴어 실패하고 귀국했을 때 맹세했지! 내 실험실을 가지면 일 년에 무조건 SCI 최소 세 편씩 뽑아내지 못하면 자살하겠다고! 이제야 다시 그 맹세를 지킬 수 있게 되었어! 실험을 서둘러 재개하자!”

교수는 그렇게 선언하며 형광등 불빛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마치 태양신을 숭배하는 신관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어이가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두운 교정, 어두운 연구동, 어두운 복도. 현우가 근무하는 연구실의 살짝 열린 문 안에서만 흐릿하게 점멸하는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러 사람의 미친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음침하고 어둑한 실험실 안에서 지혜와 민식은 새까만 보안경을 쓴 채로 녹색 스파크를 튀기며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둘은 이를 드러낸 채 웃었다. 강민 선배는 방독면을 쓴 채로 가열교반기 앞에서 다양한 빛깔의 인광을 발하는 용액이 부글부글 끓으며 김을 피어 올리는 대용량 비커에 수상한 시약을 들이부었다. 명욱은 배지를 토치로 지지고 있었는데, 그 위로 토치의 단속적인 빛을 반사하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배지에서 튀어 오른 붉은색의 액체가 명욱의 안경에 튀었다. 배지로부터 ‘끼이익!’하는 수상한 소리가 들러왔다. 명욱은 목에 건 십자가를 배지에 들이대며 충혈이 된 눈으로 외쳤다.

“하하! 아무리 피를 발라대도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교수는 그 사이를 웃으며 돌아다니면서 제자들을 독려했다. 교수가 양팔을 하늘로 벌리고 웃으며 외쳤다.

“하하하! 그래! 그래! 데이터가 나오고 있다! 수많은 데이터가! 하하하하!”

현우는 울고 있는 수연의 어깨를 토닥거리고는 저울에 버퍼 시약을 계량하기 시작했다.

 

‘선배의 말대로 그 균주를 가지고 놀라울 정도로 양질의 데이터를 뽑아낼 수 있었다. 균주를 송두리째 소모하는 과정에서 독성학, 영양학, 분자생물학적인 측면에서 혁신적인 결과가 도출되었고 우리는 그 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한 다음 네이쳐 바이오테크놀로지에 제출했다.’

논문을 준비하는 연구실 인원들은 연구실 내를 바쁘게 돌아다녔다. 책상 위에는 글씨나 그래프가 인쇄된 출력물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그 사이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다들 서류 뭉텅이를 들고 넘겨보거나 펜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논문은 리젝되었다. 재현성 문제가 있었고, 균주가 제대로 동정되지 못했다는 의혹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낮은 저널에 논문을 거듭 제출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 논문이 마지막에 억셉된 곳은 힌다위였다.’

강민 선배가 비명을 지르며 모니터를 연구실 바닥으로 내리쳤다. 그 모니터에는 힌다위의 로고가 떠 있었다. 그러나 떨어진 충격으로 컴퓨터 화면은 금방 꺼져버렸다.

‘상위 저널의 몇몇 리뷰어가 데이터 조작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우리는 실험을 재현해야했지만 그 균주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애초에 정상적인 대장균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다. 그 사실을 아는 건 나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 사실까지는 얘기할 수 없었다. 조작 건이 학과 내에서도 상당히 심각하게 번져 실험실 전체가 붕괴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현우는 침울한 표정에 멍한 눈을 한 채로 어두운 연구동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스쳐지나가는 교수 두 명이 현우를 돌아보더니 둘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무언가 속닥거렸다. 현우의 귀에는 그들이 말하는 내용이 들렸지만 그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이는 것 외에는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인적 없는 학교, 어두운 복도. 현우네 실험실의 문은 열려 있지만 내부의 불은 전부 꺼져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곳, 실험실 깊숙한 곳의 작업대에서는 실험복을 입은 현우가 휴대폰 플래시를 켜 놓고 열심히 시약을 옮기며 작업하고 있었다.

‘그 후로 밤에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다. 절박한 마음에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실패하면 미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그 환상의 균주를 재현해내야 한다. 모든 기억을 긁어내고, 집중력을 있는 대로 끌어 모아서 기필코 그 균주를 다시 길러내는 데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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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음... 뭔가 표현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된 것 같습니다. ㅠㅠ

생물쪽 실험실 생활은 한 적이 없어서 상상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딱 추석에 올리네요 ㅎㅎ 좋은 연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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